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문
우리 시대의 큰 스승
청화 큰스님은 일찍이
백양사 운문암 금타화상의 문하로 출가한 이래,
반백년이 넘게 오로지 수행과 교화에만 헌신해 오신
우리 시대의 큰 스승이셨습니다.
그런 큰스님께서 입적하신 지도 이제 1년이 지났습니다.
성성하시던 그 음성이 여전히 귀에 쟁쟁하고,
햇빛이나 바람같이 맑고 투명하시던 모습 또한
여전히 눈에 선한데,
세월은 무상하게도 어느덧 이렇게 많이 흘렀습니다.
이 세상 저 세상 오고감을 상관치 않으셨던 큰스님처럼,
남겨진 제자와 사부대중 또한
인생이 무상함을 알지 못하는 것은 아니나,
그 그리움과 사모의 정을 누를 길 없어
이렇게 새삼 큰스님의 말씀을 새겨 법문집을 냅니다.
큰스님께서 생전에 가르쳐 주신 금과옥조의 불법에
행여 누가 되지 않을까 마음이 저어되기도 하지만,
이렇게 해서라도 남겨진 성문제자(聲聞弟子)와
사부대중이 위안을 얻을 수 있고,
고통의 바다에서 헤매는 중생들에게 기쁨이 될 수 있다면,
이 또한 큰스님의 바라시던 바가 아닐까 여겨집니다.
큰스님을 가까이 모시고 가르침을 받던 제자로서,
저는 우선 이 책을 읽으실 분들게
큰스님의 삶을 간략하게나마 소개하고자 합니다.
스님의 삶 자체가 바로 가르침이요,
스님의 삶 자체가 바로 하나의 긴 수행이었기 때문입니다.
큰스님께서는 1923년 11월 6일(陰)
전남 무안군 운남면 연리에서 탄생하셨습니다.
스님의 속명은 강호성이었습니다.
일본에 유학하고 광주사범학교를 졸업하셨는데,
학생시절 민족 자각의식을 깨우치면서
민족의 독립과 해방에 관심을 보이셨습니다.
교육의 중요성을 절감하여
귀국한 뒤 고향인 무안군에서
고등공립학교(현 망운중학교)를 세우셨습니다.
큰스님은 평소 동양철학에 깊이 심취하셨고
진보적 의식을 갖고 계셨습니다.
그러나 해방공간에서
민족 간의 극심한 좌우대립을 목격한 스님은
평소에 관심을 가졌던 출가를 결심하셨습니다.
그때가 바로 24세 때입니다.
1947년 큰스님은 속세를 등지고
전남 장성 백양사 운문암을 찾아가
당시 송만암 대종사의 상좌이신
금타대화상을 은사로 출가하셨습니다.
큰스님께서는
은사인 금타대화상의 수행가풍을 그대로 이으셨습니다.
하루 한 끼 공양(一種食)과 장좌불와(長坐不臥),
청빈(淸貧), 통불교(通佛敎) 사상을
평생의 신조로 삼아 수행에 임하셨습니다.
큰스님께서는 출가 후 40여 년의
깊고 깊은 수선안거에 들어가셨습니다.
무안 혜운사, 구례 사성암, 지리산 벽송사, 백장암,
남해 부소대, 두륜산 진불암, 상원암, 남미륵암,
장흥 금선암, 월출산 상견성암 등
전국 제방선원과 토굴에서
계율을 엄격히 지키며 탁마장양(琢磨長養) 하셨습니다.
그 중 사성암의 혹독한 고행은
세간에 알려질 정도의 두타행이셨습니다.
큰스님은 동안거 결제정진을 위해
암주보살에게 방세를 주어 아랫마을로 보내시고
홀로 삼동 한 철을 공부하셨습니다.
암주보살이 절 안에 놓아둔 고양이 때문에
밤중에 가끔 사성암에 올라가면
큰스님께서는 껌껌한 바위 웅덩이에서
찬 샘물을 큰 양동이에 받아
아주 천천히 머리에서부터 붓고 계셨다고 합니다.
당시 큰스님께서는 수행처 앞에
근고청중(謹告淸衆, 삼가 청정대중에게 알림)
푯말을 내걸으셨다고 합니다.
생사사대(生死事大, 삶과 죽음이 가장 큰 일인데),
무상신속(無常迅速, 덧없는 세월은 빨리 가버리니),
촌음가석(寸陰可惜, 짧은 시간도 한껏 아끼며),
신물방일(愼勿放逸, 방심하고 게으르지 말라)고 써놓으셨다고 합니다.
큰스님 탁발수행은
1983년 태안사에 주석하면서 끝이 났습니다.
늦깎이로 출가한 스님인지라
이미 60세가 넘으신 나이셨습니다.
83년 10월, 큰스님은 20여 명의 도반과 함께
한국전쟁으로 폐허가 된 태안사에서
95년까지 10년간 주석하시면서
3년 결사정진을 감행하고 중창불사를 완결하셨습니다.
수행과 불사는 따로가 아니라는 것을 손수 보여주신 것입니다.
큰스님께서는 재가불자들을 위한 참선수행을 위해
정중당(淨衆堂)을 개설하셨습니다.
당시로는 파격적인 결정이셨습니다.
큰스님께서는 수행에는
출ㆍ재가가 따로 없다고 생각하셨기 때문입니다.
1992년 겨울, 큰스님께서는
또 한 번 대중들을 놀라게 하는 수행력을 보여주셨습니다.
한국 불교 역사상 최초로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열 분의 대중스님들과 함께
3년 결사정진에 드신 것입니다.
큰스님께서는 삼보사에서 결사정진하시면서
많은 미국인들에게 감화를 주셨습니다.
큰스님께서는 95년 1월 동안거 중에
사부대중을 위한 7일간의 순선안심탁마법회'를 열어
참다운 선수행의 진리를 설파해
미국의 언론으로부터 큰 반향을 얻기도 하셨습니다.
큰스님께서는 출가하신 이래
한 번도 수선안거를 어기신 일이 없으셨습니다.
천하의 선승(禪僧)으로 널리 알려지신 큰스님께서는
교학이나 외전에 있어서도 대단한 박학이셨습니다.
교학에 대해 어떤 참구가 와도
시원시원하게 답변을 하실 정도였습니다.
큰스님께서 제창하신 행법(行法)은
투철한 계율과 정혜쌍수(定慧雙修)를 기본정신으로 한
염불선(念佛禪)이었습니다.
큰스님께서 제창하신 염불선은
경우에 따라 정통선(正統禪),
자성선(自性禪) 등으로 불리기도 합니다.
이는 은사이신 금타대화상께서 창도하신
보리방편문이라는 행법을 전수받으시고
이를 법계일심(法界一心)의 한
생명사상으로 승화시킨 행법입니다.
큰스님은 또 일관된 도량신조(道場信條)를 견지하셨습니다.
‘가장 청정한 도량,
가장 엄정한 계율,
초인적인 용맹정진’의 휘호를 손수 쓰셔서
도량에 내걸으셨습니다.
큰스님 수행도량의 사부대중은
이 삼대 신조를 기준으로 정진하였기에
세상의 귀감이 되는 수행공동체를 이룩할 수 있었습니다.
큰스님의 평생 화두는 ‘중도실상(中道實相)’이었습니다.
큰스님은 “선이란,
우리 마음을 중도실상인 생명의 본질에 머물게 해
산란하지 않는 수행법이다.
중도실상에 입각하면 회통이 된다.
중도실상의 안목을 가지고 바른 생활을 해야만
바른 깨달음이 가능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일생을 청정한 계행과
철저한 두타행으로 수행 정진해 오신 스님은
입적하실 때까지 조계종 원로의원으로,
전남 곡성 성륜사와 서울 도봉산 광륜사에서 정기법회를 열어
후학들을 제접해 오셨습니다.
2003년 11월 12일 오후 10시 30분,
곡성 성륜사 조선당에서 문도들에게
철저한 수행과 계율을 지킬 것을 당부하신 후 입적하시니,
세수는 80이요 법랍(法臘)은 56년이셨습니다.
그로부터 이제 1년이 지나 이 작은 법문집을 펴냅니다.
큰스님의 말씀 가운데 종요(宗要)로운 말씀들을 가리되,
사부대중이 너무 어렵지 않게
그 가르침을 깨우칠 만한 말씀들을 우선 간추렸습니다.
큰스님은 비록 가셨지만,
그 말씀으로 여전히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불기 2548년 10월
곡성 성륜사 주지 도일 합장
☞ 출처 : 본정 김영동 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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