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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록동서원
지나온 역사를 고찰할때 정치나 교육은 항상 밀접한 관련를 가지고 이루어져 왔으며 ,계급 구조를 통해 교육은 항상 특층 소수인에게만 주어져왔다.한 왕조나 국가의 사회구조 전반을 이해하기위하여서는 그 사회의 교육이 어떤 지향점을 지니고 있는가를 먼저 알아보아야 한다.이러한 맥락속에서 송대라는 사회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시대의 민간 교육기관을 연구할 필요를 느끼게 된다.따라서 송의 주요 교육기관으로는 서원을 꼽을 수 있으며 ,서원이 그 사회속에서 ‘어떤 위치를 차지하는가’ 는 문제를 위해 송대 최초의 서원이었으며 남송대 서원 교육의 중심지였던 백록동 서원을 중심으로 특히 백록동서원의 전역사중에서 주희가 백록동서원의 동주였던 시대를 중심으로 교육내용과 성격등을 살펴보고자 한다.
당시대 이후의 서원은 송시대에 이르러 민간학교의 중심이 되어 청말까지 중국의 사회 교육 ,학술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으며, 또한 서원은 고려말에 한반도에 유입되어 조선사회에 깊게 뿌리내려 사회전체를 지배하고 조선왕조 몰락에 주된 원인의 하나가 되었다.
대략 백록동서원에 대해 기술하면 당시 송왕조는 문을 중시하고 무를 경시하는 숭문 정책을 실시하여 과거를 통해 인재를 양성하였고 학교기관은 과거 준비기관의 성격을 지니게 됨에 따라 유생들의 평소의 학업이나 인격 품덕에 대해서는 거의 고려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학교교육에 있어서도 유생들의 도덕교육에 대해서는 소홀히 하게 되었고 고시과목에만 치중하여 학교는 과거장으로 가는 통과문으로 되었으며 교육이란 과거의 예속물이 되고 말았다.이러한 과거의 폐단을 비판하며 출현하는것이 남송대 서원이다.따라서 남송대 교육사상 서원이 차지하는 비중은 매우 크다.
백록동 서원은 남당시기에 서원제도를 기반으로 창건된 후 여러 발전단계를 거쳐 남송 효종 7년 (1180) 에 주희에 의해 재건되어 역사상 하나의 길잡이의 역할을 한다. 주희의 서원재건은 서원규모상 내.외적으로 상당한 의미를 갖는다.내적으로는 백록당 서원은 백록당 서원을 통해 백록제생에게 교육목표,교육 내용 등을 제시함으로써 이전의 노장적,불교적성격의 서원에서 완전히 탈피하여 반과거의 성격을 가진 이학 교육 기관으로 변화하였다.
백록당 서원의 교육목표는 성인이 되는 것이었으며 주희는 이와같은 목표를 위해 구체적인 세목으로 백록동규칙(도덕,지식,생활면 규칙)을 학생들에게 제시하였다.학습내용은 성인이라는 교육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경,사,자류의 모든 책이 포함되었다.이와 같은 교육목표와 내용을 지향했던 백록동 서원은 공리주의를 추구하던 당시의 관학인 태학과는상반되는 반과거의 성격을 나타냈으므로 당시 지방교육과 순수학문에 새로운 기풍을 조성하였다.
그결과 백록동서원은 송대 서원운동의 최고 상징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후세의 중국교육에 까지도 백록동 규칙을 통해 간접적으로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따라서 이 연구에서는 송대사회에서 차지하는 백록동 서원의 역할과 의미를 이해하는데 목적이 있으며 이를 위해 본론에서 우선 백록동 서원의 정신적 기반이었던 주희의 사상부터 1.장에서 알아본 다음 2.장에서는 백록동서원의 연혁을 당대로부터 남송까지 밝히므로써 ,주희가 백록동서원의 역사에 미친 영향을 살펴보고자 하며 3.장에서 백록동 서원의 교육내용으로서 실제적인 교육목표 교육내용 교육방법을 살펴보려고 한다.4.장에서 남송대 태학의 교육내용과 백록동서원의 교육내용을 비교하여 백록동 서원의 성격을 규명하고 나아가 이상의 논의를 통해본 백록동서원이 중국역사에서 차지하는 역사적 의미를 고찰하고자 한다.
1.주희의 사상
주희의공부사상은 두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첫째 자각활동및 마음의 능력에 대한 이해로서 주로 마음(심),본성(성),정감(정)등에 대한 관념의 해석이고,둘째 부분은 덕을 이루려는 노력과정 맟 관건등에 대한 주장이다.그것은 주로 궁리,격물,치지,거경 등의 여러 학설에 포괄되어 있다.
심,성,정에 대해 논하면 마음을 말할 때 그 본성은 이른바 성이고 그움직인 곳이 즉 정이다.이와 같다면 마음은 성 및 정을 양면으로 삼고 있다.마음을 성 일면에 대해여 말하면 이치를 깨닫는 능력이므로 선하지 않음이 없다.그 발동한 곳의 구체적 활동이 바로 정이다. 정이 이치에 맞을수도 있고, 이치에 맞지 않을수도 있다.이곳에 선 또는 불선의 문제가 생긴다.이리하여 학문 또는 공부는 마음이 발동한 것이 모두 이치에 합치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아야 한다. 바꿔 말해 마음에서 말하는 공부는 또 정에서 실현이 된다.이것은 공부론 중에서 심,정,성,을 논하는 주요 이론의 가락이며 심,성,정의 설은 단지 주희의 공부이론의 길만을 제공하였을뿐 ,구체적 실현과정이라면 궁리,거경,치지,격물 등의 설법으로 보였 주었다.이제 거경문제에 대해 대략 분석하고 궁리는 격물,치지와 함께 논한다.경이란 의지상태상의 공부를 가리켜 말한 것이며 ,경을 체용으로 나누어 아직 발동하지 않고 함양된 것을 본체로 삼고 그것을 발동하여 성찰하는 것을 작용으로 삼았다.이리하여 경은 만라 밖을 관통하는 공부로 되었다.또 격물,치지 등 공부의 동력 조건이 되기도 하였다.대개 주희의 뜻은 경이란 의지상 태만하지도 구차하지도 않는 공부를 말하며 어떤때는 의와 나누어 말할 수도 있지만 사실은 안팎을 일관하고 위 아래를 꿰뚫어 버리는 근본 공부이다.
다음 글은 ‘격물치지’란 문제상에 있어서 확정적인 견해를 대표한다고 할 수 있다.궁리란 뜻도 역시 그 가운데 포괄된다.
“이른바 치지가 격물에 있다는 것은 ,나의 앎을 이루려고 하는 것이 물질에 즉하여 그 이치를 캐물어가는데 있음을 말한다.대개 인간 마음의 영특함은 인식 능력을 가지고 있지 않음이 없으며 천하의 만물은 이치를 가지고 있지 않음이 없다.오직 이치에 대하여 아직 캐묻지 않음이 있으므로 그 인식능력이 모조리 다 발휘되지 않는 것이다.이 때문에 대학의 처음 가르침은 반드시 학자로 하여금 천하의 만물에 즉하여 ,이미 그가 알아낸 이치에 의거하여 그것을 더욱 캐묻게 하여 그 극치에 이르도록 추구하지 않음이 없다. 이렇게 힘을 씀이 오래 되어 어느날 아침에 툭트여 꿰뚫어 보게 되면 ,여러 물건의 겉으로 드로낸 것과 속깊이 숨겨져 있는것과 큰테두리와 세밀한 곳에 앎이 이르지지 않음이 없다.그리고 내 마음의 전체의 큰 작용이 밝게 되지 않음이 없다.이것이 바로 앎의 지극함이라 하는 것이다.”
글가운데서 우선 “나의 앎을 넓힌다”로서 치지를 해석하였는데 이것엔 문제가 없다. 그 다음 “사물에 즉하여 그이치를 캐물음”로서 격물을 해석하였다.그리하여 궁리와 격물은 격리되지 않았고 격물의 뜻은 궁리를 통하여 그것을 말하였다.즉 궁리와 치지는 안과 밖이 서로 응하며 다시 한걸음 더 나아가 궁리와 치지는 동시에 완성 되는 것이다 격물 궁리의 목적은 안으로는 “내마음의 온 본체와 큰 작”용의 밝음을 달성하려는데 있으며 ,밖으로는 “관통된 이치에 대한 파악을 달성하려는 데 있다.그리하여 치지격물은 단지 같은 한 층면의 공부요,그 목적의 최후엔 여전히 치지를 중시하였다.총괄적으로 말하면 궁리격물은 한 수 아래의 공부요 그 목적은 내 마음의 본체를 온전히 하고 그 작용을 크게 하여 밝히는데 있다.내 마음의 큰 작용이 이미 밝혀지면 안으로 그 덕을 완성할 수 있 고, 밖으로는 문화를 이룰 수 있다.즉 통상 내성외왕의 길이다. 이 가운데 수신은 또 다른 관건이다.
주희의 실천공부 이론을 보면 격물궁리에서부터 착수하여 치지의 완성을 추구한다.이로 말미암아 자가완성 만물의 완성은 하나의 직접적 전개과정을 설명하는 것이다.만약 심,성,정,의 여러 설과 서로 연결된 것으로 보면 마음은 매번 다 밝을 수가 없다. 이리하여 정은 바를 수 없다.마침내 악이 나타나게 된다. 그러나 마음의 성 또는 이치는 원래 공동의 이치및 개별의 이치를 비추어 볼 수 있다.그러므로 공부를 하여 마음으로 하여금 밝게 하면 ,마음의 본성을 실현케 할 수 있어 이치로서 정을 부린다.이렇게 되는 것이 덕을 이루는 것이다.어떻게 마음으로 하여금 밝게 수 있을까? 이것은 실천 공부의 내재적 문제이다.주희는 여기서 궁리격물및 치지를 말하였다.치지가 완성되면 “내마음의 온전한 본체와 커다란 작용은 밝지 못함이 없다”이 바로 심의 성이다.이 마음이 이미 밝아지면 밖으로 향하여 전개되어 모든 문화를 성취할 수 있다.즉 수신으로 부터 평천하에 이르는 한 단계의 활동이 이것이다.밖으로 향해 전개되는 활동에 이르러 저절로 하나의영역을 이룩하고 있는지에 따라 그 자체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그렇다면 주희는 마음을 쓰지 아니한 적이 없다.주희는 대학의 학설에 의하여 밖으로 향한 전개를 직접 걸림돌이 없는 과정으로 보았다.비록 성공 실패에 있어서 주희는 스스로 내성은 외왕일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았으나 외왕또는 밖으로 향한는 전개중에 따로 말한 만한 공부가 있다.주희의 공부이론은 주희 한사람의 이론이지만 중국역사상 영향이 아주 컸다.
2. 백록동 서원의 연혁
백록동 서원은 강서성 남쪽 오노봉아래에 위치하고 있다.
행정상으로는 강주(지금의 구주)의 관할이었다가,북송태종 태평 흥국7년에 행정구역이 바뀌어 남강군의 관할아래에 있게 되었고 남송까지 계속되었다.백록동이라는 명칭은 당대 처음 출현하는데 처음에는 개인이 설립한 서당과 같은 성격을 갖고 있었다.그 후 오대 시대에 접어들면서 남당이 이 지역을 장악하게 되어서 이 시기에 비로서 서원으로 창건되었으며 특히 학관 ,학전이라는 서원제도도 갖추어져 있었다고 보여진다.남당(937-942) 시기에는 백록당 서원을 국학이라 하였고 비록 소규모였으나 관립학교가 됨으로써 사숙의 성격에서 완전히 벗어나게 된 것으로 생각된다.
북송에 이르러 강남지역을 장악한 것이 태조 8년말(976)인데 백록당역시 이시기에 송의 관할이 되었으며 태종 흥국2년에 조정으로부터 책 (구경)을 하사받는등 송조정으로부터 정식으로 인정을 받았으며 학도가 100인에 가까웠다.이 시기에는 지방관학이 아직 존재하지 않는 상황이었으므로 백록당 서원은 지방교육의 중심적 역할을 하고 있었으나 북송 인종조에 들어가면서 흥학운동에 압도되어 문을 닫게 되었다.그 이유는 학자들이 대부분 태학의 교관으로 발탁 채용되었으므로 따라서 서원을 운 영할 수 없었고 게다가 사설의 서원에서 공부하는 것 보다 관학인 태학에서 공부하는 편이 과거합격에 유리했기때문에 향리에서 공부하는 기풍이 점차 쇠퇴하였다고 보여진다.
다음으로 남송시대 백록동서원의 역사를 살펴보면 북송 인종조 흥학운동의 영향으로 몰락하였던 백록동 서원은 남송 초기에는 큰 변화가 없이 황폐한 상태에 있었는데 고종 6년(1179)에 주희가 남강군의 지주사로 부임함으로써 100년이상 황폐하였던 백록동 서원이 획기적으로 재건되게 되었다.주희는 1179년 3월에 남강군에 부임,먼저 일반행정사의 사무를 처리하여 남강군을 안정시키고 자주 군학에 나아가서 학생들을 모아놓고 그들과 강론을 하였다.그 해 10월에 백록동서원의 유적을 방문하고는 재건을 결심하게 되었다.그의 서원 재건지침은 주자대전의 한 부분인 다음 글에 잘 나타나있다.
“ 산 일대는 노,불의 사원이 백개나 될 정도이고 그 사원이 파괴되어 재건되지 않은 것이 없다.유생의 구관에 이르러서는 단지 이 한곳,이미 전조 (당) 이발의 옛 자취이고 또한 태종황제 경서를 하사받아서 사대부를 교육시켰던 곳이니 도의가 매우 아름다웠다.그러나 한번 파괴되어 여러 해가 이미 지나도 다시 재건되지 않았으니 ,도의 쇠함을 슬퍼하고 두려워 할뿐이다.”
즉 주희의 서원지침은 이단인 노,불의 사원이 번창하여 유교의 도를 해치고 있다고 보고 이에 대항하여 서원의 재건을 통해 쇠약해진 유도를 회복하자는 것 이었다고 추측이 된다. 그후 교수 양대법에게 명령하여 서원을 재건하게 하였으며 서원의 규모는 작은 방 200여간으로 생도 1-20명을 교육시킬 정도였다.또한 조정에 대하여 서원에 필요한 논어,맹자등의 책을 하사해 줄것을 요청하였다.
이리하여 1180 년 3월에 비로서 백록당 서원이 재건되었다.이에 3월 18일에 주희는 성현에게 역채의 예를 하였으며 또 백록 제생의 교육을 위해 학칙을 제정하였고 도서의 구입에 주력하였다.이외에도 주희는 서원교육을 위한 당장의 임명과 학전의설치, 그리고 선현의 사당건설 등에도 힘썼는데 1180년 9월에 양일신을 백록동서원의 당장으로 초빙하였다.
다음으로 주희 이후로부터 남송말까지의 백록동서원의 역사를 살펴보면 1181년 11월에 주희가 전임되어 간 후에도 30만전을 남강군수에게 보내어 예성전을 건설하게 하였으며 1183년에는 군수가 예성전에 판벽을 만들어서 성현의 상을 그렸으며 또한 불사에서 회수한 전을 백록동에 지급하였다.
성종 1221년에는 정전을 증설하고 삼문을 증벽하였고 이어서 서원장전을 설치하였으며 이종대에는 백록당이 문을 닫은 가운데 오경당을 건설하였다.
이상으로 당으로 부터 남송말까지의 백록당서원의 역사를 살펴보았다.결론적으로 백록동 서원은 오대시기는 당대의 사숙성격에서 완전히 탈피하여 국학(서원)으로 성장하였으며 학관,학전 등의 서원제도가 확립된 시기이므로 이 시기를 백록동서원의 창건기라 할 수있다.
북송초기 태종에서 진종까지의 시기는 백록동서원이 지방관학을 대신하여 지방교육을 담당했던 시기로서 백록동 서원이 조정에 의해 정식으로 인정되고 장려되었으므로 서원의 발전기라고 볼 수 있다.
북송중기인 인종에서 남송효종 중기까지는 백록동서원이 지방관학에 압도되어 쇠퇴하였던 시기였으므로 서원의 쇠퇴기라고 볼 수있다.남송 효종 말기 1179년 부터 남송말기까지는 주희에 의해 증건되고 있었으므로 서원의 전성기라고 할 수 있겠다.특히 백록당 서원은 1179-1181년을 통해 주희를 거점으로 획기적 발전을 이룩하고 있는데 ,이것은 백록동서원의 재건이라는 외면적 발전만이 아니라 내면적으로는 백록제생에게 학칙을 통해 교육지침을 강하게 규정하고 있다.이와 같은 구체적인 교육지침을 내세웠던 백록동 서원은 주희의 서원 재건이후로 남송대 서원교육의 중심지가 되었으며 주희의 재건은 명청대 백록동 서원의 역사에까지도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3.백록동 서원의 구체적 교육 방법
(1)교육 목표
백록동 서원의 교육목표는 백록동서원지에 다음과 같이 나타나고 있다.
“학문을 하는 것은 반드시 범인의 수준을 넘어서 성인의 단계로 들어갈 것을 생각하여야 하며 ,마치 어제는 향인 이었지만 오늘은 곧 성인이 되려고 해야 하는 것과 같다.”
즉 주희는 교육 목표를 성인이 되는 것으로 제시하였으며 궁극적으로는 성현의 뜻에 따라 수기치인 하는데 두었으며 이 목표를 달성하기위하여 구체적 세목을 제시하고 있다
백록동 학칙에서는 먼저 학문의 목표로 오륜의 도를 들고 있으며 다음으로 이 오륜의 도를 배우는 순서로서 학문에 박학하고 문제를 신중히 생각하고 생각을 삼가하며 의사표현에 있어서 명변과 행동함에 독행을 들고 있다.나아가 독행의 요점으로서 개인적으로 몸을 닦는 요점과 사회에 나가 일을 처리하는 요점 그리고 사람을 사귀는 요점을 제시하였다.
이와 같은 백록동학칙은 오륜을 실천하기 위한 도덕 훈련 방법과 박학,심문,신사,명변의 지식 훈련 방면 그리고 수신,처사,격물의 생활방면까지 비교적 체계있게 구성되어 있으므로 성인이라는 교육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세목으로는 손색이 없었다.
다음은 이와 같은 교육목표를 실현하기 위한 교육내용이 어떤 것이었나를 알아보고자 한다.
(2)교육 내용
교육 내용이란 교육목표를 실현하가위한 구체적 내용이며 광의로는 교재를 중심으로 한 교육과 기타 모든 교육활동을 포함하고 협의로는 수업시간에 이루어지는 교육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첫째로 광의의 의미에서 본 교육내용을 살펴보면 교재연습,제의 연습,장서정리로 구성된다.
①교재연습
교재란 교육의 기본이 되는 것으로 한 이래 유가의 경전을 주요 교재로 삼았으나 한 당시대와 송대는 연구대상이나 연구방법이 서로 달랐다.한당시대의 유학은 사장학이 중심이었는데 반하여 송대 유학자들은 의리학,도학이라고 칭하는 송학을 연구대상으로 하여 우주의 윤리나 인간의 본성을 연구하는 것이 중심이었다.
주희는 경,시,자,시무,의 네 종류가 대학에서 필요한 교재로 보았으나 시무는 과거시험을 전문으로함으로써 제외하고 경,사,자에 대해 방대한 자료를 제시하였다.
경:역경,경서,시경,주례,춘추,대학,논어,맹자,중용
사:국어,사기,양한사,삼국사,남북사,오대사,보서
자:제자
으로 상당히 방대하여 포함되지않는 것이 없다.그러므로 그가 백록동규칙에서 박학을 중시한 것은 당연하였다.
②제의는 지방교육상 매우 중요한 것으로 학생들이 반드시 닦아야 할 과제이다.교육적으로 볼때 성현을 숭배하여 귀지를 계승하는데 의미가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예양회절을 익히는 과정이었다.백록동서원도 역시 성현을 모시고 제의를 교육 내용으로 포함시키고 있었다.
③장서정리
장서는 학생들이 공부하기 위해 구비하여야할 기본이므로 백록동 서원도 재건된 이후로 도서수집이 큰 과제였을 것으로 보인다.도서의 수입은 중앙정부에 요청하거나 지방사대부의 기증 또는 직접 구매등의 여러 방법이 동원되었다.그리고 이런 방법으로 백록도서관에 소장된 도서는 백록제생에 의해 정리되었던 것으로 보인다.맹자의 필사본을 수사하는 것이백록제생의 일과였으니 당연히 이런 도서에 관계된 과제도 수업의 일부분으로 간주해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이상으로 광의로 본 백록동서원의 교육내용을 세 분야로 나누어 고찰하였다.
두번째로 협의로 백록동 서원의 교육내용을 살펴보기로 한다.협의의 교육내용은 수업시간에 시행되었던 교육내용을 의미한다.
백록동 서원의 교육은 백록제생에게 상당한 박학과 신사 명변을 실제적으로 요구하고 있었던 것 같으며 이단인 양,흑과 불,노의 설에 대한 분명한 변론을 통해 정학인 이학(의리학)을 백록제생에게 확립시키는데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그리고 이학을 근본 교육내용으로 하고 있으며 ,당시의 사회를 비판하는 즉 당시의 과거에 대해 학도에게 훈계하는 경향이 강하다. 또한 궁리의 마지막 단계인 명변을 지향하고 있었으므로 백록동 서원의 교육내용은 상당한 수준에 있었음을 알수 있게 한다.
(3)학습방법
교육방법이란 교육내용을 통하여 교육목표를 실현하는 방법으로 백록동 서원의 경우는 제생의 학습방법과 교관의 교수방법으로 구분할 수 있다.백록동서원의 학습방법을 이해하기에 앞서 남송대 일반서원의 교육방법을 먼저 살펴보기로 한다.
①남송대 서원은 전문 교관이 실제로 있었지만 강의는 매월 기망이나 아니면 정기적으로 강의를 하는 정도였다.그러므로 강의내용도 교과내용의 대부분을 제시하거나 유생들의 질문에 대답하는 정도였다.따라서 유생들은 교과의 연차정도에 따라 자기자신이 열심히 연구하는 것이었다.그러므로 평소에 유생들이 필히 서원에 가서 학문하는 것은 아니었다.서원에 들어가서 학업을 한다고 하여도 동주,산장의 뜻을 계승하여 학문에 대한 지도를 받았을 뿐이었다.매월 학관이 고시도 행하지만 그것은 유생들의 학문생활의 진전에 대해 그 정도를 알아보는데 불과하고 학생들은 자주적으로 학문 생활을 하였다.
② 백록동서원의 학생교육방법을 살펴보면 궁리과정과 고행과정으로 나뉘어지고 궁리과정은 박학,심문 ,신사,명변으로 고행과정은 수신,처사,격물인 과정이었다.궁리과정과 고행과정을 모두 중시하여 지행합일을 행하였으므로 완전학습의 원리와 유사하다고 할 수 있으며 학습방법은 박학,심문 ,신사,명변,고행의 과정을 차례로 거쳐야 한다는 면에서 분습법과 반복학습이라고 할 수 있다.즉 백록제생의 학습방법은 성인이라는 교육목표를 실현하기위한 과정적 원리로서 백록제생의 자발성을 강조한 자유생활에 기반을 두고 있다.
③백록제생의 교육을 지도한 동주의 교수법에 대해 살펴보면 서원교육의 전반을 주희가 주관했으며,주희의 교수방법은 백록제생의 박학,심문 ,신사,명변,고행을 도와주는 질문에 응답하는 문답식이 시행되었다.
즉 교수법에 있어 구조는 질문 응답하는 형식이었므로 개별학습,상호협력학습이라 할 수있고 방법면에서는 설명식 문답식 교수법이었다고 할 수있다.
4.태학과 백록동서원의 비교
백록동서원의 교육단계는 앞에서 언급했듯이 대학 교육과정의 수준이었으므로 그 당시 남송대 대학 교육기관인 태학과 백록동 서원을 비교할 필요가 있다.
우선 태학에 대해 알아보자.
태학의 교육과정은 경의와 시무를 중시하였지만 그당시 과거제도는 경의와 시무를 필수로 할 경우에는 경서는 등한시되어 성적이 불량하고 시무의 학습에는 열중하여 성적이 우수하였다는 것이며 두 과목을 분과하여 한과목만 전공토록 하면 경의에 대한 응시자는 수가 적고 시무에 대한 응시자의 수가 많아졌다는 것이다.이와같은 현상은 과거합격을 중심으로 볼때 경의는 시간이 많이 필요한 반면에 시무는 단기간에 공부할수있었으므로 시무가 남송대에 유행하였던 것이며 그 결과 시무의 유행은 사장에 치우치게 되어 이학자들의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이런 남송대의 과거와 태학 고시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받은 태학교육은 교육목표가 과거합격이었으므로 이런 목표를 위해 교육내용 교육방법등이 시행되었을 것이며 결국 태학자들은 과거합격을 위한 수험생활로 격하되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태학교육은 공리,타율적 성격이 강하게 나타나므로 근본적으로 백록동서원 교육과 차이가 나타난다.이에 반해 백록동서원은 당시 공리주의적 과거와 관학에 대한 비판으로 출발하였으므로 반과거, 자율적 성격이 강하게 나타난다.반과거적 경향은 백록동서원의 독특한 교육내용,교육목표,교육방법이 태학과 근본적인 차이가 나도록 만들어 주는 것이며 백록동규칙에서도 반과거의 경향이 나타나고 있다.
“의를 바르게 하나 이익을 도모하지않아야 하고
도를 밝게 하나 공을 계산하지 않아야 한다.”
라고 하는 기록에서 분명히 공리를 목적으로 하는 것을 배척하고 있다.또한 이 학칙을 백록동에 제시하고 있는 겄으로 보아서 당시의 백록동 서원의 반과거의 성격을 표면적으로 드러내는것으로 보인다.그리고 당시의 사회에서 백록동서원은 반과거의 성격을 가진 교육기관으로 널리 인식되고 있었던것 같다.
5.역사적 의의
송당시대에 서원은 비록 비공식적 교육기관으로 보통 존재하고 있었지만 많은 서원들이 학전과 봉급을 받는 교관,그리고 학관 ,강당,기숙사,부엌등을 겸비한 교육기관으로 변하였다.이런 면에서 서원은 지방관학과 매우 유사하였다.그러나 지방관학과 근본적 차이가 있었는데 바로 프로그램의 차이였다.서원의 교육 프로그램은 지방관학과 달리 대부분 시험 준비하는 것을 거부하였으며 대신에 신유학(이학)의 자기수양을 지향하였다.이런 변화는 매우 의미가 있는 것으로 이전의 서원과는 달리 분명히 서원의 성격을 나타낸 것이었다.
이런 성격을 바탕으로 했으므로 독특한 역사적 의의를 가질수 있었다.
첫째 일반적으로 송대 서원의 성격과 역할은 다양하였으나 남송대 주희의 재건 이후에 백록동서원은 당시의 서원과는 다르게 뚜렷한 교육목표에 따라 반과거 성격을 분명히 나타냈다.이와같은 백록동서원의 반과거 성격은 당시의 관학과 상반되는 것으로 결과적으로 새로운 순수학문 연구의 풍토가 조성됨으로써 과거시험을 통과한 과거그룹 이외의 순수학문 연구자들의 새로운 그룹을 형성시켰다는 의의를 갖고있다.
주희는 백록동서원 고유의 도덕에 관한 교육적 프로그램 ,지적인 학문 그리고 자기 수양법을 내세우며 백록동서원을 공식적으로 계통을 세웠다.이 결과 백록동서원은 이로부터 백록동 고유의 성격 즉 반과거성격을 분명히 나타내며 남송대 서원운동의 최고 상징이 되었다.
둘째 백록동서원은 북송대의 노장적 불교적 서원의 성격에서 완전히 탈피하였으며 또한 횡적으로는 다른 학파 (육상산,여조겸,장식등)와의 끊임없는 강론과 방문은 백록제생과 다른 학파와의 연계와 유대를 아루었으므로 백록동서원에서의 연구는 당시 학문을 발전시키는데 촉매제 역할을 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셋째 백록동서원이 백록동학칙을 통하여 송대의 교육뿐만 아니라 후세의 중국교육에 뚜렷한 교육목표와 교육방법을 제시하였다는 것이 역사적 의의로 지적될수 있다.
중국은 옛부터 정부의 학문진행정책과 사립의 교육이 시행되었지만 교육목표나 교육방법에 대하여 모두 계통성있는 명백한 규정을 확립하지 못하고 있었다.그러다가 백록동서원이 재건됨으로써 뚜렷한 교육목표와 방법이 비로서 제시되었다. 다음 글에 이점이 뚜렷이 나타나며 높이 평가하였다.
“주희가 제정한 학칙은 간요하고 명백하여 드디어 후세 700년의 교육의 지침을 이루었다.”
네째 주희의 백록동학칙은 조선의 이황과 이황의 영향을 받은 일본까지 영향을 미쳤는데 근세 한국과 일본의 교육계에서 상당히 중시되었으며 각종 학교 서원 사숙등에서는 백록동규칙을 난간에 걸어놓고 또 이것을 강의하거나 강의가 시작되기 전이나 끝날 무렵에 주희의 백록동 규칙을 낭독하는것이 상례가 될 정더였다.
이와 같은 사실로 보아 주희의 백록동규칙은 중국교육뿐만 아니라 한국과 일본의 교육사에도 상당한 영향을 미쳤던 것으로 평가할 수있다.
백록동서원은 왕대 남당시기에 (937-942)에 서원제도를 기반으로 하여 창건된 이래로 남송까지 꾸준한 발전을 이룩하였다.특히 남송 효종 7년 3월에 주희가 백록동서원을 재건한 것은 백록동서원의 역사상 하나의 이정표가 되었는데 주희의 서원재건은 서원의 외면적 발전뿐만 아니라 내면적으로는 백록제생에게 학칙을 통해 교육목표 교육방법등을 제시함으로써 이전의 백록동서원과는 다른 성격을 띄게 되었다.
백록동서원의 교육목표는 성인이 되는 것이었는데 주희는 이와 같은 목표를 위해서 구체적인 세목으로 백록동학칙을 백록제생에게 제시하여
학문연구의 풍토를 조성함으로써 과거에 뜻을 두지않고 순수하게 이학을 연구하게 이학의 연구자를 배출하였다.
이것은 과거시험을 통과한 과거그룹이후의 순수학문 연구자들의 새로운 그룹을 형성시켰다는 의의를 갖고 있다.한편으로 주희는 백록동서원에서 학통의 계승과 발전을 도모하여 백록제생이라는 새로운 그룹을 형성하였으며 또한 다른 학파와의 연계와 유대를 이루었으므로 백록제생에서의 학문연구는 당시 학문을 발전시키는데 촉매제 역할을 하였을 것으로 추측된다.이와 같은 백록동 서원의 역할은 반과거의 서원성격과 직접적으로 관련되어 남송대 대부분의 서원이 과거를 지향하는 경향이 강했던 것으로 보아 높이 평가할 수있다.
또란 백록동서원은 송대에 서원운동의 최고 상징으로써 당시의 서원에 대해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커다란 영향을 미쳤고 이에 그치지 않고 후세의 중국교육에 대해서도 백록동학칙을 통하여 간접적으로 상당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이상으로 주희의 교육이론과 이를 기반으로 한 백록동서원의 교육방법과 성격 그리고 의의에 대해 살펴보았는데 한 가지 아쉬움이 남는다면 서원이 우리나라 고대 사회에 유입되어 좋은 영향도 끼쳤지만 그 보다는 폐단이 더 많았는 것이 유감으로 남으며 송시대에 벌써 학생들의 자발성을 강조한 수업방법이 실시되었는데 약간 놀라움을 느낀다.
주자와 백록동서원
주자의 교육활동 중에 강서성(江西省) 여산(廬山) 지방의 백록동(白鹿洞) 서원(書院)을 살펴본다. 그곳은 중국 역사상 가장 유명한 서원이며, 그 이후에 등장한 모든 서원들의 모델이었다. 사실 그곳은 북송(北宋) 시대의 주요한 여러 서원들 가운데에 하나였는데, 남송(南宋) 시대에 들어오면서 다른 서원들과 마찬가지로 쇠락하여 잊혀져 갔다. 주희는 1179년, 남강(南康) 지방에 지사로 부임한지 한달이 안되어 그 지방의 학교 감독관과 함께 백록동 서원의 유지(遺地)를 찾기 시작하였다. 동료인 유청지(劉淸之: 1139∼1195)가 전해준 관련 역사 기록들과 산에서 나무하는 사람들이 들려준 정보를 바탕으로 하여, 결국 버려진 옛 서원 터를 찾을 수 있었다. 그곳은 성자(星子)현(縣)에 위치하고 있었는데, 여산(廬山)의 오로봉(五老峯)에서 동쪽으로 20리(里) 정도 떨어져 있는 풍광이 대단히 아름다운 지점이었다. 그는 즉시 서원을 재건하기 시작하였다. 그가 재건한 서원 건물은 3개에서 5개 정도의 방을 갖춘 작은 규모였다. 하지만 그것은 대단히 심원(深遠)한 목적과 이상을 바탕으로 건립되었고, 이에 따라 많은 사람들이 그 곳에 모여들었다. 북송기에는 서원이 보통 세 가지의 기능을 수행하였다. 교육, 서적의 보존, 공자를 비롯한 옛 성현들에 대한 제사가 그것이었다.
백록동 서원의 기능은 주자가 구상하였던 대로, 그보다 광범위하였다. 그러한 전통적인 세 가지 기능 이외에도 백록동 서원은 엄정한 도덕적 훈육을 시행하였고, 학자들에게 무상으로 숙식을 제공하였으며, 주희와 다른 신념을 지닌 학자에게도 강의의 기회를 허락하였다. 이 모든 것들이 그 유래를 찾기 힘든 것들이었다. 주자가 작성한 백록동서원게시(白鹿洞書院揭示)는 일종의 '배움을 위한 핵심적인 지침'이었다. 그것은 백록동 서원의 건물의 전면 위쪽에 부착되었는데, 주로 맹자, 중용, 역경으로부터 인용한 오륜(五倫), 공부의 순서, 자기 수양, 타인들과의 교류 등과 관련 있는 문구들과, 동중서(董仲舒: 176∼104 B.C.)의 글로부터 인용한 문장 등으로 이루어진 177자(字)의 글이었다. 그 글을 설명하면서 주자는 그것이 금지의 규칙이나 상세한 규정을 염두에 두고 쓰여진 것이 아니라, 학생들 자신이 스스로를 이끌수 있도록 하기 위한 기본적인 도덕적 원칙들을 염두에 두고 쓰여졌다고 말하였다. 주희는 그것을 다만 일반적인 지침으로 제시하였을 뿐이었고, 그것이 장차 하나의 신기원을 이룩하게 되리라는 기대나 예상은 결코 하지 않았었다. 하지만 그것은 백록동 서원 자체만큼이나 유명하게 되었고, 여러 세기 동안 주요한 신유학 사상가들에 의하여 채택되고 다듬어 지면서 다른 서원들에게 하나의 모델을 제시해 주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영향은 일본에서도 매우 두드러졌다.
그 게시가 주자가 1162년에서 1194년까지 황제에게 올린 상소들과 매우 현저한 대조를 이루고 있다는 사실이 흥미롭다. 그 상소들에서 주자는 마음을 바로잡고(正心) 뜻을 성실하게 하는것(誠意), 하늘의 이치(天理)와 사사로운 인간의 욕구(人欲), 본래적인 순선(純善)한 마음(道心)과 사욕에 물들기 쉬운 인간의 마음(人心) 등, 신유학의 주요 개념들을 거듭하여 말하고 있다. 하지만 게시에서는 유교의 기본적인 도덕에만 집중하고 있다. 비록 인용문들로만 이루어져 있었지만, 그토록 간명한 형식으로 유교 도덕을 그처럼 훌륭히 요약한 글을 그 이전에는 물론 이후에도 찾아보기 힘들다. 그 글은 체제가 논리적일 뿐만 아니라 기억하기도 쉽다. 주자의 제자 정단몽(程端蒙: 1143∼1191)과 동수(董銖: 1152∼1214)는 1187년에 함께 '학칙'(學則)을 작성하였다. 그 학칙은 특히 무엇을 입을 것이며, 어떻게 앉아있을 것인가 등의, 일상 생활 속에서 학생이 지켜야 할 세세한 규칙들에 중점을 두고 있었다. 1258년에는 요로(饒魯: 대략 1256년경을 전후로 활동)가 그러한 규칙들과 주희의 게시를 한데 묶어서 서원에 게시하였다. 이것들을 통틀어서 보통 '학규'(學規)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주자의 게시 영향은 아무리 강조하여도 지나치지 않다. 많은 서원들이 그것을 강령으로 채택하였다. 또한 그것을 본뜬 많은 글들이 쓰여지게 되었다. 그런 것들 가운데에 가장 유명한 것들로는 명대(明代: 1368∼1644)의 저명한 유학자 호거인(胡居仁: 1434∼1484)의 '학칙'(學則), 고헌성(顧憲成)이 주도하였던 동림(東林) 학파의 '회약'(會約) 등을 들 수 있다.
호거인은 자기 자신의 목표를 확고히 정하는 것, 올바른 마음을 보전하는 것, 지식을 확충하는 것, 직무와 그 밖의 여러 일들을 성실하고 올바르게 처리하는 것, 그리고 자기 자신의 인격을 완성시키고 타인의 인격 도야를 돕는 것 등의 여섯 가지 기본적인 원칙들을 열거하면서, 옛 성현들의 말을 인용하여 그 각각의 원칙을 정당화하였다.
고헌성은 주자의 게시를 충실히 따라서, 아예 그 게시를 '회약'의 첫머리에 제시해 놓았다. 그리고 자신은 주희의 게시에 감히 그 어떠한 새로운 내용도 추가시켜 놓지 않았으며, 다만 그것을 좀 더 부연하고 다듬었을 뿐이라고 말하였다. 그는 기본적인 원칙들을 열거하고 그 각각에 자못 긴 부연 설명을 더하였다.
주자의 게시가 중국 역사 속에서 지대한 영향을 미쳐왔다는 것은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사실이다. 그것은 단순히 서원의 도덕 지침들을 통일시키는 결과만을 낳았던 것이 아니라, 정부에서 설립한 학교들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대한화사전(大漢和辭典)에는 주희의 게시에 관한 8종의 책들이 제시되어 있는데, 그것들 중 6종은 일본의 신유학자들이 집필한 것이다. 특히 야마자키안사이, 사토이사이(佐藤一齋: 1772∼1859) 같은 걸출한 유학자들의 저작이 포함되어 있다. 이것은 일본에서의 게시의 영향을 보여주는 예들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주희의 게시가 불교의 수도 생활 규약 또는 지침들로부터 영향을 받았다는 주장이 학계에 널리 받아들여져 왔다. 특히 선사(禪師)인 회해(懷海: 720∼814)의 백장청규(百丈淸規)가 중요한 영향을 끼쳤다고들 한다. 하지만 그것은 주희의 것과는 근본적으로 그 성격이 다르다. 무엇보다도 그것은 불교 수도 단체의 조직, 의식 절차 등에 관한 상세한 설명을 포함하고 있다. 반면에 주희의 게시는 다만 기본적인 도덕 원칙들을 다루고 있을 뿐이다. 주희는 다른 어떤 것을 모방할 필요가 없었다. 그는 대단히 창조적인 정신의 소유자였다.
백록동 서원의 또 다른 혁신적인 측면은, 과거 시험에 합격한 28명의 전도 유망한 인물들에게 서원 공간을 제공하였다는 사실이다. 방학 기간에 학생들이 없는 동안 서원 시설을 그들에게 제공하여 학문에 정진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주희는 이러한 조치를 통하여, 그들 합격자들이 관료 세계에서의 입신출세보다는 도덕적 수양을 위하여 참된 이치를 추구하게 되기를 바랐던 것이다. 사실 이러한 조치는 별로 중요해 보이지 않을 수도 있으나, 이것은 오늘날, 학자들을 대학 또는 연구소 구내에 거주할 수 있게 하여 연구의 효율성과 안정성을 보장해 주는 배려의 선구였다고 할 수 있다.
주희는 관직 임무 수행의 일정이 허락할 때마다, 서원에서 강의하였다. 1181년의 두 번째 달에 그는 육구연을 백록동 서원으로 초빙하였다. 그는 이미 1175년에 육구연과 아호(鵝湖)에서 일주일 동안 만났었다. 그 자리는 여조겸의 주선으로 그들 둘과 다른 몇몇 학자들이 친교를 나누기 위하여 마련된 자리였다.
그 만남에서 육구연은 주희가 책읽기만에 너무 몰두하는 경향이 있다고 비판하였고, 그들은 몇몇의 주제에 관하여 논쟁을 벌였다. 주자는 육구연이 지나치게 주관적이고 자신감에 넘치는 태도를 지녔다는 인상을 받았다. 결국 그 만남은 양측 모두에게 그리 유쾌한 것은 못되었다. 이제 1181년에 육구연은 바로 전해에 세상을 떠난 자신의 형의 묘지에 휘호를 써줄 것을 부탁하기 위하여, 제자들 몇 명과 함께 남강을 방문하였다.
주자는 육구연을 백록동 서원으로 초빙하여 강의를 부탁하였고, 육구연은 논어의 "군자(君子)는 의(義)에 밝고, 소인(小人)은 이(利)에 밝다" '里仁'의 14 의 구절을 주제삼아 강의하였다. 그의 강의에 감동 받은 청중들이 눈물을 흘리기까지 했다고 한다. 주희는 그 강의의 내용을 돌에 새기기까지 하였다. 그 강의의 혁신적인 의의는, 그것이 한 사람 이상의 강의자가 청중들에게 강의하고 종종 연회의 자리가 마련되기도 하는 명대의 강학 전통의 효시가 되었다는 점말고도, 서원의 문호가 방문 학자에게, 더구나 공공연히 반대되는 입장을 취하는 학자에게까지 개방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백록동 서원 안의 명소
- 사현대(思賢臺)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누각으로 아래의 동굴에 흰 사슴상이 있다.
- 단계정(丹桂亭)
주희사당 앞에 있는 정자로, 중앙에 "주희가 직접 붉은 계수나무를 심음 (紫陽手稙丹桂)라는 글씨가 있다. 여기서 자양은 바로 주희의 호이다.
- 명륜당(明倫堂)
서원 내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던 장소로, 명륜당이라는 명판은 주희의 친필이다. 이 안에 서원의 규정이 적혀 있고, 서원을 통해 급제한 인물이 기록되어 있다.
- 문회당(文會堂)
"이문회우(以文會友)"글을 통해 벗을 사귄다는 논어의 구절에서 따온 이름이다. 송대 주돈이의 동상이 있으며 현재 학자들 사이 교류의 장소로 쓰인다
白鹿洞書院位于庐山五老峰南麓(今属江西九江市),享有“海内第一书院”之誉。始建於南唐升元年間(940年),是中國首間完備的書院;南唐時建成「廬山國學」(又稱「白鹿國學」),為中國歷史上唯一的由中央政府於京城之外設立的國學;宋代理學家朱熹出任知南康軍(今星子縣)時,重建書院,親自講學,確定了書院的辦學規條和宗旨,並奏請賜額及御書,名聲大振,成為宋末至清初數百年中國一個重要文化搖籃。白鹿洞與嶽麓、雎陽、石鼓並稱天下四大書院。
歷史
白鹿洞在唐代時原為詩人李渤兄弟隱居讀書的地方,李渤當時養白鹿自娛,傳說該鹿通曉人性,能跋涉數十里到星子縣城為主人購買書、紙、筆、墨,李渤遂有外號「白鹿先生」。後來他出任江州刺史,於此修樓建亭,取名白鹿洞。白居易過江州,贈李渤一詩中,即有「君家白鹿洞,聞道亦生苔」之句。
早年該處只是一處遊覽勝地,直至五代十國南唐,其時天下大亂,開始有人在此隱居讀書,升元年間(940年),南唐朝廷在李渤隱居的地方建立學館,稱「廬山國學」,又稱「白鹿國學」,置田藏書,由金陵國子監九經教授李善道主持學務,四方學子慕名而來,與京師國子監齊名。西元976年,南唐已亡,九江百姓遭受兵馬之災,廬山國學成為廢墟。
宋初,九江人在廢墟上建起白鹿洞書院,宋太祖趙匡胤下令將國子監刻印的《九經》等書賜予白鹿洞書院,書院旋即知名度大增,學生有近百人,該時期已被奉為北宋四大書院,西元980年,白鹿洞主被調走當官,白鹿洞書院再廢。西元1002年,宋真宗趙恒頒發一道聖旨,全國興起研學之風,白鹿洞書院得到修繕。西元1054年,白鹿洞書院毀於兵火,期間耕地又被收回,書院無法繼續提供膳食,學生紛紛離去,校舍逐漸倒塌,書院不久就停辦了,北宋末年,金兵南下,書院從此荒廢百年。
到了南宋,中國理學開始興盛,復興書院成為當時的重要運動。朱熹的出現,正式殿定白鹿洞在往後700年的學術位置,直至清代科举制度結束為止,被稱為“海內書院第一”。
同時,朱熹請南宋理學家另一派代表呂祖謙為修復工作寫記,交流學識,朱熹本人亦撰寫白鹿洞書院學規,並親臨講課,與學生質疑問難,書院1180年農曆3月得以完成重建。理學又一派代表人物陸九淵從金溪來訪白鹿洞書院,在朱熹的盛邀之下,登臺講學。陸九淵的「君子喻於義,小人喻於利」,令在場的學生和客人熱淚盈眶,在朱熹的要求下,陸九淵將這段演講內容寫下,被刻在石碑上。朱熹在南康任職的兩年時間內,是白鹿洞書院歷史上最鼎盛的時期。翌年朱熹與陸象山共同講學,稱作「白鹿洞之會」,並奏請賜額及御書,書院名聲大振。
元代年間戰亂,崔翼駐守該地,書院繼續辦學,直至元末書院所有殿堂齋舍蕩然無存。
明代初年因朝廷重視科舉,罷了薦士的舊制,致使書院講學之風幾乎消失,書院一度衰落。思想家王守仁(王陽明)當時仍支持書院制度,所到之處,廣收門徒,遍建書院。贛州的濂溪書院,便是王守仁巡撫贛南時所建。當時,白鹿洞書院洞主蔡宗袞是浙江山陰人,與王守仁為同鄉,當他得知王守仁在廬山遊玩時,便盛情邀請王守仁到白鹿洞書院講學,提高書院的知名度。明代最早的一次維修為正統元年(1436),以後還有成化、弘治、嘉靖、萬曆年間的維修。
明武宗正德十六年(1521年),「五月,集門人於白鹿洞。是月,先生有志歸……」王守仁年輕時,曾一度崇拜朱熹,他21歲中舉人,開始研究朱熹的「格物窮理」。朱熹認為,一草一木都涵有「至理」,必須一件件地「格」盡天下之物,才能豁然貫通,體會到完美的「天理」,以為聖賢。
於是,王守仁立在亭前,從秋風中抖動的一叢翠竹開始「格物」,七天七夜結果一無所得地病倒。王守仁忽然明白竹子的自然生長與朱熹的「天理」並有相適之處,把自然現象與社會現象相較是毫無根據的。王守仁於白鹿洞修道問學,為他後來的心學創立奠定了基礎。
清代仍繼承明代的規模,遠近各省都有人來此求學,但隨著清末廢除科舉,光緒二十四年(1898年)清帝下令變法,改書院為學堂,1903年正式停辦,白鹿洞交由南康府(今星子)中學堂管理,宣統二年(1910),白鹿洞書院改為江西高等林業學堂。
國民黨時期,蔣介石曾計劃將書院交由南昌中正大學接管,但未實現。1927年武漢起義失敗后,劉少奇曾避居白鹿洞書院內,1959年列為江西省文物保護單位後,劉少奇、周恩來、以及越南民主共和國主席胡志明等曾視察過白鹿洞書院,1979年成立廬山白鹿洞文物管理所;1988年公布為全國重點文物保護單位和國家二級自然保護區,同年設置作為學術研究機構的白鹿洞書院建置,1990年成立廬山白鹿洞書院管理委員會,現時白鹿洞書院是九江一帶著名景點,現有管理單位將書院比喻成古代中國的劍橋大學、牛津大學[1]
白鹿洞書院北有高山,東及南有鄱陽湖,周圍保存著近3000畝自然保護林區。從2000年開始,白鹿洞書院每年出版一本《中國書院論壇》,每年召開一次學術研討會,江西省政府、九江市政府2000年開始先後撥款180萬元,對白鹿洞書院禮聖殿、禮聖門、彝倫堂(明倫堂)、禦書閣、紫陽閣(朱子祠)、先賢祠(報功祠)等進行了裝修和翻新。書院最新一次維修於2003年11月4日正式完成。
白鹿洞書院始建於940年,摩洛哥的卡鲁因大学(University of Al Karaouine)创办于859年,埃及的爱资哈尔大学创办于988年,欧洲公认的办学最早的大学博洛尼亚大学创办于1088年。
白鹿洞書院位於廬山東南五老峰下的海會鎮和星子縣白鹿鄉的交界處,全院山地面積近3000畝,建築面積3800平方米,院內由五個院落並列組成,分別為禮聖殿、先賢書院(禮聖殿之西)、白鹿洞書院、紫陽書院和延賓館。其他建築。主體建築為櫺星門、泮池(又稱蓮池)、狀元橋(原稱泮橋)、禮聖門和禮對殿。
書院大門為磚木結構,四坡式二層。頂層,中脊磚砌,兩端起翹;四斜脊,尖端起翹,亦為磚砌。大門有「白鹿洞書院」牌匾,是明代正德年間文學家李夢陽書寫。
白鹿洞書院雖然以洞命名,但時人只以該區山峰環合似洞而命之;現有書院內朱子祠後的石洞和石鹿,則是明代嘉靖年間修鑿的。《白鹿洞志》記述,「初,鹿洞有名無洞。嘉靖甲午(即嘉靖十三年、公元1534 年),知府王溱乃辟講修堂後山,為之築台於上。知府何岩鑿石鹿於洞中。」
在朱子祠之東廂,設有碑廊,內嵌宋至明清古碑120餘塊,但這全是近代新建。在這些古代碑刻中,有朱熹的手書真跡,也有署為紫霞真人的明代狀元羅洪先的《游白鹿洞歌》。
朱子祠前有「御書閣」,為康熙賜給書院匾額及古書後,由南康知府周燦請建。閣前有桂樹兩株,相傳是朱熹手植;但也有人說是清代建造「御書閣」時種植的。
院內亦有「釣磯石」、「漱石」、「鹿眠場」、「流杯池」等名勝,當中漱石和流杯池,是因有朱熹手書「漱石」、「流杯池」石刻而得名。「鹿眠場」相傳唐代李渤飼養的白鹿就睡在這裡。釣磯石據傳是朱熹常垂釣之處,但此處裡水淺流急,魚類不多,故明代劉世揚又在石上加刻「意不在魚」四字。
白鹿洞书院全院占地面积为3000亩,建筑面积为3800平方米。书院“始于唐、盛于宋、沿于明清”。现存建筑群沿贯道溪自西向东串联式而筑,由书院门楼、紫阳书院、白鹿书院、延宾馆等到建筑群落组成。建筑均坐北朝南,石木或砖木结构,屋顶均为人字形硬山顶,颇具清雅淡泊之气。
朱熹接辦書院時,曾立下《白鹿洞書院學規》(或稱《白鹿洞書院揭示》,內容略有所差),主要述說儒家倫理觀,影響書院千年的辦學方針。全文為:
白 鹿 洞 書 院 學 規 朱 熹
父子有親。君臣有義。夫婦有別。長幼有序。朋友有信。
右五教之目。堯、舜使契為司徒,敬敷五教,即此是也。學者學此而已。
而其所以學之序,亦有五焉,其別如左:博學之。審問之。謹思之。明辨之。篤行之。
右為學之序。學、問、思、辨四者,所以窮理也。若夫篤行之事,則自修身以 至於處事、接物,亦各有要,其別如左:
言忠信。行篤敬。懲忿窒欲。遷善改過。
右修身之要。 正其義不謀其利。明其道不計其功。
右處事之要。 己所不欲,勿施於人。行有不得,反求諸己。
右接物之道。
熹竊觀古昔聖賢所以教人為學之意,莫非使之講明義理,以修其身,然後推以及人, 非徒欲其務記覽,為詞章,以釣聲名,取利祿而已也。今人之為學者,則既反是矣。然 聖賢所以教人之法,具存於經,有志之士,固當熟讀、深思而問、辨之。苟知其理之當 然,而責其身以必然,則夫規矩禁防之具,豈待他人設之而後有所持循哉?近世於學有 規,其待學者為已淺矣。而其為法,又未必古人之意也。故今不復以施於此堂,而特取 凡聖賢所以教人為學之大端,條列如右,而揭之楣間。諸君其相與講明遵守,而責之於 身焉,則夫思慮云為之際,其所以戒謹而恐懼者,必有嚴於彼者矣。其有不然,而或出 於此言之所棄,則彼所謂規者,必將取之,固不得而略也。諸君其亦念之哉!
整篇文章簡述了朱熹對古賢的看法,日後白鹿洞書院講學亦大致依從此中方針。學規指先言古先聖賢在教人為學之時,皆欲使之「講明義理,以修其身,然後推以及人」,而非是要使其「務記覽、為詞章」,批評多少鄙儒只懂得記誦之學,甚至效法「終南捷徑」。
他又認為聖賢教人之法皆存於經書中,因此有志之士必當熟讀深思而問辨之,與前面所論為學之序的學規相互結合。此後再談如果學者如知其理之當然,則自然會遵循,所以並不需要他人設規矩禁防之具,此即與前面所列修身之要相呼應。
當時不少學院亦有訂立學規,但朱熹指這些規則又「未必古人之意」,不為白鹿洞書院所取,只有他的學規是取於「聖賢所以教人為學之大端」,他又要學規「嚴於彼者」、「條列如右而揭之楣間」,讓學子時刻看到。文中最後強調學子要確實篤行學規,才能夠稱上儒者。
有關白鹿洞的學習生活細節,暫未有資料,已知朱熹為書院訂定《白鹿洞書院揭示》,規定書院辦學方針和學生的行為準則。他親自作聘書,為書院選任教職人員。書院第一次上課,朱熹登台講授《中庸》,但以今天話來說,朱熹當時正職是當地太守,辦公位置與書院相距約10里,每10天官員例假時,他才可以到書院指導學生。
白鹿洞書院其實是一座山間居舍,有說讀書人來到這裡,隨意散落溪澗林間,悟道功成後,或捐田修舍,或勒石立碑,以示報恩明志,令這裡隨處可見石碑,千來年儒家均視之為文化勝地。
참고자료
白鹿洞賦 幷序 [송, 주자]
白鹿洞賦者洞主晦翁之所作也翁既復作書院洞中又賦其事以示學者其詞曰
承后皇之嘉恵宅廬阜之南疆閔原田之告病惕農扈之非良粤冬孟之既望夙余駕乎山之塘徑北原以東騖陟李氏之崇岡揆厥號之所繇得頽址於榛荒曰昔山人之隠處至今永久而流芳自昇元之有土始變塾而為庠儼衣冠與絃誦紛濟濟而洋洋在叔季而且然矧休明之景運皇穆穆以當天一軌文而来混念敦篤於化原乃搜剔乎遺遯朌黄卷以置郵廣青衿之疑問樂菁莪之長育㧞雋髦而登進迨繼照於咸平又増修而罔倦旋錫冕以華其歸琛亦肯堂而詒孫悵茂草於熙寜尚兹今其奚論夫既啓余以堂壇友又訂余以冊書謂此前脩之逸迹復闗我聖之宏橅亦既震於余衷乃謀度而咨諏尹悉心以綱紀吏竭蹷而奔趨士釋經而敦事工殫巧而獻圖曽日月之㡬何屹厦屋之渠渠山葱瓏而遶舍水汨㶁而循除諒昔人之樂此羌異世而同符偉章甫之峩峩抱遺經而来集豈顓眺聼之為娛實覬宮牆之可入愧余脩之不敏何子望之能給矧道體之無窮又豈一言而可緝請姑誦其昔聞庶有開於時習曰明誠其兩進抑敬義其偕立允莘摯之所懐謹巷顔之攸執彼青紫之勢榮亦何心乎俛拾亂曰澗水觸石鏘鳴璆兮山木苯䔿枝相樛兮彼藏以脩息且游兮徳隆業茂聖澤流兮往者弗及余心憂兮来者有繼我將焉求矣
尋白鹿洞故址愛其幽䆳議復興建感歎有作 [송, 주자]
清冷寒澗水 窈窕青山阿 昔賢有幽尚 眷言此婆娑 事往今㡬時 髙軒絶来過 學館空廢址 鳴絃息遺歌 我来勸相餘 杖䇿搴緑蘿 謀野欣有獲 披圖知匪訛 永懐當年盛 華莘衿佩多 博約感明恩 涵濡熈泰和 凄凉忽荒榛 俯仰驚頽波 發教逮綱紀 喟然心靡它 伐木循隂岡 結屋依陽坡 一朝謝塵濁 歸哉碩人薖
書畫象自儆 [송, 주자]
從容乎禮法之塲, 沈潛乎仁義之府, 是予蓋將有意焉, 而力莫能與也. 佩先師之格言, 承前烈之餘矩, 惟闇然而自修, 或庶㡬乎斯語.
白鹿洞敎規 [송, 주자]
父子有親,君臣有義,夫婦有别,長㓜有序,朋友有信.---右五敎之目堯舜使契為司徒敬敷五敎即此是也學者學此而已而其所以學之之序亦有五焉其别如左.
慱學之,審問之,慎思之,明辨之,篤行之.---右為學之序學問思辨四者所以窮理也若夫䔍行之事則自修身以至於處事接物亦各有要其别如左.
言忠信,行䔍敬,懲忿窒慾,遷善改過.---右修身之要.
正其義,不謀其利,明其道,不計其功.---右處事之要.
已所不欲,勿施於人,行有不得,反求諸已.---右接物之要.
熹竊觀古昔聖賢所以敎人為學之意莫非使之講明義理以修其身然後推以及人非徒欲務記覽為詞章以釣聲名取利禄而已也今人之為學者則既反是矣然聖賢所以敎人之法具存於經有志之士固當熟讀深思而問辨之茍知其理之當然而責其身以必然則夫規矩禁防之具豈待他人設之而後有所持循哉近世於學有規其待學者為已淺矣而其為法又未必古人之意也故今不復以施於此堂而特取凡聖賢所以敎人為學之大端條列如右而揭之楣間諸君其相與講明遵守而責之於身焉則夫思慮云為之際其所以戒謹而恐懼者必有嚴於彼者矣其有不然而或出於此言之所棄則彼可謂規者必将取之固不得而畧也諸君其亦念之哉
六先生畫像賛 [송, 주자]
濂溪先生; 道喪千載 聖逺言湮 不有先覺 孰開我人 書不盡言 圖不盡意 風月無邊 庭草交翠
明道先生; 揚休山立 玉色金聲 元氣之㑹 渾然天成 瑞日祥雲 和風甘雨 龍徳正中 厥施斯普
伊川先生; 規員矩方 繩直準平 允矣君子 展也大成 布帛之文 菽粟之味 知徳者希 孰識其貴
康節先生; 天挺人豪 英邁盖世 駕風鞭霆 厯覽無際 手探月窟 足躡天根 閑中今古 醉裏乾坤
横渠先生; 早悦孫吳 晚逃佛老 勇撤臯比 一變至道 精思力踐 妙契疾書 訂頑之訓 示我廣居
洓水先生; 篤學力行 清修苦節 有徳有言 有功有烈 深衣大帶 張拱徐趨 遺象凛然 可肅薄夫
遊白鹿洞歌 辛巳三月紫霞真人宿此洞編蒲為書
何年白鹿洞 正傍五老峯 五老去天不盈尺 俯窺人世煙雲重 我欲攬秀色 一一青芙蓉 舉手石扇開半 掩緑鬟 玉女如相逢 風雷隠隠萬壑瀉 憑崖倚樹聞清鐘 洞門之外百丈松 千株盡化為蒼龍 駕蒼龍騎白鹿 泉堪飲芝可服 何人肯入空山宿 空山空山即我屋 一卷黄庭石上讀
[楹聯]
列嶂成垣, 永護考定之遺迹;
環溪作伴, 遙通泗洙之眞源.
德冠生民, 溯地辟天開, 咸尊首出;
道隆群聖, 統金聲玉振, 共仰大成.
廬山上 釋家幾處, 道家幾處, 二氏逃歸, 斯受之宗門大啓;
書院中 你講一場, 我講一場, 衆言淆亂, 折諸聖廟貌赫臨.
無絲竹之亂耳;
樂琴書以怡情.
鹿豕與遊, 物我相忘之地;
泉峯交映, 智仁獨得之天.
白鹿洞開, 泉谷煙霞競秀;
紫陽道在, 聖賢師友同歸.
傍百年樹;
讀聖賢書.
詔有格言, 求眞才于正學;
敎無異術, 體至理于常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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