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이종윤 목사 성탄절에 주신 네 가지 선물 이사야 9:1-7
2. 박정근 목사 당신을 위한 하나님의 성탄 선물 누가복음 2:8-14
3. 김찬종 목사 예수님 탄생에 무심한 자들 마태복음2:1-12
4. 박삼우 목사 임마누엘 마태복음1:18-25
5. 류철량 목사 베들레헴에 나신 예수 미가 5:2-6
성탄절에 주신 네 가지 선물
이사야 9:1-7
이종윤 목사(서울교회)
이사야 6절에서는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아들로 낳으신 것이 아닙니다. 이미 아들이기 때문입니다. 아기로 낳으신 것이고 아들로 주신 바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 예수의 신, 인 양성을 말해줍니다. 아기(인)로 세상에 태어났고 하나님의 아들(신)로써 우리에게 주신 바 되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예수님은 네 가지 이름을 가진 선물로써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Ⅰ. 기묘한 모사
기묘자와 모사 사이에는 콤마가 없습니다. 고로 이 말은 놀라운 상담자라고 읽어야 합니다. 우리에게 부족한 것은 과연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지혜입니다. 그런데 좋은 교육을 받고 많은 경험을 가졌다하더라도 우리는 아직도 영적 지식이 부족하고 지혜가 부족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모든 문제를 풀 수 있는 지혜를 가지신 분입니다.
그런고로 지혜가 부족한 우리에게 메시아는 꼭 필요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누구신지 알게 되고, 그리스도 안에서 내가 피조물이오, 죄인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원받은 자임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는 생의 목적도 찾게 됩니다. 예수님은 기묘하신 상담자입니다. 그러니 지혜가 필요하면 하나님께 구하면 됩니다.(약1:5)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크리스마스에 우리에게 지혜를 주실 것입니다.
Ⅱ. 전능하신 하나님
Mighty라는 것은 힘을 말합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는데 지혜만 있어서는 안됩니다. 힘도 필요한 것입니다. 지식, 물질, 권세, 주먹을 힘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힘들은 다 지나가는 그림자와 같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진정한 힘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Mighty God)이신 것입니다.
죄와 사망의 권세를 이기고 우리를 흑암에서 광명으로, 지옥에서 천국으로,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주신 분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힘을 주시는 이유는 증인의 사역을 감당케 하시려 함입니다. 성탄절에 전능하신 하나님을 영접하고 증인의 사명을 감당하는 모두가 되실 수 있기를 소원합니다.
Ⅲ. 영존하시는 아버지
'전능하신 하나님'도 신성을 의미하지만 '영존하시는 아버지'라는 것도 예수님의 신성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성경에 영존하시는 '아들'이 아닌 영존하시는 '아버지'로 나와있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하나님께서 내 아들이 바로 나임을 말씀해주시는 것입니다. 고로 예수님을 믿는 것이 하나님을 믿는 것이요, 예수님께 속하는 것은 하나님께 속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곧 하나님과 가족이 됨을 의미합니다. 이제는 이방인으로가 아닌 자녀로서 주님을 의지하고 나아갈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소원합니다.
Ⅳ. 평강의 왕
크리스마스 때 주신 네 번째 선물은 평강입니다. 모든 선물의 밑바닥에는 평강이 깔려 있습니다. 그 선물을 받음으로 내가 평강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평강이신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은 최고의 선물인 셈입니다.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모든 사람에게 필요한 것이 평강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평강을 갖지 못했습니다. 하나님과 평화를 이루지 못한 것이 근본 문제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오심으로 하나님과 원수 되었던 우리를 하나님과 화목을 이루게 하시고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주신 것입니다.
결론을 말씀드립니다
우리에게 꼭 필요한 것은 지혜와 힘과 소속감과 평화입니다. 이 네 가지 복을, 그리스도를 영접함으로 선물로 받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 선물을 이번 성탄절에 모두 받으시고 누리시는, 하나님의 사랑 받는 자녀가 되실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소원합니다.
출처 : C3TV 설교방송 2000년 12월 8일
당신을 위한 하나님의 성탄 선물
누가복음 2:8-14
박정근 목사(영안교회)
8그 지경(地境)에 목자들이 밖에서 밤에 자기 양떼를 지키더니 9주의 사자가 곁에 서고 주의 영광이 저희를 두루 비취매 크게 무서워하는지라 10천사가 이르되 무서워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11오늘날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12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누인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 하더니 13홀연히 허다한 천군(天君)이 그 천사와 함께 있어 하나님을 찬송하여 가로되 14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
여러분은 '크리스마스' 하면 무엇을 떠올리시는지 모르겠습니다. 보통 우리가 '크리스마스' 라고 하면, 크리스마스 카드와 선물을 떠올릴 것입니다. 아무래도 우리나라는 아직 기독교 국가가 아니고, 특히 부산은 기독교 인구가 7% 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크리스마스 기분이 별로 나지 않아요. 서울만 가도 1/4, 25%가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에 기독교적인 분위기를 많이 느낄 수 있습니다. 특별히 미국은 기독교 국가이기 때문에 크리스마스 때가 되면 1년 중 가장 선물을 많이 하는 날입니다. 포장지가 가장 많이 팔리는 때가 크리스마스 연휴라고 합니다. 남편과 아내는 물론이고, 부모와 자녀간, 친척간에 서로 서로 선물을 주고받는 것이, 미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광경입니다.
특별히 아이들은 대개 크리스마스 때가 되면 산타클로스 할아버지가 자기에게 선물을 가져다 줄 것이라고 믿으며 자라납니다. 그것이 얼마나 아이들에게 좋은 추억이 되는지 몰라요. 교육학의 통계에 보면, 대부분의 아이들이 6살에서 7살까지 산타클로스가 실제 인물이라고 믿고 자란다는 겁니다. 보통은 그러한데, 저희 큰아이 광진이는 아버지를 닮아 그런지, 순진해서 8살까지 믿었습니다. 그 아이가 4살 때부터, 산타클로스 할아버지가 실존 인물이라고 학교에서 배워왔기 때문에, 저도 선물을 했어요. 24일날 밤이 되면 잠을 이루지 못합니다. "아빠, 정말 산타가 와?" "산타가 와?" 몇 번이고 물어요. "그럼 오시지" "광진이가 착한 일 많이 했기 때문에 산타할아버지가 선물 들고 오실 거야"
아, 벌써 아이들은 뭘 원하는지 알잖아요? 부모들이 다 원하니까, "산타클로스 할아버지가 올해는 자동차를 갖고 오셔야 될텐데" "기도해 봐" 그러면 어떻게 합니까? 산타인 제가 자동차를 사 가지고 선물 포장을 해서 25일날 새벽에, 아이가 잠든 틈에 놓아둡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그 선물 포장지를 뜯으며 기뻐하는 그 아이들의 모습을 잊을 수가 없어요.
아이들의 나쁜 습관을 고치는데 그것보다 더 좋은 방법은 없습니다. 예를 들어서 아이가 밥을 잘 안 먹는다고 하면, 성탄 카드에다 써 놓는 거예요. "광진이는 다 좋은데 밥을 좀더 많이 먹었으면 좋겠다. 산타할아버지가!" 이렇게 써 놓으면 그 다음날부터 밥을 한 공기씩 다 먹습니다. 얼마나 아름다운 추억인지 몰라요.
우리는 누구나 다 선물을 받기를 좋아합니다. 그러나 올해 크리스마스는 우리 모두에게 좀 쓸쓸한 것 같아요. IMF 이후, 또다시 경제 위기가 온다는 소문으로 위축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카드도 잘 보내지 아니하고, 선물도 주고받지 아니하고, 더욱 더 추운 크리스마스를 우리는 맞고 있는 것 같습니다. 올 크리스마스에 여러분은 무엇을 받으셨습니까? 선물을 받으셨나요? 카드를 받으셨나요? 아니면 아무 것도 받지 못하셨나요? 그래서 외롭고 쓸쓸한 크리스마스를 보내고 계십니까?
그러나 여러분 실망하지 마십시오. 오늘 성경에 보니 우리에게 놀라운 선물이 있다고 얘기합니다. 그 선물을 보내신 이는 택배 발신지를 보니, 천국에 계신 하나님이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놀라운 선물을 보내셨다고 성경은 얘기합니다. 오늘, 어릴 적으로 돌아가서 우리가 아이 때 선물을 열어보는 그 설레는 마음으로, 본문을 열어보았으면 좋겠습니다.
크리스마스날 하나님이 당신에게 주신 선물은 과연 어떤 선물일까? 오늘 그 선물 몇 가지에 대해서 우리에게 제시해 주십니다. 뚜렷한 선물! 하나님이 크리스마스날 당신에게 주신 선물은 다름 아닌 기쁨의 선물이라고 얘기합니다.
1. 기쁨의 선물
기쁨을 우리에게 선물로 주셨어요. 10절을 다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천사가 이르되 무서워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온 백성에게 미칠 무슨 소식?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중요한 단어입니다. 이 말씀은 굉장히 놀라운 말씀입니다. 특별히 이 말씀이 우리에게 놀라움으로 다가오는 이유 가운데 두 가지를 든다면, 첫 번째는 이 소식이 제사장이 아니요, 그 나라의 지도자가 아니요, 서기관이 아닌 한낱 목자에게 이 좋은 기쁨의 소식이 전해졌다고 하는 사실이에요.
여러분, '목자' 라고 하면 오늘날 우리는 상당히 낭만적으로 생각합니다. '양치는 목동' 하면 피리를 부는 목동을 생각하죠? 한국에서 목장을 소유하고 있다, 대관령 목장의 주인입니다, 라고 하면 사회적으로 그를 우러러봅니다. 부(富)를 상징하고 있기 때문이죠. 그러나 여러분, 오늘 이 성경에 나타난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처음으로 접한 이 목자를, 오늘의 목자로 생각하신다면 여러분은 성경 말씀을 올바로 이해할 수 없을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이 태어난 날, 이 당시의 목자는 사회적으로 중산층 이하의 사람들이었어요. 그들은 평민이었지만 중산층 이하 거의 천민에 가까운 대접을 받던 아주 가난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에게 하나님은 나타나셔서 크리스마스의 기쁜 소식을 처음으로 전해 주었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여러분, 목자 가운데도 어떤 목자죠? '밤에 양 떼를 지키더니'
여러분, 어느 단체에나 계급이 있습니다. 특히 군대는 더욱 그러하죠. 같은 일병으로, 작대기 하나라도 똑같지가 않습니다. 밥그릇 수를 따져요. 그래서 흔히 하는 말로, 좀 세속적이긴 합니다만 "이놈아, 똥물에도 파도가 있다" 어떻게 맞먹으려고 하느냐 이거죠. 하루 일찍 들어온 게 얼마나 큰 차이가 있는지 몰라요. "앉아! 일어서!" 하면 그대로 다 해야 돼요.
이 목자들도 마찬가지예요. 이 목자 사회에도 계급이 있지 않겠습니까? 조금 계급이 높은 사람들은 낮에 양을 돌보고 밤에는 편히 잠을 잤습니다. 그러나 오늘 여기에, 이 기쁜 소식을 들은 목자들은 그렇지 못했던 것 같아요. 남들이 다 자고 있는 그 밤에-아마 말단 목자들이었던 것 같아요- 그들은 밖에 나와 양을 지키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이 성탄의 기쁜 소식을 처음으로 전하고 계신 것입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이 크리스마스날, 복음이 들려온 대상자들은, 전혀 기쁘지 않은 자들이었다고 하는 거예요. 아니, 도저히 기뻐할 수 없는 환경 속에 살았던 그 목자들에게, 사회적으로 천대받던 사람들이요, 목자 가운데서도 밤에 양을 지키는 말단 목자들에게, 전혀 기뻐할 조건 없고, 기쁨이 무엇인지도 알지도 못했던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찾아오셔서, 이 성탄에 기쁨을 전해 주셨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이 목자에게 나타나셔서 기쁨을 전해준 이 사실이 놀라움으로 다가오는 두 번째 이유는, 이 소식이 그냥 전해진 것이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9절을 봅시다.
주의 사자가 곁에 서고 주의 영광이 저희를 두루 비취매 크게 무서워하는지라
주의 뭐가 저희를 두루 비취매? "주의 영광" 중요한 단어예요. 여러분, 영광(靈光)은 뭡니까? 하나님의 임재(臨齋)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오늘 여기 나타난 이 영광은, 모세가 시내산에서 십계명을 받을 때 보았던 그 영광이었어요. 모세가 하나님의 영광을 멀찍이 바라보았지만 그 하나님의 영광이 얼마나 놀라웠던지, 그 하나님의 영광을 받은 모세의 얼굴에, 하나님의 영광의 흔적이 나타나 있었어요. 그 영광이 어찌 될까봐 모세는 산에서 내려올 때, 수건으로 자기의 얼굴을 가리고 내려왔다고 했습니다. 이 영광이 언제 나타났습니까? 구약에서 보니, 장막에서 나타났습니다. 아무 데서나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없었어요. 하나님의 영광을 보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계신 장막 안에 들어가야 했습니다. 훗날 이스라엘의 솔로몬이 성전을 지었을 때, 성전 안 지성소 안에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났습니다.
그런데 이 하나님의 영광이 어떻게 되었습니까? 간혹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나타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갈 길을 가르쳐주시곤 했던 하나님의 이 영광이, 에스겔서에 나타난 걸 보면, 하늘에 보니 저기 성전에 계시던 하나님의 영광이 나와 예루살렘 성읍에 거하십니다. 그 영광이 점점 성전에서 멀어져 가더니, 저 멀리 동편 산에 거하십니다. 그리고 나서 그 하나님의 영광이 영원히 이스라엘을 떠나 버립니다. 그 하나님의 영광이 떠난 지 500년이 지난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500년 동안을 목말라하며 하나님의 영광을 기다려 왔어요. 언제 다시 우리에게 하나님의 영광이 임할까. 500년 동안 나타나지 않던 이 하나님의 영광이, 바로 크리스마스날 밤에 목자들에게 나타났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여러분, 이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500년 동안 침묵했던 하나님의 영광이, 목사에게 나타나지 아니하고, 대제사장에게 나타나지 아니하고, 레위인들에게 나타난 것이 아니요, 오늘 이 사회에서 천대받던 목자들에게 나타났다고 말씀합니다. 오늘 본문에 보니 목자들이 무서워했다고 그랬어요.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500년 동안 침묵했던, 모세가 보았던 그 놀라운 하나님의 영광이 자기들에게 나타났으니, 그들은 당연히 무서워했습니다. 그래서 천사들은 먼저 그들에게 메시지를 전하기 전에 이렇게 얘기합니다. 10절을 다시 한번 보십시오.
천사가 이르되 무서워 말라 (그 다음 좋은, 아주 놀라운 말씀이 나오는데) 보라! (주의를 집중시키는 거죠)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목자들에게만 주는 소식이 아닙니다)
"오늘 온 백성들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크리스마스에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할 것이 무엇인줄 아십니까?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선물을 주셨는데, 다름 아닌 큰 기쁨의 선물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당신은 어떻습니까? 오늘 2000년도 첫 크리스마스를 맞으며, 당신에게 이러한 큰 기쁨이 있으신가요? 하나님 앞에 솔직히 대답해 보시기 바랍니다. 오늘 여기 앉은 사람들 가운데, 제가 보니까 평균적으로 적어도 40회 이상 크리스마스를 맞은 사람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40번이나 당신은 크리스마스를 맞아 왔습니다. 그렇다면 당신이 맞이한 그 40번의 크리스마스가 당신에게 어떤 의미가 있으셨습니까? 무엇이 당신의 기쁨이었습니까? 주일학교 때 받은 작은 선물 때문에 기뻐하셨나요? 캐롤송이 여러분을 기쁘게 했던가요? 백화점과 거리에 치장된 크리스마스 트리가 여러분을 흥분케 했나요? 그러나 이런 기쁨은, 오늘 천사가 전한 기쁨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기쁨입니다. 그것은 세상적인 기쁨이요, 일시적인 기쁨일 뿐입니다. 잠시 기쁘다가 성탄절이 지나면 사라지고 말 기쁨이에요.
저는 이 성탄의 기쁨에 대해서 깊이 묵상한 시간들이 있었습니다. 제가 미국에 있었을 때, 크리스마스 이브날 한낮에 TV를 보고 있었어요. 미국에는 보통 복권이 잘 팔립니다. 우리 나라 복권은 한 1,2억 하지만, 미국의 복권은 한번 터졌다 하면 50억, 100억이에요. 이 크리스마스 때가 되면 대개 큰 복권들을 많이 팝니다. 그때 제가 TV를 봤던 해에는 복권 당첨자가 없어서 자꾸자꾸 뒤로 밀려서, 크리스마스 D-Day에 그 날 복권이 딱 떨어지면, 9500만 불(Ninety-five Million), 요즘 환율로 계산하면 1200억원이에요. 1200억원의 복금이 당첨되는 날이에요. 그 날 한사람에게 복권이 당첨 됐어요. 그 복금 받는 장면을 생중계하고 있었어요. 그래서 복권 회사의 직원들과 사장이 수표를 큰 플랭카드만 하게 만들어서 1200억원, 9500만 불 짜리라고 써서 들고 갔어요. 노크를 "딱딱!" 하면서, "당신이 오늘 9500만 불 복권에 당첨되셨습니다!" 그 기뻐하던 모습을 제가 잊을 수가 없어요. 그 사람이 처음에는 멍~ 하더니, 그 다음에는 "야~!" 소리를 지르고, 뒤로 꽝 쓰러지더니 일어나서 막 구르고, 앞에 있는 사장을 껴안고 막 울다가 웃다가, 난리를 치는 거예요. 조금만 더 하면 정신병원에 가겠더라고요. 그 주위에 있던 사람들은 뭐라고 합니까? 너무 부러운 눈으로 축하한다고 박수는 치면서, 한편 배가 아파하는 눈초리로 표현하기 어려운 표정들! 온 동네 사람들이 다 모여 환영하고 있었어요.
출처 : C3TV 설교방송 2000년 12월 24일
예수님 탄생에 무심한 자들
마태복음2:1-12
김찬종 목사(과천교회)
예수님 탄생을 축하하며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할 수 있었지만 무관심했기에 구원받지 못한 자들이 있습니다. 구원을 받지 못하면 지옥으로 갈 수밖에 없습니다.
성탄에 무관심했던 첫 번째 사람은 헤롯왕입니다. 헤롯은 예수님이 탄생할 당시에 유대를 지배하고 있었던 분봉왕이었습니다. 분봉왕은 로마황제가 임명하는 왕입니다. 따라서 로마황제의 명령에 절대 복종하며 통치해야 합니다. 헤롯은 지략과 용기가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유대인의 환심을 사기 위하여 성전을 건축하였습니다. 처음에는 단순히 수리하기 위해 손을 댄 것이 오랫동안 수리하다 보니 그 모양이 모두 달라졌습니다. 그래서 예루살렘 성전을 제 3성전, 혹은 헤롯 성전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는 가정생활이 극히 문란해서 10명이나 되는 아내를 거느리고 살았습니다. 거기서 얻은 자녀들도 많았지만 그는 권력유지를 위해 아내와 자녀들을 죽이기도 했습니다. 오늘 본문은 그가 분봉왕으로 있을 때 예수님의 출생을 알리는 동방박사들이 예루살렘으로 오게 된 기사입니다.
어느 날 헤롯은 동방으로부터 박사들이 예루살렘까지 찾아와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냐는 질문을 받게 되었습니다. 헤롯왕은 내심 깜짝 놀랐습니다. 내가 이 나라의 왕인데 유대인의 왕이 탄생하다니… 새로운 왕이 탄생했다면 그는 바로 자신의 정치적인 적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본래 왕위는 세습제입니다. 아버지가 왕이면 아들이 왕이 되는 것입니다. 지금 헤롯의 위치는 로마가 임명한 분봉왕이지만 정치를 잘하면 세습이 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니 자기 가정이 아닌 다른 가정에서 왕이 탄생했다는 사실을 그는 인정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헤롯은 그를 죽여야겠다는 생각에 일단 그가 태어난 곳을 알기 위하여 대제사장과 서기관을 불러 그리스도가 태어난 곳을 자세히 묻게 되었습니다. 그의 물음에 대제사장과 서기관은 본문 6절 또 유대땅 베들레헴아 너는 유대 고을 중에 가장 작지 아니하도다 네게서 한 다스리는 자가 나와서 내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리라 하였음이니이다하는 말씀대로 베들레헴 지방에 그리스도가 탄생할 것이라는 예언을 가르쳐 주게 된 것입니다.
헤롯은 동방박사들에게 이 사실을 이야기해주며 8절 말씀대로 베들레헴으로 보내며 이르되 가서 아기에 대하여 자세히 알아보고 찾거든 내게 고하여 나도 가서 그에게 경배하게 하라궛 부탁까지 했습니다. 말은 이렇게 했지만 속으로는 아기 예수님을 찾아 죽일 생각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유대인의 정치적인 왕으로 오신 것이 아니라 온 인류의 왕으로서 인류의 죄를 대속하실 구원의 주님으로 오신 것인데 헤롯왕은 크게 착각하여 내가 왕인데 새 왕이 탄생하다니…하며 시기와 질투와 분노를 갖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동방박사들은 아기를 만나 경배하고 하나님의 지시를 따라 헤롯왕을 만나지 않고 다른 길로 자기 나라로 돌아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헤롯은 박사들이 자기의 지시대로 따르지 않은 것을 알고 베들레헴 지방에서 태어난 2살 이하의 아기들은 모두 죽여버렸습니다.
우리가 지금 예수님을 볼 수 있는 것은 가상으로 그려놓은 예수님의 초상화 같은 것들을 통해서입니다. 서양사람이 그린 예수님 얼굴은 서양 사람을 닮은 얼굴입니다. 우리나라 화가 가운데 운보 김기창 화백이 갓 쓰고 도포 입은 예수님을 그린 것을 본 적이 있는데 그것은 완전히 한국사람 얼굴이었습니다.
성경에서 예수님을 만난다는 것은 기적 중에 역사 하시는 성령의 역사를 만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헤롯은 그때 구세주로 오신 예수님을 만날 수 있는 기회였는데 불행하게도 그 기회를 놓치고 말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입으로는 경배한다고 하였지만 속에는 살인계교가 꾸며져 있었습니다. 왜 헤롯은 복 받을 수 있는 기회를 놓쳤을까요? 그것은 그가 가진 권력 때문이었습니다. 헤롯은 철저하게 권력의 노예가 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권력의 중심 속에는 내가 최고라는 교만과 자만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철저하게 자기중심적입니다. 그러기에 그는 자기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 죄 없는 수많은 아기들을 죽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직장 때문에 예수 못 믿는 사람이 있습니다. 권력 때문에 예수 믿지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세상적인 지위 때문에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나는 어떠합니까?
옛말에 ‘화무십일홍 권불십년(花無十日紅 權不十年’라는 말이 있습니다. 어떤 꽃도 십일이상 가는 꽃이 없고 어떤 권력도 10년 이상 갈 수 없다는 말입니다. 성경도 말씀합니다. 겛 마르고 풀은 시들되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토록 있도다 세상 것은 오래 못 갑니다. 천천히 예수 믿으려고 하지 마십시오. 내일 일을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오늘날 우리 주위에도 수많은 헤롯이 있습니다. 수많은 헤롯 같은 지위의 유혹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오늘 우리는 그들에게 바른 예수를 가르치고 전도해야 하겠습니다.
성탄에 무관심했던 두 번째 사람은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입니다.
대제사장은 제사장들을 지휘 통솔하는 제사장들의 책임자입니다. 제사장은 본래 아론(모세의 형)의 자손 중에서 감당합니다. 그리고 그 직책은 종신직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탄생할 당시에는 현직의 대제장 외에 그의 대리자, 전직자, 또는 그의 가족 중에 유력한 자들도 대제사장으로 불렸습니다.
서기관은 유대교에 있어서는 모세의 율법에 정통한 학자들로서 이를 가르치는 임무를 가진 자들입니다. 다른 이름으로 랍비 혹은 율법사라고 불리워졌습니다. 문제는 여기에 있습니다. 이들은 누구보다 성경을 잘 알고 있는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헤롯이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에게 그리스도가 나실 장소를 물었을 때 그들은 서슴지 않고 미가서 5장 2절의 말씀을 일러주고 베들레헴에서 그리스도가 탄생하실 것이라는 장소까지 가르쳐 준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그들보다 동방의 박사들이 먼저 별을 보고 예수를 찾아왔지만 조금도 놀라지 않았습니다. 그들 중 하나도 박사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도 않았습니다. 또한 한 사람도 아기 예수께 가서 경배한 자도 없었습니다. 이들은 알기는 알되 믿지는 않았기 때문입니다. 지식에만 매달려 있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현대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는 나오지 않으면서 간혹 미션스쿨을 다닌 정도로 성경을 안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아느냐고 하면 학점 따기 위해 억지로 공부해서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는 믿지는 않습니다. 그러기에 구원이 없는 것입니다.
또 어떤 부인들은 간혹 이런 말을 합니다. 저희 남편은 교회는 안나와도 성경은 저보다 많이 알아요 그러나 이것은 아무 소용없습니다. 믿음은 지식을 초월하는 것입니다. 물론 성경을 알아야됩니다. 그러나 믿지 않으면 모르는 것 보다 못합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바르게 알지 못하기 때문에 자기가 알고 있는 지식을 교회를 비방하는데, 진리를 핍박하는데 사용합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많이 읽고 공부하고 알아야 합니다. 또한 믿어야 합니다. 거기에 구원이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을 아는 것이 지혜의 근본임을 알아야 합니다. 신학은 기초학문이 아닙니다. 모든 학문을 공부한 후 그 다음 신학을 공부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꼭 믿어야 합니다.
성도 여러분! 최고의 지혜는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아야 합니다. 믿어야 합니다. 여러분은 어떠합니까? 바른 지식을 가지십시오. 그래서 구주 예수님을 경배할 수 있는 복된 성도가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에 무관심한 세 번째 사람은 베들레헴의 여관주인들입니다. 누가복음 2장이 이를 증거해 줍니다.
국가의 명령으로 호적 하러 베들레헴에 요셉과 마리아가 갔을 때 여관들은 만원이 되어 그들이 들어갈 수 있는 방 한 칸을 구할 수가 없었습니다. 할 수 없이 마리아는 마구간에서 해산을 했고 아기를 강보에 싸서 구유에 뉘였습니다. 해산할 날이 차서 만삭된 마리아의 피곤한 모습을 보고도 깊은 관심을 가진 여관주인은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만일 그들이 마리아가 해산 할 아기가 만 인류의 죄를 대속해 줄 구세주인 줄 알았더라면 많은 여관주인들은 안방을 제공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들은 영의 눈이 감겨져 있었습니다. 그들은 오직 돈이었습니다. 몇 명 숙박하면 얼마가 나온다는 계산뿐이었습니다. 그들에게서 우리는 돈 때문에 예수를 믿을 수 없는 자들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교회를 이용하여 권력을 잡으려 하는 무리들이나, 교회를 이용하여 돈벌이하겠다는 자들은 올바른 믿음을 가진 것이 아닙니다. 그런 자들은 권력을 잡지 못하면 교회를 떠날 것이고 돈을 못 벌면 믿음을 버릴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일만악의 뿌리’ 말했습니다. 또한 우리들이 세상의 향락이나 물질에 집착해 있는 한 그리스도 탄생을 축하할 수 없을 것입니다. 육신이 인생을 살아가는데 돈은 필요합니다. 그렇다고 돈의 노예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돈이 사람 뒤를 따라와야지 사람이 돈을 따라다니면 비굴한 사람이 됩니다. 죄를 짓게 됩니다. 우리는 돈을 다스릴 줄 알아야 합니다. 그때 바른 경제관을 갖게됩니다.
생활이 어려웠을 때는 교회봉사도 잘하고, 기도생활도 잘하고, 성수주일 잘하더니 생활이 나아지니까 예수 잘 안 믿는 사람들을 간혹 보았습니다. 돈이 신앙생활에 장애를 일으킨 것입니다. 선진국은 대부분 기독교 국가입니다. 미국 대통령은 성경 위에 손을 얹고 취임서약을 합니다. 미국 돈에는 “God We Trust(우리는 하나님을 신뢰한다)"는 말이 새겨져 있습니다. 그러나 그 사회는 지금 어떠합니까? 너무 잘살게 되니까 하나님을 믿지 않습니다. 유럽의 많은 선진국이 기독교 국가이면서 도덕적으로 더 문란합니다. 돈을 하나님으로 섬기면 그때부터 그 사회는 병들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크리스마스 이브 저녁 어떤 마을의 교회에 청년들이 모여 금년부터 마을에 사는 어려운 할머니를 돕자는 의논을 하고 그 날 바로 크리스마스 카드와 떡과 담요를 사 가지고 할머니 집을 방문하였습니다. 청년들은 방 앞에서 할머니를 불렀습니다.
“할머니!”, “거기 누가 왔소?“ ”교회 다니는 청년들입니다.“, ”뭔 일이요?“, ”오늘이 예수님이 탄생한 날이라 저희들이 할머니께 조그만 선물을 드리려고 가지고 왔습니다.“, “나는 필요 없소” 한마디로 거절해버렸습니다. 젊어서 혼자 된 이 할머니는 남에게 주어본 일도 없고 얻어 먹어본 일도 없이 인생을 살아오신 분이었기에 성탄선물을 받지 않고 거절한 것입니다. 청년들은 모처럼의 정성이라 할머니께 그것을 계속 전해드리려 했지만 안으로 잠긴 문은 끝내 열리지 않았습니다. 할 수 없이 청년들은 그냥 돌아가 버렸습니다. 그런데 며칠 후 그 할머니는 굶어 얼어죽은 시체로 동네 사람들에게 발견되었습니다.
헤롯은 권력 때문에,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은 믿음 없는 지식 때문에, 여관주인들은 돈 때문에 성탄의 복을 체험하지 못했습니다. 신앙생활은 나의 삶의 최우선순위가 예수님이 되어야 합니다. 거기에 구원과 기적적인 하나님의 은혜가 넘치게 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내가 가진 세상적인 모든 조건을 초월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 말구유에 오신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할 수 있습니다. 거기에 영생이 있습니다. 천국이 있습니다. 이 은혜를 받는 금년 성탄절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출처 : C3TV 설교방송 2002년 12월 22일
임마누엘
마태복음1:18-25
박삼우 목사(잠실중앙교회)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이 일년 중 가장 기뻐하는 날이 성탄절입니다. 어린이들은 물론이고 노인에 이르기까지 동서양 모든 인종의 장벽을 넘어서 그리스도인들은 성탄절을 기뻐합니다. 벌써 12월만 되면 우리는 성탄절 장식을 보고, 또 크리스마스 케롤을 들으면서 성탄절의 기쁨에 잠깁니다. 하지만 다시 한 번 생각해봅시다. 왜 우리가 성탄절에 기뻐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혹시라도 아무 생각 없이 그냥 분위기에 휩싸여 기뻐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기쁨의 이유, 기쁨의 근거를 다시 한번 새롭게 확인해야겠습니다.
오늘 읽은 본문에는 예수님의 이름이 나타납니다. 두 개의 이름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 두 이름은 우리가 성탄에 왜 기뻐하는지 그 이유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첫 번째 이름은 예수입니다. "아이를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한 자이심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라는 말은 구약의 여호수아라는 말과 같은 말로서 '여호와는 구원이시다' 라는 뜻입니다. 본문에는 예수님이 예수라는 이름으로 불리워져야 하는 이유를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바로 여기에 우리가 성탄에 기뻐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이름 그대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이 성탄절에 세상에 오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성탄절에 세상에 오셨으니 이 얼마나 기쁜 일입니까? 성탄절에 주님이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세상에 오셨기에 우리는 성탄절에 기뻐합니다.
예수님의 또 다른 이름은 임마누엘입니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고 했습니다. 임마누엘이란 말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뜻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 바로 여기 성탄의 또 하나의 의미가 있고 우리가 성탄에 기뻐하는 또 하나의 이유가 있습니다. 성탄을 통해 하나님이 임마누엘로 우리와 영원히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바로 이 임마누엘의 은총에 대해 함께 은혜를 나누겠습니다.
여러분, 복이란 무엇입니까? 여러분은 어떤 것을 복이라 생각하십니까? 생각 같아서는 그만하면 충분히 행복할 수 있을 것 같은데 행복하지 못한 사람이 많습니다. 그만하면 얼마든지 웃고 살아도 되겠는데 풀죽어서 사는 사람이 많습니다. 왜 그럴까 생각해봅니다. 축복관에 문제가 있습니다. 축복관, 행복관이 먼저 바로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되지 않는 한 아무리 복을 받아도 복을 복으로 알지 못합니다. 복을 복으로 알지 못하니 큰 은총 속에 있으면서도 늘 불평입니다. 복이 무엇인지를 먼저 바로 알아야 합니다.
최고의 복은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 먼저 분명히 해야 합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받는 최고의 복은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구약 성경을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인생에게 복을 주실 때 하신 말씀은 언제나 "내가 너와 함께 하리라"는 약속이었습니다. 보십시오. 성경에서 복을 가장 많이 받은 사람은 아브라함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아브라함이 받은 복을 생각할 때 자손과 땅을 생각합니다. 하늘의 별과 같이 땅의 모래와 같은 많으리라는 자손의 축복, 그리고 동서남북을 너에게 주리라는 땅의 약속, 이것 분명 아브라함이 받은 큰복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받은 최고의 복음 이러한 것들이 아니었습니다. 창세기 15장1절에 하나님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브라함아 내가 너의 방패요 내가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라." 하나님 자신이 아브라함의 가장 큰 상급이라고 했습니다. 아브라함이 받았던 가장 큰복은 하나님을 소유한 것,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함께 하신 것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이 받은 자손과 땅의 모든 복은 하나님을 소유한 결과에 지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함께 하실 때 다른 모든 복은 따라 옵니다. 그래서 하나님 야곱에게도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킬 것이라." 하나님은 애굽으로 내려가는 모세에게도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와 함께 가리라." 모세의 뒤를 이은 여호수아에게도 약속하셨습니다. "강하고 담대하라 내가 너와 함께 하리라. 내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참으로 저들은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으로 승리했고 하나님 함께 하심으로 영광을 얻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한다는 것으로 마음이 기쁘고 행복합니까? 그래야 기독교인입니다. 깊이 생각해야 됩니다. 문제는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입니다. 소유의 문제가 아닙니다. 내 소원 성취 여부도 아닙니다. 얼마나 성공했느냐, 얼마나 출세했느냐도 아닙니다. 문제는 한 마디로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입니다.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에 대해 두 가지 서로 다른 입장이 있습니다. 사람이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을 생각하는 편이 있고, 하나님께서 사람에게로 오시는 것을 생각하는 편이 있습니다. 세상의 모든 철학, 모든 사상, 모든 종교는 사람이 하나님께로 나가는 것입니다. 모든 노력과 수고를 기울여 하나님께 나가가자 합니다. 방법과 이야기는 달라도 목적은 사람이 하나님께로 나가는 길을 찾고자 함입니다. 도덕, 정결, 수도, 율법, 선행, 극기, 고행. 이 모든 방법을 통해 인간이 하나님께로 나가고자 합니다.
이에 대해 기독교는 정반대의 입장에 섭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찾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오십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찾아오시는 것, 이것이 바로 기독교요 복음입니다.
여러분, 혹시라도 복 받기 위해, 천당 가기 위해, 구원 얻기 위해, 내가 좀더 진실하게 의롭게 살자 - 이런 생각 없습니까? 이것이 바로 세상종교요 성경적으로 말하면 율법주의입니다. 이런 신앙 가지고는 평생을 믿어도 깨끗한 웃음 한 번 웃을 수 없습니다. 평생을 예수 믿어도 그 마음에 진정한 은혜 한번 채울 수 없습니다. 그 신앙구조 자체에 문제가 있습니다. 은혜란 그런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찾아오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찾아오시는 여기에 은혜가 있고 구원이 있습니다.
돌이켜보면 하나님은 처음부터 사람과 함께 하시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에덴 동산에서 하나님께서 인생과 함께 거하시며 인생과 함께 교제하셨습니다. 그러나 죄로 인해 이 교제는 깨어졌습니다.
이 교제가 깨어지고 난 다음에도 하나님은 사람들과 함께 거하시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거듭해서 구약의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내가 너와 함께 하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장막을 칠 때는 그 장막 가운데 성막을 치게 하였습니다. 성막에 임재하심으로 백성 가운데 거하시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하나님의 역사는 한계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영이십니다. 육체를 가진 인간은 영이신 하나님을 뵐 수가 없었습니다. 더구나 죄로 타락한 인간이 거룩하신 하나님의 영광을 가까이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구약에 사람들이 하나님을 뵈올 때 한결 같이 그들이 두려워하며 죽게 되었다고 고백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제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친히 오십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직접 만나고 직접 인간과 함께 거하시기 위해 인간의 몸을 입고 사람으로 오십니다. 하나님께서 마리아의 몸을 통하여 사람이 되셔서 아기 예수로 인간 문화 속에 들어오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성탄이요 여기서 임마누엘이 시작됩니다.
이 사실을 요한은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여기 "우리 가운데 거한다"는 말은 우리 가운데 천막을 쳤다는 뜻입니다. 이 천막이라는 헬라어는 구약시대 이스라엘 회중가운데 하나님 거하셨던 성막과 같은 단어입니다. 구약 시대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성막을 치고 함께 거했듯이 이제는 예수님이 사람들 가운데 육신의 장막을 치고 직접 함께 거하시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성육신이요 임마누엘의 은총입니다.
어떤 분이 "내가 왜 그리스도인이 되었는가?"하는 것을 다음과 같이 묘사한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내가 어떤 날 험한 세상을 살다가 실수해서 깊은 우물에 빠졌습니다. 그래서 살려달라고 소리쳤더니 한 사람이 지나가다가 내려다보고는 "아이구 이 일을 어찌할꼬. 아무래도 당신은 전생에 죄가 많아서 그런 것 같으니 참회하고 저승으로 가게나" 하고는 지납니다. 조금 있으니 또 한 사람이 들여다보더니 "사람이란 아차 하면 실수하는 법이니 이번 일을 거울삼아 다시는 이런 실수를 하지 않도록 조심하게" 하면서 그냥 또 지나갔습니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 사람은 우물 안을 들여다보더니 "이거 큰일났구나" 하고 놀라면서 급히 사다리를 구하여 직접 내려와서는 구해 주었습니다. 비유하기를 첫 번째 사람은 석가모니이고, 둘째 사람은 공자이며, 세번째가 예수 그리스도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왜 잘못되었느냐고 비판하지 않으셨습니다. 이렇게 저렇게 하면 살 것이라고 가르치고만 계신 것 아닙니다. 친히 사람의 몸으로 세상에 오셨고 우리를 구원해주셨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하늘 높이서 팔짱을 끼고 구경하시는, 그런 하나님이 아닙니다. 성경이 말씀하시는 하나님은 찾아오시는 하나님이요 구원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3장 16절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라고 했습니다. 성경 요한복음 3장 16절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라고 했습니다. 여기 주셨다는 말은 소유권의 이전을 뜻합니다. 원래는 하나님 편에 계셨던 예수님입니다. 이제는 우리편으로, 사람 편으로 오셨습니다.
이렇게 주님 탄생으로 시작된 임마누엘은 승천으로 완성됩니다. 주님 승천하실 때 약속하셨습니다.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사실 주님 세상에 계실 때는 임마누엘에 한계가 있었습니다. 여기 계시는 동안 저기는 계실 수 없었습니다. 이 사람과 함께 있는 동안 저 사람과 함께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승천하신 예수님은 영으로 우리 속에 계십니다. 언제 어디서나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옛날 러시아에 지혜롭고 선한 황제가 있었습니다. 그는 백성들을 매우 사랑해서, 백성들이 어떻게 살고 있나 알고 싶어 종종 노동자나 거지 차림을 하고 가난한 백성들의 집을 찾아갔습니다. 그의 방문을 받은 사람들 중 아무도 그가 황제라는 사실을 몰랐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황제를 잘 대접하기도 하고 어떤 사람을 박대하기도 했습니다. 한 번은 황제가 오두막집에 사는 몹시도 가난한 사람을 찾아갔는데 주인은 황제를 극진하게 대접했습니다. 황제는 그 집에서 가난한 사람이 먹는 음식을 함께 먹고, 하루 밤을 함께 지냈습니다. 그리고는 떠났는데 황제는 왕복을 입고 다시 그 사람을 찾아왔습니다. 가난한 사람은 깜짝 놀랐습니다. "아제 나와 함께 잔 저 분이 이 나라의 황제였다니" 상상도 할 수가 없는 일이었습니다. 황제는 물었습니다. "그대는 지난밤에 나를 정성껏 대접했노라. 이제 내가 그대의 소원을 들어주겠노라. 그대의 소원이 무엇인가? 소원을 말하라." 그 때 그는 이렇게 말했다. "황제께서는 궁궐과 그 영광을 떠나 이 어둡고 비천한 장소에 저를 찾아와 주셨습니다. 제가 먹는 초라한 음식을 함께 드셨고, 저와 거처를 함께 하셨습니다. 황제께서 저와 함께 거하셨다는 사실, 이 사실만으로 저는 만족합니다. 달리 아무 소원이 없습니다."
여러분, 주님은 황제가 아니라 우주의 주인이요 만 왕의 왕이십니다. 주님은 하루 밤을 우리와 함께 지낸 것이 아니라 영원히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이 얼마나 놀랍고 고마운 일입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거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그냥 단순히 곁에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냥 지켜보고 있는 것 아닙니다. 하나님 우리와 함께 하시는 것은 곧 우리를 도우심을 뜻합니다. 우리가 연약할 때 힘을 주시고, 괴로울 때 격려하시고, 모든 어려운 형편 가운데서 은혜를 베푸십니다. 힘이 되어 주시고 능력이 되어 주십니다. 어떤 어려움 가운데서도 승리할 수 있도록 함께 해주십니다. 여러분, 혹시라도 낙심 가운데 있습니까? 왜 나 혼자인 것처럼 실망하고 괴로워하고 있습니까? 나는 결코 혼자가 아닙니다. 혼자일 수가 없습니다. 내 속에 주님이 임마누엘로 계십니다. 주님 약속하셨습니다. "내가 과연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며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곁에 계시는 주님을 확인하십시오. 나는 약하지만 주님은 강하십니다. 예수님 요한복음 10장에서 말씀하셨습니다.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세상의 어떤 세력도 주님과 함께 하는 우리를 해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깊이 생각해보면 바로 여기 주님 편에서는 엄청난 자기 희생의 사랑이 있습니다. 그냥 우리와 함께 하신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우리와 함께 하시기 위하여 죄인의 자리로 내려오셨습니다. 우리와 함께 하시기 위해 주님 하늘의 영광을 버리시고 죄인의 자리까지 내려오셨습니다. 참으로 엄청난 하나님의 지기 희생이 아닐 수 없습니다.
다미안 신부의 이야기를 여러분 아실 것입니다. 그는 평생 문둥병자에게 복음을 전하며 나환자와 함께 살다가 죽은 사람입니다. 그가 나환자들만 사는 몰로카이 섬을 지나다가 불쌍한 생각이 들어 그들을 전도하기로 결심합니다. 설교사로서 많은 구호 물자를 가지고 섬을 방문하여 저들을 도우며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다미안을 향해 마음을 열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마음만을 내어주지를 않았습니다. 마침내 다미안은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나에게 나병을 주시옵소서." 결국 그는 나병에 걸립니다. 그리고 나환자들을 찾았을 때 저들이 마음 문을 열어줍니다. 나환자들을 구원하기 위해 나환자가 된 것입니다. 그 전에도 환자들에게 먹을 것을 줄 수 있었고 치료를 해줄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마음을 얻을 수는 없었습니다. 결국 자신도 나환자가 되고서야 저들의 마음을 열 수 있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죄인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이 바로 여기 있습니다. 하나님이 죄인의 자리로 내려오신 것이 사람이 나환자 된 것과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우리가 그 마음을 그림자로나마 볼 수 있습니다. 멀리서 의로운 자리에서 사랑하신 것이 아니라 죄인의 자리로 내려오셔서 함께 죄인이 되셨습니다. 이것이 성탄에 나타난 우리를 향한 예수님의 사랑이요 자기 희생입니다. 이런 희생을 지불하시고 주님 말씀하십니다. "나는 너의 하나님이다. 나는 너의 구세주다. 내가 너를 사랑한다. 내가 너와 함께 할 것이다." 이 엄청난 자기 희생을 지불하시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를 떠나지 아니할 것이다." 끊임없이 임마누엘을 계시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우리를 버리지 않습니다. 어떻게 해서 나를 구원하셨고, 어떤 희생을 지불하고 나와 함께 하시는데, 나를 버리시겠습니까? 내가 잘못해도 내가 범죄해도 하나님 나를 버리지 않습니다. 결코 버리지 않습니다. 함께 하시는 주님을 믿어야 합니다.
깨닫고 보면 우리는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습니다. 주님이 나와 함께 하시는데 무엇을 더 바라겠습니까? 내 죄를 용서하실 뿐 아니라 나를 기쁘게 받으십니다. 내가 부를 때 응답하시고, 일마다 때마다 은혜 내리시고, 힘과 능력 더하십니다. 참으로 우리는 어떤 환경에서도 승리하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한 십 년 전에 베들레헴을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베들레헴은 예루살렘에서 남쪽으로 10km도 채 떨어져 있지 않기 때문에 예루살렘에서 쉽게 갈 수 있는 곳이었습니다. 베들레헴 예수님 탄생하신 곳에는 예배당이 세워져있습니다. 예수 탄생 교회입니다. 이 예배당의 특징은 문이 작다는 것입니다. 허리를 굽혀야 들어갈 수 있을 정도의 아주 작은 문입니다. 그 예배당 안에 들어가면 밑으로 굴 같은 것이 있고 그 안에 내려가면 길이가 조그마한 방이 있습니다. 거기 바닥에 보면 별 모양의 모자이크가 있는데, 그곳에 "이곳이 예수 그리스도가 동정녀의 몸에서 태어나신 곳이다"는 글이 새겨져 있습니다. 저는 그 자리에 섰을 때 이곳이 주님이 나신 곳이다 하는 생각에 감격도 있었지만, 한 편으로는 거기 켜놓은 수많은 등불들과 또 이상한 장식들로 인해 마음이 상했습니다. 온갖 종류의 요상한 장식들로 인해 말구유의 주님 탄생의 모습은 상상도 하기 어려웠습니다. 마음이 산란했습니다. 솔직히 화가 났습니다. 그렇게 해서 안뜰로 나오니 마침 거기 한 무리의 관광객들이 영어로 "고요한 밤 거룩한 밤" 찬송을 합창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그곳에 서서 함께 찬송을 불렀습니다.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었지만 함께 힘차게 찬송을 불렀습니다. 말 그대로 감격이었습니다. 찬송을 부르는 가운데 모두의 마음이 하나가 되었고 그 가운데 강한 주님의 임재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바로 거기 찬송을 부르는 모든 사람들의 심령 속에 주님은 살아 계셨던 것입니다. 우리는 찬송을 부른 후 서로 박수를 쳤으며 정답게 인사를 나누었습니다. 그 때 저는 확신했습니다. '예수님은 이제 저 안에 저렇게 꾸며놓은 장소와는 아무 상관없다. 지금 내 마음속에 그리고 저 분들의 마음속에 주님이 살아 계시지 않는가. 예수님은 국경과 인종의 장벽을 넘어 지금 찬송을 부르는 우리의 마음속에 임마누엘로 함께 하신다.' 그렇습니다. 베들레헴 예수 탄생 교회, 주님은 거기 계시지 않았습니다. 주님, 온 세계 어디든지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임마누엘로 함께 살아 계십니다.
기도: 임마누엘의 주님, 이천 년 전 저 베들레헴 말구유에 오셔서 영원히 우리와 함께 하시는 그 큰 은총을 감사 드립니다. 이제 이 시간 여기 고개 숙인 모든 주의 백성들의 심령 속에 임마누엘의 은총이 충만케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임마누엘의 은혜로 세상의 어떤 어려움에서도 승리하게 하시고, 임마누엘 은총으로 주께 영광 돌리며 살아갈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출처 : C3TV 설교방송 2002년 12월 22일
베들레헴에 나신 예수
미가 5:2-6
류철량 목사(부천동광교회)
이번 대통령 선거는 토끼와 거북이의 경기를 지켜보듯 많은 사람들이 이회창 후보가 승리하리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의외로 거북이로 보았던 노무현 후보가 당선했습니다. 전직 대통령까지 지지 선언을 하면서 세몰이에 성공했으나, 두 번째 도전했던 이 후보는 고배를 마셨습니다.
대통령 당선자는 가난했습니다. 겨우 초등학교를 졸업했으나 중학교 갈 형편이 못되었습니다. 책값 만 내고 중학교입학금은 농사져서 내기로 하고 중학생이 되었지만 그것도 4년 만에 졸업했습니다. 고등학교를 포기하고 말단 공무원 시험준비를 하다가 3년 장학금을 보장받고 부산상고에 갔습니다. 학교를 졸업하고 농협에 취직하려고 시험을 보았으나 탈락했습니다.
경상남도 진영에 있는 대창 초등학교가 이름이 널리 알려지고 있습니다. 그 학교 출신 노무현씨가 대통령에 당선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뿐만이 아니라 대통령 부인이 두 명이나 나온 것입니다. 김영삼 전 대통령 부인 손명순 여사와 노무현 당선자의 부인 권영숙 여사도 그 학교 출신입니다. 권영숙씨는 아버지가 좌익 활동을 하다가 감옥에 가고 할아버지와 할머니 손에서 자랐습니다. 아버지는 감옥에서 죽고 홀어머니가 그를 키웠다고 합니다. 계성 여상에 다니다가 3학년 때 중퇴하고 취직했습니다. 그가 영부인이 되었습니다.
노 당선자는 여섯 번 입후보하여 네 번 낙선하고 두 번 당선했습니다. 온갖 역경과 시련을 딛고 일어나 이 나라의 최고 지도자의 자리에 우뚝 섰습니다. 국민들은 그에게 희망을 걸었습니다. 자라나는 우리 아이들에게 희망이 되었으면 싶습니다. 어쩌면 미국의 링컨같지 않습니까? 그들은 실패해도 포기하지 않은 것입니다. 가난에 반항하고 위기에는 정면 돌파하는 사람들의 인생이 아름답습니다.
베들레헴에서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탄생했습니다.
본문말씀 2절을 보세요.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베들레헴이나 에브라다는 이명일지(二名一地)입니다. 한 동네를 베들레헴이라 부르고 에브라다라고 부릅니다. 에브라다는 고대 이름이고 베들레헴은 후대 이름입니다. 베들레헴은 예루살렘에 비해 보잘것없이 지극히 작은 촌락입니다. 그 크기와 거주하는 사람의 수는 지극히 작고 보잘 것 없는 곳입니다.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아는 유명한 특정지역의 후광을 받거나 영향력 있는 가문을 통해서 오신 것이 아닙니다. 가난하고 작은 시골마을에서 탄생하셨습니다.
예수는 다스릴 자로 오셨습니다. 왕자로 오신 것이 아니라 왕으로 오셨습니다. 예수께서 베들레헴에서 나셨을 때 동방 박사들이 예루살렘에 와서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뇨 우리가 동방에서 그의 별을 보고 그에게 경배하러 왔노라" 하니 헤롯왕과 예루살렘이 소동했습니다(마 2:1-1-3). 예수님은 빌라도로부터 이런 질문을 받았습니다.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예수님은 대답하기를 "내가 왕이니라 그러나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요 18:33-37).
그는 세상의 통치자가 아니라 이스라엘의 통치자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다스리며, 그의 백성의 마음과 삶을 지배하십니다. 우리는 영적으로 이스라엘입니다. 예수는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로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셨습니다. 2절에서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는 말은 베들레헴에서 나실 자가 통치자가 되어 하나님께로 올 것이라는 것입니다. 나사렛은 작을지라도 메시아를 키웠습니다. 예수님은 나사렛 사람이라는 별명이 있습니다. 어린시절 나사렛에서 자라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제자 빌립이 나다나엘을 만나 예수님을 이렇게 소개합니다.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를 우리가 만났으니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니라" 그때 나다나엘이 말하기를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요1:45-46) 얕잡아보고 무시하는 말입니다. 출생지가 유명한 자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유명한 자가 출생지를 유명하게 합니다. 나사렛은 갈릴리 지방에 있는 작은 마을입니다. 그때 당시 갈릴리 사람들은 교양이 부족하고 촌스러운 사투리와, 이방인들과의 교역 때문에 멸시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나사렛 사람이라는 말만 듣고 예수님을 멸시했던 것입니다. 겉만 보고 사람을 평가하면 곤란합니다.
베들레헴에서 이스라엘을 먹이는 목자가 탄생했습니다.
목자란 양을 인도하며 먹이는 자입니다. 4절을 보면, "그가 여호와의 능력과 그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의 위엄을 의지하고, 서서 그 떼에게 먹여서 그들로 안연히 거하게 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는 양을 먹이는 목자이십니다. 먹일 때 앉아서 먹이는 것이 아니라 서서 먹입니다. 앉아 있는 것은 재판장의 자세이고 서 있는 것은 시중 드는 모습니다. 자기 양떼들을 돌보며 사나운 짐승이 공격하는 것에 대비한 자세입니다. 그는 굶주린 영혼을 먹이는 목자입니다. 그는 말씀으로 인간의 영혼을 먹이고 영적인 갈망과 욕구를 만족하게 채워주십니다. "대저 저는 우리 하나님이시오 우리는 그의 기르시는 백성이며 그 손의 양이라 너희가 오늘날 그 음성 듣기를 원하노라"(시95:7) 그에게 나아와 그를 따르는 자는 굶주리거나 목마르지 않습니다. "그들로 안연히 거하게 할 것이라" 하였습니다. 양떼들을 안전하고 평안하게 해준다는 뜻입니다.
"이제 그가 창대하여 땅끝까지 미치리라" 하였습니다. 소수로 시작된 하나님의 백성의 수가 증가할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의 나라는 쉬지 않고 성장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선한 목자 예수께서 좋은 것으로 잘 먹이심으로 번성하는 것입니다.
목자는 뜨거운 여름 뙤약 빛에서나 추운 겨울밤이나 양떼를 거느리고 들판이나 산에서 양떼와 함께 지냅니다. 목자의 눈은 양떼에게서 떠나지 않습니다. 목자의 마음은 언제나 양에게 있습니다. 양 한 마리 한 마리에 관심을 기울입니다. 양을 우리로 데리고 들어 올 때는 그 수를 일일이 셉니다. 한 마리라도 없으면 양떼를 들에 두고 잃은 양을 찾습니다. 다윗은 "여호와는 나의 목자"라고 노래했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도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 하시는도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시 23:1-4) 예수님을 목자로 믿고 따르시기 바랍니다. 목자가 없는 자는 곤고를 당합니다(슥 10:2). 부족함이 없는 삶은 예수님을 나의 목자로 삼고 사는 것입니다.
베들레헴에서 이스라엘의 평강이 탄생했습니다.
5절에서 "이 사람은 우리의 평강이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 사람은 "통치자"이신 예수를 말합니다. 평강은 단순히 전쟁이 없는 상태 뿐아니라 죄인이 하나님과 화목하는 상태까지를 말합니다. "앗수르 사람이 우리 땅에 들어와서 우리 궁들을 밟을 때에는 우리가 일곱 목자와 여덟 군왕을 일으켜 그를 치리니"(5절) 라고 했습니다. "앗수르 사람"이라는 용어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괴롭히고 그들을 파멸 시키고자하는 모든 세력을 의미합니다.
아무리 믿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고통이 있고 환란을 겪습니다. 환난을 당할 때 일곱 목자를 일으켜 원수를 물리쳐주십니다. 여기서 말하는 일곱 목자는 목자장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좌하는 영적 지도자들을 말합니다. 그리고 여덟 군왕은 메시아의 사역을 위해서 헌신하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이들은 모두 주님의 교회를 위해서 세우신 지도자들입니다. 예수는 평강의 왕으로 베들레헴에서 나셨습니다. 세상에는 근심되는 일과 걱정거리가 많습니다. 모든 사람이 갈구하는 것은 평화요 안정입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평화와 만족을 주십니다. 예수께서 인간을 하나님과 화해시키시고,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과 화평을 맺게 하시고, 인간의 마음에 평강을 가져다 주십니다.
사9:6에서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서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평강의 왕이라 할 것이라" 하였습니다. 예수는 우리의 화평이십니다.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원수 된 것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 이는 이들로 자기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 원수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 하시고, 또 오셔서 먼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고 가까운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엡 2:14-17)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그의 사랑을 예수그리스도를 통해 사람의 심령에 부어 주십니다.
내 영혼의 그윽히 깊은데서 맑은 가락이 울려나네
하늘 곡조가 언제나 흘러나와 내 영혼을 고이 싸네
평화 평화로다 하늘 위에서 내려오네
그 사랑의 물결이 영원토록 내 영혼을 덮으소서(찬송 469장)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평화를 누리라"(롬 12:8) 우리는 하나님과 화평케 된 자로써 다른 모든 사람들과 평화를 누려야 합니다.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신 예수를 통해 평강을 누리며 적극적으로 화평케 하는 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그의 근본은 상고에 태초에니라"하신 2절 말씀은 예수는 하나님과 동일하신 분이요 영원전부터 계신 분이라는 뜻입니다. 그분은 육신을 입고 오셨지만, 태초부터 계셨다는 말입니다.
예수는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십니다. 어떤 사람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예수를 믿고 나니까 세가지 일이 생기더군요. 첫째로 모든 불안이 없어지고, 둘째로 대단히 명랑해지고 셋째로, 어려움이 많아요 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나서 한마디 덧붙였습니다. 어려움이 많이 있어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능히 극복 할 수 있어요. 평안도 좋고 명랑해지는 것도 좋습니다. 그보다 어려움을 극복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게 오라!"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내게로 오라 목마른 자는 와서 생명수를 마셔라. "내 안에 있으라!" 주안에서 평안을 누리고 담력을 얻으라는 것입니다. "가라!" 집으로 직장으로 가서 복음을 전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예수를 보내신 것은 나를 다스리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나를 먹이시기 위해서입니다. 좋은 것으로 먹여 주실 때 잘 받아먹어 건강하고 능력 있는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분은 우리의 평강 이십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주는 평안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요14:27). 여러분 마음의 구유에 주님의 평강이 가득한 성탄절이 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