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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연재 (1)
살아서나 죽어서나 나의 유일한 위로는?
김헌수 목사
(독립개신교회 신학교, 교의학)
<월드뷰>로부터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에 대한 해설을 기획하고 있다는 연락을 받았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의 관점에서 ‘세상을(월드) 보는 것(뷰)’은 나름 재미있는 시도라 생각되어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16세기 독일에서 작성된 이 요리문답이 21세기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에게 무슨 의미를 지니는지를 살펴보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 될 것이다. 시기적으로나 지리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지만,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을 작성한 분들이나 오늘날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이 모두 삼위 하나님을 고백하고 성경을 신앙과 생활의 기준으로 삼기 때문에, 이 요리문답에서 고백한 내용으로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을 읽어 내는 것은 ‘성도의 교제’를 누리는 즐거움이 되리라 기대한다.
16세기의 하이델베르크
하이델베르크는 독일 남서쪽에 위치하고 있고, 라인 강의 지류인 네카르 강변에 세워진 도시이다. 1386년에 세워진 하이델베르크 대학은 독일 최초의 대학이고, 헤겔을 포함한 많은 철학자와 현대 사회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막스 베버 등이 모두 이 대학에서 가르쳤다. 종교개혁자들 중에서도 마르틴 루터의 후계자인 필립 멜란히톤, 칼빈과 동역한 스트라스부르의 마르틴 부서와 같은 사람도 이 대학 출신이다.
16세기 독일은 신성로마제국에 포함되어 있었다. 제국은 크고 작은 나라들로 나뉘어 있었는데 그 중에서 일곱 제후에게 황제를 선출할 수 있는 권한이 있었다. 팔츠 영방(領邦)의 수도인 하이델베르크에 거주하는 팔츠의 제후는 일곱 선제후(選帝侯) 중의 하나로서 제국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마르틴 루터가 1517년 10월 31일 독일 동부의 비텐베르크에서 95개조를 붙이고 토론을 제안한 것이 종교개혁의 출발점이었는데, 그 토론은 이듬해인 1518년 4월에 하이델베르크에서 이어졌다. 당시 아우구스티누스 수도회의 수도사이던 루터는 1518년 봄에 하이델베르크에 와서 ‘하이델베르크 명제’를 발표하면서 로마 교회의 신학 체계가 지니는 중요한 약점을 지적하였다. 그러한 개혁의 일은 하이델베르크 대학 교수들에게로 이어졌다. 또한 팔츠의 선제후들 중에서도 개혁의 진영에 서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프리드리히 2세(1544-56년 재위)와 오토 하인리히(1556-59년 재위)가 개혁의 뿌리를 내렸고, 그 뒤를 이은 프리드리히 3세(1559-76년 재위)가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이라는 결실을 거두었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1563년) 살펴보기
팔츠의 선제후가 된 프리드리히 3세는 성찬에 대한 논쟁을 과격하게 전개하던 사람들을 해직시키고 대신 카스파르 올레비아누스(1536-87)와 자카리아스 우르시누스(1534-83)라는 젊은 신학자를 청빙하였다. 그들은 각각 제네바와 비텐베르크에서 개혁 신앙과 신학을 배우고 고향에 돌아가서 활동하였으나 그들이 가르치는 개혁 신앙 때문에 모두 자기 고향에서 쫓겨난 분들이었다. 프리드리히 3세는 팔츠 교회의 근본적인 문제, 곧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부족하여서 생활에 열매가 없는 문제를 해결하려고 그들에게 요리문답을 작성하도록 하였다.
1563년 1월에 프리드리히 3세의 서문과 함께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이 반포되었다. 그 서문에서는 저작권에 대하여 이렇게 밝힌다.
따라서 이곳의 신학부 교수회와 모든 시찰 감독들 그리고 고명한 목사님들의 충고와 도움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교훈의 요약, 즉 우리 기독교 신앙의 요리문답을 독일어와 라틴어로 작성하여 출판에 부칩니다.
서문에 우르시누스와 올레비아누스의 이름을 언급하지 않고 대신에 “신학부 교수회와 모든 시찰 감독들 그리고 고명한 목사님들”을 언급하고 있으며, 또한 하이델베르크에서 열린 회의에서 공적으로 택한 것이므로, 이 요리문답은 공동의 저작이고 동시에 팔츠 교회의 신앙고백서라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우르시누스와 올레비아누스는 각자 개별적으로 작성한 요리문답들도 가지고 있었으며, 거기서 직접 인용한 부분들도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그뿐 아니라 조금 더 범위를 넓히면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에는 칼빈의 “제네바 요리문답”(1542년)과 비슷한 부분도 있고, 칼빈의 후계자인 베자의 “짧은 신앙고백서”(1559년)와 비슷한 부분도 있다. 지면 관계상 제네바 요리문답과 비슷한 부분만 인용하겠다.
섭리란 하나님의 전능하고 언제 어디나 미치는 능력으로, 하나님께서 마치 자신의 손으로 하듯이, 하늘과 땅과 모든 피조물을 여전히 보존하고 다스리시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잎새와 풀, 비와 가뭄, 풍년과 흉년, 먹을 것과 마실 것, 건강과 질병, 부와 가난, 참으로 이 모든 것이 우연이 아니라 아버지와 같은 그의 손길로 우리에게 임합니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27문의 답)
비와 가뭄, 우박, 폭풍과 화창한 날씨, 다산과 불모, 건강과 질병을 보내시는 분은 바로 주님이십니다. 요약하면 모든 일이 그분의 명령에 달려 있습니다.…… (제네바 요리문답 27문의 답)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은 1563년에 독일에서 작성된 신앙고백서이지만, 위의 인용구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스위스 개혁자들의 영향도 많이 받았다. 특히 올레비아누스는 칼빈 외에도 하인리히 불링거와 같은 다른 스위스 개혁자들과 교류가 있었고, 우르시누스는 비텐베르크에서 루터의 동역자인 멜란히톤에게 7-8년 동안 배운 사람이었다. 이러한 점들을 고려할 때에 하이델베르크는 독일의 개혁 전통과 스위스의 개혁 전통을 모두 아우르고 또한 종교개혁 제1세대의 신앙을 더 정교한 언어로 고백한 요리문답이라 할 수 있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이 독일이라는 지역을 넘어서 전 세계에 걸쳐 지금까지 많은 교회의 사랑을 받는 배경에는 이러한 이유가 있다 하겠다.
나의 위로와 비참을 살펴보는 요리문답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은 따뜻하며 목회적이라는 평을 듣는다. 제1문만 읽어 보더라도 우리의 마음에 호소하는 것이 있음을 알 수 있다.
1문: 살아서나 죽어서나
당신의 유일한 위로는 무엇입니까?
답: 살아서나 죽어서나
나는 나의 것이 아니요,
몸도 영혼도
나의 신실한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보혈로 나의 모든 죗값을 완전히 치르고
나를 마귀의 모든 권세에서 해방하셨습니다.
또한 하늘에 계신 나의 아버지의 뜻이 아니면
머리털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않도록
나를 보호하시며,
참으로 모든 것이 합력하여
나의 구원을 이루도록 하십니다.
그러하므로 그분은 그의 성신으로
나에게 영생을 확신시켜 주시고,
이제부터는 마음을 다하여
즐거이 그리고 신속히
그를 위해 살도록 하십니다.
제1문은 ‘당신의 유일한 위로’에 대한 질문으로 시작하고, 대답에도 ‘나’라는 말이 아홉 번(독일어 원문에는 10번)이나 나온다. 기독교 신앙을 명제적으로 제시하지 않고 우리의 영혼과 마음을 담아서 개인적으로 고백하게 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 고백을 따라 복창하는 사람은 마음까지도 따뜻해짐을 맛보지만, 어떤 이들은 혹시 주관주의적이거나 감정적인 데로 빠지지 않을까 우려하기도 한다. 실제로 미국 장로교회 역사에서 큰 역할을 하였던 워필드(1851-1921)는 ‘하나님의 영광이 삶의 목적이라고 고백하는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은 하나님 중심적이지만, 인간의 위로를 이야기한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은 인간론적’이라고 비판하였는데 그의 주장이 장로교회 안에서는 여전히 널리 인정되고 있다.
그렇지만 워필드의 주장은 단면적이다. 제1문답은 네 문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첫 문장은 사람의 유일한 위로가 자신이 그리스도의 소유라는 사실에 있다고 고백한다. 그리고 이어지는 세 문장에서는 각각 ‘그리스도’와 ‘하늘에 계신 나의 아버지’, ‘그분의 성신’을 주어로 삼아서 말한다. 달리 표현하면 자신이 그리스도의 소유가 되었다는 사실을 삼위 하나님과 연결하여서 고백하는 것이다. ‘위로 - 그리스도의 소유 - 삼위 하나님’으로 이어지는 이러한 구성은 ‘나의 유일한 위로’가 내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삼위 하나님 안에’ 있음을 나타낸다. 위로는 사람이 경험하는 것이지만, 이 위로의 근원을 삼위 하나님 안에서 찾은 데에서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의 원숙함이 잘 드러난다.
나의 비참함과 위로에 대한 성경적 교훈
‘위로’라는 말로 구원을 표현한 예를 우리는 이사야 선지자의 글에서 잘 볼 수 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과의 언약을 어겨서 다른 나라에 포로로 잡혀갔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이름을 위하여 그들을 구원하실 뜻을 보이셨다. 이사야서 40장부터 하나님의 구원에 대해서 예언하는데, 그 첫마디는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사 40:1)는 말이다. 이어서 선지자는 그 위로의 내용으로, 이스라엘이 복역(服役)의 때를 마치고 그 죄악이 사함을 받아 시온으로 다시 돌아오게 될 것을 말한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고난당하는 그분의 백성을 구속하시는 것을 보고서, 선지자는 “하늘이여 노래하라! 땅이여 기뻐하라! 산들이여 즐거이 노래하라! 여호와가 그 백성을 위로하였은즉 그 고난당한 자를 긍휼히 여길 것임이니라”(사 49:13) 하고 이야기한다. 예루살렘의 황폐한 곳들도 기쁜 소리를 발하여 함께 노래하는데, 그 이유는 ‘여호와께서 그 백성을 위로하셨고 예루살렘을 구속하셨기’ 때문이다(사 52:9. 참조. 51:12). 이러한 표현들을 보면 ‘위로’와 ‘구속’이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다. “어미가 자식을 위로함같이 내가 너희를 위로할 것인즉 너희가 예루살렘에서 위로를 받으리니”(사 66:13)라는 말씀처럼, 사람들은 다른 곳에서는 위로를 받을 수 없고 오직 여호와의 구속하심이 있는 예루살렘에서만 위로를 받을 수 있다.
이처럼 하나님의 구원을 ‘위로’라는 말로 표현했기 때문에, 메시야를 기다리던 시므온은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눅 2:25)라고 불린다. 메시야는 이스라엘을 위로하시는 분이다. 창세기 3:15부터 내려오는 구약의 예언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성신으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가난한 자와 마음 상한 자, 포로 되고 갇힌 자에게 전하시면서 그 예언이 “오늘날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사 61:1-3; 눅 4:16-21) 하고 선언하셨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에는 ‘위로’라는 말이 총 여섯 번 나오는데(1, 44, 52, 53, 57, 58문) 그 문맥을 보면 대체로 영원한 나라와 관련이 있다. 특히 ‘음부에 내려가심’(44문), ‘심판하러 오실 것’(52문), ‘육신의 부활’(57문), ‘영원한 생명’(58문) 등이 우리에게 어떠한 위로를 주는가를 깊이 있게 다룬다. 이처럼 요리문답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위로는 살아서 뿐 아니라 죽음을 넘어 영원한 나라에까지 미치는 그러한 위로이다.
나의 위로와 비참한 현실 - 16세기와 21세기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의 관점에서 16세기의 신자들과 오늘날 우리의 상황을 비교하려 할 때에, 우선 이렇게 제1주일에서 말하는 위로와 비참함이라는 관점에서 생각해 볼 수 있다.
첫째, 16세기의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께서 베푸신 구원을 개인이 경험하는 위로로 고백하되 삼위 하나님의 사역에 근거하여서 고백하였다. 이러한 고백은 굉장한 힘을 지닌다. 삼위 하나님의 사역에 그 근거를 둔 위로는 아무도 빼앗을 수 없다. 특히 사람의 선행을 구원과 관련하여 중요하게 가르치던 로마교회에서는 이러한 확신이 주는 위로를 경험할 수 없었다. 따라서 로마 교회에서는 16세기 개신교회들에 대하여 ‘구원의 확신을 가진 이단’이라고 비난하였다.
16세기 선배들의 그러한 태도는 우리에게도 귀감이 된다. 고독과 우울함에서 벗어나려고 ‘위로’를 찾는 일이 우리 주변에는 많이 있다. 현대의 개인주의적이고 감정적이며 경험주의적인 경향은 끊임없이 자기 안에서 무엇을 찾게 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베푸신 은혜를 바르게 보지 못하게 한다. 그러나 개인의 선행이나 감정이나 경험에 근거한 확신은 오래갈 수 없다. 위로는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경험하는 것이지만, 위로의 근거는 우리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삼위 하나님 안에 있다. 우리의 위로는 나의 전체가 그리스도의 것이라는 ‘사실’에 기초한 것이지, 나의 경험이 위로의 근거가 될 수는 없는 것이다.
둘째, ‘비참함’이라는 요리문답의 표현은 16세기의 상황에서 특별한 의미가 있었다. 요리문답 원문의 독일어 ‘엘렌트(Elend)’는 추방되었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을 작성하는 데 기여한 세 사람 - 프리드리히 3세, 올레비아누스, 우르시누스 - 은 모두 개혁 신앙을 가졌다는 이유로 어려움을 당하였고 주님의 섭리로 인해 하이델베르크로 온 사람들이었다. “하이델베르크에 온 세 사람”은 고향에서 추방된 사람들이었고 나그네의 비참함을 깊이 체험한 사람들이었다.
‘비참함’을 개인적인 느낌으로 이해하지 않고 성경적으로 이해할 때에, 우리는 우리가 죄 때문에 하나님의 낙원에서 쫓겨난 망국민(亡國民)임을 알게 된다. 이것이 우리의 비참함이다. 이러한 비참함은 우리의 위로가 되시는 그리스도 외에 다른 무엇으로도 없앨 수 없다. 하나님의 나라가 완성될 때까지 성도는 여전히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에 참여하지만, 그 고난은 장차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한 것이다. 그날에 주께서 성도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기실 때에 우리의 근원적인 비참함은 끝날 것이고, 나의 유일한 위로, 우리의 유일한 위로가 우주적인 차원에서 완성될 것이다.
우리의 요리문답은 “나의 유일한 위로”와 “나의 모든 죄와 비참함”이라는 표현 때문에 매우 개인적인 성격을 지니는 것 같지만, 동시에 그 배경에는 하나님의 선하신 창조와 죄로 인한 타락, 삼위 하나님의 구원 사역과 새 하늘과 새 땅에서 그 구원이 완성되는 일에 관한 거대한 성경 역사가 깔려 있다. 따라서 요리문답의 고백은 매우 개인적이면서 동시에 매우 포괄적인 고백인 것이다.
위로와 비참함에 대한 바른 이해는 21세기의 우리에게도 절실하다. 지하철이나 버스에서도 사람들은 끊임없이 다른 사람과 소통하려고 한다. 카톡, 페북, 인스타그램, 트위터 등 SNS에 들이는 시간과 노력이 엄청난데, 그것은 ‘소속감’과 관련이 있다. 생활이 더 바쁘면 바쁠수록 무엇인지 잘 알 수 없는 공허감이 있어서 사회 관계망을 유지하려고 한다. 그러한 21세기의 우리에게 16세기의 선배들은 ‘위로와 비참함’을 화두로 던진다. 성경에 뿌리를 두고 있는 이 단어에서 진정한 소속감을 찾으라고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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