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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강. 조직신학의 고속도로
04. 9. 20 강의 이근호 목사
서론 1-1
오늘 조직신학의 서론부분을 하겠습니다. 조직신학은 누가 만들었는가 하면 사람이 만든 것입니다. 성경 어느 부분에서 예수님이 조직신학을 만들라고 지시하신 적도 없고, 조직신학 만들어야 구원된다고 말한 적도 없습니다.
이것은 무엇이냐? 하나님께서 인간을 찾아오시기도 전에 인간들은 자기들이 먼저 조직신학을 만들어 놓았습니다. 만들어 놓고서 그 만들어 놓은 틀에서 인간이 납득이 되도록 구원을 해 내라고 억지를 부리는 식으로 조직신학을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것은 우리 인간들이 납득이 되고 이해할만한 조직신학을 하나님이 제공해야 하나님답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우리 하나님이 알겠어요? 모르겠어요? 그것을 알고 있습니다. 알고 있으니 그것을 나무라겠습니까? 호응을 하겠습니까?
이런 점이 어려운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상대로 하지 않습니다. 이런 말이 어려운 것입니다. 어려우면서도 이것을 제대로 알면 이것보다 기쁜 소식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갚지 않는다는 이것이 기분 좋은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은 나의 배후에 있는 악마와 상대합니다. 이것이 거룩한 전쟁입니다.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내가 죄를 지으면 하나님이 갚을 것으로 여기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죄를 지으면 놔둬버립니다. 왜 놔둬버리는가 하면 사실 하나님이 노리는 악마를 들추어내는 재료로 사용하기 때문입니다. 투캅스라는 영화를 보면 조폭을 일망타진하기 위하여 쫄따구 까부는 것을 경찰이 놔둬버리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송사리를 잡으면 안 되고 그 배후에 있는 건더기를 잡아야 할 것이 아닙니까!
인간들이 조직신학을 만들어가지고 신이시여! 우리가 납득할 만한 그런 신이 되소서! 우리가 율법을 지키겠나이다. 이렇게 하면 그대로 내버려두는 것입니다. 더 지키지 왜? 더 철저하게 해보라! 365가지 그것 가지고 되겠어? 더 해봐! 왜 그렇게 하십니까? 그것은 송사리이기 때문입니다. 배후의 정체가 드러나야 하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의 특징이 무엇이냐 하면 총 정리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시험치기 전에 총 정리하는 것처럼 총 정리하는 것이 요한계시록입니다. 요한계시록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하면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는 사물로 표현한다는 것이 특징입니다. 보이지 않는 것들을 보이는 식으로 표현을 하니 마치 그것을 실제로 그런 사건이 터져야 하는 것처럼 착각하는 것입니다. 해석하는 사람들이,,,,
처음부터 어려운 이야기를 합니다만 묵시와 역사를 혼동하는 것입니다. 묵시라고 하는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쉬운 말로 하겠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능력입니다. 역사란 눈에 보이는 사건의 뭉치입니다. 사건덩어리입니다.
다시 하겠습니다. 요한 계시록은 총 정리하는 책이다. 무엇을 정리하는 책인가? 이 세상의 눈에 보이는 역사와 그 역사를 조종하였던 그 배후가 무엇이라고 하였습니까? 묵시이지요! 묵시라는 말을 잘 안 쓰지만 신학에서는 자주 씁니다. 묵시가 역사를 조정해 왔습니다. 그런데 묵시적인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능력입니다. 그러면 역사는 능력입니까? 아닙니까? 능력이 아닙니다. 능력이 아니라 묵시에 의하여 조종 받는 것입니다.
그러면 역사는 무엇입니까? 묵시의 능력이 만들어내는 일련의 사건들의 집합 뭉치! 이해되십니까? 그런데 왜 사람들은 요한계시록을 해석을 못하는가 하면 눈에 보이는 사건이 마치 구원의 능력인양 착각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사건이 마치 구원의 능력인양 곡해를 합니다.
요한계시록은 눈에 보이지 않는 능력에 의하여 사건이 되는데 마치 사람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은 보이지 않으니까 그것은 없는 것으로 간주하고 눈에 보이는 사건이 구원의 능력인양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만약에 666표 받지 말라고 하니 그것을 안 받으면 마치 구원되는 양 여기는 것입니다. 마치 어떤 사건을 모방하면 그것이 구원되는 줄 아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2장에서 에베소 교회보고 첫 사랑을 회복하라고 합니다. 첫 사랑을 회복하면 구원되는 것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첫 사랑을 회복 못하는 것은 보이지 않는 묵시적인 능력 때문에 그런데 마치 에베소교회처럼 되고 라오디게아 교회처럼 되면 구원되는 양 착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목사들이 그렇게 설교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교회가 되자고 설교를 합니다. 모방이지요! 모방!
제가 조직신학의 고속도로에서 서론 다음에 나오는 것이 계시론 입니다. 계시론 에서 제일먼저 한 이야기는 모방과 본질을 사람들이 혼동하고 있더라는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데서 주신 계시를 사람들은 그것을 모방해서 자기가 구원받는 계시인양 소유를 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기도해서 암이 나았다고 하면 자꾸 교회 와서 기도를 하려고 합니다. 왜? 그것을 모방하면 자신도 될 줄 아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사람이 암이 걸린 것은 역사입니다. 역사는 구원의 능력이 아니라 사건에 불과한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능력에 의하며 만들어진 사건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 사람이 병이 나았다고 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그 사건은 왜 터졌는가하고 물으신다면 저는 이렇게 성경적으로 답변을 하겠습니다. 거룩한 전쟁의 여파입니다. 지진이 일어나면 지진파가 퍼지듯이 거룩한 전쟁의 여파, 또는 연못 속에 돌멩이를 던지면 퐁당하고 물결파가 일어나듯이 연못 중앙에 돌을 던졌는데도 연못가에 있는 사람이 영향을 받는 것입니다. 이런 것이 여파입니다.
마태복음 25장에 보시면 내가 어려웠을 때에 돌보아 주었고 내가 옥에 갇혔을 때에 돌아보았다는 말씀을 누구에게 합니까? 마지막 심판 때에 염소 쪽이 아니라 양에 해당되는 쪽에 말씀하십니다. 그 대목의 마지막에 하시는 말씀이 이 소자에게 한 것이 곧 나에게 한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은 가난한 사람 도와주라는 말이 아니고 예수님과 마귀와의 거룩한 전쟁의 여파가 인천에 사는 가만히 있는 나에게 밀려오는 것입니다.
그럴 때에 저 사람에게 일어나는 사건의 뭉치는 그리스도에게 속하였다는 이유 때문에 옥에 갇히고 목마르고 고난 받는 것임을 파악하게 되면 바로 그 여파에 따라서, 결국은 여파를 일으킨 주인공과의 연관성에 의하여 이 사람은 양에 속한 사람이 됩니다. 그러니 옥에 갇힌다고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나 옥에 갇히겠습니다. 이것은 구원 못 받습니다. 갇힐 때는 갇히겠지요! 무엇 때문에 거룩한 전쟁 때문에!
사도바울이 주기도문을 못 외웁니까? 잘 알고 잘 외워서 일용할 양식을 주옵소서! 하는 내용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도바울은 어떻게 했습니까? 배고프고 굶었습니다. 일용할 양식을 달라고 기도할 줄 아는 분이지만 실제로는 40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이나 맞고 하는 고난을 받았습니다. 그것이 어디에서 나온 여파입니까? 자신이 기도 안 해서 나온 여파입니까?
교인들이 제일 답답한 것은 세상에서 무언가 일이 잘못되면 기도가 부족하고 성경공부를 안하고 예배에 참석을 안 해서 되었다는 식으로 자기 쪽에서 원인을 찾는데 이것이 문제입니다. 하나님께서 벌 받기 싫어서 먼저 자기에게 매를 때리는 것입니다. 자기 행동에 따라 자기 운명이 결정된다는 것입니다. 말도 안 되는 이야기입니다. 세상에 있는 종교가 다 그런 것입니다. 네가 행동을 잘하게 되면 그 잘한 행동에 따라 구원이 보장된다고 합니다.
복음은 그것이 아닙니다. 복음의 뿌리는 인간의 행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언약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언약에 해당되는 사람은 언약에 의하여 그 사람의 행동이 조종되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여러분 마음 편한 이야기입니까? 기분 나쁜 이야기입니까? 이것이 여러분에게 아주 마음 편한 이야기로 들려야 합니다.
내 잘잘못에 의하여 앞으로의 내 운명이 달라지지 않습니다. 내가 태어나면서 지금까지 무슨 짓을 할지라도 언약에 의하여 구원될 자라면 구원이 되고야 마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어질 때에 이것을 믿음이라고 합니다. 구원의 뿌리는 언약에 있지 우리의 행위나 우리의 존재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 점을 모르고 믿음이 없으니까 무엇으로 바꿉니까? 그 행위의 주체를 언약에 두지 않고 자기에게 돌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가 하기 나름이라고 여기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자기가 믿습니다! 허하면 믿습니다! 하는 것을 통해서 믿음으로 구원되는 줄 알고 있습니다.
애들 선교단체에서 큐티하면서 많이 하는 것이 있지요! 로마서 10장의 말씀, 내가 마음으로 믿어 입으로 주를 시인하면 구원을 얻으리라는 말씀! 그것을 그대로 해 보는 것입니다. 심지어는 하도 자기 동생이 안 믿으니까! 동생을 보고 칼을 쥐고서 흉내라도 내게 해서 형의 의무와 책임인 전도를 하려고 억지를 부리는 사람도 있습니다.
다시 이야기 합니다. 성경에 나오는 모든 말씀은 그 모든 말씀의 주체자가 우리가 아닙니다. 우리가 빠져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집어넣으면 안 됩니다. 집어넣으면 유대교가 됩니다. 집어넣으면 유대교가 되고 빠져버리면 복음이 됩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왜 그것을 뺄 줄 모르는가 하면 묵시를 모르고 역사만 알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역사의 주인이 누구입니까? 본인이 아닙니까! 밥 지을 때에 가만히 있으면 밥이 지어집니까? 가만히 있으면 공부하게 해 줍니까? 피아노 내가 가만히 있는데 치집니까? 내가 손가락으로 뚱땅거려야 되지 않습니까? 그죠! 그러니 사람들은 이런 경험과 체험을 모아 모아서 그것으로 무엇을 만드는가 하면 자신의 가치관 우주관 종교관들이 다 거기서 펼쳐지는 것입니다.
내가 아니면 나를 움직일 사람이 없다는 것이 이것이 너무나 진리이고 더 이상 말할 것 없이 확정된 진리라고 간주하는 것입니다. 교인들이 교회 와서 요구하는 것이 무엇을 시켜만 달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목사들이 인간이 할 수 있는 것들만 골라서 주지요! 못할 것은 안 줍니다. 할 수 있는 것만 설교를 하게 되면 그것만 하면 구원을 받습니까? 하는 식으로 나오는 것입니다.
역사를 모방하면 구원됩니까? 안 됩니다. 뿌리가 묵시적인 인물 눈에 보이지 않는 메시아 거기에 두어야 하는데 자꾸 자기 행위에 뿌리를 두니 그것은 믿음이 아니라 행함입니다. 심지어 예수 믿는 것도 행함입니다. 예수를 내가 믿으니 자기 행함이 들어가잖아요!
교회의 문제도 그렇잖아요! 누가 무슨 말을 했다! 그러나 누가 무슨 말을 한 것이 아니고 무언가 배후에 여파가 있는 것입니다. 묵시적으로 파악해야 하는 것입니다. 사람의 감정이란 자기도 어쩔 수 없는 것입니다. 인간 속에 죄가 있는데 그 죄라는 것이 잘 안 들킵니다. 언제 들키는가 하면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이 올 때는 그 말씀에 의하여 발단이 되어 그것이 자기 의라는 모습으로 바깥에 토하여 내게 되어있습니다.
예를 들어 도적질 하지 말라고 하면, 평소에 도적질 하고 싶은 마음으로 가득 차 있는데 그것이 단번에 무엇으로 나옵니까? 나 지금까지 도적질 하지 않았습니다. 하는 자기 의가 죄의 모습으로 튀어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인간들이 속으로 하나님의 영광 거룩 이야기 하지만 무엇을 하라는 말씀이 주어지면 그것을 순종했습니다. 또는 바빠서 순종 못했습니다. 하는 식으로 행위 주체자를 자기로 귀환해 버리는 것입니다.
실컷 예수 믿는다고 해 놓고서는 좋은 결과와 나쁜 결과의 책임자를 좋으면 좋은 대로 자기에게 돌리고 나쁘면 변명으로 돌리는 식으로 자기의본 색을 드러내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어떤 인간도 말씀 앞에서는 자기 의를 포기할 인간이 없습니다. 그러니 모든 인간이 죄인이라는 그런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여파를 보내서 구원한다는 이 말은 우리로 하여금 사람 만들어서 구원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이것이 역사적인 능력 같으면 사람 만들어서 구원합니다. 사람의 인품을 변화시켜서 구원합니다. 그러나 묵시적인 능력으로 구원하시면 인간 만들어서 구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썩어빠진 인간 그 자체로 구원하시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강도를 그 자리에서 안 죽이고 그저 기적적으로 십자가에서 내려가서 사회봉사 120일하고 또 전도 몇 명 하게 해서 낙원에 가게하시는 것이 아니라 썩어빠진 그 자체를 낙원에 보낸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처음부터 우리의 행위가 배제되어 있기에 그렇습니다.
사람들이 묵시적 능력과 역사적 능력을 혼동해서 그렇습니다. 묵시적 능력은 쉽게 말해서 하나님이 자기 약속에 의하여 나온 것이기에 약속의 뿌리가 언약이니 그 언약이라는 뿌리에 근거해서 우리는 구원하는 능력이지 우리가 잘하느냐 못하느냐 지키느냐 못 지키느냐 그것보고 구원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행동이 어떻게 가더라도 우리를 구원하시는 능력을 막을 수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못 막지요! 그것이 어메이징 그레이스입니다. 놀라우신 주의 은총입니다. 찬송가 405장입니다. 저항할 수 없는, 소극적 의미가 아닙니다. 적극적인 의미입니다. 저항 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 연못가의 아이가 파도치는 것을 보고 파도야 내가 너를 반기지 않으면 나에게 못 와! 이렇게 우기지를 못합니다. 파도치면 치는 데로 발목을 적시게 되어 있습니다.
제가 이것을 조직신학의 책에서는 무엇이라고 하였습니까? 폭설이라고 하였습니다. 오는 폭설을 누가 막습니까? 내 머리 어깨에 온 몸에 뒤덮이는 하늘의 폭설을 무슨 수로 막습니까? 폭설아 그만 와라고 할 수가 있습니까? 지금 비가 오는데 이 비가 우리에게 유익이냐! 무익이냐를 따져서 옵니까? 비는 그냥 옵니다.
은혜는 여파에 의하여 오는 것이지 우리가 오라고 요청하여 오는 것이 아닙니다. 로마서 9장에 보면 우리가 달음박질 한다고 해서 은혜가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부르짖는다고 은혜가 주어지는 것이 아니고 긍휼을 입은 자는 하나님의 속성의 여파에 의하여 속성이란 지진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속성이라는 지진에 의하여 그 여파가 미친 사람은 구원받고 그렇지 못한 사람 하나님의 진노이지요! 진노의 여파가 미친 사람은 지옥 가는 것입니다.
너무 간단합니다. 달음박질 한다고 부르짖는다고 구원받지 못합니다. 제가 이런 소리하니 그러면 미쳤다고 기도하느냐고 합니다. 그러면 저는 묻습니다. 기도해서 무슨 효과 볼 줄 알았습니까? 기도하고 안하고는 당신 마음대로 결정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어제설교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에덴동산 누가 만들었습니까? 하나님이 만드셨지요! 우리가 만들었다면 에덴동산에 선악과를 심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죠! 이것은 무엇입니까? 우리가 에덴동산을 만들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인간은 처음부터 누림을 받는 존재이지 자기가 스스로 살림을 꾸려가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 인간은 처음부터 하나님께서 생각하지도 않고 만들지도 않았습니다.
에덴동산에 선악과 심은 것은 네가 아니라 나라는 것입니다. 그것도 한쪽 구석이 아니라 동산 중앙에 잘 보이는 곳에 심어놓고 너는 시키는 대로 누리기만 하면 되지 네가 건방떨면서 하나님의 지시를 어기는 그런 권한이 우리에게 있다? 없다? 없습니다. 있으면 악마입니다. 그러니 없는 권한을 만들어 준 놈이 누구입니까? 그것이 뱀 아닙니까! 악마입니다.
그래서 일이 터진 것입니다. 사람들은 이미 악마의 권한에 속하였기에, 기껏 한다는 것이 그래도 착한 일을 하고 그래도 믿잖아요! 하면서 자꾸만 자기의 행위를 기초로 해서 무언가 자기 의를 자꾸 끄집어내어 놓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누리는 것이 아니고, 아까 폭설 이야기 하였지요! 저항 할 수 없이 폭설을 그냥 받는 것입니다. 은혜가 폭설같이 오는 것입니다.
이런 폭설 이야기, 저항할 수 없이 주는 대로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이야기를 해도 사람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래도 그것을 은혜라고 아는 내가 얼마나 대견스럽습니까? 그것을 은혜로 아는 내가 얼마나 대단한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지독합니까? 이 지독한 것을 누가 집어넣었습니까? 마귀가 집어넣은 것입니다.
그러니 에덴동산에서 전세 값도 없이 사글세도 없이 그냥 내가 선악과 안 따먹는 조건으로 살면 안 되겠느냐고 하는 식의 자기 공로를 집어넣어서 에덴동산에서 살만한 가치가 있는 존재라는 것을 자꾸만 우리고 싶은 것입니다. 이것이 돌림병입니다. 전염병입니다. 장금이가 필요합니다. 전염병을 치료할 의사가 필요합니다. 애들이 태어날 때부터 이 병이 들린 것입니다. 태어나서 죽을 때 까지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전염병에서 벗어나지를 않습니다. 모든 것이 내가 하기 나름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철저하게 이것은 교회와도 마찬가지이고 집에 가도 마찬가지이고 목사에게 설교 들어도 그런 식으로 해석하고 전부 다 어느 누가 은혜를 은혜답게 아는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그래서 교회문제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교회 문제가 그것 때문에 일어나는 것입니다.
상대방이 욕을 하면 그것도 은혜인데 뭐! 이렇게 생각하지를 않는 것입니다. 상처 입었다고 합니다. 무슨 상처를 입어요! 죽은 시체를 보고 무엇이라고 한다고 해서 반응을 하면 그것이 죽은 시체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대어들 때에 이만큼은 되어야 한다는 기대치가 또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여파가 사람마다 다 다른데 그것을 일률적으로 정할 수가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생각하지 않고 자꾸 이상적인 역사뭉치, 예를 들어 심플 교회가 하나님 보시기에 이상적인 교회가 되어야 한다는 사건을 모방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는 이상적인 교회가 되어야 한다는 모방은 능력이 아니라 악마의 습관입니다. 이상적인교회가 안 되어도 구원되잖아요! 묵시적인 능력에 의하여!
이상적인 가정이 되고 싶다, 이상적인 가정이 되어서 무엇에 써 먹으려고, 예수 잘 믿어서 복 받았다는 말을 듣고 싶어서? 그것이 전부다 무엇입니까? 은혜가 아니고 나도 살만한 가치가 있다는 자기주장입니다. 자기 의라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다는 이유 때문에 묵시적인 존재를 무시하기 때문에 자꾸 눈에 보이는 것을 소유함으로 그것이 자기 의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 것으로 나는 구원받았다는 구원의 확신을 가지는 이런 사고방식은 마귀가 심어주어서 그렇게 된 것입니다. 이래가지고 안 됩니다. 묵시를 믿어야지! 역사적인 눈에 보이는 현상을 믿는다면 그것은 변하기 마련입니다.
내가 저 사람을 사랑한다고 할 때에 그 사랑하는 것이 몇 년을 갑니까? 나는 내 아내를 사랑한다! 몇 년 갑니까? 사람은 변하기 마련인데! 심지어 아침 다르고 저녁 다른 것이 사람인데 도대체 사람의 어느 때를 믿을 수가 있습니까? 20살 때 다르고 2살 때에 다른데 도대체 그 사람의 어느 때를 그 사람의 본질로 잡을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역사라는 것은 변하기 마련이고 흐르기 마련인데 어떻게 그것을 잡아 놓고 구원을 얻었다 아니다 라고 확정 지을 수가 있는 것입니까? 변하지 않는 것은 묵시적인 언약입니다. 하나님의 약속, 하나님의 자기 맹세, 맹세라는 것은 자기에게 한 것입니다. 자기에게 한 것이기에 이것은 변함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원이라는 것은 우리 숙제가 아니고 예수님의 숙제입니다. 그러니 그 숙제를 우리가 하려고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이 자기 숙제를 하다 보니 그 결과물로 우리가 구원된 것입니다. 나 자신을 예수님의 소유로 간주해야지! 내가 열심히 해서 내가 구원되었다고 하는 것은 이것은 여전히 자기를 자신의 소유물로 간주하는 구원의 주인공이 되었기에 이것은 믿는 것이 아니라 자기 행함을 과시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역사 묵시 이야기할 때에 이야기 할 것이 무지무지 하게 많은데 요한계시록에 대하여 좀더 이야기해야 합니다. 이것으로 모자랍니다. 자 지금까지 한 것 다시 한번 정리하겠습니다. 요한계시록은 무슨 책이냐? 모든 것을 총 정리 하는 책이다. 어떻게 정리하는가? 요한 계시록은 두 가지가 섞여있다. 무엇과 무엇인가? 묵시적 이야기와 역사적 이야기가 섞여있다.
왜 이렇게 섞여 있어야 정리가 되는가? 사람들은 역사에 속았다. 요한 계시록에 와보니 역사라는 것은 하나의 흔적이고 하나의 사건의 뭉치이다. 있다가도 없고 없다가도 있는 것이지 그 사건 하나 붙든다고 구원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구원은 어디에서 결정이 되는가? 요한계시록은 묵시에서 결정된다는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것에서 여파가 만들어지는 것이라고 그래서 구원자는 보이지 않는 모습으로 존재한다고 하였습니다. 여기까지 이야기 하였습니다.
그러면 악마는? 악마도 보이지 않는 존재입니다. 그러니 양쪽 다 보이지 않는 존재를 보이는 역사의 형식을 빌어서 설명한 것이 요한계시록입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의 한 낱말 한 낱말을 해석할 때에 반드시 역사를 통하여 묵시에 도착하여야 딩동댕 정답이 됩니다. 묵시적 존재에 대하여 이야기함으로 아예 인간의 행함을 집어넣을 여지를 만들면 안 됩니다.
야! 마지막 때에 이렇게 환란이 많구나! 견디자! 이렇게 하면 곤란합니다. 믿으면 되지 견디기는 무엇을 견딥니까? 그러면 못 견디면 지옥 간다는 말입니까? 예수 믿으라는 이 말입니다. 그런 말이지 견디면 구원받는다는 말이 아닙니다. 이기는 자는 구원을 얻는다고 하는데 이겨야할 그 대상이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이야기 하고자 하는 것은 그렇다면 어떻게 묵시적인 이 분이 눈에 보이지 않는 행함의 능력으로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가 하는 이 문제를 이야기 하고자 합니다. 이것이 어려운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쉬운 이야기를 해 봅시다.
예수님께서 다 이루었다고 하시는 지점이 어디입니까? 산상설교하고서 다 이루었다고 하시고 하늘나라고 가셨습니까? 물위로 걸으시고 다 이루었다고 하시고 그만 손 털고 하늘나라로 가셨습니까? 예수님은 무슨 사건을 마무리 하셨을 때에 다 이루었다고 하셨습니까?
십자가입니다. 그러니 사람들이 예수님을 볼 때에 산상수훈에 멈추면 안 됩니다. 오병이어에 멈추면 안 됩니다. 문둥병자 고친 것에 멈추면 안 됩니다. 이런 것은 중간과정에 불과하기에 그곳에서 멈추어 버리면 정답을 제대로 모르고 정답이 포함되지 않은 채 다른 예수를 믿어버리게 됩니다. 그저 이용가치 있다는 생각으로,,,
어떤 사람은 교회에 헌금을 하는데 과부의 두 렙돈이 귀하다는 말씀을 보고 동전 두개를 던지는 것입니다. 과부의 두 렙본이 귀하다고 하였으니 동전 두개도 귀한 것이 아닙니까? 이러는 것입니다. 여기 그림을 그려보겠습니다. 예수님은 어디에서 다 이루었다? 십자가에 다 이루었습니다. 동전 두 렙돈의 이야기는 중간 지점에서 나옵니다.
이 사람은 십자가를 통해서 이것을 보아야 할 것을 십자가까지 가지 않고 중간에서 보게 됩니다. 그래서 교회 헌금하려니 돈은 아깝고 헌금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벌을 주어서 있는 돈까지 다 까먹게 되면 안 되기에 헌금은 해야 하겠고, 성도는 말씀대로 살아야 하는데 나도 말씀대로 한번 해보자.
우리 목사님이 철저하게 말씀에 근거해서 살라고 했으니 말씀에 근거해서 살아보자! 그래서 말씀을 보는데 어! 동전 두개 하여도 부자의 많은 것보다 더 하였다고 하니 이거다 하면서 동전 두개 하고 자기 정당화 시켜버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십자가를 만약에 거치고 과부의 동전 두개를 이야기 하였다면, 인간이 어떤 헌금을 하여도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잘한 짓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십자가 안에 무엇이 들어있기에? 또 중간 지점에 무엇이 들어있습니까? 어떤 사람의 자식이 간질병이 있는데 제자들이 고치지 못하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낫게 하였습니다.
그때 그 아이의 아버지가 말하기를 어떻게 귀신이 쫓겨나고 이렇게 낫게 되었습니까?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 기도와 금식 외에는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기도와 금식으로 내 아들 낫게 하겠다는 것에서 멈추는 것입니다. 그런데 십자가에서 한번 거쳐서 오게 되면 자기 아들의 간질병을 낫게 하여 달라는 것이 바로 죄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이것이 욕심이고 죄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사실 예수님의 공생애를 보게 되면 십자가에 가까지 가게 될수록 십자가 비슷한 것들이 많이 나옵니다. 처음에는 오병이어 하다가 다음에는 오병이어가 없습니다. 다음부터 양식문제 자기가 알아서 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로 점점가까이가면 덩달아 그동안 많이 추종하던 사람들도 중간에 다 떨어집니다. 결국 제자들마저 다 떨어지고 달랑 예수님 혼자 올라갑니다.
물위를 걸었고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였던 베드로조차 예수님이 잡히시던 밤에 무엇이라고 합니까? 나 저 사람 모르는 사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내가 목사님 보고 모르는 사람이라고 하면 기분 더럽겠지요! 그 더러운 기분을 예수님이 다 받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이야기 직전에 베드로가 무엇이라고 하였습니까? 자기 목숨 바쳐 예수님의 죽음에 합류하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때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마귀이야기 하셨습니다. 너 모르지? 뭔데요? 사실 마귀가 너를 지옥에 끌고 가기 위하여 너는 내 것이야 하는 식으로 밀 까부르듯이 골라내는 작업을 하고 있었는데 네가 그런 소리하고 네가 기도해서 지옥에 안 가는 것이 아니라 내가 너를 위하여 기도하였기에 네가 마귀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줄로 알라는 이 말입니다.
그것이 어찌 베드로에게만 해당되는 사항이겠습니까? 여기에 앉아있는 저와 여러분 모두에게 해당되는 사항인 것입니다. 우리가 다 거기에 해당되는 사람이면서 우리 중에 그 은혜를 아는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다 자기 잘나서 교회 나오고, 다 자기 잘나서 헌금하고, 다 자기 잘나서 목사 했지! 누가 그 은혜를 알았습니까!
거저 20살 때 전도 몇 명했고 30살 때 헌금 얼마 했고 목사 했고 이런 것들만 자랑했지 주의 언제를 언제 알았습니까? 내 사는 것은 내 하기 나름이다! 날마다 하는 것이 그것 아닙니까? 오늘도 교회 왔으니 복 주겠지! 지금 한국교회의 문제가 심각합니다. 교회가 있어도 절간입니다. 이것은 사기집단입니다.
사기가 아닌 것은 복음밖에 없습니다. 왜 복음이 사기가 아닌가 하면 복음의 뿌리는 하나님의 언약에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행함과 상관없이 언약대로 구원할 자를 구원하기에 사기가 아닌 것입니다. 그런데 교회가 왜 사기가 되는가 하면 사람을 다루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심방가야 되지요! 위로해야 되지요! 다른 교회 나가는 사람 우리교회 오라고 붙잡아야 됩니다. 전부다 사기입니다.
목사가 복음을 이야기하고 언약을 이야기하여야 될 텐데 그것은 하지 않고 거저 내 교회 유지되기 위하여 사기를 벌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교인들도 그런 위로와 사랑을 은근히 고대하면서 교회로 오고 있는 것입니다. 다른 교회에는 사랑 안 해주는데 이 교회에서는 사랑해줄 것인가 하면서 은근히 기대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흥정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런 교회를 세우신 적이 없습니다. 흥정해서 세운 교회가 없는데 한국에는 약 5만개 있습니다. 도대체 예수님을 안 믿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관심도 없고 예수님의 십자가에 대하여 알고 싶지도 않고 다만 알고 싶은 것은 내가 장래에 얼마나 잘될 것인가! 내년에는 경제가 풀릴 것인가! 자기 장래에만 관심이 있지 예수님에 대하여 관심이 없는 것입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역사에 대한 희망, 역사에 대한 소망만 관심이 있는 것입니다. 역사 자체가 이미 묵시에 의하여 불타버려야 하는 것입니다. 역사가 아무리 흘러가고 내년에 봉급이 오르더라도 이것은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내년되면 내년의 허무가 찾아오는 것입니다. 2006년 되면 2006년의 허무가 있고 2008년 되면 2008년의 허무가 있어요!
어떤 사람은 셋방살이 하다가 아파트 하나 마련하면 죽어도 소원이 없다고 합니다. 아파트 하나 사 줘보세요! 죽어도 소원이 없는가! 앉아서 벽지 색깔 때문에 허무를 느끼고 있을 것입니다. 인간은 자기 환상에 속습니다. 매일같이 환상을 만들고 그 환상에 낙심하며 잠자리에 들고 그 다음에는 또 되지도 않은 상상력을 동원하여 또 환상을 만들고 그것이 안 된다고 신에게 적개심을 가지고, 사실 적개심은 누구에게 가져야 합니까? 자기 자신에게 적개심을 가져야 합니다. 공산당이 싫어요! 가 아니라 내가 싫어요! 가 되어야 합니다.
십자가 이야기를 더 해봅시다. 십자가를 거쳐서 가게 되면, 마태복음 23장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당시에 바리새인들이 자기들을 아비라고 부르라고 하였습니다. 요즈음 천주교에서 신부를 아비라 그러지요! 바리새인들이 백성들에게 자기를 아비라 지도자라 부르라고 하였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이 세상에 아비가 누가 있으며 지도자가 누가 있느냐고 하셨습니다.
이 세상에서 지도자가 없다는 이야기를 목사들 앞에서 할 수 있는 목사가 몇 사람이나 되겠어요! 리더십 강좌나 열고 있는 그들에게 리더가 되어야 속이 풀리는 그들에게 이 세상에 지도자는 그리스도 밖에 없고 아비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밖에 없다는 이것은 이렇게 해야 구원받는다는 것이 아니고 너희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뜻입니다. 너희는 역사밖에 모르고 묵시는 영적인 내막은 전혀 모른다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이것을 알았다면 십자가를 떠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것을 모르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계속 십자가 이야기해서 제자들도 떨어뜨리는 것입니다. 결국 십자가는 다 이루었다는 것입니다. 결국 십자가를 통과해야 다 이룬 것입니다. 그러면 십자가에서 다 이룬 것이 무엇입니까?
십자가 뒤에 무엇이 나옵니까? 부활이 나옵니다. 부활은 묵시세계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역사적인 사건입니다. 그러니 역사에서 묵시로 점프할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나와 보라고 그러십시오! 나사로? 살아났다가 다시 역사적인 인물이 되었습니다. 백부장의 딸, 베드로의 장모, 죽었다가 살아나든지 병이 나았든지 간에 역사속의 인물입니다.
역사에서 묵시로 뛸 수 있는 사람은 예수님밖에 없습니다. 뛴다는 말은 역사 속에서 일어난 모든 일은 다 무가치하다는 것입니다. 다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다는 것입니다. 믿으려면 나를 믿고 부활하는 이 말입니다.
이번 올림픽에서 여자 장대높이뛰기 신기록을 세운 여자가 기록이 4미터입니까? 야~ 새처럼 날았어요! 붕 날았습니다. 그러나 뛰어보았자 내려오잖아요! 왜 뛰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니 사람이 부자가 되었을 때 네 영혼 오늘밤에 도로 찾아가면 그것은 역사적인 인물이 됩니다. 우리는 아무리 교회가고 장로 되고 목사 되어도 우리는 역사적인 인물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살려고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냥 죽어가고 있다는 것이나마 파악하라는 것입니다. 내가 목사가 되던 무엇이 되던 간에 죽는다는 사실만 파악하라는 것입니다. 다 안 것입니다. 내가 역사적 인물로 태어나서 결국 역사적인 무게, 죄의 무게의 의하여 죽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 된 것입니다.
제가 지난주에 한 설교 들어보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어디에 심방을 가면서 우연히 장로님 차를 가면서 보니 대구 어느 은행 지점 앞에 한 여성이 서 있는데 제가 보기에 한 30대로 보였습니다. 딱 중간쯤이죠! 그 여성이 만약 할머니라면 얼굴이 어떻게 될까요? 할머니가 되겠지요! 그러면 할머니가 되어 서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몇 년 더 지나서 해골이 되어 있다면 해골로 서 있을 것입니다. 그 여자가 30년전 에는 어린애로 기어 다녔을 것입니다.
이러한 과정을 2.5초 정도의 시간으로 필름을 빨리 돌려봅시다. 그러면 아이가 긴다. 아장아장 걷는다. 유치원이다 하는 것이 순식간에 지나가면서 결국은 해골된 것입니다. 그러면 그 여성이 무엇 때문에 거기에 서 있었습니까? 무슨 목적으로 살았습니까? 사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태어났다! 죽었다! 사는 이유가 뭐예요? 무엇 때문에 사는지 이유가 없잖아요!
이것을 보여주는 것이 십자가입니다. 그것을 다 보여주시는 것이 십자가에 다 이루었다는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요? 네 실상을 십자가에 다 보여주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해골정도가 아니라 아예 신으로부터 저주받아야 될 자가 누구입니까? 바로 우리입니다. 역사 속에 태어나서 역사와 함께 마땅히 죽어야 할 존재라는 것입니다.
역사 속에 태어나서 역사 속에서 어떤 직종에 있든지, 목사가 되든지 무엇이 되든지 간에 아무리 열심히 해 보았자 그것은 죽어야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로마서 5장에 보면, 아담이 죄를 범함으로 모든 사람이 죄 속에 가두어 졌습니다. 죄 속에 가두어 졌다는 사실을 무엇을 통해서 알 수가 있습니까?
로마서 3장을 보면 율법을 주신 것은 모든 사람이 심판아래 있다는 저주 아래 두기 위함이라고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신 것은 역사 속에 있는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저주 아래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것으로 다 이루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십자가입니다.
그리고 그 십자가에서 살아나실 수 있는 분은 예수님뿐입니다. 어떤 사람도 부활이 못 됩니다. 부활이 못 되는데 부활되는 수가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인간 쪽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부활하신 주님께서 주님의 자리에 앉으셔서 성령을 보내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성령을 받은 자는 성령께서 죽을 사람도 그 사람의 속에서 살리시는 것입니다.
로마서 8:11절입니다. 오직 성령에 의하여 사는 것입니다. 행함이 아닙니다. 성령을 누가 보내주느냐? 하는 여부에 따라 그 사람이 산 자냐 죽은 자냐하는 것이 결정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교회에서 목사가 도대체 무엇을 증거 해야 합니까? 열심히 사세요! 착하게 사세요! 그런 것이 왜 증거 되어야 합니까? 산상설교 보았지요! 남 비판하지 말라고 하였으니 비판하지 맙시다. 그것을 왜 증거 해야 합니까? 비판하지 말라는 것은 우리가 지금 비판하고 싶어서 환장하고 있다는 것을 들추어내는 것입니다. 간음하지 말라는 것은 우리는 틈만 나면 간음하고 싶어서 환장한 놈이라는 것을 고발하기 위함인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마음속으로 간음한 것도 이미 간음하였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어느 인간도 달성할 인간이 없습니다. 그것을 24시간 다 지킬 수 있는 인간이 없습니다. 사람들이 제일 크게 오해하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제가 보기에는 사람들은 성경이 죄를 억제하는 기능이 있다고 오해하는 것입니다. 완전히 정반대로 알고 있습니다.
이것은 성경을 공자나 맹자의 말씀으로 알고 있는 것입니다. 신학교 때 그렇게 배웠지요! 성경말씀을 주면 안 준 사람보다 괜찮은 인간이 되어 가지고,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가지고 성화되어 천당 간다는 이따위 소리를 하는 것입니다. 성경 말씀은 죄를 억제하는 것이 아니고 죄를 죄 되게 하기 위하여 성경의 말씀을 주신 것입니다.
오 주님이시여! 제가 교회오기 전까지는 이것은 죄이지만, 이것은 설마 어느 놈이 감히 죄라고 해! 이것은 너무나 착한 것이라고 여긴 것들이 성경 말씀을 딱 보니 이것도 죄고 이것도 죄 인 것을 알았습니다.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대구 지방의 서문시장에 있는 사람이 동대문 시장에 물건을 하러 간다고 합시다. 주에 제가 이렇게 돈을 벌어서 십일조도 하고 선교헌금도 하려고 하니 이것을 착한 일이지요! 그죠! 하면서 자기는 착한일이라고 생각하였는데 야고보서 4장에 보면 무엇이라고 하고 있습니까? 네가 어느 도시에 가서 장사하여 이익을 보려고 하는 자들아 바로 그것이 죄악이라는 것입니다.
너는 제 주제 파악도 하지 못하느냐? 너는 잠시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네가 무엇인데 장담할 것이 어디에 있느냐는 것입니다. 네가 무엇인데 내일 어디에 가서 장사하여 이익을 보리라고 하느냐는 것입니다. 네가 내일 일을 알기는 아느냐는 것입니다. 내일은 누구 소관입니까? 내일이 왜 인간의 소관이 아닌 줄 아십니까?
아까 이야기 하였는데 내일은 누구 소관입니까? 그것은 묵시세계에서 만들어 주어야 사건이 되는 것입니다. 내일 동대문 시장에서 장사가 되고 안 되고의 사건은 은혜로서 묵시적으로 주어야 되는 사건인데 그런데 건방지게 묵시도 모르면서 현재의 역사만 보고 있다는 것입니다. 현재의 역사가 내일의 역사를 이끌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네가 안개인 것을 아느냐는 것입니다. 안개가 무엇입니까? 안개란 있는 듯하지만 없어지는 것입니다. 잠시 흔적만 나타났다가 없어지는 것이 안개입니다. 이것이 안개의 역할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역할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속성을 보여주는 재료라고 하였습니다.
제가 오늘 첫 시간 하면서 제일먼저 한 이야기가 무엇입니까? 인간이 무엇이라고 하였습니까? 인간이란 묵시적인 거룩한 전쟁을 보여주는 하나의 재료에 불과하다고 하였습니다.
에덴동산은 무엇입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면서 살아야 함을 에덴동산과 함께 세트가 되어가지고 보여주는 재료인 것입니다. 그래서 선악과를 심어 놓으신 것입니다. 따 먹으면 죽음, 죽음을 이야기하기 위하여 인간을 만들어 놓았습니다. 왜 죽음을 이야기해야 합니까? 그것은 하나님과 싸우는 마귀를 들추어내기 위하여 우리를 들추어내는 미끼로 사용하시기 위함인 것입니다.
첫 시간을 쉬면서 제가 이야기 하고 싶은 것은, 인간의 행함으로서 자기 운명이 결정된다고 여기는 것은 너무나 지독하게 자기도 속이고 하나님도 속이고 주위도 속이는 악마의 속임수라는 사실입니다. 내 결정에 따라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주의 은혜로 구원받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약속으로 됩니다.
로마서 4장에 보면 아무 행한 것도 없는 아브라함을 의롭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아무에게나 주어지는 혜택이 아니라 택한 백성에게만 주어지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긍휼입니다. 왜?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는 것이 하나님의 자기 속성이고 우리는 그 재료이기 때문입니다.
5분간 쉽시다.
서론 1-2
두 번째 시간에는 조직신학의 분류에 대하여 하겠습니다. 아까 이야기한 십자가에 연장하여 말씀드리겠습니다. 십자가까지 올라가는데 결국은 다 떨어지고 예수님만 달랑 올라갔습니다. 예수님 홀로 십자가에 올라가셔서 다 이루었다고 하셨습니다. 이 다 이루심을 누가 도와주었습니까? 아무도 도와주지 않았습니다.
이근호 목사가 도와주었습니까? 아닙니다. 없어요! 아무도 없어요! 예수님 혼자 다 이루었습니다. 그래서 다른 이름으로 구원을 주신 적이 없습니다. 부처도 안 되고 공자도 안 됩니다. 다 이루심이기에 예수 믿는 것만으로 부족하고 우리의 착함으로 보태어야 한다는 이것도 없는 것입니다. 그죠! 혼자 다 이루셨다는 것은 혼자서도 다 된다는 말입니다.
혼자서 다 이루었다는 이 말은 예수님만 믿으면 다 되는 것입니다. 거기다가 우리의 선행을 보태야 하늘나라의 상급을 더 받고 하는 것도 없고 그냥 하늘나라고 간다는 것입니다. 십자가 위에는 예수님만 올라가셨기에 여기에는 절단, 단절입니다.
이 말이 무엇이냐 하면, 예수님 홀로 올라가셨다는 것은 묵시세계의 거룩성입니다. 우리가 보통 거룩이라고 하면 인간 대 인간의 착함의 대결 또는 정도를 말합니다. 그런데 묵시세계의 거룩이란 누구뿐이냐는 것입니다. 영어로 하면 only 오직 누구뿐이냐는 것입니다.
시내산에서 하나님을 만난 사람이 누구입니까? 모세입니다. 그래서 모세는 누구보다도 이 세상에서 온유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그처럼 거룩은 예수님만 거룩하신 분이기에 다른 사람은 말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테레사 수녀? 마틴루터 킹 목사? 그들이 십자가를 졌습니까? 거룩이라는 말을 어디다가 갖다 붙이는 것입니까? 성자의 무리? 거룩이라는 말은 예수님만 쓸 수 있고 다른 사람은 쓸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 홀로의 거룩성입니다. 그것은 결국 절단되어 있습니다. 예수님 홀로의 거룩이 하나님 보시기에 하나님의 뜻이라면 인간의 뜻은 무엇이겠습니까? 이 질문이 어렵습니다. 예수님 홀로 다 이루었다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인간의 뜻은 무엇이겠습니까? 누구나가 다 됩니다가 하나님의 뜻이라고 알고 있겠지요. 이것이 죄라는 것입니다.
현재 한국교회에서의 문제점이 무엇입니까? 열심히만 하면, 노력만 하면 누구나가 다 구원된다고 보는 것입니다. 못 배워서 그렇고 헌신이 없어서 그렇지 누구나 열심히 헌신하고 금식하고 기도하면 인간인 이상 누구에게나 구원될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런 것은 라이프니츠의 계시론 입니다. 나중에 할 것인데 라이프니츠는 신에게서 주어진 우리는 모나드라는 단자이고 그 단자에는 하나님이 할 수 있는 모든 가능성이 주름처럼 접혀져 있다는 것입니다. 그 접혀져 있는 것이 펼쳐지면서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이 라이프니츠의 계시론 입니다.
여기에 무엇이 빠져 있습니까? 언약적인 예수 그리스도가 빠졌습니다. 그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모를 리가 있습니까! 그 사람에게 예수님이 빠졌다고 하면 그 사람이 욕합니다. 예수님이 빠진 것이 아니고 언약적인 예수 그리스도가 빠진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홀로의 예수님이 빠져버리고 예수님은 하나의 시범조교 모델케이스로 보는 것입니다. 저렇게 착하고 저렇게 이웃사랑하면 나도 구원되겠네! 이런 식의 엉터리 메시아가 되러버리는 것입니다. 엉터리 메시아입니다. 언약이 빠져버린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첫째 시간에 인간의 운명은 어디에서 결정된다고 하였습니까?
언약으로 결정이 됩니다.
그런데 언약을 모르면 인간은 어떻게 구원이 됩니까?
예수 믿는 것도 내가 결단해서 믿어야 하고, 내가 자유의지를 발동해서 신앙고백을 해야 구원받는 것입니다. 이것은 언약을 모를 때 나오는 모습입니다.
언약을 알게 되면, 언약은 누구만 이룰 수가 있습니까? 예수님이 이루십니다. 다른 말로 하면 모든 말씀을 누가 다 이루신 것입니까? 예수님만 이루십니다. 베드로는 왜 안 됩니까? 아까 베드로에 대하여 이야기 하였지요! 베드로가 자기의 목숨을 걸고 죽기까지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하였지만 베드로는 묵시세계의 악마의 힘을 모르는 것입니다.
악마의 힘을 모르고 보이는 것은 역사세계이니 역사적 존재인 자기 자신을 믿는 것입니다. 사람은 자기 자신이 지금까지 해 왔던 것을 잊지 않고 모아둡니다. 일기장처럼 모아두는데 모아두면 그것이 자기의 역사가 됩니다.
자기 역사란 텅텅 비는 것이 아니라 나는 지난주에 와서 이런 일을 하였고 이번 주는 이런 일을 하였고 다음주는 이런 일을 할 거야! 이런 것이 잊어지지 않고 모아 모아서 사건의 뭉치를 만들어 역사를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 역사를 인간이 포기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포기안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자신이 물위를 걸었습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하고 칭찬을 받았습니다. 변화산에서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님과 이야기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런 것을 잊지 않고 모아 모아서 나의 역사가 된 것입니다.
그러나 그 역사가 무슨 소용이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런 간증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그런 간증하는데 마귀가 지겠습니까? 웃기는 소리입니다. 사람이 간증하는데 마귀가 지겠습니까? 마귀는 누구만 겁냅니까? 예수님만 겁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사람을 상대도 하지 않습니다. 인간은 처음부터 재료입니다. 그런 재료하고 상대해서 무엇을 하겠습니까? 인간이 괜히 착각해서 병들었구나! 마귀가 역사해서 그렇구나 하면서 마귀 쫓아낸다고 기도한다고 하면서 돌아다니고 하는 것입니다.
언약적인 것이 아니면 반드시 역사적인 것이 되고 역사적인 것이 아니면 반드시 언약적인 것입니다. 그러니 이런 역사가 쓸데없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인간들의 뜻은 무엇이냐? 우리가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쉽게 이야기 하겠습니다. 신이시여! 우리도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많이 해 왔습니다. 무엇을 하였는데? 홍해를 건너고 여리고성을 무너뜨리고 사사들이 나타나서 블레셋 미디안 군사 무찔렀지요! 다윗이 골리앗을 이기지 않았습니까!
이렇게 해 온 것처럼 역사적인 사건을 모방하고 그대로 하면 되지 않습니까? 예레미야 이사야가 말하기를 고아와 과부를 돌보아야 참된 제사가 된다고 하니 저희들이 십일조를 해서 고아와 과부를 돌보았습니다. 심지어 바리새인들은 내가 십일조 내고 구제하고 금식하고 하였다는 것입니다.
제가 우리교회에서 이렇게 설교하였습니다. 바리새인이 십일조 하였다고 욕하는 사람이 있는데 십일조 해 보셨습니까? 십일조 해 보고 욕하라는 것입니다. 특히 경제가 어려운데 십일조 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해보고 나서 욕하라는 것입니다. 경제가 어려운 이런 때에 십일조를 한다는 것은 자기 팔목을 전기톱으로 자르는 것이나 진배없습니다.
돈이 얼마나 좋은 것인데 돈을 내는 것은 자살하는 것과 다름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교회에 헌금하는 것은 자살하는 것과 같은 것이기에 헌금내지 마라는 교회만 찾아다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교회까지 온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일조 했다! 구제했다! 금식했다는 이 바리새인을 향하여 네가 의인이라고? 차라리 나는 죄인이라고 하는 저 자가 의인이고 너는 죄인이라고 하였습니다. 인간이 언약을 이루고 말씀을 이룬다고 하는 것은 악마의 능력과 역사의 무게를 얕잡아 본 것입니다.
사람이 아무리 열심히 하여도 죽기 직전에 들어가서 공포를 느끼면 못하게 되어 있습니다. 열심히 교회에 봉사 헌신하여도 자기생활이 어려워지면 그 다음부터 교회를 끊게 되어 있습니다. 인간이 아무리 자기 의를 포기하였다고 하여도 자기 자존심 상하면 교회 안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이혼한 여자는 교회를 나오지 않습니다. 제가 이 이야기를 이혼하기 전에 있는 사람에게 하였습니다. 그랬더니 아니라고 난리입니다. 이혼하더라도 교회는 나와야지요! 예수님보고 나와야지! 그런 자존심을 초월 해야지요! 라고 하였던 그런 사람이 막상 본인이 이혼하고 나니 교회에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왜? 부끄럽잖아요! 인생 실패했다는 느낌이 드는 것입니다. 남들이 수군수군 대면서 무슨 소리 하는지 뻔히 아는데 내가 미쳤습니까? 그곳에 가게! 그러면 그동안 교회에는 어떤 조건하에 나온 것입니까? 어느 정도 욕 안 얻어먹을 만한 어느 정도의 조건이 구비되었다는 하에 그 교회 다닌 것입니다. 그러니 상처 안 받았다는 조건하에 나온 것이고 목사에게 욕 안 얻어먹었다는 조건하게 나온 것입니다.
결국 이것은 무엇이냐? 자기 자신을 위하여, 자기 자신이 꿈꾸는 역사를 달성하기 위하여 주위 사람을 이용하고 예수님을 이용한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죄의 무게입니다. 자기 자존심에 못 이기고 자기위신과 자기체면도 이기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자기 무게입니다.
강도가 구원받았다고 하니 상급도 없겠다고 욕하지만 네가 강도가 되어가지고 예수 믿을 수 있는지 해 보세요! 이것은 기적이 아니고는 못 믿습니다. 믿음은 은혜입니다. 인간의 능력으로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믿음은 은혜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은혜가 임하지 않은 믿음은 인간이 믿음을 흉내 내는 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그래서 인간들이 무엇을 만들었습니까? 인간 모두가 할 수 있는 것을 가지고 하나님의 계시로 잡았습니다. 그것이 조직신학입니다. 완전히 신학을 조져놓은 것입니다. 조직신학 안에 무엇이 들어있다고요? 인간이면 누구나 납득이 가고 해 낼 수 있는, 그래서 인간이면 누구나 구원이 될 수 있는 체제, 시스템을 갖추는 이것이 바로 조직신학입니다.
일반교인들은 조직신학하면 참 못들은 이야기입니다. 신학이라는 이야기는 들어도 조직신학은 잘 못 들었습니다. 조직신학이 무엇이냐 하면, 계시에 관하여 계시론, 인간에 관하여 인간론, 하나님에 대하여 신론, 예수님에 대하여 기독론, 성령에 대하여 성령론, 삼위일체에 대하여 삼위일체론, 구원에 대하여 구원론, 그리고 마지막 때에 대하여 종말론, 교회에 대하여 교회론 이런 것들을 묶어서 조직신학이라고 합니다.
마치 31가지의 아이스크림을 모아서 파는 것처럼 신학의 여러 가지를 조직신학으로 묶어서 배우는 것입니다. 그리고 목사들이 조직신학을 한 것을 가지고 으스대는 것입니다. 왜? 너희가 이런 조직신학을 배웠는가 하는 것입니다. 안 배웠으니 아마추어가 어디서 까부느냐는 식입니다.
그러니 교인들이 목사님! 성령에 대하여 궁금합니다. 그러면 목사는 예! 제가 조직신학에서 성령론을 배웠는데 가르쳐 드리겠습니다. 목사님 마지막 때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제가 종말론을 배웠으니 종말론을 가르쳐 드리겠습니다. 구원의 과정이 어떻습니까? 부르심 소명 칭의 믿음 의인 양자 수양 성화 영화 이런 것이 있던데 그런 것은 어떤 것입니까? 예! 제가 이번 금요일부터 강의하겠으니 들으시기 바랍니다.
이런 조직신학의 체계를 갖추어 놓으면 고객들이 와가지고 한수 배우고 목사들은 그것을 가르치면서 돈 값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목사의 권위가 삽니다. 그런데 그것하고 천당하고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이것하고 구원받는 것 하고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다 호기심입니다. 삼위일체가 어떻습니까? 삼위일체 알아서 구원받습니까? 아닙니다.
조직신학이라고 하는 것은, 인간이 배우면 배울수록 인간이 점점 더 성화되고, 하나님의 형상을 본받게 되고, 인간 속에 하나님의 모습이 더욱더 향상되면서 예수님처럼 올라가게 되면 인간의 품위가 달라지고 인간의 행동거지가 달라지고 술도 담배도 다 끊고 완전히 성화된 거룩한 인간이 될 수 있는 모든 윤리적 도덕적 방법이 동원된 것이 조직신학입니다.
제가 아까 이야기하기를 누가 거룩합니까? 예수님! 베드로는 거룩합니까? 하나도 거룩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삼년동안 배워놓고 기껏 한 것이 배신입니다. 이것이 처음부터 베드로에게 있었습니다. 그것을 때가 되매 주께서 일깨워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닭 울 때 베드로가 안 것입니다. 닭 울 그 순간에 잘못한 것을 아는 것이 아니라 태어나면서부터 지금까지 끌어오신 것이 주의 은혜임을 아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닭이 울고 싶어서 울었습니까? 주님이 울게 하셔서 울은 것입니다. 그것을 베드로가 닭이 울 때 알았습니다. 그것도 처음에 안 것이 아니라 세 번 울 때 알았습니다. 네 번을 울었으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그러니 닭보다도 못한 자신임을 알았던 것입니다. 닭은 순종하였는데 자기는 무엇을 하였습니까?
지금 초라하게 맥없이 죄수의 모습으로 사그라지고 무너지는 모습이지만 그 초라함 속에서도 닭은 위대한 메시아를 발견하였는데 베드로는 무엇을 하였습니까? 그 초라한 모습을 보고서 내 살자면서 배신 때리고 도망간 것입니다. 역사 속에서 묵시를 볼 줄 몰라서 그렇습니다. 그래서 오늘날 예수 믿는 초라한 소자에게 한 것이 곧 예수님에게 한 것이라는 의미를 알겠지요!
그래서 제가 언제 그런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성지 순례하는 놈들 전부다 사기꾼이라고 하였습니다. 여기가, 즉 주님과 함께 있는 것이 성지인데 어디서 역사적인 유물을 찾습니까? 그러니 평소에 신앙생활 안 했다는 증거입니다. 평소에 주님과 함께 교제하지 않았다는 증거입니다.
주님과 교제하기 위하여 비행기타고 날아가야 합니까? 성지순례란 목사들이 놀러가고 싶어서 핑계된 것입니다. 그것도 훈장처럼 두 번 갔다 왔다고 자랑하고 세 번 갔다 왔다고 자랑하고 그렇게 갔다 온다고 교인들이 얼마나 돈을 퍼 넣었겠습니까!
그렇다면 조직신학이 죄 입니까? 죄 아닌 게 어디 있습니까? 다 죄이지요! 죄이면 안해야 할 텐데 왜 합니까? 그렇게 강의를 해도 죄이니 안해야 되지 않습니까?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강의를 해도 못 알아듣는 것입니다.
기도해도 소용없습니까? 예! 그러면 기도 안해야 되겠네요! 기도해도 소용이 없다는 말은 기도하라는 말입니다. 기도해 보아야 내 기도하는 내용의 응답과 내일 주어질 응답이 얼만 핀트가 맞지 않는지 목도하고 체험하여 알게 될 것이 아닙니까! 이미 우리는 죽어가는 인간이 아닙니까! 죽어가는 인간이 어떤 이유 때문에 죽어 가는지 알아야 될 것이 아닙니까!
자식을 놓아서 키워 보아야 자식이 얼마나 못 된지 알고 그 못된 자식이 어디서 튀어나왔는지 알고 그러면서 자신도 만만치 않다는 사실을 아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자식 키우면서 속상한다고 자식을 죽일까요? 그게 아니고 역사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체험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왜? 역사는 죄라는 것을 알기 위하여 체험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내가 왜 죄인가? 왜 나는 예수님 없이는 못 사는가! 나는 왜 주님의 은혜가 없이는 지옥갈 수 밖에 없는가를 알아야 됩니다.
부모에 대하여 자식에 대하여 모르니까! 부모님이 안 믿고 돌아가게 하신 하나님이 두고두고 원망이 되는 것입니다. 나는 교회 와서 예수 믿고 구원받는데 내가 제일 좋아하는 엄마는 죽기 전까지 예수님을 거부하고 부처 믿겠다고 찬불가나 틀어놓고 죽었는데 정말 내가 좋아하는 어머니인데 정말 지옥이 있다면 너무하지 않습니까? 이런 적개심 같은 것이 떠오르는 것입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네 엄마를 아느냐? 내가 압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내가 더 알지! 네 엄마 속에 무엇이 들어있는지를 내가 안다. 엄마가 70평생 그렇게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가면서 살아놓고서 감사한 적이 있는가? 없네요! 부처한테 감사해놓고서 무엇이 엄마가 착해? 너에게 잘해 주었다고? 제가 이런 말을 하면 목사님 너무 비정합니다.
그러나 가장 비정한 것은 자기를 만드신 하나님을 때려죽인 것이 비정한 것이 아닙니까? 에덴동산이 자기 것도 아니면서 자기 것처럼 설쳐가면서 선악과를 따 먹은 것 그것보다 더 비정한 것이 어디에 있습니까? 남의 집에 들어가서 물건 훔친 것 비정한 것이 아닙니까? 에덴동산의 선악과가 누구 것입니까? 하나님의 것입니다. 그런데 왜 따먹어요? 하나님의 것을 왜 손댑니까?
하나님께서 만드신 어머니 하나님께서 알아서 처리하셨는데 자식이 왜 비정한 것입니까? 그것이 네 것이냐는 것입니다. 인간이 왜 그런가 하면 자신의 사랑의 꽂히면 그것이 자기 소유가 됩니다. 이 교회에다가 꽃꽂이를 해 보세요! 다른 사람들은 꽃꽂이 해 놓은 것 만져도 가만히 있습니다. 그런데 꽃꽂이 해 놓은 사람은 환장합니다. 내가 꽃꽂이 해 놓은 것을 왜 만지냐는 것입니다.
사람이 사랑을 해버리면 그 사랑에 의하여 상처를 받습니다. 사랑하고 헤어져보세요! 미칩니다. 특히 비 오는 날에 유행가 음악에 그런 음악이 나오지요! 사랑하고 사랑의 대가도 모르고 헤어지고 그런 이야기입니다. 다른 여자와 헤어졌다고 우는 것이 아닙니다. 슈퍼 아줌마하고 헤어졌다고 울지 않습니다. 내가 사랑한 여자인데 그 여자가 나에게 사랑으로 되갚아 주지 않을 때 괴로워서 울고불고 난리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기 소유이기 때문입니다. 일종의 작살입니다. 고래잡이 작살이 고래에 꽂히면 작살을 꽂은 쪽으로 끌어당기는 것입니다. 사랑은 작살입니다. 쏘았다! 꽂혔다! 사랑은 내가 주었으니 내 것이다! 부부싸움이 그래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나는 너를 사랑해! 이것은 너는 내 것이야! 하는 뜻입니다. 너는 내 말 안 들으면 패버릴 거야! 서로가 다 그런 것입니다. 그러니 부부싸움이 일어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나중에 사랑 값을 못하면 헤어지자고 하는 것입니다.
인간이 무엇이냐 하면, 인간이 죄 짓고 난 뒤에는 무엇이든지 자기중심입니다. 자기에게서 나온 사랑이 제일 중요하고, 자기 꿈이 제일 좋은 꿈이고, 자기의 믿음이 최고의 믿음이고, 전부다 나 나 나라는 자기중심입니다.
요즈음 우리교회에 자아문제로 고민하는 분이 있는데 목사님 예수님 믿고서 자아가 없어집니까? 고상한 질문이지요! 그런데 죽는다는 것을 없어진다고 오해한 것입니다. 나는 죽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산다는 말을 없어진다는 것으로 본 것입니다. 죽는다는 말은 죄인으로 남는다는 것인데 그것을 없어진다는 것으로 알고 내가 무엇을 하여도 다 예수님이 하는 것으로 그렇게 오해를 한 것입니다.
이것을 먼저 이야기 하겠습니다. 예수 믿는다는 것은 내 안에 침투한 것이 있습니다. 입니다. 예수님이 침투한 것 입니다. 성령 안에 예수님이 계시니 성령으로 인하여 예수님을 믿게 된 사람은 기존에 또 내가 있지요! 그러니 둘 다 있는 것입니다. 이 쪽은 날마다 죄인 되고 이 쪽은 날마다 용서하시는 분으로 계시는 것입니다. 용서와 죄 이 둘이 만나야 구원되는 것입니다. 잘나고 잘난 사람이 만나면 구원이 안 됩니다. 한 쪽은 죄인이고 한쪽은 무조건 용서 해 줄때에 이 관계가 형성이 될 때에 구원이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내가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내가 죄인이라는 것이 전제조건이 되어야 합니다. 내가 죄인인 것을 알도록 만들어 가시면서 구원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없어지면 용서 받을 대상이 없으니 공중에 붕 떠버리는 것입니다. 그것은 곤란하다는 것입니다.
나 중심으로 모든 것을 이해하기 때문에 나 중심으로 조직신학을 하기에 이 책에서 말하였습니다만 인간은 날 때부터 조직신학이 있다? 없다? 있습니다. 이 책의 표현에 의하면 교회에 올 때에 그냥 오는 것이 아니라 텅텅 빈 서랍으로 오는 것입니다. 사실은 빈 서랍이 아닌데, 목사가 설교를 하면 저것을 담을까 말까? 자신이 아주 바쁩니다. 조는 사람은 늘 졸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은 바쁩니다.
자기를 구원하기 위한 것들을 분주하게 빼고 넣고 하면서 채워 넣느라고 작전을 벌리는 것입니다. 그러니 인간 속에는 이미 조직신학이 들어있어요! 그 조직신학을 제가 이 책에다 담았습니다. 인간들이 죄지은 상태에서 어떤 조직신학을 만드는지를 이 책에 담았고 뿐만 아니라 예수님이 이야기한 조직신학도 같이 겸하여 담았다는 것입니다.
왜 그래야 하는가? 그래야 죄인 앞에 거룩한 주님께서 양쪽을 다 합하여 언약을 이루시는 것입니다. 양쪽을 다 합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계시론 같으면 인간들이 계시가 하나님의 계시는 이런 저런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예수님의 계시는 바로 이것이 계시이다. 하는 식으로 양쪽을 다 실었습니다. 그래서 과연 여러분들이 성령 받은 자인지를 확인해볼 수 있는 계시를 마련해 놓았습니다.
자 그렇다면 여기서 중요한 이야기를 해 봅시다. 사람들이 십자가를 거쳐서 와야 합니다. 아까 하던 헌금이야기 다시 합니다. 예수님께서 과부의 두 렙돈을 헌금한 것을 가지고 부자가 많이 한 것보다 저 여자가 더 많은 것을 넣었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십자가를 거쳐서 보면 저 과부의 헌금은 자기의 돈으로 헌금한 것이 아니라 주님의 은혜로 할 때에만 주님께서는 어떤 돈보다도 더 값진 것을 간주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은혜 안에서는 양적인 비교가 됩니까? 되지 않습니까? 안 됩니다. 주님 안에서는 양의 적고 많음이 문제가 아니라 어디서 왔느냐의 문제입니다. 네가 헌금한 것이 누가 주시더냐의 문제입니다. 그런데 이런 생각을 갖고 있는 것은 우리 능력에서 나옵니까? 나오지 않습니까? 절대로 나오지 않고 주님의 묵시적 능력이 잠간 잠간 떠오르게 될 때 그 사람을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합니다.
목사님! 그것이 떠오른데 어떻게 하나님의 백서입니까? 아까 성도를 무엇이라고 하였습니까? 성도는 재료라고 하였습니다. 무슨 재료? 세상 사람들은 죄만 보여주는 재료이지만 우리는 무엇 하나를 더 보여줍니까? 주님의 은혜성도 보여주어야 하기에 문득문득 주의 은혜가 보이는 것입니다. 이런 은혜가 나와야 구원받는 다는 말이 아니라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나오게 되면 구원받은 줄로 아시기 바랍니다.
아시겠습니까? 이것이 하루에 열 두 시간 내 나오는 것이 아니라 나오시거든 이것이 내 능력으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누가 있다? 주님의 능력이 함께 하시는 줄을 아시기 바랍니다. 내가 미쳤지 미쳤어 내가 왜 그런 생각을 했을꼬? 이 돈 내는 것이 얼마나 아까운 돈인데 내었을꼬? 가만히 생각해보니 그렇게 내는 것도 은혜이구나! 돈이 얼마나 아깝습니까? 그런데 내는 이것도 은혜라는 것이 잠시 생각나는 그 순간 하나님의 도구로 쓰이는 것입니다.
이것은 구원받았기에 되는 것입니다. 이런 사건을 뭉쳐야 구원이 된다는 것이 아닙니다. 역사적인 사건으로 뭉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것 하고 십 원도 안내도 괜찮습니다. 주께서 어떻게 사용하는가가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제가 하는 이야기를 인간의 행함으로 이해한다면 굉장히 구원받기 쉬워요! 하루에 2초만 은혜 생각하면 됩니다. 그런데 인간의 행함이 아니라 정말 은혜로 생각한다면 구원받기에 불가능합니다. 인위적으로 조작이 안 됩니다.
지금 제가 이야기 하는 것은 이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조직신학은 어디서 나오는가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조직신학은 여기서 머무는 것이 아니라 더 올라가서 십자가를 거치고 부활된 상태에서 다시 세상으로 내려올 때에 예수님의 조직신학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조직신학 자체가 죄인데 또 예수님의 조직신학을 합니까? 예수님은 조직신학을 한 적이 없는데 왜 예수님의 조직신학이라는 말을 씁니까? 라고 물으신다면 예수님께서 인간들이 기존에 가지고 있는 조직신학의 하나하나의 시스템을 부정하기 위하여 정죄하기 위한 것이기에 예수님의 조직신학이라고 한 것입니다.
네가 종말에 대하여 아느냐고 물으시는 것은 이미 그들이 거기에 관심이 있기 때문에 시비를 거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육체로 오신 것은 인간이 이미 죄인이기에 죄인인 육체의 모습으로 오신 것입니다. 조직신학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의 조직신학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조직신학은 이렇게 엉터리라는 것을 까발리기 위하여 조직신학을 전개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체계적으로 자 계시론을 하자! 구원론을 하자고 하신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과 행동 속에 모든 조직신학이 다 들어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요한복음 8장에서 너희들은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마태복음에서 나오지만 요한복음 8장의 경우에 예수님은 자신을 하나님을 본 것입니다.
자 여기서 잠시 어려운 것을 해 봅시다. 하나님의 계시가 무엇입니까? 계시라는 말은 이미 구약성경에서 나오는 용어입니다. 계시라는 말은 직접 하나님이 인간에게 나타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계시를 가지고 인간과 연계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직접 나타나시면 인간이 다 죽습니다.
그래서 안 죽이고도 구원하시는 방식은 어떤 방식입니까? 선지자나 꿈으로나 우림이나 둠밈이나 어떤 흔적이라는 계시를 통하여 구원되기 위한 방책이 하나님의 계시입니다. 이것의 전제가 무엇이라고요? 하나님은 직접 나타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시내산에서 모세가 내려왔을 때에 왜 수건을 머리에 썼습니까? 40일간 영광의 하나님과 함께 있었기에 그 영광의 광채로 인하여 백성들이 모세에게 가까이 올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구원이 되지를 않습니다. 그래서 모세가 수건을 씀으로 자발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은폐하는 것이 됩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계시 안에 무엇이 들어있습니까? 무서운 하나님의 거룩도 들어있고 영광도 들어있고 하나님의 진노와 징벌이 다 들어있는데 다만 계시의 특성상 사람을 안 죽여야 하니 하나님의 그런 거룩과 영광을 감추고서 나타내는 것이 하나님의 계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시는 감추는 식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예를 들겠습니다. 제가 이렇게 고함지른다고 이해되는 것이 아니지만 이른 예를 들겠습니다. 출애굽기 20장에 나오는 십계명을 액자로 만들어서 벽에 걸었다고 해서 그것이 무섭습니까? 십계명에서 탐내지 말라는 글씨를 가지고 이 강단에 써 놓으면 사람들이 무섭다고 벌벌 떱니까? 애들도 무서워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탐내지 말라는 것이 갑자기 하늘에서 손가락이 나타나 인천 하늘에 한글로 탐내지 말라는 글이 나타나면 겁이 납니까 안 납니까? 겁이 납니다. 그러니 이것이 바보 아닙니까? 말도 안 되는 이야기입니다. 아니 탐내지 말라는 말씀이 하늘에 손가락이 나타나서 써야 비로소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이 되는 것입니까?
아니지 않습니까? 하늘에 쓰이는 탐내지 말라는 것이나 여기에 쓰는 탐내지 말라는 말씀이 다 하나님의 뜻이지 않습니까? 그런데 갑자기 손가락이 벽에 나타나서 메네 메네 데겔 우바르신 이라는 글자가 쓰여 지니 그 왕이 벌벌 떨었지 않습니까!
그러니 우리가 평소에 예수님을 얼마나 무시하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 손가락이 누구 손가락입니까? 예수님의 손가락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계시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을 때 어떻게 했습니까? 사람들이 떠밀고 난리를 쳤습니다. 제자들은 3년 동안 같이 합숙훈련을 했습니다. 예수님의 손가락 보고 겁을 냈습니까?
주님께서는 우리를 살리시기 위하여, 우리가 얼마나 어설픈지 아시기에 모든 하늘의 영광을 다 감추시고 심지어 뺨까지 얻어맞고 옷 빼앗김을 당하고, 그런데 예수님은 요한복음 8장에서 자신을 하나님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 꼬락서니 좋다!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께서 피조물에게 와서 그것도 그냥 피조물이 아니라 깡패 같은 피조물에게 매 맞고 침 뱉음을 당하고 가시 면류관을 쓰고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그러면서도 예수님은 수시로, 수시로 묵시를 나타내셨는데 예를 들면 요한복음 2장의 가나 혼인잔치 때에 포도주가 떨어졌습니다. 물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사람들이 어떻게 하겠습니까? 저라도 그렇게 하였을 것입니다. 사람들을 불러서 주목하게 하고서는 자 보십시오! 지금 이 물을 포도주로 만들겠습니다. 하나 둘 셋 하면 물이 포도주가 될 것입니다. 그런데 포도주가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인기 짱! 완전히 뜨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요한복음 2장에 보면 맛있는 포도주를 마시면서도 정작 이 포도주가 어디서 나왔는지를 모르는 것입니다. 누구 때문에? 어떻게? 이렇게 생겼는지를 모르게 하시는 것입니다. 심지어 자기 어머니가 부탁하여도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아직 때가 이르지 않았다고 합니다. 즉 때가 이르지 않았기에 자기 영광을 드러내지 않았던 것뿐이지 주님은 하나님의 영광을 가졌습니까? 안 가졌습니까?
평소에도 가지셨는데 인간들이 육적인 인간이 되어가지고 그걸 철저하게 깔아뭉갠 것입니다. 마치 오늘날 교회와 같은 것입니다. 예수가 누구입니까? 예수가 우리 구세주입니다. 동시에 창조주 아닙니까? 말씀으로 창조하신 분이십니다. 우리의 아버지 아닙니까? 자기 아버지의 이름을 함부로 안 부르면서 예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않습니까! 막 먹으려고 그러는 것입니다. 교회에서도 그런 것입니다.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모든 영광을 버리시고 모든 아픔과 겸손과 종처럼 낮아지심과 죽기까지 모든 것을 감내하셨는데 그러한 은혜성을 모르고 건방을 떨면서 헌금 좀 했다! 착한 일 좀했다! 너는 왜 그따위로 사느냐며 싸우고 말입니다. 참 철이 없어도 보통 철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돈 좀 있으면 교회에서 헌금하라고 할까봐서 교회 안나오고, 돈 없으면 헌금하는 것이 부담되어 또 안나오고 그러면서도 예수 믿는다고 우기고, 뭐합니까? 지금! 차라리 나는 예수 믿은 적이 없다고 솔직하게 말하면 될 텐데, 그래도 나는 어려서부터 유아세례 받았다고 하는 것입니다. 유아세례 받는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하나님의 계시에 대하여서도 인간의 계시와는 완전 딴 판입니다. 제가 지금까지 말씀한 것이 예수님의 계시라면 인간의 계시라는 것은 참 웃깁니다. 인간들은 무엇을 계시라고 보는가 하면 하나님께서 인간이 없으면 적적하다는 것입니다. 참 웃기는 이야기입니다. 인간이 없으면 놀 상대가 없다는 것입니다. 소꿉놀이 하는데 같이 놀려고 인간을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담을 친구하려고 만들었는데 죄를 지어서 그 값을 못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니 친구가 없어서 적적하니 어떻게 해서든 달래서 같은 레벨을 만들기 위해서 사랑을 해 주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인간들이 신의 계시를 논하기 전부터 이미 신에 대하여 자기 나름대로 아는 것을 다 풀어놓는 것입니다.
원래 계시란 신으로부터 받아야 계시가 되는 것입니다. 다시 합시다. 원래 하나님이라는 분으로부터 무슨 소식을 들어야 알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하나님의 소식을 듣기 전에 이미 하나님에 대하여 다 알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신은 인간의 친구라는 것입니다. 인간을 친구 삼는 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고방식이 왜 나오는가 하면, 저희들 입장에서 생각한 것입니다. 여러분들 친구 없으면 적적하지요? 무슨 말인가 하면 여러분들 자녀를 왜 놓습니까? 자녀 없으면 적적하잖아요! 낳으면 좀 분잡지만 안 심심하지요! 그러니 나나 하나님이나 마찬가지 인격자이니 나의 생각이 곧 누구 생각이다? 하나님의 생각이라는 것입니다.
당신 생각이나 내 생각이나 같으니 내 생각대로 할 테니 나의 생각에 맞추라는 것입니다. 사랑을 베풀었다는 것을 말할 때에, 사랑을 왜 합니까? 외로울 때에 사랑을 하지 않습니까? 짝을 찾을 때에 사랑을 하는 것입니다. 짝을 찾기 위하여 사랑하는 것이니 아마 하나님도 짝이 필요해서 우리를 사랑해 줄 거야!
그러면 사랑은 무조건적인 사랑이니 봐주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인간을 친구 삼고자 하실 때에, 친구 간에 무엇이 통해야 합니까? 대화가 통해야 합니다. 같은 연배라고 다 친구가 됩니까? 말을 걸어보면 대화가 되는 사람이 있는 것입니다. 취향 성격 가정환경 같은 것들이 비슷한 공통점이 있어야 대화가 되는 것입니다.
이런 대화가 있어야 하기에 하나님께서 선지자를 통해서 말씀을 하셨다는 것입니다. 이 대화는 사람이 납득이 되고 이해가 되는 그런 계시를 우리에게 주었다는 것입니다.
제가 지금 이야기하는 것은 인간들의 계시관입니다. 그림을 그려 보겠습니다. 위에는 하나님이 계시고 밑에는 인간이 있습니다. 인간 대 인간의 관계가 있습니다. 이 관계를 확장시켜서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로 연장시켰다는 것이 제 이야기입니다. 이제 이해가 되십니까?
인간과 인간의 관계란 부모와 자식관계에 무엇이 생깁니까? 사랑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늘에 계신 하나님 우리 아버지라고 합니다. 그런데 요즈음 안상홍 하나님의 증인이라는 곳에서는 하나님 어머니를 믿지 않으면 저주 받는다고 예수 믿는 사람들 붙들고 전도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계시를 인간 대 인간의 관계를 확장하고 연장하여 하늘까지 연결한 것입니다. 그래서 하늘에 계신 아버지, 아버지에 대하여서는 내가 빠삭하게 안다는 것입니다. 아버지와 자식의 관계를 뻔하게 아는 것이 아닙니까? 또는 예수님은 우리의 신랑 우리는 그의 신부! 이런 신랑신부는 결혼 해 본 사람은 다 알지 뭐! 그러니 뭐 어려운가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관계 아닙니까? 신랑 신부 다 아는 이야기이나 그 비유를 추적하면 하나님도 알고 예수님도 다 아는 것이지 복잡하게 설명할 것이 무엇이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하고 용서하면 다 되는 것이지 무엇을 한국교회를 보고 이단이니 삼단이나 할 것이 무엇이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주장하는 것입니다.
인간 대 인간의 관계를 확장시켜서 하나님의 관계까지 이어보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 관계가 형성된다면 대화가 되어야지요! 그래서 그 대화를 기도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의 조직신학에서 두 가지를 강조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이것도 되지도 않지만- 두 번째로 기도를 함으로써 인간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성립된다고 그렇게 믿고 싶어들 합니다. 그렇게 알고 싶어들 하는 것입니다.
말씀에 순종하고 기도하면 된다고 여겼기에 바리새인들은 이레에 두 번씩 금식까지 한 것입니다. 기도를 해도 그냥하면 안 되고 금식까지 하면서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잘 들어주신다는 것입니다. 간절한 소망을 들어주신다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은 무엇이냐 하면, 간절한 기도이니까 여기에 무엇이 들어가느냐 하면, 애걸복걸 하는 나의 정성이 들어가는 것입니다.
말씀에 순종한다는 것은 윤리지요! 그러니 윤리성 더하기 정성 이것이 인간의 계시입니다. 이제 정리가 되었지요? 인간의 계시란 윤리성에다가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정성입니다. 윤리성과 정성을 빼놓고서 한국교회가 되는가 한번 보세요! 한국교회 어디를 가더라도 윤리성 빼고 정성 빼면 목회가 되는지 한번 보라는 것입니다.
오는 손님이나 가르치는 목사나 간에 인간들이 만든 이런 계시에서 벗어나지 않습니다. 윤리적인 착함으로 복 받는 간증과 정성 드려서 복 받는다 간증 이 두 가지 밖에 더 있습니까! 없습니다. 그 외에는 없습니다. 한 가지 더 보탠다면 교회 키우기입니다.
그러니 이들이 어떤 성경구절을 어떻게 한다고 하여도 그것은 전부다 사기입니다. 인간 대 인간, 자기 친구들 관계, 또는 직장 상사들과의 관계, 부부의 관계, 자식들과의 관계, 이러한 지상에 있는 인간들의 관계를 모방하여 확장시키면 하늘과도 통할 수 있다고 여기는데 이것은 거짓말입니다.
왜 거짓말일까요? 에덴동산에 생명나무를 심어놓았는데 그곳에 들어가지 못하도록 하나님께서 차단시켜 놓았습니다. 예수님께서 무슨 말을 하였을 때에 사람들이 다 떠났습니까? 내 살을 먹지 않고 내 피를 마시지 않고서는 생명이 없다는 이 말씀에는 말씀을 지키는 윤리성과 정성 바치면 된다는 이 교리가 들어갈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못 들어갑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그 사람들은 어렵도다! 도저히 이해가 안 된다는 것입니다. 하고서 그들은 다 떠나고 말았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아버지께서 보내지 않으면 어떤 자도 나에게 올 수가 없다고 하셨습니다. 무엇을 포기하라? 윤리를 포기하고 정성을 포기하자는 것입니다.
윤리포기하고 정성포기하지 않으면 그 사람은 예수님에 대하여 아는 바 없는 사람입니다. 전혀 모르는 사람입니다. 이 연사 호소합니다. 정말! 사람이 윤리를 포기한다는 것은 자기 의를 포기한다는 말입니다. 자기 의를 포기한다는 말은 나의 구원은 나의 의에 기초하지 않는다는 것을 확신할 때에 나오는 소리 아닙니까!
그래서 이혼해도 교회 나오라는 말입니다. 그렇다고 이혼하라는 말이 아니고, 그러니 사업망해도 교회 나오라는 것입니다. 왜? 처음부터 자기 의는 포기하였지 않습니까! 자기 착함을 포기하였지 않습니까! 게을러도 교회 나오시기 바랍니다. 왜? 자기 정성을 포기 했잖아요! 헌금 한 푼 하지 못해도 교회 나오라는 말입니다.
주님은 헌금보고 구원하시는 것이 아니고 십일조 보고 구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정성 없어도 교회 나오라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를 포기하지 않고 무슨 주를 안다고! 부부싸움 할 때는 꼭 자기 의를 내세웁니다. 네가 나에게 얼마나 해주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네가 아이 보았나? 혼자 아이에게 시달리는 것 아나 모르나? 너는 내 직장생활 하는 것 얼마나 힘 드는지 아나 모르나? 그러면 바꿔서 해볼까?
자기 의를 가지고 있으면 주님을 헛되이 섬기는 것입니다. 주님이 있으나 마나 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인간들이 생각하는 계시의 특징입니다. 그래서 인간들이 만든 조직신학이 무엇인가 하면 정성과 착함이라는 이 두 가지로 짜여져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정성과 착함이 결국은 누구를 살해 했습니까?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무용지물로 만들어버리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필요 없다고 나가라고 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죽여 버린 것입니다.
오늘날도 교회는 예수님의 이름을 도용하는데 이름을 부르기는 하지만 그 속에 예수님의 공로가 들어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처럼 말씀을 순종하고 예수님처럼 정성을 다해야 구원을 받는 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하나의 모델케이스로 간주하고 예수님을 본 받자는 식으로 치닫고 있습니다. 보통 큰 문제가 아닙니다.
여기서 좀더 깊이 나가 봅니다. 인간의 계시란 윤리와 정성인데 좀더 깊이 들어가 보면, 인간의 윤리성이란 인간의 착함입니다. 인간의 착함은 어디서 나온 것입니까? 이것은 양심에서 나온 것입니다. 맹자가 이런 소리를 하였습니다. 인간에는 근본적으로 하늘의 법도가 들어있다고 하였습니다. 그것을 이법이라고 합니다.
인간에 하늘의 이법, 이치가 들어있는데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측은지심 즉 남을 보는데 불쌍히 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이 예를 갖추는 것, 그리고 사람이 정의로운 것, 불의를 참지 못하는 것 이런 요소들은 인간 속에 신적인 품성이 들어있다는 증거라고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중에 신학의 맛을 본 사람은 이런 것을 가지고 무엇이라고 합니까? 흔히들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하지요! 하나님의 형상이 인간에게도 있는 그것을 공유적 속성이라고 합니다. 동양철학에서는 이법이라고 하지요! 인간 이치의 법이 인간 속에 들어있어서 인간은 기와 이로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기는 물질적 요소요 이는 기를 구체화시키는 하나의 법칙을 가지고 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런 양심은 인간에게만 있습니까? 가만히 보니 두더지라든지 개미라든지 자연물에도 있지요! 그러니 이런 양심이라든가 정성을 다한다든가 하는 것은 자연에도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것을 가지고 자연계시라고 합니다. 지금 이런 것들은 인간들이 만든 계시입니다. 자연 속에는 인간도 포함이 되어 있습니다.
중요하기에 쉬지 않고 계속하여 하겠습니다. 자연 속에 인간도 포함이 되고 짐승도 포함이 됩니다. 인간이든 짐승이든 동일하게 포함되어 있는 착한 심성은 분명히 착한 누군가가 집어 넣어주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착한 분이 누구인가 하면 그들은 그 분을 신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기가 막혀서! 신이 착하다고 누가 그렇게 말하였습니까? 이런 질문은 여러분 생전에 처음 듣는 질문일 것입니다. 신이 착하다고 누가 이야기하든가요? 여러분이 지옥에 한번 가 보았습니까? 지옥이 어떤 곳입니까? 지옥은 십년 살고 나올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네 고생 많이 했지! 이제 풀어주겠다. 이런 곳이 지옥이 아닙니다.
지옥은 한번 들어가면 영원토록 있어야 하며 이곳은 죽지도 않고 구더기도 죽지 않고 영원히 고통을 주는 곳이 지옥입니다. 물 한 방울이 없는 곳이 지옥입니다. 여기 컵의 물이 많습니다. 이 한 컵의 물이 지옥에서는 얼마나 보통 값이 아닙니다. 물 한 방울이 아쉬워서 부자가 거지 나사로에게 물 한 방울이라도 묻혀 달라는 곳이 지옥입니다.
지옥 불, 유황 불, 영원히 고통 받는 곳, 구더기도 죽지 않고 영원히 고통 받는 곳 그 속에 한번 들어가 보지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라고요! 하나님이 자비하신 분이라고요! 하나님이 착하신 분이라고요! 그래서 유명한 슈바이처 같은 사람은 하나님을 안 믿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증인 같은 곳에서는 지옥을 믿지 않습니다. 사랑의 하나님께서 지옥을 만드실 리가 없다는 것입니다. 겁주려고 하신 이야기이지 지옥은 없다는 것입니다.
겁을 주어야 죄를 억제하고 돌아설 것이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현대 신학자들 중에 지옥을 안 믿는 자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고 현재 목사 가운데도 지옥을 안 믿는 자들이 점점 늘어가고 있습니다. 목사는 원래부터 믿음이 없으니 당연한 것이고, 지옥을 안 믿는 것입니다. 지옥을 안 믿으면 나머지는 무엇만 있겠습니까?
수능의 내신 성적만 있는 것입니다. 그냥 합격을 시켜주면 노력을 하지 않을 것이기에 아까 말한 인간의 계시인 선함과 정성을 유발시킬 동기 부여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엇을 해야 합니까? 상급으로 돌리는 것입니다. 많이 노력할수록 많이 상급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 세상을 그대로 천국에 올려놓은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사장님도 계시고 저 밑에 말단 사원도 있듯이 천국도 기껏해야 그 정도라는 것입니다. 뭐냐 하면 지옥은 없는데 제일 밑바닥에는 부끄러운 구원이 있고 제일 위에는 사장님 같이 느긋하게 자식아 좀 노력하지 뭐하느라고 세상에 있을 때에 봉사도 하지 않고 그랬느냐고 나를 보라 비록 세상에서 고난을 받았지만 지금 영광을 받잖아! 라는 여유 있는 그런 사람들이 있다는 식의 사람들의 계급을 지어가지고 인간 세상과 똑같이 만든 것입니다. 인간 세상과 똑같이 만들어 그것을 그대로 연장시킨 것입니다.
왜냐하면 진짜 지옥을 만들어 버리면 하나님은 너무 잔인하잖아요! 사람은 많이 죽인 유영철도 잘못했다고 하는데 하나님은 사람을 그렇게 많이 죽여 놓고도 잘못했다고 하지 않잖아요! 그렇게 괴팍하고 마음이 고약한 사람이 어디에 있습니까? 그러니 지옥을 없애버리는 조직신학, 거기에 비하면 자연은 하나님의 고운 성품으로 충만하지요! 물론 폭풍이 있고 풍랑이 있어도 그것도 일시적인 것이고 사실은 이 자연은 하나님의 따뜻한 품속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자연계시 속에 들어있는 것이 무어냐 하면, 착함이고 양심인데 이것을 칸트가 이야기 하였습니다. 칸트라는 학자가 말하기를 인간 속에는 오성이 들어있는데 이 오성은 숨길 수 없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신과 자유와 영혼 이 세 가지는 인간의 이성 범위 밖에서 나온 것인데 이것은 무엇으로 수용하여야 하는가 하면 윤리적으로만 수용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이 무조건적으로 윤리적이어야만 하는 이유는 신의 성품을 받았기 때문이라는 것이 칸트의 철학입니다.
제가 칸트의 주장이라고 하였지만 사실은 오늘날 교회 목사들의 주장입니다. 오늘날 신학자들의 주장입니다. 철학을 무시하지 마세요! 신학에서 이야기하는 것들을 철학에서 다 이야기 한 것입니다. 칸트는 모든 자연 속에 신의 착함과 신의 사랑과 정성이 다 들어있다고 본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곧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여러분이 지금 공부를 두 시간 이상 했으니 이해할 것입니다. 지금 자연계시를 앞장세워서 신을 안다는 것은 무엇을 뺀 결과입니까? 신의 저주를 뺀 것입니다.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십자가를 뺀 것입니다.
십자가는 완전히 절단, 차단입니다. 십자가를 빼 버리면 차단이 아니라 하면 됩니다. 아이 캔 두 잇입니다. 내가 하면 할 수 있다는 이것이 인간의 계시인데 진짜 하나님의 계시는 무엇입니까? 십자가는 미련한 것이고 세상에서 부끄러운 것이고 십자가는 세상에서 자기 의를 주장하는 자들이 그 앞에서 엎어지고 자빠지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자빠지고 엎어지게 만드는 그것이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를 통해서 인간은 구원받을 자격이 없으며 오직 저주 받아야 마땅하다는 것이 십자가입니다. 지금 강의하는 것이 그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스스로 자기가 만든 자연계시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아까 말한 예수님 홀로 역사 세계에서 묵시 세계로 점프하셔서 부활하셨는데, 자연 계시를 말하는 자들은 누구든지 착하게 살면 신의 자녀가 될 수 있다고 본 것입니다.
특히 자연계시에 의하면, 유대주의에 의하면 인간은 존재론 적으로 누가 만들었습니까? 하나님이 만들었지요! 하나님이 만들었으니 곧 신의 자녀로 본 것입니다. 이것이 일반인들에게 얼마나 납득이 되고 설득이 되는지, 자식은 누가 만들었지? 아~ 우리 부부가 만들었구나! 내가 자식을 만들었기에 자식은 내 자식, 나는 자식의 부모 그렇다면 인간은 누가 만들었지? 하나님이 만들었지! 하나님이 만들었으니 인간의 신의 자녀가 되고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가 되고, 현재 인간들의 관계를 가지고 말하면 납득이 되지요! 설득이 되지요!
그런데 그것이 엉터리입니다. 하나님은 진노하심과 긍휼하심의 속성을 보여주는 재료로서 어떤 자녀는 긍휼의 자녀로 어떤 자녀는 진노의 자녀로 만들어 놓았는데 이것이 십자가에서 나옵니다. 그런데 십자가를 무시하는 인간 쪽에서는 만들어 놓았으니 책임지라는 것입니다.
연속극에 나왔지요! 여자가 남자하고 하루 밤 자고나서는 책임지라는 것입니다. 그런 것처럼 만들어 놓았으니 책임지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당신이 책임을 지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어쩌면 좋겠습니까? 이런 모습은 우리가 하루에 열두 번도 이상 말은 안했지만 속으로 그렇게 한 것입니다.
지금 가을비가 농사짓는 사람들에게 맞는 것입니까? 왜 이런 가을비가 옵니까? 하나님 책임지세요! KAL기 폭파될 때에 미국에서 15년간 유학해서 박사학위 딴 사람이 죽었습니다. 그 사람이 여러분의 형이고 동생이고 여러분의 가족이라면 여러분이 하나님께 원망하겠습니까? 안 하겠습니까?
15년간 유학해서 박사학위 받고 돌아오는데 러시아의 미사일 맞고 폭파 되었을 때에 러시아를 원망하는 것이 아니라 결국 하나님을 원망하는 것입니다. 죽이시려면 미국에서 죽이시든지 아니면 15년 후에 죽이시든지 하시지, 우리가 착해서 그동안 교회 열심히 다녔고 우리가 농땡이를 부렸다면 할말이 없지만 목사가 시킨 대로 다 했는데 왜 죽이는 것입니까? 이런 생각이 하루에 열두 번도 더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그동안 살아온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을 모릅니까? 여러분이 이렇게 앉아있는 것도 주의 은혜의 덩어리로 앉아있다는 사실을 우리가 왜 모르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런 주님의 공로를 모르고 자꾸만 눈에 보이는 인간의 역사에서 어떤 공로를 찾고 다듬어 체인을 계속하여 연결시켜 나가서 자기 의를 형성 시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나는 착하다고 하는 이것이 자연계시입니다. 이 자연 계시를 어느 신학자도 다 긍정합니다. 단 칼 바르트는 이것을 거부합니다. 인간에게 자연계시란 있을 수가 없다. 자연계시라는 것은 인간의 죄의 결과이다. 죄인이기에 구원받고자 하는 열망이 모이고 모여서 쌓이고 쌓여서 자연계시라는 것을 만들어내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특별계시는 무엇입니까? 자연계시가 있다면 특별계시가 있다는 것인데 특별계시는 무엇입니까? 성경책을 특별계시라고 합니다. 이것도 자기들이 지어낸 말입니다. 어디 성경책에 특별계시라는 말이 있습니까! 성경책을 특별계시라고 하는 것은 자연계시가 계시가 맞지만 다만 흐릿하기에 분명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분명한 것은 성경책을 보면 분명해지니까 자연계시와 특별계시를 합쳐서 계시라고 그들은 증거를 한 것입니다.
제가 이런 것에 대하여 시비를 걸었습니다. 어떤 식으로 시비를 걸었는가 하면, 이 책을 본 사람을 알 것인데 자연계시를 안다고 구원이 되는가 하는 것입니다. 구원의 능력이 자연계시를 알면 구원이 옵니까 안 옵니까? 그들에 의하면 온다고 해야 합니다. 또 특별계시인 성경을 보면 구원이 옵니까 안 옵니까? 그들의 경우에는 온다고 해야 합니다.
그러나 제가 알기로는 구원의 능력이 십자가에서 나옵니다. 십자가에서 나온다는 말은 십자가 지신 분이 내가 아닙니다. 예수님입니다. 그러니 구원의 능력은 예수님에게서만 나옵니다. 여러분은 그렇게 믿습니까? 아멘! 감사합니다. 그렇다면 내가 자연계시를 알고 성경을 백독하여도 이것이 구원의 능력이 안 된다면 왜 그것을 계시라고 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극장 간판보고 영화 다 본 것입니까? 우리가 성경을 보았다고 예수님에 대하여 압니까? 모르잖아요? 모릅니다. 우리가 부부사이에 자기 아내를 얼마나 압니까? 나는 압니다. 죄인이라는 것을 압니다. 사람이 상대방에 대하여 친분이 있다고 해서 얼마나 압니까? 몰라요! 모릅니다. 왜요? 상대방이 변하고 나도 변하기 때문입니다. 둘 다 변하기 때문에 모릅니다.
변하지 않고 일년쯤 멈추면 좀 알지 모르지만 둘 다 부지런히 변하는 것입니다. 좋았다가 싫었다가 좋았다가 싫었다가 변화무쌍합니다. 애들도 얼마나 변한다고요! 지금 저렇게 까불대고 왔다 갔다고 하지면 커서는 모릅니다. 엄마 나 안 그랬는데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비디오로 찍어 놓아야 정답이 됩니다. 얼마나 떠들었는지 본인은 모르고 다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종잡을 수 없는 것이 인간입니다. 붙잡을 수 없는 것이 인간입니다. 내가 예수를 믿는다고 하여도 이것이 믿을 것이 못됩니다. 현재 이것이 몇 시간을 갈지 모릅니다. 지금 비 오는데 돌아서서 바쁘고 하면 다 잊어버리는데, 예수님이 누구시더라? 예수님이 무슨 소용 있는가! 하는 식으로 다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목사님! 어떻게 해서 구원을 받습니까? 이렇게 고백되어야 구원받는 사람입니다. 내 능력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공로로 구원받습니다하는 고백이 솔직하게 나와져야 구원되는 것입니다. 내 능력이 아니고, 그렇다면 잘 들어보세요! 중요합니다. 그렇다면 그 능력은 소멸됩니까? 소멸되지 않습니까? 소멸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그 사람이 이혼을 하던 무엇을 하던 교회에 나와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 능력이 자기 능력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구원한 능력이 아닌 것입니다. 다시 말합니다. 내 능력으로 된다면 오늘 교회가거라! 안 간다! 이런 것을 내 능력으로 할 수가 있지요! 그런데 내 능력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누구 능력으로요? 예수님의 능력이라면 무엇이든지 은혜 아닙니까?
그러니 사람의 눈치보고 가고 말고 할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물론 바빠서 또는 차가 펑크 나서 못 오는 그런 경우는 있습니다. 그러면 할 수 없이 못 가는 것이지요! 그렇더라고 어디에 있든지 주님의 은혜를 놓치지 않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교회를 안 나옵니다. 그래서 전화를 하니 목사님 제가 어디에 있든지 주님의 은혜로 살지요! 그러면 됐습니다.
그런데 삐져서 안 나온다고 하면 그것은 아니지요! 그러면 지금까지 당신은 신앙생활을 어떻게 해온 것입니까? 정말 눈에 보이지 않는 분 앞에서 해 온 것이란 그 사람을 떠나지 않고 인도하십니다. 그렇다면 매사에 범사에 그 사람이 성질나서 예수님이 어디에 계시느냐고 한바탕 소리치더라도 본인의 속에 있는 능력은 본인이 속일 수가 없습니다.
비록 내가 이런 소리를 하더라도 주님의 은혜라는 사실을 본인만이 알고 다른 사람들은 모르는 것입니다. 이것은 남에게 이야기 해 줄 필요도 없고, 이야기 하면 이야기 해주지만 그것을 남에게 확증 받을 필요는 없는 것입니다. 본인이 알고 있으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당신의 조직신학을 배웠는데 그것으로 많은 사람들이 구원을 받았지요? 라고 하면 아닙니다. 조직신학으로 구원받은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착함으로? 아닙니다. 정성으로? 아닙니다. 그러면 누구라는 말입니까? 예수님의 십자가의 공로로 구원받았습니다. 라고 예수님을 증거 하는 사람이 될 때에 그 사람을 가지고 사도행전 1:8절에서 성령이 임하면 나의 증인이 될 것이라는 그 현상이 일어난 것입니다. 즉 예수님의 증인이 되는 것입니다.
약간만 더 하고 마치겠습니다. 한 이십분만 더하고 마치겠습니다. 안 쉬고 하였기에 조금만 더 참으세요! 양심에 대하여 그냥 넘어가면 안 됩니다. 양심은 신이 주신 형상이다. 인간이 착하다는 것은 하나님이 착하기 때문에 착하다고 하였는데 그렇다면 인간의 못된 것은 어디에서 나왔는가? 이것은 하나님 때문이 아니라 악마가 못되어서 그렇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두 얼굴을 가진 야누스처럼 인간에게는 두 얼굴이 있는데 하나는 천사의 얼굴이 있고 하나는 악마의 얼굴이 있다고 하는 이것이 모든 동화, 드라마, 영화, 우리가 통용하고 있는 상식에 이것이 푹 삶겼습니다. 이것은 옳고 그러고 가 아니라 마땅히 옳은 것으로 알고 모든 교육이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존 듀이의 교육입니다.
또 몬테소리라는 아줌마의 교육까지 모든 교육들이 양심에 호소해서 숨겨진 양심, 잠자는 양심, 잠재되어 있는 자신의 능력, 선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을 교사가 되어서 개발해 줌으로서 그 사람은 훌륭한 시민으로서 윤리적 도덕적 자질을 가진 자로서 인류와 사회와 교회에서 봉사할 수 있는 사람으로 변화할 수 있다는 그것입니다.
교도소에서도 교정하는 것이 그것이 아닙니까? 그 사람의 선한 양심을 개발해서 그 사람의 약한 양심을 죽이고 억제시키고 선한 양심은 개발시켜서 착한 사람으로 봉사하는 사람으로 만들자는 것입니다. 이런 목적이 불가능하다면 교육 자체가 불가능하게 되니 모든 교육이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기독교교육이 무엇입니까? 총신에 기독교교육학과가 있지요! 기독교교육이라는 것이 말이 되는 이야기 입니까? 무얼 어떻게 하겠다는 것입니까? 기독교교육으로 불신자를 신자로 만들겠다는 것입니까?
교육이론에 있어서 제일 근거가 되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 인간은 전적으로 타락한 것이 아니고 약간, 반쯤 타락하였는데 그것이 무엇 때문에 그렇게 되었는가 하면 환경 때문에 그렇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육학의 그 뿌리에 들어 가버리면 행동 심리학에 거기에 담겨 있습니다.
행동심리학이라는 것이 어디서 나왔습니까? 동물을 실험하는 것입니다. 동물의 심리를 연구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직접 연구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사람을 실험할 수 도 없고 동물처럼 다루려고 하려면 사람을 사야 하는데 너무 비싸게 먹히잖아요! 동물의 심리를 연구해서 동물을 길들이기 하는 것입니다.
���길들이기��� 이것이 중요합니다. 그동안 인간이 양심을 운운했고 선한 것을 운운한 것은 그 모든 목적이 무엇입니까? 그 시대의 체제상에 길들이기와 연관이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어디에 나와 있는가 하면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에 다 들어있습니다.
예를 들면 어떤 청년이 예수님을 따라 오는데 움찔한 것입니다. 왜 그런가 하였더니 우리 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장례를 치르고 따르면 안 됩니까? 이것이 일반적인 통념상 양심상 무엇이 문제입니까? 문제 됩니까 안 됩니까? 사람이 양심이 있어야지! 자기 아버지 죽었는데 매 몰라라 하고서 따라가면 안 되겠지요!
그런데 예수님은 뭐라고 하였습니까? 인간의 양심을 따라서 마땅히 장례 치르고 오라고 그렇게 말씀하셨습니까? 예수님은 도발적인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죽은 자는 죽은 자에게 맡겨두고 너는 나를 따라 오너라고 하셨습니다. 도대체 예수님은 이 세상을 어떻게 하시겠다는 것입니까?
또 마태복음 11장에서는 전도자의 모습이 나오는데, 내가 온 것은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싸우고, 아비와 자식과 싸우고, 형제간에 부부간에 싸우고, 화평케 함이 아니라 불화를 일으키려고 오셨다고 하십니다. 그 뒤에 보면 누구든지, 자 지금이 중요합니다. 중요하니 다짐을 합시다. 제가 지금 양심을 장려하는 것이 기독교 교육이고 하나님의 교회라고 보았지요!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을 들어보세요! 누구든지 살고자 하는 자는 죽을 것이요 누구든지 죽고자 하는 자는 살 것 이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것을 누가 어떻게 교육시키는 것입니까? 모든 사람들이 양심이니 천사니 악마니 하는 것들은 무엇을 하는 작당들이었습니까? 전부다 이 땅에서 살고자 하는 작당들입니다. 이 땅에 길들여져서 살고자하는 작당들입니다.
아버지 장례 안 치르고 따라 간다면 어떻게 될까요? 꼴좋다! 그동안 아버지가 자식을 길러 놓았는데 남보고 장례 치르라고 하고 자기는 예수 따라 다닌다고 예수라는 종교가 무엇인데 그것이 아버지 죽은 것보다 더 중요합니까? 예수가 자기 아버지 죽은 것보다 더 중요합니까?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 너의 아버지만이 아니라 너 보다 더 중요하다고 하셨습니다. 나 예수는 너의 목숨보다 더 중요하다고 하신 것입니다. 교육이라는 것은 딱 깨놓고 말해서 내가 나를 더 잘 살리고, 나를 더 예쁘게 만들고, 나를 더 참한 사람 만들기 위한 방법이 교육이 되는 것입니다.
선생님이 좋아서 교육하는 것이 아닙니다. 선생님이 예뻐서 피아노 배워주는 것이 아니고, 피아노 몰랐던 내가 피아노 칠 수 있는 향상된 나가 그리워서 레슨비 주어가면서 피아노 배우는 것입니다.
마지막 대목에 가서 화가 납니까? 안 납니까? 사람들이 그래 교육이 무엇이 나쁩니까? 무심코 내 뱉는 것입니다. 가르치고 배우라고 하였는데 교육에 대하여 시비 거는 사람 처음 보았네! 왜 교육해야 합니까? 아니 사람에게는 양심이 있기에 착한 양심은 장려하고 나쁜 양심은 죽이고 해야 그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옳지요! 하나님은 착한 분이시기에 그렇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착한 분이시라고요? 하나님은 우리를 죽이시는 분이십니다. 너는 죽어야 된다는 뜻으로 말씀하시는 분이 하나님입니다. 착하게 되라는 것이 아닙니다. 이 세상에서 제일 착한 사람이 누구입니까? 주여 저는 죄인입니다. 저는 죽어 마땅한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입니다. 누구입니까? 강도, 창기, 세리 이들이 누구보다 먼저 천국에 갑니까? 착한 교육 받은 바리새인보다 먼저 천국에 갔습니다.
자기 분수도 모르고 자기 수준도 모르면서 무슨 교육이라는 말이 나옵니까? 자신이 누구인지도 모르면서! 교회 오는 이유가 교육 받기 위하여 오면 안 됩니다. 엑스레이 찍기 위하여 나오는 것입니다. 자신의 모든 것을 드러내 놓고 양심이라는 이름으로 얼마나 자신의 품위를 도모하였는가? 그리고 그 품위가 돈 되는데 쓰이는 것입니다.
내가 손해 보는 곳에는 내 양심대로 안 삽니다. 미쳤다고 손해 보는 짓을 합니까? 다 나에게 도움 된다고 생각할 때에 양심을 동원시키는 것입니다. 사흘만 굶어보세요! 양심 같은 소리하고 있네! 사흘 굶었는데 무슨 양심이 있습니까? 먼저 자기 입안에 넣기 바쁩니다.
집안에서 식사할 때에 맛있는 갈치를 구워서 가운데 도톰한 부분 한 도막이 남았습니다. 그러면 삼촌 조카 부모 자식도 없습니다. 서로 집는 것입니다. 그것도 한두 번 해본 사람은 체면 지킨다고 좀 참지만 만약에 누가 안 먹는다고 하면 단번에 달려드는 것입니다.
인간이라고 하는 것은 아무리 위선적으로 양심과 이성과 예의 바름으로 치장을 하여도 근본적으로 욕동, 라이프니츠가 말하였는데 용어가 재미있지요! ���욕동��� 다르게 말하면 그냥 욕구입니다. 또는 충동이라고 합니다. 인간의 충동은 마치 화산과 같아서 아무리 고상한 품격으로 포장을 해 놓아도 마그마처럼 폭발해 버리는 것입니다.
남자들 직장생활 할 때에 점잔하지요! 그러나 직장 딱 마치고 1차 식사할 때까지 점잔하지요! 과장님과 함께 2차 노래방 가서 머리에 넥타이 메고 소주병에 숟가락 꼽고 노래할 때 품위가 어디에 있습니까? 한번 풀자고 왔는데 무슨 품위 같은 소리를 합니까? 거기에 아가씨까지 붙여놓으면 품위는 어느새 날아가 버린 것입니다.
서울 대 나왔느니 무슨 교육을 받았느니 하지만, 인간들의 근본적인 욕정이라고 하는 것은 다 살고자 하는 것입니다. 조금만 더 해봅시다. 중요한 것이니 자! 살고자 하는 것이 무엇이 나쁩니까? 살고 싶어서 사는데 예수 네가 왜 대들고 목사 네가 왜 시비 거는가? 살고 싶어서 사는데 무엇이 잘못 되었는가? 라고 할 때에 정답이 무엇입니까? 남에게 피해를 주는 것입니다.
너희들 때문에 얼마나 불편하지 너희들이 아느냐(애들이 떠들고 있음)? 이 애들은 살아야겠다는 것입니다. 맛있는 땅콩샌더를 먹고 살아야겠다는 것입니다. 맛있는 것이 동생 줄까? 그러면 화내는 것입니다. 이것이 아까 전에 말한 ���욕동��� 또는 욕심 욕구 아닙니까?
그런데 저런 샌더하나 사주기 위해서 부모는 남들 앞에서 양심을 속여가면서, 더러운 소리해가면서, 거짓말 해가면서 장사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 얼마 남지 않습니다. 그러면서도 남길 것은 다 남기는 것입니다. 그렇게 거짓말 해가면서 속여가면서 벌어가지고 땅콩샌더 하나 사주는 것입니다.
온 집안이 살려면 온전히 사기꾼이 되어야 합니다. 목사 집안이 살려면 목사가 교회에서 사기를 쳐야 합니다. 주님의 언약이야기 용서이야기하면 돈 한 푼도 안 됩니다. 그 정도입니다. 그 정도! 그러니 예수님께서 도사입니다. 한마디로 도사입니다. 인간에 대하여 모르는 것이 없습니다.
인간의 가장 중요한 엔진부분을 폭파한 것이 무엇인가 하면 살고자 하면 죽을 것이요 죽고자 하면, 그냥 죽으면 안 되고 예수님을 위하여 죽고자 하면 살리라! 끝입니다. 아무도 못 지킵니다. 어느 놈이 지킵니까? 베드로도 못 지키고 요한도 못 지킵니다. 결국은 그 예언대로 예수님 홀로 십자가 지시고 나머지는 다 도망가 버린 것입니다.
무엇하겠다고? 살겠다고! 베드로는 한수 더 떠서 칼을 빼들고 휘둘렀습니다. 예수님께서 도로 집어넣으라고 하셨습니다. 칼을 쓰는 자는 칼로 망한다고 하셨습니다. 아니 세상에서 칼을 쓰지 않으면 어떻게 자기를 방어한다는 것입니까?
그러니 제가 이야기하는 것은 방금 말한 대로 양심을 개발해서 착한 것은 장려하여 나쁜 짓은 완화 시켜서 바른 세계 만들어 올바른 하나님의 나라를 만든다고 그것이 교육이라고? 그 모든 교육은 전부다 살고자 하는 악마의 마음이 있어서 다 무산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소용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장 좋은 착함은 성령이 와서 주여! 내가 나 된 것은 주님의 은혜입니다. 내가 언제 죽고자 한 놈이었습니까? 내가 언제 주님을 위하여 살고자 마음이나 먹었겠습니까? 남을 이용하고 남을 등쳐먹어야 속이 시원한 인간입니다. 그런데 이런 인간을 구원하여 지금까지 살게 하신 것은 주님의 은혜입니다. 주님의 은총이 역사하셔서 그렇게 된 것입니다.
행여나 남에게 베풀어준 것이 있다면 내 능력이 아니고 내 욕심도 아니고 주께서 나로 하여금 그것을 시켜서 한 일일 뿐입니다. 주님의 의의 종으로서, 주님께서 시키신 것뿐이지 내가 잘나서 그 사람에게 무엇을 베풀어주고 하는 그럴 능력이 제게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영광은 주님께서 받으셔야 하고 모든 은혜는 주님께로부터 왔기에 저에게는 그럴 능력이 없습니다. 이렇게 주님을 증거 하는 사람이 성령이 함께 하는 사람의 특징입니다. 이것이 참된 계시입니다. 다른 계시는 없습니다.
이제 오늘 강의한 것을 총 정리 해봅시다.
제가 제일먼저 이야기 한 것이 역사와 묵시의 구별이었습니다. 역사는 눈에 보이는 것,
묵시는 눈에 뜨이지 않는 것이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오해하기를 역사를 뭉치면 그것이 신의 계시가 되는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역사라는 게 반복될 수 없는 것이고 다만 묵시의 결과로 나타난 것이 역사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묵시가 시키는 움직일 수밖에 없는데 두 가지가 나옵니다. 한쪽은 자기 의가 나오고 한 쪽은 예수님의 은혜와 공로를 아는 이 두 가지의 상반된 현상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같은 역사 속에서!
그러니 인간이라고 하는 것은 아무리 날고 뛰어보아야 묵시의 재료 묵시의 도구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것을 보여주면 이렇게 나와야 되고 이것을 보여주면 이렇게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은혜를 아는 사람은 착한 일을 해 놓고서 자꾸만 주의 은혜라고 하는가 하면 무엇을 알기 때문입니까? 십자가에서 다 이루신 결과에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자기 의는 십자가가 없기 때문에 내가 했잖아! 내가 공부해서 했잖아! 내가 장사해서 벌었잖아! 여기는 십자가가 없기 때문에 무엇이든지 자기 행동이 나오겠지요! 따라서 이 사람의 특징이 무엇인가 하면 자기 계시를 만들어서 나온 것이 자연계시입니다. 이 자연계시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착함과 정성(열심)으로 신의 세계를 뚫어보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무엇이라고 합니까? 인간의 어떤 행동도 구원의 능력이 아니라 이미 구원의 능력이 임하였기에, 이미 구원받았기에 내가 예수님의 능력을 아는 그런 것을 함께 공유하면서 살아가는 이런 특징입니다.
역사 속에서 이런 두 종류의 특징이 나타납니다. 이 둘 중에 여러분은 어느 쪽에 속하는 것입니까? 여러분 마음대로 하시기 바랍니다. 그것은 내가 알바가 아닙니다. 내가 안들 어떻게 하겠습니까? 내가 십자가를 지지도 않았기에 구원할 입장도 못되는 것입니다.
항상 우리들이 부족하고 죄인임에 불과하고 지금 살아있는 것이 예수님의 공로를 증거 하기 위하여 살아 있다는 것을 평생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