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朝鮮) 중기의 문신 거유(文臣 巨儒)로서 자는 효직(孝直), 호는 정암(靜庵). 관향은 한양(漢陽). 개국공신(開國功臣) 온(溫)의 5세손으로 성종13년 한성부(漢成府)에서 태어났다. 일직부터 학문에 뜻이 커서 과거(科擧)는 달갑지 않게 여겼다.
18세때 부친 원강(元綱)이 어천(魚川)찰방(察訪)으로 부임되었을 때 마침 한훤당 (寒暄堂 )이 희천(熙川)에 유찬(流竄)되어 있었기에 정암(靜庵)은 한훤당(寒暄堂)에게 종학(從學)하여 위학(爲學)의대방(大方)을 들었다.
중종(中宗) 5년 진사과(進士科) 장원(壯元)에 들고 동 10년에 알성과(謁聖科)에 올라 성균관(成均館) 전적(典籍)에 제수(除授)되였다. 얼마 후 사간원(司諫院) 정언(正言)이 되고 다시 홍문관(弘文館) 부제학(副提學)으로 승차( 陞差)되었다.
중종은 유학(儒學)을 숭상(崇尙)하여 문치(文治)에 뜻을 기울였으므로 (靜庵)을 의중(倚重)하게 되니 정암 또한 감격하여 유학(儒學)을 진흥시키고 군덕(君德)을 향상시키는 지치주의(至治主義)에 입각한 왕도정치(王道政治)의 실현(實現)만이 자기의 임무로 삼았다.
중종의 특지(特旨)로써 대사헌(大司憲)에 승진되면서, 일시에 많은 현사(賢士)를 발탁(拔擢)하여, 적폐(積弊)를 개혁하고 선왕의 법도(法度)를 차츰 거행하려고 하였다.
선생은 현량과(賢良科)를 주청(奏請) 시행하여 학행겸비(學行兼備)의 현사(賢士)를 대거 등용(登用)케 하였으며 중종반정(中宗反正)때의 정국공싱(靖國功臣)에 잘못 책록(策錄)된 인사들을 삭훈(削勳)하였다. 이에 격탁(激濁) 양청(揚淸)하는 신진사류(新進士類)와 훈구재상(勳舊 宰相)들이 감정이 대립(對立)하게 되었다.
이때 삭훈(削勳)된 홍경주(洪景舟) 남곤(南袞) 심정(沈貞) 등이 주초위왕(走肖爲王)으로 모함(謀陷)하여 사사(賜死)케하고 많은 사류(士類)가 함께 화(禍)를 당하였으니 이를 기묘사화(己卯士禍)라 한다.
그후 선조 즉위시(宣祖 卽位時)에 시임 좌의정(左議政) 이명(李蓂)의 초계 주청(初啓奏請)으로 모두 신원(伸寃) 복권(復權)되어 영의정(領議政)의 증직(贈職)과 문정(文正)의 시호(諡號)가 내리고 문묘(文廟)에 종향되니 세칭(世稱) 기묘명현(己卯名賢)이라 했고 . 한훤당(寒暄堂).일두(一두). 정암(靜庵). 회재(晦齋). 퇴계(退溪)를 동방오현(東方五賢)이라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