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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아일보 추운 바람을 신으로 모신 자들의 經典 [ 이은규 ] 어느 날부터 그들은 바람을 신으로 여기게 되었다 바람은 형상을 거부하므로 우상이 아니다 떠도는 피의 이름, 유목 그 이름에는 바람을 찢고 날아야 하는 새의 고단한 깃털 하나가 흩날리고 있을 것 같다 유목민이 되지 못한 그는 작은 침대를 초원으로 생각했는지 모른다 건기의 초원에 바람만이 자라고 있는 것처럼 그의 생은 건기를 맞아 바람 맞는 일이 혹은 바람을 동경하는 일이, 일이 될 참이었다 피가 흐른다는 것은 불구의 기억들이 몸 안의 길을 따라 떠돈다는 것 이미 유목의 피는 멈출 수 없다는 끝을 가진다 오늘밤도 베개를 베지 않고 잠이 든 그 유목민들은 멀리서의 말발굽 소리를 듣기 위해 잠을 잘 때도 땅에 귀를 댄 채로 잠이 든다지 생각난 듯 바람의 목소리만 길게 울린다지 말발굽 소리는 길 위에 잠시 머무는 집마저 허물고 말겠다는 불편한 소식을 싣고 온다지 그러나 침대위의 영혼에게 종종 닿는 소식이란 불편이 끝내 불구의 기억이 되었다는 몹쓸 예감의 확인일 때가 많았다 밤, 추운 바람을 신으로 모신 자들의 經典은 바람의 낮은 목소리만이 읊을 수 있다 동경하는 것을 닮아갈 때 피는 그 쪽으로 흐르고 그 쪽으로 떠돈다
■ 전남일보 대동여지도 [조다윗 ] 1. 내 영혼이 어느 산천 물줄기의 방점이라면 그 더딘 물소리가 끝없는 방물장수의 노래여도 좋겠다. 까마득한 옛 생각, 지도 하나를 그리는 밤, 고요의 헤진 발자국을 따라 걷다보면 어찌,들이고 산이고 섬인지 헤아릴 수 있을 까마는 능선과 능선이 만나는 무등산엔 소리그림자 짙다. 평야와 평야가 나란히 도사리는 푸른 꿈도 젖는다. 지칠 줄 모르고 다가갈 것만 같은 어지간히 어지러운 삶 예견이라도 하는 듯이, 휘감고 되돌아가야 할 그 길 꼭 잊지 말란 듯이 그래도 살별처럼 떨고 있는 간이역을 처연(凄然)의 뒤안길에서 기다리고 있다. 2. '그 끝이 어느 경계 하나 끊고 살았으면 참 좋겠다.'라고, 생 각하던 밤은 이토록 깊은 적막이다. 마치, 어머니의 가랑이처럼 길고 긴 포옹이다. 내 시의 근원지를 아직 잘 알지 못하겠으나, 늘 부려먹고 싶었던 어머니의 이름 대신 할미 가슴에 텃밭 한 평 가꾸던 이유가 옛 지도의 성지처럼 신성함을 알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아주 잠시 내 마음 속에도 초록의 활기가 꽃을 피우던 날, '모든 길은 다시 하나의 길로 마주본다.'고 여우비가 산 자와 죽은 자와 떠나간 자의 갈림길에서 등고선을 깊게 새겨두었다.
■ 매일신문 파문 [ 이장근 ] 결혼을 코앞에 두고 여자는 한강에 투신했다 이유를 묻지 않았다, 물은 여자를 결과로만 받아들였다 파문을 일으키며 열리고 닫히는 문 물은 떨어진 곳에 과녁을 만든다 어디에 떨어져도 적중이고 무엇이 떨어져도 적중이다 투신한 죽음도 다시 떠오른 삶도 물은 과녁을 만들어 적중을 알렸다 적중을 알리며 너는 왔다 온몸에 파문처럼 돋던 소름 빗나간 너의 말도 떨어지는 족족 적중했다 사랑처럼 민감한 것이 또 있으랴 이유 없이 떠나도 결과는 적중이었다 이유 없이 너는 가고 나는 안개 같은 거짓말로 너를 미워했다, 그리워했다, 지웠다, 썼다 사랑처럼 가벼운 것이 또 있으랴 구름이 되어 제멋대로 문장을 만들다 지치면 낱글자가 되어 떨어졌다 지금도 비가 온다 몸에 소름이 돋는다 네가 오고 있는 것이다 이 밤 이 세상에는 또 얼마나 많은 사랑이 투신할 것인가, 투신하는 족족 파문을 일으키며 적중할 것인가
■ 조선일보 티셔츠에 목을 넣을 때 생각한다 [ 유희경 ] 1. 티셔츠에 목을 넣을 때 생각한다 이 안은 비좁고 나는 당신을 모른다 식탁 위에 고지서가 몇 장 놓여 있다 어머니는 자신의 뒷모습을 설거지하고 있는 것이다 한 쪽 부엌 벽에는 내가 장식되어 있다 플라타너스 잎맥이 쪼그라드는 아침 나는 나로부터 날카롭다 서너 토막이 난다 이런 것을 너덜거린다고 말할 수 있을까 2. 티셔츠에 목을 넣을 때 생각한다 면도를 하다가 그저께 벤 자리를 또 베였고 아무리 닦아도 몸에선 털이 자란다 타일은 오래되면 사람의 색을 닮는 구나 베란다에 앉아 담배를 피우는 삼촌은 두꺼운 국어사전을 닮았다 얇은 페이지가 빠르게 넘어간다 뒷문이 지워졌다 당신이 찾아올 곳이 없어졌다 3. 티셔츠에 목을 넣을 때 생각한다 간 밤 당신 꿈을 꾼 덕분에 가슴 바깥으로 비죽하게 간판이 하나 걸려진다 때 절은 마룻바닥에선 못이 녹슨 머리를 박는 소리 아버지를 한 벌의 수저와 묻었다 내가 토닥토닥 두들기는 춥지 않은 당신의 무덤 먼지들의 하얀 뒤꿈치가 사각거린다
■ 한라일보 오월의 잠 [ 김은실 ] 황사를 빠져나오자 나의 행방은 나무들의 습성을 닮아간다 뒤를 돌아보면 오롯이 되살아나는 잎새들의 발자국 기린처럼 도시를 넘겨보거나 하루의 마지막 햇살들을 꿈인듯 곱씹어간다 사막이 될 사랑과 목마름 하나로 건너야 할 기억의 행방을 찾아내는 것 나무들의 소문이 심상치 않다 뿌리째 뒤적여도 좀처럼 줄어들지 않는 해묵은 반란들, 나이테들의 구석에 처박혀 잠이 들거나 이루어지지 않을 불면의 등성이들을 오르내린다 숨이 가빠지고 발목이 푸르러진다 누군가 적어놓은 유서들의 단서를 찾는 동안 문맹의 슬픔이 불어온다 심장의 한 켠에 푸른 병조각이 들어차고 이 도시에선 어떤 나무이든 술의 날들을 깨뜨리지 않으면 조금씩의 간격도 좁혀지지 않는 것이다 황사를 빠져나오자 나의 의문들은 나무들의 틈바구니에 묶인다 어제의 위치와 잎들의 수런거림이 나를 가둔 채 숲 저쪽으로 사라진다 오후의 통화와 몇 개의 망각이 푸른 위궤양을 앓는다 기린처럼 목을 늘려도 좀처럼 줄어들지 않는 오월의 잠들, 계단을 타고 오르는 몇 개의 잎새들을 상상하면서 나는 누군가 녹이다 만 박하사탕같은 사랑을 되짚어간다
■ 영남일보 나무는 나뭇잎 속으로 걸어 들어가고 [ 조혜정 ] 처음 찍은 발자국이 길이 되는 때 말의 반죽은 말랑말랑 할 것이다 나무는 나뭇잎 속으로 걸어 들어가고 쏙독새는 온몸으로 쏙독새일 것이다 아랫도리를 겨우 가린 여자와 남자가 신석기의 한 화덕에 처음 올려놓았던 말. 발가벗은 말. 얼굴을 가린 말. 빵처럼 향기롭게 부풀어 오른 말. 넘치고 끓어오르는 말. 버캐 앉는 말. 빗살무늬 허공에 암각된 말. 처음 만난 노을을 허리띠처럼 차고 만 년 전 바람이 만 년 전 숲에서 불어온다 뒤돌아보는 여자의 열린 치맛단 아래 한번도 씻지 않은 말의 비린내 훅 끼쳐온다 여자가 후후 부풀린 불씨가 쏙독새 울음소리에 옮겨 붙는다 화덕 앞에 쪼그린 아이들 뜨겁게 반죽한새소리를 공깃돌처럼 굴리며 논다 진흙 같은 노을 속에 층층 켜켜 찍히는 손가락 자국들, 귀먹은 아이는 자꾸 흩어지는 소리를 뭉치고 굴린다 깊고 먼 어둠을 길어 올려 둥글게 반죽한다 천 개의 나뭇잎들이 천 개의 귀를 붙잡고 흔드는 소리, 목구멍 속에서 쏙독새 울음소리가 허공을 물고 터져나온다 바람이 석류나무 아래서 거친 숨결을 고르자 처음부터 거기 살고 있는, 아직도 증발하지 않은 침묵의 긁힌 알몸이 보인다 나무는 나뭇잎 속으로 걸어 들어가고 쏙독새는 온몸으로 쏙독새인 그 길이 보인다
■ 부산일보 예의 [ 조연미 ] 손바닥으로 찬찬히 방을 쓸어본다 어머니가 자식의 찬 바닥을 염려하듯 옆집 여자가 울던 새벽 고르지 못한 그녀의 마음자리에 귀 대고 바닥에 눕는다 누군가는 화장실 물을 내리고 누군가는 목이 마른지 방문을 연다 무심무심 조용하지만 숨길 수 없는 것들을 예의처럼 모르는 척 하는 일상 아니다, 아니다 그러나 아니더라도 어쩔 수 없다 몸의 뜨거움으로 어느 귀퉁이의 빙하가 녹는지 창 너머에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또 잊혀지는 것들이 생기는 것이다 뻔하고 흔한 세상의 신파들 사이를 질주하며 이번에는 흥청망청 살고 싶어요 소리치며 눈은 내리고 가지런히 슬픔을 조율하며 우는 벽 너머의 당신 찬 바닥에 기대어 누군가의 슬픔 하나로 데워지는 맨몸을 가만 안아본다
■ 한국일보 차창밖, 풍경 빈곳 [ 정은기 ] 철길은 열려진 지퍼처럼 놓여있다, 양 옆으로 새벽마다 물안개를 뱉어내는 호수와 <시골밥상>이니 <대청마루>니 하는 간판의 가든촌이 연대가 다른 지층처럼 어긋나 있다 등 뒤로 떨어지는 태양이 그림자로 가리키는 북동의 방향으로 질주하는 춘천행 무궁화호 열차 지퍼를 채우듯 튿어진 자리를 꿰매며 달려가는 것은 열차의 속도였다 기차의 머리가 향하는 방향을 보여주는 것은 긴장을 잃고 곡선으로 휘어지는 구간에서라는 사실을 기억하자 그곳에 자리를 튼 마을이 호수에 기대어 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사람들은 이제 <가정식 백반>의 가정을 찾아 속도에 몸을 싣고 거꾸로 달린다 이곳에서는 두고 온 먼 곳의 시간을 추억하는 일도 먼발치에서 바라보는 풍경을 관람하기 위해 돈을 지불하고 박물관을 찾는 일만큼이나 자본주의적이다 직선의 끝에는 목적지가 있어 마을은 머지않아 먼지의 전시관이 될 것이다 곁길로 샐 수 없는 것이 슬프다는 것을 호수는 알고 있을까 튿어진 굴곡을 따라 살을 드러낸 풍경의 허리를 휘감고 돌아가는 기차, 가끔씩 창밖으로 활처럼 휘어지는 기차의 곡선을 본다면 퇴락을 거듭하는 호숫가 옆, 한 마을이 생각날 것이다 ■ 경향신문 페루 [이제니 ]
빨강 초록 보라 분홍 파랑 검정 한 줄 띄우고 다홍 청록 주황 보라. 모두가 양을 가지고 있는 건 아니다. 양은 없을 때만 있다. 양은 어떻게 웁니까. 메에 메에. 울음소리는 언제나 어리둥절하다. 머리를 두 줄로 가지런히 땋을 때마다 고산지대의 좁고 긴 들판이 떠오른다. 고산증. 희박한 공기. 깨어진 거울처럼 빛나는 라마의 두 눈. 나는 가만히 앉아서도 여행을 한다. 내 인식의 페이지는 언제나 나의 경험을 앞지른다. 페루 페루. 라마의 울음소리. 페루라고 입술을 달싹이면 내게 있었을지도 모를 고향이 생각난다. 고향이 생각날 때마다 페루가 떠오르지 않는다는 건 이상한 일이다. 아침마다 언니는 내 머리를 땋아주었지. 머리카락은 땋아도 땋아도 끝이 없었지. 저주는 반복되는 실패에서 피어난다. 적어도 꽃은 아름답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간신히 생각하고 간신히 말한다. 하지만 나는 영영 스스로 머리를 땋지는 못할 거야. 당신은 페루 사람입니까. 아니오. 당신은 미국 사람입니까. 아니오. 당신은 한국 사람입니까. 아니오. 한국 사람은 아니지만 한국 사람입니다. 이상할 것도 없지만 역시 이상한 말이다. 히잉 히잉. 말이란 원래 그런 거지. 태초 이전부터 뜨거운 콧김을 내뿜으며 무의미하게 엉겨 붙어 버린 거지. 자신의 목을 끌어안고 미쳐버린 채로 죽는 거지. 그렇게 이미 죽은 채로 하염없이 미끄러지는 거지. 단 한번도 제대로 말해본 적이 없다는 사실이 안심된다. 우리는 서로가 누구인지 알지 못한다. 말하지 않는 방식으로 말하고 사랑하지 않는 방식으로 사랑한다. 길게 길게 심호흡을 하고 노을이 지면 불을 피우자. 고기를 굽고 죽지 않을 정도로만 술을 마시자. 그렇게 얼마간만 좀 널브러져 있자. 고향에 대해 생각하는 자의 비애는 잠시 접어두자. 페루는 고향이 없는 사람도 갈 수 있다. 스스로 머리를 땋을 수 없는 사람도 갈 수 있다. 양이 없는 사람도 갈 수 있다. 말이 없는 사람도 갈 수 있다. 비행기 없이도 갈 수 있다. 누구든 언제든 아무 의미 없이도 갈 수 있다.
■ 국제신문 마농꽃이 걸어서 우체국에 간다 [ 이언지 ] 가을, 입질이 시작되었다 만물이 보내는 연서가 속속 배달 중이다 온몸이 간지럽다 배롱나무 붉은 글씨는 화사체라고 하자 작살나무가 왜 작살났는지 내야수는 내야에만 있어야 하는지 계집들의 질문이 쏟아진다 작살나게 이쁜 열매가 미끼였다고 의혹은 무조건 부인하고 보는 거야 경자년이 정해년에게 속삭인다 낮은 음들이 질러대는 괴성에 밥숟갈을 놓친 귀들 은해사 자두가 맛있었다고 추억하는 입술을 덮친다 누가 빠앙 클랙슨을 누른다 -당신의 유방이 위험에 노출되어 있습니다 테이프을 갈아끼우는 사이 농염의 판타지가 물컹 섞인다 비탈 진 무대에서 마지막 스텝을 밟는다 끼어들고 싶다 소리와 소리 사이 스텝과 스텝 사이, 소문과 소문 사이 납작하게 드러눕고 싶다 내 것도 아니고 네 것도 아닌 죽은 나에게 말 걸고 싶다 거시기, 잠깐 뜸들이고 싶다 *마농꽃이 걸어서 우체국에 간다 노랑 소인이 찍힌 연서는 하룻밤만 지나면 사라질 것이다 사라져 도착할 것이다 소멸을 윙크하는 가을 프로젝트 데카당스도 이쯤이면 클래식이다 *마농꽃 달래의 제주 방언, 샤프란
■ 서울신문 가벼운 산 [ 이선애 ] 태풍 나리가 지나간 뒤, 아름드리 굴참나무 등산로를 막고 누워 있다. 오만상 찌푸리며 어두운 땅속을 누비던 뿌리 그만 하늘 향해 들려져 있다. 이젠 좀 웃어 보라며 햇살이 셔터를 누른다. 어정쩡한 포즈로 쓰러져 있는 나무는 바쁘다. 지하 단칸방 개미며 굼벵이 어린 식구들 불러 모아 한 됫박씩 햇살 들려 이주를 시킨다. 서어나무, 당단풍나무, 노각나무 사이로 기울어진 채 한 잎 두 잎 진창으로 꿈을 박고 있는 굴참나무 제 뼈를 깎고 피를 말려 숲을 짓기 시작한다. 생살이 찢겨 있는 굴참나무, 그에게서는 고통의 향기가 난다. 살가죽의 요철이 전 재산을 장학금으로 기탁한 밥장수 할머니의 손등만 같다. 끝내 허리를 펴지 못하는 굴참나무가 세로로 서 있어야 한다는 것은 편견이다. 굴참나무가 쓰러진 것은 태풍 나리 때문이 아니다. 나무는 지금 저 스스로 살신성인하는 중이다, 하늘 가까이 뿌리를 심기 위해.
■ 전북일보 오리떼의 겨울 [ 이지현 ] 강 위에 오리가 머리를 숙였다 올린다 노란 부리로 쪼아낸 물방울은 베틀을 돌리지 않았는데도 모퉁이에서 가운데로 물결을 만들어간다 물결이 엉키지 않도록 휘휘 발 저어 옮기는 오리들, 혼자서는 저 넓은 강을 물고 날아오를 수 없다고 함께 강을 담아갈 보자기를 짜고 있는 것이다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았는데도 서로의 날갯소리를 엮을 수 있다는 것을 그리하여 코와 코를 매듭지을 수 있다는 것을 결국 삶의 보자기는 혼자 짜낼 수 없다는 것을 오리떼가 함께 날아오를 때 알았다 살얼음이 발목을 조여와도 강의 끝자락을 팽팽히 잡아당기는 오리떼, 놓고 가는 건 없는지 막바지 점검을 끝낸 후 세상 바깥으로 일제히 날아 오른다 세상 안쪽으로 폭설이 쏟아진다
■ 세계일보 너와집 [ 박미산 ] 갈비뼈가 하나씩 부서져 내리네요 아침마다 바삭해진 창틀을 만져보아요 지난 계절보다 쇄골 뼈가 툭 불거졌네요 어느새 처마 끝에 빈틈이 생기기 시작했나 봐요 칠만 삼천 일을 기다리고 나서야 내 몸속에 살갑게 뿌리 내렸지요, 당신은 문풍지 사이로 흘러나오던 따뜻한 온기가 사라지고 푸른 송진 냄새 가시기 전에 떠났어요, 당신은 눅눅한 시간이 마루에 쌓여있어요 웃자란 바람이, 안개가, 구름이 허물어진 담장과 내 몸을 골라 밟네요 하얀 달이 자라는 언덕에서 무작정 기다리지는 않을 거예요, 나는 화티에 불씨를 다시 묻어놓고 단단하게 잠근 쇠빗장부터 열겁니다 나와 누워 자던 솔향기 가득한 한 시절, 당신 그립지 않은가요?
■ 강원일보 소라의 집 [ 김정임 ] 외포리 뻘밭 소라의 집을 보셨나요 굵은 밧줄 한 개씩 기둥처럼 세워서 수 백 개 다닥다닥 붙은 소라의 빈 집들 지금은 선홍빛 노을만 그물질하고 있어요 빈집의 적막이 굴뚝의 연기처럼 피어올라 밀물대신 갯내 나는 뻘밭을 메워가고 있어요 소라의 그물망을 드넓은 바다 어장에 던져두면 호기심 많은 쭈꾸미가 소라의 빈 집으로 스며든다 지요 두근거리는 가슴으로 능소화빛으로 색칠한 대문을 열고 미로같이 꾸불꾸불한 계단을 내려갔을 테지요 발자국 소리가 메아리 되어 울리는 아득하고 속이 깊은 방으로 스며들어 제 꿈을 익히곤 했을 소라의 집 간간이 파도 소리는 열어 둔 창으로 들어 왔다가 꿈의 한 가운데를 현처럼 긋고 나가곤 했겠지요 누군가를 기다리듯 대문 활짝 열어놓은 소라의 빈 집이 나를 자꾸만 끌어 당겨요 제 몸을 던져 꿈을 익혀가던 쭈꾸미처럼, 꿈은 꿈꿀 때 가장 빛나는 순간이 아니던가요
■ 경인일보 꽃신 [ 김소연 ] 달이 붓는다 가지가 휜다 일터에서 돌아온 어머니 발 매만지면 굳은살 갈라진 발바닥에서 바스락, 낙엽 밟히는 소리 들린다
어머니 얼굴에 꽃 지고 단풍마저 떨어져 잔가지들만 힘없이 흘러내린다 새벽녘 새근대는 어머니의 숨소리에서 낙엽 쓸어내는 소리 들린다 숨죽이며 눈발이 날린다 어머니가 벗어놓은 구겨진 신발 위로 새순 같은 새하얀 눈꽃이 핀다 눈부신 꽃신이 된다 비 [김소연 ] 빗방울이 소년의 얼굴을 때린다 자전거 바퀴가 천천히 구르고 어깨를 움츠린 소년의 등 뒤 비닐 덮인 신문지 위로 빗방울이 쌓인다 새벽의 푸른 발등을 한 바퀴 돌아 소년이 반지하 구들장 위에 신발을 얹으면 늘 기침하는 어머니 갈라진 숨소리, 소년을 마중한다 살가죽만 늘어진 마른 젖가슴에 얼굴을 묻으면 어머니 가슴까지 축축이 멍들이는 시퍼런 빗물 소년은 엊저녁 남은 찬밥을 물에 말아 후루룩 마신 후 다시 흥건히 젖은 신발에 발을 담근다 우산도 없이 뛰는 소년의 등 뒤에서 책가방이 자꾸만 넘어질 듯 소년을 떠민다 빗방울은 사정없이 소년의 얼굴을 밟는다
■ 문화일보 하모니카 부는 오빠 [ 문 정 ] 오빠의 자취방 앞에는 내 앞가슴처럼 부풀어 오른 사철나무가 한그루 있고 그 아래에는 평상이 있고 평상 위에서는 오빠가 가끔 혼자 하모니카를 불죠 나는 비행기의 창문들을 생각하죠, 하모니카의 구멍들마다에는 설레는 숨결들이 담겨 있기 때문이죠 이륙하듯 검붉은 입술로 오빠가 하모니카를 불면 내 심장은 빠개질 듯 붉어지죠 그때마다 나는 캄보디아를 생각하죠 양은 밥그릇처럼 쪼그라들었다 죽 펴지는 듯한 캄보디아 지도를 생각하죠, 멀어서 작고 붉은 사람들이 사는 나라, 오빠는 하모니카를 불다가 난기류에 발목 잡힌 비행기처럼 덜컹거리는 발음으로 말해주었지요, 태어난 고향에 대해, 그곳 야자수 잎사귀에 쌓이는 기다란 달빛에 대해, 스퉁트랭, 캄퐁참, 콩퐁솜 등 울퉁불퉁 돋아나는 지명에 대해, 오빠의 등에 삐뚤빼뚤 눈초리와 입술들을 붙여놓은 담장 안쪽 사람들은 모르죠 오빠의 하모니카 소리가 바람처럼 나를 훅 뚫고 지나간다는 것도 모르죠 검은 줄무늬 교복치마가 펄렁, 하고 젖혀지는 것도 영원히 나 혼자만 알죠 하모니카 소리가 새어나오는 그 구멍들 속으로 시집가고 싶은 별들이 밤이면 우리 집 평상 위에 뜨죠 오빠가 공장에서 철야작업 하는 동안 별들도 나처럼 자지 않고 그냥 철야를 하죠
■ 경남일보 여자의 풍선 [ 오자영 ] 내 몸에 알록달록 풍선이 살고 있어요 풍선 속을 가득 채운 심장 모양의 푸른 바람을 나는 ‘그’라고 부르며 가끔 등에 태우고 둥둥 떠다니기도 하지요 둘의 호흡이 달처럼 둥글게 부풀어 올랐던 절정의 꼭대기에서 싱싱한 나무가 급사하는 것을 목격한 후 내 고운 풍선들도 그 비슷한 소멸, 아니면 죽음을 눈앞에 두고 있다는 것을 감지했어요 팽창의 한계점에서 존재를 확인하는 순간, 펑 새벽이 어둠을 밀쳐내고 또다시 거대한 풍선을 안아 올릴 때까지 웅크린 내 몸 구석구석에서 새는 바람 소리 편두통처럼 아리게 들려왔어요 즐거운 나의 집 왁자지껄한 일상에 매달려 아찔하게 흔들릴 때도 아이들은 손뼉 치며 환호성을 질러댔고 개 발자국에 밟혀 사라진 보랏빛 환상이며 애당초 불량으로 태어나 버림받은 회색빛 가슴까지 몸 가득 알슬기했던 팽팽한 풍선은 손 뻗어 꺼내기도 전에 사라져가고 있었어요 허공에서 발버둥치는 텅 빈 무게 알알한 합성고무냄새가 집안 가득 차기 시작했어요 물렁물렁하게 잡히는 비닐거죽, 바람도 느낄 수 없어 단단하고 선명한 시간이 사그라지고 있어요 알록달록 풍선을 몇 봉지 더 사왔지요 내 배란주기보다 짧게 살다가는 생을 위하여 몸 가득 오색바람 채우고 날아오르기 위하여
■ 불교신문 그 흰 빛 [박지선 ] 장롱 맨 아래 한지에 곱게 싸여 있는 한 필의 모시 철이 바뀌어도 결코 위아래 섞이는 일 없다. 깊은 禪定에 든 석불 같다. 하나의 풀씨가 한 필의 베로 태어나기까진 잿물로 살과 피를 녹이는 고통이 필요하다. 흐르는 시냇물 속에서도 물살 거스르지 않고 버티다가 올곧은 백발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쪼개지고 비벼지고 다시 수많은 시간을 모닥불로 담금질을 당하는 동안에도 모시의 生은 동그랗게 이어져간다. 마냥 엉클어져 있다가도 북이 오가고 딱딱 바디 오르내리며 장단이 울리면 모시는 그것이 죽비의 깨우침이란 것을 안다 죽비가 어깨를 내려칠 때마다 몸을 낮게 낮추던 씨줄과 날줄이 서로 손 내밀며 정갈하게 일어선다 달구어진 여름 내내 매미의 울음소리 지천으로 흐르다가 겨우 엷어질 즈음 비로소 그 흰 빛 모시는 긴 터널을 빠져 나온다. 한번 흘러간 것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오래 견뎌야만 하는 것을 알았을까. 풀기 빠진 가슴을 서로 맞잡은 모시의 손이 따뜻하다 장롱의 어둠 속에서 홀로 깨여있는 그 흰 빛. 아직도 긴 겨울밤 잠 못 드는 어머니다.
■ 무등일보 나의 아름다운 세탁소 [ 박문혁 ] 아버지가 다리미 하나 들고 세상 한 가운데 섰다. 비록 세상이 알 굵은 사포처럼 거칠다 해도 창가에서 응원가를 불러주는 벽돌만한 금성 라디오 벗 삼아 묵묵히 하루를 다렸다. 산더미처럼 쌓인 일감은 손목이 아리도록 다림질을 강요했지만, 세상을 배우는 수업료라 여겨 한번 숙인 고개를 좀체 들지 않았다. 그리하여 점점 달인이 되어가던 아버지. 아버지는 다리미로 세상의 모든 근심을 다렸다. 장마 끝으로 축축해진 무등산 호랑이 가죽도 다리고, 학동과 지원동을 돌며 바다를 파는 목포댁의 생선 비린내도 다리고, 매번 귀가할 때마다 술에 취해 흥얼거리는 막노동꾼 김씨의 흘러간 노래도 다리고, 거리에서 붕어빵을 구워 파는 박씨의 희망도, 지하철에서 구걸하는 시각장애인 송씨의 하얀 지팡이도, 등록금 마련을 위해 연탄배달을 하는 대학생의 굵은 땀방울도 스팀을 다려 먹었다. 그러나 어머니의 유방암까지 다릴 수는 없었다. 이제 그 아버지가 3평 좁은 공간에서 홀로 늙어간다. 지금껏 구겨지고 이맛살 찌푸린 것들, 매끈하게 다려 모두 손님에게 돌려주고 마지막 남은 것이라곤 고작 몸에 걸친 한 벌 외로움 뿐. 하지만 중이 제 머리 못 깎듯 아버지는 자신의 외로움을 다리지 못한다. 늦은 밤 나는 아버지가 벗어놓은 외로움을 빳빳하게 다려서 어머니 영정 옆에 쓸쩍 걸어놓는다. 미사일처럼 세워놓은 다리미가 어둠을 다림질하며 하늘로 솟아오를 듯.
■ 광주일보 구두 수선공 [ 최일걸 ] 그는 구두 밑창에 겹겹이 달라붙은 길들을 더듬는다 뒤엉킨 길들을 풀어놓으려는 그의 손마디가 저릿하다 시한폭탄을 해체할 때처럼 진땀나는 순간, 자칫 잘못 건드리면 길들이 한꺼번에 들고 일어서거나 뜀박질이 그의 심장을 짓밟고 지나갈 것이다 자꾸 엇박자를 놓는 길과 걸음이 구두를 망가뜨린다 구두란 길과 걸음의 교차점, 사사건건 대립각을 세우는 걸음과 길에서 절충점을 모색하기 전에 그는 먼저 숨을 고른다 쉼 없이 구두 뒷굽을 야금야금 갉아먹는 길, 막바지로 구두를 몰아세우는 걸음걸음, 그를 여기까지 내몬 것은 길도 걸음도 아니었다 구둣방 선반 위에서 번득이며 광휘를 뿜어내는 구두가 시치미를 떼고 돌아앉는다 그는 어긋난 길들을 구두에서 삭제하고는 도톰한 밑창으로 새로운 길을 포장한 다음 못을 박아 단단히 고정한다 고공행진을 거듭하는 세상에서 굽의 높이를 조정하는 일 또한 만만치 않다 못이 박힌 손으로 나달나달 떨어진 날들을 깁는 그는 차츰 지워지고 실밥이 그를 대신하여 툭툭 삐져나온다 보행을 손보는 일은 손님의 몫이지만 그는 시선을 곧게 펴서 손님의 종종걸음을 떠받친다 그의 뼈마디가 시큰거리다가 어긋난다
■ 농민신문 가족 [ 조성식 ] 집에 들어서면 대문 옆에 헛간이 서고처럼 서 있는데 처마 끝에 도서 대여목록 카드처럼 여섯 자루의 호미가 꽂혀 있다. 아버지 호미는 장시간 반납하지 않은 책처럼 한번 들고 나가면 며칠씩 밤새고 돌아온다. 산비탈을 다듬는지 자갈밭을 일구는지 듬성듬성 이가 빠져 자루만 조금 길면 삽에 가까운 호미, 그 옆에 어머니 호미는 가장 많이 빌려 보는 연애소설 같다. 테이프 여러 번 붙인 표지에서 파스 냄새가 난다. 빛나는 손잡이에 밥주걱의 둥근 날을 가진 넉넉한 호미, 땅을 파는 일보다 아버지가 파 놓은 흙을 다시 훑어보는 돋보기 알 같은 눈 밝은 호미, 나란히 서 있는 아내와 내 호미는 주말이나 가끔 들고 나가는 장식용 백과사전, 철물점 쇳내도 가시지 않은 두 자루 쇳덩어리, 제대로 땅 한 번 파지 못하고 마늘이나 고구마 살점만 물어뜯는 날선 칼날, 그 옆에 장난처럼 걸려 있는 아이들의 호미가 있는데 할아버지 할머니 밭에 나가실 때 말동무로 따라 나서는 동화책같이 착한 호미가 한집에 산다.
■ 대전일보 책장애벌레 [이종섶 ] 낡은 책장은 망치로 부수는 것보다 드라이버를 사용하는 것이 더 간단하다 나무의 이음새마다 박혀있는 나사못 숨쉬기 위해 열어놓은 십자정수리를 비틀면 내장까지 한꺼번에 또르르 딸려 올라오고 허물처럼 남아있는 벌레의 집에 어두운 그림자가 밀려들었다 안간힘을 다해 붙어있는 것들을 대여섯 마리씩 잡을 때마다 하나 둘 떨어져나가는 책장의 근육들 바닥에 납작 주저앉을 무렵엔 한 줌 넘게 모인 애벌레가 제법 묵직했다 가지와 가지 사이를 물고 깊은 잠을 자야했던 동면기가 끝나면 훨훨 나비가 되어 숲속으로 돌아갈 줄 알았는데 책장이 늙어버린 탓에 애벌레만 집을 잃고 말았다 꼼지락거리는 것들 땅바닥에 던져버리려다 회오리돌기가 마디마디 살아 있어 공구함에 보관해둔다 상처도 없고 눈물도 없으니 언젠가는 다시 나무속에 들어가 살게 될지도 모른다 밤만 되면 꾸물꾸물 기어다니는 소리 나무의 빈 젖을 물고 싶어 오물거리는 소리 고아원의 밤이 깊어간다
■ 전북도민일보 바람의 일 [ 공인숙 ] 오랫동안 바람을 사랑했습니다 바람만큼 외롭고 쓸쓸한 건 이 지상에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들녘에서, 포구에서, 노을 비껴가는 강가에서도 언제나 안녕하며 내 마음을 쓸어줍니다 바람은 아무 것도 남기지 않습니다 다만, 살구꽃이 눈부신 날 할머니 무릎베개에 옛 이야기 듣는 아이의 눈꺼풀을 힘겹게 하는 것도, 깊은 우물 속 맑은 물 위에 꽃잎의 연서를 날리는 것도 산 그림자가 마을로 내려오게 하는 것도 다 바람의 일이지요 또한 종아리가 유난히 예쁜 산골 계집아이의 상고머리를 산당화의 향기로 흔들어 주는 것도 바람의 일이고요 길섶에 피어난 쑥부쟁이의 꽃대를 한두 번 흔들어 보기도 하다가 그저 슬몃… 오늘은 비가 내렸습니다 이 빗물을 바다로 보내 파도를 보며 영혼을 키우는 누군가에게 한 점 살이 되게 하는 것도 바람의 일일겁니다 수 없는 바람이 수많은 별이 될 때까지 바람을 사랑하겠습니다 |
첫댓글 은비 님! 수고하셨습니다. 덕분에 편하게 신춘문예 당선작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고맙습니다.
어쩜 어떻게 이걸 다 옮겨 놓으셨나요. 타자치느냐고 손가락통증 심했겠어요. 고맙고 또 고맙네요. 덕분에 주르르, 책 사지 않고도 언제든지 보러 올 수 있어 넘 좋아요. 고맙습니다. ^*^
서핑하다 업어왔습니다..^^
단순산문시,이런 것을 가지고 어떻게 시를 논할까? 시는 절제 된 함출과 은율 또한 비유가 살아있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