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합론 장차 이품을 해석함에 있어서 여섯 문으로 분별함이니 1은 품(品)의 제목을 해석함이요, 2는 품의 원뜻을 해석함이요, 3은 여래의 처소를 해석함이요, 4는 설법주를 해석함이요, 5는 모인바 대중을 해석함이요, 6은 글을 따라 그 뜻을 해석함이라. 그 1은 명목을 해석함이니 왜 입법계품이 되었는가. 믿음을 즐거워하여 미(迷)를 좇아 통달함을 이름하여 입(入)이라 하고, 몸과 마음의 경계가 성(性)이 스스로 의지가 없음을 이름하여 법(法)이라 하고, 일다(一多)가 통철(通徹)하여 진가시비(眞假是非)의 장애가 없음을 이름하여 법계(法界)라 하며, 또 무명종식(無明種識) 순전히 지혜를 씀으로써 미혹에 속하지 않음이 무의지(無依智)의 경계인 줄 통달함을 이름해서 법계라 한다. 불찰(佛刹)이 중중(重重)무진하여 성인과 범부가 동체(同體)요, 경계의 모양이 서로 상즉상입(相卽相入)함을 보니 이것이 법계라. 한 티끌 안에 많은 불세계를 머금어 허공의 세계에 두루하지 않음이 없고, 불찰(佛刹)마다 해당치 않음이 없음이라. 경계의 한량없는 세계가 무너지지 아니하고 진리(法)가 참되지 않음이 없다. 이치에 통하고 사리에 통철하여 이름이 법계가 되고, 또한 묘음(妙音)으로써 두루 법계의 부처님 세계에 들고 일섬모(一纖毛)로써 그 양(量)이 방위(方位)가 없음과 동등하여 대소의 봄이 없어지매(見亡) 물아(物我)가 동체(同體)요, 식(識)을 버리고 정(情)을 멸하매 지혜가 통하여 걸림없음에 이름이 입법계(立法界)가 됨이라. 지혜의 경계를 잡아 널리 밝힘이니 육안과 식정(識情)의 소견(所見)에 의지하지 말지어다. 2는 품(品)의 원뜻을 해석함이니 여래의 출현을 밝히었으며, 또 마음이 물듦이 없음을 이름이 이세간(離世間)이라. 이 품은 일체 제불이 성도해 마친 지혜의 상과(常果)라, 시작도 없고 마침도 없음이며 오위진수(五位進修: 五位는 오종의 位態라는 뜻이다. 오위를 五事, 五法, 五品이라고도 한다. 色法은 물질적인 것, 心法은 마음의 주체인 識, 心 所法은 마음의 작용, 心不相應法, 소위 生·住·異·滅 이라고 하는 존재의 존재하는 행태, 無爲法은 생멸변화가 없고 인연에 따라 조작됨이 없으며 작용을 일으킴이 없는 것. 유식종에서는 (1) 資糧位 (2)加行位 (3) 通達位 (4) 修習位(5) 究意位)가 이로써 체(體)가 되어서 여기에 이르러 관습(慣習)이 가득한 연고로 지혜에 맡겨서 베풀어서 근원에 돌아감이라. 3은 여래께서 사는 곳을 해석함이라. 묻되 무슨 까닭인가. 먼저 보리도량에 보광명전을 여의지 않는다 말함이며, 자기의 성불과만(成佛果滿)한 중생을 제도하는 것을 밝힐새 곧 순전히 자재 법계로써 체(體)를 삼아서 오위 보살과 행함과 수행을 세우지 아니하며, 또한 차별지(差別智)인 보현행원의 불과가 총히 이 불과가 이미 가득하여 보현행이 이미 두루하였다. 뿐만 아니라 중생을 이롭게 하는 법이라. 4는 설법의 주인을 말하여 해석한다는 것은 설법의 주인도 앞의 보리도량의 비로자나 부처님 여래이며, 또한 모든 보살의 스스로 이룬바 부처님이며, 또한 당래 미륵 부처님의 이룬 바 부처님이며, 삼세고금의 일체 부처님인 연고라. 중생과 열반과 법계의 일호(一毫) 일미진(一微塵)의 체용시분(體用時分)이 다름을 옮기지 않는 줄을 보는 연고라. 범정망견(凡情亡見)에 있음에 다르거니와 법계 지혜에 있어서는 일체 삼세제불의 성불과 일체 중생의 성불함이 한가지이니 일찰나(一刹那) 일미진(一微塵) 일법신(一法身) 일지혜(一智慧) 일언음(一言音) 일해탈(一解脫) 일신통(一神通) 일부사의(一不思議) 일보경계(一報境界) 일연화좌(一蓮華座)에 주(住)하여 거듭거듭하며, 무애무애하나니, 이는 여래의 실견을 밝힘이라. 5는 모인 대중의 뜻을 해석함이란 경에 이르되, 보살 마하살 오백인으로 함께한다 하며, 또 아래에 이르기를, 모든 보살이 다 보현행을 성취한다 하시니, 이 같은 오백 보살이니라. 문수 보살로서 법신 근본 지혜의 체를 삼고, 보현 보살로 차별한 지혜로 대용(大用)을 삼나니, 어떻게 142의 보살로 500의 수를 이루었는가 하면 천관 보살(天冠菩薩)로부터 이하에 100의 보살은 본 법계의 과체(果體) 가운데 십 바라밀의 행이 서로 융통하여 하나 가운데 10을 갖추고 100을 갖춤이니 이는 법계 가운데 행과(行果)이니 십당 보살(十幢菩薩)로부터 십력(十力) 보살, 십장(十藏) 보살, 십안(十眼) 보살 다 문수보현의 두 가지 지행(智行)으로 십주(十住) 십행(十行) 십회향(十廻向) 십지(十地) 가운데 보현·문수를 통한 42현성행(四十二賢聖行) 가운데 각각 십 바라밀로써 이지(理智)와 대원력과 대자비를 융합하여 40심을 닦아 나아가매 400을 이루고 뒤의 법계 본과 가운데 백 바라밀을 더하여 오백을 이루나니 보현과 문수의 체용을 삼아서 후의 법계 본과(本果) 천관 보살 이하로 100보살의 행한 결실을 본과에서 밝힘이라. 6은 처음으로부터 좇아 61권 일체중생이역불리차서다림여래지소(一切衆生而亦不離此逝多林如來之所)에 이르기까지 여래께서 사자빈신삼매(師子頻伸三昧)에 드시며 미간에 백호 광명을 놓으사 법계문(法界門)을 나투었고, 모든 보살들로 하여금 오위승진불과(五位昇進佛果)로서 법계에서 구할 게 없는 자재불과(自在佛果)에 들어서 밝힌 분(分)이라.
십신위선지식(十信位善知識)
1. 문수 보살(文殊菩薩)
⊙ 합론 양시문수사리이하(兩時文殊師利已下)로 이름이 성취이생(成就利生) 행문(行門)이 되나니 다만 문수사리라 운(云)하고 속(俗)에 들어가 행(行)으로써 이름을 세웠을 새니라. 이어 이는 삼세법(三世法)이 비로서 보리심을 발할새 처음 법신(法身)이 나툰 근본지(根本智)의 본성이 없는 이(理)의 묘혜(妙慧)의 연고이니 일체 삼세법(三世法)이 이를 좇아 불가(佛家)에 처음으로 태어남이며, 이를 좇아 보현의 대행(大行)을 성취(成就)하는 연고라.
2. 지혜를 성취하기 위하여 선지식 찾기를 권하다 3. 덕운 비구(德雲比丘) 4. 해운 비구(海運比丘) 5. 선주 비구(善住比丘) 6. 미가 장자(彌伽長子) 7. 해탈 장자(解脫長子)
⊙ 합론 소 해탈 장자가 곧 보살삼매에 들어 몸 가운데 시방십불찰토(十方十佛刹土)를 나투어서 선재 동자의 청한 바를 답하여 그로 하여금 동입(同入)케 함이요, 해탈 장자가 정(定)으로 좇아 일어나 언설로써 그 정(定) 가운데 십불경계(十佛境界)의 대회도량(大會道場)으로 설(說)함이요, 해탈 장자가 마음을 따라 생각에 응하여 모든 부처님이 현전(現前)함을 밝힘이라.
8. 해당 비구(海幢比丘)
‡호랑이 입에 들어간 고기는 다시 나오지 않는다 호랑이의 입에 들어간 먹이는 다시 입 밖으로 나오지 않듯이, 스승의 훌륭한 가르침은 구원을 받게 됩니다. 스승의 구원을 모르는 사람은 그 어떤 가르침이라고 할지라도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예로부터 우리 나라에서는 스승을 알기를 하늘같이 하라고 하였고 스승의 그림자는 밟지도 않는다 하였습니다. 스승을 우습게 아는 사람은 절대로 구제의 은총을 받을 수 없을 뿐더러 그들의 자손은 그러한 영향을 받아서 잘 되지 않습니다. 부모가 간악하다든지 또는 포악한 가정은 자손이 망합니다. 그러나 부모가 훌륭하고, 선근을 심으며, 스승을 존중하면 그의 자손은 잘 되게 되어 있습니다. 내가 잘 아는 교수가 있었는데 그 분은 옛날 어느 여중학교에서 교편 생활을 한 적이 있습니다. 그 분은 영문학과 출신도 아니고, 그리고 영어를 잘하지 못합니다. 그런데도 그 여중학교에서는 이 신참내기 선생님에게 영어를 가르치라고 하였습니다. 그 소리를 듣고 선생님은 집에 왔는데 식은땀이 다 나더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렇다고 영어를 아주 모른다고 할 수 도 없고 학교를 안 나갈 수도 없고, 그리하여 이리저리 궁리를 해보고 생각을 해보아도 도저히 가망이 없더라는 것이었습니다. 대학에서 공부하다 보면 영어를 잊어버리는 것은 거의 모든 학생들이 다 그렇습니다. 밤을 꼬박 새우고 학교에 갔는데 어린 여중 2학년 학생들이 얼마나 눈이 초롱초롱하고, 젊은 새 선생님이 왔다고 좋다고 하든지 그만 아이들한테 쏙 빠져 버렸습니다. 그 때 그랬답니다. 그래 내가 공부를 다시 시작하자. 그리고 매일 그는 집으로 오자마자, 중학교 영어 교과서를 놓고 하루에 네 시간 이상씩 하였습니다. 그리고 아이들에게 자신 있게 영어 공부를 시켰는데 그 해 경기도 전 중학교에서 영어 테스트를 하였는데 당당히 그 선생님이 맡은 학교 그 반 학생들이 2위를 하였답니다. 학생들이 따라 배우기를 잘하니까 거의 중·하위권 어린 학생들이 모두 은총을 받은 것입니다. 스승은 제자를 바라볼 때 제자라는 생각조차 없지만, 제자 쪽에서 보면 스승은 부처님 같은 존재이며, 구원의 자비를 내리는 존재이기도 합니다. 어떤 사람은 스승을 비방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아무리 자기발전을 꾀하더라도 결국 스스로 무너지고 맙니다. 왜냐하면 스승을 경시한 과보입니다. 만약 어떤 학생이 작은 종이컵 정도를 가지고 가서, 얻기는 많은 것을 바랍니다. 스승도 그 제자를 사랑하기 때문에 무엇이든지 많이 주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담을 그릇이 못 되는 것입니다. 결국 그 제자는 컵 속에 조금밖에 못 가지고 갔습니다. 그는 집으로 돌아가서 '아! 우리 스승은 왜 나에게는 이렇게 조금밖에 주지 않지.' 이렇게 생각할 것입니다. 많고 적음을 얻는 것은 오직 배우는 자에게 달려 있습니다. 문수 보살은 스승입니다. 우리들의 스승입니다. 문수 보살은 지혜를 상징하는 보살입니다. 문수 보살은 항상 경전 속에서 많은 사람들에게 가르침을 주는 역할을 합니다. 그러므로 문수 보살은 우리들에게 스승의 상징입니다. 영적인 삶을 가르치는 스승은 바로 나의 '아버지'입니다. 영적인 아버지란 나의 영혼을 일깨워 눈을 뜨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가 직접 가르쳤건 아니면 책을 통하여 가르침을 받았건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것을 곁에서 보았건 모두 나의 영혼을 일깨워 주는 사람은 모두 문수라는 스승입니다. 인간은 영리하여 아무리 깡패 사회라 할지라도 그들은 어느날 조용히 생각하면 옳고 그름을 그들 스스로 잘 압니다. 만약 그것조차 모른다면 그 사람은 구제불능일 것입니다. 스승 가운데 가장 큰 스승님은 부처님입니다. 부처님은 우리들의 그 모든 것에 가르침을 주신 분이며 일체의 귀의처이기도 합니다.
‡진정한 스승은 그의 내면에 숨어 있다 참 스승을 찾고자 한다면 자신의 내면에서 찾아야 합니다. 내가 얼마나 스승을 갈구하고 있는지 또는 스승이 될 수 있는지를 말입니다. 제자가 될 수 있는 사람은 스승도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제자가 되기를 거부하는 사람은 스승이 되지 못합니다. 이 세상은 모두가 스승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 사회가 바람직한 사회입니다. 나에게 일시적으로 그저 믿는 정도의 스승이 아니라, 진정한 스승은 영원히 믿을 수 있는 스승입니다. 잠시 글공부를 하기 위하여 공부하는 사람은 오직 글줄 몇 자 정도를 얻습니다. 그러나 참 공부를 하기 위하여 스승을 믿는 사람은 가치를 배우게 되어 글이 더욱 머릿속에 잘 들어갈 것입니다.
‡스승을 통하면 참 나를 발견할 수가 있다 사람은 그 사람의 차원으로 스승을 그리고 있는 지도 모릅니다. 그 사람은 생각하기를 자신의 육(肉)을 가지고 생각하면 그 스승은 육인 그 정도를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만약 어떤 사람이 육이 아니라 정신을 구원하면 그 사람은 바로 전신이 정신의 세계에 들어가게 됩니다. 조용히 자신의 내면 세계를 관할 것을 가르치는 스승은 참으로 훌륭한 스승입니다.
‡불퇴주선지식(不退住善知識)
9. 해조처(海潮處)의 휴사 우바이(休捨優婆夷) 10. 비목구사 선인(毘目瞿沙仙人) 11. 승렬 바라문(勝烈婆羅門) 12. 자행 동녀(慈行童女) 13. 선견 비구(善見比丘) 14. 자재주(自在主) 동자
‡황제의 꿈 황제란? 중국에서 정의를 내리길 성천자(聖天子)라고 했습니다. 황제는 국가 대소사의 정치 현안들, 내·외빈들의 방문으로 생긴 연회, 수많은 후궁이나 궁녀들과의 만남, 이웃 나라와의 전쟁, 어느날 쳐들어올지 모르는 저 오랑캐들, 천재지변으로 생기는 기후의 변화들, 국내의 반란이나 후계자를 두는 일 등 황제의 자리는 몸이 열 개라도 부족해 그야말로 지칠 대로 지치는 자리가 황제의 자리입니다. 그래서 황제의 옥좌를 천형좌(天刑座))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하늘의 형벌이라는 뜻입니다. 황제는 육체와 정신이 어지러워지면 정확한 판단을 내리기가 쉽지 않습니다. 황제의 자리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작은 나라를 다스리는 임금이나 또는 마을을 다스리는 군현의 장이라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니 자연 황제는 항상 마음이 상해 있을 때가 많으며 그로 인한 피로의 누적으로 단명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어느날 황제는 명을 내렸습니다. "짐이 여름철 3개월 간 저 하궁(夏宮)에서 쉬고 싶으니 어떠한 일이 있어도 나에게 찾아오지 말라." 황제는 여름 궁전에서 모든 정사를 놓고 편안히 쉬고 있었는데, 어느날 낮잠을 즐기다가 꿈을 꾸었습니다. 꿈속에서 황제는 화서씨(華胥氏)의 나라에 놀러 갔습니다. 그런데 그 곳은 그지없이 평화롭고 아름다운 이상향의 나라였습니다. 그 곳에 있는 사람들의 입가엔 항상 웃음이 서려 있었고,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은 모두 다 할 수 있는 그런 나라였습니다. 농부가 밭을 갈고, 가을에 추수를 하니 풍년이라! 농부는 남부러운 것이 없습니다. 관리가 있어서 세금을 징발하는 것도 없고, 강도나 도둑이 물건을 강탈해 가는 것도 없습니다. 통치자가 없으니 백성이 벌벌 떨 일도 없고, 백성을 관리하는 사람이 없는 데도 백성은 그야말로 순진하여 누구 하나 나쁜 사람이 없는 천진스러움 그 자체였습니다. 황제가 가도 사람들은 아무도 무서워하지 않았고, 오히려 황제의 옷을 만져 보기도 하고, 참 좋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애증도 없고, 갈등도 없고, 구하는 것은 언제나 늘 모든 곳에 널려 있었습니다. 그래서 황제는 지나가는 사람을 붙들고 물었습니다. "이 나라는 왜 이리 조용하며, 어떻게 모두 평화롭게 살 수 있습니까?" 나그네가 답하길, "여기는 황제가 없습니다. 그러니 조용하고, 평화롭게 살 수 있는 것입니다." 황제는 놀라서 물었습니다. "어떻게 황제가 없으니, 나라가 조용하고 평화롭다는 말이오." 나그네는 이상하다는 눈으로 황제를 바라보더니, "황제가 없으니 모두 자기가 하고 싶은 일들을 하고 살지요. 만약에 황제가 있다면 궁궐이 있어야 하고, 후궁이 있어야 하고, 궁녀가 있어야 하고, 대신이 있어야 하고, 군사가 있어야 하니 이런 사람들을 먹여 살리는 사람이 누구겠소? 백성이 아닙니까. 만약에 그 사람들을 다 먹여 살리노라면 등골이 다 빠질 것입니다." 황제는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황제가 잠에서 깨어 보니 꿈이었습니다. "짐도 이제는 황제의 자리를 버리고 조용하게 살고 싶소." 잠에서 깨어난 황제가 이렇게 대신들에게 말하자, 대신들은 "만약에 황제께서 하루라도 없다면 나라의 백성들은 그 사는 것이 말이 아니며, 오랑캐가 쳐들어와 백성들은 도탄에 빠질 것입니다. 만약에 황제께서 그만두신다고 해도 그만둘 수 없는 자리가 그 자리이며, 그만두신다고 해도 그만둘 수 없는 자리가 그 자리이며, 그만두신다고 해도 누군가 그 자리를 채울 것입니다." 그 후 황제는 궁으로 돌아와서 온 백성을 어떻게 다스려야 하는지 알았다고 합니다. 모든 사물을 보되 자연스럽게 보며, 사람이 사는 곳을 자연스럽게 만든다는 것은 그것이 잘하는 통치의 기술일 것입니다. 이와 같이 이상향은 어디에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곧 내가 만들어 가는 것이고, 정치인이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16. 대흥성(大興城)의 명지 거사(明智居士)
§ 경해 소 회론(會論)의 경해소에 명지 거사는 무굴요행(無屈撓行)에 있다 하였다. 무굴요행에 기(寄)한다는 것은 부지런하여 게으르거나 물러남이 없다는 뜻이다. 지명(地名)이 대흥(大興)이라는 것은 대정진(大精進)을 일으키는 연고요, 명지(明智)란 지혜의 덕목이 족한 연고라.
17. 사자궁성(師子宮城)의 법보계 장자 18. 등근국(藤根國)의 보안장자(菩眼長子)
⊙ 합론 경해소 보안 장자는 선현행(善現行) 잘함이다. 선현행이란 지혜가 능히 삼제(三諸)의 이치를 현발(顯發)하여 반야가 현전한 연고라 하였고, 국명(國名)이 등근(藤根)이란 땅에 깊이 들어 꽃이 피어나니 선현행의 반야지가 능히 후에 얻게 됨을 표하나니, 후에 얻게 됨이란, 물(物)을 따라 구르게 되는 고로 이러한 비유로써 등(藤)에 취함이다. 지명이 보문(普門)이란 실상반야(實相般若)가 통하지 못함이 없음이다라고 하였다. (신화엄경 회론 통권 18권, 168, 169p)
19. 다라당성(多羅幢城)의 무염족왕(無厭足王)
⊙ 합론 간략히 십사문(十四門)을 나누리니, 1은 선지식을 바르게 생각해서 승진(昇進)함이요, 2는 다라당성(多羅幢城)에 주(住)함이요, 3은 대중에게 왕의 소재를 물음이요, 4는 대중사람이 궁중에 있다 답함이요, 5는 선재가 나아가 왕이 나라연금강(那羅延金剛)의 자리에 앉아 멀리 봄이요, 6은 왕의 장엄한 전각들이 장엄함을 봄이요, 7은 왕의 도구로 악을 다스려 벌줌이 통절해 감당하기 어려움이요, 8은 선재가 마음에 의혹을 냄이요, 9는 공중의 하늘이 고하되 선지식의 말씀을 써서 의혹을 없앰이요, 10은 선재가 의심이 사라져 왕 앞에 나아가 절하고 구하는 바를 말함이요, 11은 왕이 선재의 손을 잡고 거느려 궁중에 들어가 경치를 보게 함이요, 12는 황이 환과 같은 해탈문으로 그 몸이 악업을 자작(自作)하고 가지가지 고를 받음을 나타내어 실로 중생으로 하여금 선근의 마음을 내어 보리심을 발하게 함이라.
20. 묘광성(妙光成)의 대광왕(大光王) 21. 안주왕도(安住王都)의 부동 우바이(不動優婆夷) 22. 무량도살라성(無量都薩羅城)의 출가 변행 외도(出家遍行外道)
‡백년지대계(白年之大計) 일일지계는 재어(在於) 인시(寅時)요, 일월지계는 재어(在於) 일일(一日)이요, 일년지계는 재어(在於) 일월(一月)이요, 일생지계는 재어(在於) 소년(少年)이라.
윗글은 내가 어릴 적에 동문선습(童文先習)에서 읽은 것으로 기억합니다. 일체 만사는 하루 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모두가 계획과 그 계획에 의하여 실행에 옮기는 실천력이 만사를 이루게 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어려운 일이라도 계획이 잘 서있으면 꼭 이루게 되어 있습니다. 백년대계를 가지고 일을 하고 계획을 잡으라는 것이지요. '백년대계'라는 말은 백년이라는 긴 세월을 보고 일을 하라는 뜻도 있지만, 맡은 바 일을 튼튼히 하라는 뜻도 있습니다. 아무리 좋은 계획이라도 그 계획서가 서랍 속에서 낮잠을 잔다거나, 아니면 시효가 지나간 뒤의 계획이라든가 하면 있으나 마나 한 것입니다. 가끔 보면 사람은 방안에 누워 매일 기와집을 몇 채씩 짓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실제 무엇 하나 할 줄 모르는 게으름뱅이입니다. 공상만 늘어서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습니다. 그야말로 밥이나 축내면서 주변 사람들에게 폐나 끼치는 존재입니다. 또 하나는 되지도 않을 계획을 가지고 사람들을 현혹시키면서 주변을 괴롭히는 사람입니다. 사리 판단을 하지 못하여 정신적인 결함이 있다고 하는 말을 내 친구 의사로부터 들은 적이 있습니다. 시기가 안 되었다는 것은 틀린 계획이나 다름없습니다. 예컨대 우리 나라가 경제발전을 위하여 여러 가지 계획을 수립하는 데는 일의 순서가 있고, 할 수 있는 계획이 있고, 힘이 벅차서 할 수 없는 계획이 있습니다. 개인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와 같이 개인이나 사회나 그 누구라도 계획이 없다면 인생도 없는 것과 같습니다. 어떤 사람이 병이 났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발가락이 곪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병원을 찾아보았지만 도대체 차도가 없는 것입니다. 점점 환부는 커져 가고, 이제는 발목까지 붓고 통증이 심하다 못해서 온몸이 쑤시고 아파서 견딜 수가 없습니다. 의사가 권고합니다. "선생님, 이 병은 바로 발가락을 잘라냈으면 나았을 것인데 이제 발목까지 썩어 들어가니 하는 수 없습니다. 다리를 잘라내야 하겠습니다." 그는 의사의 말을 들어야 합니다. 만약 다리를 잘라내면 목숨을 건질 수가 있습니다. 걷는 데는 물론 불편하지만 건강한 몸을 가질 수는 있습니다. 만약 환부를 그대로 놔두면 그 환부는 커져서 돌아올 수 없는 길을 가고 말 것입니다.
‡고름은 피가 되지 않는다 아무리 고름을 피로 만들려고 하나 고름은 피가 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피가 썩은 것이 고름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피고름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종기가 난 사람이 있습니다. 종기를 고치는 데는 의사가 반드시 그 환부를 도려내고 새 살이 돋아나도록 해야 합니다. 그리고 환부에 소독약과 항생제를 발라서 다시는 2차 3차 감염이 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살을 도려내고, 뼈를 깎아내고, 잘라내는 일인데 왜 아프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생명을 구하기 위하여는 방편을 동원해야 합니다. 종기의 고름을 짜내고, 그 자리의 환부를 도려내는데 안 된다는 사람은 없습니다. 다 아는 일인데도 너무 고통스러울까 봐 그리고 괴로워하는 모습이 안쓰러워서 환부를 그대로 놔둔다면, 이 사람은 보살의 도(道)를 모르는 사람일 것입니다. 치료도 그렇고 세상일도 다 그렇습니다. 아무리 훌륭한 의사라도 그 시기를 한번 잃으면 회복하는 데는 상당한 시간이 필요합니다. 방법은 하나입니다. 고름을 제거해야 새 살이 돋는 것처럼 세상일도 그와 같습니다.
‡십회향선지식(十廻向善知識) 22. 광대국(廣大國)의 육향( 香) 장자 23. 누각성(樓閣城)의 바시라 선사(婆施羅船師)를 뵙고 법을 묻다
§ 경해 소 제 2에 바시라는 불괴회향(不壞廻向)에 듦이라. 기불괴회향(寄不壞廻向)이란 무너지지 않는 믿음을 얻어서 천종(天縱) 선근으로 회향할새 고로 이름이 불괴(不壞)가 된다 하였다. 바시라는 우리말로 자재(自在)이니 이르되 불법해(佛法海)에 이미 잘 통달하며, 생사의 바다에 이미 잘 통달하며, 능히 잘 운전하여 이르며, 일체 믿음을 깊이 믿어 무너지지 아니할새 고로 이름이 자재(自在)라. 재루각성(在樓閣城)이라는 것은 회향을 말미암아 보림으로 하여금 전전(轉轉)히 다시 증장케 하여 지비(智悲)가 상의(相依)해서 뛰어난 연고라.
‡진아(眞我), 그것은 지복(至福)이다 진아(眞我) Self, 참 나, 그것은 무엇인가? 그는 지복(至福) 그 자체입니다. 참 나와 복(福)이라는 자체는 둘이 아니라 그것은 곧 나이며, 그것은 절대이며, 그것은 또한 지극한 복이라는 말입니다. 왜 그런가? 어떻게 나라는 그 자신을 알 수 있단 말인가? 지극한 복이 아니면 이 세상에 태어날 수도 없을 뿐더러 그런 세상이 주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지복이란, 나라는 존재가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나는 행복한 존재이기 때문에 지복이 됩니다. '진아'는 땅을 밟고 서있는 당당한 존재가 아닌가. 생각해 보세요. 이 세상에 오뚝 선 그 당당한 모습 얼마나 장한 일입니까? 그러기에 지복(至福) 그 자체입니다. 나는 만물과 둘이 아니며, 천하와 동체이고, 유일무이한 하나이며, 실체의 근원이며, 변화무쌍한 화신(化身)이며, 그러면서도 본질을 떠나지 않고, 항상 왕래자재(往來自在)합니다. 나는 또 만 가지를 체험하나 그 하나를 떠나지 않습니다. 나를 떠나 있으나 각성(覺性) 할 수 있는 존재, 그는 언제나 하지 못하는 것이 없습니다. 나는 본체를 떠나서 이제 온갖 것으로 화현됩니다. 참나는 보이지 않는 주체(主體)이고, 현신(現身)은 주체(主體)를 떠나지 않고 온갖 만복(萬福)을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여기에서 진아 즉 참 나는 지복(至福)이라 하였습니다. 즉 'Self realization 깨달음'입니다. 깨달음과 지복(至福)이 따로 있을 수가 없음을 말한 것입니다.
‡예배 대상으로의 불(佛) 부처님은 그 뜻을 두 가지로 해석하고자 합니다. 그 첫째는 신앙의 대상인 불(佛)입니다. 신앙(信仰)이란 우리들이 기도하면서 우리들이 무엇을 기도하는 곳(곳이란 장소가 아닌 기도를 받는 존재를 말합니다. 기도같은 것을 말하기도 합니다.) '그 곳'에서 우리들은 응공(應供)합니다. 물론 응공(應供)도 부처님의 다른 이름입니다만 응당히 공양할 만한 부처님, 그러나 형상을 만들어 모시었고 그 형상은 형상 아닌 실체적 존재로 생각되는 '님'이라고 규정짓고 출가 이중과 재가 이중〔四部大衆〕이 기도를 하는데 불(佛)의 존재를 그리워한 나머지 불상(佛像)을 만들었던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신(神)을 그리워한 나머지 신(神)의 형상(形象)을 만들어 모시었다고 보면 됩니다. 회교에서는 '알라'라는 신을 만들면 알라를 훼손한다고 못 만들게 하는 것이 회교의 생각입니다. '그리스도교'에서는 십자가가 곧 그들의 신(神)의 형상(形象)이라고 보면 됩니다. 법당이나 도량에 조상(造像)하여 모셔져 있는 부처님은 우리 중생들이 부처님을 보고 싶은 나머지 그리워하는 사랑의 마음으로 표현된 것이 불상(佛像)입니다. 그리고 실제 석가모니불이 이 사바세계에 오셨던 분이므로 어떠한 문제가 될 것이 없습니다. 즉 부처님은 우리 곁에 와계신다는 근원사상(根源思想)에 둔 근본정신(根本精神)입니다. 그러므로 불교도들은 이것에 조금도 거부감을 갖지 않습니다. 뿐만 아니라 온 세계의 모든 불교 국가는 이와 같은 불상 조성에 관하여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다만 우리 나라에서 불상을 우상이라 하는 이들이 있는 것은 이질적 종교 집단의 몰이해(沒理解)에서 오는 무지(無知)의 소치(所致)일 뿐입니다.
‡진리로서의 불(佛) 진리로서의 부처님은 '법(法)'입니다. 법이라는 것은 과거 무량 세의 끝없는 시간으로부터 지금까지 그리고 미래세의 끝없는 시간까지 오직 이 한 '법(法)'뿐입니다. 그 법은 절대로 변치 아니하며, 생기는 것도 죽는(滅) 것도 없어지는(滅) 것도 아닙니다. 생(生)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멸(滅)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 법은 모양을 볼 수가 없으며 모양을 생각할 수도 없습니다. 크기로 말하면 우주 전체에 걸쳐 있고, 작기로 하면 겨자씨에 들어가고도 겨자씨가 텅 비어 있을 정도입니다. 그 '법(法)'은 모양이 정해진 것이 없어서 어떻다고 할 수가 없어서 옛 조사가 말하기를 대(大)라 하고, 방(方)이라 하고, 광(廣)이라 했으며, 그 색깔이 없어서 무엇이라고 이름 지을 수가 없다고 합니다. 그 법은 통하지 않는 곳이 없어서 사람이나 동물이나 미물이나 식물이나 땅이나 돌멩이나 흙이나 물이나 어디에고 다 그 처소에 즉(卽)해 있으며, 해나 달이나 별들이나 허공이나 모든 곳에 즉(卽)해 있으며, 그 전체로 몸(體)을 삼습니다. 법은 새봄에 돋아나는 작은 풀잎에서도 찾을 수 있고, 무장다리 꽃으로 날아가는 노랑 나비에서도 그 법(法)은 찾아집니다. 물론 가을 하늘에 떠있는 구름에서도 그 법(法)은 찾아질 수가 있으며, 하늘을 나는 금속성 비행기의 엔진에서도 그 법(法)은 찾을 수가 있습니다. 그러한 법을 진리(眞理)라고 합니다. 그러한 진리는 위대하신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이라는 이름으로 부처님이 되십니다. 그 부처님은 진리의 당체(當體)이며 모든 만물의 어버이가 됩니다.
⊙ 합론 큼이여, 진계(眞界)의 만법(萬法)이 비로소 자양되고 공(空)과 유(有)를 포함하되 그 상(相)이 끊어지며, 언어의 세계에 들어서는 자취가 없는지라. 묘유(妙有)가 이를 얻어 유(有)가 아니며, 진공(眞空)이 이로 말미암아 공(空)이 아니며, 생멸(生滅)이 이를 얻어 떳떳하고, 연기(緣起)가 이로 하여 밝게 비침이라. 우리 부처님이 이를 얻으사 묘(妙)히 깨달음에 나아가 확연(廓然)히 티끌세계를 깨끗이 하시니, 만화(萬化)의 땅에 고요히 일허(一虛) 가운데 움직여 모두 씀이라. 실상의 몸과 찰해(刹海)를 융섭(融攝)해서 서로 합하여 음성과 빛으로 유통(流通)하고 멀리 비추었도다. 아황(我皇)이 이를 얻으사 허극(虛極)을 신령스러이 거울하여, 태화(太和)를 보전하고 성문(聖文)이 백왕(百王)을 엄폐(掩蔽)하고 순풍이 만국(萬國)에 부는지라. 그윽이 교화함을 깨달음으로써 펼치며, 천진(天眞)을 성정(性情)으로 드리우다.
25. 가릉림성(伽陵林城)의 사자빈신 비구니(獅子頻伸比丘尼) 26. 험난국(險難國)의 바수밀다녀(婆須密多女) 27. 선도성(善度城)의 비슬지라( 瑟 羅)거사를 찾아 법을 묻다 28. 보달낙산(補撻洛山)의 관자재 보살(觀自在菩薩)
관자재 보살을 뵙고 법을 묻다 § 경해 소 제 7은 등수순일체중생회향(等隨順一切衆生廻向)이다. 선우(善友)의 이름인 관자재(觀自在)는 삼업(三業)으로 귀향(歸向)하면 육통(六通)으로 인연에 따라 섭리(攝利)가 난사(難思)일새 이름이 관자재이니 이를 말미암아 두루 변재하니 중생은 수순함이라. 환(歡)은 능환(能歡)이니 일체에 통함이요, 세(世)는 소(所)이니 일체 세(世)에 통(通)함이다. 만일 음(音)이라 할진대 또한 소(所)에 통(通)함이니 소구(所救)의 일체의 기(機)요, 만일 자재(自在)라 원할진대 능화(能化)의 용(用)에 속(屬)함이다. <同卷 二十四>
29. 정취 보살(正趣菩薩) 30. 타라발저성(墮羅鉢底城)의 대천신(大天神) 31. 보리도량(菩提道場)의 안주신(安住神) 32. 바산바연저 주야신(婆珊婆演底晝夜神) 33. 제2 이구지(離垢地) 선지식 보덕정광 주야신(普德淨光主夜神)
‡죽지 않고는 살 수 없음 '진아(眞我)는 영원히 죽지 않는다.' 진아는 마음을 초월해 있고, 그는 깨달음만을 통하여 살아 나옵니다. 진아는 마음을 비워 버리지 아니하면〔無我〕 그를 만날 수가 없습니다. 마치 진아는 보자기에 싸여진 보물과 같기도 합니다. 우리들이 나라고 하는 것은 마치 보자기에 싸여진 안의 것이 아니라 그 보자기를 말하는 것과도 같습니다. 그러므로 그 보자기 안에 있는 것을 갖고 말해야 합니다. 내가 죽지 않고는 살 수가 없습니다. 즉 가아(假我)를 죽이지 않고는 참나를 발견하지 못합니다. 죽는다는 것은 육신이 죽는 것은 물론 아닙니다. 육신도 거짓일 따름입니다. 죽은 마음은 곧 무아(無我)를 말합니다. 무아는 내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참 나를 보는 즉시 그 참 나를 위하여 나라는 존재를 그 영혼 위에서 확인하여야 합니다. 잠자고 먹고 말하고 일하는 나는 순수한 '내'가 아니며 그것은 꾸며진 나일 뿐입니다. 그 내면에 존재하는 순수실체(純粹實體)가 따로 있습니다. 무지와 망상으로부터 벗어나 있고, 생사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이 내가 있습니다. 그것을 '광명(光明)'이라 합니다. 그 광명은 나와 함께하는 모든 광명과 동일합니다. 어느날 하늘에 떨어지는 섬광(閃光)을 가끔 봅니다. 우리들은 별똥별이라 말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인간의 육신이 죽어서 어디론가 가버릴 때에도 그와 같은 현상이 일어난다고 합니다. 어떠한 인간을 말하는가. 그것은 깨달은 영혼입니다. 깨침은 곧 광명이라는 존재와 합일한다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우리들은 한량없는 빛을 갖고 있습니다. 그 빛은 내 안에 존재한다고 합니다. 어두운 방에 촛불을 켜놓았습니다. 그러나 밝은 해가 뜨고 그 햇빛이 방안에 들어오게 되면 촛불 같은 것은 필요 없게 됩니다.
34. 희목관찰중생 주야신(喜目觀察衆生主夜神) 35. 보구중생묘덕 주야신(普救衆生妙德主夜神) 36. 적정음해 주야신(寂靜音海主夜神) 37. 수호일체성 주야신(守護一切城主夜神) 38. 개부일체수화 주야신(開敷一切樹華主夜神) 39. 대원정진력 주야신(大願精進力主夜神) 40. 람비니림신(嵐毘尼林神) 41. 석녀 구파(釋女瞿波)
‡무위와 열반, 버터와 빠다 그리고 된장 불교를 배우다 보면 낯선 단어들이 많이 나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불교는 어려운 종교'라고 합니다. 그도 그럴 것이 불교는 우리 나라에서 탄생한 종교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만약 우리 나라에서 탄생된 것이라면 사정은 조금 달라졌을 것입니다. 예를 들면 컴퓨터에서 쓰는 용어와 같습니다. 만약 컴퓨터가 우리 나라에서 만든 물건이라면 당연히 우리 나라 말로 되어 있기 때문에 쉽게 배울 수 있을 것입니다. 가령 컴퓨터를 요술상자 라든지 뭐 여러 가지 이름을 지을 수 있을 것입니다. 자동차도 마찬가지이고, 텔레비전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불교가 어렵다고 들 하는 것입니다. 꼭 용어 문제로 어려운 것만은 아니지만 말입니다. 고행한다든가 알 수 없을 듯한 마음을 알아낸다는 것 자체가 난해한 문제입니다. 불교가 어려운 것은 다종(多種)이라는 데 있습니다. 우선 경전의 종류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방대합니다. 대승경전, 소승경전, 경·율·론 삼장으로 구분되고, 다음으로는 선문답이라는 형식 자체가 사람들에게 어렵습니다. 다른 종교나 다른 서적들은 모두가 이 세상 일들이기 때문에 이해하기가 쉽습니다. 마치 컴퓨터를 우리가 만들었으면 우리들이 이해하기가 쉽듯이 말입니다. 그런데 불교는 인간들이 사는 세상 일들만 말씀한 것이 아닙니다. 그 안에는 무한한 우주의 신비스러운 일들을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다음으로 어렵다고 하는 것이 한자 때문입니다. 불교는 중국으로 넘어 오면서 한문 문화권에 들어와 엄청난 글을 만들어 냈습니다. 왜냐하면 거의 모든 분야에 걸쳐서 새로운 사상의 틀을 만들기 위해서는 새로운 한자도 만들어야 했고, 사상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인도말로 된 경전을 한자로 고치고 번역하는 어려움도 있었습니다. 한 가지 예를 들어 무위(無爲)는 도가(道家)의 말입니다. 불교가 처음으로 중국에 들어 왔을 때 열반(Nirv a)을 어떻게 설명하여야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을까 생각하다가 설명할 길이 없자 하는 수 없이 도가의 말을 끌어다가 쓸 수밖에 없었습니다. 마치 기독교가 불교의 용어를 갖다 쓸 수밖에 없듯이 말입니다. 예를 하나 들어볼까요. 기독교에는 장로(長老)가 있습니다. 장로란 불교에서 가장 어른 스님들을 일컫는 말입니다. 그랬듯이 불교에서 열반의 버금가는 말로 무위(無爲)를 처음으로 차용해서 쓰기 시작했습니다. 그 후 불교는 독자 노선을 걸으면서 '니르바나'를 한자로 열반(涅槃)이라고 고쳐 쓰기 시작했습니다. 버터가 처음으로 우리 나라에 들어왔을 때 사람들은 먹어 보지 않고는 도저히 이해될 수 없는 음식이었습니다. 그 후 우리 나라의 된장과 같은 것이 버터라고 말하면서 사람들은 조금씩 이해를 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버터를 모르기에 음이 변질되어 '빠다'라고 불렀습니다. 버터라는 원음은 사라지고 빠다가 남은 것이지요. 그런데 놀랍게도 이 빠다 속에 버터라는 말의 의미의 '버터의 맛'이 고스란히 남는다는 것입니다. 그렇듯이 열반(涅槃)이라는 한자에 '니르바나'라는 말의 의미가 고스란히 남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불교를 공부하다 보면 언제쯤인가는 부처님의 맛이 고스란히 남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언어에 대하여는 조금도 걱정할 것이 없습니다.
42. 마야 부인을 뵙고 법을 묻다
⊙ 합론 마야 부인은 성모(聖母)이시다. 일체 중생을 구제해서 삼계(三界)의 고해 중생을 출리(出離)케 하여 모두 성불하게 함이요, 원컨대 시방 일체 모든 부처님의 일을 이어 공경·공양하며 헛되지 않게 함이라 하였고<신화엄⊙ 합론 20권 139p, 2행>, 세간에 상주하여 인천일체육도중생(人天一切六道衆生)을 이익케 하여 정토를 별구〔淨土別求〕함을 바라지 않고, 일체 법계문을 밝게 보아 깨끗하고 더러운 것이 본래 진(眞)에 의지하며 본래 없음을 안다 하였다.
43. 천주광녀(天主光女) 44. 변우 동자사(遍友童子師) 45. 지중예 동자(知衆藝童子) 46. 현승 우바이(賢勝優婆夷) 47. 견고 장자(堅固長子) 48. 묘월 장자(妙月長子) 49. 무승군 장자(無勝軍長子) 50. 적정 바라문(寂靜婆羅門) 51. 덕생 동자와 유덕 동녀(德性童子 有德童女)
‡부처님께 복종하라 개체적 자아에서 진리의 자아로 가고자 한다면 부처님께 복종하여야 합니다. 자신의 모든 것을 부처님께 맡겨 놓는 것은 곧 자기 완성의 첫걸음입니다. 불교에서, 특히 한국 불교에서는 복종의 의미를 잘 모르고 있습니다. 모두가 자신을 돌보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들은(일반적 중생) 자신을 어떻게 돌보는 지 모릅니다. 어떻게 하여야 참 자기를 돌볼 수 있는 지를 가르친 스승이 없다는 말이 됩니다. 부처님에게 복종하는 것은 자기 탐구와 무관하지 않습니다. 자기 발견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복종은 '나(我)라는 생각'을 완전히 지워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많은 선사(禪師)들은 나를 버리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어떤 방법으로 나를 버리라는 것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행위를 가르칠 때에는 반드시 그 방법도 제시되어야 합니다. 나는 없는 존재요, 오직 부처님만이 존재한다는 것을 파악해야 합니다. 무아(無我)라면 곧 '내가 없음'입니다. 내가 없다는 것은 곧 그것은 절대적인 그 무엇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불교에서는 '절대적인 것이 없다'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지금까지 불교를 그렇게 가르친 데에서 문제가 생긴 것입니다. 내가 없는 그 자리에 절대자가 있습니다. 부처님이 바로 절대자입니다. 부처님을 불교에서 '진리(眞理)'라는 말로도 표현합니다. 그렇다면 그 진리(眞理)는 절대자입니다. 절대로 변질 될 수 없는 완벽한 자, 그는 바로 진리요, 부처님입니다. 그러한 진리인 부처님께 복종하는 자는 자신을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복종이라는 행위 자체가 자아를 발견하게 된다는 것을 말합니다. 나를 부처님에게 고정시켜 움직일 수 없게 만든다면, 근원적으로 티끌 같은 번뇌를 없앨 수 있습니다.
‡복종하는 자는 죄업이 소멸된다. 화엄경이나 금강경 같은 데에서 복종이라는 말로 번역된 것은 없지만 복종하여야 한다는 사실을 말한 구절은 경전에 아주 흔해 빠진 것입니다. 즉 '내가 없다'라는 말입니다. 물아(物我)가 비어야 곧 '깨침'을 이룬다는 가르침은 나를 내던져야 한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나를 내던지고는 어떻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까. 아무런 대책이 없이 나를 버리라고 한다면 그것은 진리에로의 안내가 아닙니다. 복종이란 주객을 초월해야 합니다. 부처님과 나와의 이분화된 것이 아니라 완전히 합일(合一)된 것을 복종이라 할 수 있습니다. 부처님에게 복종하는 사람이라면 그는 부처님과 하나가 된 것입니다. ① 나와 부처님이 분리되어 부처님 따로, 내가 따로 있다고 한다면 그런 사람은 아직 성공을 거둘 수 없습니다. ② 자기 일생의 모든 것을 그리고 그 몸과 마음을 완전히 부처님께 복종한다는 결의가 차 있다면 그런 사람은 '샘이 없는' 선근(善根)을 짓습니다. ③ 부처님은 내가 복종해야 할 응공(應供)이며, 가치이며, 부처님은 내가 있어야 할 소례(所禮)입니다. ④ 부처님은 절대적 존재이므로〔實相〕상주법계(常住法界)하며, 자비무한(慈悲無限)이므로 정변지입니다.
52. 미륵 보살(彌勒菩薩)
⊙ 합론 남쪽에 나라가 있으니 이름이 해안(海岸)이라는 것은 선재 동자가 승진(昇進)해서 자씨(慈氏) 미륵 보살의 도량에 이르렀다는 말이다. 곧 일생성불(一生成佛)이 이루어짐을 말한다. 미륵 보살의 거처하는 곳이 생사로 원(園)을 삼고, 만행(萬行)으로 수풀을 삼아서 지비불과(智悲佛果)로 장엄하였다. 이로써 만족할새 이름이 대장엄이라. 그 가운데 광대누각이 있으니 이름이 비로자나장엄장(毘盧遮那莊嚴藏)이라. 선재 동자가 누각에 들어가서 청정 세계와, 부정세계와, 대천 세계와, 소천 세계와, 내지 지옥·축생·아귀·시방 세계 종종 일체 일들이 그 가운데 있음을 보아서 설하심이라. 일체 중생이 생사의 원림에서 만행하여 길이 백정법신(白淨法身)과 더러움 없는 깨끗한 땅에서 청정한 낙을 얻게 함이라. 경에 이르되 선근 과보로 쫓아 선교(善巧) 방편으로 복덕의 지혜를 좇아 난다 하였다.
‡미륵 부처님의 교화
☞ 해설 미륵(彌勒)은 산스크리트어로 Maitreya(마이트레아)라고 합니다. 마이트레아는 사랑이라고 번역되는 바, 사랑의 보살, 혹은 사랑의 부처, 사랑의 붓다라 할 수 있습니다. 마이트레아 그러니까 자씨(慈氏)라는 서이며, 이름은 아일타(Ajita)입니다. 아일타의 뜻은 무승(無勝) 또는 막승(莫勝)이라 하여 '이길 이 없는'이라는 뜻입니다. 인도의 '바라내' 국의 바라문 집에서 내어나 세존의 교화를 받고 미래에 성불하리라는 수기를 받았습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은 말씀하시길 "미륵이 먼저 열반에 들어 저 도솔천에 태어나 천인(天人)들을 교화하고 부처님 입멸 후 56억 7천만 년이 지나서 사바세계 중생을 구제하기 위하여 오신다"고 하셨습니다. 53. 문수 보살(文殊菩薩) 54. 보현 보살(普賢菩薩)
‡미륵불(彌勒佛), 미륵보살(彌勒菩薩) 범어로 'Maitreya'라고 부릅니다. 그래서 미륵 부처님을 '마이뜨리아 붓다'라 부르기도 합니다. 미륵 보살을 '대승보살(大乘菩薩)'이라 하기도 합니다. 미륵은 보살의 성(姓)이요, 여기 말로 하면 자씨(慈氏)입니다. 자씨란 자비가 있다는 뜻입니다. 항상 중생에게 희망을 주고, 사랑을 베푼다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이름은 아일다(Ailta)라 합니다. 아일다는 인도 바라내 국의 바라문 가정에 태어나 석가모니불의 교화를 받고 수행을 하였다고 합니다. 미륵 보살의 용모가 어찌나 잘 생겼던지 사람들이 미륵을 보고, 혹시 이 미륵이 석가모니불의 또 다른 화현신이 아닌가 하였다고 합니다.
‡미륵신앙의 미륵삼부경 미륵신앙의 토대가 되는 미륵삼부경은 미륵상생경, 미륵하생경, 미륵성불경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 가운데 미륵 부처님이 지금 도솔천에 있으니 우리들이 그곳에 태어나야 한다는 믿음을 갖는 것을 말하고, 그러한 줄거리로 이루어진 경전을 미륵상생경이라 합니다. 또한 미륵 보살은 석가모니 부처님이 열반하신 후 56억 7천만년 후에 오시는 것으로 되어 있는 것을 다룬 것을 미륵 하생경이라 합니다. 미륵대성불경(彌勒大成佛經)에 보면 장래에 미륵이 오시는데 그 때가 되면 저절로 이 땅이 낙토(樂土)가 된다고 합니다.
‡미륵 부처님의 중생 구제 석가모니 부처님은 당신의 제자인 미륵에게 모든 것을 위임하였습니다. 그리고 미륵이 이 세상에 하생한 뒤에 용화 세계라는 세상에서 제도하신다 하여 용화수하삼회설법(龍華樹下三會說法)하시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 때 제도를 받은 모든 중생은 미륵 부처님의 정토인 도솔천에 다 태어난다고 합니다. 중국의 수나라 규기(窺基;632-682)는 미륵상을 만들고, 미륵 신앙을 하면서 제자들에게는 부처님의 계율을 외우게 하고, 신자들도 보살계를 외우도록 하였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들이 보살계를 받으면 혹시 잘못 되어 구제를 못 받더라도 용화 세계에서는 반드시 구제 받는다는 것입니다. ① 상생정토(上生淨土) 상생정토 신앙(上生淨土 信仰)으로 미륵 부처님이 계신 도솔천에 태어난다는 신앙을 상생정토라 합니다. 56억 7천만년을 지나서 교화 받을 것이 아니라 바로 이 몸이 상생하여 미륵 보살을 만나 뵙고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내어 보살도를 성취한다는 화엄경의 입법계품 저 끝에 이르면 미륵에 관한 법문이 나옵니다. 미륵상생경이나 기타 다른 경전을 따지지 않더라도 화엄경의 말씀을 갖고도 이러한 신앙의 체계를 갖습니다. 즉 도솔천 내원궁에서 미래 중생을 위하여 성불을 기다리고 계신 미륵 보살을 모시며 함께 정토를 성취하여 간다는 사상은 미륵 사상 가운데 핵심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상생정토를 이룩한다는 정신입니다. ② 하생정토 신앙(下生淨土 信仰) 미륵불을 본존으로 하는 신앙의 형태를 말합니다. 부처님이 계시는 국토를 정토(淨土)라 합니다. 정토를 정토답게 하는 일이 우리 중생의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미륵 부처님이 저 도솔천에서 56억 7천만년 후에 이 땅에 오시면 중생을 교화하실 수 있도록 미리 수행하여 이 땅을 정토화 시킨다는 적극적 신앙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위의 상생신앙이 이상적 불국세계를 지향한다면 아래의 하생신앙은 중생구제의 적극적 사고에서 출발합니다. 물론 미륵불이 용화수 아래로 하생하여 중생구제하실 때 나도 그 때 성불한다는 하생신앙으로써 우리가 사는 이 땅의 중생을 부처님이 오시기 전에 이미 다 구호하여야 한다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미륵경전들 미륵 경전들을 보통 미륵 삼부경이라 합니다. 그리고 미륵 육부경이라고도 합니다.미륵 삼부경이라 하였을 때는, ① 불설관미륵보살상생도솔천경(佛說觀彌勒菩薩上生兜率天經) ② 불설미륵하생경(佛說彌勒下生經) ③ 불설미륵대성불경(佛說彌勒大成佛經)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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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감사합니다~~덕분에 화엄경 공부를 많이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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