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일에 제사를 지내게 된 것은 비교적 후대인 중국 송나라 때부터로 알려져 있다. 당시 유학에 새로운 학풍을 몰고 왔던 성리학자들에 의해 비로소 제사하는 풍습이 생기게 된 것이다. 북송의 사마광이 지은 『서의』에는 기제가 보이지 않고 남송의 주희가 지은 『가례』에 수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그 사이에 시작된 듯하다.
제사는 본래 길례(吉禮)에 속하는 것이다. 이는 귀신에게 음식과 재물과 같은 희생물을 바치고 춤과 음악으로 그를 기쁘게 함으로써 인간이 복을 받고자 했던 일종의 축제 같은 것이었다.
동서고금에 걸쳐 제사는 떠들썩한 잔치와 같은 것이었으며 또한 이웃 사람들을 불러 음식을 대접하는 하나의 연회이기도 했다.
『맹자』에도 제사를 지내지 못하면 연회를 할 수 없다고 하였다. 따라서 제사는 신을 향사하고 신으로부터 복을 받는 대단히 즐거운 축제로서 각기 일정한 계절에 따라 정해져 있었다. 시제라고 부르는 4대조까지의 합동 제사는 4계절의 가운데 달, 곧, 시조의 제사는 동지에, 먼 선조에 대한 제사는 입춘에, 그리고 부모의 제사는 계추(季秋) 곧 음력 9월에 지내도록 되어 있었다.
송대 이후에 지내게 된 기제사는 매우 조심스럽게 치르도록 되어 있고 친지나 이웃과 음식을 나누어 먹는 절차도 없었다. 이날(기일)은 술을 마시지 않고 고기를 먹지 않으며, 음악을 듣지 않고 검정 포(袍:두루마기 형태의 웃옷)와 흰옷을 입고 흰 띠를 두르고 지내며, 밤에는 안방에 들지 않고 사랑채에서 자도록 했다. 이것이 기일을 지내는 도리였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오래전부터 대부분의 가정에서 시제와 선조 그리고 부모에 대한 계절 제사는 행하지 않았으므로 기제사에 연희의 요소가 합쳐져 이날 손님을 초대하고 이웃과 음식을 나누어 먹는 풍습이 생기게 되었다. 그렇더라도 이날이 조상의 돌아가신 날인만큼 근신하는 마음가짐이 필요하다 하겠다.
기제사를 지내는 조상은 조선 전기까지는 신분에 따라 달랐지만 『가례』가 널리 생활화된 조선 후기 이후에는 고조부모, 증조부모, 조부모 그리고 부모에 이르기까지 4대 봉사를 하는 것이 관행으로 되어 있다. 제사를 받드는 봉사자는 물론 적장자, 적장손으로 이어지는 맏이이다. 이는 제사가 직계 계승의 원리에 의해 행해지는 의례이기 때문이다.
『가례』를 비롯한 모든 예서에는 시제를 가장 중시하여 모든 제사의 앞에 두었고 기일 제사는 시조, 선조, 부모의 제사 뒤에 두었지만 여기에서는 기제사 위주로 설명하려 한다. 이는 고대와는 달리 현대의 거정에서는 기제사를 가장 중요한 제사로 여기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시제의 중요성을 망각해서는 안 되며 그 예법을 현대의 형편에 맞게 부활하는 방법을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