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윤두서의 생애
1. 생 애
해남 윤씨 집안의 19대 종손인 윤두서는 1668년(효종 9년)에 해남의 연동에서 태어났다. 그는 본래 윤이후의 넷째 아들이었는데, 18대 종손이며, 윤이후의 사촌맏형인 爾錫이 후사가 없자 윤선도가 爾厚의 자식들 중 점괘를 보아 가장 길한 괘가 나온 두서를 이석의 양자로 입적시켜 종손으로 삼았다. 이에 따라 양어머니인 숙인 심씨가 어렸을 적에 데려다 키웠으며, 12~13세 사이에는 양부모와 함께 서울로 올라가 駱山의 서쪽에 살았다. 윤두서의 유년기에 대하여는 그리 전하는 기록이 없으나 어릴 때부터 문예에 뛰어났고, 특히 필법에 재능이 있어서 5~6세에 벌써 큰 글씨와 초서를 써서 칭찬을 받았다고 하는 것을 보아 타고난 재능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15세에 芝峰 李睡光(1563~1628)의 외손녀인 전주 이씨와 혼인하여 18세에 큰아들인 德熙를 낳았다. 그러나 윤두서가 22세 되는 해에 부인은 2남 1녀를 두고 세상을 떠났다. 26세에는 進士試에 합격하였으나 관직에 나아가지 않고 독서로 소일하였으며, 27세에는 양부인 爾錫이 타계하여 29세까지 3년간 복을 입었다. 윤두서가 29세 되던 해에는 세째 형인 宗緖가 당쟁에 연루되어 거제도에 유배되었다가 이듬해에 다시 체포되어 34세로 세상을 떠났고, 윤두서가 30세 되던 해에는 큰 형인 昌緖가 모함을 받고 윤두서로 연루되었으나 무고로 밝혀져 무사하였다. 이러한 일을 겪으면서 공재는 더욱 세상사에 뜻을 잃어 더 이상 관직에 연연해 하지 않고 48세(1715년)에 세상을 뜨기까지 학문과 서화에 열중하게 되었다.
윤두서는 30세 이후 주변의 친인척과 가까이 교유하던 友人들이 차례로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심적, 물적으로 많은 타격을 입으며 힘든 나날을 보내야 했다. 그가 무고를 당한지 2년 뒤 32세 때에는 죽도에 은거하고 있던 생부 윤이후가 세상을 떠났고, 그로부터 5년 뒤 37세에는 생모가 별세하였다. 2년 후인 39세에는 또한 가까이 어울려 지내던 剡溪 李潛이 상소를 올렸다가 무고로 매맞아 죽게되었다. 이잠은 星湖 李瀷(1579~1624)의 형이요, 동시에 윤두서가 평생 金蘭之交를 가졌던 玉洞 李漵(1662~1723)의 형이었다. 이익은 이잠의 죽음으로 인하여 충격을 받고 평생 벼슬을 포기하고 학문에 몰두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로부터 4년 뒤인 43세 때에는 다시 가장 친한 친구인 심득경이 타계하니 줄이은 초상에 윤두서는 편안할 겨를이 없었을 것이다.
윤두서가 45세 되던 1712년에는 양모인 숙인 심씨가 타계하였는데, 워낙 정성을 들여 장례를 다한 까닭에 가산이 소모되어 서울에서 계속 살만한 대책이 없자 1713년에 가족을 이끌고 해남의 白蓮洞으로 낙향하였다. 그러나 그는 곧 서울로 돌아갈 계획이었다. 낙향하기 전에 형인 尹昌緖와 곧 올라가 함께 모여 살 것을 약속하였으나 1714년에 갑자기 형이 죽었고 윤두서는 조카들을 해남으로 내려오게 하였다. 거듭된 슬픔에다 해남에서의 생활이 수질과 풍토가 맞지 않았기 때문인지 윤두서는 1715년 우연한 감기 끝에 사망하니 향년 48세였다.
그는 슬하에 9남3녀를 두었는데, 그 중 맏아들인 駱西 尹德熙(1685~1766)가 20대 종손으로 해남 윤씨 가문의 혈통을 이었다. 윤두서 자신은 아이들에게 서화를 가르치지 않으려고 하였다 하나 윤덕희 또한 서화를 잘 하였고, 그 손자인 尹용(1708~1740)도 서화에 뛰어나서 자연 가법으로 전수되었다.
2. 교우관계
윤두서는 1693년(숙종 9) 진사시에 급제하였으나 집안이 당대 주도적인 정치 세력에서 소외된 남인(南人)계열이었고, 당쟁이 심화하였던 상황에서 자연히 관로를 포기하고 시서화와 교우, 독서로써 생애를 지냈는데, 천문․지리․수학․병법․금석․음악․공예 등 집안의 전통과 교우 관계에 따라 다방면을 섭렵하였다. 이들은 당시에는 잡학으로 취급되던 분야이다. 아들 윤덕희가 쓴 행장과 종가소장의 유품 가운데 <동국여지지도(東國與地之圖)>와 <일본여도(日本輿圖)>, 인장(印章)을 비롯해서 천문서인 『관규집요(管窺輯要)』, 수학서인 『양산(楊算)』 등의 유품을 통해서 엿볼 수 있다. 이처럼 실학적 분야에 심취하였던 윤두서는 자연히 동류의 인물들과 교류하였으며, 조선 후기 실학의 거두인 성호 이익(1681~1763) 형제들과 가장 절친한 교분을 가졌다.
윤두서는 이익의 둘째 형인 옥동 이서(1662~1723)와 매일 상면할 정도였고, 두 집안은 형제들끼리도 친해서 윤두서의 관형(寬兄)이고 묘갈명을 썼던 현파 윤흥서, 이익, 이서의 장형인 이잠 등이 단짝이었다 하며, 유상(遺像)을 그려 준 심득경도 함께 어울렸다. 이들의 친분은 종가에 소장된 해남 윤씨 문집인 『당악문헌』의 ‘공재’편에 게재된 이서의 만사(輓詞)외 제문의 내용에 잘 나타나 있으며, 그들의 교류는 인간적인 면에서뿐만 아니라 학문적으로도 밀착되어 있다.
이서는 1718년에 쓴 제문에서 그들 형제가 윤두서로부터 박학한 점을 배웠고, 윤두서가 세상을 떠난 뒤 그의 넓은 학식에 더 접하지 못하는 아쉬움을 적었다. 윤두서의 이러한 학식은 외증손으로 강진에 유배 온 다산 정약용(1762~1836)에게도 영향을 주었으리라 여겨진다. 강진 유배시 정약용은 해남의 녹우당을 왕래하며 윤두서의 서화와 유적을 접하였고, 특히 윤두서의 자화상을 보고 정약용 자신이 외증조를 꼭 닯았다고 피력하고 있어 흥미롭다. 그러나 이 두 인물 사이의 학문적 관계를 밝혀 줄 뚜렷한 자료는 없다. 윤두서은 학자로서의 깊이 있는 학문 세계를 정립하지는 못하였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그는 학문이나 회화에서나 실사구시의 실험 정신으로 임하였다. 이는 행장에 ‘필정구연핵(必精究硏覈)’해서 ‘실득(實得)’했다는 사실과도 잘 부합한다. 그리고 ‘凡畵人物動植 必終日注目 得其眞形而後已…’하였다는 윤두서의 창작태도는 실제 사실적 묘사 기량이 뛰어난 자화상이나 말 그림에 잘 나타나 있다.
Ⅱ. 공재 윤두서의 회화세계
1. 공재의 화풍
시․서․화 삼절(三絶)인 윤두서(1668~1715)는 겸재 정선, 현재 심사정과 함께 조선 후기의 삼재(三齋)라 일컬어질 정도로 당대에 비중 있는 선비화가이다. 활동 시기로 보아 엄밀히 말한다면 중기(1550~1770경)와 후기(1770~1850경)의 변화기에 위치하는 작가이다. 그래서 윤두서의 회화 역시 중기 전통화풍의 계승과 신경향의 선구로 거론될 만큼 복합적이다.
먼저 양대 전란을 겪고 혼란이 계속되었던 중기는 이불해․이정근․이흥효․이징 등이 초기의 안견 화풍을 지속하였고, 김제․이경윤․이정․함윤덕․김명국 등 중국 명대의 절파계 화풍(浙派系 畵風)이 소극적이나마 수용되었다. 윤두서는 산수화에서 절파계 화풍을 계승하였는데, 그러한 취향은 최근 공개된 그의 유집 『기졸(記拙)』의 화평 부분에 뚜렷하게 나타난다. 윤두서는 조선 초기의 대가로 손꼽히는 안견과 그 일파에 대하여는 혹평을 가했으면서도 함윤덕을 ‘화원의 노수(老手)’로, 김지를 ‘안견에 버금가는 당대의 독보적인 존재’로, 김명국을 ‘화원의 누습(陋習)을 벗어난 명가’로 일컬으며, 그가 심취했던 절파계 화풍을 수용한 작들을 호평하였다. 또한 그는 시대적 변동기의 미감을 구현한 회화관도 분명하였다. 즉 필묵법(筆墨法)과 화학(畵學)【화식(畵識)․화공(畵工)․화재(畵材)로써 화도(畵道)에 이르는 오품론(五品論)을 전개하였던 것이다.
다음 문예부흥을 이룩한 18세기 영․정조년간의 조선 후기의 회화는 국풍화(國風化)의 자각과 함께 신경향이 두드러졌다. 심사정․이인상․강세황 등 남종문인화풍의 정착, 정선 진경산수화와 김홍도․신윤복 등 풍속화의 유행, 그리고 부분적인 서양화풍의 수용 등이 그것이다.
산수화 영역에서 절파계 화풍을 따랐던 윤두서의 경우는 진경산수작품은 없으나 남종화풍의 수용을 비롯한 풍속화, 서양화 수용 화풍에서는 선구적 위치를 차지하였다. 이러한 경향은 18년 후배인 선비화가 관아재 조영석(1686~1761)의 회화에도 나타난다. 최근 조영석의 유고(遺稿)와 회화가 새로이 발굴되어 주목을 끌었다. 그 가운데서도 서민층의 생활을 담은 풍속화첩은 윤두서의 풍속화와 함께 김홍도․신윤복 이전의 선구로서 17세기 후반부터 18세기 전반, 즉 숙종에서 영조년간의 화단에 형성된 선비화가들의 새로운 의식 전환과 후기 회화의 개조(開祖)로서 그들의 역할을 충분히 드러내 주었다.
2. 공재 회화의 특징
윤두서는 48세의 짧은 생애를 살았다. 짧은 기간 활동한 화가로서의 그는 그보다 8년 뒤에 태어난 겸재 정선(1676~1759)과 흔히 비교되는데, 공재의 그림은 조선 후기의 새로운 경향보다 중기의 전통을 계승한 쪽으로 평가된다. 그러면서도 중기의 말과 후기의 초기라는 과도기에 활동하였던 만큼 그의 작품세계는 다분히 복합적인 요소를 지녔다. 즉 <산수도>나 <산수인물도>는 중기의 절파계 화풍을 따른 반면에, 중국 남종화풍의 유입 단서가 되는 『고씨역대명인화보(顧氏歷代名人畵譜)』의 참작과 함께 종가소장의 화첩에는 남종화법을 구사해 본 습작들도 눈에 띈다.
그리고 인물화에 있어 서민층의 풍습을 다룬 속제(俗題)의그림은 1713년 가정을 이끌고 해남에 귀항하여 은거하던 생활 속에서 나온 것으로 추정된다. 또 그의 대표작인 <자화상>과 <말그림> 등 인물․초상화들은 그의 작업 태도를 실증해 주듯이 한국회화사에서도 돋보이는 관찰력과 묘사력을 갖추었다. 그런 반면 <노승도(老僧圖)>나 도석인물화(道釋人物畵)에서는 대담한 수묵의 선종화적 취향도 지녔다. 이외에 영모․화조․초충 등 다양한 소재를 섭렵하였고, 이들은 선비화가로서의 여기적 수준을 충분히 넘은 것이다. 종가소장의 화첩 가운데 농가의 생활을 담은 <채애도(採艾圖)>, <짚신삼기>, 목기를 깎는 장면인 <선차도(旋車圖)> 등은 바로 자신의 주변 현실에 애정 어린 눈길을 돌린 그의 태도를 알게 해준다. 특히 이들 풍속화는 회화사적 평가에서 그의 <자화상>에 버금가는 중요 위치를 점한다.
더불어 그의 회화에서 가장 관심을 끄는 것은 자화상에서 보이는 서구화풍의 수용이다. 정면의 앞면만 부각시켜 자신의 심성을 잘 드러낸 <자화상>은 묘사 방법이나 표현력에서 서구적인 소묘 작품을 연상케 한다. 그리고 목기 깎는 장면을 그린 <선차도> 역시 소재나 표현에서 서구적인 냄새가 강하다. 이들 사실주의적 작품을 통하여 그가 서구 회화와 접했을 가능성이 짐작된다. 그러한 가능성은 서학이나 새로운 학문에 관심이 컸었던 이익 형제들과의 만남과 조선에 본격적으로 서구 문화를 소개했던 지봉 이수광(1563~1628)의 증손녀가 그의 첫 번째 부인이었던 사실에서도 찾을 수 있다. 특히 이익을 비롯한 당대의 실학자들은 서양회화에 대한 인상이 깊었으며, 그것을 통한 사실주의적 조형관을 가졌었다. 그리고 부인의 조부이며, 이수광의 아들인 이성구(1584~1644)도 1637년과 1640년에 사신으로 심양에 다녔왔다. 물론 윤두서가 두 인물과 직접적인 관계를 갖지 않았겠으나 사위로서 새로운 문물을 수용했던 처가의 전통과 유품을 만났을 것이다. 이러한 윤두서의 남종화풍과 사실주의적 회화 경향은 조선 후기 회화론 형성의 바탕을 이루었고, 특히 남종화임네 하며 ‘화의불화형(畵意不畵形)’으로만 치달으려는 성향을 날카롭게 비판한 이익에서 정약용에 이르는 실학자들의 사실주의적 회화론으로 정립되었다.
Ⅲ. 공재 화풍의 계승
1. 연옹 윤덕희
윤두서가 조선시대 회화사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산수․인물도 등 후기 회화의 선구적 측면도 물론이려니와 회화론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산수․인물도 등 후기 회화의 선구적 측면도 물론이려니와 회화론에서도 선구적이다. 또한 남도화단에서의 역할은 보수적인 성격으로 중기와 후기를 섭렵한 데 있다. 지금 남도 화단이 다시 생각해야 될 의식의 문제나 묘사력을 중시한 작가적 태도는 오히려 윤두서의 회화에서 배울 점이 많다. 이런 그의 회화는 아들인 윤덕희와 손자인 윤용(1708~1740)에게로 가전(家傳)되었는데, 그들의 회화들은 새로운 경향보다 전통화풍 쪽으로 기울었다.
연옹 운덕희(1685~1766)는 공재 윤두서의 큰아들로 가업을 계승한 조선후기의 선비화가이다. 자는 경백(敬伯), 호는 낙서(駱西)이다. 녹우당이 있는 연동의 마을 이름을 따서 연포(蓮浦), 혹은 연옹(蓮翁)이라 하였다. 아버지 윤두서는 선비화가로서 조선 후기 화단에 많은 업적을 남겼으나 벼슬길에서는 빛을 보지 못하였다. 그와 달리 윤덕희는 아버지의 명성을 배경으로 관리로서 등용되는 인연을 가졌다. 1748년(영조 24)에 삼성진(三聖眞)을 중수하고 어진을 모사(模寫)할 때 선비화가로서 참여할 수 있는 감동(監董)에 선발되었다. 그것이 벼슬길에 오르는 계기였고, 현감․도사 등을 역임하였으며, 사후 동지중추부사에 추증되었다.
그는 아버지의 행장을 썼고, 현재 종가소장의 윤두서 화첩인 「해남윤씨가전고화첩(海南尹氏家傳古畵帖)」(보물 481호)도 그가 정리해서 표장한 것이다. 이 작업은 윤덕희 자신의 화업보다 아버지 윤두서의 회화를 후세에 전한 위업으로 높이 살 만하다. 또한 그런 탓에 전통성이 강한 윤두서의화풍을 더욱 철저하게 습득하였을 것이다.
윤두서를 전수 받은 윤덕희의 회화는 ‘신선과 말을 잘 그렸다’(이긍익, 『연려실기술』)라는 화평에 손색없는 중국적인 소재의 <하마선인(蝦蟆仙人)>, <진무(眞武)>(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등 도석인물을 비롯하여 <송하고사(松下高士)>, <기마미인(騎馬美人)>(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등의 고사인물 및 그러한 내용을 담은 산수인물, 그리고 <기마인물>과 <말그림>(국립중안박물관 소장)들이 유존한다. 윤덕희의 이러한 회화적 관심은 부업을 계승한 이유도 있겠고, 당시의사회적 요구에 따른 때문이기도 하였다. 그것들의 전통적 화풍에 비하여 <월야산수(月夜山水)>(개인소장), <설경산수(雪景山水)>(서울대박물관 소장)를 비롯한 산수나 산수인물화에서는 영조시대 화단의 유행에 동참하여 윤두서보다 남종화풍의 수용이 비교적 깊게 느껴진다.
그리고 종가에 소장된 그의 화첩 중에는 필력은 다소 미흡하지만 단양의 <도담삼봉도(島潭三峰圖)>도 남아 있어 진경을 사생하는 일에는 관심을 보였음이 확인된다. 그의 회화에는 대작이 많기는 하나 역시 답보적이고 보수적인 냄새가 강하다. 또 거칠고 투박한 필치로, 짧은 생애 동안 이룩한 윤두서의 탁월한 필력과 황경(畵境)에는 이르지 못하였다. 또한 그의 작품 중에서 <공기놀이>(국립중앙박물관 소장)는 풍속화에 대한 그의 새로운 시각이 나타나 있다. 그렇지만 전통적 취향 때문인지 풍속화가 지녀야 할 현실 감각이 덜하다. 실제로 윤두서의 시각을 감안한다면 더욱 진전된 윤덕희의 풍속화를 기대할 수도 있겠는데, 참 미약하다. 그 점도 윤덕희가 아버지에 비하여 회화사적 평가를 받지 못하는 이유 중의 하나일 것이다.
2. 청고 윤용
청고 윤용(1708~1740)은 연옹 윤덕희 차남이다. 1735년(영조11)에 진사시에 급제하였으며, 할아버지 윤두서와 아버지로부터 화재를 이어받았고, 문장에도 뛰어났으나 뜻을 다 펴지 못하고 33세로 요절하였다. 어쨌든 그는 가업을 계승한 선비화가로서 3대에 걸친 조선후기의 명문화가 가정을 이루었다. 윤용은 술을 좋아하였으며, 기품이 화미(華美)하고 맑은 성품에 단려(端麗)한 용모를 지녔다고 전해온다.
요절한 때문에 현존하는 유작이 많지 않으나 그것들은 대체로 산수, 도석인물, 풍속 등 집안의 전통을 따른 것이다. 그러면서도 시대의 흐름에 맞게 남종화풍의 수용에 보다 적극적인 면이 나타난다. 또한 그는 구름과 나무, 화조, 초충 등에도 뛰어난 재능을 발휘하였다고 전해 오는데, 할아버지 윤두서의 화법을 이어 자세한 관찰력과 정심(精深)한 묘사를 갖추었다고 한다. 이에 대하여 사촌 여동생의 아들로 조카뻘인 다산 정약용은 윤용의 「취우첩(翠羽帖)」에 대한 화평에서 “화목(花木), 영모(翎毛), 곤충을 그렸는데 정말 실물을 닮았고, 그 묘한 이치는 정세(精細)하며 생동감이 넘친다. … 윤공은 나비와 잠자리를 잡아서 그 수염, 턱, 맵시 등을 면밀히 관찰해서 그 모습을 똑같이 그린 뒤에야 붓을 놓았다 하니 그분의 정결(精潔)한 태도를 짐작할 수 있겠다. …”(『여유당전서 1권』)라고 하였다. 이를 통해서도 윤두서의위업에 접근할 수 있었던 가능성은 아버지인 윤덕희보다 나았을 것으로 짐작되기도 한다.
윤용의 작품 가운데 시골 여인의 삷을 담은 <협롱채춘(挾籠採春)>(간송미술관 소장)에는 아버지에게서 찾아볼 수 없는 풍속화의 생동감이 물씬하다. 그 감각은 역시 할아버지 윤두서의 시각과 만나는 것으로 윤두서의 <채애도>를 연상케 한다. 필력은 설익었지만 오히려 윤두서의 풍속화보다 현실 인식이 짙다. 여기에서 그는 향토적 소재에 끌린 애정을 회화적인 감흥으로 진솔하게 표현하였다. 등돌린 여인의 포착과 공간감, 중간 톤의 섬세한 변화 속에서도 덤덤한 수목 감각, 언덕 풀섶이나 치마 주름에 가한 깔끔한 붓질 등은 부분적인 미숙함이 눈에 거스르지 않을 정도로 시취(詩趣)와 탈속한 화격을 풍겨 준다. 솔직한 선비화가의 시각이 참신하고 깨끗한 그림이다. 이처럼 뛰어난 감각의 윤용이 33세의 나이로 요절한 데 대한 아쉬움이 쉽게 뇌리에서 떠나지 않는다.
그 외에 <증산심청(蒸山深靑)>, <야심명월(夜深明月)>(서울대박물관 소장), <누각산수(누각산수)>(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등의 산수화 및 (신선도(신선도)>(서강대 박물관 소장) 등 도석인물이 유존하는데 이는 아버지, 할아버지의 화풍을 승계한 것이다. 그러면서도 산수화에는 윤용의 섬세한 감각이 눈에 띈다. 그것은 당시 화단에 풍미하기 시작한 남종화풍을 채득한 화풍으로 여겨진다.
< 참 고 문 헌 >
1. 안휘준, 『한국회화사』, 일지사, 1980.
2. 안휘준, 『한국 회화의 전통』, 문예출판사, 1988.
3. 전라남도지편찬위원회, 『전라남도지』4집, 전라남도, 1993.
4.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편, 『전라남도의 향토문화』(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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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문화관광해설가 원문보기▶ 글쓴이 : 해남현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