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상하이 461호(2014.12.7)
* 百上海 (Buy Shanghai)는 상하이 교민들을 대상으로 발행하는 한글 주간지이다.
임춘성 교수의 <영상으로 읽는 상하이>
―상하이영화와 영화 상하이―
리안의 『색, 계』(1)
베네치아 영화제 수상작 『색, 계』
2012년 김기덕의 『피에타』에게 황금사자상을 안겨줬던 베네치아 영화제는 중국 영화와 인연이 남다르다. 1989년 허우샤오셴(侯孝賢)의 『비정성시』를 필두로, 장이머우(張藝謀)가 1992년 『추쥐의 재판/귀주 이야기』, 1999년 『책상 서랍 속의 동화』로 황금사자상을 두 차례 수상한 바 있다. 그리고 2005년 리안(李安)의 『브로크백 마운틴』이, 2006년 자장커(賈樟柯)의 『스틸 라이프』가, 2007년 다시 리안의 『색, 계』가 연속 황금사자상을 석권했다. 3연속 수상은 당시 베이징 올림픽을 앞두고 있던 중국인에게 대단한 자부심을 안겨주었으니, 문화 올림픽을 통해 국가의 위상을 한껏 높이려 벼르고 있던 중국에게 문화대국의 명예를 안겨준 셈이었다. 리안이 미국 국적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문제가 아니었다. 국경을 뛰어넘어 화인(華人)이라는 명명으로 그를 중국의 품으로 안을 수 있었던 것이다.
2007년 가을과 겨울 사이 홍콩과 타이완 그리고 대륙에서 리안의 『색, 계』는 대대적으로 환영을 받았고, 상하이에서는 영화가 끝난 후 관객들이 기립 박수와 함께 “리안 만세, 만만세!”를 외쳤다고 한다. 리안 신화, 리안 기적, 세계적으로 공인된 감독, 할리우드에서 성공한 중국계 감독 등의 수식어가 어색하지 않게, 그는 상업과 예술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거머쥐고 대륙·홍콩·타이완을 넘나들고, 중국어세계와 영어세계를 횡단함으로써 ‘화인의 빛(華人之光)’이 되었다. 리안의 『색, 계』를 제대로 음미하려면 ‘모던 상하이’의 역사를 알아야 한다.
모던 상하이의 부침
맑스가 부도덕한 전쟁이라 평했던 아편전쟁이 1840년에 일어났고 패전한 중국은 최초의 ‘불평등조약’인 난징(南京)조약을 체결한 다음해인 1843년 상하이는 개항을 맞이하면서 중국의 새로운 중심으로 부상했다. 개항 이전부터 상하이는 인근 도시의 기능을 흡수하고 있었고, 그보다 훨씬 이전인 1685년 청 강희제가 개방했던 네 곳의 항구 가운데 하나인 강해관(江海關)이 상하이 인근인 송강(松江)에 자리하고 있었다. 그리고 최근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불을 지피다”라는 평가를 받고 있는 명나라 정화(鄭和)의 대항해(1434)도 이곳에서 시작했다. 이렇듯 상하이의 지정학적 가치는 일찌감치 주목을 받아왔었고 1843년의 개항을 계기로 집약적인 발전을 하게 된 것이다. 상하이는 개항 이전부터 난징(南京), 양저우(揚州), 닝보(寧波), 항저우(杭州), 쑤저우(蘇州) 등 인근 도시들의 기능을 서서히 수렴하면서 1930년대에 국제적인 도시 ‘대(大)상하이’가 되었고 1950년대 이후 공화국의 장자(長子)가 되었다.
중서 교역의 관점에서 아편전쟁 이전의 광둥(廣東)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1840년 이전 광저우(廣州)는 국가의 공인을 받은 특허상인인 ‘13공행(公行)’을 대표로 하는 광둥무역체계의 중심이었다. 이는 서유럽 중상주의와 중국 중화주의의 동상이몽의 결과물로서, 광저우 13공행은 서양과의 무역뿐만 아니라 외교업무도 관장했다. 아편전쟁 이전 광둥의 월해관(粵海關)은 중서 해상 교통의 중요한 교차로이자 나라의 재화와 부가 모이는 곳으로, 아편전쟁 이전 중국 대륙의 유일한 개방 항구가 될 수 있었다. 그러나 17-18세기 대외무역을 총괄했던 13공행은 아편전쟁 이후 배상금 부담과 5구통상으로 인한 독점적 지위를 상실하고 말았다. 13공행은 상업 무대에서 완전히 사라졌고 행상들도 파산하거나 외국 상인들에게 매판으로 고용되는 등 저마다 다른 길을 걷게 되었다. 일부 영리하고 모험심 강한 상인들은 새로운 개항 항구인 상하이로 가서 떠오르는 부자가 되기도 했다.
광둥 상인들은 난징조약 직후 개항된 상하이에 가장 먼저 왔다. 그 뒤를 이어 오랜 도시 경영의 경험을 가지고 있던 인근의 닝보(寧波)인들이 몰려왔다. 전자가 상하이의 대외무역을 주도했다면 후자는 금융업에 뛰어들었다. 모던 상하이는 광둥 무역과 닝보 금융의 경험을 받아들인 기초 위에 ‘몸소 서양을 시험(以身試西)’해 자신의 독특한 정체성을 창안했다고 보아야 한다.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후 이들 상하이 금융인들은 마오쩌둥(毛澤東)뿐만 아니라 장제스(蔣介石)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기 위해 홍콩을 선택했는데, 이들은 서유럽식 금융업과 상업 실무를 습득한 최초의 중국인으로, 서양의 규칙에 따라 국제적인 금융게임에 참가해 홍콩 발전을 기틀을 다졌다. 그리고 금융업이 세계경제를 주도하기 시작한 1960년대부터 형성된 전 세계 화교들의 국경 없는 네트워크 형성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고 1980년대 개혁개방에 지대한 공헌을 한 것이다.
중서교류의 관점에서 볼 때, 중국 측 창구는 1840년 이전의 광저우, 1843년 개항 이후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직전까지의 상하이, 1950년대 이후의 홍콩, 1980년대 개혁개방 이후의 광저우와 선전(深圳), 1990년대 이후 상하이가 중심 역할을 했음을 알 수 있다. 크게 보면 주장(珠江) 삼각주와 창장(長江) 삼각주 사이를 오간 셈이다. 중국 근현대 장기 지속(longue durée)의 관점에서 볼 때, 상하이는 가장 오랜 시간 동안 중국의 대외 창구 노릇을 한 셈이다. 외국인 조계와 국내외 이주를 통해 중국의 새로운 중심으로 부상한 모던 상하이는 1930-40년대에 세계적인 국제도시의 명망을 뽐내다가, 1949년 공산화된 이후 그 영광을 홍콩에게 넘겨주었다. 식민지였으면서도 20세기 자본주의 정점의 하나를 구축했던 홍콩의 발전은 상하이의 후견 아래 이루어졌던 셈이다. 1930년대 서양인들에게 ‘동양의 파리’ 또는 ‘모험가들의 낙원’으로 일컬어졌던 상하이가 왕년의 영광 회복을 선언하고 나선 것은 1990년대 들어와서다. 푸둥(浦東) 지구 개발로 뒤늦게 개혁개방을 실시한 상하이는 10여년 만에 중국 최고 수준의 발전을 이루는 저력을 과시하고 있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우리는 상하이가 중국 근현대사의 진행과정을 압축적으로 구현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모던 상하이의 역사를 제대로 파악하는 것은 근현대 중국의 핵심을 이해하는 것이기도 하다.
* 국립국어원 외래어 표기법에 따랐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