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헌의 산악비행] 고흥 마복산
가을 하늘 떠돌며 다도해 절경 감상 직선거리 30km 넘는 멋진 비행 즐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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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남해바다를 하늘로 항해중인 비행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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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미국 등반계의 거장 이본 취나드의 자서전 <파도가 칠 때는 서핑을>이란 책을 읽은 적이 있다. 서퍼에게 태풍은 아마도 가장 훌륭한 훈련 대상일 것이며, 큰 파도는 훌륭한 서퍼를 탄생시킬 것이다. 산 또한 높은 고도에, 덤으로 심한 경사를 이룬다면 알피니스트에게 혹독한 산이 될 것이 자명하다. 이 말은 곧 그 등반의 대상 산이 알피니스트를 만든다는 뜻이다. 하늘을 나는 조인(鳥人)의 세계도 혹독하리만큼 그 진리는 변함이 없다.
수천 마리 새들이 떼를 지어 이동할 때도 언제나 그 선두에서 길을 열어가는 새가 있다는 사실은 흥미롭다. 강인하고 지혜를 갖춘 우두머리 새들이 선두에서 열을 찾고 길을 만들어 수천의 새들이 힘을 아끼며 보다 안전하게 지구의 반대편까지 날아갈 수 있는 것이다.
자연 속에서 움직이는 등산도, 파도타기도, 비행도 모두 마찬가지다. 자연을 에너지원으로 활용할 수 있는 능력과 끊임없는 도전, 그리고 반복이 보다 큰 자유와 힘을 준다. 지난 8월 850km의 알프스산맥을 인간이 동력을 달지 않고 뼈대 없는 천으로 만든 7kg 정도의 패러글라이더로 순수한 자연의 에너지인 바람을 이용, 알프스산맥의 시작점인 오스트리아에서 프랑스 모나코까지 종주하는 엑스알프스(x-alps)라는 경기가 열린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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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가을 남해바다와 배경으로 비행 중인 필자의 패러글라이더. 2 멀리 나로도와 다도해를 바라보며 마복산 위를 날고 있는 조인.
- 전 세계의 많은 사람들과 조인들이 매일 매일 생중계되는 이들의 움직임을 보고 인간의 도전정신과 경이로움에 찬사와 격려를 보냈다.
이들은 바람과 열을 이용해 비행하고, 일기가 불순한 날은 쉼없이 걸어서 알프스를 넘었다. 우리도 언젠가 백두산에서 설악산을 거쳐 지리산까지 백두대간을 걷고 날아서 종주하는 그 날을 기대해 본다. 가을은 계절적으로 언제나 높고 푸른 하늘을 연상케 하지만, 요즘은 계절의 구분을 잃은 듯한 가을날이 허다하다. 계속되는 검은 구름들이 하늘을 채우고 있어 비행이 쉽지 않다.
바람은 무궁무진한 자연 에너지
11월7일 입동을 하루 앞두고 지리산 형제봉 단풍비행을 가기로 했지만 역시나 바람 방향이 맞지 않았다. 산악비행에 참가하기로 한 순천의 나관수 팀장이 추천하는, 이름도 처음 들어보는 전라도 고흥의 마복산으로 향했다. 남해의 치경이와 정 사장도 방향을 바꾸어 순천을 향해 달렸다. 진주 패러의 홍필표 팀장은 전남 패러의 나관수 팀장에게 계속 전화로 길을 물었다.
전형적인 작은 농촌 마을인 외산 마을회관 앞에 차를 세우고 투박한 지프에 모든 장비를 싣고 임도를 따라 올라갔다. 산정으로 올라가면서 나관수 팀장이 “저기 바위 보랑께. 좋아 부러”하면서 마복산을 자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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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황금빛 억새군락으로 착륙중인 여수 바차 팀장님
- 차량이 북쪽 사면을 넘어 남쪽 바다가 보이는 능선에 올라선 순간 모두 “우와, 죽인다!”며 함성이다. 푸른 바다와 해안선 사이 올망졸망한 섬들이 절경을 이룬 다도해 국립공원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륙장 동쪽 능선은 학바위, 거북바위, 물개바위 등의 기암괴석들이 솟았다.
주차지점에서 도보로 10분 정도에 위치한 이륙장은 북서 방향으로 고흥읍의 넓은 벌판이 자리하고, 남으로는 시원하고 환상적인 다도해다. 넓은 바다를 보는 순간 지루했던 2시간의 긴 드라이브의 짜증은 사라졌다. 동으로 말 잔등 같은 능선이 마복산 정상으로 이어지고, 바둑판처럼 해창만 간척지가 뵌다. 뒤로는 팔영산이 우리를 지켜보고 있다.
이륙장에 도착하니 이미 전남 패러의 김병국 선수와 멀리 경기도 이천에서 아내와 단풍구경을 내려온 함영민 선수가 바람을 기다리고 있다. 모두들 많은 기대를 가지고 왔지만, 결국 바람이 없어 국가대표 선수들도 바로 총알처럼 착륙지점으로 날아간다. 결국 첫 비행은 기대와는 달리 실망만 남기고, 아름다운 남해의 경치는 제대로 보지도 못하고 지상으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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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마복산 기암괴석을 배경으로 날고 있는 나관수 팀장.
- 뒤이어 도착한 고흥 패러팀과 합류하여 모두 한 트럭에 타고 다시 이륙장으로 향한다. 오늘 ‘쫄 비행(이륙 후 5분 이내 착륙)’을 한 사람들은 모두 국내에서 10위권에 드는 국가대표 선수들로, 서로 먼저 나가라고 야단이다.
2차로 이륙장에 도착하니 바람이 조금씩 불어오기 시작하고, 해가 점점 앞쪽으로 나오면서 고흥벌판을 비추기 시작한다. 이곳 순천 여수 바닥의 터줏대감인 나관수 팀장이 먼저 이륙해 이륙장 주변으로 한두 번 사면비행을 하면서 고도를 조금씩 올리고 있다.
모두들 열기둥이 생기나 하고 시선을 집중한다. 나 팀장이 한 번 돌고 두 번 돌며 점점 고도가 올라가기 시작한다. 이 순간을 놓칠 수 없는 선수들이다. 모두 입이 귀에 걸려 멋진 비행을 기대하며 힘차게 땅을 박차고 하늘로 치솟는다.
홍 팀장, 치경이, 김병국 선수, 그리고 나. 나관수 팀장은 벌써 1,000m 가 넘는 고도를 가지고 하늘 바다를 항해하며 나로도 앞바다에서 놀다가 다시 딸각산을 돌아 마복산으로 향한다. 모두 고도를 잡아 마복산으로 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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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딸각산에서 이어지는 마복산과 해창만 넘어 고흥 팔영산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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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한 바람은 보다 큰 자유와 힘을 준다
이륙장 오른쪽 능선에 형성된 열기류는 기체를 계속 다도해 섬들 가까이 남해바다로 기울게 한다. 고도가 900m 가까이 올라가니 마복산과 해안선 사이의 작은 마을의 아담한 포구와 올망졸망한 섬들이 한눈에 들어온다. 마복산의 기암괴석 사이로는 등산객들이 단풍을 즐기고 있다.
딸각산쪽으로 주능선은 마치 살 발라 먹고 남긴 생선뼈처럼 작은 능선들이 차곡차곡 포개진 것 같다. 오늘 바람이면 우주센터가 있는 나로도까지도 날아갈 수 있다. 고도 1,000m를 가지면 배풍(背風)으로 10km 이상을 날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기체들은 열 기류를 따라 함께 모여 기둥을 타고 올라 다시 팔영산 방면의 해창만 간척지로 날아간다. 오늘 함께 비행 중인 김병국 선수는 마복산에서 팔영산을 넘어 여수 직전까지 날아간 적이 있다고 한다. 정말 자연의 에너지는 무궁무진한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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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마복산 비행에 참가한 순천, 여수, 진주팀들. 2 이륙 전 하네스를 점검 중인 하치경 선수.
- 필자는 무거운 사진기를 목에 걸고 양쪽 브레이크를 놓은 채로 동서남북 셔터를 눌러대며 자연의 아름다움을 훔치고 있다. 브레이크는 차의 핸들과도 같아서 이것을 놓으면 기체의 방향이 꺾이고 피칭과 요잉이 나타난다. 한번은 심한 요동으로 기체가 망가질 뻔했다.
우리는 점심도 먹지 않고 멀리 2시간을 날아왔다. 그러나 굶주린 배를 멋진 비행으로 하늘에서 채우고 있었다. 남해의 정 사장님은 해안선의 끝까지 밀고 나갔다가 다시 마복산으로 돌아오며 솔로비행을 만끽하고 있었고, 다른 선수들은 서쪽으로 이어지는 딸각산 능선을 따라 날아가고 있었다.
김병국 선수와 홍필표 선수, 치경이는 고흥벌판을 에워싼 산들을 완전히 일주하고 고도 1,200m까지 올렸다가 고흥읍 공설운동장에 착륙했다. 순천의 나관수 팀장은 제주행 배가 뜨는 녹동항 직전에 홀로 착륙했다. 모두들 직선거리로 30km가 넘는 멋진 비행을 한 풍성한 가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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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흥벌판을 접수하고 있는 하치경 선수.
- 고흥팀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벌판의 복사열이 약해지고 열기류가 식으면서 고도를 올리지 못하고 겨우 능선에서 이륙장 고도를 유지하며 큰 재미를 보지 못하고 있다. 가을과 겨울 비행은 태양이 지면을 비추는 시간이 적기 때문에 겨우 1~2시간 열기류가 형성되었다가는 빨리사라진다. 때문에 열기류가 형성되는 시간에 얼른 이륙해 고도를 잡고 원하는 목적지까지 날아가야 한다. 봄에 비해 열기류가 형성되는 시간이 반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나는 마복산에서 기수를 이륙장으로 돌려 우주센터의 산 능선에 위치한 천문대로 날아갔다. 멀리 홍 팀장과 정 사장님은 천둥산 아래 위치한 딸각산에서 고도를 잡느라 열심히 돌고 있다. 이미 바람이 동풍으로 바뀌었는지 마복산쪽으로 열이 생기지 않는다. 천둥산에서 김병국 선수와 하치경 선수가 고도를 잡고 고흥반도를 돌고 있다.
저 아래 착륙장 주변 억새군락이 황금빛으로 물들고 있다. 착륙장 근처에서는 함영민 선수가 묘기 비행을 하는 작은 기체를 가져왔으나 아쉽게도 사면상승과 열 비행을 하지 못하고 쫄 비행을 한다. 뒤이어 고흥 패러팀이 착륙장에 도착한다. 모두들 30분만 먼저 비행했다면 하는 아쉬움을 갖지만 열은 생겨나지 않는다. 함영민 선수는 오늘 비행이 아쉬운지 모터글라이더로 마복산과 딸각산을 지나 천둥산을 돌고 해안선을 따라 녹동항까지 날아가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비행을 끝내고 공설운동장과 착륙지점에서 사람들을 태운 뒤 녹동항으로 갔다. 일몰을 바라보며 낙지와 신선한 회로 오늘의 환상적인 남도 비행을 이야기하면서 다음 비행을 기약했다.
요즘 점차로 등산뿐만 아니라 패러글라이더나 산악자전거 동호인들이 늘어가고 있다. 몇 해 전 지리산 국립공원의 정령치 활공장이 자연을 파괴한다는 이유로 폐쇄되어 많은 활공인들이 아쉬움을 남겼다. 활공인들은 이륙 후 하늘에서 산을 지켜볼 뿐, 쓰레기 한 점 버리지 않는다. 알프스를 비롯한 세계 곳곳의 국립공원에서 패러글라이더는 하늘을 수놓으며 인간의 무한한 꿈인 자유의 이상을 실현하고 있다. 무조건 통제보다는 긍정적 시각이 우선돼야 하는 것이 아닐까 한다. 이번 비행에 참가해준 전남패러학교 나관수 팀장과 회원들, 그리고 고흥패러 회원님들과 여수 비차팀에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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