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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신앙고백의 주체선언
말씀 : 마28:19, 16:16, 히11:1절
사도신경은 주기도문과 더불어 모든 교회에서 암송되어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기도문은 성경에 명백히 기록되어 있는 반면,
사도신경은 성경 가운데서 자구적으로 일치하는 기록을 찾을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사도 신경이 교회 역사 가운데서,
오늘에 이르기까지 계속 암송되며 사랑받는 것은
구원에 대한 기독교의 진리가 함축적으로 잘 표현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사도신경은 인간 구원과 관련된 성경의 진리를 요약하여 구원의 주체이신 삼위 하나님의 사역별로 정리한 것입니다.
따라서 사도신경이 성경 자체와 동일한 권위를 갖는다고 말하기는 어려우나 성경에서 구원의 진리를 추출한 것이기 때문에,
진리의 말씀인 성경과는 완전한 조화를 이루는 성경적인 것입니다.
한편 사도신경이 언제부터 고백되어 왔는지에 대해서는 여러 견해들이 있습니다. 전설적인 이야기로는 예수님께서 승천하신지 열흘이 되던 날 사도들이 한 자리에 모여서 앞으로 그들이 전파할 복음의 내용을 동일하게 하기 위해
요강을 만들었는데 이때 사도들이 돌아가면서 한마디씩 말한 내용을 엮은 것이 사도신경이란 것입니다.
이는 사도신경에 12번의 '믿는다'는 말이 나오는 것과 조화를 이루며,
사도신경의 기원을 사도에게 둠으로써 권위를 갖게 하려는 의도에서
널리 유포되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고백하는 것과 동일한 형태의 사도신경은
710-724년에 작성된 문서에서 비로소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신경은 사도적 권위를 갖는 것은 분명합니다.
왜냐하면 사도들이 활동하던 초대교회 당시부터 성도의 신앙 고백으로 사도신경이 사용되었으며 따라서 이는 사도들의 바른 신앙이 전승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도신경은 어떻게 형성되었는가?]
사도신경의 형성에 대하여는 신비에 싸여 있지만 그 기원에 대해서 우리가 말할 수 있는 것은 마28장19절과 16:16절이 그 모체가 되지 않았는가라는 추측이 가능하다는 것뿐입니다.
1. 마태복음 28장19절은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예수님이 이 말씀을 하신 이후, 이 문장은 세례를 베풀 때 사용되는 기본예전형식으로 정착되었습니다.
세례는 아버지 곧, 성부와 아들 곧,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시행됩니다.
여기서 성부, 성자, 성령 세분 하나님이 언급되는데,
사도신경은 바로 이 세분 하나님을 고백하는 기본틀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내가 하나님 아버지를 믿고, 하나님의 아들을 믿고, 성령을 믿는다”는 기본틀은 사도신경의 골격입니다.
2. 또 마태복음 16장16절은 기독교사상 최초로 기록된 신앙고백문이라고 할 수 있는 데, 이 고백문에서 베드로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베드로의 이 신앙고백은 온통 하나님의 아들에게 집중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이 아들이 우리의 주이시며, 그리스도임이 고백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앞에 말씀드린 기본형에다가 아들에 대한 설명 곧,
-그 아들은 외아들이며,
-우리의 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라는 고백이 다시 첨가되면서,
“하나님 아버지를 믿고, 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성령을 믿는다”는 형식이 성립되었습니다.
3. 기본형에 나타난 삼위일체 하나님에 핵심적인 교리내용 첨가
초대교회의 지도자들은 이 기본형에 나타난 삼위일체 하나님이 세례를 받고자 하는 모든 자가 기본적으로 반드시 알아야 할 내용이라는데 의견을 같이하면서, 이 기본틀에게다가 하나씩 하나씩 가르쳐야 할 핵심적인 교리의 내용들을 첨가하게 되었고,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오늘날 사도신경으로 알려진 고백문이 성립된 것입니다.
특별히 초대교회 시대에 여러 이단들이 등장해서 교회를 어지럽혔고,
이들과 논쟁을 하는 가운데 기독교인들이 이단의 미혹에 넘어가지 않게 하기 위하여 꼭 필요한 교리적 조항들이 하나씩 첨가되었습니다.
특별히 성자 하나님 곧,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내용이 많은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구원사역을 이루신 분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특히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이단도 많이 일어났고 논쟁도 많았기 때문입니다.
이런 과정을 거쳐 내려오다가
-주후 500년경에 오늘날 우리가 고백하는 것과 같은 형식으로 정립이 되었고, -이후 1500년이 넘는 긴 기간동안 카톨릭교회나 개신교를 막론하고 모든 교회가 공통적으로 고백하는 신앙고백문으로 사용되어 왔습니다.
1500년 동안이나 고백문으로 사용되어 오면서도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는 것은 이 고백문이 얼마나 잘 만들어진 고백문인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4. 사도신경은 기독교교리의 핵심을 요약한 고백문입니다.
사도신경은 어는 한 뛰어난 신학자에 의하여 형성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을 시작으로 해서 초대교회 열두사도와 속사도들, 교부들,
그리고 수많은 교회회의들을 거치면서,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의 기도와 연구와 수정을 거쳐 가면서,
수백년간에 걸쳐서 만들어진 기독교교리의 핵심을 요약한 고백문입니다.
결국 이 고백문은 이같이 많은 신실한 기독교인들과 교회들과 교회회의들을 통하여 역사하신 성령의 작용을 통해서 형성된 고백문입니다.
이 고백문은 두 가지 중요한 특징을 가지고 있는데,
첫째는 이 고백문은 철저하게 성경말씀에 근거하여 작성되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고백문은 신적인 거룩한 권위를 가집니다.
둘째로 이 고백문은 성령의 도우심을 간구하는 수많은 교회회의를 통해서 교회의 공식교리로 인정받은 것이요, 따라서 이 사도신경 고백문은 어느 한 신학자나 교인이나 교회나 교단이 마음대로 바꾸거나 고치거나 무시해서는 안됩니다.
이렇게 하여 형성된 사도신경은 그 이후,
-세례를 받아야 할 사람들이 필수적으로 고백해야 할 표준으로서,
-또 성도들의 교육의 기본틀로서,
-나아가서는 이단을 가려내고,
-교회의 순결성을 보존하는 틀로서 사용되었습니다.
그러면 초대 교회 때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의
계속 사도신경을 사용하고 있는 까닭은 무엇일까?
첫째, 방대한 기독교의 구원 진리를 간결한 형태로 정리하여
일관성 있는 진리를 사람들에게 교육하기 위해서입니다.
둘째, 기독교의 순수성을 해치는
이단의 그릇된 견해를 분별하는 기준을 마련하기 위해서입니다.
셋째, 성도들로 하여금 항상 바른 신앙을 고백케 함으로써
자신의 신앙을 되돌아보며 신앙을 향상시키기 위해서입니다.
이처럼 사도신경은 성경에 입각하여
기독교의 구원 진리를 일목요연하게 요약한 역사성을 지닌 신앙고백입니다.
이러한 신앙 고백은 인간 구원을 이루시는
삼위 하나님의 역할이 성부.성자.성령의 사역별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본서에서도 성부 하나님으로부터 시작하여,
성자 그리스도와 성령의 구원 사역을 구분하여 해설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도신경이 성자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에 대해 상대적으로 많은 내용을 담고 있는 바 이에 대하여는 성자 그리스도의 본성에 대한 신앙 고백과
성자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에 대한 신앙 고백으로 나누어 해설하고자 합니다.
실로 성경의 축소판이라고 할 수 있는 사도신경을 깊이 음미한다면 큰 신앙의 성장을 이룩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신앙고백의 주체선언-각개인 "...내가 믿사오며..."]
사도신경은 단순하지만 심오한 문장으로 시작됩니다.
즉 "내가 믿습니다.(I believe in)"라는 구절로 시작됩니다.
"내가 믿습니다"라고 시작되는 사도신경의 서두는,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 개인적인 것이라는 성경의 진리를 잘 반영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사도신경 암송자가 자신이 개인적으로 하나님을 믿는 사실을 무엇보다도 먼저 고백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믿는다”라는 매우 중요한 단어를 만나게 됩니다.
우리는 자기 자신의 개인적 신앙의 토대 위에서 "내가 믿습니다"라고 고백하여 사도 신경을 받아들임으로써 그 교회의 교제에 참여하게 되는 것입니다.
도대체 믿는다는 것, 믿음이란 무엇이냐?
1. 먼저 우리는 사도신경 고백문이 “나는 생각한다. 또는 나는 안다”는
표현을 사용하지 않았다는 점에 유의해야 하겠습니다.
“생각한다”라든지, “안다”는 말은 이성 또는 지성의 문제입니다.
생각한다 또는 안다는 단어를 사용하게 되면, 나의 전인격 가운데 다만 나의 이성 또는 지성만이 동원되고 나의 감성이나 의지는 배제됩니다.
그러나 믿는다고 할 때는 단순한 이성이나 지성으로 아는 지식 이상의 것이 포함됩니다.
곧 지. 정. 의가 모두 포함된 개념입니다.
나아가서는 나의 인격 전체가 포함된 개념입니다.
곧, 이성을 통하여 아는 지식뿐만 아니라 나의 감성으로 느끼는 감정도 포함되고,
나의 확고한 의지까지도 포함된,
나의 인격 전체로서 상대방과 관계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지. 정. 의라는 철학적인 용어보다 더 생생하고 알맞은 표현을
우리는 성경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마가복음 12:30절을 보면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여기 기록되어 있는 마음을 다 드리고 목숨도 드리고 나의 뜻도 드리고 나의 힘도 드린다는 표현이 “지. 정. 의”를 다 드린다는 표현에 해당하는 표현인데, 훨씬 더 구체적이고 실감이 있고 역동성이 있는 표현입니다.
따라서 믿느다는 말은 이처럼 우리의 마음과 목숨과 뜻과 힘을 다해서 하나님을 신뢰하고 사랑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매 주일 사도신경을 고백할 때는 단순히 나의 지식으로만이 아니라 나의 몸 전체를 드린다는 심정으로 한마디 한마디 신중하고 감격어린 태도로 고백하여야 할 것입니다.
2. 믿는다는 말이 지니는 또 다른 중요한 의미는
믿는 대상이 객관적이고 무감각하고 무표정한 대상이나 사물이 아니라 나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계시는 따뜻한 인격체임을 시사해 준다는 것입니다.
사도신경을 고백할 때 우리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을 믿는다고 고백하게 되는데, 여기서 성부도 인격이요, 성자도 인격이요, 또한 성령도 단순한 능력이 아닌 인격입니다.
이 처럼 인격을 가지신 하나님이
-우리를 창조하셨고,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셨으며,
-우리를 의롭다 하셨으며,
-우리를 양자로 삼으셨으며,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셨으며,
-우리의 몸을 성전으로 삼고 우리 안에 들어와 거하십니다.
얼마나 우리와 긴밀한 관계안에 계십니까?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존재함을 인정하고 신뢰하고 우리의 모든 인생을 의탁하고 또한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3. 다음으로 사도신경이 생각한다라든지 안다는 말 대신 믿는다는 말을 사용한 이유는 믿는다고 고백하는 내용들이 인간의 평범한 이성으로 쉽게 받아들이기 어렵고, 이성의 차원을 넘어서서 신비에 가득차 있는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이성적으로는, 또는 평범한 상식으로는 납득이 되지 않지만 진리임을 인정하기 때문에 “믿는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히브리서11:1절이 말하고 있는 믿음의 내용입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언니”이 말이 무슨 뜻입니가?
“바라는 것”은 현재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를 들어서 내가 “자동차를 바란다”고 생각해 봅시다.
현재 나에게는 자동차가 없기 때문에 자동차를 바라는 것이지요.
그런데 없는 자동차를 “실상”처럼, 곧 내 눈앞에 실물인 자동차가 있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이 바로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또 우리 눈으로 “보지 못하는 것”을
마치 우리 눈앞에 뚜렷하게 증거가 드러나 있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이
곧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성으로서는 다 납득하기 어려운 신비롭고 경이로운 일들을
확신한다고 고백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이성으로는 다 이해하기 어려운 것을 확실히 진리라고 믿는 것은
인간의 힘만으로는 안되고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을 받아야 합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엡2:8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그러므로 우리는 사도신경을 고백할 때 하나님께서 믿음의 선물을 주셔서 이 놀라운 고백의 내용들을 전적으로 믿고 진리로 받을 수 있도록 간구하는 마음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기독 교회는 신자들의 공동체입니다.
그리고 모든 신자는 성경에 계시된 동일한 진리를 믿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신자들은 교회에 나아가 다른 신자들과 함께 모이지 않을 것입니다.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찌 상관하겠는가?"(고후 6:15).
그러므로 신자들이 고백하는 사도신경은 신자들의 공동체인 교회의 신앙에 대한 표현입니다.
그러나 이미 말하였거니와 사도신경은 먼저, 교회 각 회원의 개인적 신앙의 표현이었기에 개인들의 것입니다.
이 진리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께 대한 신앙은 분명히 개인적인 것입니다.
우리가 이 사실을 이해하지 못하는 한, 신앙생활은 단지 종교적인 관습에 지나지 않게 되고 이러한 관습적 종교 행위는 조만간 따분한 일이 되고 말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의 삶이 그러합니다.
십대들은 주일 학교가 따분하기 때문에 거기서 떨어져 나갑니다.
성인들도 설교가 자기들의 분명한 요구를 충족시키지 못한다는 핑계를 대면서 교회에서 멀어집니다.
어떤 경우에는 설교 내용이 지적됩니다.
청중은 그 설교 내용을 이해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그것을 거부합니다.
그들은 시편 10편에 나오는 악인과 흡사합니다.
그는 "여호와께서 이를 감찰치 아니하신다 하며, 그 모든 사상에 하나님이 없다"(시 10:4)고 합니다.
분명히 계셔서 역사를 주관하시고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이 없다고 하는 사람에게는 소망이 없습니다.
반대로 하나님이 계신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는 소망이 있습니다.
그러나 많은 경우 그들도 개인적으로는 하나님을 알지 못합니다.
그들은 교회에서 자라왔기 때문에, 단순히 교회의 일원이 되었다는 사실만으로 그들의 미래가 보장받으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사실상 개인적인 신앙 고백이 없는 자들은 형식상 교인일 뿐이며,
실상은 교인 자격을 박탈당하고 교회에서 쫓겨난 자처럼 교회 안의 잃어버린 자입니다.
구원은 복음의 진리를 체득하고, 자기 죄에서 돌이켜 그리스도께서 그의 삶 속으로 들어오시기를 믿음으로 기도하는 사람의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부르심에 응하는 자 한 사람 한 사람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들은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롬 10:9)라고 한 사도 바울의 말씀에 귀를 기울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이 말씀에 깊이 주의한다면, 진실하게 사도신경을 고백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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