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강씨중앙종회 |
이오당(二吾堂)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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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백오현(太白五賢)의 표상(表象) 정민공(貞敏公) 잠은(潛隱) 흡(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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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 번 놀란다. 그 정자의 규모가 작은데 놀라고 그 명성과 의의가 큰 데 더 놀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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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지정 문화재 자료 156호로 지정된 이오당은 서기 1679년(숙종5)에 건립되었다. 진주강씨 법전문중 입향조(入鄕祖)정민공ㆍ잠은 강흡(姜恰)의 절의(節義)를 기리며 학덕(學德)을 추모(追慕)하여 세웠다. 정민공의 아드님은 다섯이고 손자는 열셋이다. 아드님 다섯은 말할 것도 없고 손자 열셋은 효성이 지극하고 우애가 돈독하였다. 숙질 열서너명(건립 당시 손자 4-5명은 출생하지 않았음)의 효우의 힘을 바탕으로 하여 유림의 호응 속에 건립되었다. 나는 "천명을 즐거이 받아 들이고 살다가 생애를 마친다. (樂吾天終吾年)"라는 뜻에서 이오당(二吾堂)이라 편액하였다. 이 정자의 특색은 태백오현의 상징이라는 점에 있다. 만주의 야만족이 세운 후금이 중국을 정벌하여 청이라는 대제국이 되어 일방주의의 힘을 휘두르며 병자호란을 일으켜 우리나라를 침범하니 이에 항거하여 벼슬을 버리고 태백산(太白山) 아래 은거한 지사(志士) 5인이 회동(會同)하던 추억의 표상이다. 이 5인은 바로 포옹(抱翁) 정양(鄭瀁), 두곡(杜谷). 홍우정(洪宇定). 손우당(遜愚堂). 홍석(洪錫). 각금당(覺今堂). 심장세(深長世). 제공(諸公)과 정민공(貞敏公)이다. 이 5인은 학행과 덕망으로 칭송이 높았다. 세상 사람들이 "태백오현"이라 일컬으며 존경하였다. 이 5인은 10-20리 떨어진 곳에 각각 거처하였고 춘양의 와선대(臥仙臺)에 모여 은색(銀色) 폭포를 완상(玩賞)하며 음풍영월(吟風詠月) 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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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민공(貞敏公)의 선대(先代)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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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오당의 정민공(흡 恰)은 박사공파 1세조 계용(啓庸)으로부터 댓수를 계산(計算)하면 13대손이다. 목은 이색이 "진주강씨는 대대로 벼슬이 이어져 왔는데 정승 상가에 슬픔의 깃발이 영롱하다"는 취지의 만사를 지어 문경공(文敬公) 군보(君寶)를 애도하였다. 대제학 양촌 권근도 묘비명에서 문경공과 그 아드님 공목공(恭穆公)에 대하여 "현저할손 문경공 적선하신 경사요,상공(相公) 자리 면면하여 문벌이 번성했네 위대할손 공목공 위의도 당당하시도다."라고 칭송했 다. 문경공(文敬公)은 정민공(貞敏公)의 9대조이고 공목공은 8대조이며 공목공 둘째 아드님 보문각 대제학 통계공(淮仲)은 7대조이다. 통계공 둘째 아드님 안복(安福)이 이(利)자 항렬 9형제를 두었다. 그 9형제 중 제6자 증판서(이행 利行)공의 맏아들(징)이 중화에까지 명성을 날린 명필(名筆)ㆍ문장가로 예조참판을 지냈다. 정민공은 예조참판 심제공(心齋公)심재공(心齋公,징 징)의 현손(玄孫)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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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先祖) 3대 청환 혁혁(淸宦 赫赫) - 조부,증조,고조 3대 문과 급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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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민공 조부(덕서 德瑞),증조(억 億),고조(징 ), 삼대(三代)가 문과급제를 하였다. 3대가 연이은 문과급제는 고금(古今)에 흔한 일이 아니다. 정민공 조부는 인조(仁祖) 19年(1586)에 태어나 봉사(奉事)로서 등과하여 한산ㆍ덕원 등지의 고을원을 지냈으며 홍문관 응교로 재직하면서 문장과 행의로 사우들의 추증을 받았다. 정민공 증조부는 연산(燕山) 4년(1498)에 태어나 1544년 왕자 사부로 별시(別試) 문과에 급제하여 관서어사로 다녀와 사옹원정 겸 지제교를 지냈다. 정민공 고조부는 세조(世祖) 11년 (1466)에 태어나 성종25년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강원도관찰사ㆍ경주부윤을 거쳐 예조참판에 이르렀다. 정민공 조부ㆍ증조ㆍ고조 선조 3대 문과급제라는 영예와 3대 청요직을 제수받은 기록은 결코 아무나 흉내낼 수 없는 문중의 큰 자랑이다. 3대가 조정에 출사하여 청렴한 관리로 명성을 얻고 문장과 행의로 사우(士友)들의 추중을 받은 할아버지의 가르침이 있었기에 정민공과 같은 훌륭한 후손이 나왔으며 영남 유림을 울린 법전문중이 탄생한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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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문(名門)의 조모 문화유씨(祖母 文化柳氏) - 정민공 증조(曾祖) 억(億) 배위(配位) - |
문화유씨 가계도 |
통계공 가문 9리파(九利派)는 진주강문 130만 후손 중 가장 많은 후손을 거느리는 최대 문중이다. 이 집안은 빛나는 인물을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이 배출한 진주강의 최고 명문의 하나이다. 그러나 통계공 이후 대한민국 건국 이전까지 정승ㆍ판서 하나를 낸 적이 거의 없는 게 특색이고 반면에 이 집안에 들어오신 할머니들은 정승ㆍ판서댁 출신이 수두룩한 것이 또하나의 다른 특색이다. 통계공 어머니 공목공 배위(恭穆公 配位)가 정승 하즙(河楫)의 따님이며, 통계공 아드님 안복(安福)의 배위 인천이씨(仁川李氏) 할머니가 육판서댁(六判書宅) 따님이다. 통계공 손자(이행 利行)는 배위(양천허씨 陽川許氏)가 우의정 허종, 좌의정 허침과 남매지간이다. 정민공의 증조모(왕자사부 억 億 배위) 역시 문화유씨(文化柳氏)로 역시 명문거족(名門巨族)의 따님으로 영의정 유순(柳洵)의 손녀이다. 정승ㆍ판서 하나 거의 못낸 이 집안에 정승ㆍ판서댁 따님들이 줄을 이어 들어온 까닭이 무엇이겠는가? 정승ㆍ판서 위에 절의(節義)와 도학(道學)ㆍ문장(文章)이 있기 때문이다. 두문동 절신(節臣) 못지 않은 통계공의 정충대절(精忠大節)이 빛나기 때문이며 그 후손들이 통계공의 유지를 받들어 벼슬보다는 도학ㆍ문장에 힘을 쏟아 그 인물의 기국(器局)이 정승ㆍ판서 위에 있었기 때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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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의ㆍ학덕(節義ㆍ學德) 높은 현사(賢士)로 추앙(推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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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민공 흡 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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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2년 함경도 덕원부 관사에서 출생하였다. 자는 정오(正吾)이고 호는 잠은(潛隱),또는 이오당(二吾堂)이다. 도연명이 벼슬을 버리고 귀거래사를 읊으며 전원(田園)에서 기품(氣品)있는 생활을 한 야인(野人)의 정신을 기리는 취지로 호를 잠은이라 하였다. 글공부는 인조조 영의정 상촌 신흠(申欽)에게 하다가 사계 김장생(金長生) 문하에서 더욱 정진하였다. 1630년 사마시에 합격하고 성균관 유생으로 1635년 율곡 이이와 우계 성혼을 문묘에 배향할 것을 소청하였다. 병자호란을 맞이하여 양친을 모시고 춘양현 법전 성잠이라는 곳에 터를 잡았다. 1637년 제능참봉,1657년 세자익위사 세마,1659년 부수로 승진하였다. 남구만이 암행어사로 영남을 순시 중 공의 효행을 높이 평가하여 조정에 천거,1661년 성현찰방이 되었다. 우역이 심하여 농우가 모두 죽어가자 녹봉을 털어 농우를 구입 작농(作農)에 크게 도움을 주었다. 관찰사 이상진(李尙眞)이 공의 선정을 조정에 보고,1664년 산음현감으로 영전하였다. 산음 고을을 떠나올 때 그곳 백성들 수천명이 길거리에 나와 부모를 여읜 듯 슬퍼했다. 병자호란(丙子胡亂)이 일어나자 어버이를 모시고 한양을 떠나 태백산하(太白山下) 법전촌에 은거(隱居)하며 수의자정(守義自靖)하였다. 학덕이 높아 태백5현의 1인으로 추앙되었다. 이조판서에 추증되고 정민(貞敏)이라는 시호가 내렸다. 사덕사에 배향되었다. 정민공의 가장(家狀)은 종자(從子) 성건재(찬)와 증손(원일 元一)이 각각 한 부씩 썼다. 가전(家傳)은 종손(從孫 재항 再恒)이,묘지명(墓誌銘)은 현손(玄孫 한 瀚)이 각각 썼다. 묘갈명(墓碣銘)은 이조판서 문정공 (文正公) 도암 (陶菴) 이재 (李縡)가 짓고 응교 김상묵(金尙默)이쓰고 전(篆)은 현감 심원지(沈元之)의 필(筆)이다. 시장(諡狀)은 영의정ㆍ대제학 김병국(金炳國)이 지었으며 묘비개수(墓碑改竪)에 내무대신 윤용구(尹用求)가 전면(前面)에 글을 쓰고 제릉참봉(齊陵參奉) 당시 종손(宗孫 희원 禧元)이 음기(陰記)를 하였다. 사적이 존주록 배신열전(尊周錄 陪臣列傳)에 올랐다. 우암 송시열 후손으로 경학이 뛰어나 천거로 벼슬길에 나가 형조판서에 오른 당대의 거유(巨儒) 강재(剛齋) 송치규(宋穉圭)가 준덕사 봉안문(竣德祠 奉安文)에서 공(公)의 탁절지행(卓節至行)을 높이 평가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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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민공 배위 청송심씨(靑松沈氏)도 명가(名家)의 할머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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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민공 배위 청송심씨 친정 가계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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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민공 배위(청송심씨)의 친정은 세종의 부마 순의청성위(심안의 沈安義)의 형 절도사 심안인(沈安仁) 집이다. 정민공 배위 청송심씨는 심안인의 후손으로 효종 때 영의정을 지낸 심지원(沈之源)과 남매지간이다. 심지원은 효종3년(1652년)에 형조판서를 지내고 그후 이조판서 우의정 등을 거쳐 영의정에 이르렀다. 아들 익현(益顯)이 효종의 딸 숙명공주와 결혼하여 왕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다. 정민공의 처남이 영의정이고 처조카가 효종의 사위이다. 정민공은 정승ㆍ판서댁 선대(先代) 할머니들 보란 듯이 상공(相公) 집안으로 장가들었다. 이로써 통계공집 둘째 집안 9리파(九利派) 할아버지는 "재상집 규수"들의 배우자 인기 순위 1위라고 하여도 지나친 말은 아닐 듯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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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선정(臥仙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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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봉화군 춘양면 학산리(慶北 奉化郡 春陽面 鶴山里) 골띠 마을에 있다. 이 정자를 잠은 강흡(潛隱 姜恰),포옹 정양(抱翁 鄭瀁),각금당 심장세(覺今堂 深長世),두곡 홍우정(杜谷 洪宇定),손우당 홍석(遜愚堂 洪錫) 제현(諸賢)의 회동,교우지처에 건립하였다. 그곳에 바위를 입덕(竢德)이라고 불렀으며 이곳에 흘러내리는 폭포를 은폭(銀瀑)이라 하고 그것을 내려다보는 대(臺)를 와선(臥仙)이라 하였다. 병자호란 뒤 모두 벼슬을 버리고 대명절의(大明節義)를 지키며 이 와선대에 백의(白衣)를 걸치고 백발을 휘날리며 음영(吟詠)하였다. 제공(諸公)들은 향산지구로(香山之九老)와 낙중지기영(洛中之耆英)을 방불케 하는 탈속(脫俗)의 삶을 보였다. 제공은 그 아름다운 절개와 두터운 명망으로 인해 당시 사람들에게 신선(神仙)같이 보였으며 사림(士林)의 사표(師表)가 되어 태백오현이라 칭송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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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백오현 제위(太白五賢 諸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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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포옹(抱翁) 문절공 정양(文節公 鄭瀁)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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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0년에 태어나 1668년에 몰했다. 자는 안숙(晏叔),호는 포옹(抱翁)ㆍ김장생 문인이다. 1618년 사마시에 합격하고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 강화도로 피난했다. 1661년 장령을 거쳐 시강원 진선에 이르렀다. 증이조판서. 시호는 문절(文節). 학덕으로 태백오현(太白五賢)의 칭을 듣고 사덕사에 배향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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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각금당 정민공 심장제(覺今堂. 貞敏公 深長世)-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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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금당 심장세는 명종의 장인 심강(沈鋼)의 증손이며 서인의 영수 심의겸의 손자이다. 1594년에 태어나 1660년에 몰했다. 자는 덕조(德祖). 호는 각금당(覺今堂). 1624년 이괄의 난 때 포의로 임금을 호종하여 금부도사가 되었으며, 1637년 정묘호란 때 왕을 호종하여 부사가 되었다.
학문과 덕행으로 절의를 지켜 태백오현의 1인으로 불리워졌다. 증이조판서. 시호 정민(貞敏). 사덕사에 배향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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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곡 개절공 홍우정(杜谷 介節公 洪宇定)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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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곡 홍우정은 형조판서 홍가신(洪可臣)의 손자이며 이조판서 홍우원(洪宇遠 )과 청백리 홍우량(洪宇亮 )의 형이다. 1595년에 태어나 1656년에 몰했다. 자는 정이(靜而 ),호는 두곡(杜谷 )이다. 1616년 진사시에 합격하고 경학이 뛰어나 대신의 천거로 왕자사부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했다. 그뒤 직장ㆍ공조좌랑 등의 벼슬이 내렸으나 나가지 않았다. 숭정처사로 세인들의 존경을 받아 태백오현의 1人 으로 불리워졌다. 증이조판서. 시호 개절공(介節公) 문원서원에 배향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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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손우당 정민공 홍석(遜愚堂 貞敏公 洪錫)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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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우당 홍석은 증조ㆍ고조 양대 영의정에 증조부가 대제학을 지낸 명문(名門) 출신이다. 1604년에 태어나 1680년에 몰했다. 자는 군서(君敍),호는 손우당(遜愚堂)이다. 김집과 김상헌에게 글을 배웠다. 김수항ㆍ송시열의 천거로 참봉이 되고 주부와 용담현령을 거쳐 세자익위사어에 이르렀다. 사림의 중망이 컸으며 절의를 지켜 태백오현의 일인으로 일컬어진다. 증이조판서,시호 정민(貞敏). 사덕사에 제향되었다. 문집과 예기유회,일성록ㆍ이기록ㆍ예총요설 등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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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백오현 후예(後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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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백오현을 이야기 할 때는 정민공 형제를 함께 이야기 하였다. 정민공(貞敏公)과 도은공(陶隱公 각 恪)은 형제가 기거(起居)를 똑같이 하여 남들에게 형제가 일체(一體)로 보였다. 그래서 법전문중의 후손은 정민공만을 이야기 하지 않고 형제 후손을 하나로 이야기 했다. 법전문중 후손 활약상은 "만산고택(晩山古宅) 어제와 오늘"에서 자세히 소개된 바와 같이 눈부시었다. 형제가 낙향한 병자호란 이후 한말까지의 기간으로 영남에서 문과급제 배출 제1위 가문으로 명성을 날렸고 오늘날에도 대법관ㆍ고법원장 등 법조인이 쏟아졌으며 국회의원ㆍ치안본부장ㆍ포항종합제철 회장 등 굵직한 인물들이 줄을 이어 배출되었다. 박사ㆍ교수ㆍ대기업 임원등 각계 각층에 활약하는 인물의 수를 쉽게 헤아리지 못할 정도이다. 두곡 홍우정(社谷 洪宇定) 후손은 문과는 한두명에 그쳤으나 글 잘하는 선비가(社谷 洪宇定) 많이 배출되었다. 문집이나 유고가 있는 이가 열댓명 가량 있었다. 현대인물로는 10. 11대 국회의원에 장관을 지낸 홍사덕을 비롯하여 음대학장 홍춘선, 사시(司試) 홍승기,외무고시 홍승목,박사ㆍ교수 홍사만,부교수 홍남선,전문의 홍혜준,의학박사 홍우선,국세청 징세조사국장 홍성범이 있다.
손우당 홍석(遜愚堂 洪錫) 후손은 역시 글 잘하는 선비들이 많이 있었으나 과환은 미미하다. 현대인물로 판사ㆍ국회의원 홍승만,신문사 논설위원 홍철화,금성방직 사장 홍재선,한국페인트 사장 홍승달이 있다. 포옹 정양(抱翁 鄭瀁) 후손은 문과급제하여 좌참찬을 지내고 충헌이라는 시호를 받은 정익하,문과하여 이조참판을 지낸 정해관,건국공로 포상자 정운경이 있으며 현대인물로 농협 충북 지부장 정운승이 있다. 각금당 심장세(覺今堂 沈長世) 후손은 문과급제 1인으로 그쳤다. 이를 볼때 정민공 잠은(姜恰)의 법전문중은 옛날에도 영남 유림에 큰 족적을 남겼고 오늘날에도 인물이 쏟아져 고금(古今)에 보기드문 집안으로 널리 명성(名聲)이 났다.
'만산고택(晩産古宅)의 어제와 오늘'에 이어 나가는 새 연재물 '봉화정자 奉化亭子'는 정구(貞求) 종무처장이 기획 편집하고 정기 正基 종보 편집위원이 글을 지었으며 사진 자료등은 만산고택 주인(主人)인 백기 百基 현종이 제공하였다. 특히 새 연재물 봉화정자는 중앙종회 원로고문이신 면희(冕熙,전고려대 교수 및 영남대 학장) 박사의 감수 監修 를 받았다. |
진주강씨중앙종회 http://www.jinjukang.org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