上) 한산도에 있는 한산정 풍경
통영 열무정의 역사는 이순신 장군과 관련이 있다. 임진란 즈음에 통영에는 좌수영이 있었다. 그리고 왜적과 치열한 전투를 치루는 근거지였고, 이곳에 이순신 장군이 상주했다. 한산섬이 바로 그 근거지이다. 한산섬에는 이순신 장군을 기리는 충무사가 있다. 이순신 장군의 영정을 모시고 있어서 참배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바로 그 옆에 한산정이라는 활터가 있는데, 그 빼어난 절경에 모두 감탄한다. 과녁은 바다 건너에 있다. 한산정이 위치한 곳에 바다로 삐죽 뻗어나간 곶의 끝에 있기 때문에 무겁과 설자리 사이로 바다가 들어와 있는 것이다. 바로 이곳에서 왜적과 싸우는 병사들을 독려하기 위해서 무과를 치렀다. 그리고 싸움이 없는 날이면 이곳에서 활을 쏘면서 전력을 정비했다. 난중일기에 보면 활쏘기를 했다는 기사가 거의 매일 나온다. 바로 그 기사의 많은 부분이 이곳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그러니 한량이라면 누구나 이곳에서 활을 쏘고 싶은 마음이 동하는 곳이다. 그러나 현재 한산정의 관리가 충무사 유적을 포함한 제승당에서 관리하기 때문에 이곳의 허락을 얻어야 한다
現) 열무정 풍경
1592년 4월 13일에 임진란이 일어나고 이순신은 전라좌수사의 직책으로, 경상우수영이 무너지자, 왜적을 맞아 진을 한산도로 옮긴 다음해인 1593년 8월에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되어 한산도를 삼도수군통제영으로 삼았다.
1594년(선조27년) 무관(武官)인 한효순(韓孝純)을 통제사의 휘하에 파견하여 수군 진영인 한산도에서 무과를 실시한 것이 통영 궁도의 효시가 된 것이다.
1603년(선조36년) 이경준(李慶濬) 6대 통제사 때, 통제영을 현 통영으로 옮겼고, 1656년 제40대 통제사로 부임한 유혁연(柳赫然)이 통영시 용남면 한정골 기슭에 처음으로 누각(樓閣)을 세우고 열무정(閱武亭)이라 하였다.
이 열무정에는 매년 춘추로 충청, 전라, 경상 삼도를 통활하여 무과 시사장(試射場)으로 삼아 왔으나 1896년(건양1년) 통제영이 폐영되고 열무정도 폐정되고 말았다.
1753년(영조29년) 제114대 구선행(具善行) 통제사가 부임하여 현 남망산 중턱에 남송정(南松亭)을 건립하여 궁도 도장으로서의 역할을 다해왔으나 세월이 지나면서 정(亭)이 퇴락하여 폐정이 될 지경에 이르런지 오래되자 본 군의 뜻있는 선비 유지들이 서로 도아 정(亭)을 중수하고 유영(柳營)의 장사, 사졸, 궁사들이 모여 날마다 습사(習射)에 열중하니 당기는 화살마다 명중케 되므로 나라의 안팎을 지키는 간성(干城)의 군사라 명성이 자자하자 협소한 남송정을 넓이고자 건물을 증축할 것을 의논하여 오던 중 본 군의 유지 송병문(宋秉文), 김영태(金永台), 김영팔(金永八), 박성오(朴性午), 박성숙(朴性叔) 등이 적지 않은 재물을 희사하여 1870년(고종7년) 가을에 준공하니 남망산 송림 사이에 사정(射亭)이 우뚝 서게 되었다.
통영항 서남 쪽으로 착량(판도)이 보이고 동쪽으로는 임란때 대첩을 이룩한 한산섬 앞바다와 제승당이 있어 정에 오르면 윤환(輪奐)의 풍경이 절경이라, 두루 바라보는 객(客)이 도움을 아끼지 않았다고 전해지고 있다.
이 고장 선비 백남호(白南昊), 김두옥(金斗玉), 송정택(宋正宅), 이부근(李富根) 등이 감동(感動)하여 정택(正宅)이 시(時)를 짓고 부근(富根)이 글을 써서 남송정 네 기둥에 주련(住聯)을 걸었다.
주련시(住聯詩)
궁개한잠월(弓開閑岑月)
시오굴포풍(矢嗚掘浦風)
해산의구부(海山依舊否)
장소일배중(長嘯一杯中)
활을 한산섬 뫼 뿌리에 달이 솟을 때 쏘니
화살이 판도 바람을 타고 소리 내어 날으고
이곳 바다와 산이 그 옛날과 같으련만
긴 휘파람과 한잔 술에 토하는구나
남송정은 통영 궁도의 도량으로 오랜 역사 속에 이어 왔으나 나라의 운명과 함께 일제의 강점기 아래 사라질 운명에 이르렀으나, 1945년 나라의 광복과 함께 전국 궁도가 다시 활기를 되찾게 되어 통영에서도 도천동 해운정(海雲亭), 한산도 한산정(閑山亭), 남망산의 남송정(南松亭)을 보수하고 정량동에 육각정(六角亭)을 세워 통영의 궁사들이 다시 일어섰다.
예로부터 남망산 송림은 나라에서 정한 금송림(禁松林)으로 아무나 함부로 베지 못하게 한 송림이다.
남송정 관혁(貫革) 주변이 소나무 숲으로 싸여있어 갈비(솔잎 낙옆) 채취하러 나왔던 부녀자가 빗나간 화살에 맞아 사망하는 불상사가 1960년을 전후하여 두 차례에 이르자 통영군민의 거센 여론에 폐정을 면치 못하게 건물을 철거하게 된 목재와 1692년도에 철거된 통영시 용남면 사무소 목재 일부를 합하여, 통영궁도협회 김기석(金琪錫), 양덕영, 김기섭 분들이 주동이 되어 20여 명 사우(射友)들의 협찬과 지방 유지들의 도움을 받아 총공사비 2,798,730원으로 남망산 동편 언덕에 사정을 옮겨 건립하고 유혁연(柳赫然) 통제사의 뜻을 이어 열무정(閱武亭)이라 하였다.
2000년도에 도·시비 3억1천4백만원의 예산으로 퇴락한 정사를 헐고 지하1층 지상2층 연건평 134평으로 준공하여, 지금은 매년 ‘이충무공 한산대첩기 전국남녀궁도대회’를 개최하고 있는 궁도장(弓道場)으로 그 명성이 인구(人口)에 회자(膾炙) 되고 있다.
첫댓글 수고 하였습니다. 잘 보고 기억하여야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