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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인물 탐구
● 박제상 [朴堤上, 363~419] 신라의 충신. 417년 삽량주(良州)의 간(干)으로 있다가 눌지왕의 명을 받아 고구려에 볼모로 가 있던 왕제(王弟) 복호(卜好)를 지략과 계교로 데려왔다. 다시 일본에 건너가 볼모로 잡혀 있던 왕자 미사흔(未斯欣)을 고국으로 탈출시켰으나, 일본군에게 잡혀 기시마[木島]에 유배되었다가 그 곳에서 살해당하였다. 왕은 대아찬(大阿) 벼슬을 추증하고, 그의 둘째딸을 미사흔과 결혼시켜 그 충절에 보답하였다. 부인 또한 열녀로 지아비를 기다리다 지쳐 망부석(望夫石)으로 변했다고 한다.
● 김춘추. 태종무열왕 [太宗武烈王, 602~661] 신라 제29대 왕(재위 654∼661). 성 김(金). 휘 춘추(春秋). 진지왕의 손자. 이찬(伊) 용춘(龍春:龍樹)의 아들. 어머니는 진평왕의 딸 천명부인(天明夫人) 김씨(金氏). 무열왕(武烈王)이라고도 한다. 642년(선덕여왕 11) 백제의 침입으로 대야성(大耶城)이 함락되고 사위인 성주(城主) 품석(品釋)이 죽음을 당하자, 고구려와 힘을 합하여 백제를 치고자 연개소문(淵蓋蘇文)을 만났으나, 국경의 영토문제로 감금당했다가 돌아왔다. 웅변에 능하고 외교적 수완이 뛰어나서 사신으로 일본과 당(唐)나라에 다녀왔으며, 특히 당나라에는 여러 차례 왕래하면서 외교적 성과를 거두고 군사원조까지 약속받아 삼국통일의 토대를 닦았다. 654년 진덕여왕이 죽자 진골(眞骨)의 신분으로 군신들의 추대를 받아 즉위함으로써 신라 최초의 진골출신 왕이 되었다. 즉위 후 이방부령(理方府令) 양수(良守)에게 명하여 율령(律令)을 상정(詳定)하게 하고 이방부격(理方府格) 60여 조를 제정하여 왕권을 강화하였으며, 당나라와 계속 친교를 맺어 깊은 신뢰를 얻고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 ·신라왕(新羅王)에 책봉되었다. 660년(무열왕 7) 당나라에 청원하여 당나라가 백제 정벌의 대군을 파견하자, 왕자 법민(法敏:文武王)과 김유신 등에게 5만의 군사를 주어 당나라 군사와 연합하여 백제를 멸망시켰다. 이듬해 백제 부흥군을 격파하고, 이어 고구려 정벌의 군사를 일으키다가 죽었다. 그의 재위기간에 신라 왕권의 전제화(專制化)가 확립되었고, 또한 크게 성장한 귀족세력을 중심으로 당나라의 율령제도(律令制度)를 모방한 관료체계가 정비되었으며, 구서당(九誓幢)이라는 9개 군단(軍團)의 설치로 군사조직이 강화되는 등 본격적인 국가체제가 확립되었다. 또, 김유신의 매부(妹夫)가 됨으로써 경주김씨 왕실과 김해김씨와의 결합이 이루어졌고, 그의 직계자손으로 8대가 계속됨으로써 120년 동안 정치의 황금기를 맞게 되었다.
● 계백 [階伯, ?~660] 백제 말기의 장군. 일찍이 사로(仕路)에 나가 벼슬이 달솔(達率:제2품)에 이르렀다. 당시 신라가 한강 유역을 강점함으로써 그때까지의 나제동맹(羅濟同盟)이 결렬되자 백제는 고구려 ·일본 등과 친교를 맺고 신라에 대항하였다. 고립상태에 빠진 신라는 당(唐)나라와 동맹을 맺고 원병을 요청하였다. 당나라 고종(高宗)은 소정방(蘇定方)을 신구도 대총관(神丘道大摠管)으로 임명하여 군사와 함께 바다를 건너 신라를 돕게 하여, 이른바 나당 연합군의 5만 병력이 백제를 치기 시작하였다. 이 때 백제의 의자왕은 사치와 연악(宴樂)에 파묻혀 충신들의 훌륭한 작전계획도 물리치고 있다가, 사태가 위급해지자 계백을 장군으로 삼아 적을 막도록 하였다. 계백은 죽기를 각오한 군사 5,000명을 이끌고 출전하면서, 이미 나라를 보전하기 어렵다는 것을 직감하고 ‘살아서 적의 노비(奴婢)가 됨은 차라리 죽음만 같지 못하다’하여 자기의 처자를 모두 죽여 비장한 결의를 보였다. 황산(黃山)벌에 이르러 세 진영을 설치하고 군사들에게 맹세하기를 “옛날에 구천(句踐)은 5,000명의 군사로써 오(吳)나라 70만 대군을 쳐부쉈으니 오늘날 마땅히 각자가 있는 힘을 다하여 최후의 결판을 내자”하고, 신라의 김유신(金庾信)이 이끄는 5만의 군사를 맞아 네 차례나 그들을 격파하였다. 이에 신라군이 사기를 잃고 있을 즈음, 신라의 장군 품일(品日)은 16세의 어린 아들 관창(官昌)으로 하여금 나가 싸우게 하니, 관창은 백제군과 싸우다가 생포되었다. 계백은 어린 나이로 용전한 관창을 가상히 여겨 살려보냈으나, 관창은 재차 나와 싸우다가 또 붙잡혔다. 계백은 신라에 이같이 용감한 소년이 있으니 싸움은 이미 승부가 난 것이라 예감하였다. 그는 관창의 목을 잘라 그의 말 안장에 묶어 신라군 진영으로 돌려보냈다. 예상했던 대로 신라군은 관창의 죽음으로 사기가 올라 총공격을 감행하였고 계백은 전사하였다. 부여의 부산서원(浮山書院)과 충곡서원(忠谷書院)에 배향되었다.
● 김유신 [金庾信, 595~673] 삼국통일을 이룩한 신라의 장군. 본관 김해(金海). 아버지는 소판(蘇判)·대량주도독(大梁州都督)을 역임한 서현(舒玄), 어머니는 숙흘종(肅訖宗:葛文王 立宗의 아들)의 딸 만명(萬明). 본래 가야국의 시조 김수로왕(金首露王)의 12대손으로, 증조부는 금관가야의 마지막 왕인 구해왕(仇亥王:仇衡王이라고도 함), 조부는 신주도 행군총관(新州道行軍摠管)을 지낸 명장 무력(武力)이었다. 김유신은 609년(진평왕 31) 화랑이 되어 용화향도(龍華香徒)라 불린 낭도(郎徒)를 이끌고 화랑정신을 길렀고, 611년과 이듬해 중악(中嶽)과 인박산(咽薄山)에서 삼국통일을 기원(祈願)하고 무술을 닦은 뒤 국선(國仙)이 되었다. 629년(진평왕 51) 8월 이찬(伊) 임영리(任永里) 등이 고구려의 낭비성(娘臂城)을 공격할 때 중당(中幢)의 당주(幢主)로서 출전하여 큰 공을 세웠다. 이때 적군의 역습을 받은 아군의 사기가 떨어져 싸움이 불리해지자 아버지 소판 서현에게 "제가 벼리와 옷깃이 되겠습니다" 하고 홀로 적진으로 돌진하여 적장의 머리를 베어 옴으로써 승리의 기틀을 잡아 대승을 거두게 하였다. 642년(선덕여왕 11) 압량주(押梁州:지금의 慶山) 군주(軍主)가 되었고, 644년 소판 벼슬에 올랐다. 같은 해 9월 상장군(上將軍)이 되어 백제의 가혜성(加兮城) 등 7개 성을 쳐 이기고 이듬해 1월에 개선하였다. 그런데 왕을 알현하기도 전에 매리포성(買利浦城:居昌)이 백제군의 맹공을 받고 있다는 파발에 곧장 상주(上州:尙州) 장군이 되어 출전, 요격하여 크게 무찔렀다. 647년(진덕여왕 1) 1월 여왕을 폐하려고 난을 일으킨 귀족회의 수뇌인 상대등(上大等) 비담(毗曇)과 염종(廉宗)의 반군을 토벌하였고, 10월 무산(茂山:무주) 등 3개 성을 공격해 온 백제군을 보병·기병 1만으로써 크게 격파하였다. 이듬해 압량주 군주로서 전날 백제에게 빼앗긴 대량성(大梁城:합천)을 공격하여 함락시키고 이어서 악성(嶽城) 등 12개 성을 빼앗았으며, 그 공으로 이찬 벼슬로 승진하고 상주행군대총관(上州行軍大摠管)이 되었다. 649년 8월에는 석토성(石吐城) 등 7개 성을 공격해 온 백제의 장군 좌평(佐平) 은상(殷相)을 무찔렀다. 654년 3월 진덕여왕이 후사 없이 죽자 재상으로 있던 이찬 알천(閼川)과 의논하여 이찬 김춘추(金春秋:太宗武烈王)를 왕으로 추대하였다. 이듬해 9월 백제의 도비천성(刀比川城:忠北 永同郡의 飛鳳山城)을 공략하였으며, 이때 백제왕의 문란한 정치를 보고 백제를 멸할 것을 왕에게 건의하였다. 660년(태종무열왕 7) 1월 상대등에 올랐고, 7월 신라 정예군 5만과 소정방(蘇定方)이 이끈 당나라군 13만이 연합하여 사비성(泗城)을 함락하여 백제를 멸망시켰다. 661년(문무왕 1) 7월 나당 연합군과 함께 고구려를 정벌하러 가는 도중인 9월 옹산성(瓮山城:대전시 鷄足山城)에 있는 백제의 잔적(殘賊)을 토벌하고, 12월 당나라군의 군량미를 실어다 주었으나 당나라군의 철수로 고구려 정벌은 실패로 돌아갔다. 663년 8월 백제의 부흥군(復興軍)을 두솔성(豆率城:周留城)에서 대파하였고, 665년 당나라 고종으로부터 봉상정경평양군개국공(奉常正卿平壤郡開國公)에 봉해졌다. 667년(문무왕 7) 왕을 따라 당나라군과 함께 고구려 정벌에 나섰으나 실패하고 11월 환군하였다. 이듬해 9월 나당 연합군으로 평양을 칠 때 연합군 대총관이 되었으나 왕명으로 금성에 남아 국방을 도맡았다. 고구려 정벌 직후 태대각간(太大角干:太大舒發翰)의 최고직위에 오른 후 당나라 군사를 축출하는 데 힘써 한강 이북의 고구려 땅을 수복함으로써 삼국통일의 기반을 다져 놓았다. 673년(문무왕 13) 7월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유해는 금산원(金山原:경주시)에 장사지냈고, 835년(흥덕왕 10) 흥무대왕(興武大王)에 추존되고 경주 서악서원(西嶽書院)에 제향되었다.
● 을지문덕 [乙支文德, ?~?] 고구려 명장. 612년(영양왕 23) 수(隋)나라의 우중문(于仲文) ·우문술(宇文述)이 113만 여의 수륙양군(水陸兩軍)으로 고구려를 침범하자 압록강에서 대치하고 있을 때 적정을 살피기 위하여 거짓으로 항복, 적군의 허실을 정탐하고 돌아왔다. 적군이 이 사실을 알고 추격하자 적의 군사력을 소모시키기 위해 거짓 패배를 가장하여 평양성(平壤城) 30리 밖까지 유인하였다. 이때 장군은 적장 우중문에게 ‘神策究天文妙算窮地理戰勝功旣高知足願云止’라는 희롱의 시를 보냈다. 우중문이 비로소 술수에 빠진 것을 깨닫고 지친 군사로 회군(回軍)하자, 을지문덕은 살수(薩水:淸川江)에서 수나라의 후군(後軍)을 무찔러 대승하였다(薩水大捷). 침착 대담하고 지략과 무용에 뛰어났으며, 시문(詩文)에도 뛰어났다.
● 연개소문 [淵蓋蘇文, ?~666] 고구려 말기의 대막리지(大莫離支)·장군. 일명 천개소문(泉蓋蘇文). 동부대인(東部大人) 태조(太祚)의 아들이다. 개금(蓋金)·개소문(蓋蘇文)이라고도 한다. 15세에 부친의 직책을 계승하여 동부대인 대대로(大對盧)가 되었으며, 642년 당나라의 침입에 대비하고자 북쪽 1,000리에 이르는 장성(長城)을 축조하였다. 같은 해, 자신을 제거하려는 대인(大人)들의 기미가 보이자 주연을 베풀어 대신과 대인 180여 명을 죽이고 영류왕을 시해(弑害), 보장왕을 옹립하고 스스로 대막리지가 되어 정권을 장악, 고구려에 구원을 요청하러 온 신라의 김춘추(金春秋, 후에 태종무열왕)를 감금하고 신라와 당나라의 교통로인 당항성(黨項城)을 점령하였다. 644년(보장왕 3) 신라와의 화해를 권고하는 당 태종(唐太宗)의 요구를 물리치고 그 사신 장엄(蔣儼)을 구속하는 등 강경책을 쓰자 이에 격노한 당 태종이 645년 17만의 대군을 이끌고 침입하였다. 그는 고구려군을 지휘하여 개모성(蓋牟城)·요동성(遼東城)·백암성(白巖城) 등에서 적에게 큰 타격을 가하고 마침내 안시성(安市城)의 혈전(血戰)에서 60여 일 간의 공방전 끝에 당군을 격퇴하였다. 그 후에도 4차례나 당나라의 침입을 받았으나 이를 모두 막아냈다. 한편 이보다 앞선 643년에는 당나라에 사신을 파견하여 도교(道敎)의 도사(道士) 8명과 《도덕경(道德經)》을 들여오는 등 업적을 남겼다.
● 고선지 [高仙芝, ?~755] 고구려 출신의 당(唐)나라 장수. 고구려가 망하자 아버지 사계(舍鷄)를 따라 당나라 안서(安西)에 가서 음보(蔭補)로 유격장군(遊擊將軍)에 등용되고, 20세 때 장군(將軍)에 올랐으며, 안서 절도사(安西節度使) 부몽영찰(夫蒙靈)의 신임을 얻어 언기진수사(焉耆鎭守使)가 되었고, 740년경 톈산산맥[天山山脈] 서쪽의 달해부(達奚部)를 정벌한 공으로 안서 부도호(安西副都護)에 승진하고, 이어 사진도지병마사(四鎭都知兵馬使)에 올랐다. 747년 토번(吐蕃:티베트)과 사라센제국이 동맹을 맺고 당을 견제하려고 동진(東進)하자, 행영절도사(行營節度使)에 발탁되어 군사 1만을 인솔, 파미르고원을 넘어 사라센제국과 동맹을 맺은 72개국의 항복을 받고 사라센제국의 동진을 저지, 그 공으로 홍려경어사중승(鴻'A卿御史中丞)에 오르고 이어 특진 겸 좌금오대장군동정원(特進兼左金吾大將軍同正員)이 되었다. 750년 제2차 원정에 나가 사라센과 동맹을 맺으려는 타슈켄트[石國]를 토벌하고 국왕을 잡아 장안(長安)에 호송한 공로로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가 되었으나, 장안의 문신들이 포로가 된 타슈켄트 국왕을 참살했기 때문에 이듬해 서역 각국과 사라센이 분기하여 연합군을 편성, 탈라스의 대평원으로 쳐들어왔다. 이를 막기 위해 다시 7만의 정벌군을 편성, 제3차 원정에 나갔다가 크게 패하고 후퇴, 귀국 후 밀운군공(密雲郡公)에 봉해졌다. 755년 안녹산(安祿山)이 반란을 일으키자 정토군 부원수로 출전, 선발군으로 나가, 패전한 우군을 구원하기 위해 방어 담당지역을 무단이동한 사실에 대하여, 평소 사원(私怨)을 품고 있던 부관이 과장하여 밀고(密告)함으로써, 진중에서 참형되었다. 세계 최초로 섬유질의 제지법이 고선지에 의하여 유럽에 전파된 사실이 밝혀진 것이다. 즉, 751년 고선지가 제2차 탈라스 전투에서 패하여 잡힌 포로 중에는 제지장(製紙匠)이 있었던 것이다. 고선지가 이룩한 빛나는 전적을 통하여 그의 뛰어난 지휘자로서의 통솔력과 전술을 살펴보면 대략 다음과 같은 세가지 사실이 발견된다. ① 서역에서 거둔 고선지의 탁월한 전과로서 소발률국을 토벌한 것, ② 당나라와 아라비아 두 나라가 석국과 탈라스성을 쟁탈하기 위하여 싸운 격전, ③ 탈라스전투 이후 제지법이 아라비아에 전파된 것 등은 그를 평가하는 데 있어서 중요한 자료가 된다.
● 장보고 [張保皐, ?~846] 신라의 무장. 일명 궁복(弓福)·궁파(弓巴). 일찍이 당나라 서주(徐州)에 건너가 무령군 소장(武寧君小將)이 되었으나 신라에서 잡혀간 노비(奴婢)의 비참한 처우에 분개하여 사직하고 귀국했다. 해적들의 인신매매를 근절시키기 위해 왕의 허락을 얻어 1만의 군사로 해로의 요충지 청해(淸海:莞島)에 진을 설치하고 가리포(加利浦)에 성책을 쌓아 항만시설을 보수, 전략적 거점을 마련했다. 그리고 청해진 대사(淸海鎭大使)가 되자 휘하 수병을 훈련시켜 해적을 완전 소탕했다. 837년(희강왕 3) 왕위계승 다툼에서 밀려난 우징(祐徵:神武王)이 청해진에 오자 이듬해 우징과 함께 반란을 일으켜 839년 민애왕(閔哀王)을 죽이고 우징을 왕위에 오르게 하여 감의군사(感義軍使)가 되었다. 신무왕이 죽고 문성왕(文聖王)이 즉위하자 진해장군(鎭海將軍)이 되었다. 840년(문성왕 2) 일본에 무역사절을, 당나라에 견당매물사(遣唐賣物使)를 보내어 삼각무역을 했다. 845년(문성왕 7) 딸을 왕의 차비(次妃)로 보내려 했으나 군신들의 반대로 좌절되었다. 846년(문성왕 8) 그의 세력에 불안을 느낀 조정에서 보낸 자객 염장(閻長)에게 살해되었다.
● 이차돈 [異次頓, 506~527] 신라의 승려, 한국 불교사상 최초의 순교자. 자 염촉(厭觸)·염도(厭都). 거차돈(居次頓)·처도(處道)라고도 한다. 습보갈문왕(習寶葛文王)의 증손. 속성 박(朴). 법흥왕의 근신(近臣)으로서 일찍부터 불교를 신봉하였으며, 벼슬은 내사사인(內史舍人)이었다. 당시 법흥왕은 불교를 국교로 삼고자 하였으나 재래의 토착신앙에 젖은 조신(朝臣)들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이때 그는 조신들의 의견에 반대, 불교의 공인(公認)을 주장하던 끝에, 527년 순교(殉敎)를 자청하고 나서 만일 부처가 있다면 자기가 죽은 뒤 반드시 이적(異蹟)이 있으리라고 예언하였다. 예언대로 그의 잘린 목에서 흰 피가 나오고 하늘이 컴컴해지더니 꽃비가 내리는 기적이 일어나 신하들도 마음을 돌려 불교를 공인하게 되었다고 한다. 북산(北山)의 서령(西嶺:金剛山)에 장사지내고 그곳에 절이 창건되었다. 817년(헌덕왕 9) 국통(國統)·혜륭(惠隆) 등이 그의 무덤을 만들고 비를 세웠다. ▣이차돈의 죽음 신라 23대 법흥왕 때의 일이다. 서라벌에 박갈이라는 사나이가 있었다. 사람들은 그를 이차돈이라고 불렀다. 이차돈은 본래 성격이 대쪽처럼 곧은 사람이었다. 이른바 세속에 물들지 않은 곧은 성품의 소유자였으며, 22세 때에는 사인(舍人)이라는 벼슬을 갖고 있었다. 마침 신라에서는 불교가 도래되어 이에 대한 편견이 많았다. 서역에서 전래된 불교란 사교는 사람의 마음을 현혹시키는 것, 그런 것이 퍼져 나가면 나라가 망하여 절을 짓는 것은 더욱 안되는 일이라고 했다. 이 때문에 왕의 마음은 어지러웠다. 또한 이차돈 역시 불교를 깊이 믿고 있었으므로 어느 날 왕을 만나게 된 이차돈은 임금에게 아뢰었다. 그는 사찰의 건립을 방해하는 자가 있사온데 그들을 물리쳐야 한다고 아뢰었다. 이어 그는 "....폐하 신의 목을 쳐 주십시오. 왕명을 어겼다는 죄로 신의 목을 쳐 주십시오. 그렇게 하면 왕명이 준엄하다는 것을 보여 줄 수 있을 것이며 페하의 뜻대로 모든 신하가 따르게 될 것이옵니다." 이 말을 듣던 왕은 실색을 하였으나 불도를 열어 나가기 위하여서는 그런 순교가 따르지 않으면 안 된다고 주장하는 이차돈의 높은 뜻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이렇게 하여 이차돈은 왕명을 받고 절을 짓게 된다는 소문을 퍼뜨렸다. 그는 절을 지을 터를 실지로 닦으면서 사찰을 건립할 차비를 차렸다. 이런 소문을 들은 당시의 권력을 쥐고 있던 신하들은 들고 일어나서 불교 때문에 나라가 망한다고 웅성대면서 왕 앞으로 나아갔다. 정말 그가 왕명을 받고 절을 짓는 것인지 이를 확인코자 조정으로 몰려갔다. "무어라고?" 법흥왕은 크게 성이 난 듯 그 말을 듣고 펄쩍 뛰면서 이차돈을 불러들이라고 하였다. 왕 앞으로 끌려 온 이차돈은 왕의 불호령에 엎드린 채 잠자코 있었다. "네가 잠자코 있는 것을 본즉 왕명을 사칭한 것이 사실 이렸다. 당장 이차돈의 목을 쳐라!" 드디어 참수형이 내려졌다. 그래도 이차돈은 잠자코 있다가 마지막으로 이 나라에 불교가 골고루 퍼져 나가기를 바랄 뿐이라는 한마디를 남기자 순식간에 번득이는 칼 앞에 그의 목은 날아갔다. 동체의 목 언저리에서는 하얀 우유 빛 피가 솟구쳐 나왔다. 동시에 맑았던 하늘이 갑자기 어두워지며 뇌성번개천둥이 치면서 비가 쏟아졌다. 이변은 그뿐이 아니었다. 우물물이 갑자기 말라 버리는가 하면 냇물도 마르고 뭇 짐승들도 살 곳을 잃은 듯 울부짖었다. 놀래서 넋을 잃은 것은 당시에 권력을 쥐고 있던 권신들 이었다. 놀라 당황한 권신들은 그 때서야 무엇을 깨닫는 듯 하였다. 이렇게 하여 완강히 버티던 권신들은 마음 속으로 잘못을 뉘우치며 왕 앞에서 눈물을 흘리며 굴복하였다. 그로부터 신라에는 불교가 급속히 퍼져 나갔다. 이차돈의 죽음을 애통히 여긴 여러 사람들은 금강산 기슭에 절을 지었다. 그 절이 자추사, 즉 오늘의 백률사이다. 이처럼 불교를 위한 이차돈의 순교의 전말을 적은 석비는 백률사에 오랫동안 보관되어 오다가 그 후 절이 황폐해짐에 따라 다른 것들은 없어지고 오늘날 경주 박문관에 남아있는 석비만이 간신히 보관되어 있다. 내용출처 : [인터넷] http://kjtour.sorabol.ac.kr/index.htm
● 원효대사 원효. 617∼686년. 신라시대의 고승. 성은 설씨. 원효는 법명, 아명은 서당(誓幢). 648년 황룡사에서 중이 되어 각종 불전을 섭렵하며 수도에 정진하였다. 일정한 스승을 모시고 경전을 공부하지 않고 타고난 총명으로 널리 전적(典籍)을 섭렵하여 한국불교사에 길이 남는 최대의 학자이자 사상가가 되었다. 34세에 의상(義湘)과 함께 당나라로 가던중 해골에 괸 물을 마시고 "진리는 걸코 밖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서 찾아야 한다"는 깨달음을 터득하고 의상과 헤어져서 돌아왔다. 이후 태종무열왕의 둘째딸인 요석공주와의 사이에서 설총을 낳았는데 이후 스스로 복성거사(卜性居士) 소성거사(小性居士)라고 칭하고 속인행세를 하였다. 현존하는 그의 저술은 20부 22권이 있으며 특히 그의<대승기신론>은 중국 고승들이 해동소(海東疏)라하여 즐겨 인용하였고 <금강삼매경론>은 인도의 마명(馬鳴) 용수 등과 같은 고승이 아니고는 얻기 힘든 논(論)이라는 명칭을 받은 저작으로서 그의 세계관을 알 수 있는 대저슬이다. 그는 학승으로서 높이 평가될 뿐만 아니라 민중교화승으로서 당시 왕실 중심의 귀족화된 불교를 민중불교로 바꾸는데 크게 공헌하였다. 또 종파주위적인 방향으로 달리던 불교이론을 고차원적인 입장에서 회통시키려하였는데 그것을 오늘날 원효의 화쟁사상(和諍思想)이라 부르며 이것은 그의 일심사상(一心思想) 무애사상(無 思想)과 함께 원효사상을 가장 특징적으로 나타낸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그의 사상은 너무나 다양하여 헤아리기 어려우나 항상 '하나' 라는 구심점을 향하였고 화쟁과 자유를 제창하였다.
● 설총 [薛聰, ?~?] - 신라 경덕왕(景德王) 때의 학자. 자 총지(聰智). 호 빙월당(氷月堂). 경주설씨(慶州薛氏) 시조. 원효대사(元曉大師)의 아들. 어머니는 요석궁 공주(瑤石宮公主). 신라 십현(十賢)의 한 사람. 한림(翰林)을 지냈고 주로 왕의 자문역을 맡아보았다. 유학(儒學)과 문학(文學)을 깊이 연구한 학자로서 일찍이 국학(國學)에 들어가 학생들을 가르쳐 유학의 발전에 기여했으며 그가 창제한 중국 문자에 토를 다는 방법은 당시 중국 학문 섭취에 큰 도움이 되었다. 즉 ‘은·는’은 자를 썼는데 이는 ‘隱’자의 왼쪽을 딴 것이며, ‘니’는 ‘匕’자를 썼는데 이는 ‘尼’자의 아래쪽에서 딴 것이다. 또한 이두(吏讀) 문자를 집대성하였다. 《화왕계(花王戒)》를 지어 신문왕(神文王)을 충고한 일화가 있으며 1022년(현종 13) 홍유후(弘儒侯)에 추봉되고 문묘(文廟)에 배향되었고 경주의 서악서원(西岳書院)에 제향되었다.
● 최치원 [崔致遠, 857~?] 경주 최씨(慶州崔氏)의 시조. 자 고운(孤雲)·해운(海雲). 869년(경문왕 9) 13세로 당나라에 유학하고, 874년 과거에 급제, 선주(宣州) 표수현위(漂水縣尉)가 된 후 승무랑(承務郞) 전중시어사내공봉(殿中侍御史內供奉)으로 도통순관(都統巡官)에 올라 비은어대(緋銀魚袋)를 하사받고, 이어 자금어대(紫金魚袋)도 받았다. 879년(헌강왕 5) 황소(黃巢)의 난 때는 고변(高)의 종사관(從事官)으로서 〈토황소격문(討黃巢檄文)〉을 초하여 문장가로서 이름을 떨쳤다. 885년 귀국, 시독 겸 한림학사(侍讀兼翰林學士) 수병부시랑(守兵部侍郞) 서서감지사(瑞書監知事)가 되었으나, 894년 시무책(時務策) 10여 조(條)를 진성여왕에게 상소, 문란한 국정을 통탄하고 외직을 자청, 대산(大山) 등지의 태수(太守)를 지낸 후 아찬(阿飡)이 되었다. 그 후 관직을 내놓고 난세를 비관, 각지를 유랑하다가 가야산(伽倻山) 해인사(海印寺)에서 95세를 일기로 여생을 마쳤다. 글씨를 잘 썼으며 〈난랑비서문(鸞郞碑序文)〉은 신라시대의 화랑도(花郞道)를 말해주는 귀중한 자료이다. 고려 현종 때 내사령(內史令)에 추증되었으며, 문묘(文廟)에 배향, 문창후(文昌侯)에 추봉되었다. 조선시대에 태인(泰仁) 무성서원(武成書院), 경주(慶州)의 서악서원(西岳書院) 등에 종향(從享)되었다. 글씨에 〈대숭복사비(大崇福寺碑)〉〈진감국사비(眞鑑國師碑)〉 〈지증대사적조탑비(智證大師寂照塔碑)〉 〈무염국사백월보광탑비(無染國師白月光塔碑)〉 〈사산비(四山碑)〉가 있고, 저서에 《계원필경(桂苑筆耕)》 《중산복궤집(中山覆集)》 《석순응전(釋順應傳)》 《법장화상전(法藏和尙傳)》 등이 있다.
● 신숭겸 [申崇謙, ?~927] 고려 초의 무신. 초명 능산(能山). 시호 장절(壯節). 평산신씨(平山申氏)의 시조. 광해주(光海州: 春川) 출생. 918년 태봉(泰封)의 기장(騎將)으로 배현경(裵玄慶) ·홍유(洪儒) ·복지겸(卜智謙) 등과 협력, 궁예(弓裔)를 폐하고 왕건(王建)을 추대하여 고려 개국의 대업을 이루었다. 927년(태조 10) 공산(公山)에서 견훤(甄萱)의 군대에게 태조가 포위되자 김락(金樂) 등과 함께 역전하여 이를 구출하고 전사하였다. 1120년(예종 15) 예종은 그와 김락을 추도하여 《도이장가(悼二將歌)》라는 향가를 지었다. 삼중대광(三重大匡)에 태사(太師)로 추증되었으며, 태조의 묘정(廟廷)에 배향되고 곡성(谷城)의 양덕사(陽德祠), 대구광역시의 표충사(表忠祠), 춘천의 도포(道浦)서원, 평산(平山)의 태백산성사(太白山城祠)에 제향되었다. ● 최응 [崔凝, 898~932] 고려시대의 문신. 본관 황주(黃州). 시호 희개(熙愷). 오경(五經)에 밝고 문장이 뛰어나 궁예(弓裔) 밑에서 한림랑(翰林郞)으로 있으면서 신임을 얻었다. 915년(신덕왕 4) 궁예가 왕건(王建)에게 모반의 누명을 씌울 때 왕건이 변명하자, 장주(掌奏)로 그 자리에 있던 최응이 붓을 일부러 뜰에 떨어뜨리고 주우러 내려가, “굽히지 않으면 위태롭다”고 왕건에게 귀띔, 굴하게 함으로써 화를 면하게 하였다. 그 후 왕건이 즉위하자 지원봉성사(知元鳳省事)를 지내고, 이어 광평낭중(廣評郞中) ·내봉경(內奉卿) ·광평시랑(廣評侍郞) 등을 지내면서 태조의 총애를 받았다. 대광 태자태부(大匡太子太傅) ·사도(司徒)에 추증, 태조의 묘정(廟庭)에 배향되었다.
● 쌍기 [雙冀, ?~?] 중국 후주(後周)에서 고려에 귀화한 쌍철(雙哲)의 아들. 956년(광종 7) 후주의 시대리평사(試大理評事) 재임시 사신 설문우(薛文遇)를 따라 고려에 와서 신병 때문에 체류하다 귀화, 원보 한림학사(元補翰林學士)가 되었다. 958년 당(唐)나라 관리임용제도를 따라 과거제도를 창설하게 하고 수차 지공거(知貢擧)가 되었다. 이것이 한국 과거제도의 효시이다.
● 최승로 [崔承老, 927~989] 고려시대의 문신 ·재상. 본관 경주(慶州). 시호 문정(文貞). 12세 때 왕 앞에서 《논어(論語)》를 암송하여 칭찬을 듣고, 안마(鞍馬)와 예식(例食) 20석(碩)을 하사받았으며, 원봉성(元鳳省) 학생이 되는 은혜를 입었다. 학문연구에 전심, 일찍 문병(文柄)을 관장하고 982년(성종 1) 왕명에 따라 사회개혁 및 대중국관(對中國觀)의 시정 등에 관한 시무책(時務策) 28조를 올려 군제(軍制)의 개편, 과다한 불교행사의 중지, 무역의 절제, 지방관제의 확정, 관복의 제정, 승려의 횡포 엄금, 공역(貢役)의 균등, 우상 철폐, 신분제도의 확립 등 전반적인 면에 걸쳐 폐단을 시정, 새로운 제도를 제정 ·건의하여 고려왕조의 기초작업에 큰 역할을 하였다.특히 토호(土豪)들의 횡포로 인한 세공(歲貢) 수납의 폐해를 시정토록 12목(牧)을 설치, 목사(牧使)를 상주시켜 중앙집권적 체제를 갖추도록 했다. 988년 문하수시중(門下守侍中)에 승진하고 청하후(淸河侯)에 봉해졌다.
● 최항 [崔沆, ?~1024] 고려시대의 문신. 본관 경주(慶州). 자 내융(內融). 시호 절의(節義). 991년(성종 10) 문과에 장원, 우습유지제고(右拾遺知制誥) 등을 지냈다. 1009년(목종 12) 이부시랑(吏部侍郞) 때 김치양(金致陽)이 자기의 사생아를 즉위시키려는 음모를 탐지, 채충순(蔡忠順) 등과 함께 현종을 즉위시켜 음모를 막았다.1010년 정당문학(政堂文學) 때 30년간 폐지되었던 팔관회(八關會)를 부활시켰다. 1012년(현종 3) 이부상서참지정사감수국사(吏部尙書參知政事監修國史)를 거쳐, 1016년 내사시랑평장사(內史侍郞平章事)가 되고, 1020년 추충진절위사공신(推忠盡節衛社功臣)에 이어 1021년 수정공신(守正功臣)에 녹선되었다. 청렴결백하고 불심이 깊었으며, 글씨를 잘 썼다. 현종의 묘정(廟庭)에 배향되고, 1033년(덕종 2) 정광(正匡)에 추증, 정종 때에는 시중(侍中)에 가증(加贈)되고, 1067년(문종 21) 문종은 수태사 겸 중서령(守太師兼中書令)을 가증하였다. 훈요십조를 조작하였다는 의심을 받고있다.
● 서희 [徐熙, 942~998] 고려의 외교가 ·문신. 본관 이천(利川). 자 염윤(廉允). 시호 장위(章威). 960년(광종 11) 문과에 급제, 광평원외랑(廣評員外郞)에 이어 내의시랑(內議侍郞)이 되었다. 982년 송나라에 가서 중단되었던 국교를 트고 검교병부상서(檢校兵部尙書)가 되어 귀국했다. 993년(성종 12) 거란(契丹)의 내침 때 중군사(中軍使)로 북계(北界)에 출전했다. 전세가 불리해지자 조정에서는 항복하자는 안(案)과 서경(西京) 이북을 할양하고 강화하자는 안 중에서 후자를 택하기로 했으나 이에 극력 반대, 자진해서 국서를 가지고 가 적장 소손녕(蕭遜寧)과 담판을 벌였다. 이때 옛 고구려 땅은 거란 소유라는 적장의 주장에 반박, 국명으로 보아도 고려는 고구려의 후신임을 설득, 거란군을 철수시켰다. 994년 평장사(平章事)로 청천강 이북의 여진족(女眞族)을 축출, 장흥진(長興鎭) ·곽주(郭州) 등을 축성, 압록강 진취의 전략기지로 삼았다. 또 압록강 문제를 전담할 압강도구당사(鴨江渡勾當使)를 두게 했으며, 이듬해 안의진(安義鎭: 安州) 등지에 축성하고 선주(宣州: 宣川) 등지에 성보(城堡)를 쌓아 지금의 평북 일대의 국토를 완전히 회복했다. 태보내사령(太保內史令)을 지내고 신병으로 개국사(開國寺)에서 죽었다. 성종 묘정(廟庭)에 배향, 덕종 때 태사(太師)가 추증(追贈)되었다.
● 강감찬 [姜邯贊, 948~1031] 고려시대의 명장. 본관 금주(衿州:서울 관악구 봉천동), 초명 은천(殷川). 983년(성종 2)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예부시랑이 되었다. 1010년(현종 1) 거란의 성종이 40만 대군으로 침입하자, 조신(朝臣)들은 항복할 것을 주장하였으나, 이를 반대하고 하공진(河拱辰)으로 하여금 적을 설득하여 물러가게 하였다. 그 뒤 한림학사·승지·중추원사(中樞院使)·이부상서·서경유수·내사시랑평장사를 역임하였다. 1018년 거란의 소배압(蕭排押)이 10만 대군으로 침입해 오자 이듬해 서북면행영도통사로 상원수(上元帥)가 되어 군사 20만 8000명을 이끌고 흥화진(興化鎭)에서 적을 무찔렀다. 그 위에 쫓겨가는 적을 귀주에서 크게 격파하고 개선할 때 영파역(迎波驛)에서 왕의 영접을 받았으며, 검교태위(檢校太尉) 문하시랑동내사문하평장사(門下侍郞同內史門下平章事) 천수현개국남(天水縣開國男) 식읍 3백호에 봉해지고 추충협모안국공신(推忠協謀安國功臣)의 호를 받았다. 그 이듬해 벼슬을 사양하고 물러났다가 1030년 왕에게 청하여 성을 쌓고 문하시중이 되었으며, 이듬해 특진검교태사시중 천수국 개국후(開國侯)에 봉해졌다. 현종 묘정(廟庭)에 배향, 수태사 겸 중서령에 추증되었다. 저서에 《낙도교거집(樂道郊居集)》 《구선집(求善集)》 등이 있다.
● 의천 [義天, 1055~1101] 고려시대의 승려. 천태종(天台宗)의 개조(開祖). 자 의천. 시호 대각(大覺). 이름 후(煦). 문종의 넷째 아들로, 어머니는 인예왕후(仁睿王后). 11살 때 왕사(王師) 난원(爛圓) 밑에서 승려가 되어 구족계를 받고, 영통사(靈通寺)에서 난원으로부터 화엄(華嚴)의 교관(敎觀)을 배웠다. 1084년 미복(微服)으로 중국 송(宋)나라에 입국하여, 계성사(啓聖寺)에서 유성법사(有誠法師)에게 화엄 ·천태 양종의 깊은 뜻을 깨우친 뒤 여러 절을 찾아다니며 불법을 공부하였다. 1086년 귀국하여 개경(開京) 흥왕사(興王寺)의 주지가 되어 그곳에 교장도감(敎藏都監)을 두고 송 ·요 ·일본 등에서 수집해 온 불경 ·유서(儒書) 등 4,700여 권을 교정 ·간행했다. 1095년(헌종 1)에는 화폐사용을 건의하여 이를 사용하게 하였으며, 1097년 인예왕후의 원찰(願刹)인 국청사(國淸寺)가 낙성되자 주지가 되어 처음으로 천태를 강(講)하기 시작하였다. 그는 죽기 이틀 전에 국사(國師)에 책봉되었다. 고려의 불교가 교종(敎宗)과 선종(禪宗)으로 갈라져 대립하던 당시에 교선일치(敎禪一致)를 역설하고, 화엄종인 규봉(圭峰)의 학설로 고려의 교종을 통일한 후, 선종의 교리에 입각, 천태종을 개창하여 선종의 종파를 통합하고 원효(元曉)의 중심사상인 일불승(一佛乘) 회삼귀일(會三歸一)의 원리에 입각하여 고려 불교의 융합을 실현, 한국 불교 발전에 획기적인 업적을 남겼다. 유학(儒學)에도 정통하였다. 저서에 《신편제종교장총록(新編諸宗敎藏總錄)》 《석원사림(釋苑詞林)》 《대각국사문집(大覺國師文集)》 등이 있다.
● 최충 [崔沖, 984~1068] 고려의 문신. 본관 해주(海州). 자 호연(浩然). 호 성재(惺齋)·월포(月圃)·방회재(放晦齋). 시호 문헌(文憲). 1005년(목종 8) 문과에 장원, 1011년(현종 2) 우습유(右拾遺)가 되었다. 1013년 국사수찬관(國史修撰官) 때 태조에서 목종까지의 《칠대실록(七代實錄)》 편찬에 참여했다. 1033년(덕종 2) 우산기상시(右散騎常侍) 등을 지내고 1037년(정종 3) 참지정사국사수찬관(參知政事國史修撰官) 때 《현종실록(顯宗實錄)》 편찬에 참여했다. 1041년 서북로병마판사(西北路兵馬判事)로 나가 영원(寧遠) ·평로(平虜)에 진을 치고, 산성개수(山城改修)를 감독했다. 1047년(문종 1) 문하시중(門下侍中)으로서 법률관들에게 율령(律令)을 가르쳐 고려 형법의 기틀을 마련했으며, 1050년 서북면도병마사(西北面都兵馬使) 때 농번기(農繁期)의 공역(工役) 금지와 국가 재정의 낭비를 막도록 상소하여 시행했고, 동여진(東女眞)의 동태를 파악, 국방을 강화하는 등 업적을 쌓고 1053년 궤장 을 하사받았다. 나이가 많다고 사직을 상주하자 만류 조서가 내려지고 추충찬도협모동덕치리공신(推忠贊道協謀同德治理功臣)의 호와 개부의동삼사 수태사 겸 문하시중상주국치사(開府儀同三司守太師 兼 門下侍中上柱國致仕)라는 훈작을 내렸고, 1055년 내사령(內史令)을 삼은 후 다시 추충찬도좌리 동덕홍문의유보정강제공신(推忠贊道佐理同德弘文懿儒保定康濟功臣)이라는 호를 내렸다. 벼슬에서 물러나 송악산(松岳山) 아래에 사숙을 열고 많은 인재를 배출하여, 이를 문헌공도(文憲公徒)라고 했는데, 12공도(公徒) 중의 하나이다. 문장과 글씨에 능하여 해동공자(海東孔子)로 추앙받았다. 처음에는 정종의 묘정(廟庭)에, 후에 선종의 묘정에 배향되었고, 해주 문헌서원(文憲書院)에 제향되었다. 《귀법사제영석각(歸法寺題詠石刻)》(개성) 《거돈사원공국사승묘탑비(居頓寺圓空國師勝妙塔碑)》(원주) 《홍경사개창비(弘慶寺開創碑)》(직산) 등의 글씨가 남아 있고, 저서에 《최문헌공유고(崔文憲公遺稿)》가 있다. 우리나라 최초의 사립학교인 「구재학당」을 세워 많은 인재를 배출했다.
● 이자연 [李子淵, ?~1086] 고려시대의 문신. 본관 인주(仁州:仁川). 경원이씨. 시호 장화(章和). 1024년(현종 15) 문과에 급제, 덕종 때 우보궐(右補闕)·이부낭중(吏部郞中)·어사잡단(御史雜端)·우승선(右承宣)이 되고, 정종 때 급사중(給事中)·중추원지사(中樞院知事)를 거쳐 1047년(문종 1) 이부상서(吏部尙書)·참지정사(參知政事)가 되었다. 1050년 내사시랑평장사(內史侍郞平章事)에 승진되고, 세 딸이 각각 인예태후(仁睿太后)·인경현비(仁敬賢妃)·인절현비(仁節賢妃) 등으로 모두 문종의 비가 됨으로써 세력을 장악하였다. 1052년 수태위(守太尉)가 되고, 이듬해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에 이르러 공신이 되었다. 1055년 문하시중(門下侍中)·상서이부판사(尙書吏部判事) 겸 지공거(知貢擧)가 되었다. 그 후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태사(太師) 겸 중서령(中書令)·감수국사(監修國史)·상주국(上柱國)·경원군개국공(慶源郡開國公)이 되었다. 문종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 이자겸 [李資謙, ?~1126] 고려시대의 문신. 본관 인주(仁州: 지금의 仁川). 음서(蔭敍)로 합문지후(閤門祗侯)가 되고, 1108년(예종 3) 둘째 딸이 예종의 비가 되자 익성공신(翼聖功臣)에 녹훈되고, 소성군 개국백(邵城郡開國伯)에 봉해졌다. 1122년 예종이 죽자 왕위를 탐내던 왕제들을 물리치고 연소한 태자(太子: 후에 仁宗)를 즉위하게 하여 양절익명공신 중서령서경유수(中書令西京留守)가 되고 부(府)를 설치하여 요속(僚屬)을 두게 되었다. 인종을 강요하여 셋째와 넷째 딸을 비(妃)로 삼게 하고 권세와 총애를 독차지하여 자기 생일을 인수절(仁壽節)이라 하고, 매관매직과 수뢰로 축재하였으며, 1126년(인종 4)에는 군국지사(軍國知事)의 직위를 탐내어 왕의 노여움을 샀다. 이에 상장군 최탁(崔卓)·오탁(吳卓), 대장군 권수(權秀) 등이 거사하여 그를 잡으려 하자 그들을 모두 살해하였다. 이때부터 국사(國事)를 한 손에 쥐고 세도를 부리다가 이듬해 반역을 도모하여 왕비(王妃)를 시켜 수차 왕을 독살하려 하였으나 왕비의 반대로 실패하였다. 왕의 밀명을 받은 척준경(拓俊京)과 병부상서(兵部尙書) 김향(金珦)의 거사로, 영광(靈光)에 유배된 후 거기서 죽었다.
● 이자겸과 굴비의 유래
고려말 인종 때 척신 이자겸이 정주(지금의 영광)로 귀양 왔을 때의 일입니다. 특산품인 조기를 먹어 보고, 이 말린 조기에 『정주 굴비』의 네 글자를 써 붙였는데 임금에 대한 충정을 잃지 않을 것이며 결코 자기의 잘못을 용서 받기 위한 아부가 아니고 뜻을 굴하지 않겠다는 의미로 굴비(屈非)라 명명하였다는 것이 오늘날 굴비의 유래가 되었습니다. 이때부터 굴비는 임금의 수라상에 오르게 되고 관혼상제례에 빠져서는 안될 품목으로 꼽히고 있습니다. ● 윤관 [尹瓘, ?~1111] 고려시대의 명신·명장. 본관 파평(坡平). 자 동현(同玄). 시호 문숙(文肅). 문종 때 문과에 급제하고 습유(拾遺)·보궐(補闕)을 거쳐 1095년(숙종 즉위) 좌사낭중(佐司郞中)으로 요나라에 파견되어 숙종의 즉위를 알렸다. 추밀원지주사·어사대부·이부상서 등을 거쳐 1104년 추밀원사로서 동북면 행영병마도통사(東北面行營兵馬都統使)가 되어 여진을 정벌하다가 실패하였다. 윤관은 척준경의 도움으로 가까스로 살아나게 되고 척준경과 부자지간을 맺는다. 그뒤 별무반(別武班)을 창설하여 군대를 양성, 1107년(예종 2) 여진 정벌군의 원수가 되어 부원수 오연총(吳延寵)과 17만 대군을 이끌고 동북계에 출진, 이때 함주(咸州)·영주(英州)·웅주(雄州)·복주(福州)·길주(吉州)·공험진(公鎭)·숭녕(崇寧)·통태(通泰)·진양(眞陽)의 9성을 쌓아 침범하는 여진을 평정하고 이듬해 봄에 개선, 그 공으로 추충좌리평융척지진국공신(推忠佐理平戎拓地鎭國功臣)·문하시중(門下侍中)·상서이부판사(尙書吏部判事)·군국중지사(軍國重知事)가 되었다. 그뒤 여진은 9성의 환부를 요청하며 강화를 요청해오자, 조정은 9성을 지키기 어렵다 하여 여진에게 돌려주었다. 정세가 바뀌자 여진정벌의 실패로 모함을 받아 벼슬을 빼앗기고 공신호마저 삭탈되었으나, 예종의 비호로 1110년 수태보(守太保)·문하시중(門下侍中)·병부판사(兵部判事)·상주국(上柱國)·감수국사(監修國史)가 되었다. 예종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 오연총 [吳延寵, 1055~1116] 고려시대의 문신. 본관 해주(海州). 시호 문양(文襄). 문과에 급제하고 1096년(숙종 1) 요(遼)나라의 천안절(天安節)에 축하사절로 다녀와서 1098년 기거랑(起居郞)에 이어 병부낭중(郞中)이 되었다. 1100년 상서(尙書) 왕하(王)와 함께 송제(宋帝)의 등극 축하사신으로 갔다가 희귀본 《태평어람(太平御覽)》을 구해 가지고 돌아와 왕에게 칭찬을 받고 특별히 중서사인(中書舍人)에 임명되었으나 스스로 외직(外職)을 청하여 전주(全州)목사로 나가 선정을 베풀어 치적을 올렸다. 예종 초에 추밀원지사 ·어사대부 ·한림학사 ·승지를 역임하고 동북면병마사 겸 행영병마사로 나갔다가 검교사공 ·행부상서로 전임되었다. 1107년 부원수가 되어 윤관(尹瓘)과 함께 여진을 소탕하여 협모동 덕치원(協謀同德致遠)공신으로 상서좌복야 ·참지정사가 되었다. 그 후 웅주성(雄州城)에 침입한 여진을 격퇴하였으나 1109년 길주성(吉州城)에서는 실패하여 화의를 맺고 돌아왔다. 이를 재상 최홍사(崔弘嗣) 등이 문제삼아 탄핵하여 파직되었다가 다시 회복되어 1110년 수사공(守司空) ·중서시랑평장사로 기용, 수사도(守司徒) 수태위(守太尉), 감수국사 상주국(監修國史上柱國)을 거쳐서 이부 ·예부 ·병부의 판사를 지냈다.
● 척준경 [拓俊京, ?~1144] 고려시대 무신. 곡산척씨(谷山拓氏)의 시조. 집이 가난하여 학문을 닦지 못하고 무뢰배들과 교유하였다. 뒤에 계림공(林公:후에 숙종)의 종자(從者)로 있다가 추밀원 별가(樞密院別駕)가 되었다. 1104년(숙종 9) 이래 동여진(東女眞) 정벌에 여러 번 참가하여 승전, 큰 공을 세웠으며, 1117년 급사중(給事中)으로서 서북면 병마부사(西北面兵馬副使), 1122년 위위경 직문하성(衛尉卿直門下省), 이듬해 참지정사(參知政事)가 되었다. 1126년(인종 4) 이자겸(李資謙)과 함께 인종을 폐위하고자 군사를 이끌고 대궐을 침입했다가 왕의 권유로 뜻을 바꾸어, 자겸을 잡아 귀양보내고 그 공으로 추충정국협모동덕위사공신(推忠靖國協謀同德衛社功臣)이 되었다. 이후 세도를 마구 부리다가 좌정언(左正言) 정지상(鄭知常)의 탄핵을 받고 암타도(巖墮島)에 유배되었으나 곧 죽었다. 1144년 과거의 공로로 조봉대부검교호부상서(朝奉大夫檢校戶部尙書)에 기용되었다.
● 묘청 [妙淸, ?~1135] 고려시대의 승려. 정심(淨心)이라고도 한다. 서경(西京: 平壤) 출생. 검교소감(檢校少監) 백수한(白壽翰)을 통하여 근신(近臣)들과 접촉, 도참설(圖讖說)을 이용하여 중앙정계에 진출하였다. 1127년(인종 5) 왕실 고문으로 추대되자 왕의 서경 거둥을 주청하여 실현하고, 당시의 혼란한 내외정세를 이용, 개경(開京) 출신 구신(舊臣)들의 세력을 꺾기 위하여 서경천도(遷都)를 획책하였다. 1129년 신궁을 낙성, 칭제건원(稱帝建元)을 청하고 금나라 공략 등을 건의하였으나 김부식(金富軾) 등 사대주의자들의 반대로 좌절되었다. 1134년 삼중대통지 누각원사(三重大統知漏刻院事)에 오르고 왕에게 천도를 계속 주청하였으나 불가능해지자 1135년 서경에 기반을 두고 국호를 대위(大爲), 연호를 천개(天開)라 하여 천견충의군(天遣忠義軍)을 조직, 반란을 일으켰다. 그러나 반란군은 원수(元帥) 김부식에게 섬멸되고 묘청 자신은 부하 조광(趙匡)에게 피살되어 개경에 효시되었다.
●정지상 [鄭知常, ?~1135] 고려시대의 문신·시인. 본관 서경(西京). 호 남호(南湖). 초명 지원(之元). 서경 출생. 1114년(예종 9) 문과에 급제, 1127년(인종 5) 좌정언(左正言)으로서 척준경(拓俊京)을 탄핵하여 유배되게 하고, 1129년 좌사간(左司諫)으로서 시정(時政)에 관한 소를 올렸다. 음양비술(陰陽術)을 믿어 묘청(妙淸)·백수한(白壽翰) 등과 삼성(三聖)이라는 칭호를 받으면서, 서울을 서경으로 옮길 것과 금(金)나라를 정벌하고 고려의 왕도 황제로 칭할 것을 주장하였다. 1130년 지제고(知制誥)로서 《산재기(山齋記)》를 지었으며, 뒤에 기거랑(起居郞)이 되었다. 1135년(인종 13) 묘청의 난 때 이에 관련된 혐의로 김안(金安)·백수한과 함께 김부식(金富軾)에게 참살되었다. 시(詩)에 뛰어나 고려 12시인의 한 사람으로 꼽혔으며 역학(易學)·불전(佛典)·노장철학(老莊哲學)에도 조예가 깊었다. 그림·글씨에도 능했으며 저서로는 《정사간집(鄭司諫集)》이 있다. 送人 정지상의 시 雨歇長堤草色多 送君南浦動悲歌 大同江水何時盡 別淚年年添綠波 비 개인 긴 강둑 위론 풀빛이 솟아 오고 님 보낸 남포에선 슬픈 노래만이 잔잔하고 대동강 물이 언제나 마르련가 해마다 저 강물에 이별 눈물만 더하는데
● 김부식 [金富軾, 1075~1151] 고려시대의 문신 ·학자. 본관 경주. 자 입지(立之). 호 뇌천(雷川). 시호 문열(文烈). 신라 왕실의 후예로서 경주의 주장(州長)인 위영(魏英)의 증손자. 국자좨주 좌간의대부(國子祭酒左諫議大夫) 근(覲)의 셋째 아들. 네 형제가 모두 과거로 진출하였으며, 그 가운데 부일(富佾) ·부식 ·부철(富轍)은 문한(文翰)으로 이름을 날렸다. 1096년(숙종 1) 과거에 급제하였으며 안서대도호부(安西大都護府)의 사록참군사(司錄參軍事)에 임명되었다가 직한림원(直翰林院)을 거쳐 중서사인이 되었다. 인종 초에 이자겸이 왕의 외조부이자 장인이라는 이유로 권력을 마음대로 하자 이를 저지하였으며, 이자겸이 제거된 뒤 1126년(인종 4) 어사대부가 되었다가 호부상서 한림학사승지를 역임하였다. 1130년 정당문학 겸 수국사로 승진하였고 이어 검교사공 참지정사가 되었으며, 1132년에 수사공 중서시랑동중서문하평장사(守司空中書侍郞同中書門下平章事)에 이르렀다. 당시에 묘청(妙淸) 등 서경세력이 천도를 주장하면서 난을 일으키자 원수로서 삼군(三軍)을 지휘하였으며, 출정하기 전에 먼저 개경에 있던 정지상(鄭知常) ·김안(金安) ·백수한(白壽翰) 등을 죽였다. 장기전을 벌이면서 1년 2개월 만에 반란군을 진압하였고, 그 결과 수충정난정국공신(輸忠定難靖國功臣)에 책록되고 검교태보 ·수태위 ·문하시중 ·판상서이부사 ·감수국사 ·상주국 겸 태자태보(檢校太保守太尉門下侍中判尙書吏部事監修國事上柱國兼太子太保)에 승진하였다. 1138년에 검교태사 ·집현전대학사 ·태자태사(檢校太師集賢殿太學士太子太師)를 더하였다. 이어 함께 전공을 세운 윤언이(尹彦)와 개인적인 불화가 생겨 그가 칭제건원(稱帝建元)을 주장한 것을 탄핵하여 양주방어사(梁州防禦使)로 쫓아냈다가 뒤에 사면되자, 정치적 보복이 두려워 1142년에 사직하였다. 인종은 그의 사직을 허락하면서 동덕찬화공신호(同德贊化功臣號)를 더하여 내렸다. 관직에서 물러난 뒤 인종의 명령을 받아 《삼국사기》를 편찬하면서 체재를 작성하고 사론(史論)을 직접 썼으며, 1145년에 완성하였다. 한림원에 있을 때에는 사륙변려문체(四六儷文體)에서 당 ·송 시대의 고문체(古文體)를 수용하려 하였다. 《고려도경(高麗圖經)》의 저자 서긍(徐兢)은 그를 고금에 밝고 글을 잘 짓는 박학강식한 사람이라고 평하였다. 의종이 즉위한 뒤 낙랑군 개국후에 봉하고 《인종실록》을 편찬하게 하였다. 죽은 후 1153년 중서령이 추증되었으며 인종 묘정(廟庭)에 배향되었다. 문집 20여 권을 남겼으나 전하지 않는다.
● 정함 [?~?] 고려 의종 때의 환관. 인종 때 내시서두공봉관(內侍西頭供奉官)이 되고 의종의 유모를 처로 삼았는데, 의종이 즉위한 뒤 내전숭반(內殿崇班)이 되었다. 1151년(의종 5)에 왕비를 덕흥공주(德興宮主)에 봉하고 벌인 잔치에서 왕이 내린 서대(犀帶)를 불법적으로 띠고 나오자 대관과 마찰했으며, 권지합문지후(權知閤門祗候)에 임명되자 대관이 환관으로 조관(朝官)에 참여한 적이 없다고 하여 철회시켰다. 이에 대한 보복으로 산원(散員) 정수개(鄭壽開)를 시켜 대성(臺省)이 왕의 동생 대령후 경(暻)을 추대한다고 무고하고 외척과 조신(朝臣)이 대령후와 연결되었다고 참소하였으나, 무고임이 밝혀져 대간을 모함했다는 죄로 탄핵을 받고 파직되었다. 다시 내시에 복직되었는데, 1156년 낭장 최숙청(崔淑淸)이 정함을 제거하려다가 유배되었고, 다음해에 권지합문지후에 다시 임명되어 재상과 간관(諫官)에게 임명장에 서명하기를 강요했으나 결국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의종의 측근으로 계속 성장하여 왕광취(王光就)·백자단(白子端) 등과 함께 권세를 휘두르다가, 1158년 신숙(申淑)의 파면 요구로 잠시 파면되었다가 다음해에 복직되었다.
● 정중부 [鄭仲夫, 1106~1179] 고려시대의 무신. 본관 해주(海州). 인종 때 견룡대정(牽龍隊正)이 되고, 의종 초 교위(校尉)를 거쳐 상장군(上將軍)을 지냈다. 1164년(의종 18) 왕이 무신을 차별하는 데 불만을 품고, 1170년 왕의 보현원(普縣院) 거둥 때 대장군 이소응(李紹膺)이 문신 한뇌(韓賴)에게 구타당하자 격분, 문신을 죽이고 정권을 장악하였다. 이어 의종을 폐하고 왕제 익양공(翼陽公) 호(晧:明宗)를 즉위시키는 한편, 의종과 태자를 유배시켰다. 이의방(李義方)·이고(李高)와 함께 전왕의 사제(私第)를 분점(分占), 스스로 참지정사(參知政事)가 되고 벽상공신(壁上功臣)에 올랐으며, 이어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문하평장사·서북면판사·행영병마 겸 중군병마판사 등을 지냈다. 1173년 동북면 병마사간의대부(諫議大夫) 김보당(金甫當)이 의종의 복위와 무신의 집권을 타도하려고 난을 일으키자, 이를 토벌하고 의종을 살해하였다. 이듬해 서경유수 조위총(趙位寵)이 난을 일으키자 토벌, 문하시중이 되고 1175년 궤장(杖)을 하사받은 뒤 치사(致仕)하였다. 1179년 같은 무신인 경대승(慶大升)에게 일가족이 몰살되었다.
● 이의방 [李義方, ?~1174] 고려시대의 무신. 본관 전주(全州). 1170년(의종 24) 견룡행수(牽龍行首)로서 정중부(鄭仲夫) ·이고(李高)와 함께 무신란을 일으켰으며, 의종을 폐위하고 명종을 세운 뒤에 대장군 ·전중감(殿中監) 겸 집주(執奏)에 임명되고 벽상공신(壁上功臣)에 책록되었다. 이고가 정권을 마음대로 하려 하자 1171년(명종 1) 그를 제거하고 정권을 장악하고 중방(重房)을 강화하여 고위 무신들을 끌어들이는 한편, 원래 문신들만 임명했던 지방관에 하급 무신을 임명하여 그들을 회유하는 정책을 실시하였다. 1173년 문신 김보당(金甫當)이 의종의 복위를 내세워 난을 일으키자 이를 토벌하기 위한 방편으로 이의민(李義旼)을 통해 의종을 살해하였고, 위위경 흥위위 섭대장군 지병부사(衛尉卿興威衛攝大將軍知兵部事)가 되었다. 1174년에는 귀법사(歸法寺)의 승려 100여 명이 공격해 오자 이들을 물리쳤고,중광사(重光寺) ·홍호사(弘護寺) 등의 승려 2000여 명이 자신을 죽이려 하자 이들을 죽이고 여러 절을 불사르며 재산을 빼앗았다. 이때 서북면에서 조위총(趙位寵)이 난을 일으키자 상서(尙書) 윤인미(尹仁美) 등 서경 출신을 함부로 살해하여 인심을 잃었으며, 윤인첨(尹鱗瞻)을 원수로 삼아 토벌했으나 실패하였다. 이 상황에서 좌승선에 임명되자 정권을 강화하기 위해 딸을 바쳐 태자비를 삼았는데, 이는 오히려 정치적 입장을 더욱 고립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그래서 조위총 토벌을 위한 두번째 토벌군이 출동한 가운데 정중부의 아들 균(筠)과 승려 종참(宗)에게 살해되었으며, 형 준의(俊義)를 비롯하여 같은 세력인 고득원(高得元) 등이 죽었으며, 그의 딸도 태자비에서 축출되었다.
● 경대승 [慶大升, 1154~1183] 고려시대의 장군.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 진(珍)의 아들로 15세에 음보(蔭補)로 교위(校尉)가 되고, 뒤에 장군에 이르렀다. 부친인 진이 부당하게 모은 재산을 모두 군대에 헌납하고 청렴한 생활을 하였다.무인(武人)이 집권한 이후 횡포해진 무인 집권자들을 제거하기로 결심하고, 1179년(명종 9)에 허승(許升) 등과 함께 앞서 1170년 무신의 난을 일으켰던 주모자인 정중부(鄭仲夫)·송유인(宋有仁) 등의 부자(父子)를 죽였다. 그후 허승·김광립(金光立) 등이 자기의 공(功)을 믿고 많은 폐단을 끼치자, 다시 이들을 잡아죽이고 정권을 장악하였다. 신변보호를 위해 도방(都房)을 설치하였고, 국정을 집중한 군정(軍政)기관으로서 중방제(重房制)를 실시하였으나, 30세로 병사하였다. ● 이의민 [李義旼, ?~1197] 고려시대의 무신. 본관 경주(慶州). 천민 출신으로 기골이 장대하여 안찰사(按察使) 김자양(金子陽)에게 발탁되어 경군(京軍)에 편입되었다. 수박(手搏)을 잘 하여 의종의 총애를 받아 별장(別將)이 되었다. 1170(의종 24) 정중부(鄭仲夫)의 난에 가담하여 공을 세워 중랑장(中郞將)이 되고 이어 장군에 승진하였다. 1173년(명종 3) 김보당(金甫當)·장순석(張純錫) 등의 의종 복위음모를 평정한 공으로 대장군이 되었다. 이듬해 조위총(趙位寵)의 난을 평정하여 상장군에 올랐다. 1178년 경대승(慶大升)이 정중부를 죽이자 그를 두려워하여 병을 핑계로 고향 경주에 은거해 있다가 경대승이 죽은 후 공부상서(工部尙書)·중서문하평장사를 거쳐, 1191년 병부판사(兵部判事)에 이르렀다. 참위설(讖緯說)을 믿고 역모(逆謀)할 뜻으로 명사들을 포섭하고 적도(賊徒) 김사미(金沙彌)·효심(孝心) 등과 은밀히 결탁하였으며, 벼슬을 팔고 백성의 재물을 착취하는 등 관기를 문란하게 하다가 미타산(彌陀山) 별장에서 최충헌(崔忠獻)에게 살해되었다.
● 최충헌 [崔忠獻, 1149~1219] 고려 무신정권기의 집권자. 본관 우봉(牛峰). 초명 난(鸞). 시호 경성(景成). 음보(蔭補)로 양온령(良令)이 되고, 1174년(명종 4) 조위총(趙位寵)의 난을 토벌, 별초도령(別抄都令)에 올랐다. 1196년 동생 충수(忠粹)와 함께 권신 이의민(李義旼)을 죽이고 정권을 장악, 폐정(弊政)의 개혁을 위한 봉사십조(封事十條)를 왕에게 올렸다. 이어 왕의 측근을 몰아내고 좌승선(左承宣)을 거쳐 어사대지사(御史臺知事)가 되었으며, 1197년 충성좌리공신(忠誠佐理功臣)에 봉해졌다. 그러나 왕이 봉사십조를 이행하지 않자 창락궁(昌樂宮)에 유폐시킨 뒤 평량공(平凉公) 민(旼:神宗)을 왕위에 앉히고 정국공신(靖國功臣) 삼한대광대중대부(三韓大匡大中大夫) 상장군주국(上將軍柱國)이 되어 최씨 무단정권을 확립했다. 같은 해 딸을 태자(太子:熙宗)의 비(妃)로 만들려는 동생 충수와 대립, 충수를 죽이고 독재정권을 더욱 강화했다. 1198년(신종 1) 사노(私奴) 만적(萬積)의 난을 토벌하고, 1199년 병부상서이부지사(兵部尙書吏部知事)가 되어 군사권 ·인사권을 장악했다. 같은 해 다시 김준거(金俊)의 난을 토벌하고 1202년 삼중대광(三重大匡) 수대위상주국(守大尉上柱國)이 되었다. 이어 도방(都房)을 설치, 신변을 보호케 했으며 추밀원사(樞密院使) ·이병부상서(吏兵部尙書) ·어사대부(御史大夫)로서 경주별초군(慶州別抄軍)의 반란을 진압했다. 1204년 신종을 폐하고 태자(太子:熙宗)를 옹립, 벽상삼한삼중대광(壁上三韓三重大匡) 개부의동삼사수태사(開府儀同三司守太師) 문하시랑동중서문하평장사(門下侍郞同中書門下平章事) 상장군상주국(上將軍上柱國) 병부어대판사(兵部御史臺判事) 태자태사(太子太師)에 올랐다. 1209년 학자 이규보(李奎報)를 발탁, 무신정권으로 피폐해진 문운(文運)을 재흥시키려고 힘썼는데, 청교역(靑郊驛)의 관리들의 자기네 부자살해 미수사건이 생기자 영은관(迎恩館)에 교정도감(敎定都監)을 설치, 실질적인 무인정권의 중앙기관으로서 국정 전반을 감독케 했다. 1211년 내시 왕준명(王濬明) 등의 음모로 죽을 고비를 넘기고 살아난 뒤, 왕을 폐하고 한남공(漢南公) 정(貞:康宗)을 즉위시켰다. 1212년 문경무위향리조안공신(文經武緯嚮理措安功臣)에 책봉되고, 1213년 강종이 죽자 고종을 즉위시켰다. 1217년(고종 4) 자신을 암살하려는 흥왕사(興王寺) 승려들의 음모를 적발, 처형한 후로는 백성들에 대한 횡포가 심해지기는 했으나 민란을 잘 진압하여 기강의 확립, 풍속의 순화, 문운의 재흥 등 치적을 많이 쌓았다.
● 이규보 [李奎報, 1168~1241] 고려시대의 문신·문인. 본관 황려(黃驪:驪興). 자 춘경(春卿). 호 백운거사(白雲居士)·지헌(止軒)·삼혹호선생(三酷好先生). 초명 인저(仁). 시호 문순(文順). 1189년(명종 19) 사마시(司馬試), 이듬해 문과에 급제, 1199년(신종 2) 전주사록(全州司錄)이 되고 1202년(신종 5) 병마녹사 겸 수제(兵馬錄事兼修製)가 되었다. 1207년(희종 3) 최충헌(崔忠獻)에 의해 권보직한림(權補直翰林)으로 발탁, 참군사(參軍事)·사재승(司宰丞)·우정언(右正言)을 거쳐 1219년(고종 6) 좌사간(左司諫)으로서 지방관의 죄를 묵인하여 계양도호부부사(桂陽都護府副使)로 좌천되었다. 1220년(고종 7) 예부낭중(禮部郞中)·한림시강학사(翰林侍講學士)를 거쳐 30년 위위시판사(衛尉寺判事)가 되었으나, 팔관회(八關會) 행사에 잘못을 저질러 한때 위도(蝟島)에 유배되었으며 1232년(고종 19) 비서성판사(書省判事)에 승진하고, 이듬해 집현전대학사(集賢殿大學士)·정당문학(政堂文學)·참지정사(參知政事)·태자소부(太子少傅) 등을 거쳐 1237년(고종 24)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감수국사(監修國事)·태자대보(太子大保)로 벼슬에서 물러났다. 호탕 활달한 시풍(詩風)은 당대를 풍미했으며, 특히 벼슬에 임명될 때마다 그 감상을 읊은 즉흥시는 유명하다. 몽골군의 침입을 진정표(陳情表)로써 격퇴한 명문장가였다. 시·술·거문고를 즐겨 삼혹호선생이라 자칭했으며, 만년에 불교에 귀의했다. 저서에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 《백운소설(白雲小說)》 《국선생전(麴先生傳)》 등이 있으며, 작품으로 시(詩)에 〈천마산시(天摩山詩)〉 〈모중서회(慕中書懷)〉 〈고시십팔운(古詩十八韻)〉 〈초입한림시(初入翰林詩)〉 〈공작(孔雀)〉 〈재입옥당시(再入玉堂詩)〉〈초배정언시(初拜正言詩)〉 〈동명왕편(東明王篇)〉, 문(文)에〈모정기(茅亭記)〉〈대장경각판군신기고문(大藏經刻板君臣祈告文)〉 등이 있다.
● 일연 [一然, 1206~1289] 고려시대의 승려 ·학자. 속성 김(金). 이름 견명(見明). 자 회연(晦然)·일연(一然). 호 무극(無極)·목암(睦庵). 시호 보각(普覺). 탑호 정조(靜照). 경상북도 경산(慶山) 출생. 1214년(고종 1) 9세에 전라도 해양(海陽:현 광주) 무량사(無量寺)에 들어가 대웅(大雄) 밑에서 학문을 닦다가 1219년 승려가 되었다. 1227년 승과(僧科)에 급제, 1237년 삼중대사(三重大師), 1246년 선사(禪師), 1259년 대선사(大禪師)가 되었다. 1261년(원종 2) 왕명으로 선월사(禪月寺) 주지가 되어 목우(牧牛)의 법을 이었다. 1268년 운해사(雲海寺)에서 대덕(大德) 100여 명을 모아 대장경 낙성회(大藏經落成會)를 조직, 그 맹주가 되었다. 1277년(충렬왕 3) 운문사(雲門寺) 주지가 되어 왕에게 법을 강론, 1283년 국존(國尊)으로 추대되고 원경충조(圓經沖照)의 호를 받았다. 1284년 경상북도 군위(軍威)의 인각사(麟角寺)를 중건하고 궁궐에서 구산문도회(九山門都會)를 열었다. 탑과 비는 인각사에, 행적비는 운문사에 있다. 저서 《삼국유사(三國遺事)》는 한국 고대 신화와 설화 및 향가를 집대성한 책으로, 고대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이다. 그 밖에 《어록(語錄)》 《계승잡저(界乘雜著)》 《중편조동오위(重編曹洞五位)》 《조도(祖圖)》 《대장수지록(大藏須知錄)》 《제승법수(諸僧法數)》 《조정사원(祖庭事苑)》 《선문점송사원(禪門頌事苑)》 등이 있다.
● 조일신 [趙日新, ?~1352] 고려시대의 역신. 본관 평양(平壤). 초명(初名) 흥문(興問). 찬성사 위(瑋)의 아들. 공민왕이 세자 때 원나라에서 시종(侍從)하고, 공민왕이 돌아와 즉위하자 찬성사(贊成事)가 되고, 이듬해 1등공신에 책록되어 왕에게 정방(政房)의 복구를 요구하고, 도평의녹사(都評議錄事) 김덕린(金德麟) 등 충신들을 제거했다. 삼사판사(三司判事)에 올라 좌리공신(佐理功臣)에 책록되어 국권을 한손에 쥐고 친원(親元) 세력가인 기철(奇轍) ·기원(奇轅) 등을 습격하여 기원을 살해하였다. 왕이 있는 성입동(星入洞) 이궁(離宮)을 포위, 직숙위(直宿衛)를 죽이고, 왕을 위협하여 우정승(右政承)이 되고, 정천기(鄭天起)를 좌정승으로 하는 등, 그 일당을 요직에 안배하였다. 자기의 죄를 감추려고, 동지인 최화상(崔和尙)을 죽이고 함께 거사한 장승량(張升亮) 등 8,9명을 효수(梟首)한 다음 정천기는 투옥시키고, 스스로 좌정승에 찬화안사공신(贊化安社功臣)이 되었다. 그러나 왕의 밀지를 받은 삼사좌사(三司左使) 이인복(李仁復)이 김첨수(金添壽)를 시켜 참살하였다.
● 이제현 [李齊賢, 1287~1367] 고려시대의 문신 ·학자. 본관 경주(慶州). 자 중사(仲思). 호 익재(益齋) ·역옹(翁) ·실재(實齋). 초명 지공(之公). 시호 문충(文忠). 1301년(충렬왕 27) 성균시(成均試)에 장원하고 이어 문과에 급제했으며 1303년 권무봉선고판관(權務奉先庫判官)과 연경궁녹사(延慶宮錄事) 등을 지냈다. 1308년 예문춘추관(藝文春秋館)에 등용되고 제안부직강(齊安府直講)을 역임했다. 이듬해 사헌규정(司憲糾正), 1310년(충선왕 2) 선부산랑(選部散郞), 이듬해 전교시승(典校寺丞) ·삼사판관(三司判官) 등을 거쳐 1312년 서해도안렴사(西海道按廉使)가 되고 성균악정(成均樂正) ·풍저창사(豊儲倉使)를 지냈다. 이듬해 내부부령(內府副令) 풍저감두곡(儲監斗斛)을 거쳐 1314년 원나라에 가서 조맹부(趙孟) 등과 고전을 연구하였다. 1316년 진현관제학(進賢館提學)이 되고, 1320년 지밀직사(知密直事)에 올라 단성익찬공신(端誠翊贊功臣)이 되었다. 같은 해 충선왕이 모함으로 유배되자 원나라에 그 부당함을 밝혀 1323년 풀려나게 하였다. 이듬해 광정대부밀직사사(匡靖大夫密直司使)에 승진, 1325년 추성양절공신(推誠亮節功臣)이 되고 정당문학(政堂文學)으로 김해군(金海君)에 봉해졌다. 1336년 삼중대광영예문관사(三重大匡領藝文館事)에 오르고 1339년 심양왕(瀋陽王) 고(暠)가 원나라에 충숙왕을 모함하자 연경(燕京)에 가서 해명하고 돌아왔다. 1343년(충혜왕 복위 4) 원나라 사신이 왕을 잡아가자 사면을 요청했고, 이듬해 삼사판사(三司判事)에 복직, 서연관(書筵官)이 되었다. 1348년(충목왕 4) 왕이 죽자 제조경사도감(提調經史都監)으로 원나라에 가서 충정왕의 승습(承襲)을 요청했고, 1351년 공민왕이 즉위하자 우정승(右政丞) ·권단정동성사(權斷征東省事)가 되고 도첨의정승(都僉議政丞)을 지냈다. 이듬해 동덕협의찬화공신(同德協議贊化功臣)에 오르고 1353년 사직했다가 이듬해 우정승에 재임, 1356년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올랐다. 그 후 사직하고 학문 연구에 전념하다가 1362년 홍건적의 침입 때 왕을 청주(淸州)로 호종, 계림부원군(鷄林府院君)에 봉해졌다. 당대의 명문장가로 정주학(程朱學)의 기초를 확립하였고, 조맹부의 서체(書體)를 도입하여 유행시켰다. 공민왕 묘정(廟庭)에 배향, 경주의 귀강서원(龜岡書院)과 금천(金川)의 도산서원(道山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에 《효행록(孝行錄)》 《익재집(益齋集)》 《역옹패설(翁稗說)》 《익재난고(益齋亂藁)》 등이 있다.
● 이색 [李穡, 1328~1396] 고려 말의 문신 ·학자. 본관 한산(韓山). 자 영숙(潁叔). 호 목은(牧隱). 시호 문정(文靖). 이제현(李齊賢)의 문하생. 삼은(三隱)의 한 사람이다. 1341년(충혜왕 복위 2) 진사(進士)가 되고, 1348년(충목왕 4) 원(元)나라에 가서 국자감(國子監)의 생원이 되어 성리학을 연구했다. 1351년(충정왕 3) 부친상(父親喪)으로 귀국, 1352년(공민왕 1) 전제(田制)개혁 ·국방강화 ·교육진흥 ·불교억제 등 당면정책을 왕에게 건의했다. 1353년 향시(鄕試)와 정동행성(征東行省)의 향시에 장원 급제하였고 1354년 서장관(書狀官)으로 원나라에 가서 회시(會試)에 장원, 전시(殿試)에 차석으로 급제, 국사원편수관(國史院編修官) 등을 지내다가 귀국하였다. 이듬해 다시 원나라의 한림원(翰林院)에 등용되었다. 1356년 귀국하여 이부시랑(吏部侍郞) 등 인사행정을 주관, 정방(政房)을 폐지하였고, 이듬해 우간의대부(右諫議大夫) 때는 3년상(三年喪)을 제도화했다. 1361년 홍건적(紅巾賊)의 침입으로 왕의 남행(南幸)을 호종, l등공신이 된 후 좌승선(左承宣) 등 여러 관직을 지냈다. 1367년 대사성(大司成)이 되자 성균관의 학칙을 새로 제정하고 김구용(金九容) ·정몽주(鄭夢周) ·이숭인(李崇仁) 등과 강론, 성리학 발전에 공헌했다. 1373년 한산군(韓山君)에 책봉된 후에는 신병으로 관직을 사퇴했으나 1375년(우왕 l) 우왕의 청으로 다시 정당문학(政堂文學) 등을 역임했다. 1377년 추충보절동덕찬화공신(推忠保節同德贊化功臣)의 호를 받고 우왕의 사부(師傅)가 되었다. 1388년 철령위(鐵嶺衛) 사건에는 화평을 주장하였고 이듬해 위화도회군(威化島回軍)으로 우왕이 강화로 유배되자 조민수(曺敏修)와 함께 창(昌)을 즉위시켜 이성계(李成桂)의 세력을 억제하려 하였으나 이성계가 득세하자 장단(長湍) ·함창(咸昌) 등지에 유배되었다. 1391년(공양왕 3) 석방되어 한산부원군(韓山府院君)에 책봉되었으나 다시 여흥(驪興) 등지에 유배되었다가 풀려났다. 조선 개국 후 인재를 아낀 태조가 1395년 한산백(韓山伯)에 책봉했으나 사양, 이듬해 여강(驪江)으로 가던 중 죽었다. 문하에 권근(權近) ·김종직(金宗直) ·변계량(卞季良) 등을 배출, 학문과 정치에 커다란 발자취를 남겼다. 저서에 《목은시고(牧隱詩藁)》 《목은문고(牧隱文藁)》가 있다.
● 정몽주 [鄭夢周, 1337~1392] 고려 말기의 문신·학자. 본관 영일(迎日). 자 달가(達可). 호 포은(圃隱). 초명 몽란(夢蘭)·몽룡(夢龍). 시호 문충(文忠). 영천(永川) 출생. 1357년(공민왕 6) 감시에 합격하고 1360년 문과에 장원, 예문검열(藝文檢閱)·수찬·위위시승(衛尉寺丞)을 지냈으며, 1363년 동북면도지휘사 한방신(韓邦信)의 종사관으로 여진족(女眞族) 토벌에 참가하고 1364년 전보도감판관(典寶都監判官)이 되었다. 이어 전농시승(典農寺丞)·예조정랑 겸 성균박사(禮曹正郞兼成均博士)·성균사예(成均司藝)를 역임하고, 1371년 태상소경보문각응교 겸 성균직강(太常少卿寶文閣應敎兼成均直講) 등을 거쳐 성균사성(成均司成)에 올랐으며, 이듬해 정사(正使) 홍사범(洪師範)의 서장관(書狀官)으로 명(明)나라에 다녀왔다. 1376년(우왕 2) 성균대사성(成均大司成)으로 이인임(李仁任) 등이 주장하는 배명친원(排明親元)의 외교방침을 반대하다 언양(彦陽)에 유배, 이듬해 풀려나와 사신으로 일본 규슈[九州]의 장관에게 왜구의 단속을 청하여 응낙을 얻고 잡혀간 고려인 수백 명을 귀국시켰다. 1379년 전공판서(典工判書)·진현관제학(進賢館提學)·예의판서(禮儀判書)·예문관제학·전법판서·판도판서를 역임, 이듬해 조전원수(助戰元帥)가 되어 이성계(李成桂) 휘하에서 왜구토벌에 참가하였다. 1383년 동북면조전원수로서 함경도에 침입한 왜구를 토벌, 다음해 정당문학(政堂文學)에 올라 성절사(聖節使)로 명나라에 가서 긴장상태에 있던 대명국교(對明國交)를 회복하는 데 공을 세웠다. 1386년 동지공거(同知貢擧)가 되고 이듬해 다시 명나라에 다녀온 뒤 수원군(水原君)에 책록되었다. 1389년(창왕 1) 예문관대제학·문하찬성사가 되어 이성계와 함께 공양왕을 옹립하고, 1390년(공양왕 2) 벽상삼한삼중대광(壁上三韓三重大匡)·수문하시중(守門下侍中)·도평의사사병조상서시판사(都評議使司兵曹尙瑞寺判事)·경영전영사(景靈殿領事)·우문관대제학(右文館大提學)·익양군충의백(益陽郡忠義伯)이 되었다. 이성계의 위망(威望)이 날로 높아지자 그를 추대하려는 음모가 있음을 알고 이성계 일파를 숙청할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1392년 명나라에서 돌아오는 세자를 마중 나갔던 이성계가 사냥하다가 말에서 떨어져 황주(黃州)에 드러눕자 그 기회에 이성계 일파를 제거하려 했으나 이를 눈치챈 방원(芳遠:太宗)의 기지로 실패, 이어 정세를 엿보려고 이성계를 찾아보고 귀가하던 도중 선죽교(善竹矯)에서 방원의 부하 조영규(趙英珪) 등에게 격살되었다. 의창(義倉)을 세워 빈민을 구제하고 유학을 보급하였으며, 성리학에 밝았다. 《주자가례(朱子家禮)》를 따라 사회윤리와 도덕의 합리화를 기하며 개성에 5부 학당(學堂)과 지방에 향교를 세워 교육진흥을 꾀하는 한편 《대명률(大明律)》을 참작, 《신율(新律)》을 간행하여 법질서의 확립을 기하고 외교와 군사면에도 깊이 관여하여 국운을 바로잡으려 했으나 신흥세력인 이성계 일파의 손에 최후를 맞이하였다. 시문에도 뛰어나 시조 〈단심가(丹心歌)〉 외에 많은 한시가 전해지며 서화에도 뛰어났다. 고려 삼은(三隱)의 한 사람으로 1401년(태종 1) 영의정에 추증되고 익양부원군(益陽府院君)에 추봉되었다. 중종 때 문묘(文廟)에 배향되었고 개성의 숭양서원(崧陽書院) 등 11개 서원에 제향되었다. 문집에 《포은집(圃隱集)》이 있다.
● 길재 [吉再, 1353~1419] 고려 말, 조선 초의 성리학자. 본관 해평(海平). 자 재부(再父). 호 야은(冶隱) ·금오산인(金烏山人). 시호 충절(忠節). 금주지사 (錦州知事) 원진(元璡)의 아들. 구미 출생. 1363년 냉산(冷山) 도리사(桃李寺)에서 처음 글을 배웠으며, 1370년 박분(朴賁)에게 《논어》 《맹자》를 배우면서 성리학을 접하였다. 관료로 있던 아버지를 만나러 개경에 갔다가 이색(李穡) ·정몽주(鄭夢周) ·권근(權近) 등의 문하에서 학문을 익혔다. 1374년 생원시(生員試)에, 1383년(우왕 9) 사마감시(司馬監試)에 합격하고, 그해 중랑장 신면(申勉)의 딸과 결혼하였다. 1386년 진사시에 합격, 청주목(淸州牧) 사록(司錄)에 임명되나 부임하지 않았고, 다음해 성균학정(成均學正)이 되었다가, 1388년에 순유박사(諄諭博士)를 거쳐 성균박사(成均博士)로 승진하였다. 1389년(창왕 1) 문하주서(門下注書)에 임명되었으나, 이듬해 고려의 쇠망을 짐작하여 늙은 어머니에 대한 봉양을 구실로 사직하였으며, 고향으로 가는 길에 장단에 있던 이색(李穡)을 만나기도 하였다. 1390년 계림부(鷄林府)의 교수가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으며, 우왕의 죽음을 듣고 마음으로 3년상을 행하였다. 조선이 건국된 뒤 1400년(정종 2)에 이방원(李芳遠)이 태상박사(太常博士)에 임명하였으나 두 임금을 섬기지 않겠다는 뜻을 말하며 거절하였다. 1402년(태종 2)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불교식 장례법을 따르지 않고 성리학적 가례(家禮)를 따랐다. 세종이 즉위한 뒤 길재의 절의를 기리는 뜻에 그 자손을 서용하려 하자, 자신이 고려에 충성한 것처럼 자손들은 조선에 충성해야 할 것이라며 자손들의 관직 진출을 인정해주었다. 어머니에 대한 효도가 지극하며 세상의 영달에 뜻을 두지 않고 성리학을 연구하였기 때문에 그를 본받고 가르침을 얻으려는 학자가 줄을 이었으며, 김숙자(金叔滋)를 비롯하여 김종직(金宗直) ·김굉필(金宏弼) ·정여창(鄭汝昌) ·조광조(趙光祖) 등이 학맥을 이었다. 청풍서원(淸風書院)에 제향되었다. 문집에 《야은집》 《야은속집(冶隱續集)》, 언행록인 《야은언행습유록(冶隱言行拾遺錄)》이 있다.
●문익점 [文益漸, 1329~1398] 고려시대의 학자·문신. 본관 남평(南平). 자 일신(日新). 호 삼우당(三憂堂). 시호 충선(忠宣). 초명 익첨(益瞻). 강성현(江城縣: 경남 산청) 출생. 1360년(공민왕 9) 문과에 급제하여 김해부사록(金海府司錄)·순유박사(諄諭博士) 등을 지내고, 1363년 좌정언(左正言)으로 서장관(書狀官)이 되어 계품사(啓稟使) 이공수(李公遂)를 따라 원(元)나라에 갔다가 돌아오면서 붓대[筆管] 속에 목화씨를 감추어 가져왔고, 이를 장인 정천익(鄭天益)과 함께 고향에서 재배하는 데 성공하였다. 1375년(우왕 1) 다시 전의주부(典儀注簿)로 등용되고 1389년 좌사의대부(左司儀大夫)가 되었으며, 공양왕 때 이성계(李成桂) 일파에 의하여 추진된 전제개혁(田制改革)에 반대했다가 조준(趙浚)의 탄핵으로 밀려났다. 1440년(세종 22) 영의정이 추증되고 강성군(江城君)으로 추봉되었으며 세조 때에 사당이 세워졌다.
● 정도전 [鄭道傳, 1337~1398]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학자. 본관 봉화(奉化). 자 종지(宗之). 호 삼봉(三峰). 1362년(공민왕 11) 진사, 이듬해 충주사록(忠州司錄)을 거쳐 전교시주부(典敎寺主簿)·통례문지후(通禮門祗候)를 지내고 부모상으로 사직하였다. 1370년 성균박사가 되고 이어 태상박사(太常博士)를 거쳐 예조정랑 겸 성균태상박사(禮曹正郞兼成均太常博士)가 되어 전선(銓選)을 관장하였다. 1375년(우왕 1) 성균사예(成均司藝)·지제교(知製敎) 등을 역임하였고 이해 권신 이인임(李仁任)·경복흥(慶復興) 등의 친원배명(親元排明)정책을 반대하다가 회진현(會津縣)에 유배되었다. 1377년 유형을 마치고 고향 영주(榮州)에서 학문연구와 후진교육에 종사하며, 특히 주자학적 입장에서 불교배척론을 체계화하였다. 1383년 동북면도지휘사(都指揮使) 이성계(李成桂)의 막료가 되었고 이듬해 성절사(聖節使) 정몽주(鄭夢周)의 서장관이 되어 명(明)나라에 다녀왔다. 1385년 성균좨주(成均祭酒), 이듬해 남양부사(南陽府使)로 있다가 1388년 이성계의 천거로 성균대사성(成均大司成)에 승진하였다. 이성계의 우익으로서 조준(趙浚)과 함께 전제개혁론을 주장, 1389년(창왕 1) 밀직부사(密直副使)로 승진하였고 창왕(昌王)을 폐위하고 공양왕(恭讓王)을 옹립하는데 적극 가담하여 봉화현충의군(奉化縣忠義君)에 책록되었다. 1390년(공양왕 2) 경연지사(經延知事)로 성절사 겸 변무사(聖節使兼辨誣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와 동판도평의사사사 겸 성균대사성(同判都評議使司事兼成均大司成)·삼사부사(三司副使) 등을 역임하였다. 그 해 조민수(曺敏修) 등 구세력을 몰아내고 전제개혁을 단행하여 과전법(科田法)을 실시하게 함으로써 조선 개국의 정치·경제적 토대를 마련하였다. 이듬해 이성계가 군사권을 장악하여 삼군도총제부(三軍都摠制府)를 설치하자 우군총제사(右軍摠制使)가 되고 이어 정당문학(政堂文學)으로 재직 중, 구세력의 역습으로 탄핵을 받아 관직을 박탈당하고 봉화로 유배되었다. 1392년 한때 풀렸으나 정몽주의 탄핵으로 투옥되었고 정몽주가 살해된 뒤 풀려나와 조준·남은(南誾) 등과 함께 이성계를 추대, 조선 건국의 주역이 되었다. 그 공으로 분의좌명개국공신(奮義佐命開國功臣) 1등에 녹훈되고, 문하시랑찬성사(門下侍郞贊成事)·예문춘추관사(藝文春秋館事)에 임명되어 사은 겸 정조사(謝恩兼正朝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394년(태조 3) 한양천도 때는 궁궐과 종묘의 위치 및 도성의 기지를 결정하고 궁·문의 모든 칭호를 정했다. 《조선경국전(朝鮮經國典)》을 찬진하여 법제의 기본을 이룩하게 하고 1395년 정총(鄭摠) 등과 《고려사》 37권을 찬진했으며, 1397년 동북면도선무순찰사(都宣撫巡察使)가 되어 성을 수축하고 역참(驛站)을 신설했다. 제l차 왕자의 난 때 이방원(李芳遠)에게 참수되었다. 유학(儒學)의 대가로 개국 후 군사·외교·행정·역사·성리학 등 여러 방면에서 활약하였고, 척불숭유(斥佛崇儒)를 국시로 삼게 하여 유학의 발전에 공헌하였다. 글씨에도 뛰어났으며 저서에 《삼봉집(三峰集)》 《경제육전(經濟六典)》 《경제문감(經濟文鑑)》 《심기리편(心氣理篇)》 《불씨잡변(佛氏雜辨)》 《심문천답(心問天答)》 《진법서(陳法書)》 《금남잡제(錦南雜題)》 등이 있고, 작품에 〈납씨가(納氏歌)〉 〈정동방곡(靖東方曲)〉 〈문덕곡〉 〈신도가(新都歌)〉 등이 있다.
● 최영 [崔瑩, 1316~1388] 고려의 명장 ·충신. 본관 동주(東州). 시호 무민(武愍). 양광도도순문사(楊廣道都巡問使) 휘하에서 수차 왜구를 토벌, 우달치[于達赤:司門人]가 되었으며 1352년(공민왕 1) 조일신(趙日新)의 난을 평정하고, 호군(護軍)에 올랐다. 1354년 대호군(大護軍) 때 원(元)나라의 요청으로 중국에서 장사성(張士誠)의 난군을 토벌하고 귀국, 서북면병마부사(西北面兵馬副使)가 되어 원나라에 속했던 압록강 서쪽의 8참(站)을 수복했다. 1358년 양광 ·전라도 왜적체복사(楊廣全羅道倭賊體覆使) 때 오예포(吾乂浦)에 침입한 왜선 400여 척을 격파했으며 1359년 4만의 홍건적(紅巾賊)이 서경(西京:平壤)을 함락하자 1360년 서북면병마사(西北面兵馬使) 이방실(李芳實) 등과 함께 이를 물리치고 좌산기상시(左散騎常侍) 등을 지냈다. 1361년 홍건적이 창궐, 개경(開京)까지 점령하자 안우(安祐) ·이방실 등과 함께 이를 격퇴, 훈(勳) 1등에 도형벽상공신(圖形壁上功臣)에 책록되고 전리판서(典理判書)에 올랐다. 1363년 흥왕사(興王寺)의 변(金鏞의 난)이 일어나자 이를 진압, 진충분의좌명공신(盡忠奮義佐命功臣) 1등이 되고 찬성사(贊成事)에 이르렀다. 1364년 원나라에 있던 최유(崔濡)가 덕흥군(德興君)을 왕으로 추대, 군사 1만으로 쳐들어오자 서북면도순위사(西北面都巡慰使)로서 의주(義州)에서 섬멸했으며, 이어 박백야(朴伯也)가 연주(延州)에 침입하자 부하 장수를 시켜 격퇴했다. 1365년 강화(江華)에서 왜구와 싸우던 중, 신돈(辛旽)의 모함으로 계림윤(鷄林尹)에 좌천되고 훈작(勳爵)도 삭탈당하고 유배되었다가 1371년 신돈이 처형되자 복직,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 등을 지냈다.
● 조민수 [曺敏修, ?~1390] 고려의 무신. 본관 창녕(昌寧). 1361년(공민왕 10) 순주부사(順州府使)로 홍건적(紅巾賊)의 침입을 물리쳐 공신 2등에 책록되고, 이듬해 양광도도순문사(楊廣道都巡問使)를 거쳐 전리판서(典理判書)·밀직사 동지사(密直司同知事) 등을 지냈다. 1368년 명나라가 원나라 수도 연경(燕京)을 포위하자 좌상시(左常侍)로 의정주등처 안무사(義靜州等處安撫使)가 되어 명나라의 위협에 대처하고, 충근보리공신(忠勤輔理功臣)의 호를 받았다. 우왕 초 경상도도순문사로 왜구를 격퇴하고, 문하부지사(門下府知事)·서북면도체찰사(西北面都體察使), 1379년(우왕 5) 문하평리(門下評理), 1383년 문하시중(門下侍中)을 거쳐 창성부원군(昌城府院君)에 봉해졌다. 다음해 밀직부사(密直副使)로 전라도 조전원수(助戰元帥)를 겸하고, 1385년 문하부판사(門下府判事)로 사은사(謝恩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1388년(우왕 14) 요동정벌군(遼東征伐軍)의 좌군도통사(左軍都統使)로 출정한 뒤 위화도(威化島)에서 이성계(李成桂)와 회군(回軍)하여 우왕을 폐하고 창왕을 세우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그 공으로 충근양절선위동덕안사공신(忠勤亮節宣威同德安社功臣)에 책록되고, 양광·전라·경상·서해·교주도도통사(楊廣全羅慶尙西海交州道都統使)를 지냈다. 1389년(창왕 1) 이성계 일파의 전제개혁을 반대하여 조준(趙浚) 등의 탄핵으로 창녕(昌寧)에 유배된 뒤 창왕의 생일에 특사로 풀려났으나, 우왕의 혈통을 에워싼 논쟁으로 이성계 일파에 대항하다가 서인(庶人)으로 강등되고, 이듬해 다시 창녕으로 유배, 배소에서 죽었다. 1374년 제주(濟州)의 이른바 호목(胡牧)의 난에는 양광 ·전라 ·경상도 도통사로 난을 평정, 판삼사사(判三司事)에 올랐다. 1376년(우왕 2) 왜구가 삼남지방을 휩쓸고 원수(元帥) 박원계(朴元桂)가 참패당하자, 최영이 홍산(鴻山)에서 적을 대파, 철원부원군(鐵原府院君)에 봉해졌다. 1377년 서강(西江)에, 1378년 승천부(昇天府:德)에 쳐들어온 왜구를 이성계 등과 섬멸, 안사공신(安社公臣)의 호를 받았으며, 1380년 해도도통사(海道都統使)로서 왜구 때문에 서울을 철원(鐵原)으로 옮기려던 계획을 철회시켰다. 1381년 영삼사사(領三司事) 등을 지내고 벼슬을 사퇴했다가 88년 수문하시중(守門下侍中)이 되었는데, 이 때 명나라가 철령위(鐵嶺衛)를 설치, 북변 일대를 랴오둥[遼東]에 귀속시키려 하자 랴오둥정벌을 계획, 팔도도통사(八道都統使)가 되어 정벌군을 이끌고 출정했으나, 이성계 등의 위화도회군(威化島回軍)으로 랴오둥정벌이 좌절되었다. 이성계군이 개성에 난입하자 이를 맞아 싸우다가 체포되어 고봉(高峰:高陽) 등지에 유배되었다가 개경(開京)에서 참형(斬刑)되었다.
● 최무선 [崔茂宣, ?~1395] 고려 말, 조선 초의 발명가. 본관은 영주(永州:永川)이다. 왜구(倭寇)가 창궐하자 화약제조법의 필요성을 절감, 원나라 이원(李元)에게서 그 제조법을 배웠다. 1377년(우왕 3) 화통도감(火都監)을 설치케 하여 화약을 만들고, 대장군(大將軍) ·이장군(二將軍) ·삼장군 ·육화(六花) ·석포(石砲) ·화포(火砲) ·신포(信砲) ·화통(火) ·화전(火箭) ·철령전(鐵翎箭) 등 각종 화기(火器)를 제조하였으며 한편 전함(戰艦)의 건조에도 힘썼다. 최초로 함포를 개발하였다. 1380년 왜구가 대거 침입했을 때 부원수(副元帥)로서 진포(鎭浦:錦江河口)에서 화포 ·화통 등을 처음으로 사용, 왜선 500여 척을 전멸시켜 영성군(永城君)에 봉해졌다. 1383년 남해 관음포(觀音浦)에 침입한 왜구를 격파했고, 1389년(창왕 1) 화통도감이 철폐되자 집에서 《화약수련법(火藥修鍊法)》 《화포법(火砲法)》을 저술하였다. 1392년 조선이 개국하자 정헌대부(正憲大夫) ·검교문하부참찬사 겸 군기시판사(檢校門下府參贊事兼軍器寺判事)가 되었다. 의정부 우정승(議政府右政丞)이 추증(追贈), 영성부원군(永城府院君)에 추봉되었다.
● 태조 [太祖, 1335~1408] 조선의 제1대 왕(재위 1392∼1398). 본관 전주(全州). 자 중결(仲潔). 호 송헌(松軒). 성 이(李). 휘(諱) 성계(成桂). 시호 지인계운성 문신무대왕(至仁啓運聖文神武大王). 함경도 영흥(永興) 출생. 자춘(子春)의 2남. 즉위 후 휘를 단(旦), 자를 군진(君晉)으로 고쳤다. 비(妃)는 한경민(韓敬敏)의 딸 신의왕후(神懿王后), 계비는 강윤성(康允成)의 딸 신덕왕후(神德王后). 1356년(공민왕 5) 아버지와 함께 고려에 내부(來附)한 뒤 이듬해 유인우(柳仁雨)가 쌍성총관부를 공격할 때 이에 내응(內應)하여 공을 세웠고, 후에 아버지의 벼슬을 이어받아 금오위상장군(金吾衛上將軍) ·동북면상만호(東北面上萬戶)가 되었다. 1361년 반란을 일으킨 독로강만호(禿魯江萬戶) 박의(朴儀)를 토벌하였으며, 같은 해 홍건적(紅巾賊)의 침입으로 개경(開京)이 함락되자, 다음해 사병 2,000명을 거느리고 수도 탈환전에 참가하여 제1착으로 입성, 전공을 세움으로써 동북면병마사(東北面兵馬使)로 승진되고, 원(元)나라의 나하추[納哈出]가 함경도 홍원(洪原)으로 침입하자 함흥평야에서 이를 격파하였다. 1364년 원나라 연경(燕京)에 있던 최유(崔濡)가 충숙왕(忠肅王)의 아우 덕흥군(德興君)을 추대하고 1만 명의 군대로 평안도에 침입하여 공민왕을 폐하려 하자 최영(崔瑩)과 함께 이들을 달천강(川江)에서 대파하고, 이어 여진족(女眞族)의 삼선(三善) ·삼개(三介)가 함경도 화주(和州)에 침입한 것을 격퇴하였다. 이 해 밀직부사(密直副使)로 익대공신(翊戴功臣)에 책록되었다. 1368년 동북면원수(東北面元帥) ·문하성지사(門下省知事)로 승진, 1372년(공민왕 21) 화령부윤(和寧府尹)이 되고, 1377년(우왕 3) 왜구가 개경을 위협할 때 서강부원수(西江副元帥)로서 이를 격퇴하였다. 1380년 양광 ·전라 ·경상도도순찰사(楊廣全羅慶尙道都巡察使)가 되어 운봉(雲峰)에서 왜구를 소탕하고 1382년 찬성사(贊成事)로서 동북면도지휘사가 되었다. 다음해 이지란(李之蘭)과 함께 함경도에 침입한 호바투[胡拔都]의 군대를 길주(吉州)에서 대파하였으며, 1384년 동북면도원수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가 되었고 이듬해 함경도 함주(咸州)에 침입한 왜구를 격파하였다. 1388년(우왕 14) 수문하시중(守門下侍中)에 올라 최영과 함께 권신(權臣) 임견미(林堅味) ·염흥방(廉興邦)을 처형, 이때 명(明)나라의 철령위(鐵領衛) 설치 문제로 요동정벌이 결정되자 출정을 반대했으나 거절당했다. 우군도통사(右軍都統使)가 되어 군사를 이끌고 북진하다가 위화도(威化島)에서 회군(回軍), 최영을 제거하고 우왕을 폐한 후 창왕(昌王)을 세웠으며, 자신은 수시중(守侍中)으로서 도총중외제군사(都摠中外諸軍事)가 되어 막강한 권력을 장악하였다. 다음해 정도전(鄭道傳) 등과 함께 창왕을 폐위하고 공양왕(恭讓王)을 세웠다. 1390년(공양왕 2) 삼사영사(三司領事)로 승진하였고, 1391년 삼군도총제사(三軍都摠制使)로서 조준(趙浚) 등과 함께 구신(舊臣)들의 반대를 물리치고 전제개혁(田制改革)을 단행하였다. 그 결과 구신들은 경제적 기반을 잃었고, 그의 일파인 신진세력은 경제적인 토대를 구축하게 되었다. 1392년(공양왕 4) 정몽주(鄭夢周)를 제거, 그 해 7월 공양왕을 양위시키고 스스로 새 왕조의 태조가 되었다. 이듬해 국호를 조선(朝鮮)이라 정하고 1394년(태조 3) 서울을 한양(漢陽)으로 옮겼다. 1398년 제1차 왕자의 난이 일어나자 방과(芳果:定宗)에게 선위한 뒤 상왕(上王)이 되고, 1400년 방원(芳遠)이 즉위하자 태상왕이 되었다. 1402년 왕자들의 권력 다툼에서 빚어진 심뇌로 동북면에 가서 오랫동안 머물다가 돌아왔고 불가(佛家)에 귀의하여 여생을 보냈다. 사대주의(事大主義) ·배불숭유(排佛崇儒) ·농본주의(農本主義)를 건국이념으로 삼아 조선 500년의 근본 정책이 되게 하였고 관제의 정비, 병제(兵制)와 전제(田制)의 재조정 등 초기 국가의 기틀을 다지는 데 큰 업적을 남겼다. 묘호(廟號)는 태조, 능은 건원릉(健元陵)이다.
● 무학대사. 자초 [自超, 1327~1405] 고려 말 ·조선 전기의 승려. 속성 박(朴). 호 무학(無學)·계월헌(溪月軒). 삼기(三岐:陝川郡) 출생. 18세에 소지선사(小止禪師)의 제자로 승려가 되어 구족계를 받고, 혜명국사(慧明國師)에게서 불법을 배웠다. 진주(鎭州) 길상사(吉祥寺)·묘향산 금강굴(金剛窟) 등에서 수도하다가, 1353년(공민왕 2) 원(元)나라 연경(燕京)에 유학하여 그때 원에 와 있던 혜근(惠勤)과 지공(指空)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았다. 1356년 귀국하여 1373년에 왕사(王師)가 된 혜근의 법을 이어받았는데, 1376년 혜근이 회암사(檜巖寺)에서 낙성회(落成會)를 연 때 수좌(首座)로 초청하였으나 사양했다. 1392년 조선 개국 후 왕사가 되어, 대조계종사(大曹溪宗師)·선교도총섭(禪敎都摠攝)·전불심인변지무애부종수교홍리보제도대선사(傳佛心印辯智無碍扶宗樹敎弘利普濟都大禪師)·묘엄존자(妙嚴尊者)의 호를 받고 회암사에서 지냈다. 이듬해 태조를 따라 계룡산과 한양(漢陽)을 오가며 지상(地相)을 보고 도읍을 한양으로 옮기는 데 찬성하였다. 1397년(태조 6) 왕명으로 회암사 북쪽에 수탑(壽塔)을 세우고, 1402년(태종 2) 회암사 감주(監主)가 되었다가 이듬해 사직하고, 금강산 금장암(金藏庵)에 머물다가 죽었다. 저서에 《불조종파지도(佛祖宗派之圖)》 《인공음(印空吟)》이 있다.
● 사명대사. 유정 [惟政, 1544~1610] 조선 후기의 승려. 속성 임(任). 본관 풍천(川). 자 이환(離幻). 호 사명당(泗溟堂/四溟堂) ·송운(松雲) ·종봉(鍾峯). 시호 자통홍제존자(慈通弘濟尊者). 유정은 법명. 경남 밀양(密陽) 출생. 어려서 조부 밑에서 공부를 하고 1556년(명종 11) 13세 때 황여헌(黃汝獻)에게 《맹자(孟子)》를 배우다가 황악산(黃岳山) 직지사(直指寺)의 신묵(信默)을 찾아 승려가 되었다. 1561년 승과(僧科)에 급제하고, 1575년(선조 8)에 봉은사(奉恩寺)의 주지로 초빙되었으나 사양하고 묘향산 휴정(休靜:西山大師)의 법을 이어받았다. 금강산 등 명산을 찾아다니며 도를 닦다가, 상동암(上東菴)에서 소나기를 맞고 떨어지는 낙화를 보고는 무상을 느껴 문도(門徒)들을 해산하고, 홀로 참선에 들어갔다. 1589년(선조 22) 정여립(鄭汝立)의 역모사건에 관련된 혐의로 투옥되었으나 무죄석방되고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승병을 모집, 휴정의 휘하로 들어갔다. 이듬해 승군도총섭(僧軍都摠攝)이 되어 명(明)나라 군사와 협력, 평양을 수복하고 도원수 권율(權慄)과 의령(宜寧)에서 왜군을 격파, 전공을 세우고 당상관(堂上官)의 위계를 받았다. 1594년(선조 27) 명나라 총병(摠兵) 유정(劉綎)과 의논, 왜장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의 진중을 3차례 방문, 화의 담판을 하면서 적정을 살폈다. 정유재란(丁酉再亂) 때 명나라 장수 마귀(麻貴)와 함께 울산(蔚山)의 도산(島山)과 순천(順天) 예교(曳橋)에서 전공을 세우고 1602년 중추부동지사(中樞府同知使)가 되었다. 1604년 국왕의 친서를 휴대하고, 일본에 건너가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를 만나 강화를 맺고 조선인 포로 3,500명을 인솔하여 귀국했다. 선조가 죽은 뒤 해인사(海印寺)에 머물다가 그 곳에서 죽었다. 초서를 잘 썼으며 밀양의 표충사(表忠祠), 묘향산의 수충사(酬忠祠)에 배향되었다. 저서에 《사명당대사집》 《분충서난록》 등이 있다.
● 서산대사 (휴정 1520∼1604) 조선 중기의 스님. 속성은 최(崔)이고, 호는 청허(淸虛) 또는 서산(西山)이다. 보통 서산 대사라고 불린다. 1534년에 진사 시험에 낙방하여 지리산에 들어가 중이 되었다. 1549년에 승과에 급제한 뒤, 봉은사의 주지가 되었다가 승직을 그만두고, 유명한 절을 두루 찾아다니며 수도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왕의 특명으로 ‘팔도십륙종 도총섭’에 임명되어 승병을 이끌고 도읍을 되찾는 데 공을 세웠다. 1594년에 제자 유정(사명당)에게 군사 지휘권을 맡기고 묘향산에 들어가 여생을 보내었다. 선종과 교종을 통합하는 한편, 유·불·도가 결국은 일치한다는 ‘삼교 통합론’의 기원을 이룩하였다. 시와 문장에도 뛰어났으며, 저서로는 <청허당집>이 있다.
● 하륜 [河崙, 1347~1416] 고려 말·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 진주. 자 대림(大臨). 호 호정(浩亭). 시호 문충(文忠). 1365년(공민왕 14) 문과에 급제, 감찰규정(監察糾正)이 되고 고공좌랑(考功佐郞)에 올랐다. 밀직사첨서사(密直司簽書事)를 거쳐, 1388년(우왕 14) 최영(崔瑩)의 요동공격을 반대하다가 양주(楊州)로 귀양갔다. 조선 개국 후 1393년(태조 2) 경기도도관찰사가 되어 한양(漢陽) 천도를 주장, 관철하였고 이듬해 중추원첨서사(中樞院簽書事)에 전보, 중국 명나라 태조가 표전문(表箋文)이 불손하다고 트집잡자, 1396년 한성부윤으로 계품사(計稟使)가 되어 명나라에 가서 표전문 작성의 전말을 해명하였다. 1398년 충청도도관찰사로 제1차 왕자의 난 때 방원(芳遠)을 도와 공을 세우고 정당문학(政堂文學)에 승진, 정사공신(定社功臣) 1등에 책록되고 진산군(晉山君)에 봉해졌다. 1400년(정종 2) 제2차 왕자의 난에도 방원을 도왔고, 그해 명나라 태조의 국상에 진위 겸 진향사(陳慰兼進香使)로 가서 정종의 왕위승습(王位承襲)을 승인받고 귀국, 문하부참찬사에 오르고 다시 의흥삼군부 판사(義興三軍府判事)를 거쳐 우정승으로 진산백(晉山伯)에 진봉되었다. 그해 태종의 즉위로 좌명공신(佐命功臣)에 책록되고, 이듬해 관직에서 물러났다가 좌정승(左政丞)에 복관, 승추부판사를 겸하였다. 그해 명나라 영락제(永樂帝)의 등극사(登極使)로 가서 조선왕조의 완전인준을 표하는 고명인장(誥命印章)을 받아왔으며, 이첨(李詹)과 함께 《동국사략(東國史略)》을 편수하였다. 1409년 의정부영사가 되어 군정(軍政)을 개정한 데 이어 춘추관영사로 《태조실록(太祖實錄)》 편찬을 지휘하고, 1412년 다시 좌의정을 거쳐, 1416년(태종 16) 70세로 치사(致仕)하였다. 진산부원군에 진봉되어 왕명으로 함길도(咸吉道)에 있는 선왕(先王)의 능침(陵寢)을 순심(巡審)하고 돌아오는 길에 죽었다. 문집에 《호정집》이 있다.
● 황희 [黃喜, 1363~1452]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 본관 장수(長水). 자 구부(懼夫). 호 방촌(판 村). 초명 수로(壽老). 시호 익성(翼成). 개성(開城) 출생. 1376년(우왕 2) 음보로 복안궁녹사(福安宮錄事)가 되었다가 1383년 진사시(進士試)에 합격, 1389년(창왕 1) 문과에 급제, 이듬해 성균관학관(成均館學官)이 되었다. 고려가 망하자 두문동에 은거했으나, 이성계(李成桂)의 간청으로 1394년(태조 3) 성균관학관으로 세자우정자(世子右正字)를 겸임, 그 후 직예문춘추관(直藝文春秋館)·사헌감찰(司憲監察)·우습유(右拾遺)·경기도도사(京畿道都使)를 역임했다. 1400년(정종 2) 형조·예조·이조 등의 정랑(正郞)을 거쳐 1404년(태종 4) 우사간대부(右司諫大夫)가 되었다가 이듬해 지신사(知申事)에 올랐으며, 1408년 민무휼(閔無恤) 등의 횡포를 제거, 그 후 형조·병조·예조·이조의 판서를 역임하였다. 1416년 이조판서로 세자 폐출(廢黜)을 반대하여 공조판서로 전임되었으며, 이어 한성부판사(漢城府判事)가 되었다. 1418년 충녕대군(忠寧大君:世宗)이 세자로 책봉되자 이를 반대하여 서인(庶人)이 되고 교하(交河)로 유배, 다시 남원(南原)에 이배(移配)되었으나 1422년(세종 4) 풀려나와 좌참찬에 기용되고, 강원도 관찰사·예조판서·우의정 등을 역임하였다. 1427년 좌의정에 올랐고 1430년 투옥된 태석균(太石鈞)의 감형을 사사로이 사헌부에 부탁한 일로 탄핵을 받아 파직되었으나, 이듬해 복직, 영의정에 올랐다. 1449년 벼슬에서 물러날 때까지 18년간 영의정에 재임하면서 농사의 개량, 예법의 개정, 천첩(賤妾) 소생의 천역(賤役) 면제 등 업적을 남겨 세종의 가장 신임받는 재상으로 명성이 높았다. 또한, 인품이 원만하고 청렴하여 모든 백성들로부터 존경을 받았으며, 시문에도 뛰어나 몇 수의 시조 작품도 전해진다. 파주의 방촌영당(村影堂), 상주(尙州)의 옥동서원(玉洞書院) 등에 제향되고, 세종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저서에 《방촌집(村集)》이 있다.
●맹사성 [孟思誠, 1360~1438] 고려 말 조선 초의 재상. 본관 신창(新昌). 자 자명(自明). 호 고불(古佛) ·동포(東浦). 시호 문정(文貞). 온양(溫陽) 출생. 1386년(우왕 12) 문과에 급제하여 예문춘추관 검열(檢閱)을 거쳐 전의승(典儀丞)·기거사인(起居舍人)·우헌납(右獻納) 등을 역임하였다. 조선시대에 이르러 수원판관(水原判官)·내사사인(內史舍人)·예조정랑(禮曹正郞)·시어사(侍御史)·간의(諫議)를 지내고, 1400년(정종 2) 우산기상시(右散騎常侍)가 되었다. 1406년 이조참의·예문관제학을 거쳐 이듬해 진전사(進箋使) 시종관으로 명(明)나라에 다녀와 한성부윤이 되었다. 1408년 대사헌에 오르자 왕의 허락도 없이 부마 조대림(趙大臨)을 국문하여 태종의 노여움을 사 한주(韓州)로 유배되었으나, 영상 성석린(成石璘)의 변호로 풀려나 다시 기용되어 예조참판을 거쳐 1416년 판서(判書)로 승진, 호조(戶曹)·공조(工曹)를 거쳐 1419년(세종 1) 이조판서로 예문관 대제학을 겸하였다. 1425년 좌군도총제부판사(左軍都摠制府判事)로서 성절사(聖節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와서 문신으로는 최초로 삼군도진무(三軍都鎭撫)가 되고, 1427년 우의정에 올랐다. 1429년 궤장(杖)을 하사받고, 이듬해 《태종실록(太宗實錄)》을 감수, 1431년 좌의정이 되고 다시 춘추관영사(春秋館領事)를 겸임, 《팔도지리지(八道地理志)》를 찬진(撰進)하고 1435년 노령으로 사임하였다. 황희(黃喜)와 함께 조선 전기의 문화 창달에 크게 기여했고, 성품이 청백검소하여 남루한 행색으로 수령(守令)의 야유를 받았는데, 도망하던 수령이 관인(官印)을 못에 빠뜨려 후에 그 못을 인침연(印沈淵)이라 불렀다는 일화도 있다. 시문(詩文)에 능하고 음률(音律)에도 밝아 향악(鄕樂)을 정리하고 악기도 만들었다. 또 청백리로 기록되고, 효성이 지극하여 정문(旌門)이 세워졌다. 작품에 《강호사시가(江湖四時歌)》가 있다.
● 김정호 [金正浩, ?~1864] 조선 후기의 지리학자. 본관 청도(淸道). 자 백원(伯元) ·백온(伯溫). 호 고산자(古山子). 황해도 출생. 어려서 서울로 이주하였고, 미천한 가문의 출신이었으나 학문을 열심히 닦았으며, 정밀한 지도의 작성에 뜻을 품고 전국 각지를 두루 돌아다니며 30여 년간의 각고 끝에 1834년(순조 34)에 《청구도(靑邱圖)》 2첩을 완성하였다. 그후 《청구도》에 불만을 느낀 그는 다시 전국을 답사하여 1861년(철종 12)에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 2첩을 완성하고, 교간(校刊)하였다. 《여지승람(輿地勝覽)》의 착오를 정정하고 보충하기 위해 32권 15책으로 된 《대동지지(大東地志)》를 집필 ·간행하였다. 이 책은 전국 각 지방의 연혁 ·산수 ·인물 ·지리를 기록한 것으로서, 한국의 지형과 당시의 각 지방 사정을 실었다. 청구도 를 살펴보면, 전국을 가로 29층, 세로 28판으로 나누고, 동서는 제3층 1판인 경흥에서 시작하여 제9층 2판인 의주에서 끝냈으며, 남북은 제1층 3판인 온성에서 시작하여 제29층 16판인 제주도에서 끝냈다. 지도를 세분하여 가로 28km, 세로 40km를 각각 22cm, 30cm로 축소하여 각 1매씩의 세밀한 지도를 작성하였는데, 이 지도는 모두 310여 면으로 각 군 ·면 ·도로 ·고적 ·산천 ·역(驛) 등이 기록되어 있다. 《대동여지도》는 크기가 20×30cm 정도이며, 1첩에는 간기(刊記)가 있고, 각 첩 1편(片)의 넓이는 32×48㎢에 해당한다. 또 22종류의 부호를 사용하여 역 ·창고 ·목장 ·성 등을 표시하였고, 중요한 도로에는 4km마다 점을 찍어 놓았으며 이것은 약 1만 6200분의 1에 해당하는 축척도이다. 《대동여지도》는 그가 손수 그려서 판각하였다고 하며, 한 벌을 흥선대원군에게 바치자 그 정밀하고 자세함에 놀란 조정 대신들이 국가의 기밀을 누설하였다는 죄명으로 그를 옥에 가둔 뒤 목각판을 압수하여 태워버렸고 그는 옥사하였다. 오늘날 전하는 《대동여지도》는 수사본(手寫本)뿐이다.
● 한석봉. 한호 [韓濩, 1543~1605] 조선 중기의 서예가. 본관 삼화(三和). 자 경홍(景洪). 호 석봉(石峯) ·청사(淸沙). 개성 출생. 왕희지(王羲之) ·안진경(顔眞卿)의 필법을 익혀 해(楷) ·행(行) ·초(草) 등 각 서체에 모두 뛰어났다. 1567년(명종 22) 진사시에 합격하고, 천거로 1599년 사어(司禦)가 되었으며, 가평군수를 거쳐 1604년(선조 37) 흡곡현령(谷縣令) ·존숭도감 서사관(尊崇都監書寫官)을 지냈다. 그 동안 명나라에 가는 사신을 수행하거나 외국사신을 맞을 때 연석(宴席)에 나가 정묘한 필치로 명성을 떨쳤으며, 한국 서예계에서 김정희(金正喜)와 쌍벽을 이룬다. 그의 필적으로 《석봉서법》 《석봉천자문》 등이 모간(模刊)되었고, 친필은 별로 남은 것이 없으나 그가 쓴 비문(碑文)은 많이 남아 있다. 글씨로는 《허엽신도비(許曄神道碑)》(용인) 《서경덕신도비(徐敬德神道碑)》(개성) 《기자묘비(箕子廟碑)》(평양) 《김광계비(金光啓碑)》(양주) 《행주승전비(幸州勝戰碑)》 《선죽교비(善竹橋碑)》 《좌상유홍묘표(左相兪弘墓表)》 등이 있다.
● 장영실 [蔣英實, ?~?] 조선 전기 세종 때의 과학자. 본관 아산(牙山). 기녀 소생으로 동래현(東萊縣)의 관노(官奴) 출신. 과학적 재능이 있어 제련(製鍊) ·축성(築城) ·농기구 ·무기 등의 수리에 뛰어나서 1423년(세종 5) 왕의 특명으로 발탁, 상의원(尙衣院) 별좌가 되면서 노예의 신분을 벗었다. 그 후 행사직(行司直)이 되고 1432년 중추원사 이천(李狀)을 도와 간의대(簡儀臺) 제작에 착수하고 각종 천문의(天文儀) 제작을 감독하였다. 1433년 호군(護軍)에 오르고 혼천의(渾天儀) 제작에 착수하여 1년 만에 완성하고 이듬해 동활자(銅活字)인 경자자(庚子字)의 결함을 보완한 금속활자 갑인자(甲寅字)의 주조를 지휘감독하였으며, 한국 최초의 물시계인 보루각(報漏閣)의 자격루(自擊漏)를 만들었다. 1437년부터 6년 동안 천체관측용 대 ·소간의(大小簡儀), 휴대용 해시계 현주일구(懸珠日晷)와 천평(天平)일구, 고정된 정남(定南)일구, 앙부(仰釜)일구, 주야(晝夜) 겸용의 일성정시의(日星定時儀), 태양의 고도와 출몰을 측정하는 규표(圭表), 자격루의 일종인 흠경각(欽敬閣)의 옥루(玉漏)를 제작 완성하고 경상도 채방(採訪)별감이 되어 구리[銅] ·철(鐵)의 채광 ·제련을 감독하였다. 1441년 세계 최초의 우량계인 측우기와 수표(水標)를 발명하여 하천의 범람을 미리 알 수 있게 했다. 그 공으로 상호군(上護軍)에 특진되었으나 이듬해 그가 감독 제작한 왕의 가마가 부서져 불경죄로 의금부에 잡혀가 장형(杖刑)을 받고 파직당하였다.
● 박연 (1378∼1458, 고려 우왕 4∼조선 세조 4) 조선 초기의 학자이며 음악가, 집현전 교리를 거쳐 세종 때에 악학 별좌가 되어 궁중 음악을 아악으로 대체하고 악기 제작 및 정리, 아악의 정리 및 창작에 힘썼다. 대금을 잘 불었으며 고구려의 왕산악, 신라의 우륵과 함께 우리 나라 3대 악성으로 일컬어진다. 지금도 영동에서는 그의 호를 딴 '난계 음악제'가 열려 음악 발전에 남긴 업적을 기리고 있다. 박연은 편경의 음정을 맞출 정확한 율관을 제작하기 위하여 수차에 걸쳐서 시험적인 제작을 하였으며, 흐트러진 악제를 바로잡기 위하여 수십회에 걸친 상소문을 올리기도 하였다. 정확한 율관을 제작하자는 상소문을 비롯하여 제향의 아악을 바로잡자는 글, 축의 제도를 개정하자는 주장, 악현의 제도를 옛 법대로 고치자는 주장, 악보를 간행하자는 상소문에 이르기까지 무려 39편의 상소문이 《난계유고》에 실려 있다. 세종 때에 음악이 정비되었던 이유는 임금의 뜻이 확고하고 박연 같이 악리에 밝은 사람이 있어 시운이 들어맞았다고 표현하는 글들이 있듯이, 그의 음악적 공헌은 시대적 상황과도 연결된다고 할 수 있다.
● 김종서 [金宗瑞, 1390~1453]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 순천(順天). 자 국경(國卿). 호 절재(節齋). 시호 충익(忠翼). 1405년(태종 5) 문과에 급제, 1419년(세종 1) 사간원우정언(司諫院右正言)으로 등용되고, 이어서 지평(持平) ·집의(執義) ·우부대언(右副代言)을 지냈다. 1433년 함길도도관찰사(咸吉道都觀察使)가 되어 야인(野人)들의 침입을 격퇴하고 6진(鎭)을 설치하여 두만강을 경계로 국경선을 확정하였다. 1435년 함길도병마도절제사(咸吉道兵馬都節制使)를 겸직하면서 야인들의 정세를 탐지 ·보고하고, 그 대비책을 건의하였다. 1440년 형조판서로 승진하고, 예조판서 ·우참찬(右參贊)을 역임하다가, 1449년 권제(權) 등이 고친 《고려사(高麗史)》가 잘못되었다 하여 왕명으로 개찬(改撰)하게 되자 춘추관지사(春秋館知事)로 총책임을 맡아 1451년 간행하였다. 평안도도절제사(平安道都節制使)를 거쳐 1450년 좌찬성(左贊成)으로 평안도도체찰사(平安道都體察使)를 겸하였다. 다음해 우의정에 오르고, 1452년 《세종실록》의 총재관(摠裁官)이 되었으며,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의 편찬을 감수하여 간행하였다. 세종의 뒤를 이은 문종이 재위 2년 만에 죽자 영의정 황보 인(皇甫仁), 우의정 정분(鄭)과 함께 좌의정으로, 유명(遺命)을 받아 12세의 단종(端宗)을 보필하였다. 대호(大虎)라는 별호까지 붙은 지용(智勇)을 겸비한 명신(名臣)이었으나, 왕위를 노리던 수양대군(首陽大君:후의 世祖)에 의하여 1453년(단종 1) 두 아들과 함께 집에서 격살(擊殺)되고 대역모반죄(大逆謀叛罪)라는 누명까지 쓰고 효시(梟示)됨으로써 계유정난(癸酉靖難)의 첫번째 희생자가 되었다. 1746년(영조 22) 복관(復官)되었으며, 시조 2수가 전해지고 있다. 저서에 《제승방략(制勝方略)》이 있다.
● 한명회 [韓明澮, 1415~1487]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 청주(淸州). 자 자준(子濬). 호 압구정(狎鷗亭)·사우당(四友堂). 시호 충성(忠成). 장순왕후(章順王后:睿宗妃)·공혜왕후(恭惠王后:成宗妃)의 아버지. 1452년(문종 2) 음보(蔭補)로 경덕궁직(敬德宮直)이 되고, 친구인 교리(校理) 권람(權擥)의 주선으로 수양대군에게 가담하여 무사 홍달손(洪達孫) 등 30여 명을 추천, 1453년(단종 1) 계유정난(癸酉靖難) 때 수양대군을 도와 군기녹사(軍器錄事)가 되고, 정난공신(靖難功臣) 1등으로 사복시소윤(司僕寺少尹)에 올랐다. 1454년 동부승지(同副承旨)가 되고, 1455년 세조가 즉위하자 좌부승지(左副承旨)에 승진, 그해 좌익공신(佐翼功臣) 1등으로 우승지(右承旨)가 되었다. 이듬해 사육신의 단종(端宗) 복위운동을 좌절시키고, 그들의 주살(誅殺)에 적극 가담하여 좌승지를 거쳐 도승지에 올랐다. 1457년 이조판서가 되고, 상당군(上黨君)에 봉해졌으며, 이어 병조판서를 거쳐, 1459년 황해·평안·함길·강원 4도의 체찰사를 역임한 후, 1461년 상당부원군(上黨府院君)에 진봉되었다. 이듬해 우의정이 되고, 1463년 좌의정을 거쳐 1466년 영의정이 되어 병으로 한때 물러났다. 1467년 이시애(李施愛)의 난 때 반역했다고 하여 체포되었으나 혐의가 없어 풀려났고, 세조가 죽자 원상(院相)이 되어 서정(庶政)을 결재하였다. 이 해 남이(南怡)의 옥사를 다스린 공으로 익대공신(翊戴功臣) 1등에 올랐고, 1469년(예종 1) 영의정에 복직, 이 해 예종이 죽고 성종이 즉위하자 병조판서를 겸하였다. 1471년 좌리공신(佐理功臣) 1등이 되고, 그 해 춘추관영사(春秋館嶺事)에 이르렀다. 세조의 묘정에 배향되고, 1504년(연산군 10) 갑자사화(甲子士禍) 때 윤비(尹妃) 사사(賜死) 사건에 관련되었다 하여 부관참시되었다가 후에 신원되었다.
● 권람 [權擥, 1416~1465]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 안동. 자 정경(正卿). 호 소한당(所閑堂). 시호 익평(翼平). 1450년(문종 즉위) 식년문과에 장원급제하였다. 감찰을 거쳐 이듬해 교리로서 《역대병요(歷代兵要)》를 함께 편찬하던 수양대군(首陽大君: 世祖)과 뜻이 통하여 그의 참모가 된 뒤 양정(楊汀) 등 무장을 포섭하였다. 1453년(단종 1) 계유정난(癸酉靖難) 때 정난공신(靖難功臣) 1등으로 우부승지에 특진하였으며, 1455년 세조가 즉위하자 이조참판에 발탁되었다. 이어서 좌익공신(佐翼功臣) 1등으로 예문관 대제학이 되고, 길창군(吉昌君)에 봉해졌다. 1458년 수찬관(修撰官)으로 《국조보감(國朝寶鑑)》을 편찬하였고, 우찬성에 승진했으며, 1459년 좌찬성 ·우의정을 거쳐 1462년 좌의정에 올랐고, 이듬해 부원군(府院君)으로 진봉(進封)되었다. 활을 잘 쏘고 문장에도 뛰어났으나, 횡포가 심하고 축재를 하여 여러 번 탄핵을 받았다. 세조묘(世祖廟)에 배향되었다. 문집에 《소한당집》이 있다.
● 신숙주 [申叔舟, 1417~1475] 조선 전기의 학자 ·문신. 본관 고령(高靈). 자 범옹(泛翁), 호 보한재(保閑齋)·희현당(希賢堂). 시호 문충(文忠). 1439년(세종 21) 친시문과(親試文科)에 급제, 전농시 직장(典農寺直長)·집현전(集賢殿) 부수찬을 역임, 1443년 통신사 변효문(卞孝文)의 서장관(書狀官)으로 일본에 다녀왔다.훈민정음 창제에 공을 세웠으며 1447년(세종 29) 문과중시(文科重試)에 급제하여 응교(應敎)에 특진하고 부제학 등을 거쳐, 1452년(문종 2) 수양대군이 사은사로 명나라에 갈 때 서장관으로 수행하고 이듬해 부승지로 계유정난(癸酉靖難)에 참여, 정난공신 2등이 되었다. 1454년(단종 2) 도승지에 오르고 세조가 즉위하자 그를 적극 보좌하여 좌익공신(佐翼功臣) 1등에 예문관 대제학이 되어 고령군(高靈君)에 봉해졌고, 이해 주문사(奏聞使)로 명나라에 다녀와 병조판서·우찬성·대사성 등을 역임하였다. 이듬해 우의정에 올랐고 1459년 좌의정에 승진, 1460년 강원 함길도 도체찰사(江原咸吉道都體察使)로서 모련위(毛憐衛)의 야인(野人)을 정벌, 1462년(세조 8) 영의정이 되었다. 예종 즉위 후 원상(院相)이 되었고, 이해 남이(南怡)를 숙청한 공으로 익대공신(翊戴功臣) 1등이 되었으며 1471년(성종 2) 성종을 잘 보좌하여 다시 좌리공신(佐理功臣) 1등에 채록, 영의정에 재임되었다. 뛰어난 학식과 문재(文才)로서 6대 왕을 섬겼고,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 《동국정운(東國正韻)》 《국조보감(國朝寶鑑)》 《세조실록(世祖實錄)》 《영모록(永慕錄)》 등을 찬수(撰修)했다. 세종 때는 왕의 총애를 가장 많이 받은 학자였으나 수양대군의 왕위찬탈(王位簒奪)에 가담한 점에서 후세에 비난을 받았다.성종의 묘정(廟庭)에 배향되었다. 저서에 《보한재집(保閑齋集)》 《북정록(北征錄)》 《해동제국기(海東諸國記)》 《사성통고(四聲通攷)》 등이 있다.
● 정인지 [鄭麟趾, 1396~1478] 조선 전기의 문신 ·학자. 본관 하동(河東). 자 백저(伯雎). 호 학역재(學易齋). 시호 문성(文成). 1411년(태종 11) 생원이 되고, 1414년 식년문과에 장원급제한 뒤 예빈주부(禮賓主簿) ·사헌감찰(司憲監察) ·예조좌랑을 거쳐, 1418년 병조좌랑이 되었다. 세종의 신임을 받아 예조와 이조의 정랑(正郞)을 거쳐 집현전학사(集賢殿學士)가 되고, 1425년(세종 7) 집현전직제학(直提學)에 승진하였다. 1427년 문과 중시(重試)에 장원급제, 좌필선(左弼善)이 되고 이듬해 부제학 ·시강관(侍講官)을 겸하였다. 1430년 우군동지총제(右軍同知摠制)가 되고, 이듬해 《칠정산내편(七政算內篇)》을 지어 역법(曆法)을 개정하였으며, 1432년 예문관제학 ·춘추관동지사를 거쳐 이조참판 ·충청도관찰사로 있다가, 1436년 부친상을 당하여 사직하였다. 1439년 형조참판에 기용되어 이듬해 형조판서에 승진, 사은사(謝恩使)로 명나라에 다녀왔고, 1442년 예문관대제학으로 《사륜요집(絲綸要集)》을 편찬하였다. 1443년 중추원지사 ·제조를 거쳐, 1445년 우참찬 때 《치평요람(治平要覽)》을 찬진(撰進)하였다. 1448년 이조판서가 되어 삼남지방의 전품(田品)을 심사하여 토지의 등급을 정하였고, 뒤에 공조판서 ·좌참찬을 거쳐 1452년(문종 2) 병조판서에 전임되었다. 1453년(단종 1) 계유정난(癸酉靖難) 때 수양대군(首陽大君:세조)을 도와 우의정이 되고 정난공신(靖難功臣) 1등에 책록, 하동부원군(河東府院君)에 봉해졌다. 1455년(세조 1) 영의정으로 좌익공신(佐翼功臣) 2등에 책록되고, 1458년 공신연(功臣宴)에서 불서(佛書) 간행을 반대하여 부여(扶餘)에 부처(付處)되었다. 뒤에 풀려나와 다시 부원군이 되고, 1465년 궤장(杖)을 받았다. 1468년(예종 즉위년)남이(南怡)의 옥사를 처리하여 익대공신(翊戴功臣) 3등에 책록되고, 1470년(성종 1) 원상(院相)으로서 국정을 총괄하고, 이듬해 좌리공신(佐理功臣) 2등이 되었다. 성삼문(成三問) ·신숙주(申叔舟) 등과 함께 훈민정음 창제에 참여하였고, 안지(安止) 등과 함께 《용비어천가》를 지었으며, 천문 ·역법(曆法) ·아악 등에 관한 책을 많이 편찬하였다. 문집에 《학역재집(學易齋集)》이 있고, 편저로 《고려사(高麗史)》 《역대역법(歷代曆法)》 《역대병요(歷代兵要)》 《자치통감훈의(資治通鑑訓義)》 등이 있다.
● 김시습 [金時習, 1435~1493] 조선 전기의 학자. 본관 강릉(江陵). 자 열경(悅卿). 호 매월당(梅月堂)·동봉(東峰)·청한자(淸寒子)·벽산(碧山). 법호 설잠(雪岑). 시호 청간(淸簡). 생육신(生六臣)의 한 사람이다. 서울 성균관 부근에 있던 사저(私邸)에서 출생하였으며, 신동·신재(神才)로 이름이 높았다. 3세 때 보리를 맷돌에 가는 것을 보고 “비는 아니 오는데 천둥소리 어디서 나는가, 누른 구름 조각조각 사방으로 흩어지네(無雨雷聲何處動 黃雲片片四方分)”라는 시를 읊었다 하며, 5세 때 이 소식을 들은 세종에게 불려가 총애를 받았다. 15세 되던 해에 어머니를 여의고 외가에 몸을 의탁했으나, 3년이 채 못 되어 외숙모도 별세하여 다시 상경했을 때는 아버지도 중병을 앓고 있었다. 이러한 가정적 역경 속에서 훈련원 도정(都正) 남효례(南孝禮)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였으나 그의 앞길은 순탄하지 못하였다. 이어 삼각산 중흥사(重興寺)에서 공부하다가 수양대군이 단종을 내몰고 왕위에 올랐다는 소식을 듣고 통분하여, 책을 태워버리고 중이 되어 이름을 설잠이라 하고 전국으로 방랑의 길을 떠났다. 북으로 안시향령(安市香嶺), 동으로 금강산과 오대산, 남으로 다도해(多島海)에 이르기까지 9년간을 방랑하면서 《탕유관서록(宕遊關西錄)》 《탕유관동록(宕遊關東錄)》 《탕유호남록(宕遊湖南錄)》 등을 정리하여 그 후지(後志)를 썼다. 1463년(세조 9) 효령대군(孝寧大君)의 권유로 잠시 세조의 불경언해(佛經諺解) 사업을 도와 내불당(內佛堂)에서 교정 일을 보았으나 1465년(세조 11) 다시 경주 남산에 금오산실(金鰲山室)을 짓고 입산하였다. 2년 후 효령대군의 청으로 잠깐 원각사(圓覺寺) 낙성회에 참가한 일이 있으나 누차 세조의 소명(召命)을 받고도 거절, 금오산실에서 한국 최초의 한문소설 《금오신화(金鰲新話)》를 지었고, 《산거백영(山居百詠)》(1468)을 썼다. 이곳에서 6∼7년을 보낸 후 다시 상경하여 성동(城東)에서 농사를 지으며 《산거백영 후지》(1476)를 썼다. 1481년(성종 12)에 환속(還俗), 안씨(安氏)를 아내로 맞이하였다. 그러나 1483년 다시 서울을 등지고 방랑의 길을 나섰다가 충남 부여(扶餘)의 무량사(無量寺)에서 죽었다. 그는 끝까지 절개를 지켰고, 유·불(儒佛) 정신을 아울러 포섭한 사상과 탁월한 문장으로 일세를 풍미하였다. 1782년(정조 6) 이조판서에 추증, 영월(寧越)의 육신사(六臣祠)에 배향(配享)되었다.
● 남이 [南怡, 1441~1468] 조선 전기의 무신. 본관 의령(宜寧). 시호 충무(忠武). 태종의 외손(外孫)이다. 1457년(세조3) 약관의 나이로 무과(武科)에 장원, 세조의 지극한 총애를 받았다. 1467년(세조13) 이시애(李施愛)가 북관(北關)에서 난을 일으키자 우대장(右大將)으로 이를 토벌, 적개공신(敵愾功臣) 1등에 오르고, 의산군(宜山君)에 봉해졌으며 이어서 서북변(西北邊)의 건주위(建州衛)를 정벌하고 28세의 나이로 병조판서에 올랐다. 1468년 예종이 즉위한 후 대궐에서 숙직하던 중 혜성(彗星)이 나타난 것을 보고, 묵은 것이 없어지고 새 것이 나타날 징조라고 말하자, 그에게 항상 질투를 느껴오던 유자광(柳子光)이 엿듣고 역모를 획책한다고 모함하였다. 또한 남이가 여진토벌(女眞討伐) 때 읊은 시 ‘白頭山石磨刀盡, 豆滿江水飮馬無, 男兒二十未平國, 後世誰稱大丈夫’ 속의 ‘미평국(未平國)’이란 글귀를 ‘미득국(未得國)’이라 하였다고 조작한 사실은 유명하다. 즉 ‘나라를 평정하지 못하면’을 ‘나라를 얻지 못하면’으로 왜곡하여, 반역의 뜻이 있다고 모함받아 영의정 강순(康純) 등과 함께 주살(誅殺)되었다. 1818년(순조18) 관작(官爵)이 복구되었다.
● 유자광 [柳子光, ?~1512] 조선 세조·연산군 때의 문신. 본관 영광(靈光). 자 우복(于復). 중추부지사 규(規)의 서자(庶子)로 원래 건춘문(建春門)을 지키는 갑사 (甲士)출신이었다. 1467년(세조 13) 이시애(李施愛)의 난에 자진 출전하여, 난이 끝나자 병조정랑이 되었고, 온양별시문과(溫陽別試文科)에 응시하여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유자광은 자기보다 뛰어난 남이(南怡)를 전부터 질투해 오다가 1468년 왕위에 오른 예종이 남이를 좋아하지 않는 것을 눈치 채고 남이의 언행과 시에서 꼬투리를 잡아 그가 반역의 뜻을 품었다고 왕에게 밀고하였다. 당시 영의정이던 강순(康純) 등을 연루시켜 죄목을 조작, 남이 ·강순을 비롯한 수많은 인사를 처형하게 하였고, 유자광은 이들을 숙청한 공으로 익대공신(翊戴功臣) 1등에 책록되었고 무령군(武靈君)에 봉해졌다. 그는 이때부터 자기보다 뛰어난 자를 모함하였는데, 1476년(성종 7)에는 한명회(韓明澮)를 모함하다가 도리어 관직에서 쫓겨났다. 이듬해 다시 도총관으로 임명되자 대간(臺諫)들이 이를 논핵하였으나 무위로 끝나고, 1478년 다시 조정을 문란하게 한 죄로 가산이 몰수되고 공신적(功臣籍)이 삭탈되었다가, 1481년 공신적을 다시 찾았다. 몇 차례 중국 사신으로 다녀온 뒤 1491년(성종 22) 황해도 관찰사가 되었다. 이보다 앞서 함양군으로 놀러 갔다가 시를 지어 현판(懸板)하게 하였는데, 그 뒤 김종직(金宗直)이 함양군수로 부임하여 그 현판을 떼어버리자, 이때부터 김종직에게 원한을 품었다. 김종직이 죽은 뒤에도 그의 문인 일파를 비롯한 영남 출신의 유림들을 성종이 대거 기용하여 훈구파(勳舊派)와 맞서는 신진 세력을 이루었다. 이에 유자광은 연산군 4년 《성종실록》을 편찬할 때 김일손(金馹孫)이 사초(史草)에 그의 스승 김종직이 지은 《조의제문(弔義帝文)》을 실은 것을 기화로 삼아, 이는 세조가 왕위를 빼앗은 데 대한 비유라고 연산군을 충동질하여 마침내 무오사화(戊午史禍)를 일으킴으로써 수많은 충신이 죽거나 축출 유배되었다. 이로써 권세의 정상에 오른 그는 종1품 숭록대부(崇祿大夫)가 되었으며, 그 뒤 대간들의 여러 차례에 걸친 탄핵으로 한때 파직되었다가, 중종반정(中宗反正)이 일어나자 전부터 인연이 있던 성희안(成希顔)과 손잡고 의거에 참여하여 이번에는 정국공신(靖國功臣) 1등에 무령부원군으로 봉해졌다. 그러나 다음해 대간 ·홍문관 ·예문관 등이 들고 일어나 탄핵을 계속하여 훈작이 취소되고 흥양(興陽)에 부처(付處)되었다가 해평(海平)에 유배되었다. 이어 경상도 변두리로 이배(移配)되었는데 그곳에서 죽었다.
● 임사홍 [任士洪, 1445~1506] 조선 전기의 권신. 본관 풍천(佯 川). 자 이의(而毅). 1465년(세조 11) 알성문과에 급제했다. 아들 광재(光載)와 숭재(崇載)가 각각 예종과 성종의 사위가 된 뒤부터 차차 권력을 쥐게 되었다. 성종(成宗) 초 도승지 때 유자광(柳子光) 등과 파당을 만들고 횡포를 자행, 1478년(성종 9) 탄핵을 받고 유배되었으나 반대여론 속에 풀려났다. 1489년 왕명에 따라서 월산대군(月山大君) 정(撲 ) 의 신도비명(神道碑銘)을 지었으며 이듬해 승문원(承文院)에 보직되었으나 탄핵을 받고 파직되었다가 왕이 간관(諫官)을 갈아치운 뒤 다시 등용되었다. 이어 관압사(管押使)로 명(明)나라에 다녀왔으며 승문원에서 중국어를 가르쳤다. 1498년(연산군 4) 무오사화 이후 권세를 독점하고 있던 유자광, 연산군의 처남 신수근(愼守勤)과 제휴하여 연산군의 생모(生母) 윤비(尹妃)가 폐비(廢妃) ·사사(賜死)된 내력을 연산군에게 밀고, 1504년 갑자사화를 일으키게 했다. 같은 해 수차에 걸쳐 극형을 받게 되었으나 왕의 특명으로 모면하고 권세를 누리다가, 1506년 중종반정(中宗反正) 때 추살(推殺)되고 이어 부관참시(剖棺斬屍)되었다. 글씨는 촉체(蜀體)를 잘 썼고 특히 해서(楷書)에 뛰어났다. 글씨에 〈노문광공사신신도비명(盧文匡公思愼神道碑銘)〉(衿川) 〈박중선묘비명(朴仲善墓碑銘)〉(楊州) 〈이계손묘비명(李繼孫墓碑銘)〉(廣州) 〈한확묘비명(韓確墓碑銘)〉(廣州) 〈영원윤호묘비명(鈴原尹壕墓碑銘)〉(麻田) 〈서거정묘비명(徐居正墓碑銘)〉(廣州) 등이 있다.
● 김종직 [金宗直, 1431~1492] 조선 전기의 성리학자(性理學者) ·문신.본관 선산(善山). 자 계온(季) ·효관(孝). 호 점필재(畢齋). 시호 문충(文忠). 경남 밀양 출생. 1453년(단종1) 진사가 되고 1459년(세조5) 식년문과에 정과로 급제, 이듬해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했으며, 정자(正字) ·교리(校理) ·감찰(監察) ·경상도병마평사(慶尙道兵馬評事)를 지냈다. 성종(成宗) 초에 경연관(經筵官)이 되고, 함양군수 ·참교(參校) ·선산부사(善山府使)를 거쳐 응교(應敎)가 되어 다시 경연에 나갔다. 도승지 ·이조참판 ·경연동지사(經筵同知事) ·한성부윤 ·공조참판(工曹參判) ·형조판서 ·중추부지사(中樞府知事)에까지 이르렀다. 문장과 경술(經術)에 뛰어나 이른바 영남학파(嶺南學派)의 종조(宗祖)가 되었고, 문하생으로는 정여창(鄭汝昌) ·김굉필(金宏弼) ·김일손(金馹孫) ·유호인(兪好仁) ·남효온(南孝溫) 등이 있다. 성종의 특별한 총애를 받아 자기의 문인들을 관직에 많이 등용시켰으므로 훈구파(勳舊派)와의 반목과 대립이 심하였다. 그가 죽은 후인 1498년(연산군4) 그가 생전에 지은 조의제문(弔義帝文)을 사관(史官)인 김일손이 사초(史草)에 적어 넣은 것이 원인이 되어 무오사화(戊午士禍)가 일어났다. 이미 죽은 그는 부관참시(剖棺斬屍)를 당하였으며, 그의 문집이 모두 소각되고, 김일손 ·권오복(權五福) 등 많은 제자가 죽음을 당하였다. 중종(中宗)이 즉위하자 그 죄가 풀리고 숙종(肅宗) 때 영의정이 추증되었다. 밀양의 예림서원(禮林書院), 구미의 금오서원(金烏書院), 함양의 백연서원(栢淵書院), 금산(金山)의 경렴서원(景濂書院), 개령(開寧)의 덕림서원(德林書院)에 제향되었다. 문집에 《점필재집(畢齋集)》, 저서에 《유두유록(流頭遊錄)》 《청구풍아(靑丘風雅)》 《당후일기(堂後日記)》 등이 있고, 편서에 《동문수(東文粹)》 《일선지(一善誌)》 《이준록(彛尊錄)》 등이 있다.
● 이극돈 [李克墩, 1435~1503]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 광주(廣州). 자 사고(士高). 1457년(세조 3) 친시문과(親試文科)에 급제하고 전농시주부(典農寺注簿) ·성균관직강(成均館直講) ·응교(應敎) 등을 역임했다. 1468년 문과중시(文科重試)에 을과(乙科)로 급제하고 예조참의(禮曹參議)에 승진, 이어 한성부우윤(漢城府右尹), 1470년(성종 1) 대사헌 ·형조참판을 거쳐 이듬해 좌리공신(佐理功臣) 4등으로 광원군(廣原君)에 봉해지고 1473년 성절사(聖節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476년 예조참판 때 주청사(奏請使)가 되어 재차 명나라에 다녀오고, 1487년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이 되었다. 1494년 이조판서에 이어 병조 ·호조의 판서를 역임하였고, 평안(平安) ·강원(江原) 등의 관찰사를 거쳐 좌찬성(左贊成)에 이르렀다. 훈구파(勳舊派)의 거물로서 신진 사림파(士林派)와 반목하던 중 유자광(柳子光)을 시켜 김일손(金馹孫) 등을 탄핵, 무오사화를 일으켜, 뒤에 시호 익평(翼平) 및 관직이 추탈되었다.
● 김굉필 [金宏弼, 1454~1504] 조선 전기의 성리학자. 본관 서흥(瑞興). 자 대유(大猷). 호 사옹(蓑翁)·한훤당(寒喧堂). 시호는 문경(文敬). 김종직(金宗直)의 문하에서 학문을 배우면서 특히 《소학》에 심취하여 ‘소학동자’라 지칭되었다. 1480년(성종 11) 초시에 합격하였으며, 1494년 경상도관찰사 이극균(李克均)에 의해 유일(遺逸)로 천거되어 주부(主簿)·감찰·형조좌랑 등을 역임하였다. 1498년 무오사화가 일어나자 평안도 희천에 유배되었는데, 그곳에서 조광조(趙光祖)를 만나 학문을 전수하였다. 1504년 갑자사화로 극형에 처해졌으나 중종반정 이후에 신원되어 도승지가 추증되고, 1517년에는 정광필(鄭光弼) 등에 의해 우의정이 추증되었다. 학문경향은 정몽주(鄭夢周)·길재(吉再)로 이어지는 의리지학(義理之學)을 계승하였으며, 치인(治人)보다는 수기(修己)에 중점을 두었다. 문인으로는 조광조·이장곤(李長坤)·김안국(金安國) 등이 있으며, 16세기 기호사림파의 주축을 형성하였다. 1610년(광해군 2) 정여창(鄭汝昌)·조광조·이언적(李彦迪)·이황(李滉) 등과 함께 5현으로 문묘에 종사됨으로써 조선 성리학의 정통을 계승한 인물로 인정받았다. 아산의 인산서원(仁山書院), 희천의 상현서원(象賢書院), 순천(順天)의 옥천서원(玉川書院), 달성의 도동서원(道東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문집에 《한훤당집》, 저서에 《경현록(景賢錄)》 《가범(家範)》 등이 있다.
● 서거정 [徐居正, 1420~1488] 조선 전기의 문신 ·학자. 본관 달성(達城), 자 강중(剛中), 호 사가정(四佳亭), 시호 문충(文忠)이다. 1444년(세종 26) 식년문과에 급제, 사제감직장(司宰監直長)을 지냈다. 1451년(문종 1) 사가독서(賜暇讀書) 후 집현전박사(集賢殿博士) 등을 거쳐 1456년(세조 2) 문과중시(文科重試)에 급제, 1457년 문신정시(文臣庭試)에 장원, 공조참의 등을 역임했다. 1460년 이조참의 때 사은사(謝恩使)로 명나라에 다녀와서 대사헌에 올랐으며, 1464년 조선시대 최초로 양관 대제학(兩館大提學)이 되었다. 1466년 다시 발영시(拔英試)에 장원한 후 육조(六曹)의 판서를 두루 지내고 1470년(성종 1) 좌찬성(左贊成)에 이르렀으며 이듬해 좌리공신(佐理功臣)이 되고 달성군(達城君)에 책봉되었다. 45년간 여섯 왕을 섬겼다. 문장과 글씨에 능하여 《경국대전(經國大典)》 《동국통감(東國通鑑)》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편찬에 참여했으며, 또 왕명을 받고 《향약집성방(鄕藥集成方)》을 국역(國譯)했다. 성리학(性理學)을 비롯, 천문·지리·의약 등에 정통했다. 문집에 《사가집(四佳集)》 저서에 《동인시화(東人詩話)》 《동문선(東文選)》 《역대연표(歷代年表)》 《태평한화(太平閑話)》 《필원잡기(筆苑雜記)》 《골계전(滑稽傳)》이 있으며 글씨에는 《화산군권근신도비(花山君權近神道碑)》(忠州)가 있다. 대구(大邱) 귀암서원(龜巖書院)에 제향되었다.
● 박원종 [朴元宗, 1467~1510] 조선 전기의 무신. 본관 순천(順天), 자 백윤(伯胤), 시호 무열(武烈)이다. 무술에 뛰어나서 음보(蔭補)로 무관직에 기용되었다. 1486년(성종 17) 선전관으로 있을 때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내승(宣傳內乘)으로 승진, 오랫동안 왕의 측근이 되었다. 1492년 성종의 특지(特旨)로 동부승지에 발탁된 후 공조·병조의 참의(參議)를 거쳐, 연산군 때 중추부지사(中樞府知事) 겸 경기도관찰사, 함경도 병마절도사를 지낸 다음 평성군(平城君)에 봉해지고 도총부 도총관(都摠管)을 겸직하였다. 1506년 성희안(成希顔)·유순정(柳順汀) 등과 함께 연산군을 폐하고 중종을 옹립하는 반정(反正)에 주동적 역할을 맡아 정국공신(靖國功臣) 1등에 책록되었다. 1507년에는 이과(李顆)의 옥사(獄事)를 다스린 공으로 정난공신(定難功臣) 1등에 책록되었다. 이듬해 사은사(謝恩使)로 명나라에 다녀와서 1509년 영의정에 오르고 평성부원군에 봉해졌다. 중종의 묘정(廟庭)에 배향되었다.
● 성희안 [成希顔, 1461~1513]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 창녕(昌寧). 자 우옹(愚翁). 호 인재(仁齋). 시호 충정(忠定). 1480년(성종 11) 생원이 되고 1485년 별시문과(別試文科)에 급제, 정자(正字)를 지냈다. 1504년(연산군 10) 이조참판 겸 부총관(副摠官) 때 양화도(楊花渡) 놀이에서 왕의 횡포를 풍자한 시를 지어 바침으로써 미움을 사 무신직(武臣職)에 좌천되었다. 1506년 박원종(朴元宗) 등과 중종반정(中宗反正)을 일으켜 연산군을 폐하는 데 공을 세우고 정국공신(靖國功臣) 1등에 형조판서가 되었다. 이어 창산부원군(昌山府院君)에 봉해지고 주청사(奏請使)로 명(明)나라에 가서 반정을 납득시켰다. 귀국 후 우의정을 거쳐 1513년(중종 8) 영의정에 이르렀다. 중종 묘정(廟庭)에 배향되었다
● 김처선 [金處善, ?~1505] 조선 전기의 환관(宦官). 본관 전의(全義). 문종 때 영해로 유배되었다가, 인종 때 풀려나 직첩이 되돌려졌다. 1455년(단종 3) 정변에 관련되어 삭직·유배되고, 세조 때 복직되었다. 1460년(세조 6) 원종공신(原從功臣) 3등에 책록되었으나, 세조의 미움을 받아 자주 장형을 당하였다. 성종 때에는 의술을 알아 대비의 신병치료에 이바지하여 가자(加資)되고, 자헌대부(資憲大夫)에 이르렀다. 연산군이 즉위하자 다시 시종에 임하였으나, 직언을 잘하여 미움을 받았다. 1505년 연산군이 스스로 창안한 처용희(處容戱)를 벌여 그 음란함이 극에 달하자, "이 늙은 신(臣)은 4대 임금을 섬겨 대략 서사(書史)에는 통하 바, 고금의 군왕으로 이토록 문란한 군왕은 없었소이다"라고 극간(極諫)하였다. 연산군에 의해 직접 다리와 혀가 잘려 죽고, 부모의 무덤까지 헐렸다. '처(處)'자 사용을 금하여 처용무(處容舞)를 풍두무(豊頭舞)로 고치기까지 하였다. 1506년(중종 1) 고향에 정문(旌門)이 세워졌다.
● 김안로 [金安老, 1481~1537]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 연안(延安). 자 이숙(叔). 호 희락당(希樂堂) ·용천(龍泉) ·퇴재(退齋). 1506년(중종 1) 별시문과(別試文科)에 갑과로 급제한 뒤,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하고 대사간을 지냈다. 1519년 기묘사화 때는 조광조(趙光祖) 등과 함께 유배되었다. 1522년에 부제학(副提學)이 되고, 1524년에는 대사헌을 거쳐 이조판서가 되었다. 아들 희(禧)가 효혜공주(孝惠公主)와 결혼한 뒤부터 권력 남용이 잦아 영의정 남곤(南袞), 대사헌 이항(李沆) 등의 탄핵을 받고 경기 풍덕(豊德)에 유배되었다. 1527년 남곤이 죽고 그 일파가 실각되자, 1529년에 풀려나와, 1531년에 다시 등용되었다. 이조판서를 거쳐, 1534년에는 우의정이 되고, 이듬해 좌의정에 이르렀다. 정적(政敵)에 대해서는 종친(宗親) ·공경(公卿)이라 할지라도 이를 축출하여 살해하는 등 무서운 공포정치를 한 끝에, 문정왕후(文定王后)의 폐위를 도모하다가 중종의 밀령을 받은 윤안임(尹安任)과 대사헌 양연(梁淵)에 의해 체포되어 유배, 이어 사사(賜死)되었다. 허항(許沆) ·채무택(蔡無擇)과 함께 정유삼흉(丁酉三凶)으로 일컬어진다. 저서에 《용천담적기(龍泉淡寂記)》가 있다.
● 윤원형 [尹元衡, ?~1565]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 파평(坡平). 자 언평(彦平). 소윤(小尹)의 영수이다. 중종의 제2계비 문정왕후(文定王后)의 동생. 1533년(중종 28)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 사관(史官)에 등용된 뒤 여러 벼슬을 거치는 동안 세력을 잡아 세자(世子:仁宗)를 폐위하고, 경원대군(慶原大君:明宗) 환()을 세자로 책봉하려는 모의로 세자의 외숙인 대윤(大尹)의 영수 윤임(尹任)과 다투다 1544년 인종이 즉위하자 파직당하였으나 다음 해 명종이 즉위, 이어 문정왕후의 수렴청정(垂簾聽政)이 시작되면서 득세, 대윤의 윤임·유관(柳灌)·유인숙(柳仁淑) 등을 사사(賜死)하게 하였다. 을사사화의 공으로 보익공신(保翼功臣) 3등, 이어 위사공신(衛社功臣) 2등에 책록되고 서원군(瑞原君)에 봉해졌다. 1546년(명종 1), 형 원로(元老)와 권세(權勢)를 다투어 유배하게 하고, 이듬해 양재역(良才驛) 벽서사건을 계기로 대윤의 잔당을 모두 숙청하였다. 1548년 이조판서, 1551년 우의정, 1558년 다시 우의정을 거쳐서, 1560년(명종 15) 서원부원군(瑞原府院君)에 봉해지고, 1563년 영의정에 올랐다. 1565년 문정왕후가 죽자 삭직되고 강음(江陰)에 귀양가서 죽었다.
● 서경덕 [徐敬德, 1489~1546] 조선 중기의 유학자·주기론(主氣論)의 선구자. 본관 당성(唐城), 자 가구(可久), 호 화담(花潭)·복재(復齋), 시호 문강(文康)이며 부위(副尉) 서호번(徐好蕃)의 아들이다. 화담이라는 호는 그가 송도의 화담에 거주했으므로 사람들이 존경하여 부른 것이다. 가세가 빈약하여 독학으로 공부를 하였고, 주로 산림에 은거하면서 문인을 양성하였으며, 과거에는 뜻을 두지 않았다. 조식(曺植)·성운(成運) 등 당대의 처사(處士)들과 지리산·속리산 등을 유람하면서 교유하였으며, 1544년 김안국(金安國)이 후릉참봉(厚陵參奉)에 천거하였으나 출사하지 않았다. 학문경향은 궁리(窮理)와 격치(格致)를 중시하였으며, 선유의 학설을 널리 흡수하고 자신의 견해는 간략히 개진하였다. 또한 주돈이(周敦)·소옹(邵雍)·장재(張載) 등 북송(北宋) 성리학자의 학문에 많은 관심을 보였다. 단편 논저로는 〈원리설(原理說)〉 〈이기설(理氣說)〉 〈태허설(太虛說)〉 〈귀신사생론(鬼神死生論)〉 등 네 편이 있는데, 이들 논저에는 '이(理)'보다는 '기(氣)'를 중시하는 주기철학의 입장이 정리되어 있다. 〈태허설〉에서는 우주의 근본원리를 태허 또는 선천(先天)이라 하고 태허에서 생성 발전된 만상(萬象)을 후천(後天)이라 하였으며, 〈귀신사생론〉에서는 인간의 죽음도 우주의 기에 환원된다는 사생일여(死生一如)를 주장하여 기의 불멸성을 강조하고, 불교의 인간 생명이 적멸한다는 논리를 배격하였다. 대표적 문인으로는 허엽(許曄)·박순(朴淳)·민순(閔純)·박지화(朴枝華)·서기(徐起)·한백겸(韓百謙)·이지함(李之函) 등이 있으며, 그의 학문은 남북분당기에 북인의 사상을 형성하는 데 큰 영향을 주었다. 황진이·박연폭포와 함께 개성을 대표한 송도3절(松都三絶)로 지칭되기도 하며, 황진이의 유혹을 물리친 일화는 시조작품으로도 전해질 만큼 유명하다. 노장사상으로 대표되는 도가사상(道家思想)에도 관심을 보여 도가의 행적을 기록한 《해동이적(海東異蹟)》에는 그의 도가적인 성향이 소개되었다. 그의 학풍은 조선 전기의 사상계의 흐름이 주자성리학 일색만이 아니었던 분위기를 보여주며, 그의 문인들 중에서 양명학자나 노장사상에 경도된 인물이 나타나는 것은 주목할 만하다. 한편, 북한에서는 그의 주기철학을 유물론의 원류로 평가하여 그의 철학을 높이 평가한다. 개성의 숭양서원(崧陽書院)과 화곡서원(花谷書院)에 제향되었으며, 문집으로는 《화담집(花潭集)》이 있다.
● 황진이 [黃眞伊, ?~?] 조선시대의 시인 ·명기(名妓). 일명 진랑(眞娘). 기명(妓名) 명월(明月). 개성(開城) 출생. 중종 때 진사(進士)의 서녀(庶女)로 태어났으나, 사서삼경(四書三經)을 읽고 시(詩) ·서(書) ·음률(音律)에 뛰어났으며, 출중한 용모로 더욱 유명하였다. 15세 무렵에 동네 총각이 자기를 연모하다가 상사병(相思病)으로 죽자 기계(妓界)에 투신, 문인(文人) ·석유(碩儒)들과 교유하며 탁월한 시재(詩才)와 용모로 그들을 매혹시켰다. 당시 10년 동안 수도(修道)에 정진하여 생불(生佛)이라 불리던 천마산(天馬山) 지족암(知足庵)의 지족선사(知足禪師)를 유혹하여 파계(破戒)시켰고, 당대의 대학자 서경덕(徐敬德)을 유혹하려 하였으나 실패한 뒤, 사제관계(師弟關係)를 맺었다. 당대의 일류 명사들과 정을 나누고 벽계수(碧溪守)와 깊은 애정을 나누며 난숙한 시작(詩作)을 통하여 독특한 애정관(愛情觀)을 표현했다. ‘동지달 기나긴 밤을 한허리를 둘에 내어’는 그의 가장 대표적 시조이다. 서경덕 ·박연폭포(朴淵瀑布)와 함께 송도삼절(松都三絶)로 불렸다. 작품으로 《만월대 회고시(滿月臺懷古詩)》《박연폭포시(朴淵瀑布詩)》《봉별소양곡시(奉別蘇陽谷詩)》등이 있다.
● 허난설헌 [許蘭雪軒, 1563~1589] 조선 중기의 여류시인. 본관 양천(陽川). 호 난설헌. 별호 경번(景樊). 본명 초희(楚姬). 강릉(江陵) 출생. 균(筠)의 누이. 이달(李達)에게 시를 배워 천재적인 시재(詩才)를 발휘했으며, 1577년(선조 10) 김성립(金誠立)과 결혼했으나 원만하지 못했다고 한다. 불행한 자신의 처지를 시작(詩作)으로 달래어 섬세한 필치와 여인의 독특한 감상을 노래했으며, 애상적 시풍의 특유한 시세계를 이룩하였다. 작품 일부를 동생 균이 명나라 시인 주지번(朱之蕃)에게 주어 중국에서 시집 《난설헌집》이 간행되어 격찬을 받았고 1711년 분다이야 지로[文台屋次郞]에 의해 일본에서도 간행, 애송되었다. 작품으로는 시에 《유선시(遊仙詩)》 《빈녀음(貧女吟)》 《곡자(哭子)》 《망선요(望仙謠)》 《동선요(洞仙謠)》 《견흥(遣興)》 등 총 142수가 있고, 가사(歌辭)에 《원부사(怨婦辭)》 《봉선화가》 등이 있다.
● 허균 [許筠, 1569~1618] 조선시대 중기 문신·소설가. 본관은 양천(陽川), 자는 단보(端甫), 호는 교산(蛟山)·성소(惺所)·백월거사(白月居士)이다. 1589년(선조 22) 생원이 되고, 1594년 정시문과에 급제, 검열(檢閱)·세자시강원 설서(世子侍講院說書)를 지냈다. 1597년 문과중시에 장원급제, 이듬해 황해도도사가 되었다가 서울 기생을 끌어들였다는 탄핵을 받아 파직되었다. 뒤에 춘추관기주관(春秋館記注官)·형조정랑(刑曹正郞)을 지내고 1602년 사예(司藝)·사복시정(司僕寺正)을 거쳐 전적(典籍)·수안군수(遂安郡守)를 역임하였다. 1606년 원접사(遠接使) 종사관(從事官)이 되어 명나라 사신 주지번(朱之蕃)을 영접하여 명문장으로 명성을 떨쳤다. 1610년(광해군 2) 진주부사(陳奏副使)로 명나라에 가서 한국 최초의 천주교 신도가 되었고, 천주교 12단(端)을 얻어왔다. 같은 해 시관(試官)이 되었으나 친척을 참방(參榜)했다는 탄핵을 받고 파직 후 태인(泰仁)에서 창작에 전념하다가 1613년 계축옥사(癸丑獄事) 때 평소 친교가 있던 박응서(朴應犀) 등이 처형되자 신변의 안전을 위해 권신 이이첨(李爾瞻)에게 아부하여 예조참의·호조참의·승문원부제조(承文院副提調)를 지냈다. 1617년 폐모론(廢母論)을 주장하는 등 대북파의 일원으로 왕의 신임을 얻었다. 같은 해 좌참찬(左參贊)으로 승진하고, 광해군 폭정에 항거하여 이듬해 하인준(河仁俊)·김개(金) ·김우성(金宇成) 등과 반란을 계획하다가 탄로되어 1618년 가산이 적몰(籍沒)되고 참형되었다. 시문(詩文)에 뛰어난 천재로 여류시인 난설헌(蘭雪軒)의 동생이며 소설 《홍길동전(洪吉童傳)》은 사회모순을 비판한 조선시대 대표적 걸작이다. 작품으로 《교산시화(蛟山詩話)》 《성소부부고(惺所覆藁)》 《성수시화(惺詩話)》 《학산초담(鶴山樵談)》 《도문대작(屠門大爵)》 《한년참기(旱年讖記)》 《한정록(閑情錄)》 등이 있다.
● 정철 [鄭澈, 1536~1593] 조선 중기의 문신 ·시인. 본관 연일(延日). 자 계함(季涵), 호 송강(松江). 시호 문청(文淸). 기대승(奇大升)·김인후(金麟厚)·양응정(梁應鼎)의 문하생. 어려서 인종(仁宗)의 귀인(貴人)인 맏누이와 계림군(桂林君) 유(瑠)의 부인이 된 둘째 누이로 인하여 궁중에 출입하였는데 이 때 어린 경원대군(慶原大君:뒤에 明宗)과 친숙해졌다. 1545년(명종 즉위) 을사사화(乙巳士禍)에 계림군(桂林君)이 관련되자 아버지가 유배당할 때 배소(配所)에 따라다녔다. 1551년 특사되어 온 가족이 고향인 창평(昌平)으로 이주, 김윤제(金允悌)의 문하가 되어 성산(星山) 기슭의 송강(松江)가에서 10년 동안 수학할 때 기대승 등 당대의 석학들에게 배우고 이이(李珥)·성혼(成渾) 등과도 교유하였다. 1561년 진사시에, 다음 해 별시문과에 각각 장원, 전적(典籍) 등을 역임하고 1566년 함경도 암행어사를 지낸 뒤 이이와 함께 사가독서(賜暇讀書)하였다. 1578년(선조 11) 장악원정(掌樂院正)으로 기용되고, 곧 이어 승지에 올랐으나 진도(珍島)군수 이수(李銖)의 뇌물사건으로 동인(東人)의 공격을 받아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1580년 강원도 관찰사로 등용, 3년 동안 강원·전라·함경도 관찰사를 지내면서 시작품(詩作品)을 많이 남겼다. 이 때 《관동별곡(關東別曲)》을 지었고, 또 시조 《훈민가(訓民歌)》 16수를 지어 널리 낭송하게 함으로써 백성들의 교화에 힘쓰기도 하였다. 1585년 관직을 떠나 고향에 돌아가 4년 동안 작품 생활을 하였다. 이 때 《사미인곡(思美人曲)》 《속미인곡(續美人曲)》 등 수많은 가사와 단가를 지었다. 1589년 우의정으로 발탁되어 정여립(鄭汝立)의 모반사건을 다스리게 되자 서인(西人)의 영수로서 철저하게 동인 세력을 추방했고, 다음해 좌의정에 올랐으나 1591년 건저문제(建儲問題)를 제기하여 동인인 영의정 이산해(李山海)와 함께 광해군(光海君)의 책봉을 건의하기로 했다가 이산해의 계략에 빠져 혼자 광해군의 책봉을 건의했다. 이 때 신성군(信城君)을 책봉하려던 왕의 노여움을 사 파직, 진주(晉州)로 유배, 이어 강계(江界)로 이배(移配)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 때 부름을 받아 왕을 의주(義州)까지 호종, 다음 해 사은사(謝恩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얼마 후 동인들의 모함으로 사직하고 강화(江華)의 송정촌(松亭村)에 우거(寓居)하면서 만년을 보냈다. 당대 가사문학의 대가로서 시조의 고산(孤山) 윤선도(尹善道)와 함께 한국 시가사상 쌍벽으로 일컬어진다. 창평(昌平)의 송강서원, 연일군의 오천서원(烏川書院) 별사(別祠)에 배향(配享)되었다. 문집으로 《송강집》 《송강가사》 《송강별추록유사(松江別追錄遺詞)》, 작품으로 시조 70여 수가 전한다.
● 이언적 [李彦迪, 1491~1553] 조선 중기의 문신.본관 여주. 호 회재(晦齋)·자계옹(紫溪翁). 자 복고(復古). 이름 적. 시호 문원(文元). 원래 이름은 적(迪)이었으나 중종의 명령으로 언적(彦迪)으로 고쳤다. 경주에서 태어나 외숙인 손중돈(孫仲暾)에게 글을 배웠으며 1514년(중종 9)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을 시작하였다. 사헌부 지평·장령·밀양부사 등을 거쳐 1530년(중종 25) 사간원 사간에 임명되었는데, 김안로(金安老)의 재등용을 반대하다가 관직에서 쫓겨나 귀향한 후 자옥산에 독락당(獨樂堂)을 짓고 학문에 열중하였다. 1537년 김안로가 죽자 다시 관직에 나아가 홍문관 부교리·응교를 거쳐 이듬해에는 직제학에 임명되었다가 전주부윤이 되었다. 이 무렵 일강십목(一綱十目)으로 된 상소를 올려 올바른 정치의 도리를 논하였다. 그 후 성균관대사성·사헌부대사헌·홍문관부제학을 거쳐 1542년 이조·형조·예조 판서에 임명되었는데, 노모 봉양을 이유로 자주 사직을 하거나 외직으로 보내줄 것을 요청하여 안동부사·경상도관찰사에 임명되었다. 1544년 무렵부터 병이 생겨 거듭되는 관직 임명을 사양하였는데, 인종이 즉위한 다음해(1545)에 의정부 우찬성·좌찬성에 임명되었다. 그해 인종이 죽고 명종이 즉위하자 윤원형(尹元衡) 등이 사림(士林)을 축출하기 위해 을사사화(乙巳士禍)를 일으켰는데, 이때 의금부판사에 임명되어 사람들을 죄 주는 일에 참여했지만 자신도 곧 관직에서 물러났다. 1547년 을사사화의 여파인 양재역벽서(良才驛壁書) 사건이 일어나 사람들이 다시 축출될 때 그도 연루되어 강계로 유배되었다. 부인은 박숭부(朴崇阜)의 딸로 슬하에 자식이 없어 종제(從弟) 이통(李通)의 아들인 이응인(李應仁)으로 양자를 삼았으며, 서자로는 이전인(李全仁)이 있다. 1566년 이전인은 《진수팔조(進修八條)》의 상소를 올렸는데, 이는 그가 죽기 전에 작성해 놓은 것으로서, 임금의 학문에 필요한 《진덕수업(進德修業)》의 8가지 조목을 열거한 것이다. 그는 조선의 유학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함으로써 성리학의 정립에 선구적인 역할을 하였다. 27세 때 영남지방의 선배학자인 손숙돈(孫叔暾)과 조한보(曺漢輔) 사이에 벌어진 ‘무극태극(無極太極)’ 논쟁에 참여하여, 주리적(主理的) 관점에 입각하여 이들의 견해를 모두 비판하였다. 기(氣)보다 이(理)를 중시하는 주리적 성리설은 그 다음 세대인 이황(李滉)에게 계승되어 영남학파의 중요한 성리설이 되었으며, 조선 성리학의 한 특징을 이루게 되었다. 김안로 사후 그는 재등용되어 중종의 신임을 받으며 정치일선에 복귀하는데, 이때부터 중종 말년까지 약 20년간 그는 생애 중 가장 활발한 정치활동을 펴 나갔다. 그가 올린 〈일강십목소〉는 그의 정치사상을 대표하는 것으로서, 김안로 등 훈신들의 잘못에 휘말린 중종에 대한 비판의 뜻을 담고 있는 글이다. 왕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一綱] 왕의 마음가짐이라고 주장하고, 그것을 바로하기 위한 수단으로 열 가지 조목[十目]을 열거하였다. 유배기간 동안 그는 많은 저술을 남겼다. 《구인록》은 유학의 근본개념인 ‘인(仁)’에 대한 집중적인 관심을 나타낸 것이며, 《봉선잡의(奉先雜儀)》는 제례(祭禮)에 관한 책으로서 주자가례를 중심으로 여러 학자들의 예설(禮說)을 모아 당시 실정에 맞도록 편집한 것이다. 《대학장구보유(大學章句補遺)》와 《속대학혹문(續大學惑問)》은 《대학》에 대한 그의 독창적인 견해를 보여주는 책으로 주희의 《대학장구》나 《대학혹문》을 보완하려는 의도를 담고 있다. 특히 주희가 《대학장구》에서 제시한 체제를 그대로 따르지 않고 자기 나름대로의 학설을 제시하여 이를 개편하려고 한 시도는 그 이후의 도학자(道學者)들에 비해 독자적이고 자율적인 학문정신을 보여주고 있다. 《중용구경연의》는 진덕수(眞德秀)가 《대학연의》를 저술하여 정치의 도리를 밝혔지만 제왕학(帝王學)으로서는 부족한 점이 있어 이를 중용의 구경(九經)으로 보완하려는 의도에서 쓰여졌다. 완성을 보지 못한 책이지만 그는 여기에서 정치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왕의 마음이며 왕은 천도(天道)를 체득하여 배천(配天) ·경천(敬天)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명종의 묘정(廟庭)에 배향되었고, 1573년에는 경주의 옥산서원에 제향되었으며, 1610년(광해군 2) 문묘에 종사되었다. 이언적의 주요저술 원본은 ‘이언적수필고본일괄’이라고 하여 보물 제586호로 지정되어 독락당과 옥산서원에 보관되어 있으며, 다른 글들은 문집인 《회재집》에 실려 있다.
● 조식 [曺植, 1501~1572] 조선 중기의 학자. 본관 창녕(昌寧). 자 건중(楗仲). 호 남명(南冥). 시호 문정(文貞). 김우옹(金宇) ·곽재우(郭再祐)는 그의 문인이자 외손녀 사위이다. 삼가현(三嘉縣:지금의 합천) 토골[兎洞] 외가에서 태어났으며, 20대 중반까지는 대체로 서울에 살면서 성수침(成守琛) ·성운(成運) 등과 교제하며 학문에 열중하였고, 25세 때 《성리대전(性理大全)》을 읽고 깨달은 바 있어 이때부터 성리학에 전념하였다. 30세 때 처가가 있는 김해 탄동(炭洞)으로 이사하여 산해정(山海亭)을 짖고 살면서 학문에 정진하였다. 1538년 유일(遺逸)로 헌릉참봉(獻陵參奉)에 임명되었지만 관직에 나아가지 않다가, 45세 때 고향 삼가현에 돌아온 후 계복당(鷄伏堂)과 뇌룡정(雷龍亭)을 지어 살면서 제자들 교육에도 힘썼다. 1548~1559년 전생서 주부(典牲署主簿) ·단성현감 ·조지서 사지(造紙署司紙) 등 여러 벼슬에 임명되었지만 모두 사퇴하였다. 단성현감 사직 때 올린 상소는 조정의 신하들에 대한 준엄한 비판과 함께 국왕 명종과 대비(大妃) 문정왕후(文貞王后)에 대한 직선적인 표현으로 큰 파문을 일으켰다. 이렇게 모든 벼슬을 거절하고 오로지 처사(處士)로 자처하며 학문에만 전념하자 그의 명성은 날로 높아져, 1551년 오건(吳健)에 이어 정인홍(鄭仁弘) ·하항(河沆) ·김우옹 ·최영경(崔永慶) ·정구(鄭逑) 등 많은 학자들이 찾아와 학문을 배웠다. 1561년 지리산 기슭 진주 덕천동[德山洞:지금의 산청군 시천면]으로 이거하여 산천재(山天齋)를 지어 죽을 때까지 그곳에 머물며 강학(講學)에 힘썼다. 1566년 상서원 판관(尙瑞院判官)을 제수받고 왕을 만나 학문의 방법과 정치의 도리에 대해 논하고 돌아왔다. 1567년 즉위한 선조가 여러 차례 불렀으나 나아가지 않았으며, 1568년에는 올바른 정치의 도리를 논한 상소문 〈무진봉사(戊辰封事)〉를 올렸는데, 여기에서 논한 ‘서리망국론(胥吏亡國論)’은 당시 서리의 폐단을 극렬히 지적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의 사후인 1576년 그의 제자들이 덕천의 산천재 부근에 덕천서원을 건립한 데 이어 그의 고향 삼가현에 회현서원(晦峴書院:뒤에 龍巖書院)을, 1578년에는 김해에 신산서원(新山書院)을 세웠다. 광해군대에 대북(大北) 세력이 집권하자 조식의 문인들이 스승에 대한 추존사업을 적극적으로 전개하여 세 서원들이 모두 사액되었고 조식에게는 영의정이 추증되었다. 그가 살았던 시기는 사화기(士禍期)로 일컬어질 만큼 사화가 자주 일어난 시기로서 훈척(勳戚)정치의 폐해가 극심했던 때였다. 그는 성년기에 두 차례의 사화를 경험하면서 훈척정치의 폐해를 직접 목격한 탓에 출사를 포기하고 평생을 산림처사(山林處士)로 자처하며 오로지 학문과 제자들 교육에만 힘썼다. 그의 사상은 노장적(老莊的) 요소도 다분히 엿보이지만 기본적으로는 수기치인(修己治人)의 성리학적 토대 위에서 실천궁행을 강조했으며, 실천적 의미를 더욱 부여하기 위해 경(敬)과 아울러 의(義)를 강조하였다. 즉 경의협지(敬義夾持)를 표방하여 경으로서 마음을 곧게 하고 의로서 외부 사물을 처리해 나간다는 생활철학을 견지하였다. 이러한 신념을 바탕으로 그는 일상생활에서는 철저한 절제로 일관하여 불의와 타협하지 않았으며, 당시의 사회현실과 정치적 모순에 대해서는 적극적인 비판의 자세를 견지하였다. 학문방법론에 있어서도 초학자에게 《심경(心經)》 《태극도설》 등 성리학의 본원과 심성(心性)에 관한 내용을 먼저 가르치는 이황(李滉)의 교육방법을 비판하고 《소학》 《대학》 등 성리학적 수양에 있어서 기초적인 내용을 우선 가르쳐야 한다고 주장했다. 당시 이황과 기대승(奇大升)을 둘러싸고 일어난 이기심성(理氣心性) 논쟁에 대해서도 비판적인 시각에서 이를 ‘하학인사(下學人事)’를 거치지 않은 ‘상달천리(上達天理)’로 규정하고 ‘하학이상달(下學而上達)’의 단계적이고 실천적인 학문방법을 주장하였다. 그는 출사(出仕)를 거부하고 평생을 처사로 지냈지만 결코 현실을 외면한 것은 아니었다. 그가 남겨놓은 기록 곳곳에서 당시 폐정(弊政)에 시달리는 백성에 대한 안타까움을 나타내고 있으며, 현실정치의 폐단에 대해서도 비판과 함께 대응책을 제시하는 등 민생의 곤궁과 폐정개혁에 대해서도 적극적인 참여의지를 보여주고 있다. 그의 사상은 그의 제자들에게도 그대로 이어져 경상우도의 특징적인 학풍을 이루었다. 이들은 지리산을 중심으로 진주 ·합천 등지에 모여 살면서 유학을 진흥시키고, 임진왜란 때에는 의병활동에 적극 참여하는 등 국가의 위기 앞에 투철한 선비정신을 보여주었다. 그와 그의 제자들은 안동지방을 중심으로 한 이황의 경상좌도 학맥과 더불어 영남 유학의 두 봉우리를 이루었다. 그러나 선조대에 양쪽 문인들이 정치적으로 북인과 남인의 정파로 대립되고 정인홍 등 남명의 문인들이 인조반정(仁祖反正) 후 정치적으로 몰락한 뒤 남명에 대한 폄하(貶下)는 물론, 그 문인들도 크게 위축되어 남명학(南冥學)은 그 후 제대로 계승되지 못하였다. 저서에 문집 《남명집》과 그가 독서 중 차기(箚記) 형식으로 남긴 《학기유편(學記類編)》이 있고, 작품으로 《남명가》 《권선지로가(勸善指路歌)》 등이 있다.
● 이황 [李滉, 1501~1570] 조선 중기의 학자·문신. 본관 진성(眞城). 초명 서홍(瑞鴻). 자 경호(景浩). 초자 계호(季浩). 호 퇴계(退溪)·도옹(陶翁)·퇴도(退陶)·청량산인(淸凉山人). 시호 문순(文純). 경상북도 예안(禮安) 출생. 12세 때 숙부 이우(李)에게서 학문을 배우다가 1523년(중종 18) 성균관(成均館)에 입학, 1528년 진사가 되고 1534년 식년문과(式年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하였다. 부정자(副正子)·박사(博士)·호조좌랑(戶曹佐郞) 등을 거쳐 1539년 수찬(修撰)·정언(正言) 등을 거쳐 형조좌랑으로서 승문원교리(承文院校理)를 겸직하였다. 1542년 검상(檢詳)으로 충청도 암행어사로 나갔다가 사인(舍人)으로 문학(文學)·교감(校勘) 등을 겸직, 장령(掌令)을 거쳐 이듬해 대사성(大司成)이 되었다. 1545년(명종 즉위) 을사사화(乙巳士禍) 때 이기(李)에 의해 삭직되었다가 이어 사복시정(司僕寺正)이 되고 응교(應敎) 등의 벼슬을 거쳐 1552년 대사성에 재임, 1554년 형조·병조의 참의에 이어 1556년 부제학, 2년 후 공조참판이 되었다. 1566년 공조판서에 오르고 이어 예조판서, 1568년(선조 1) 우찬성을 거쳐 양관대제학(兩館大提學)을 지내고 이듬해 고향에 은퇴, 학문과 교육에 전심하였다. 이언적(李彦迪)의 주리설(主理說)을 계승, 주자(朱子)의 주장을 따라 우주의 현상을 이(理)·기(氣) 이원(二元)으로 설명, 이와 기는 서로 다르면서 동시에 상호 의존관계에 있어서, 이는 기를 움직이게 하는 근본 법칙을 의미하고 기는 형질을 갖춘 형이하적(形而下的) 존재로서 이의 법칙을 따라 구상화(具象化)되는 것이라고 하여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을 주장하면서도 이를 보다 근원적으로 보아 주자의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을 발전시켰다. 그는 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을 사상의 핵심으로 하는데, 즉 이가 발하여 기가 이에 따르는 것은 4단(端)이며 기가 발하여 이가 기를 타[乘]는 것은 7정(情)이라고 주장하였다. 사단칠정(四端七情)을 주제로 한 기대승(奇大升)과의 8년에 걸친 논쟁은 사칠분이기여부론(四七分理氣與否論)의 발단이 되었고 인간의 존재와 본질도 행동적인 면에서보다는 이념적인 면에서 추구하며, 인간의 순수이성(純粹理性)은 절대선(絶對善)이며 여기에 따른 것을 최고의 덕(德)으로 보았다. 그의 학풍은 뒤에 그의 문하생인 유성룡(柳成龍)·김성일(金誠一)·정구(鄭逑) 등에게 계승되어 영남학파(嶺南學派)를 이루었고, 이이(李珥)의 제자들로 이루어진 기호학파(畿湖學派)와 대립, 동서 당쟁은 이 두 학파의 대립과도 관련되었으며 그의 학설은 임진왜란 후 일본에 소개되어 그곳 유학계에 큰 영향을 끼쳤다.스스로 도산서원(陶山書院)을 창설, 후진양성과 학문연구에 힘썼고 현실생활과 학문의 세계를 구분하여 끝까지 학자의 태도로 일관했다. 중종·명종·선조의 지극한 존경을 받았으며 시문은 물론 글씨에도 뛰어났다. 영의정에 추증되고 문묘 및 선조의 묘정에 배향되었으며 단양(丹陽)의 단암서원(丹巖書院), 괴산의 화암서원(華巖書院), 예안의 도산서원 등 전국의 수십 개 서원에 배향되었다. 저서에 《퇴계전서(退溪全書):修正天命圖說·聖學十圖·自省錄·朱書記疑·心經釋疑·宋季之明理學通錄·古鏡重磨方·朱子書節要·理學通錄·啓蒙傳疑·經書釋義·喪禮問答·戊辰封事·退溪書節要·四七續編》이 있고 작품으로는 시조에 《도산십이곡(陶山十二曲)》, 글씨에 《퇴계필적(退溪筆迹)》이 있다.
● 이이 [李珥, 1536~1584] 조선중기의 학자. 정치가. 본관 덕수(德水), 자 숙헌(叔獻), 호 율곡(栗谷)·석담(石潭), 시호 문성(文成), 강원도 강릉 출생이다. 사헌부 감찰을 지낸 원수(元秀)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사임당 신씨이다. 1548년(명종 3) 진사시에 합격하고, 19세에 금강산에 들어가 불교를 공부하다가, 다음해 하산하여 성리학에 전념하였다. 22세에 성주목사 노경린(盧慶麟)의 딸과 혼인하고, 다음해 예안의 도산(陶山)으로 이황(李滉)을 방문하였다. 그해 별시에서 <천도책(天道策)>을 지어 장원하고, 이 때부터 29세에 응시한 문과 전시(殿試)에 이르기까지 아홉 차례의 과거에 모두 장원하여 ‘구도장원공(九度壯元公)’이라 일컬어졌다. 29세 때 임명된 호조좌랑을 시작으로 관직에 진출, 예조·이조의 좌랑 등의 육조 낭관직, 사간원정언·사헌부지평 등의 대간직, 홍문관교리·부제학 등의 옥당직, 승정원우부승지 등의 승지직 등을 역임하여 중앙관서의 청요직을 두루 거쳤다. 아울러 청주목사와 황해도관찰사를 맡아서 지방의 외직에 대한 경험까지 쌓는 동안, 자연스럽게 일선 정치에 대한 폭넓은 경험을 하였고, 이러한 정치적 식견과 왕의 두터운 신임을 바탕으로 40세 무렵 정국을 주도하는 인물로 부상하였다. 그동안 《동호문답(東湖問答)》 《만언봉사(萬言封事)》 《성학집요(聖學輯要)》 등을 지어 국정 전반에 관한 개혁안을 왕에게 제시하였고, 성혼과 ‘이기 사단칠정 인심도심설(理氣四端七情人心道心說)’에 대해 논쟁하기도 하였다. 1576년(선조 9) 무렵 동인과 서인의 대립 갈등이 심화되면서 그의 중재 노력이 수포로 돌아가고, 더구나 건의한 개혁안이 선조에 의해 받아들여지지 않자 벼슬을 그만두고 파주 율곡리로 낙향하였다. 이후 한동안 관직에 부임하지 않고 본가가 있는 파주의 율곡과 처가가 있는 해주의 석담(石潭)을 오가며 교육과 교화 사업에 종사하였는데, 그동안 《격몽요결(擊蒙要訣)》을 저술하고 해주에 은병정사(隱屛精舍)를 건립하여 제자교육에 힘썼으며 향약과 사창법(社倉法)을 시행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당시 산적한 현안을 그대로 좌시할 수 없어, 45세 때 대사간의 임명을 받아들여 복관하였다. 이후 호조·이조·형조·병조 판서 등 전보다 한층 비중 있는 직책을 맡으며, 평소 주장한 개혁안의 실시와 동인·서인 간의 갈등 해소에 적극적 노력을 기울였다. 이 무렵 《기자실기(箕子實記)》와 《경연일기(經筵日記)》를 완성하였으며 왕에게 ‘시무육조(時務六條)’를 지어 바치는 한편 경연에서 ‘십만양병설’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이런 활발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선조가 이이의 개혁안에 대해 계속 미온적인 태도를 취함에 따라 그가 주장한 개혁안은 별다른 성과를 거둘 수 없었으며, 동인·서인 간의 대립이 더욱 격화되면서 그도 점차 중립적인 입장을 유지할 수 없게 되었다. 그 때까지 중립적인 입장를 지키려고 노력한 그가 동인측에 의해 서인으로 지목되는 결과를 가져오고, 이어서 동인이 장악한 삼사(三司)의 강력한 탄핵이 뒤따르자 48세 때 관직을 버리고 율곡으로 돌아왔으며, 다음해 서울의 대사동(大寺洞) 집에서 죽었다. 파주의 자운산 선영에 안장되고 문묘에 종향되었으며, 파주의 자운서원(紫雲書院)과 강릉의 송담서원(松潭書院) 등 전국 20여 개 서원에 배향되었다. 【정치사상】 관직생활을 시작한 명종 말~선조 초는 명종대에 정치를 좌우한 척신이 제거되고 새로운 정치세력이 부상한 정치적 변동기였다. 1565년(명종 20) 문정왕후가 죽자 윤원형(尹元衡) 등 그간 정사를 전횡한 권신이 차례로 쫓겨나고, 을사사화 때 죄를 입은 사람들이 신원되는 등 정세가 일변함에 따라 사림이 정계에 복귀하기 시작하였고, 곧이어 선조가 즉위하자 사림의 정계 진출은 더욱 본격화되어 그동안 훈척정치하에서 이루어진 폐정의 잔재를 청산하기 위한 방안이 활발하게 논의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중앙의 고위관직을 상당부분 차지한 구신(舊臣)과 삼사(三司)를 중심으로 포진한 사림이 대치한 정국의 구도 속에서 구체제 인물에 대한 처리 방식을 놓고 사림간의 견해차이가 드러났는데, 강온의 입장차이에 따라 동인과 서인으로 붕당이 갈렸다. 이이는 처음에는 훈척으로부터 사림 세력을 보호하기 위해 사림의 정치집단인 붕당의 필요성과 정당성을 주장하였으나, 이 때에 사림이 분열하자 붕당의 지나친 분파활동이 수반하는 폐단을 경계하며 사림의 결속을 도모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러나 분열된 사림의 결합을 위한 그의 노력은 치열해져가는 정쟁(政爭)의 격화 속에서 효과를 거두지 못하고, 그 자신마저 동인에 의해 서인으로 지목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러한 그의 붕당관은 그가 가진 시국관과도 무관하지 않다. 당시 가장 시급한 문제는 훈척정치 아래에서 파생된 많은 사회적 모순과 폐정을 개혁하여 민생고를 해결하는 일이라고 판단하고, 이를 위해서는 이제 막 정권담당층으로 자리굳힌 사림의 총력을 결집시킬 필요성에서 그 분열과 소모적인 논쟁을 경계한 것이다. 자기가 살던 16세기의 조선 사회를, 건국 뒤 정비된 각종 제도가 무너져가는 ‘중쇠기(中衰期)’라고 진단하고서, 시급한 국가의 재정비를 위해 일대 경장(更張)이 요구되는 시대라고 판단하였다. 이를 위해서는 변통(變通)을 통한 일대 경장이 필요하다는 생각에서 《동호문답》 《만언봉사》 등의 저술을 통하여 안민(安民)을 위한 국정 개혁안을 선조에게 제시하였는데, 이것이 ‘경장론(更張論)’이다. 《만언봉사》에 의하면 ‘정치에 있어서는 때를 아는 것이 소중하고 일에 있어서는 실질적인 것에 힘쓰는 것이 중요하다’고 하면서 ‘때에 알맞게 한다(時宜)는 것은 때에 따라 변통을 하고 법을 마련하여 백성을 구제하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즉, 시대가 바뀌면 법제도 맞지 않기 때문에 현실에 맞게 제도를 개혁해야 하며, 이러한 변통을 통해 경장이 이루어져야 안민이 가능하다고 하였다. 그가 당시 조선 사회를 중쇠기로 파악한 구체적 증후로서 지배층의 기강 해이와 백성의 경제적 파탄을 들었는데, 그 원인은 각종 제도의 폐단에서 비롯한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국가의 재정비를 위해서는 마땅히 잘못된 제도를 경장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경장의 구체적인 방법은 국가의 통치체제 정비를 통해 기강을 확립하고, 공안(貢案)과 군정(軍政)등 부세(賦稅)제도의 개혁을 통해 백성의 고통을 덜어주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 밖에도 서원향약(西原鄕約) ·해주향약(海州鄕約) ·사창계약속(社倉契約束) 등을 만들어 향약과 사창법을 실시함으로써 향촌에서의 농민생활 안정과 사족중심의 향촌질서 유지를 위해 노력하였으나, 결국 그는 이러한 방법으로 안민을 이루어 중세사회의 동요를 막고자 한 것이다. 그러나 그의 경장론은 동 ·서인의 분쟁 격화와 선조의 소극적인 태도로 말미암아, 당대에는 거의 실현되지 못하였다. 이러한 그의 정치사상은 시의를 쫓아 실공(實功)과 실효를 강조한 현실적 면모를 보이는데, 진리란 현실 문제와 직결된 것이고 그것을 떠나서 별도로 구해지는 것이 아니라고 한 점에서 일관되게 주장한 이기론, 즉 이(理)와 기(氣)를 불리(不離)의 관계에서 파악한 율곡성리설의 특징을 그대로 보여준다고 하겠다. 【철학사상】 16세기 전반기에는 성리학에 대한 깊은 연구 결과로 이기론·사단칠정론·인심도심설 등 이기심성에 대한 다양한 견해가 표출되어 이를 둘러싼 논쟁과 학문적 심화과정을 통해 조선 성리학이 정착되었다. 이황과 기대승(奇大升)간의 사칠논쟁, 이를 둘러싼 성혼과 이이와의 우율논변(牛栗論辨)이 벌어지고, 서경덕과 이황이 각기 기(氣)와 이(理)를 둘러싸고 학설상의 차이를 보이는데, 이이는 이들의 주장을 아우르며 독특한 성리설을 전개하였다. 이황은 이기론에 있어서는 기뿐만 아니라 이도 발한다는 이기호발설을 견지하여 ‘이발이기수지 기발이이승지(理發而氣隨之氣發而理乘之)’를 주장하였는데, 이러한 견해는 사단칠정론에도 그대로 이어져 순선(純善)인 사단(四端)은 이발(理發)의 결과이고 유선악(有善惡)인 칠정(七情)은 기발(氣發)의 결과이므로, 결국 사단과 칠정을 별개로 취급하여 ‘사단대칠정’ 논리를 전개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이는 이발을 인정하지 않고 ‘발하는 것은 기이며 발하는 까닭이 이’라고 하여 ‘기발이이승지’의 한 길(一途)만을 주장하면서 사단칠정이 모두 이것 으로부터 생기는 것이라고 하였다. 단지 칠정은 정(情)의 전부이며, 사단은 칠정중에서 선한 것만을 가려내 말한 것이라고 하여 칠정이 사단을 포함한다는 ‘칠정포사단’의 논리를 전개하여 기대승의 사단칠정론에 찬동하였다. 이이의 경우 이와 기는 논리적으로는 구별할 수 있지만 현실적으로 분리시킬 수 있는 것이 아니며, 모든 사물에 있어 이는 기의 주재(主宰)역할을 하고 기는 이의 재료가 된다는 점에서 양자를 불리(不離)의 관계에서 파악하고, 하나이며 둘이고 둘이면서 하나인 이들의 관계를 ‘이기지묘(理氣之妙)’라고 표현하였다.이들이 이런 사상을 갖게된 현실적 배경을 살펴보면, 이황의 경우 이이보다 35년 연상으로 훈척정치하의 극심한 정치적 혼란기를 살면서 타락한 정치윤리와 도덕을 바로잡기 위해서 기보다는 이, 칠정보다는 사단, 인심보다는 도심에 역점을 두어 선(善)을 지향하는 이 위주의 이기이원론적 사고방식을 취한 것으로 생각된다. 반면 이이의 경우, 정권 담당층이 훈척에서 사림으로 교체되는 등 개선된 정치 여건속에서 시급한 민생문제 해결을 위해 현실에 적극 참여하고 개혁을 모색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레 의리와 실사(實事)가 결합되고 이와 기가 통합된 일 원론적 사고방식을 취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결국 이이의 이기론은 다양한 현상(氣)속에 보편적 원리(理)가 존재한다는 것이며, 이러한 이가 현실 속에서는 구체적 기에 의해 규정되고 따라서 보편적 이는 구체적인 변화상을 떠나서는 추구될 수 없다는 점에서 그가 주장한 경장론의 변통논리와 일맥 상통한다. 이이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변화하고 제한적인 기(氣局) 속에는 항상 보편적 이(理通)가 존재한다는 ‘이통기국설(理通氣局說)’을 제시하였다. 이를 서경덕의 주기론과 관련하여 살펴보면, 서경덕의 주기론에 대해 이이는 그가 기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이기불리를 주장하였다는 점에서는 동의하지만, 서경덕이 궁극적 존재를 기, 즉 태허지기(太虛之氣)로 인식한 데 대해서는 비판을 가하여 궁극적 존재는 태허지기가 아니라 바로 이, 즉 태극지리(太極之理)라고 주장하여 이의 중요성을 동시에 부각시켰다. 결국 이이는 서경덕의 기 위주의 주기론에 대해서는 이의 중요성을 들어 비판하고, 이황의 이 위주의 이기이원론 이기호발설에 대해서는 기의 중요성과 이기불리를 들어 기발일도설(氣發一途說) 이기지묘를 주장하였으니, 이이는 서경덕과 이황 등 당대 성리학자의 상이한 주장을 균형있게 아우르며 그의 독특한 성리설을 전개시켜 나갔다고 하겠다.
● 황윤길 [黃允吉, 1536~?] 조선중기의 문신. 본관 장수(長水). 자 길재(吉哉). 호 우송당(友松堂). 1561년(명종 16)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 1563년 정언, 1567년 지평이 되었다. 1585년(선조 18) 황주(黃州)목사를 지내고 병조참판에 이르렀다. 1590년 통신사로 일본에 파견되어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를 접견하고 이듬해 귀국하여 장차 일본이 반드시 내침(來侵)할 것이므로 대비하여야 할 것이라고 복명하였다. 이때 부사(副使) 김성일(金誠一)의 보고와 서로 상반되었으나, 조정은 동인(東人) 세력이 강성하였으므로 서인인 그의 의견을 묵살하였다. 1592년 봄 그의 예견대로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선조는 그의 말을 좇지 않았음을 후회하였다고 전한다.
● 김성일 [金成一, 1593~1658] 조선 중기의 무신. 본관 광산. 자 응건(應乾). 호 세한재(歲寒齋). 우후(虞候) 준민(俊民)의 아들. 1629년(인조 7) 과거에 응시하려고 서울에 간 사이 아버지가 숙부의 노복 김이(金伊)에게 피살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돌아와, 동생 성구(成九)와 함께 김이와 그의 부모를 죽이고 형제가 담양부(潭陽府)에 자수하였다. 담양부사 이윤우(李潤雨)가 곧 이 사실을 전라도감사에게 알리고, 감사는 조정에 보고하였는데, 인조는 이들의 효성을 가상히 여겨 특사를 내렸다. 그 뒤 조신(朝臣)들의 추천에 의하여 1636년의 병자호란 때 인조를 남한산성에 호종한 공으로 선전관이 되고, 무과에 급제하여 도총부경력(都摠府經歷) 등을 역임하였다. 이어 영원군수(寧遠郡守) ·삭주도호부사(朔州都護府使) 등을 지냈다.
● 정여립 [鄭汝立, 1546~1589] 조선 중기의 문신 ·사상가. 본관 동래(東萊). 자 인백(仁伯). 전주 출생. 경사와 제자백가(諸子百家)에 뛰어났다. 1570년(선조 3)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 이이(李珥)·성혼(成渾)의 문인이 되었다. 1583년 예조좌랑을 거쳐 이듬해 수찬(修撰)이 되었다. 본래 서인(西人)이었으나 집권한 동인(東人)에 아부, 죽은 스승 이이를 배반하고 박순(朴淳)·성혼 등을 비판하여 왕이 이를 불쾌히 여기자 다시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였다. 하지만 그는 동인 사이에서 인망이 높고 영향력이 커서 찾아오는 사람이 많았다. 이렇게 되자, 진안(鎭安) 죽도(竹島)에 서실(書室)을 세워 대동계(大同契)를 만들어 세력을 넓혀갔다. 1587년 전주부윤(全州府尹) 남언경(南彦經)의 요청으로, 침입한 왜구를 물리쳤다. 그 뒤 대동계의 조직을 전국에 넓혀 황해도 안악(安岳)의 변숭복(邊崇福), 해주(海州)의 지함두(池涵斗), 운봉(雲峰)의 승려 의연(義衍) 등의 세력을 끌어모았다. 1589년 마침내 거사를 꾀하여 반군을 서울에 투입하고 병권을 잡을 것을 계획하였다. 이때 안악군수 이축(李軸)이 이 사실을 알아채어 관련자들이 차례로 잡히자 아들 옥남(玉男)과 함께 죽도로 도망하였다가 관군에 포위되자 자살하였다. 이 사건으로 동인에 대한 박해가 시작, 기축옥사(己丑獄事)가 일어났다. 이를 기점으로 하여 전라도를 반역향(叛逆鄕)이라 하여 호남인들의 등용이 제한되었다.
● 이산해 [李山海, 1539~1609]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 한산(韓山). 자 여수(汝受). 호 아계(鵝溪)·종남수옹(綜南睡翁). 시호 문충(文忠). 진사를 거쳐 1561년(명종 l6) 문과에 급제, 1578년(선조 11) 대사간에 이르러 서인(西人) 윤두수(尹斗壽) ·윤근수(尹根壽) 등의 죄를 탄핵하여 파직시켰다. 1590년 영의정에 올라 종계변무(宗系辨誣)의 공으로 광국(光國)공신에 책록되었고 이듬해 정철이 건저문제(建儲問題)를 일으키자 아들 경전(慶全)으로 하여금 정철(鄭澈)을 탄핵하게 하여 유배시켰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양사(兩司)로부터 국정(國政)을 그르치고 왜적(倭敵)을 들어오게 하였다는 죄목으로 탄핵을 받아 파직, 백의(白衣)로 평양에서 다시 탄핵을 받아 강원도에 귀양갔다가 돈령부영사(敦寧府領事)로 복관되고 대제학을 겸임하였다. 1600년 영의정에 재임(再任), 아성부원군(鵝城府院君)에 봉해졌다. 6세 때 글씨를 잘 써서 신동이라는 말을 들었고 서화(書畵)에 능하여 대자(大字)와 산수묵도(山水墨圖)에 뛰어났다. 선조 때 문장 8가(文章八家)라 일컬었다. 조정에서는 동인(東人)에 속하였으나 다시 북인(北人)에 속하였다가 마지막에는 대북(大北)의 영수가 되었다. 저서로 《아계유고(鵝溪遺稿)》가 있고, 글씨에 《조정암광조묘비(趙靜庵光祖墓碑》(용인)가 있다.
● 유성룡 [柳成龍, 1542~1607] 조선 중기의 문신·학자. 본관 풍산(豊山). 자 이현(而見). 호 서애(西厓). 시호 문충(文忠). 의성 출생. 이황(李滉)의 문인. 1564년(명종 19) 사마시를 거쳐, 1566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 권지부정자(權知副正字)가 되었다. 이듬해 예문관검열과 춘추관기사관을 겸하였고, 1569년(선조 2)에는 성절사(聖節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명나라에 갔다가 이듬해 귀국하였다. 이어 경연검토관 등을 지내고 수찬에 제수되어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하였다. 이후 교리 ·응교(應敎) 등을 거쳐, 1575년 직제학, 다음해 부제학을 지내고 상주목사(尙州牧使)를 자원하여 향리의 노모를 봉양하였다. 이어 대사간 ·도승지 ·대사헌을 거쳐, 경상도 관찰사로 나갔다. 1584년 예조판서로 경연춘추관동지사(經筵春秋館同知事)를 겸직하였고, 1588년 양관(兩館) 대제학이 되었다. 1590년 우의정에 승진, 광국공신(光國功臣) 3등으로 풍원부원군(豊原府院君)에 봉해졌다. 이듬해 좌의정 ·이조판서를 겸하다가, 건저(建儲)문제로 서인 정철(鄭澈)의 처벌이 논의될 때 온건파인 남인에 속하여 강경파인 북인 이산해(李山海)와 대립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도체찰사(都體察使)로 군무를 총괄, 이순신(李舜臣) ·권율(權慄) 등 명장을 등용하였다. 이어 영의정이 되어 왕을 호종(扈從)하여 평양에 이르렀는데, 나라를 그르쳤다는 반대파의 탄핵을 받고 면직되었으나 의주에 이르러 평안도도체찰사가 되었다. 이듬해 중국 명나라 장수 이여송(李如松)과 함께 평양을 수복하고 그 후 충청 ·경상 ·전라 3도 도체찰사가 되어 파주까지 진격, 이 해에 다시 영의정이 되어 4도 도체찰사를 겸하여 군사를 총지휘하였다. 화기 제조, 성곽 수축 등 군비 확충에 노력하는 한편, 군대양성을 역설하여 훈련도감(訓鍊都監)이 설치되자 제조(提調)가 되어 《기효신서(紀效新書)》를 강해하였다. 1598년 명나라 경략(經略) 정응태(丁應泰)가 조선이 일본과 연합, 명나라를 공격하려 한다고 본국에 무고한 사건이 일어나자, 이 사건의 진상을 변명하러 가지 않는다는 북인의 탄핵을 받아 관직을 삭탈당했다. 1600년에 복관되었으나, 다시 벼슬은 하지 않고 은거했다. 1604년 호성공신(扈聖功臣) 2등에 책록되고, 다시 풍원부원군에 봉해졌다. 임진왜란 때 명나라 장수 이여송이 바둑을 둘 줄 모르는 선조에게 대국을 요청하자 그는 우산에 구멍을 뚫어 훈수함으로써 이여송을 무릎 꿇게 하였다는 일화가 전해질 만큼 바둑의 애호가였다. 1995년 9월 특별대국에서 이창호(李昌鎬)와 맞대결한 유시훈(柳時熏)은 그의 14세손이라고 한다. 안동의 호계서원(虎溪書院) ·병산서원(屛山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저서에 《서애집》 《징비록(懲毖錄)》 등이, 편서에 《황화집(皇華集)》 《정충록(精忠錄)》 등이 있다.
● 이항복 [李恒福, 1556~1618] 조선 중기의 문신·학자. 본관 경주(慶州). 자 자상(子常). 호 백사(白沙)·필운(弼雲)·청화진인(淸化眞人)·동강(東岡)·소운(素雲). 고려 말의 명신 이제현(李齊賢)의 후손으로 참찬 이몽량(李夢亮)의 아들이며 권율(權慄)의 사위이다. 어렸을 때, 훗날 함께 재상이 된 이덕형(李德馨)과 돈독한 우정을 유지하여 오성(鰲城)과 한음(漢陰)의 일화가 오랫동안 전해지게 되었다. 1580년(선조 13) 알성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1581년 검열(檢閱)이 되었으며, 1583년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하였다. 이후 저작(著作)·박사·정언(正言)·수찬(修撰) 등 언관직을 두루 거쳤으며, 1589년 예조정랑으로 정여립(鄭汝立)의 옥사를 다스리는데 참여했다. 1590년 정여립의 옥사를 무난히 수습한 공으로 평난공신(平難功臣) 3등에 올랐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선조를 따라 의주로 갔으며, 이후 병조판서가 되어 명나라 군대의 파견을 요청하는 한편 국왕의 근위병을 모집하는 데 주력하였다. 1595년 이조판서에 올랐으며, 1598년 좌의정으로 진주사(陳奏使)가 되어 명나라를 다녀왔다. 1599년 좌의정을 거쳐 이듬해에 영의정이 되었으며, 1602년 오성부원군(鰲城府院君)에 진봉되었다. 광해군이 즉위한 후에도 정승의 자리에 있었으나, 대북파(大北派)들과는 정치적 입장이 달랐으며 1617년 이이첨(李爾瞻) 등이 주도한 폐모론(廢母論)에 적극 반대하다가 1618년 삭탈관직되었다. 이후 북청(北靑)으로 유배되었다가 그곳에서 죽었다. 사후에 복관되고 청백리(淸白吏)에 녹선되었다. 임진왜란시에 5번이나 병조판서에 오를 만큼 선조의 신임을 받았으며, 전란 후에는 그 수습책에 힘썼다. 고향인 포천의 화산서원(花山書院)과 북청의 노덕서원(老德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백사집》 《북천일록(北遷日錄)》 《사례훈몽(四禮訓蒙)》 등이 있다.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선조조상신(宣祖朝相臣)〉조에 행적이 소개되어 있다.
● 이덕형 李德馨 1561(명종 16)∼1613(광해군 5)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자는 명보(明甫)이고, 호는 한음(漢陰)·포옹산인(抱雍散人)이다. 본관은 광주이고 지중추부사를 지낸 민성(敏聖)의 아들이자 영의정 이산해의 사위이다. 조안면 송촌리에 그가 농사를 지으면서 여가를 보냈던 별서(別墅) 터가 있다. 어려서부터 재능이 뛰어나고 침착하였으며, 문학에 통달하였다. 1580년(선조 13) 별시문과에 을과로 합격하여 승문원에 배치되었으며, 1583년 사가독서하고 이듬해에 박사가 된 후 수찬·교리·이조좌랑·대사간·대사성을 역임하였다. 1592년에는 31세에 예조참판에 대제학을 겸임하였고 임진왜란 때 대동강까지 진격한 왜장 소서행장(小西行長)이 현소(玄蘇)와 유천조신(柳川調信) 등을 보내어 구화(?和)를 요구해오자 대사헌 신분으로 이들과 대동강상(大洞江上)에서 회담을 하고 대의로서 그들의 침범을 공박하였다. 이후 선조를 호종(扈從)하면서 평양을 떠나 함경도로 몽진(蒙塵)하려는 왕에게 이항복과 더불어 조선을 돕기 위하여 들어올 명군(明軍)을 맞이하기 위하여 의주로 향하여야 한다고 간하여 선조와 조정의 함경도 행을 포기케 하고 조명(朝明) 국경 도시인 압록강구의 의주로 방향을 바꾸게 하였다. 이어서 청원사(請援使)가 되어 명에 들어가 구원군을 요청하고 귀국하여 한성판윤이 되고 명의 원병이 들어오자 명장 이여송(李如松)의 접반관(接伴官)이 되어 전쟁 중 줄곧 그와 같이 행동하면서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1593년 병조판서가 되고 다음해에는 이조판서와 훈련도감의 당상(堂上)을 겸임하였다. 1595년에는 경기·황해·평안·함경 4도의 체찰부사(體察副使)가 되었으며 1598년 38세의 나이로 우의정이 되고 이어 좌의정에 훈련도감도제조를 겸임하였다. 1597년 정유재란 때 도원수 권율의 막하에서 부흥군(復興軍)을 창설하여 명의 제독(提督) 유정과 함께 순천에서 통제사 이순신과 합동작전으로 소서행장 군을 대파하였다. 1601년에 행판중추부사(行判中樞府使)로 경상·전라·충청·강원도의 4도 도체찰사가 되어 임진왜란 이후의 민심 수습과 군대의 정비에 진력하였으며 대마도(對馬島) 정벌을 건의하기도 하였다. 이듬해에 영의정이 되었으며 1608년에 광해군이 즉위하자 신왕(新王)의 책봉문제 때문에 진주사(陳奏使)로 명에 다녀온 후 다시 영의정이 되었다. 1613년(광해군 5) 북인의 영수인 이이첨의 사주를 받은 삼사에서 영창대군의 처형과 폐모론을 들고 나오자 이항복과 함께 이를 적극 반대하였다. 이에 삼사에서 그를 처형할 것을 주장하였으나 광해군이 이를 경감하여 삭탈관직하였으며 이후 오늘날의 양평인 양근에 낙향하였다. 동인이 남·북으로 분당하자 처음에는 중도적 입장을 취하다가 후에 남인에 가담하였다. 어렸을 때부터 백사 이항복과 절친하여 기발한 장난을 잘하여 많은 일화를 남겼으며 글씨에 뛰어나 조선 전기의 4대 서예가 중 한 사람으로 추앙되었다. 병사하자 광해군은 몹시 애도하여 복관(復官)을 명하였으며 시호는 문익(文翼)이다. 포천의 용연서원과 상주의 근암서원에 제향되었고 저서로는 『한음문고(漢陰文稿)』가 있다.
● 정인홍 [鄭仁弘, 1535~1623]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 서산(瑞山). 자 덕원(德遠). 호 내암(萊菴). 경상남도 합천(陜川) 출생. 조식(曺植)의 문인. 1573년(선조 6) 학행으로 천거되어 6품직(六品職)을 받고, 1575년 황간현감(黃澗縣監), 다음해 지평(持平)을 거쳐 1581년 장령(掌令)이 되어 정철(鄭澈)·윤두수(尹斗壽)를 탄핵하다가 해직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 때 제용감정(濟用監正)으로 합천(陜川)에서 의병을 모아, 성주(星州)에서 왜병을 격퇴하여 영남의병장의 호를 받았다. 이듬해 의병 3,000명을 모아 성주·합천·함안(咸安) 등을 방어했고, 1602년 대사헌에 승진, 중추부동지사·공조참판을 역임하였으며 유성룡(柳成龍)을 탄핵하여 사직하게 하고, 홍여순(洪汝諄) 등 북인(北人)과 함께 정권을 잡았다. 1607년 유영경(柳永慶)이 선조가 광해군에게 양위하는 것을 반대하자 이를 탄핵하다가, 이듬해 영변(寧邊)에 유배령(流配令)을 받았다. 하지만 선조가 급서하고 광해군이 즉위하자 대사헌이 되어 대북정권(大北政權)을 세웠다. 이언적(李彦迪)·이황(李滉)의 문묘종사(文廟從祠)를 반대하다가 유생들에게 탄핵받아 청금록(靑衿錄:儒籍)에서 삭제되는 등 각종 싸움으로 분란을 일으켰다. 1612년 우의정이 되고, 다음해 계축옥사(癸丑獄事)를 일으켜 영창대군을 강화도로 귀양을 보냈다. 그 뒤 서령부원군(瑞寧府院君)에 봉해지고, 좌의정에 올라 1615년 궤장(杖)을 받았다. 1618년 인목대비를 폐위하여 서궁(西宮)에 유폐시키고 영의정에 올랐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참형되고 가산은 적몰되었으며, 이후 대북은 정계에서 거세되어 몰락하였다.
● 이원익 [李元翼, 1547~1634]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 전주. 자 공려(公勵). 호 오리(悟里). 시호 문충(文忠). 1569년(선조 2)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승문원정자(承文院正字) ·저작(著作) ·봉상시직장(奉常寺直長) 등을 거쳐, 1573년 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으로 성절사를 따라 명(明)나라에 다녀온 뒤, 호조좌랑(戶曹佐郞) ·정언(正言) ·예조정랑(禮曹正郞) ·사간(司諫) 등을 역임하였다. 1582년 중추부첨지사(中樞府僉知事)를 거쳐 호조참의가 되었으며, 1587년(선조 20) 안주목사(安州牧使)에 기용되어, 대사헌 ·호조 및 예조의 판서를 지냈다. 1592년(선조 25) 이조판서 때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평안도 도순찰사가 되어 왕의 피란길에 호종하고, 이듬해 평양 탈환작전에 공을 세워 평안도관찰사가 되었으며, 1595년 우의정에 올라 진주 변무사(辨誣使)로 명나라에 다녀온 후 1598년 영의정이 되었는데, 유성룡(柳成龍)을 변호하다 사직, 은퇴하였다. 1604년(선조 37) 임진왜란 때의 공적으로 호성공신(扈聖功臣)에 녹훈되고 완평부원군(完平府院君)에 봉해졌다. 1608년(광해군 즉위) 영의정을 지내면서 수차 사의를 표했으나 수리되지 않던 중, 1615년 폐모론을 반대하다가 홍천(洪川)에 유배되었는데, 1619년(광해군 9) 풀려나왔다. 1624년(인조 2) 이괄(李适)의 난 때는 80세의 노구로 공주까지 왕을 호종하고 돌아와, 훈련도감 도제조(訓鍊都監都提調)를 마지막으로 퇴사, 낙향하였다. 그는 1608년(선조 41) 대동법(大同法)의 실시를 건의하여 이를 실시케 하였고, 불합리한 조세(租稅) 제도를 시정, 국민의 부담을 덜었으며, 안주목사로 있을 때는 군병방수제도(軍兵防水制度)를 개혁, 1년에 3개월의 복무를 2개월로 단축, 법제화시켰으며, 청백리(淸白吏)에 녹선되기도 하였다. 문장에 뛰어났으며, 남인에 속했으나 성격이 원만하여 정적들에게도 호감을 샀다. 인조의 묘정(廟庭)에 배향되고, 여주의 기천서원(沂川書院) 등 여러 서원에 배향되었다. 저서에 《오리문집(梧里文集)》 《속 오리집(續梧里集)》 《오리일기(梧里日記)》 등이 있다.
● 허준 [許浚, 1546~1615] 조선 중기의 의학자. 본관 양천(陽川), 자 청원(淸源), 호 구암(龜岩). 선조 때 내의(內醫)가 되어 왕실의 진료에 공을 세웠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어의(御醫)로 왕을 끝까지 호종(扈從)하고 돌아와 1604년 호성공신(扈聖功臣) 3등에 책록되고, 1606년 양평군(陽平君)에 봉해졌다. 후에 대간의 반대로 직위가 취소되고, 1608년 선조가 죽자 치료를 소홀히 했다는 죄로 한때 파직당했다. 1610년(광해군 2) 16년의 연구 끝에 완성한 《동의보감(東醫寶鑑)》은 조선 한방의학의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을 뿐만 아니라, 18세기에는 일본과 청(淸)나라에서도 간행될 만큼 높이 평가되었으며 지금도 여러 나라에서 번역 출판되고 있다. 저서에 《벽역신방(疫神方)》 《신찬벽온방(新纂瘟方)》 《언해구급방(諺解救急方)》 《언해두창집요(諺解痘瘡集要)》 《언해태산집요(諺解胎産集要)》 《맥결집성(脈訣集成)》 《찬도방론맥결집성(纂圖方論脈訣集成)》 등이 있다.
● 소현세자 [昭顯世子, 1612~1645] 조선 후기의 왕족. 이름 왕(炡 ). 인조의 장자, 효종의 형이며, 어머니는 한준겸의 딸 인열왕후(仁烈王后)이다. 1625년 세자로 책봉되었고, 부인은 강석기(姜碩期)의 딸인 민회빈강씨이고 보통 강빈(姜嬪)이라고 부른다.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 삼전도에서 청나라에 항복한 이후, 아우 봉림대군과 함께 청나라에 인질로 끌려갔다. 이후 9년간 심양(瀋陽)의 심관(瀋館)에 머물면서 많은 고초를 겪었다. 동시에 조선과 청나라 사이에서 창구역할을 맡아 조선인 포로 도망자의 속환문제, 청나라의 조선에 대한 병력 ·군량 ·선박 요구, 각종 물화의 무역 요구 등 정치 ·경제적 현안을 맡아 처리하였다. 또 청나라 인사들이 벌인 대부분의 행사에 참여하고 청나라 황제의 사냥 등에도 동행하였다. 1640~1642년 인조의 병문안을 위해 잠시 귀국하였고, 1644년 청나라 제9왕 다리콘[多爾袞]의 원정군을 따라 베이징[北京]에 들어갔다. 베이징에서 독일인 선교사 샬 폰 벨[湯若望]을 만나 그로부터 서양 역법과 여러 가지 과학에 관련된 지식을 전수받고 천주교에 관해 소개받았다. 당시 베이징에서 명나라 멸망의 현실을 직접 목도했기 때문인지 그는 청나라의 현실을 인정하고 청나라와 조선의 관계를 원활히 하려고 애썼다. 이에 청나라의 경제적 요구를 들어주면서 환심을 얻었는데, 그들은 그를 ‘소군(少君)’으로 부르기도 하였다. 이 과정에서 심관으로 들어가는 조선 정부의 재정부담이 커졌고, 동시에 부왕 인조의 의구심을 사게 되었다. 인조는 청나라가 소현세자를 즉위시키고 자신을 몰아내려는 공작을 펴는 것으로 의심, 그를 감시하였다. 1645년 영구귀국하였으나 청나라에서의 행실을 문제삼아 인조의 냉대를 받았고 급기야는 병을 얻어 급사하였다. 일설에는 그가 독살되었다는 주장도 있는데, 당시 조야의 배청적(排淸的)인 분위기를 염두에 두면 가능성이 있다. 그가 죽은 뒤 인조는 왕권강화 차원에서 세손(世孫:소현세자의 장자)을 폐위하고 봉림대군을 세자로 책봉하였다. 이러한 전후과정에서 부인인 강빈 역시 죽음을 당하고, 세 아들은 유배되었다가 죽었다. 이후로 강빈의 옥사를 억울하게 여기고 소현세자를 추모하는 분위기가 있어, 19세기 말에는 그의 후손을 왕으로 추대하려 했다는 역모사건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 곽재우 [郭再祐, 1552~1617] 조선 중기의 의병장. 본관 현풍(玄風). 자 계수(季綏). 호 망우당(忘憂堂). 시호 충익(忠翼). 의령(宜寧) 출생. 1585년(선조 18) 문과에 급제하였으나 왕의 뜻에 거슬린 글귀 때문에 파방(罷榜)되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 왕이 의주(義州)로 피난하자 의령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1592년 5월 함안군을 점령하고 정암진(鼎巖津:솥바위나루) 도하작전을 전개한 왜병을 맞아 싸워 대승을 거두었다. 이때 홍의(紅衣)를 입고 선두에서 많은 왜적을 무찔렀으므로 홍의장군이라고도 불렸다. 그러나 왜적을 피해 달아났던 감찰사 김수(金)와의 불화로 누명을 쓰고 구금되었다가 초유사(招諭使) 김성일(金誠一)의 장계(狀啓)로 석방된 후, 유곡도찰방(幽谷道察訪)·조방장(助防將)·성주목사(星州牧使)를 역임하였다. 1597년 정유재란 때에는 경상좌도방어사(慶尙左道防禦使)로 임명되어 화왕산성(火旺山城)을 수비하였고, 경상우도조방장(慶尙右道助防將)이 되어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신구(伸救)하는 상소문을 올리고 낙향하였다. 여러 차례 경상도 병마절도사·수군통제사 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퇴하였는데, 그 후 부총관(副摠管)·한성부좌윤(漢城府左尹)을 거쳐 함경도관찰사를 지내다가 당쟁으로 나라의 형편이 날로 어지러워질 뿐만 아니라, 통제사 이순신(李舜臣)이 죄없이 잡혀 올라오고 또 절친한 사이인 광주의병장 김덕령(金德齡)이 이몽학(李夢鶴)의 난에 휘말려 죽은 일을 통탄하여 벼슬을 사퇴하고 창암(蒼巖)에 망우정(忘憂亭)을 짓고 은둔생활로 여생을 보냈다. 필체가 활달하고 시문에도 능했다.
● 강홍립 [姜弘立, 1560~1627] 조선 중기의 무신. 본관 진주(晋州), 자 군신(君信), 호 내촌(耐村). 참판 신(紳)의 아들이다. 1589년(선조 22) 진사가 되고, 1597년 알성문과(謁聖文科)에 을과로 급제, 설서(說書) ·검열 등을 거쳐 1605년 진주사(陳奏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명(明)나라에 다녀왔다. 1608년 보덕(輔德)이 되고, 이듬해 한성부우윤, 1614년 순검사(巡檢使)를 지낸 뒤 18년 진녕군(晋寧君)에 봉해졌다. 그 해 명나라가 후금(後金)을 치기 위해 조선에 원병을 하였다. 이에 조선 조정은 새로 일어난 후금이 두려웠으나, 명나라가 임진왜란 때 원군을 보내온 사실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강홍립을 5도도원수(五道都元帥)로 삼아 1만 3,000명의 군사를 주어 출정하게 하였다. 그러나 조선과 명나라 연합군은 부차(富車)에서 대패하고, 강홍립은 조선군의 출병이 부득이하여 이루어진 사실을 적진에 통고한 후 군사를 이끌고 후금에 항복하였다. 이는 현지에서의 형세를 보아 향배를 정하라는 광해군의 밀명에 따른 것이었다. 투항한 이듬해인 1620년 후금에 억류된 조선 포로들은 석방되어 귀국하였으나, 강홍립은 부원수 김경서(金景瑞) 등 10여 명과 함께 계속 억류되었다. 1627년(인조 5) 정묘호란 때 후금군의 선도로 입국하여 강화에서 화의(和議)를 주선한 뒤 국내에 머물게 되었으나, 역신으로 몰려 관직을 삭탈당하였다가 죽은 뒤 복관되었다.
● 김상헌 [金尙憲, 1570~1652]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 안동. 자 숙도(叔度). 호 청음(淸陰)·석실산인(石室山人). 어려서 윤근수(尹根壽) 등에게 수학하였고 《소학(小學)》 공부에 힘썼다. 1590년(선조 23) 진사시에 합격하고, 1596년 문과에 급제하여 통례원 인의(引儀)가 되고 이어 예조좌랑·시강원사서(司書)·이조좌랑·홍문관수찬 등을 역임하였다. 그해 제주도에서 반란이 발생하자 진상 조사와 수령들의 근무상황을 점검하라는 임무를 띠고 어사로 파견되었다. 선조 말년에는 정인홍(鄭仁弘) 등이 성혼(成渾)을 모함할 때 같이 연루되어 고산찰방(高山察訪)·경성판관(鏡城判官) 등의 외직으로 전보되었다. 광해군 대에도 북인들과의 관계가 원만하지 못하여 그다지 뚜렷한 관직을 역임하지 못하였다. 1611년(광해군 3) 정인홍 등이 상소를 올려 이황(李滉)과 이언적(李彦迪)을 격렬히 비난하자, 승지로 있으면서 정인홍을 비난하였다. 폐모론(廢母論)에 대해서도 비판적인 입장을 보인데다 광해군 말년에는 연이어 부모 상을 맞아 물러나 있어야 하였다. 인조반정 이후 다시 조정에 나가 대사간·이조참의·도승지로 임명되었다. 1624년(인조 2) 이괄의 난이 일어난 직후 인조에게 상소를 올려 붕당을 타파하고 언로를 넓힐 것을 주장하는 상소를 올렸다. 반정 이후에도 강직한 성격으로 누차 시사를 비판하다가, 반정 주체들의 뜻에 거슬려 향리로 귀향하기도 하였다. 1627년 정묘호란이 일어났을 때 진주사로 명나라에 갔다가 구원병을 청하였고, 돌아와서는 후금(後金)과의 화의를 끊을 것과 강홍립(姜弘立)의 관직을 복구하지 말 것을 강력히 주장하였다. 인조가 자신의 부친을 왕으로 추존하려는 이른바 추숭논의(追崇論議)가 일어나자 그에 강력히 반대하였고, 찬성한 반정공신 이귀(李貴)와 의견 충돌을 빚어 다시 낙향하였다. 1633년부터 2년 동안은 5차례나 대사헌에 임명되었으나, 강직한 언론활동을 벌이다가 출사와 사직을 반복하였다. 예조판서로 있던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남한산성으로 인조를 호종하여 선전후화론(先戰後和論)을 강력히 주장하였다. 대세가 기울어 항복하는 쪽으로 굳어지자 최명길(崔鳴吉)이 작성한 항복문서를 찢고 통곡하였다. 항복 이후 식음을 전폐하고 자결을 기도하다가 실패한 뒤 안동의 학가산(鶴駕山)에 들어가, 와신상담해서 치욕을 씻고 명나라와의 의리를 유지해야 한다는 내용의 상소를 올린 뒤 두문불출하였다. 1638년 장령 유석(柳碩) 등으로부터 ‘김상헌이 혼자만 깨끗한 척하면서 임금을 팔아 명예를 구한다’라는 내용의 탄핵을 받았다. 곧 조정에 다시 들어오라는 명을 받았으나, 조정에서 군대를 보내 청이 명을 치는 것을 돕는다는 말에 분연히 반대하였다. 이 때문에 청나라로부터 위험인물로 지목되어 1641년 심양(瀋陽)에 끌려가 이후 4년여 동안을 청에 묶여 있었다. 당시에도 강직한 성격과 기개로써 청인들의 굴복 요구에 불복하여 끝까지 저항하였다. 1645년 소현세자와 함께 귀국했지만, 여전히 척화신(斥和臣)을 탐탁지 않게 여기는 인조와의 관계가 원만하지 못해 벼슬을 단념하고 석실(石室)로 나아가 은거하였다. 1649년 효종 즉위 뒤 대현(大賢)으로 추대받아 좌의정에 임명되었다. 이후 수차례 은퇴의 뜻을 밝히면서 효종에게 인재를 기르고 대업을 완수할 것을 강조하였다. 죽은 뒤 대표적인 척화신으로서 추앙받았고, 1661년(현종 2) 효종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저서에 《야인담록(野人談錄)》 《독례수초(讀禮隨)》 《남사록(南錄)》 등이 있고, 후인들에 의해 문집 《청음집》이 간행되었다.
● 송시열 [宋時烈, 1607~1689] 조선 후기의 문신·학자, 노론(老論)의 영수(領袖). 본관 은진(恩津). 자 영보(英甫). 호 우암(尤庵)·화양동주(華陽洞主). 시호 문정(文正). 아명 성뢰(聖賚). 1633년(인조 11) 생원시(生員試)에 장원급제하여 최명길(崔鳴吉)의 천거로 경릉참봉(敬陵參奉)이 되었으나 곧 사직, 1635년 봉림대군(鳳林大君:孝宗)의 사부(師傅)가 되었다. 이듬해 병자호란 때 왕을 호종(扈從)하여 남한산성으로 피란하였고, 1637년 화의가 성립되자 낙향, 1649년 효종이 보위에 오르자 장령(掌令)에 등용, 세자시강원진선(世子侍講院進善)을 거쳐 집의(執義)가 되었으나 당시 집권당인 서인(西人)의 청서파(淸西派)에 속한 그는 공서파(功西派)의 김자점(金自點)이 영의정이 되자 사직하고 다시 낙향하였다. 이듬해 김자점이 파직된 뒤 진선에 재임명되었으나 1651년(효종 2) 그가 찬술한 《장릉지문(長陵誌文)》에 청나라 연호를 쓰지 않았다고 김자점이 청나라에 밀고함으로써 청의 압력을 받아 사직하고 또 낙향, 충주목사(忠州牧師)·집의 등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고 후진 양성에 전심하였다. 1658년(효종 9) 찬선에 등용, 이조판서로 승진, 효종과 함께 북벌계획을 추진하였으나 이듬해 효종이 죽자 그 계획은 중지되었다. 그 뒤 자의대비(慈懿大妃)의 복상문제(服喪問題)가 제기되자 기년설(朞年說: 만 1년)을 주장하여 관철시키고 3년설을 주장하는 남인을 제거하여 정권을 장악, 좌참찬(左參贊) 등을 역임하면서 서인의 지도자로서의 자리를 굳혔다. 1660년(현종 1) 우찬성에 올랐을 때, 앞서 효종의 장지(葬地)를 잘못 옮겼다는 규탄을 받고 낙향하였고, 1668년 우의정이 되었으나 좌의정 허적(許積)과의 불화로 사직했다가 1671년 다시 우의정이 되고 이듬해 좌의정이 되었다. 1674년 인선왕후(仁宣王后)의 별세로 다시 자의대비의 복상문제가 제기되어 대공설(大功說: 9개월)을 주장하였으나 남인 쪽이 내세운 기년설이 채택됨으로써 실각, 제1차 복상문제 때 기년설을 채택하게 한 죄로 이듬해 덕원(德源)으로 유배, 그 뒤 여러 곳으로 유배장소가 옮겨졌다. 1680년 경신대출척(庚申大黜陟)으로 남인이 실각하게 되자 중추부영사(中樞府領事)로 기용되었다가 1683년 벼슬에서 물러나 봉조하(奉朝賀)가 되었다. 이 무렵 남인에 대한 과격한 처벌을 주장한 김석주(金錫胃)를 지지함으로써 많은 비난을 받았는데 그 중에서도 제자 윤증(尹拯)과의 감정대립이 악화되어 마침내 서인은 윤증 등 소장파를 중심으로 한 소론(少論)과 그를 영수로 한 노장파의 노론(老論)으로 다시 분열되었다. 그 뒤 정계에서 은퇴하고 청주 화양동에서 은거생활을 하였는데 1689년 왕세자가 책봉되자 이를 시기상조라 하여 반대하는 상소를 했다가 제주에 안치되고 이어 국문(鞠問)을 받기 위해 서울로 오는 도중 정읍(井邑)에서 사사(賜死)되었다. 1694년 갑술옥사(甲戌獄事) 뒤에 신원(伸寃)되었다. 주자학(朱子學)의 대가로서 이이(李珥)의 학통을 계승하여 기호학파(畿湖學派)의 주류를 이루었으며 이황(李滉)의 이원론적(二元論的)인 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을 배격하고 이이의 기발이승일도설(氣發理乘一途說)을 지지, 사단칠정(四端七情)이 모두 이(理)라 하여 일원론적(一元論的) 사상을 발전시켰으며 예론(禮論)에도 밝았다. 성격이 과격하여 정적(政敵)을 많이 가졌으나 그의 문하에서 많은 인재가 배출되었으며 글씨에도 일가를 이루었다. 문묘(文廟)·효종묘(孝宗廟)를 비롯하여 청주의 화양서원(華陽書院), 여주의 대로사(大老祠), 수원의 매곡서원(梅谷書院) 등 전국 각지의 많은 서원에 배향되었다. 저서에 《송자대전(宋子大全)》《우암집(尤庵集)》《송서습유(宋書拾遺)》 《주자대전차의(朱子大全箚疑)》《정서분류(程書分類)》 《주자어류소분(朱子語類小分)》《논맹문의통고(論孟問義通攷)》 《심경석의(心經釋義)》《사계선생행장(沙溪先生行狀)》 등이 있다.
● 윤선도 [尹善道, 1587~1671] 조선 중기의 문신 ·시인. 본관 해남(海南). 자 약이(約而). 호 고산(孤山) ·해옹(海翁). 시호 충헌(忠憲). 1612년(광해군 4) 진사가 되고, 1616년 성균관 유생으로 권신(權臣) 이이첨(李爾瞻) 등의 횡포를 상소했다가 함경도 경원(慶源) 등지에 유배되었다.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으로 풀려나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가 되었으나 곧 사직하고 낙향, 여러 관직에 임명된 것을 모두 사퇴했다. 1628년 별시문과(別試文科) 초시(初試)에 장원, 왕자사부(王子師傅)가 되어 봉림대군(鳳林大君:孝宗)을 보도(輔導)했다. 1629년 형조정랑(刑曹正郞) 등을 거쳐 1632년 한성부서윤(漢城府庶尹)을 지내고 1633년 증광문과(增廣文科)에 급제, 문학(文學)에 올랐으나 모함을 받고 파직되었다. 1636년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왕을 호종하지 않았다 하여 영덕(盈德)에 유배되었다가 풀려나 은거했다. 1652년(효종 3) 왕명으로 복직, 예조참의 등에 이르렀으나 서인(西人)의 중상으로 사직했다가 1657년 중추부첨지사(中樞府僉知事)에 복직되었다. 1658년 동부승지(同副承旨) 때 남인(南人) 정개청(鄭介淸)의 서원(書院) 철폐를 놓고 서인 송시열(宋時烈) 등과 논쟁, 탄핵을 받고 삭직 당했다. 1659년 남인의 거두로서 효종의 장지문제와 자의대비(慈懿大妃)의 복상문제(服喪問題)를 가지고 서인의 세력을 꺾으려다가 실패, 삼수(三水)에 유배당하였다. 치열한 당쟁으로 일생을 거의 벽지의 유배지에서 보냈으나 경사(經史)에 해박하고 의약 ·복서(卜筮) ·음양 ·지리에도 통하였으며, 특히 시조(時調)에 더욱 뛰어났다. 그의 작품은 한국어에 새로운 뜻을 창조하였으며 시조는 정철(鄭澈)의 가사(歌辭)와 더불어 조선시가에서 쌍벽을 이루고 있다. 사후인 1675년(숙종 1) 남인의 집권으로 신원(伸寃)되어 이조판서가 추증되었다. 저서에 《고산유고(孤山遺稿)》가 있다.
● 남구만 [南九萬, 1629~1711]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 의령(宜寧). 자 운로(雲路). 호 약천(藥泉) ·미재(美齋). 시호 문충(文忠). 1651년(효종 2) 사마시(司馬試)를 거쳐, 1656년 별시문과(別試文科)에 을과로 급제하여, 이듬해 정언(正言)을 지냈다. 1660년(현종 1) 이조정랑 ·집의(執義) ·응교(應敎) ·대사간(大司諫) ·승지(承旨)를 거쳐, 1668년 안변부사(安邊府使) ·전라도관찰사가 되고, 1674년 함경도관찰사가 되어 유학(儒學)을 진흥시키고 변방수비를 다졌다. 숙종 초에 대사성 ·형조판서를 거쳐, 1679년(숙종 5) 한성부좌윤을 지냈다. 서인(西人)으로서 남인(南人)을 탄핵하다가 남해(南海)로 유배되고, 이듬해 경신대출척(庚申大黜陟)으로 남인이 실각하자 도승지 ·부제학 ·대제학 ·대사간을 역임하였다. 1683년 병조판서가 되어 폐사군(廢四郡)의 복치를 주장하여 무창(茂昌) ·자성(慈城) 등 2군을 설치하였다. 이때 서인(西人)이 노소론(老少論)으로 분열되자 소론의 영수가 되었으며, 1684년 우의정 ·좌의정을 거쳐, 1687년 영의정에 올랐다. 1689년 기사환국으로 남인이 득세하자 강릉(江陵)에 유배되었다. 1694년 갑술옥사 때 다시 영의정에 기용되어, 1696년 중추부영사가 되었다. 1701년 희빈(禧嬪) 장씨의 처벌에 대해 경형(輕刑)을 주장하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 퇴관, 경사(經史) ·문장을 일삼았다. 송준길(宋浚吉)의 문하에서 수학, 문장과 서화에 뛰어났다. 시조 “동창이 밝았느냐 노고지리 우지진다…”는 그의 작품이다. 문집에 《약천집(藥泉集)》이 있다.
● 박세채 [朴世采, 1631~1695] 조선 후기의 문신·성리학자.본관 반남(潘南), 자 화숙(和叔), 호 현석(玄石)·남계(南溪), 시호 문순(文純), 교리(校理)의()의 아들이다. 원두추(元斗樞)의 사위, 김상헌(金尙憲)의 문인이다. 현석은 그가 태어난 한양의 한 지명에서, 남계는 그가 만년에 기거한 파주(坡州)의 시내 이름에서 각각 따온 것이다. 성균관 유생 시절에 이이(李珥)와 성혼(成渾)의 문묘종사(文廟從祀)를 주장, 효종의 꾸지람을 받자 과거를 포기하였다. 주로 송시열(宋時烈)·송준길(宋浚吉) 등 서인과 학문적 교유관계를 가졌으며, 1659년 1차 예송논쟁(禮訟論爭)이 일어나자 기년복(朞年服)을 주장한 서인의 입장을 지지하였다. 1674년 2차 예송논쟁에서 서인이 패하고 남인이 집권하자 파직되었으며, 1680년 경신환국(庚申換局)으로 서인이 다시 집권하자 집의(執義)·동부승지 등에 등용되었다. 1683년 서인이 노론과 소론으로 분립되자 윤증(尹拯)·최석정(崔錫鼎)·남구만(南九萬) 등과 소론의 영수가 되었으며, 1694년 갑술환국(甲戌換局)으로 소론이 정권을 잡자 좌의정에 올랐다. 소론의 힘으로 좌의정이 되었지만 이후에는 '시비명변(是非明辨) 후의 탕평론(蕩平論)'과 '벽이단(闢異端)'을 강조하는 노론의 정치·학문적 입장을 지지하였다. 그와 교유한 인물과 초기의 문인들은 대부분 소론이지만, 죽은 뒤에 김간(金幹)·김구(金構) 등 문인 대부분이 노론으로 이탈하는 것은 이러한 이유에서이다. 숙종 후반에 송시열이 사사(賜死)되고 윤증도 출사하지 않자 조정에서 산림학자를 대표하는 위치에 있게 되면서 붕당간의 조정에 힘을 기울여 탕평론을 적극 개진하였다. 그의 탕평론은 선조대에 이이가 주장한 조제보합설(調劑保合說)을 모범으로 한 것으로서 황극탕평설(皇極蕩平說)로 구체화되었으며, 영조·정조대에 이르러 탕평책을 시행할 수 있는 중요한 기반을 제공하였다. 성리학 이론에 밝았으며, 예학에도 해박하여 《남계예설(南溪禮說)》 《삼례의(三禮儀)》 《육례의집(六禮疑輯)》 등 많은 예학서를 저술하였다. 신라시대부터 당시대까지 학자들의 학통을 기록한 《동유사우록(東儒師友錄)》을 저술하여 조선시대 성리학자의 계보를 파악하였다. 숙종의 묘정에 배향되었으며, 문집에 《남계집》이 있다.
● 김만중 [金萬重, 1637~1692] 조선시대의 문신 ·소설가. 본관 광산(光山). 자 중숙(重叔). 호 서포(西浦). 시호 문효(文孝). 1665년(현종 6) 정시문과(庭試文科)에 장원, 정언(正言) ·지평(持平) ·수찬(修撰) ·교리(校理)를 거쳐 1671년(현종 12) 암행어사(暗行御史)가 되어 경기 ·삼남(三南)의 진정(賑政)을 조사하였다. 이듬해 겸문학(兼文學) ·헌납(獻納)을 역임하고 동부승지(同副承旨)가 되었으나 1674년 인선왕후(仁宣王后)가 작고하여 자의대비(慈懿大妃)의 복상문제(服喪問題)로 서인(西人)이 패하자, 관직을 삭탈당하였다. 그 후 다시 등용되어 1679년(숙종 5) 예조참의, 1683년(숙종 9) 공조판서, 이어 대사헌(大司憲)이 되었으나 조지겸(趙持謙) 등의 탄핵으로 전직되었다. 1685년 홍문관대제학, 이듬해 지경연사(知經筵事)로 있으면서 김수항(金壽恒)이 아들 창협(昌協)의 비위(非違)까지 도맡아 처벌되는 것이 부당하다고 상소했다가 선천(宣川)에 유배되었으나 1688년 방환(放還)되었다. 이듬해 박진규(朴鎭圭) ·이윤수(李允修) 등의 탄핵으로 다시 남해(南海)에 유배되어 여기서 《구운몽(九雲夢)》을 집필한 뒤 병사하였다. 《구운몽》은 그의 어머니를 위로하기 위해 쓴 것으로 전문을 한글로 집필하여 숙종 때 소설문학의 선구자가 되었다. 한편, 한글로 쓴 문학이라야 진정한 국문학이라는 국문학관을 피력하였다. 1698년(숙종 24) 관직이 복구되고 1706년(숙종 32) 효행에 대해 정표(旌表)가 내려졌다. 저서에 《구운몽》 《사씨남정기(謝氏南征記)》 《서포만필(西浦漫筆)》 《서포집(西浦集)》 《고시선(古詩選)》 등이 있다.
●목호룡 [睦虎龍, 1684~1724] 조선 후기의 지관(地官). 본관 사천(泗川). 처음에는 노론(老論)으로, 왕세제(王世弟: 英祖)를 옹호하였다. 1722년(경종 2) 소론(少論)에 가담, 과격파 김일경(金一鏡)의 사주로 노론 김창집(金昌集) 등 4대신을 포함, 일당 60여 명이 경종의 시해(弑害)를 역모, 자기도 이에 가담하였다고 고변하여 4대신을 비롯한 노론이 숙청되었다(신임사화). 이 공으로 부사공신(扶社功臣) 3등에 책록, 동성군(東城君)에 봉해지고 중추부동지사(中樞府同知事)에 올랐다. 1724년 영조가 즉위하자, 노론의 상소로 신임사화가 무고로 일어났음이 밝혀져, 김일경과 함께 체포되었다. 옥중에서 급사하였으며, 당고개(唐古介)에서 효시되었다.
● 이중환 [李重煥, 1690~?] 조선 후기의 실학자. 본관 여주. 자 휘조(輝祖). 호 청담(淸潭)·청화산인(靑華山人). 1713년(숙종 39)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1717년 김천도찰방(金泉道察訪)이 되었다. 평소부터 목호룡(睦虎龍)과 친하게 지내던 중 1722년(경종 2) 신임사화(辛壬士禍) 때 말을 빌려 주어 병조좌랑(兵曹佐郞)이 되었다. 1723년 목호룡사건에 연루되어 유배감. 1724년 영조가 즉위하자 목호룡의 일당으로 구금되었다가 이듬해 절도(絶島)로 귀양갔다가 1727년 풀려났다. 이익(李瀷)의 실사구시(實事求是)의 학풍을 이어받아 1730년까지 전국을 방랑하면서 지리·사회·경제를 연구하여 실학사상 큰 공적을 남겼다. 대표적인 저서로는 《택리지(擇里志:八域志)》가 있다.
● 사도세자 [莊獻世子, 1735~1762] 조선 제21대 영조의 제2자. 자 윤관(允寬). 호 의재(毅齋). 휘 선(). 이복형 효장세자(孝章世子)가 요절하자 세자에 책봉되었다. 1749년(영조 25) 영조의 명을 받고 15세에 대리기무(代理機務)를 보았다. 1762년 김한구(金漢耉)와 그의 일파인 홍계희(洪啓禧)·윤급(尹汲) 등은 세자의 장인 영의정 홍봉한(洪鳳漢)이 크게 세력을 떨치자 홍봉한 일파를 몰아내고 세자를 폐위시키고자 윤급의 종 나경언(羅景彦)을 시켜 세자의 비행 10여 가지를 들어 상변(上變)하게 하였다. 이에 영조는 대로하여 나경언을 참형하고, 세자에게 마침내 자결을 명령하였으나, 이를 듣지 않자 뒤주 속에 가둬 죽게 하였다. 영조는 곧 뉘우쳐 사도(思悼)의 시호를 내렸고, 1777년(정조 1) 그의 아들인 정조가 장헌(莊獻)으로 상시(上諡)하였으며, 1899년 다시 장조(莊祖)로 추존(追尊)되었다. 특히 정조가 불행하게 죽은 그의 아버지를 기린 여러 행적은 유명하다.
● 이익 [李瀷, 1681~1763] 조선 후기의 학자. 본관 여주(驪州). 자 자신(子新). 호 성호(星湖). 1705년(숙종 31) 증광문과(增廣文科)에 응시, 낙방하였다. 이듬해 형 잠(潛)이 장희빈(張禧嬪)을 두둔하다가 당쟁의 제물로 장살(杖殺)되자 벼슬할 뜻을 버리고 낙향, 학문에만 몰두하였다. 처음 성리학(性理學)에서 출발하였으나 차차 이이(李珥) ·유형원(柳馨遠)의 학문에 심취하였는데, 특히 유형원의 학풍을 계승하여 천문 ·지리 ·율산(律算) ·의학(醫學)에 이르기까지 능통하였으며, 서학(西學)에도 관심을 가졌다. 투철한 주체의식과 비판정신을 토대로 그의 주요저서인 《성호사설(星湖僿說)》과 《곽우록(藿憂錄)》을 통해 당시의 사회제도를 실증적으로 분석 ·비판하여 정책적 대안을 제시하였다. 중농사상(重農思想)에 입각하여 전제(田制)개혁의 방향을 개인의 토지점유를 제한하여 전주(田主)의 몰락을 방지하려는 한전론(限田論)에서 찾았으며, 노비신분을 점차적으로 해방시킬 것 등을 주장하는 한편 당쟁의 발생은 이해(利害)의 상반에서 오는 것이라고 분석, 양반도 산업에 종사해야 한다는 사농합일(士農合一)이론을 주장하였다. 인재등용에 대해서는 과거제도에만 의존하지 말고 공거제(貢擧制)를 아울러 실시할 것 등도 제시하였다. 1727년(영조 3) 학행(學行)으로 천거되어 선공감가감역(繕工監假監役)에 임명되었으나 사퇴, 1763년 83세의 고령에 이르자 나라에서는 우로예전(優老例典)에 따라 중추부첨지사(中樞府僉知事)로 승자(陞資)의 은전을 베풀었으나 그 해에 죽었다. 이조판서가 추증되었다.
● 홍국영 [洪國榮, 1748~1781] 조선 후기의 문신 ·세도정치가. 본관 풍산(豊山). 자 덕로(德老). 1771년(영조 47) 정시로 문과에 급제, 승문원 부정자(副正字)를 거쳐 세자시강원 설서(說書)가 되어 사도(思悼)세자를 죽이는 데 주동역할을 한 벽파(僻派)들이 세손(世孫:正祖)까지 해하려고 음모를 꾀하자 이를 막아 세손에게 깊은 신임을 얻었다. 이어 사서(司書)에 승진, 이때 세손의 승명대리(承命代理)를 반대하던 벽파 정후겸(鄭厚謙) ·홍인한(洪麟漢) ·김구주(金龜柱) 등을 탄핵하여 몰아내고 1776년 정조를 즉위시키는 데 진력하였다. 이어 홍상간(洪相簡) ·홍인한 ·윤양로(尹養老) 등의 모역(謀逆)을 적발 처단하였고, 이어 동부승지에 특진, 숙위소(宿衛所)를 창설하여 그 대장을 겸임, 정조의 신변보호에 힘쓰고 도승지에 올랐다. 이때부터 세도정권이 이루어져 갖은 횡포와 전횡을 일삼아 정후겸 못지않다 하여 대후겸(大厚謙)이라 불렸다. 1778년 왕비에게 소생이 없자 누이동생을 빈(嬪)으로 들여보내 세도정권을 굳게 다졌으며, 이듬해 훈련대장이 되었다. 그러나 후궁으로 원빈(元嬪)이 1년 만에 병사하여 왕의 외척(外戚)으로서 집권하려던 계획이 수포로 돌아가자 왕이 새로 빈을 맞아들이지 못하도록 극력 반대하고 왕제(王弟)인 은언군(恩彦君) 인()의 아들 담(湛)을 죽은 원빈의 양자로 삼아 완풍군(完豊君)으로 했다가다시 상계군(常溪君)으로 개봉, 세자로 책립케 함으로써 집권기반을 다지려 하였다가 마음에 맞지 않는다고 역모죄를 씌워 죽이게 하였다. 1780년 왕비 김씨가 앞서 원빈을 살해한 것으로 믿고 왕비의 음식에 독약을 넣었다가 발각되어 가산을 적몰(籍沒)당하고 방축(放逐)되어 이듬해 강릉에서 죽었다. 실각할 때까지 도승지 ·이조참의 ·대제학 ·이조참판 ·대사헌 등을 역임하였다.
● 정약용 [丁若鏞, 1762~1836] 조선 후기의 학자 ·문신. 본관 나주(羅州). 자 미용(美鏞)·송보(頌甫). 초자 귀농(歸農). 호 다산(茶山)·삼미(三眉)·여유당(與猶堂)·사암(俟菴)·자하도인(紫霞道人)·탁옹(翁)·태수(苔)·문암일인(門巖逸人)·철마산초(鐵馬山樵). 가톨릭 세례명 요안. 시호 문도(文度). 광주(廣州) 출생이다. 1776년(정조 즉위) 남인 시파가 등용될 때 호조좌랑(戶曹佐郞)에 임명된 아버지를 따라 상경, 이듬해 이가환(李家煥) 및 이승훈(李昇薰)을 통해 이익(李瀷)의 유고를 얻어보고 그 학문에 감동되었다. 1783년 회시에 합격, 경의진사(經義進土)가 되어 어전에서 《중용》을 강의하고, 1784년 이벽(李蘗)에게서 서학(西學)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책자를 본 후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였다. 1789년 식년문과에 갑과로 급제하고 가주서(假注書)를 거쳐 검열(檢閱)이 되었으나, 가톨릭교인이라 하여 같은 남인인 공서파(功西派)의 탄핵을 받고 해미(海美)에 유배되었다. 10일 만에 풀려나와 지평(持平)으로 등용되고 1792년 수찬으로 있으면서 서양식 축성법을 기초로 한 성제(城制)와 기중가설(起重架說)을 지어 올려 축조 중인 수원성(水原城) 수축에 기여하였다. 1794년 경기도 암행어사로 나가 연천현감 서용보(徐龍輔)를 파직시키는 등 크게 활약하였다. 이듬해 병조참의로 있을 때 주문모(周文謨)사건에 둘째 형 약전(若銓)과 함께 연루되어 금정도찰방(金井道察訪)으로 좌천되었다가 규장각의 부사직(副司直)을 맡고 97년 승지에 올랐으나 모함을 받자 자명소(自明疏)를 올려 사의를 표명하였다. 그 후 곡산부사(谷山府使)로 있으면서 치적을 올렸고, 1799년 다시 병조참의가 되었으나 다시 모함을 받아 사직하였다. 그를 아끼던 정조가 세상을 떠나자 1801년(순조 1) 신유교난(辛酉敎難) 때 장기(長)에 유배, 뒤에 황사영 백서사건(黃嗣永帛書事件)에 연루되어 강진(康津)으로 이배되었다. 그 곳 다산(茶山) 기슭에 있는 윤박(尹博)의 산정을 중심으로 유배에서 풀려날 때까지 18년간 학문에 몰두, 정치기구의 전면적 개혁과 지방행정의 쇄신, 농민의 토지균점과 노동력에 의거한 수확의 공평한 분배, 노비제의 폐기 등을 주장하였다. 이러한 학문체계는 유형원(柳馨遠)과 이익을 잇는 실학의 중농주의적 학풍을 계승한 것이며, 또한 박지원(朴趾源)을 대표로 하는 북학파(北學派)의 기술도입론을 받아들여 실학을 집대성한 것이었다. 어릴 때부터 시재(詩才)에 뛰어나 사실적이며 애국적인 많은 작품을 남겼고, 한국의 역사·지리 등에도 특별한 관심을 보여 주체적 사관을 제시했으며, 합리주의적 과학정신은 서학을 통해 서양의 과학지식을 도입하기에 이르렀다. 1910년(융희 4) 규장각제학(提學)에 추증되었고, 1959년 정다산기념사업회에 의해 마현(馬峴) 묘전(墓前)에 비가 건립되었다. 저서에 《정다산전서(丁茶山全書)》가 있고, 그 속에 《목민심서(牧民心書)》 《경세유표(經世遺表)》 《흠흠신서(欽欽新書)》 《마과회통(麻科會通)》 《모시강의(毛詩講義)》 《매씨서평(梅氏書平)》 《상서고훈(尙書古訓)》 《상서지원록(尙書知遠錄)》 《상례사전(喪禮四箋)》 《사례가식(四禮家式)》 《악서고존(樂書孤存)》 《주역심전(周易心箋)》 《역학제언(易學諸言)》 《춘추고징(春秋考徵)》 《논어고금주(論語古今注)》 《맹자요의(孟子要義)》 등이 실려 있다. 서용보-이사람은 정조대왕 치세시에 관찰사로 부임했습니다. 그러나 명륜당과 향교를 부서 자신의 집안 묘자리로 사용하였고 환곡을 꾸어줄 때에는 겨와 모래를 섞어 주고는 받을 때는 배로 받아냈습니다. 또 백성들에게 강제로 원래 시세보다 비싸게 쌀을 사도록 강매하였습니다. 그러나 벽파의 영수라는 이유로 벌을 받지는 못했습니다.
● 서용보 [徐龍輔, 1757~1824]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 달성(達城). 자 여중(汝中). 호 심재(心齋). 시호 익헌(翼獻). 1774년(영조 50) 생원시(生員試)와 증광문과(增廣文科)에 급제했다. 1783년(정조 7) 규장각 직각(奎章閣直閣)을 거쳐, 1792년 사은부사(謝恩副使)로 청나라에 다녀와 규장각 직제학(直提學), 대사헌 등을 지냈다. 1800년(순조 즉위) 우의정, 1803년 좌의정에 이어 이듬해 중추부판사(中樞府判事)가 되었다. 1805년 사은사(謝恩使)로 청나라에 다녀온 뒤 1819년 영의정에 오르고 뒤에 중추부영사(中樞府領事)를 지냈다.
● 박제가 [朴齊家, 1750~1805] 조선 후기의 실학자. 본관 밀양(密陽), 자 차수(次修)·재선(在先)·수기(修其), 호 초정(楚亭)·정유·위항도인(葦杭道人)이다. 19세 때 박지원(朴趾源)의 문하에서 실학을 연구, 1776년 이덕무(李德懋)·유득공(柳得恭)·이서구(李書九) 등과 합작한 시집 《건연집(巾衍集)》이 청나라에 소개되어 조선 시문 사대가(詩文四大家)의 한 사람으로 알려졌다. 1778년(정조 2) 사은사 채제공(蔡濟恭)의 수행원으로 청나라에 가서 이조원(李調元)·반정균(潘庭筠) 등에게 새 학문을 배우고 귀국하여 《북학의(北學議)》 〈내외편(內外篇)〉을 저술, 이듬해 정조의 특명으로 규장각 검서관(檢書官)이 되어 많은 서적을 편찬하고, 그뒤 진하사(進賀使)·동지사(冬至使)를 수행, 두 차례 청나라에 다녀왔다. 1794년 춘당대(春塘臺) 무과에 장원하여 오위장(五衛將)에 오르고, 이듬해 영평현감(永平縣監)으로 나갔다. 1798년 《북학의》 진소본(進疏本)을 작성하고, 1801년(순조 1) 사은사를 수행, 네 번째로 청나라에 다녀와서 동남성문(東南城門)의 흉서사건(凶書事件)에 사돈 윤가기(尹可基)가 주모자로 지목되어 연좌로 종성(鐘城)에 유배되었다가 4년 만에 풀려났다. 저서에 《명농초고(明農草藁)》 《정유시고》 《유정집》이 있다.
● 박지원 [朴趾源, 1737~1805] 조선 후기의 실학자·소설가. 본관 반남(潘南), 자 중미(仲美), 호 연암(燕巖)이다. 돈령부지사(敦寧府知事)를 지낸 조부 슬하에서 자라다가 16세에 조부가 죽자 결혼, 처숙(妻叔) 이군문(李君文)에게 수학, 학문 전반을 연구하다가 30세부터 실학자 홍대용(洪大容)과 사귀고 서양의 신학문에 접하였다. 1777년(정조 1) 권신 홍국영(洪國榮)에 의해 벽파(僻派)로 몰려 신변의 위협을 느끼자, 황해도 금천(金川)의 연암협(燕巖峽)으로 이사, 독서에 전념하다가 1780년(정조 4) 친족형 박명원(朴明源)이 진하사 겸 사은사(進賀使兼謝恩使)가 되어 청나라에 갈 때 동행했다. 랴오둥[遼東]·러허[熱河]·베이징[北京] 등지를 지나는 동안 특히 이용후생(利用厚生)에 도움이 되는 청나라의 실제적인 생활과 기술을 눈여겨 보고 귀국, 기행문 《열하일기(熱河日記)》를 통하여 청나라의 문화를 소개하고 당시 한국의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각 방면에 걸쳐 비판과 개혁을 논하였다. 1786년 왕의 특명으로 선공감감역(繕工監監役)이 되고 1789년 사복시주부(司僕寺主簿), 이듬해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제릉령(齊陵令), 1791년(정조 15) 한성부판관을 거쳐 안의현감(安義縣監)을 역임한 뒤 사퇴했다가 1797년 면천군수(沔川郡守)가 되었다. 이듬해 왕명을 받아 농서(農書) 2권을 찬진(撰進)하고 1800년(순조 즉위) 양양부사(襄陽府使)에 승진, 이듬해 벼슬에서 물러났다. 당시 홍대용·박제가(朴齊家) 등과 함께 청나라의 문물을 배워야 한다는 이른바 북학파(北學派)의 영수로 이용후생의 실학을 강조하였으며, 특히 자유기발한 문체를 구사하여 여러 편의 한문소설(漢文小說)을 발표, 당시의 양반계층 타락상을 고발하고 근대사회를 예견하는 새로운 인간상을 창조함으로써 많은 파문과 영향을 끼쳤다. 이덕무(李德懋)·박제가·유득공(柳得恭)·이서구(李書九) 등이 그의 제자들이며 정경대부(正卿大夫)가 추증되었다. 저서에 《연암집(燕巖集)》 《과농소초(課農小抄)》, 《한민명전의(限民名田義)》 등이 있고, 작품에 《허생전(許生傳)》, 《호질(虎叱)》, 《마장전(馬傳)》, 《예덕선생전(穢德先生傳)》, 《민옹전(閔翁傳)》, 《양반전(兩班傳)》 등이 있다.
● 이승훈 [李承薰, 1756~1801.2] 조선 천주교 사상 최초의 영세자(領洗者). 세례명은 베드로. 강원도 평창(平昌) 출생. 자 자술(子述). 호 만천(蔓川). 1780년(정조 4)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했으나 벼슬을 단념하고 학문에 전심하다가 천주교인 이벽(李蘗)을 만나 천주교에 심취, 1783년 동지사(冬至使)의 서장관(書狀官)인 부친을 따라 청(淸)나라에 가서 베이징[北京]천주교당 북당(北堂)에서 교리 증부를 한 뒤, 이듬해 예수회(會)의 루이 드 그라몽 신부에게 세례를 받았다. 이 해 교리 서적과 십자고상(十字苦像)을 가지고 귀국, 1785년 명례방(明禮坊:현 명동)의 김범우(金範禹) 집을 교회로 삼고, 가성직(假聖職)제도를 채택, 사제대행권자로서 주일(主日)미사와 영세를 행하며 전도를 시작하였다. 이듬해 당국에 발각되어 체포되자 가족들의 권유로 배교(背敎)하고 척사문(斥邪文)을 공표하였으나, 1787년 복교(復敎)하여 자치적으로 교회활동을 개시, 자신이 주교가 되어 성사(聖事)를 집행하였다. 1789년 평택현감(平澤縣監)에 등용되었는데 이듬해 베이징에 밀파되었던 윤유일(尹有一)이 가성직제도와 자치운동은 위법이며, 조상에 대한 제사도 철폐해야 한다는 파리 외방전교회(外邦傳敎會)의 회신을 받고 돌아오자, 그는 제사문제로 두 번째로 배교하였다. 그 후 다시 교회에 돌아왔으나 91년(정조 15) 진산사건(珍山事件)이 일어나 서학(西學) 서적을 발간했다는 탄핵을 받고 관직을 삭탈당하고 투옥되었다. 옥중에서 다시 배교하고 석방되었다가 94년 중국인 신부 주문모(周文謨)가 밀입국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다시 교인이 되었는데, 이듬해 주문모를 맞아들인 죄로 최인길(崔仁吉) ·지황(池璜) ·윤유일 등은 붙잡혀 처형되고 그는 예산(禮山)에 유배되었다. 1801년 신유박해(辛酉迫害)로 의금부(義禁府)에서 취조를 받고 이 해 2월 서소문 밖 형장에서 사형되었는데, 1856년(철종 7) 아들 신규(身逵)의 탄원으로 대역죄만은 신원(伸寃)되었다. 그러나 1866년 아들 신규와 손자 재의(在誼)가 순교한 데 이어 1871년에는 증손 연구(蓮龜) ·균구(筠龜)가 순교함으로써 4대에 걸쳐 순교자를 낸 집안이 되었다.
● 김조순 [金祖淳, 1765~1832]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 안동. 자 사원(士源). 호 풍고(楓皐). 시호 ) 순조의 장인으로, 영의정 창집(昌集)의 4대손이며 아버지는 부사 이중(履中)이다. 1785년(정조 9) 약관에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검열이 되고 초계문신(抄啓文臣)으로 발탁되어 강원도·황해도·함경도지방의 수령·찰방 중에 겸사(兼史)1명을 두어 그 지방 요속(謠俗)을 채록하여 시정기(時政記)에 수록하도록 할 것을 건의, 실시했다. 1788년 규장각의 대교(待敎)때 당시 시·벽파(時僻派)싸움에 중립을 지키며 당쟁을 단호히 없앨 것을 주장하였다. 1789년 동지 겸 사은사의 서장관으로 청나라에 다녀왔고, 이어 이조참의·검교·직각을 거쳐 1800년 보덕에 제수되었다. 순조 즉위 후 부제학·행호군(行護軍)·병조판서·이조판서·선혜청제조 등 여러 요직이 제수되었으나 항상 조심하는 태도로 사양하였다. 1802년에 양관 대제학 등을 거쳐 딸이 [순조의 비](純元王后)로 봉해지자 영돈녕부사(領敦寧府使)로 영안부원군(永安府院君)에 봉해지고, 이어 훈련대장·호위대장 등을 역임하였다. 또한, 선혜청제조로 친위병의 수효가 적다고 하여, 철폐된 장용영(壯勇營)의 군사로 충당하도록 주청하여 시행했다. 1814년 금위대장, 1826년 양관 대제학이 되고, 1827년 왕의 관서지방 목욕행을 호종하였다가 서하(西下)지방의 은밀한 민간실정을 보고하여서, 경외(京外)각 아문의 절미(折米)·형정(刑政)·인사(人事)·대동미 등 어려운 실정을 정리하게 하였다. 그뒤 실권있는 직책은 맡지 않고, 제조직과 영돈녕부사로 있다가 죽었다. 어릴 때부터 기량과 식견이 뛰어났으며 성격이 곧고 밝아서 정조의 사랑을 받고 왕세자의 보도(輔導)를 맡았고, 국구(國舅)가 된 뒤로는 왕을 보필하여 군덕(君德)을 함양시키는 일에 진력하였다. 그러나 요직이 제수될 때마다 사양하는 것으로 보아 자신이 권세를 누리기 위해 노력한 인물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시벽당파에 몰리지 않으려는 노력과 세도의 풍을 형성하지 않으려는 노력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둘러싼 척족 세력들이 후세 안동김씨 세도정치의 기반을 조성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문장이 뛰어나 초계문신이 되었고, 비명·지문·시책문·옥책문 등 많은 저술을 남겼고 죽화(竹畵)도 잘 그렸다. 저서로 《풍고집 楓皐集》이 있다. [정조]의 묘정에 배향되었으며, 양주의 석실서원(石室書院), 여주의 현암서원(玄巖書院)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충문(忠文)이다.
● 김좌근 [金左根, 1797~1869]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 안동. 자 경은(景隱). 호 하옥(荷屋). 시호 충익(忠翼). 영안부원군 조순(祖淳)의 아들. 순조비 순원왕후(純元王后)의 오빠. 1825년(순조 25) 음보로 부수(副率)가 되고, 1834년 상의원첨정(尙衣院僉正)으로 승진, 1837년(헌종 3) 진사가 되었다. 이듬해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부교리(副校理) ·대사성 ·이조참의 ·한성부판윤 ·공조판서 ·대사헌 ·병조판서를 역임하였다. 1850년(철종 1) 이후 우참찬(右參贊) ·선혜청당상 ·금위대장 ·형조판서 ·훈련대장 ·공조판서 ·우의정을 지내고, 1853~1863년 영의정에 세 번이나 보직되어 안동김씨의 중심인물로서 세도정치를 폈다. 흥선대원군이 집권하자, 영의정에서 물러나 실록총재관(實錄摠裁官)으로 《철종실록》 편찬에 참여하였다. 1868년(고종 5) 삼군부(三軍府)가 설치되자, 삼군부영사(領事)가 되었다. 돈령부영사로 1866년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
● 김병기 [金炳基, 1814~?]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 안동. 김옥균(金玉均)의 양부. 1846년 소과에 합격하였으나 문과급제를 못하고, 음직으로 1852년(철종 3) 광릉참봉을 지냈다. 1856년 옥과현감을 시작으로, 금성현령 ·옥천군수 ·양양부사 ·강릉부사 ·가평현감 등 주로 외직을 담당하였다. 1883년(고종 20) 총정대부에 가자(加資)되었다. 1884년 김옥균이 서광범(徐光範) 등과 갑신정변을 일으켰다가 실패하자, 이에 연좌되어 삭직되었다. 1886년 허직(許稷) 등 대각(臺閣)에서 상소를 올려, 사면을 요청하였으나 거부되었다.
● 홍경래 [洪景來, ?~1812] 19세기 초 평안도에서 일어난 홍경래난의 최고지도자. 출신 지역은 평안도 용강군 다미동(多美洞). 정확한 나이는 알 수 없으나 봉기 당시 42∼43세였던 것으로 보인다. 아버지를 포함한 가계를 알 수 없으며, 아들만 네 형제인 집안의 셋째로 처 최소사(崔召史)와의 사이에 두 아들을 두었다. 신분은 대개 몰락양반이라고 설명하여 왔으나, 평민이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듯하다. 경제적으로는 전답이나 노비를 지니지 못한 빈궁한 처지에 있었다. 유교는 물론 풍수(風水)에 상당한 소양을 지니고 있었으며 서당에서 아이들에게 글을 가르치기도 한 지식인이었다. 그러한 바탕 위에서 민중의 희원을 반영하여 초인이 나타나 세상을 구원할 것이라는 정진인설(鄭眞人說)을 봉기의 가장 중요한 이념으로 제시하였다. 또한, 뛰어난 무술 실력을 지니고 있어 직접 선두에서 전투를 지휘하기도 하였으며, 병법에도 밝아 다양한 전술로 관군과 대항하였다. 이 밖에 성장과정과 과거응시 등에 대해서 19세기 후반 작자미상의 한문단편 《홍경래》를 근거로 설명해 왔으나, 그 내용들은 사실로 받아들이기 힘들다. 1801년(순조 1)에 우군칙(禹君則)과 병란(兵亂)을 논의한 뒤로 10년 동안 각지를 다니며 향촌의 유력자, 무술을 갖춘 장사(壯士), 그리고 부호를 끌어들여 봉기를 준비하였다. 평서대원수(平西大元帥)의 직책을 띠고 1811년 12월 18일 가산 다복동의 봉기로부터 만 4개월 동안 계속된 반란을 총지휘하였다. 1812년 4월 19일 관군에 의해 정주성이 함락될 때 전사하였으며, 정부로부터 '군대를 일으켜 반역한 우두머리[擧兵逆魁]'로 처리되었다. 그러나 민중들 사이에서는 저항과 변혁의 상징으로 인식되어 죽지 않고 하늘을 날아서 성을 빠져나갔다는 소문이 퍼지기도 하였고, 많은 사람들이 그가 살아 있다고 주장하면서 민중봉기를 선동하였다.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기에는 그가 이끈 군사력과 봉기 이념에 명확한 한계가 있었지만, 당시의 지배체제가 아니라 기층사회에서 성장한 인물로서 대규모의 항쟁을 주도한 점에서 중세사회의 극복에 중요한 단계를 이룩하였다.
● 최제우 [崔濟愚, 1824~1864] 동학(東學)의 창시자. 본관 경주(慶州). 호 수운(水雲)·수운재(水雲齋). 초명 복술(福述)·제선(濟宣). 어려서부터 경사(經史)를 공부하여 학문에 정진하다가 1844년(헌종 10) 구도행각에 나선 지 10년 만에 울산(蔚山) 유곡(裕谷)에 은거, 수도에 들어갔다. 1856년(철종 7) 천성산(千聖山) 내원암(內院庵)에서 49일간 기도하고, 1857년 천성산 적멸굴(寂滅窟)에서 49일간 기도했으며, 1859년 다시 경주 용담정(龍潭亭)에서 수도한 끝에, 그리스도교적 영향과 유불선(儒佛仙)의 장점을 융합하여 ‘시천주(侍天主) 사상’을 핵심으로 한 ‘인내천(人乃天)’의 교리를 완성하고 동학을 창시했다. 천(天)·인(人)을 대도(大道)의 근원으로, 성(誠)·경(敬)·신(信)을 도행(道行)의 본체로, 수심정기(守心正氣)를 수도의 요결로 삼고 포교를 시작하여 도를 천도(天道)라 하고, 농민·천민·유생에 이르는 광범한 계층에 전파했다. 1862년 도수사(道修詞) ·권학가(勸學歌)를 짓고 동학론(東學論)을 집필하며 포교에 전심, 각 지방에 접소(接所)를 설치하고 접주(接主)를 두어 관내의 교도를 관장하게 하였는데, 1863년에는 교인 3,000여 명, 접소 14곳에 이르렀다. 같은 해 최시형(崔時亨)을 북접(北接) 대도주로 앉히고 8월에 도통(道統)을 계승하여 교주로 삼았다. 1864년(고종 1) 각 접소를 순회하다가 용담정에서 동학을 사학(邪學)으로 단정한 정부에 의해 체포되어, 사도난정(邪道亂正)의 죄목으로 3월에 대구장대(大邱將臺)에서 순도하였다. 1907년(융희 1) 신원되었다. 저서에 《용담유사(龍潭遺詞)》 《동경대전(東經大全)》 등이 있다.
● 최시형 [崔時亨, 1827~1898] 조선 후기 동학(東學)의 제2대 교주(敎主). 본관 경주(慶州). 호 해월(海月). 초명 경상(慶翔). 경주 출생.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어려서 부모를 여의고 한때 조지소(造紙所)에서 일했다. 1861년(철종 12) 동학에 입문, 1863년 초대 교주 최제우(崔濟愚)에 이어 제2대 교주가 되었다. 64년(고종 1) 정부의 탄압으로 최제우가 처형되자 태백산(太白山)에 은신, 관헌의 감시를 피해 안동(安東) ·울진(蔚珍) 등지에서 포교에 힘썼다. 1871년 허락도 없이 이필제(李弼濟)가 교조의 신원운동(伸寃運動)을 전개, 영해(寧海)에서 민란을 일으킴으로써 탄압이 강화되자 소백산(小白山)에 피신했다. 그 후 《동경대전(東經大全)》 《용담유사(龍潭遺詞)》 등 주요 경전(經典)을 발간, 교의(敎義)를 체계화했으며, 84년 갑신정변(甲申政變) 후 탄압이 완화되자 육임제(六任制)를 확립하고 전국에 육임소(六任所)를 설치, 조직을 강화했다. 92년 손천민(孫天民) ·손병희(孫秉熙) 등의 주장에 따라 교조의 신원, 포교의 자유, 탐관오리의 숙청을 충청도관찰사에게 요구했다. 1893년 2월 제2차로 각 도의 동학 대표 40여 명을 모으고 그 소두(疏頭)로서 박광호(朴光浩)를 내세워 왕에게 직접 상소, 대궐 앞에서 사흘 밤낮을 통곡하게 했다. 왕의 선처를 약속받고 해산했으나 시행되지 않자, 다시 보은(報恩)의 대도소(大都所)에 전국 교도들을 시켜 교조의 신원, 부패관리의 처단, 종교의 자유를 주장하며 척왜양창의(斥倭洋倡義)의 기치를 들고 제3차 신원운동을 계획하고 대대적인 시위를 감행하려 했다. 이에 당황한 조정에서 우선 경상도관찰사 조병식(趙秉式) 등 탐관을 파면하자 자진 해산했다. 1894년 고부 접주(古阜接主) 전봉준(全琫準)이 주도한 동학농민운동에 북접(北接) 산하 동학도를 궐기시켜 호응했으며, 9월 전봉준이 일본군 상륙과 정부의 요구조건 불이행을 이유로 재기포(再起包)하자, 북접 각지의 접주들에게 총궐기를 명하여 10만여 명의 병력을 인솔하고 논산(論山)에서 남접군(南接軍)과 합세했다. 관군 ·일본군의 혼성군과의 공주(公州)싸움에서 참패하고 또 장수(長水) 등지에서 연패하여 피신했다가 98년 원주(原州)에서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 처형되었다. 1907년 고종의 특지(特旨)로 신원되었다.
● 전봉준 [全琫準, 1854~1895] 조선 후기 동학농민운동(東學農民運動)의 지도자. 초명 명숙(明叔), 별명 녹두장군(綠豆將軍). 전라북도 태인(泰仁) 출생. 아버지가 민란의 주모자로 처형된 후부터 사회개혁에 대한 뜻을 품게 되었다. 30여 세에 동학에 입교하여 고부접주(古阜接主)로 임명되고 은거 중인 흥선대원군과도 접촉하여 국정개혁에 대한 의견을 교환하였다. 1892년(고종 29) 고부군수로 부임한 조병갑(趙秉甲)이 농민들로부터 과중한 세금을 징수하고 양민의 재산을 갈취하는 등 탐학(貪虐)을 자행하고 만석보(萬石洑) 밑에 다시 보를 축조, 불법으로 700섬의 수세(水稅)를 징수하였다. 이에 농민 대표와 함께 그 시정(是正)을 진정했으나 거부당하자 1894년 1월 1,000여 명의 농민과 동학교도를 이끌고 관아(官衙)를 습격, 무기를 탈취하여 강탈당했던 세곡(稅穀)을 농민에게 배분하고 부패한 관원들을 감금하였다. 이 보고를 받은 정부는 조병갑 등 부패한 관리를 처벌하고 이용태(李容泰)를 안핵사로 보내어 사태를 조사·수습케 했으나 민란의 책임을 동학교도에게 돌려 체포·투옥·살해하고 가옥을 파괴하는 등 동학교도 탄압과 탐학을 자행하였다. 이윽고 보국안민(輔國安民)의 슬로건을 내세우고 인근 각지의 동학접주들에게 통문을 보내어 궐기를 호소하였다. 고부에 인접한 태인(泰仁)·무장(茂長)·금구(金溝)·정읍(井邑)·부안(扶安) 등지의 동학교도와 농민들이 봉기, 8,000여 명이 고부 백산(白山)에 모여 제폭구민(除暴救民)·진멸권귀(盡滅權貴)·축멸왜이(逐滅倭夷)를 내세우고 금구·부안을 점령, 전주를 향해 진격 중 황토현(黃土峴)에서 관군을 격파하고 계속 정읍·고창·무장 등을 장악, 4월 28일 전주를 점령하였다. 그러나 정부의 요청으로 청군(淸軍)이 인천에 상륙하고 동시에 톈진조약[天津條約]을 빙자하여 일군(日軍)도 입국하여 국가운명이 위태롭게 되자, 양호초토사(兩湖招討使) 홍계훈(洪啓薰)의 선무(宣撫)에 응하기로 결정하고 탐관오리의 응징, 노비의 해방, 토지균분제 실시 등 12개 조목의 시정개혁(施政改革)에 대한 확약을 받고 휴전을 성립시켰다. 그리고 전라도 지방에 집강소(執綱所)를 설치하여 동학의 조직강화에 힘쓰고 도정(道政)에 참여, 감시하였으나 근본적인 시정개혁이 실현되지 않아 재궐기를 계획하던 중 일본이 청일전쟁에서의 우세를 이용하여 침략행위를 노골화하자 이에 격분, 재봉기하였다. 전봉준은 남도접주(南道接主)로 12만의 병력을 지휘, 북도접주(北道接主) 손병희(孫秉熙)의 10만과 연합하여 교주(敎主) 최시형(崔時亨)의 총지휘하에 항일구국(抗日救國)의 대일전(對日戰)을 시작했다. 한때는 중부·남부 전역과 함남·평남까지 항쟁규모가 확대되었으나 관군과 일본군의 반격으로 패배를 거듭하였으며 공주(公州)에서 일본군과의 대격전 끝에 대패(大敗)하고 10월 금구싸움을 끝으로 종식되었다. 전봉준은 순창(淳昌)에 피신, 동지 손화중(孫化仲)·김덕명(金德明)·최경선(崔慶善) 등과 재거(再擧)를 모의하던 중 지방민에게 붙잡혀 서울로 압송되어 동지들과 함께 1895년 3월 사형당하였다.
● 김옥균 [金玉均, 1851~1894] 조선 후기의 정치가. 본관 안동(安東). 자 백온(伯溫). 호 고균(古筠) ·고우(古愚). 시호 충달(忠達). 갑신정변(甲申政變)을 주도하였다. 6세 때 김병기(金炳基)의 양자로 들어가 1872년(고종 9) 알성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교리(校理) ·정언(正言) 등을 역임하면서 관료로서 출세의 길이 열렸다. 그러나 박규수(朴珪壽) ·유대치(劉大致) ·오경석(吳慶錫) 등의 영향으로 개화사상을 가지게 되었으며, 특히 1881년(고종 18)에 일본을 시찰하고, 다음해 다시 수신사(修信使) 박영효(朴泳孝) 일행의 고문으로 일본을 다녀온 후에는 일본의 힘을 빌려 국가제도의 개혁을 꾀할 결심을 굳혔다. 서재필(徐載弼) 등 청년들을 일본에 유학시키고, 박영효 ·서광범(徐光範) ·홍영식(洪英植)과 함께 국가의 개혁방안을 토론하다가, 1884년(고종 21)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 정부측에 군인양성을 위한 300만 원의 차관을 교섭하였으나 실패하였다. 당시 청나라 세력을 배경으로 하는 민씨(閔氏) 일파의 세도정치가 지나치게 수구적(守舊的)인 데 불만을 품고 국제정세와 보조를 맞추기 위해서는 개혁을 단행해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수구파의 제거가 불가피하다고 보고, 신축한 우정국(郵政局) 청사의 낙성연을 계기로 거사를 감행하여 한규직(韓圭稷) 등 수구파를 제거하고 정변을 일으켰다. 이튿날 조직된 새 내각의 호조참판으로 국가재정의 실권을 잡았으나 갑신정변이 삼일천하로 끝나자 일본으로 망명, 10년간 일본 각지를 방랑한 후 1894년(고종 31) 상하이[上海]로 건너갔다가 자객 홍종우(洪鍾宇)에게 살해되었다. 갑신정변은 민중이 직접 일으킨 것이 아닌 소수의 지성인들의 거사였다는 점에서 임오군란(壬午軍亂)과 구분되고, 일제에 대한 직접적인 항거가 아닌 기층질서에 대한 개혁의지였다는 점에서 동학농민운동과도 구분된다. 또 왕조의 제도적 개혁을 뛰어넘어 왕조질서 그 자체의 변화를 시도했다는 점에서 갑오개혁(甲午改革)과도 구분된다. 갑신정변에 투영된 김옥균의 사상 속에는 문벌의 폐지, 인민평등 등 근대사상을 기초로 하여 낡은 왕정사(王政史) 그 자체에 어떤 궁극적 해답을 주려는 혁명적 의도가 들어 있었다. 1895년(고종 32)에 법부대신 서광범(徐光範)과 총리대신 김홍집(金弘集)의 상소로 반역죄가 용서되고, 1910년(융희 4)에 규장각 대제학에 추증되었다. 저서에 《기화근사(箕和近事)》 《치도약론(治道略論)》 《갑신일록(甲申日錄: 手記)》 등이 있다.
● 박영효 [朴泳孝, 1861~1939] 철종의 사위. 한말의 정치가. 본관 반남. 자 자순(子純). 호 춘고(春皐) ·현현거사(玄玄居士). 초명 무량(無量). 수원 출생. 판서 원양(元陽)의 아들. 13세 때 철종의 딸 영혜옹주(永惠翁主)와 결혼하여 금릉위(錦陵尉)가 되고, 유대치(劉大致)를 중심으로 김옥균(金玉均) ·홍영식(洪英植) ·서광범(徐光範) 등 개화당 요인들과 결속, 정치적 혁신을 주창하며, 일본의 세력을 이용하여 청나라의 간섭과 러시아의 침투를 억제하는 데 주력했다. 1882년(고종 19) 수신사(修信使)에 임명되어 민영익 ·김옥균 등과 일본을 시찰하고 돌아와 개혁을 시도했으나 민태호(閔台鎬) ·김병시(金炳始) ·김병국(金炳國) 중심의 수구파의 집권으로 실패하였다. 이에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으로서 개화당 요인들과 협의, 1884년 10월 17일 우정국(郵政局) 청사의 낙성연(落成宴)을 계기로 갑신정변을 일으켜 수구파를 제거하고 정권을 장악하였다. 신내각이 조직될 때 친군전후영사겸좌포장(親軍前後營使兼左捕將)이 되어 군사와 경찰의 실권을 장악했으나 삼일천하(三日天下)로 그쳐, 역적으로 몰려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1885년 잠시 도미(渡美)했다가 다시 일본으로 돌아와 야마자키[山崎永春]로 개명하고 메이지학원[明治學院]에 입학, 영어를 배우고, 유학생들의 기숙사로서 친린의숙(親隣義塾)을 경영하다가 1894년 갑오개혁으로 죄가 용서되어 귀국, 제2차 김홍집(金弘集) 내각에서 김홍집 ·박영효의 연립정부를 수립하기에 이르렀다. 내무대신으로 있으면서 자주적 개혁을 꾀하였으나 1895년 반역음모사건으로 재차 일본에 망명했다. 1898년 중추원 회의에서 그를 정부요직에 다시 기용하자는 건의가 나올 정도로 영향력이 컸고 이런 움직임을 반대파에서는 박영효 대통령설을 유포시켜 독립협회를 해산시키는 데 이용하였다. 그러나 국내에서의 정치적 변동은 친일 세력에게 유리하게 전개되었다. 1907년 오랜 망명생활 끝에 다시 귀국, 궁내부대신(宮內部大臣)에 임명되었다가 고종의 양위에 앞장선 대신들을 암살하려 하였다는 혐의를 받아 1년간 제주도에 유배되기도 하였다. 국권피탈 이후 일제의 한국인 회유정책으로 주어진 후작(侯爵)을 받았으며 1918년에 조선식산은행(朝鮮殖産銀行) 이사에 취임하였다. 1920년 동아일보사 초대 사장, 1926년 중추원의장, 1932년 일본귀족원의원을 지냈으며, 1939년 중추원 부의장에 있을 때 죽었다. 저서에 《사화기략(使和記略)》이 있다.
● 서재필 [徐載弼, 1866.11.20~1951.1.5] 한말의 독립운동가.본관은 달성(達城)이며, 호는 송재(松齋)이다. 영어명은 제이슨(P.Jason)이다. 전라남도 보성(寶城)에서 출생했다. 7세 때 서울에 올라와 외숙인 판서(判書) 김성근(金聲根) 밑에서 한학을 배웠고, 1879년(고종 16) 전강(殿講)에 장원하였다. 이 무렵부터 김옥균(金玉均)·서광범(徐光範) 등 개화인사들과 교유, 1883년 일본의 도쿄 육군유년학교(陸軍幼年學校)에 입학하여 이듬해 졸업, 귀국 후 국왕에게 사관학교의 설립을 진언, 조련국(操鍊局) 사관장이 되었다. 1884년 12월 김옥균·홍영식(洪英植) 등과 갑신정변을 일으켜 18세의 젊은 나이로 병조참판 겸 정령관(正領官)이 되었으나 정변의 실패로 일본을 거쳐 1885년 미국으로 망명, 1889년 워싱턴대학에 입학하였다. 졸업 후 세균학을 연구하여 박사학위를 받고, 본국의 민씨 일파가 몰락하자 1896년 귀국 후 중추원(中樞院)고문에 임명되었다. 정부예산을 얻어 《독립신문》을 발간하는 한편, 이상재(李商在)·이승만(李承晩) 등과 독립협회(獨立協會)를 결성하고 모화관(慕華館)을 인수·개축하여 독립회관으로 하였다. 1897년 영은문(迎恩門)을 헐고 그 자리에 독립문을 세웠으나 수구파(守舊派) 정부와 일부 외국인의 책동으로 다시 미국으로 추방되었다. 펜실베이니아에서 병원을 개업하고 있다가 3 ·1운동 소식을 전해 듣고 잡지 《The Evening Ledger》와 제휴, 한국문제를 세계 여론에 호소하는 한편 한인친우회(Friend of Korean)를 조직, 재미교포들을 결속하여 독립운동후원회를 만들었다. 그 후 상해임시정부와 긴밀한 연락을 취하며 외교위원장 자격으로 활약, 1922년 워싱턴군축회의에 독립을 청원하는 연판장을 제출하고, 1925년 호놀룰루의 범태평양회의에 한국대표로 참석, 일본의 침략을 폭로·규탄하였다. 1947년 미군정 장관 J.R.하지의 초청으로 귀국, 미군정청고문(美軍政廳顧問)으로 있는 동안 국민의 추앙을 받았으나 이승만과의 불화 및 시국의 혼란함을 개탄하고 미국으로 돌아가 여생을 마쳤다. 미국에 있던 그의 유해는 전명운(田明雲)의사의 유해와 함께 1994년 4월 8일 서울 동작동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 1977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 홍영식 [洪英植, 1855~1884]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 남양(南陽). 자 중육(仲育). 호 금석(琴石). 시호 충민(忠愍). 서울 출생. 1873년(고종 10) 문과에 급제 정자(正字) ·대교(待敎)를 지내고, 1881년 신사유람단의 일원으로 일본을 시찰하고 돌아와서 통리기무아문 부경리사가 되었다. 이듬해 부제학을 거쳐 참의통리 내무아문사무(內務衙門事務) ·참의군국사무 ·참의교섭통상사무를 역임, 1883년 협판(協辦)교섭통상사무를 지내고 전권부대신(全權副大臣)으로 미국에 다녀왔으며, 이듬해 병조참판이 되었다. 개화당(開化黨)의 중진으로서 신설된 우정국(郵征局)의 총판(總辦)이 되어 그 개국 축하연을 계기로 김옥균(金玉均) ·박영효(朴泳孝) 등과 갑신정변을 일으켜 사대당(事大黨)을 제거, 신정부를 조직하고 우의정이 되었다. 그러나 청나라의 개입으로 3일천하로 신정부가 무너지자 대역죄로 처형되었다. 1894년 갑오개혁으로 신원되고 대제학에 추증되었다. 편저에 《일본육군 총제(總制)》 《일본육군 조전(操典)》 등이 있다.
● 김립 [金笠, 1807~1863] 조선시대의 방랑시인. 본관 안동(安東). 본명 병연(炳淵). 속칭 김삿갓. 자 성심(性深). 호 난고(蘭皐). 경기 양주 출생. 1811년(순조 11) 홍경래의 난 때 선천부사(宣川府使)로 있던 조부 익순(益淳)이 홍경래에게 항복한 죄로 폐족(廢族)이 되었다. 당시 6세였던 그는 형 병하(炳河)와 함께 종이던 김성수(金聖秀)의 구원으로 황해도 곡산(谷山)으로 피신, 거기서 공부를 하며 성장하였다. 뒤에 사면을 받고 고향에 돌아왔으나 폐족자에 대한 천대가 심하고 벼슬길도 막혀 20세 무렵부터 방랑생활을 시작하였다. 그는 즐겨 큰 삿갓을 쓰고 얼굴을 가리고 다녔으므로 삿갓이라는 별명도 여기서 생겼는데, 전국을 방랑하면서 도처에서 즉흥시를 남겼다. 그의 시 중에는 권력자와 부자를 풍자하고 조롱한 것이 많고, 그런 작품에 뛰어난 것이 많아 민중시인으로도 불린다. 아들이 여러 차례 귀가를 권유했으나 방랑을 계속하여 전라도 동복(同福:전남 화순)에서 객사하였다. 작품으로 《김립시집(金笠詩集)》이 있다.
● 이완용 [李完用, 1858~1926] 한말의 정치가. 본관 우봉(牛峰). 자 경덕(敬德). 호 일당(一堂). 1882년(고종 19)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 주서(注書)·규장각대교(奎章閣待敎)·검교(檢校)·수찬(修撰)·동학교수(東學敎授)·해방영군사마(海防營軍司馬)를 역임하였다. 1881년 육영공원(育英公院)에 들어가 영어를 배운 뒤 응교(應敎), 세자시강원 겸 사서(司書)를 지냈다. 1887년 주차미국참사관(駐箚美國參事官)으로 도미(渡美), 이듬해 5월 귀국한 후 이조참의(吏曹參議) 겸 전보국회판(電報局會辦), 외무참의(外務參議)를 역임하였다. 그 해 12월 미국 주차대리 공사가 되어 다시 도미했다가 1890년 귀국하여 대사성(大司成)·교환서총판(交換署總辦)을 역임하였다. 1895년 학부대신(學部大臣)·중추원의관(中樞院議官)이 되었다. 1896년(건양 1) 아관파천(俄館播遷) 때 친러파로서 외부대신·농상공부대신 서리를 겸직, 1901년 궁내부 특진관(宮內部特進官)으로 있다가 친일파로 바뀌어 1905년 학부대신이 되고, 같은 해 11월 을사조약의 체결을 지지, 솔선하여 서명함으로써 을사5적신(乙巳五賦臣)의 한 사람으로 지탄을 받았다. 이 해 12월에 의정대신서리·외부대신 서리를 겸직, 1907년 의정부 참정이 되었으며 의정부를 내각으로 고친 다음 통감(統監)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의 추천으로 내각총리대신이 되었다. 헤이그밀사사건 후 일본의 지시대로 고종에게 책임을 추궁하고 양위(讓位)할 것을 강요, 순종을 즉위시키는 등 매국행위를 하다가 1909년 이재명(李在明)으로부터 자격(刺擊)을 받았으나 상처만 입었다. 1910년 8월 22일 총리대신으로 정부 전권위원(全權委員)이 되어 일본과 한일병합조약을 체결, 그 공으로 일본 정부에 의해 백작(伯爵)이 되었다.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을 거쳐 1911년 조선귀족원 회원을 역임, 1920년 후작(侯爵)에 올라 죽을 때까지 일본에 충성을 다했다. 글씨에 뛰어났다. 편저에 《황후폐하 치사문(皇后陛下致詞文)》이 있다.
●홍범도 [洪範圖, 1868~1943] 한말의 독립운동가. 별명 범도(範道). 1868년 평안북도 자성[慈城:일설에는 평양·양덕(陽德)]에서 출생하였다. 어려서 갑산(甲山)에 이사, 수렵과 광산 노동으로 생계를 유지하였다. 1907년 전국적인 의병봉기에 자극을 받고 있던 중 이 해 9월 일제가 ‘총포 및 화약류 단속법’을 공포하고, 이 법에 의하여 포수들의 총을 회수하려 하자, 11월 차도선(車道善)·태양욱(太陽郁)·송상봉(宋相鳳)·허근(許瑾)과 함께 산포대(山砲隊)를 조직, 삼수(三水)·갑산지방 포수들의 총포를 회수하러 온 일본군을 북청(北靑)·후치령(厚峙嶺)을 중심으로 갑산·삼수·혜산(惠山)·풍산(豊山) 등지에서 유격전을 벌여 격파하였다. 이 싸움에서 그는 9시간의 전투 끝에 적을 전멸시켰는데 한때 갑산을 완전히 장악하였다. 1910년 한국이 일제에 의하여 강제 점령되자 소수의 부하를 이끌고 만주로 건너가 독립군 양성에 전력, 다음 해 부하 박영신(朴永信)으로 하여금 함북 경원(慶源)의 수비대를 습격하게 하여 큰 성과를 거두었다. 1919년 본국에서 3·1운동이 일어나자 대한독립군의 총사령이 되어 약 400명의 독립군으로 1개 부대를 편성, 국내에 잠입, 갑산·혜산·자성 등의 일본군을 급습하여 전과를 거두었는데, 특히 만포진(滿浦鎭) 전투에서 70여 명을 사살하였다. 1920년 6월 반격전으로 나온 일본군이 제19사단의 병력과 남양(南陽) 수비대로 부대를 편성하여 독립군 본거지인 봉오동(鳳梧洞)을 공격해 오자, 700여 명의 독립군을 지휘, 3일간의 치열한 전투 끝에 120여 명을 사살, 그때까지의 독립군이 올린 전과 중 최대의 승전을 기록하였으며, 그해 9월 청산리(靑山里) 전투에서는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 제1연대장으로 참가하였다. 그 후 독립운동단체가 흑룡강의 국경지대에 집결하자 항일단체들의 통합을 주선하여 대한독립군단을 조직, 부총재가 되었으며, 1921년 러시아령(領) 흑하자유시(黑河自由市)로 이동하여 스랍스케 부근에 주둔, 레닌 정부의 협조를 얻어 고려혁명군관학교를 설립하는 등 독립군의 실력양성에 힘쓰던 중 1921년 6월 소련 당국의 한국독립군에 대한 무장해제령으로 빚어진 흑하사변(黑河事變)이 발생하자 소련군과 충돌하여 많은 희생자를 낸 채 북만주로 탈출하였다. 그 후 후진 양성에 힘쓰다가 1943년 병사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 김좌진 [金佐鎭, 1889.11.14~1929.12.25] 한국의 독립운동가. 본관 안동(安東). 자 명여(明汝). 호 백야(白冶). 충남 홍성(洪城) 출생. 형규(衡奎)의 2남이다. 부유한 명문대가 출신으로 15세 때 가노(家奴)를 해방할 정도로 진취적 개화사상이 강하였다. 1905년(광무 9) 서울에 올라와 육군무관학교에 입학하였으며, 을사조약 체결 이후 국권회복의 신념을 가지고 애국지사들과 교류하며 국운을 바로잡을 것을 결심하였다. 1907년(융희 1) 고향으로 돌아와서 가산(家産)을 정리하여 호명학교(湖明學校)를 세우고, 대한협회 홍성지부를 조직하는 등 애국계몽운동을 하였다. 다시 서울로 올라와 기호흥학회(畿湖興學會)에 참여하면서 1909년 《한성신보》의 간부를 지냈고, 안창호(安昌浩) 등과 함께 서북학회(西北學會)를 조직하였다. 그리고 서북학회의 산하교육기관인 오성학교(五星學校) 교감을 역임하였으며 청년학우회 설립에도 참여하였다. 1911년 군자금 모금 혐의로 일본경찰에 체포·투옥되어 2년 6개월 간 복역하였고, 1916년 노백린(盧伯麟)·신현대(申鉉大) 등과 함께 광복단에서 활동하였다. 1918년 만주로 망명하여 대종교(大倧敎)에 입교하였으며, 그 해 12월 무오(戊午)독립선언서에 민족지도자 39명 중의 한 사람으로 서명하였다. 19년 대한정의단의 기반 위에 군정부를 조직하여 본거지를 왕칭현[汪淸縣]에 두고 5분단(分團) 70여 개의 지회를 설치한 뒤 광복운동을 위한 기반을 조성하였다. 이를 대한민국임시정부 휘하의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로 개편한 뒤, 그 기관의 총사령관이 되어 1,600명 규모의 독립군을 훈련시켰다. 이어 사관연성소(士官練成所)를 설치하여 사관훈련과 무기입수에도 힘썼다. 기관총 7문 등으로 무장한 김좌진 휘하의 독립정예군은 만주 일대에서는 가장 막강한 실력의 군대로, 1920년 이후 10여 년 간 본격적인 항일전투를 전개하였다. 1920년 10월 20~23일 청산리(靑山里) 80리계곡에서 유인되어 들어온 일본군을 맞아, 나중소(羅仲昭:참모총장)·박영희(朴英熙:부관)·이범석(李範奭:연성대장) 등과 함께 백운평(白雲坪)·천수평(泉水坪)·마록구(馬鹿溝) 등지에서 일본군과 3회의 격전을 전개, 일본군 3,300명을 일시에 섬멸하였다. 이를 청산리전투라 하여 봉오동전투와 함께 독립전쟁사상 최대의 승리로 꼽는다. 그 후 부대를 이동, 헤이룽강[黑龍江] 부근으로 전진하여 국민회군의 안무(安武), 도독부군의 최진동(崔振東) 등과 연합하고 대한독립군단을 결성, 부총재에 취임하였다. 일본군의 격렬한 보복작전의 전개로 1921년 러시아령 자유시(自由市)로 이동하다가 이듬해 헤이허[黑河]사변으로 타격을 받고 다시 만주로 돌아왔다. 1925년 신민부를 창설하여 군사부위원장 겸 총사령관으로 있으면서 성동사관학교(城東士官學校)를 설립, 부교장으로 독립군간부 양성에도 주력하였다. 1927년 만주의 신민부·참의부·정의부의 3부를 통합하려다 실패하자 민족유일당 재만책진회(在滿策進會)를 조직하고 중앙집행위원장에 취임, 단일단결성을 재촉하였다. 1929년 한족연합회를 결성, 주석에 취임하여 황무지개간, 문화계몽사업, 독립정신 고취와 단결을 호소하였다. 1930년 1월 24일 중동철도선 산시역(山市驛) 부근 정미소에서 고려공산청년회의 김일성(金一星)의 감언이설에 빠진 박상실(朴尙實)의 흉탄에 맞아 순국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 윤동주 [尹東柱, 1917.12.30~1945.2.16] 시인. 북간도(北間島) 출생. 용정(龍井)에서 중학교를 졸업하고 연희전문을 거쳐 도일, 도시샤[同志社]대학 영문과 재학 중 1943년 여름방학을 맞아 귀국하다 사상범으로 일경에 피체, 1944년 6월 2년형을 선고받고 이듬해 규슈[九州] 후쿠오카[福岡] 형무소에서 옥사했다. 용정에서 중학교에 다닐 때 연길(延吉)에서 발행되던 《가톨릭소년》에 여러 편의 동시를 발표했고 1941년 연희전문을 졸업하고 도일하기 앞서 19편의 시를 묶은 자선시집(自選詩集)을 발간하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가 자필로 3부를 남긴 것이 그의 사후에 햇빛을 보게 되어 1948년에 유고 30편을 모아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로 간행되었다. 이 시집이 세상에 나옴으로써 비로소 알려지게 된 윤동주는 일약 일제강점기 말의 저항시인으로서 크게 각광을 받게 되었다. 주로 1938~1941년에 씌어진 그의 시에는 불안과 고독과 절망을 극복하고 희망과 용기로 현실을 돌파하려는 강인한 정신이 표출되어 있다. 《서시(序詩)》 《또 다른 고향》 《별 헤는 밤》 《십자가》 《슬픈 족속(族屬)》 등 어느 한 편을 보더라도 거기에는 울분과 자책, 그리고 봄(광복)을 기다리는 간절한 소망이 담겨져 있다. 연세대학교 캠퍼스와 간도 용정중학 교정에 시비(詩碑)가 세워져 있으며, 1995년에는 일본의 도시샤대학에도 대표작 《서시》를 친필과 함께 일본어로 번역, 기록한 시비가 세워졌다.
● 나혜석 [羅蕙錫, 1896.4.18~1949] 한국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 본관 나주. 호 정월(晶月). 경기 수원 출생. 1918년 일본 도쿄[東京]여자미술학교 유화과를 졸업하고, 1920년 김우영(金雨英)과 결혼하였다.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제1회부터 제5회까지 입선하였고, 1921년 3월 경성일보사 건물 안의 내청각에서 한국 여성화가로서 최초의 개인전을 가졌다. 1926년부터 3년간 남편과 함께 세계일주, 귀국 도중 파리에서 그린 정원화(庭園畵)가 도쿄의 이과전(二科展)에 입선되었다. 한편, 1918년 《경희》 《정순》 등의 단편소설을 발표하여 소설가로도 활약하였다. 1929년 이혼하고 충청남도 공주의 마곡사(麻谷寺)에 들어가 수도생활을 하였다. 대표작으로 《누드》가 있다.
● 윤심덕 [尹心悳, 1897~1926] 여류 성악가. 본관 파평(坡平). 평양 출생. 1918년 경성여고보(京城女高普) 사범과를 졸업하고 강원도 원주공립보통학교 교사로 근무하다가 조선총독부의 관비생으로 일본 도쿄음악학교에 유학, 성악을 전공하고 귀국했다. 그후 경성사범부속학교 음악교사로 근무하면서 음악회에 출연, 성악가로 명성을 떨치고 1925년 토월회(土月會) 배우로 활약하다가 유행가수로 전향하여 방송에 출연하는 한편 레코드를 취입, 특히 《사(死)의 찬미》로 인기를 끌었다. 1926년 레코드취입을 위하여 오사카에 있는 닛토[日東]레코드회사에 갔다가 귀국길에 관부연락선 도쿠주마루[德壽丸] 위에서 애인 김우진(金祐鎭)과 함께 현해탄에 투신, 정사(情死)하였다.
● 홍난파 [洪蘭坡, 1898.4.10~1941] 한국의 작곡가·바이올리니스트. 본관은 남양(南陽), 본명은 영후(永厚)이다. 1898년 경기도 수원(水原)에서 태어났다. 1912년 YMCA를 졸업하고 1915년 조선정악전습소(朝鮮正樂傳習所) 양악부(洋樂部)를 마친 뒤 동 전습소 교사가 되었다. 1916년 최초의 곡으로 추정되는 행진곡풍의 야구 응원가인 창가(唱歌) 《야구전》을 작곡하였다. 1918년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음악학교에서 2년간 수학한 후 귀국, 1920년 《봉선화》의 원곡인 《애수》를 작곡하고, 1925년 제1회 바이올린 독주회를 가졌다. 이 무렵 잡지 《음악계》를 발간했으며, 소설 《처녀혼》 《향일초(向日草)》 《폭풍우 지난 뒤》 등도 발표하여 문학적 재질도 보였다. 1926년 다시 일본 도쿄고등음악학교에 편입하고 이듬해 도쿄신교향악단의 제1바이올린 연주자가 되었다. 1929년 귀국하여 중앙보육학교 교수를 거쳐 1931년 조선음악가협회 상무이사로 있다가 같은 해에 미국으로 건너가 셔우드음악학교에서 연구하였다. 1933년 귀국하여 이화여전 강사를 지낸 뒤 경성보육(京城保育)학교 교수로 전임하였다. 1935년부터 《백마강의 추억》 등 모두 14곡의 대중가요를 나소운(羅素雲)이라는 예명으로 발표하기도 하였다. 1937년 조선총독부 주도로 결성된 친일 사회교화 단체인 조선문예회에 가입하면서부터 총독부의 정책에 동조하였고, 1938년에는 대동민우회(大同民友會), 1941년에는 조선음악협회 등 친일단체에 가담했다. 작품에는 《봉선화》 외에 《성불사의 밤》 《옛동산에 올라》 등 민족적 정서와 애수가 담긴 가곡과, 《달마중》 《낮에 나온 반달》 등의 동요, 도쿄 유학 직전에 남긴 《통속창가집》 《행진곡집》 등 17권의 편저작물이 있다. 이밖에 저서에는 《음악만필(音樂漫筆)》 《세계의 악성》 등이 있다.
● 이중섭 [李仲燮, 1916.4.10~1956.9.6] 서양화가. 호 대향(大鄕). 평남 평양(平壤) 출생. 오산고보(五山高普) 졸업. 일본 도쿄문화학원[東京文化學院] 미술과 재학 중이던 1937년 일본의 전위적 미술단체의 자유미협전(自由美協展:제7회)에 출품하여 태양상(太陽賞)을 받고, 1939년 자유미술협회의 회원이 되었다. 1945년 귀국, 원산(元山)에서 일본 여자 이남덕(李南德:본명 山本方子)과 결혼하고 원산사범학교 교원으로 있다가 6·25전쟁 때 월남하여 종군화가 단원으로 활동하였으며 신사실파(新寫實派) 동인으로 참여했다. 부산·제주·통영 등지를 전전하며 재료가 없어 담뱃갑 은박지를 화폭 대신 쓰기도 했다. 1952년 부인이 생활고로 두 아들과 함께 도일(渡日)하자, 부두노동을 하다가 정부의 환도(還都)와 함께 상경하여 1955년 미도파(美都波)화랑에서 단 한 번의 개인전을 가졌다. 그후 일본에 보낸 처자에 대한 그리움과, 생활고가 겹쳐 정신분열병증세를 나타내기 시작, 1956년 적십자병원에서 간염으로 죽었다. 작풍(作風)은 포비슴(야수파)의 영향을 받았으며 향토적이며 개성적인 것으로서 한국 서구근대화의 화풍을 도입하는 데 공헌했다. 담뱃갑 은박지에 송곳으로 긁어서 그린 선화(線畵)는 표현의 새로운 영역의 탐구로 평가된다. 작품으로 《소》(뉴욕현대미술관 소장), 《흰 소》(홍익대학교 소장) 등이 있다.
● 김홍도 [金弘道, 1745~?] 조선시대의 화가. 본관 김해(金海). 자 사능(士能). 호 단원(檀園)·단구(丹邱)·서호(西湖)·고면거사(高眠居士)·첩취옹(輒醉翁). 강세황(姜世晃)의 천거로 도화서 화원(圖畵署畵員)이 된 뒤 1771년(영조 47)에 왕세손(뒤의 正祖)의 초상을 그렸고, 1781년(정조 5)에 어진화사(御眞畵師)로 정조를 그렸다. 1788년 스승 김응환(金應煥)이 왕명을 받고 몰래 일본의 지도를 그릴 임무를 띠고 떠날 때 그를 수행, 부산까지 갔으나 김응환이 거기서 병으로 죽자 홀로 쓰시마섬[對馬島]에 가서 일본 지도를 모사(模寫)해 가지고 돌아왔다. 1790년 수원 용주사(龍珠寺) 대웅전에 《삼세여래후불탱화(三世如來後佛幀畵)》를 그렸고, 1795년(정조19) 연풍현감(延豊縣監)이 되었다가 곧 사임하였다. 이듬해 왕명으로 용주사의 《부모은중경(父母恩重經)》 삽화를 그렸으며, 1797년 정부에서 간행한 《오륜행실도(五倫行實圖)》의 삽화를 그렸다. 산수화·인물화·신선화(神仙畵)·불화(佛畵)·풍속화에 모두 능하였고, 특히 산수화와 풍속화에 새로운 경지를 개척했다. 산수화는 사실(寫實)묘사와 조국애가 어울려서 조국 강산의 아름다움을 예술로 승화시킨 것으로 당시의 신윤복(申潤福)·이인문(李寅文)·김석신(金碩臣)·김득신(金得臣) 같은 화가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또, 풍속화는 서민사회의 생활정서와 농(農)·상(商)·공(工) 등의 생활정서를 주제로 하여 그들의 생활모습을 익살스럽고 구수한 필치로 그린, 일종의 사회풍자를 곁들인 작품들이다. 기법도 서양에서 들어온 새로운 사조를 받아들여 과감히 시도하였는데, 용주사의 《삼세여래후불탱화》에서 볼 수 있듯이 색채의 농담(濃淡)과 명암으로써 깊고 얕음과 원근감을 나타낸, 이른바 훈염기법(暈染技法)이 그것이다. 작품에 《소림명월도(疎林明月圖)》, 《신선도병풍(神仙圖屛風)》, 《쌍치도(雙雉圖)》, 《무이귀도도(武夷歸棹圖)》, 《낭구도(浪鷗圖)》, 《군선도병(群仙圖屛)》, 《선동취적도(仙童吹笛圖)》, 《풍속화첩(風俗畵帖:야공도·서당도·씨름도·무악도 등)》, 《마상청앵도(馬上聽鶯圖)》 등이 있다.
● 장승업 [張承業, 1843~1897] 조선 후기의 화가. 본관 태원(太原). 자 경유(景猶). 호 오원(吾園). 화원(畵員)을 지내고 벼슬은 감찰(監察)에 이르렀다. 고아로 자라 어려서 남의집살이를 하면서 주인 아들의 어깨너머로 그림을 배웠다. 화재(畵才)에 뛰어났고 술을 몹시 즐겨 아무 주석(酒席)에 나가서나 즉석에서 그림을 그려주었다. 절지(折枝)·기완(器玩)·산수·인물 등을 잘 그렸고 필치가 호방하고 대담하면서도 소탈한 맛이 풍겨 안견(安堅)·김홍도(金弘道)와 함께 조선시대의 3대 거장으로 일컬어진다. 평생 독신으로 살았다. 주요 작품에 《홍백매십정병(紅白梅十幀屛)》 《군마도(群馬圖)》 《청록산수도(靑綠山水圖)》 《수상서금도(樹上棲禽圖)》 《영모절지병풍(翎毛折枝屛風)》 《풍림산수도(楓林山水圖)》 《화조곡병(花鳥曲屛)》 《담채산수(淡彩山水)》 《화조수도(花鳥獸圖)》 《포대도(包袋圖)》 《심양송객도(陽送客圖)》 《어옹도(漁翁圖)》 등이 있다.
● 신윤복 [申潤福, 1758~?] 조선 후기의 풍속(風俗)화가. 본관 고령(高靈). 자 입부(笠父). 호 혜원(蕙園). 김홍도(金弘道) ·김득신(金得臣)과 더불어 조선 3대 풍속화가로 지칭된다. 그는 풍속화뿐 아니라 남종화풍(南宗畵風)의 산수(山水)와 영모(翎毛) 등에도 뛰어났다. 속화(俗畵)를 즐겨 그려 도화서(圖畵署)에서 쫓겨난 것으로 전해지며, 그의 부친 신한평(申漢枰)과 조부는 화원이었으나 그가 화원이었는지는 불분명하다. 다만, 전해진 작품에 남긴 간기(干紀)로 해서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된 《처네를 쓴 여인》에 있는 1829년이 가장 하한인 바 대체로 19세기 초에 활동한 것으로 짐작된다. 화원이었는지의 여부는 불분명해도 직업화가로, 당시 수요에 따른 많은 풍속화를 그렸을 것으로 보인다. 대표작으로는 국보 제135호로 지정한 《혜원전신첩(蕙園傳神帖)》이 전한다. 모두 30여 점으로 이루어진 이 화첩은 간송미술관 소장품으로 국내뿐 아니라 해외 전시를 통해 외국에도 잘 알려진 그림이다. 사회 각층을 망라한 김홍도의 풍속화와 달리 도회지의 한량과 기녀 등 남녀 사이의 은은한 정을 잘 나타낸 그림들로 동시대의 애정과 풍류에 대해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 외에도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된 《탄금(彈琴)》 등 6점으로 된 화첩 또한 명품(名品)이다. 아울러 초상기법으로 그린 《미인도(美人圖)》는 조선 여인의 아름다움을 잘 드러낸 걸작으로 손꼽힌다.
● 정수동 [鄭芝潤, 1808~1858] 조선후기의 시인. 본관 동래(東萊). 자 경안(景顔). 호 하원(夏園). 규칙적인 생활을 싫어하고 자유분방한 생활을 좋아했다. 두뇌가 명석하여 어려운 문장도 잘 파악했다. 그의 시는 권력과 금력에 저항하고 예리한 풍자로 일관하여 많은 일화가 전해진다. 번잡하고 텅빈 형식을 배격하고, 간결하면서도 격조높은 시를 썼다. 당대의 명사 김흥근(金興根) ·김정희(金正喜) ·조두순(趙斗淳)과 친분이 있었다. 그는 수동(壽銅)이란 별호를 사용했다. 저서로는 《하원시초(夏園詩)》가 있고, 작품으로는《남한시(南漢詩)》 《관동상매(關東賞梅)》 《전춘시(餞春詩)》가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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