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양 여운형 선생 연보
1886년 5월 25일(음 4.22), 경기도 양평군 양서면 신원리 묘곡에서 태어남.
1894년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나자 일가족이 단양으로 피난감.
1896년 묘곡으로 일가족 돌아옴.
1899년 용인 출신 유세영의 장녀와 결혼.
1900년 배재학당 입학.
1901년 흥화학교로 전학.
1903년 9월 할아버지 여규신 별세. 10월 첫 아내 유씨 별세.
흥화학교 중퇴, 통신원 부속 우무학당 입학.
1905년 4월 일제 통신사업권 탈취, 10월 어머니 경주 이씨 별세.
11월 을사늑약 체결 후 은사 민영환 자결. 양평에서 애국 연설 순회.
일제의 관료가 될 수 없다는 이유로 우무국 기술관 채용 거절,
충주 출신 삼척 진(陳)씨의 딸 상하(相夏)와 재혼.
1906년 4월 아버지 여정현 별세. 농사를 지으며 사서삼경 독학.
1907년 기독교 입교, 양평 자신의 집에 기독 사립학교 광동학교 설립.
양평에서 단연국채보상운동을 벌임.
1908년 서울 승동교회 오가며 애국계몽인사들과 교류 시작. 안창호의 시국강연에 감명 받음.
4월, 부친 3년 상 마친 후, 조상 신주를 묻고, 상투를 자르고, 집안의 노비를 해방시킴.
가을, 동생 운홍과 서울 동대문 밖 창신동으로 이사,
승동교회 클라크(C.H.Clark) 목사의 조수로 활동 시작.
1910년 강릉 초당의숙의 교사로 초빙돼 선비들 계몽교육 전념.
8월22일, 한일병탄조약 체결.
1911년 여름, 일제가 불온사상 교육 이유로 초당의숙 폐교하고 여운형을 강릉에서 쫒아냄.
금강산과 양평을 거쳐 서울 승동교회로 복귀. 설교 및 전도활동.
황성YMCA 운동부장으로서 청년운동 전개.
1912년 가을, 황성YMCA 야구단장으로서 팀을 이끌고 일본 도쿄 원정(최초의 해외 원정 경기)
11월, 평양의 장로교 신학교 입학 (2년간 수학)
1913년 중국 망명을 결심하고 서간도 신흥학교 등 답사
1914년 겨울, 중국 망명. 난징(南京) 진링(金陵)대학 영문과 입학
1915년 상하이를 오가며 예관 신규식 선생이 만든 동제사 참여
1916년 상하이 거주 동포 자녀들 교육을 위해 '상해 기독교 소학교'(이후 인성학교) 설립
1917년 상하이로 이주, 기독교 계통 서점에 취직. 동포 청년들의 구미 유학과 도항 절차 알선.
중국지도자 쑨원을 처음 만남. 이후 동지적 관계 유지.
1918년 상하이 고려민 친목회 조직 후 총무로 활동. 신한청년당 조직하고 당수 취임.
‘조선독립에 관한 진정서’를 작성해 미국 윌슨 대통령의 특사 크레인(C. Crane)과
상하이 <밀라드 리뷰> 신문사 사장에게 전달.
1919년 1~3월, 신한청년당 대표로 김규식을 파리강화회의에 파견. 신한청년당 당원들은 국내,
일본, 연해주, 만주 등에 잠입해 파리강화회의 대표 파견 사실을 전하고, 필요자금 마련과
대규모 독립선언 운동 조직. 도쿄 2.8선언과 3.1운동으로 이어짐. 여운형은 간도․시베리아
방면을 맡아 활동하다 3월 중순 상하이로 귀환.
4월,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
5월, 중국 5.4운동 지원활동.
11월, 일본 총리의 초청으로 도쿄를 방문, 고위각료들과의 수차례 회담과 제국호텔에서
의 연설을 통해 조선독립의 정당성을 주장.
12월, 상하이 귀환. <독립신문> 등에 일본에서의 활약이 대서특필됨.
1920년 고려공산당 참여. 마르크스의 <공산당 선언> 등 번역.
미국 하원의원 100여명과 각국 대사들에게 조선 독립 당위성 연설.
1921년 한중호조사 - 여운형은 부의장. 마오쩌뚱(毛澤東)도 참여 - 를 조직해
조선독립과 중국혁명의 연대활동 추진.
한중호조사는 이후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중국을 전전할 때 큰 도움을 줌.
1922년 1월, 모스크바에서 열린 원동피압박민족대회 참석. 개회식 연설.
레닌과 조선독립 문제 등을 논의. 트로츠키를 만남. 4월 상하이 귀환.
10월, 상하이에서 김구 등과 함께 한인노병회를 조직해 병사 양성과 군비조달에 힘씀.
1923년 안창호 등과 ‘국민대표대회’를 열고, 임시정부의 개조를 위해 노력.
1924년 상하이 사립 동방대학 영어강사 취직. 중국 국민당 가입, 공산당이 특별회원 자격 부여.
1925년 소련의 공식 통신사인 타스통신의 상하이 지부에 취직.
중국 1차 국공합작의 핵심인물로서 중국 혁명에 적극적 참여.
1926년 1월, 중국국민당 제2차 전국대표대회 참가해 축하 연설. 중국 장제스(蔣介石), 마오쩌뚱,
베트남의 호치민(胡志明) 등도 참석.
11월, 국민혁명군의 우한(武漢)점령 축하대회에서 20만 군중 앞에서 내빈으로 축사.
1927년 장제스의 공산당 숙청으로 1차 국공합작 결렬. 여운형 처형 위기 모면.
1928년 중국혁명운동 실패 후 상하이 후단(復旦)대학 체육코치로 취직.
1929년 후단대학 축구팀 이끌고 동남아시아 원정 다니며, 영국과 미국의 식민정책 성토 연설.
7월, 상하이에서 일본경찰에게 체포돼 서울로 압송.
1930년 6월9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3년 판결.
1932년 7월26일, 가출옥으로 석방
1933년 2월16일, <조선중앙일보> 사장으로 취임.
1935년 충남 아산 충무공 이순신 묘소 재건 추진.
백범 김구의 어머니와 아들 형제의 상하이 탈출을 도와줌.
1936년 <조선중앙일보>,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우승한 손기정 선수 일장기 말소사건 최초 보도.
이 사건으로 <조선중앙일보> 폐간.
1937년 일본군의 중국 침공으로 중일전쟁 발발.
1938년 일제와 친일변절자들의 전쟁 협조 요구를 거절.
1940년 창씨개명 반대. 일본 군부 요청으로 도쿄 방문(이후 1942년까지 5차례), 체류하며 세계정
세 포착하고, 애국학생을 규합.
1942년 도쿄에서 미군의 폭격을 목격. 일본 패전을 예견. 치안대 조직 준비.
12월, ‘유언비어 유포혐의’로 체포, 재차 투옥됨.
1943년 7월, 3년 집행유예 판결로 출옥.
출옥 후 경성요양원에 입원, 비밀리에 ‘조선민족해방연맹’ 조직 준비 돌입.
11월, 일제의 학병지원 연설, 대동아 전쟁 강연회 강요 등을 거절. 일본인 기자의 날조로
<경성일보>에 학병권유 담화 실림.
1944년 8월, 전국적 조직인 ‘조선건국동맹’ 조직해 해방 후의 건국을 준비.
10월, 양평 용문산에서 ‘농민동맹’ 조직.
1945년 8월6일, 9일, 미군이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탄 투하.
8월15일, 해방. 조선총독부에게서 치안권 넘겨받음. 건국준비위원회 결성(위원장 여운형).
보름 여 만에 전국에 140여개 지부 결성.
8월18일, 9월7일, 2차례 테러로 약 한 달간 요양.
9월8일, 미군 상륙. 한반도 38선 이남 점령. 군정 시작.
연말, 모스크바 3상회의의 내용이 ‘신탁통치 실시 결정’으로 국내에 왜곡 보도되면서 신탁
통치 찬반논쟁 촉발됨. 국론이 극심하게 분열된 가운데, 여운형은 임시독립정부 수립은
3상회의 결정 지지로만 가능하다고 결론 내림.
1946년 좌우합작위원회 구성, 5차례의 38선 이북 방문 등의 활동을 하며, 한민족의 자주독립 통일
정부를 세우기 위한 좌우합작․남북연합 운동에 전력을 쏟음.
1947년 7월19일, 해방 후 12번째 테러인 권총 피격으로 혜화동 로터리에서 62세를 일기로 서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