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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장 영사정의 位置와 地名由來 1. 고촌면(高村面) 신곡리(新谷里) 2. 영사정(永思亭) 3. 천등[五龍齋] 4. 南原 尹氏家의 김포정착
제1장 영사정의 위치와 지명유래 1. 고촌면 신곡리(高村面 新谷里) 김포시 고촌면은 고란태면(高欄台面)의『高』임촌면의『村』을 합칭(合稱)한 것이다. 「고란태면」은 고산자(古山子)김정호(金正浩)가 편찬한 대동지지(大東地志)에는 「高亂台面」으로, 조선후기지방지도(朝鮮後期地方地圖)에는 「高蘭台面」으로 표시하여 한자가 다르고 김포군에서 만든「김포군」誌에는 「高欄台面」으로 표시하였다. 옛 「고란태면」의 면소재지는 향산리(香山里)였고 천등고개 북편과 서남쪽 일대의 香山 閑基 楓谷 薪洞 梨花 太里 踆山 新村의 8개 동리를 관할구역으로 하고 있었다. 고란태면의 ‘고란태’는 ‘골안터’가 변천한 것을 의미가 좋은 한자로 표기한 지명인 것으로 추정된다. 임촌면(林村面)의 글자 풀이로는 ‘숲 고을’의 뜻이지만 이 일대는 ‘숲 고을’이라 할 만큼 큰 산이 없으므로 훈(訓)으로 표기 한 지명은 아닌 듯하다. 김포군지에 따르면 예전 검포현(黔浦縣)시절에 고을의 현치소재(縣治所在)가 은행정(銀杏亭)마을이었다고 했는데 이를 근거로 ‘임촌(林村)’은 곧 임고을[主邑]이 되고 ‘수령이 있는 고을’이란 의미를 찾을 수 있다. 新谷 水基 錢湖 坪里를 관할구역으로 하였었다. 현재 고촌면(高村面)은 1914년 군면 폐합에 따라 「고란태면」과 「임촌면」의 동리를 병합하여 고란태, 임촌의 2면의 이름을 따서 고촌면이라 하였고 향산 풍곡 신곡 전호의 5개리로 개편 관할하였다. -「金浦郡」김포군 지명유래- 신곡리(新谷里)는 본래 김포군 임촌면의 지역으로 섶이 많은 골짜기이므로 섶굴, 석골 또는 「薪谷」이라 하였 는 데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新谷里」라 하여 고촌면에 편입되었다. 인조 때 남양부사(南陽府使)를 지내고 병자호란 때 절사(節死)한 충간공(忠簡公) 윤 계(尹棨)가 살았다. 윤 계의 호가 신곡(薪谷)이며 「신곡」이라는 마을 이름도 그의 號에서 따온 것이라 한다. 그의 묘는 영사정 서북쪽 남원윤씨 묘역에 있다. -「金浦郡」김포군 지명유래-
2. 영사정(永思亭) 김포반도의 동쪽을 가로지르는 해안도로가 시작되는 지점인 「신곡 양수장」에서 길 건너 바라보이는 해발 30미터 야산의 동쪽 기슭에 남원윤씨 九世孫 증 좌승지(贈左承旨)윤 은(尹訔)과 그 직계 후손들의 묘가 자리 잡고 있는 데 이곳을 『南原尹氏永思亭墓域』 약칭으로「永思亭」이라 이른다. 「영사정」에는 윤 은의 후손 중 나라에 공헌한 이가 많이 묻혔지만 절신(節臣)윤 결(尹潔) 윤 섬(尹暹) 윤 계(尹棨) 윤 집(尹集/ 숙종 때 이장함)의 묘가 있어 나라의 보살핌이 더욱 많았다.
朝鮮王朝實錄등에 나타난 기록을 살펴보면, 「윤 섬(尹暹) 윤 계(尹棨)의 묘소 등에 치제할 것을 명하다」 김포군(金浦郡)에 있는 증(贈) 영의정 윤 섬(尹暹)· 증 판서(判書) 윤 계(尹棨)의 묘소에 예관(禮官)을 보내어 치제(致祭)하라고 명하였다. 또 몸소 제문(祭文)을 짓고 묘소에 근시(近侍)를 보내어 치제하게 하였다. -朝鮮王朝實錄:영조10년1734 甲寅 9월 15일- 병조 판서 홍봉한(洪鳳漢)이 아뢰기를, “고(故) 학사(學士) 윤 집(尹集)의 조부 윤 섬(尹暹)은 임진년(1592/선조25)에 순절(殉節)하였고, 윤집은 또 병자년(1636/인조14년)에 순절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후손이 궁핍하여 살 수 없게 되자 그 집을 팔아 해동(解凍)한 뒤에는 헐리게 되어 있는데, 명년은 곧 윤 집(尹集)이 순절한 해(丙子 1756/영조32년) 입니다. 마땅히 당(唐)나라 태종(太宗)이 위징(魏徵/당 태종의 명신)의 옛집을 속환(贖還)한 일에 의하여 조가(朝家)에서 속환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충절(忠節)을 기리는 도리에 있어 어찌 그 값의 다과를 논하겠는가?”하고, 이어 호조(戶曹)에서 그 집을 속환하고, 봉사손(奉祀孫)을 수령(守令)으로 조용(調用)하라고 명하였다. -朝鮮王朝實錄:영조 31년1755 乙亥 12월 17일- 정조(正祖)가 장릉(章陵)을 참배하러 가던 중 개화리(開花里)에 당도해 「저 멀리 경치 좋은 곳의 묘가 누구의 묘인가」 물으니 신하가 「남원 윤 은의 묘라」 하니 「경치가 아름다워 영원히 생각 나겠다」하며 영사정(永思亭)이라 이름을 내려 영사정(永思亭)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金浦郡」김포군 지명유래- 또한 正祖實錄에 의하면 1797년(정조21)8월15일 장릉(章陵)으로 참배하러가던 길에 왕께서 영사정(永思亭)에 이르러서 “정헌공(貞憲公) 윤우신(尹又新), 문열공(文烈公) 윤 섬(尹暹), 충강공(忠康公) 윤형갑(尹衡甲), 충간공(忠簡公) 윤 계(尹棨)는 한 가문의 충절을 지닌 인물들로 늘 상 흠모하였다. 이제 그 묘소를 지나게 되었는데 어찌 뜻을 보이는 일이 없을 수 있겠는가. 선조(先朝) 갑인년(甲寅年/1755)의 고사(故事)에 따라 치제하라.”하고 다음과 같은 치제문(致祭文)을 손수지어 하사 하였다. 저 그윽한 언덕이여 / 彼窈窕原 울연히 아름다운 광채가 있으니 / 蔚有休光 충성이 지극한 신하의 / 曰有忠藎 유해가 여기에 묻혔네 / 衣履是藏 정헌공의 강직함이여 / 貞憲侃侃 : 註) 尹又新 패옥(佩玉)이 아름답게 울렸는데 / 玉珮璆鏘 말고삐를 잡고 달리니 / 執靮于邁 저 멀리 서쪽 강토였네 / 逖矣西疆 과감 하였도다 어진 아들이여 / 果哉賢胤 지닌 덕이 강직하고 방정하였으니 / 秉德剛方 절의는 송균에 비기겠고 / 節譬松筠 공로는 기상에 실렸다네 / 功載旂常 : 註)尹暹 또 뒤를 이어 능히 선대를 닮은 이로 / 有承克肖 참으로 충강공이 있었으니 / 展也忠康 : 註)尹衡甲 그 손자에 이르러 / 施及厥孫 혁혁한 남양 부사(南陽府使)가 있었네 / 有奕南陽 : 註) 尹棨 아름다운 사대가 / 式美四世 화락하게 한 언덕에 묻혔으니 / 於樂一岡 어둡지 않은 영령들에게 / 不沬者靈 이 제문을 바치네 / 矢此侑章. -弘齋全書- 치제문(致祭文)은 홍재전서(弘齋全書)에 수록되어 있으며 문열공(文烈公) 윤 섬(尹暹), 충간공(忠簡公) 윤 계(尹棨), 충정공(忠貞公) 윤 집(尹集)은 모두 특별 하교를 인하여 조천(祧遷)하지 않도록 하였다. 「충간공과 충정공을 아들로 두고 문열공을 아비로 두어 계축년에 절개를 지키고 무오년에 의리에 나아가 진실로 이른바 그 아비에 그 아들이라 할 수 있었던 자는 고 통정(通政) 윤형갑(尹衡甲)이 그 사람이다. 똑같이 조천(祧遷)하지 말도록 하라」는 下敎도 홍재전서에 수록되어 있다. 대사헌(大司憲) 이단하(李端夏)가 말하기를, 「신이 경기 감사(京畿監司)로 대죄(待罪)하고 있을 때 김포(金浦)를 지나가는데 길옆에 윤씨(尹氏)의 분산(墳山)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윤 섬(尹暹)은 임진년(1592)에 사절(死節)하였고, 그 손자인 고(故) 부사(府使) 윤 계(尹棨)는 병자년(1636)에 사절(死節)하였으며, 윤 계의 아우 윤 집(尹集)은 지금 사우(祠宇)를 세울 것을 의논하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윤집의 아우인 진사(進士) 윤 유(尹柔)도 또한 효행(孝行)이 있어서 장령(掌令)을 추증(追贈)하였고, 그 방친(旁親)인 윤 결(尹潔)도 또한 강직(剛直)하기 때문에 간신(奸臣) 진복창(陳復昌)에게 구살(構殺)당하였습니다. 충성(忠誠)·절개(節介)·행실(行實)·의리(義理)의 5인의 묘(墓)가 같이 한 산에 있는데, 묘지기[墓奴]가 호역(戶役)에 침해(侵害)받아 보존(保存)하지 못하며, 땔나무를 하고 방목(放牧)하는 것을 금지(禁止)함도 없으니, 그 묘지를 특별히 복호(復戶)하여 수호(守護)하게 하는 것이 실로 포장(褒奬)하고 진휼하는 은전(恩典)에 합당 합니다」 하였는데, 김수항·이상진이 모두 옳게 여기니, 임금이 명하여 묘지기 2인을 특별히 복호(復戶)하여 군역(軍役)을 면해 주어 영구히 수호(守護)하게 하였다 -朝鮮王朝實錄:숙종 7년1681 丁亥 2월 3일-
영사정에는 입향조 윤 은(尹訔) 이외에 아들 사형제 중 尹時英(광주목사), 尹時豪(전적), 尹時傑(정랑)등 文科에 등과한 3형제의 墓가 있고, 손자 尹 淸(현감) 尹 澄(증 영의정) 尹 湜(증 영의정) 尹 潔(수찬), 증손 尹自新(판서/증 영의정, 호성공신) 尹又新(증 좌찬성), 현손 尹 暹(증 영의정/광국공신) 尹耆獻(漢城府左尹) 5대손 尹衡甲(현감/증 판서), 6대손 尹 棨(南陽府使/ 증 판서) 尹 柔(증 장령) 7대손 尹以健(진산군수) 11대손 尹行恁(증 영의정)의 묘가 있다.
정자가 있던 자리는 경작지로 이용되고 있으며 터의 위치와 유래를 적은 석비만이 세워져있다.(경기도 건립). 비석 뒤쪽은 철조망이 쳐져있고 출입이 금지되어 있다. 조선 正祖朝에 이조판서를 지낸 「남원윤행임」이正祖로부터「永思亭」이 라는 정자 이름을 하사받았다고 적혀있다.
영사정의 위치와지명유례
3. 천등(天登/오룡재)
동네 뒷산에 천등이라는 고개가 있어 ‘천등(天登)’이라고 했다는 말이 전하고 있다. 일설에는 ‘하늘을 오르는 것같이 높다’는 설과 ‘고개가 험해서 도둑이 많아 천명 이상의 사람이 모여서 집단으로 고개를 넘어야 화를 면할 수 있다’는 뜻에서 ‘천등고개’라 했다고도 한다. 조선시대 철종(哲宗/강화도령)이 등극하러 한양으로 가실 때 이 고개에서 한양을 바라보며 한양에서 마중 나오지 않는 것을 꾸짖어 가는 행차를 멈추게 하고 천둥 같은 호령을 하여 ‘천둥고개’라 했다는 말이 전하기도 한다. 천등에는 영사정의 윤 은(尹訔)의 증손 증참판 윤민신(尹民新)의 묘역이 위치하는 곳이다. 천등일대는 장차(長釵)마을을 중심으로 확장된 마을로 남원윤씨가 1500년대 말부터 세거해온 지역이며 윤민신(尹民新)의 아들 五兄弟가 모두 등과하여 오자등과(五子登科)를 이룩한 사적이 있는 곳으로써 六父子의 묘가 있고 김포시 鄕土遺蹟 제11호 「남원윤씨오룡골유적」으로 지정 된 곳이다. 천등고개를 오르면서 왼편에 위치한 오룡골(현재 현대아파트)은 윤민신의 오자등과사적(五子登科事蹟)에 연유하여 생긴 이름이라는 말이 있다. 이곳을 五龍齋라고 칭하며 영사정(永思亭)과 오룡재(五龍齋)는 김포 남원윤씨유적의 양축(兩軸)으로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4. 南原 尹氏家의 金浦定着 경기도 김포시 고촌면 신곡7리에는 남원윤씨의 선영(先塋/ 永思亭)이 있다. 이곳에는 남원윤씨 九世孫으로 군자감 판관을 역임하고 좌승지에 추증(追贈)된 윤 은(尹訔)과 문과에 등과한 세 아들, 윤시영(尹時英/광주목사), 윤시호(尹時豪/전적), 윤시걸(尹時傑/정랑)과 손자 내자시판관(內資寺判官) 윤 청(尹淸) 증 영의정(領議政) 윤 징(尹澄) 증 영의정(領議政) 윤 식(尹湜) 증 부제학(副提學) 윤 결(尹潔)과 증손(曾孫) 증 영의정(領議政) 윤자신(尹自新) 증 좌찬성(左贊成) 윤우신(尹又新)의 묘가 있다. 현손 임란절신(壬亂節臣) 광국공신(光國功臣) 증 영의정(領議政) 윤 섬(尹暹), 6대손 호란절신(胡亂節臣) 남양부사 증 판서(判書) 윤 계(尹棨) 11대손 대제학(大提學) 증 영의정(領議政) 윤행임(尹行恁)의 묘 등 남원윤씨의 많은 묘가 이곳에 있다. 남원윤씨가 김포 고촌 신곡에 살기 시작한 것은 九世孫 증 좌승지 윤 은(尹訔)의 묘를 이곳에 쓴 후부터 묘지봉사(墓地奉祀)를 위해 터 잡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윤 은의 아버지 윤지득(尹之得)은 고려 공조전서(工曹典書) 기면(奇勉)의 딸과 결혼하였으나 조졸(早卒)하였다. 행주 기씨(奇氏)가 자신의 친정 장산(葬山)에 남편의 묘를 이장함으로써 처가의 선영인 현재 경기도 고양시 성사동에 유택(幽宅)을 마련하여 현재에 이르렀고 「南原尹氏家」에서는 윤지득의 유택이 명당(明堂)이었으므로 이후 많은 자손들이 귀하게 됨을 얻었다고 전한다. 아버지 윤지득의 묘가 외가(外家) 선영인 고양시 성사동에 정해지면서 윤 은(尹訔)은 아버지 묘와 가까운 김포 신곡의 영사정(永思亭)으로 들어온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윤 은(尹訔)이 아버지의 묘역봉사(墓域奉祀)를 위해 생전에 김포로 들어왔는지 아니면 윤 은(尹訔)역시 사후에 묘소를 이곳 김포로 정하면서 후손들이 정착하게 된 것인지는 정확하지 않다. 어찌되었든 윤 은(尹訔)의 사후[1528년]에 후손들이 김포 신곡(新谷)에 영사정(永思亭)과 천등(天登)과 같은 선영을 마련하고 세거(世居)한 것은 확실하다. 윤 은(尹訔)이 태어난 1447년 (世宗29 丁卯) 이후 약 550년이 지난 서기 2000년 발간된 「南原尹氏判官公派譜」의 수단(收單)에 의하면 윤은(尹訔)의 후손은 약 1만여 명으로 집계 되었다. 이것은 수단(收單)에 응한 종원의 숫자이므로 실제로는 그 숫자가 훨씬 많을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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