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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웅치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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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견주에 속해있던 본면(本面)은 1545년(조선인종원년(朝鮮仁宗元年)) 장흥군을 신설하면서 장흥에 속하게 되었으나
1914년 행정구역편시 회령·율포 등과 함께 다시 보성군에 편입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
[강산(江山) : 웅치면 강산1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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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산리는 한때 장흥군 웅치면의 지역으로 기(箕 : 겨) 재밑이 되므로 강산(糠山)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구암리, 채석리, 중선리, 강산리 등 4개 마을을 병합하여 웅치면 강산리라 하였다. |
[신기(新基) : 웅치면 강산1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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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기 마을은 1605년경 강산마을에서 살던 광산김씨(光山金氏)가 입향하여 마을을 형성하였고 그후 진주정씨(晋州鄭)씨와
하동정(河東鄭)씨가 들어와 살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
[내곡(內谷) : 웅치면 강산1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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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곡 마을은 1490년경 김해김(金海金)씨가 입향하여 15세대가 부락을 형성하였다가 떠나고 지금은 3세대만 마을을
형성하고 있다. |
[구암(九岩) : 웅치면 강산2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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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암 마을은 1649년경 청주한(淸州韓)씨가 입향하여 터를 잡고 마을을 형성하였으며 그후 여러 성씨들이 살고
있다. |
[연향(蓮香) : 웅치면 강산2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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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향 마을은 1650년경 함(咸)씨가 들어와 정착하여 마을이 형성되었다 하는데 그후 여러 성씨가 들어와 마을을
이루었다. |
[장변(場邊) : 웅치면 강산2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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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변 마을은 광복후인 1946년경 이곳에 5일시장이 들어서면서부터 시작되었는데 평산신(平山申)씨를 비롯한 2세대가 맨
처음 정주(定住)했다 한다. |
[채석(採石) : 웅치면 강산3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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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석 마을은 고려초에 장흥마(長興馬)씨가 입향하여 마을이 처음으로 형성되었다 하며 웃돔(上村) 아래돔(下村)으로
불리우고 있다. |
[성봉(聖鳳) : 웅치면 강산3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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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봉 마을은 1914년경 일본인 전갑(田甲)이라는 사람이 황무지를 개가하여 단감 나무를 심고 살았는데 1956년도에
월남한 피난민 25세대가 입향하여 이 마을을 형성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 |
[토동(土洞) : 웅치면 강산3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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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동마을은 제암산을 뒤로하여 그 산자락에 형성된 조선말엽 동학란을 피해온 성명미상의 선비가 은거하면서부터 마을이
이루어졌다 한다. |
[중선(重船) : 웅치면 강산4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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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선마을은 1530년경 연월엄씨와 평산신(平山申)씨 전주이(全州李)씨가 입향하여 터를 잡고 살았으나 그후
김해김(金海金)씨와 하동정(河東鄭)씨가 마을에 들어와 살면서 마을을 형성하였다고 한다. |
[중흥(中興) : 웅치면 중산1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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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산리는 한때 장흥군에 속했던 지역으로서 분지형의 중앙에 위치하고 있어 증흥(中興)이라 하는데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중흥(中興)과 약산(藥山) 2개 마을을 병합하여 중산리라 하였다. |
[약산(藥山) : 웅치면 중산2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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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산마을은 15300년경 밀양박(密陽朴)씨가 입향하여 마을을 형성하였는데 그후 보성선(寶城宣)씨 김해김(金海金)씨와
기타 여러 성씨가 마을을 이루고 있다. |
[해룡(海龍) : 웅치면 대산1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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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산리는 한때 장흥군에 속한 지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신전리, 임수리, 장내리, 해룡리, 복흥리 등
5개 마을을 병합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
[담안(담안) : 웅치면 대산1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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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안마을은 고려말엽 범(凡)씨와 임(林)씨가 입향하여 터를 잡고 살다 떠나고 조선초엽에 수원백(水原白)씨와
하동정(河洞鄭)씨가 들어와 살면서 마을을 형성하여 지금은 수원백씨와 하동정씨, 광산김씨 등이 마을을 이루고 있다. |
[복흥(卜興) : 웅치면 대산1리] |
복흥마을은 1900년경 김해김(金海金)씨와 밀양손(密陽孫)씨가 입향하여 마을을 형성 오늘에 이르고 있으며 지금은 5세대가 살고 있다. 마을의 지명은 풍수지리설에 마을 형태가 복(卜)字 형이기에 흥(興)하라는 뜻으로 복흥(卜興) 마을이라 불렀다 한다. |
[임수(林水) : 웅치면 대산2리] |
임수마을은 조선초기에 봉(奉)씨와 영광정(靈光丁)시가 입향하여 터를 잡아 살다가 다른 곳으로 이주하고 조선중엽 상주주(尙州周)씨와
전주(全州李)씨, 김해김(金海金)씨가 입향하여 마을을 형성 오늘에 이르고 있다 한다. 마을의 지명은 풍수지리설에 마을앞으로 흐르는 물과 숲(林)이 성하면 물이 좋은 마을로 영혼히 번창한다 해서 임수(林水) 마을이라 했다고 한다. |
[신전(薪田) : 웅치면 대산2리] |
신전마을은 조선말엽 신안주(新安朱)씨와 영월엄(永月嚴)씨가 입향하여 마을을 형성하였다 하는데 그후 김해김(金海金)씨를 비롯한 여러성씨가
들어와 마을을 이루고 있다. 마을의 지명은 풍수지리설에 마을 앞을 숲으로 가려야 부유하고 오래 발전할 것이라 하여 울타리 안의 새밭(터)란 뜻에서 신전(薪田)이라 부르고 있다. |
[용추(龍湫) : 웅치면 용반1리] |
용반리는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대은리, 임내리, 덕림리, 덕산리, 용반리 등 5개 마을을 병합하여 용반리라
하였다. 용추마을은 조선초기에 경주김(慶州金)씨가 입향하여 터를 잡고 살았다 하는데 그후 1898년경 죽산안(竹山安)씨와 수원백(水原白)씨가 마을에 들어와 살면서 마을을 크게 형성하였으며 지금은 죽산안씨와 수원백씨가 집성을 이루고 있다. 마을의 지명은 마을 뒤의 산비탈을 1km쯤 올라가면서 사철 맑은 물이 흐르는 계곡에 폭포가 있으며 옛날용이 하늘로 올라갔다는 용소가 있어서 마을 이름을 ‘용추’(龍湫)로 부르고 있다. |
[덕림(德林) : 웅치면 용반1리] |
덕림마을은 조선초기에 경주최(慶州崔)씨가 처음으로 입향하여 마을을 형성하였다 한다. 마을의 지명은 마을에 큰 나무가 많이 우거져서 옛적에는 ‘숲안’(林內)이라고 했으나 ‘숲안’(竹內)이라는 이름엔 별 의미가 없다하여 조선말엽부터 큰숲이라는 뜻의 덕림(德林)이라 부르고 있다. |
[대은(大隱) : 웅치면 용반2리] |
대은마을은 고려말엽에 창녕조(昌寧曺)씨가 처음으로 들어와 마을을 형성하여 살다가 떠나고 그후 조선 초기에 김해김(金海金)씨가 들어와
살았다 전해오며 1600년경에 관산임(冠山任)씨를 비롯한 여러 성씨가 들어와 현재에 이르고 있다. 마을의 지명은 사방이 숲으로 둘러쌓여 외부에서 마을을 보면 마을인지 숲속인지 문간하기 어려울 정도여서 마을 이름을 ‘대은’(大隱)이라 부르고 있다. |
[덕산(德山) : 웅치면 용반2리] |
덕산마을은 1607년경 천안전(天安全)씨가 처음으로 들어와 마을을 형성하여 살다가 떠나고 그후 1720년경에 수원백(水原白)씨가 들어와
현재에 이르고 있다 한다. 마을의 지명은 풍수지리설에 마을 뒷산에 범바위등이 있어 덕산(德山)이라 불리우고 있다. |
[동고지(東顧枝) : 웅치면 용반2리] |
동고마을은 1680년경부터 형성되었다고 하는데 예부터 이 마을에서 단일(單一) 성씨가 성(盛)하지 못하다는 구전(口傳) 때문에 한성씨만
살지 않고 여러 성씨가 함께 살아오고 있다. 마을의 지명은 마을의 형태가 동(東)쪽으로 뻗은 나뭇가지 같다는 풍수설에 의해 ‘동고지’(東顧枝)라 하였으나 1900년경부터 끝의 ‘지’(枝)자를 발음하기 귀찮다 해여 때버리고 ‘동고’라 부르고 있다. |
[녹동(鹿洞) : 웅치면 봉산1리] |
봉산리는 1914년 행정구역 개편시에 녹동리, 산남리, 상수리 등 3개 마을을 병합하여 봉산리라 하였다. 녹동마을은 약 400년전
한양조(漢陽趙)씨 조주상이라 분이 강진으로 유배되었을 때 그 자손들이 각지로 흩어졌는데 그중 한분이 입향하여 이 곳에 마을을 형성하였다
한다. 마을의 지명은 북으로는 형제봉, 남동쪽으로는 학성산과 심봉산이 있고 마을뒤에는 함매등과 봉선등이 서로 대창을 이루고 있는데 그 모습이 마치 사슴과 같다하여 ‘녹(鹿 : 사슴논) 동’(洞 : 고을동)이라 부르고 있다. |
[매남(梅南) : 웅치면 봉산1리] |
매남마을은 조성중역 녹동마을에 살던 한양조(漢陽趙)씨가 아들 6형제를 데리고 이곳에 처음으로 터를 잡은 것으로 전해오나 지금은
진원박(珍原朴)씨가 자작일촌을 이루고 있다. 마을의 지명은 마을 뒷산에 자생한 매화가 많아서 봄이면 가히 장관을 이루엇다 하여 매화마을이란 뜻으로 ‘매남(梅南)’이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
[외삼수(外三水) : 웅치면 봉산2리] |
외삼수 마을은 고려효종때 청주김(淸州金)씨가 처음 마을을 세웠다고 전해오는데 조선중엽에 다시 장흥읍 견산리에 살던 죽산안(竹山安)씨가
들어와 현재까지 자작일촌을 이루고 있다. 마을의 지명은 보성강(寶城江)의 발원인 비래천(飛來川)과 단풍천(丹楓泉) 찬샘(寒泉)의 3천(三泉)이 있어 고려때부터 삼수(三水)라 불러왔다 하며 현재는 마을이 안, 밖으로 나누워 안쪽마을을 안삼수(內三水), 바깥쪽 마을을 외삼수(外三水)로 부르고 있다. |
[삼수(三水) : 웅치면 봉산3리] |
삼수 마을은 조선초기에 장수황(長水黃)씨와 한양조(漢陽趙), 수원백(水原白)씨가 마을을 형성했다 전해오나 조선조 숙종때의 박몽형이
이주해온 이래 지금까지 진원박(珍原朴)씨가 자작일촌을 이루고 있다. 마을 지명은 섬진강 발원지인 비래천(飛來川)과 상진천(上眞泉), 하진천(下眞泉)을 합해 삼수라고 하였다는 설이 있고 일설은 매년 정월 대보름날에 풍년을 기원하며 제사를 모셨던 당산나무가 세그루 있었는데(현 단산) 석삼(三) 나무수(樹)자를 써서 삼수(三樹)로 불러오다 풍수지리상 마을터가 화란(火難)이 두려우니 물수(水)로 고쳐 부르라 하여 그후부터 삼수(三水)라 하였다는 말도 전해온다. |
[왕초(王草) : 웅치면 유산1리] |
유산리는 1914년 행정구역 개편시에 오류, 내동, 왕초, 부춘, 유산의 다섯마을을 병합하여 유신리라 하였다. 왕초마을은 조선말엽 청주한(淸州韓)씨 파평윤(坡平尹)씨, 죽산안(竹山安)씨가 처음으로 마을을 형성하였다 하는데 지금도 안씨와 한씨의 후손들이 마을을 이루고 있다. 마을의 지명은 언제부터였는지는 알 수 없으나 이곳에는 인삼(人蔘)을 재배하였다고 하며, 인삼은 모든 풀(草)의 왕(王)이라 하여 마을 이름을 왕초(王草)라 했다 전해온다. |
[부춘(富春) : 웅치면 유산1리] |
부춘마을은 조선중엽에 보성선(寶城宣)시와 수원백(水原白)씨가 입향하여 부락을 형성, 현재에 이르고 있다. 마을의 지명은 처음에는 옹기를 굽는 마을이라 하여 점등, 또는 솔밭등이라 불렀으나 안진사라는 분이 매년 봄이면 식량이 떨어져 고생하는 것을 보고 춘궁기가 없으란 뜻에서 부춘(富春)이라 부르게 하였다 한다. |
[내동(內洞) : 웅치면 유산2리] |
내동마을은 조선중엽 오류동(五流洞)의 광산김(光山金)씨가 번창하자 양지바른 곳에 터를 잡아 마을을 이루었다 한다. 마을의 지명은 오류동에서 살다가 이곳으로 이주 정착하였기에 본 마을인 오류동의 안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내동(內洞)이라 부르고 있다. |
[오류(五柳) : 웅치면 유산2리] |
오류마을은 1300년경 덕수장(德水張)씨와 영광김(靈光金)씨가 입향하여 살았는데 장씨는 장흥으로 이주하고 영광김(靈光金)씨는 갑오경장때
동학의 지역 인물인 김보열(金甫烈)이 진을 치고 활약하자 정부군이 소탕하여 뿔뿔히 흩어지고 1400년경부터 광산김(光山金)씨가 입향하여 지금까지
성을 이루고 있다. 마을의 지명은 광산김씨 입향조(入鄕祖)인 김평석(金平碩)이 장흥에서 이주해 왔는데 그의 4대손인 김혼(金混)이 임진왜란때 경상좌병사 참모로 싸우다가 전사하자 그의 부인이 14세된 아들 홍업(弘業)을 데리고 초온제를 모신 후 자결했다. 아들 홍업(弘業)이 집앞에다 다섯그루의 버드나무를 심고 집에서 글 공부만 하다가 세상을 마치자 그때부터 마을 이름을 오류동(五柳洞)이라 부르고 있다. |
[신유(新柳) : 웅치면 유산2리] |
신류마을은 1750년경 장흥에서 큰 재배로 흉년을 당한 진주정(晋州鄭)씨가 곰재를 넘어서 살 곳을 찾아오다 물이 좋고 땅이 넓어 새로이
이곳에 마을을 이루고 살았다고 한다. 마을의 지명은 새로 이루어졌다고 해서 신지(新地) 또는 신기(新基)라 부르다가 새터(新基)라는 지명이 싫어서 1900년경부터 유산(柳山)리의 ‘유’자와 신기의 ‘신’자를 합해 신류(新柳)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