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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8월 5일 6일 양일간 8월 5일(토요일) 오후 내내 안개. 8월 6일(일요일) 오전 쾌청 오후 안개 저녁 비.
주요경유지: 백복령(780)- 832 무명봉 y자형 갈림길- 달팽이산 동봉 헬기장(1022)- 970 헬기장-원방재(730)- 상월산(970.3)- 906 헬기장무명봉 - 이기령(더바지령)(810)- 1143봉 우회-갈미봉(1277)-고적대삼거리-고적대(1353)- 망군대(망경대 1247)- 연칠성령(난출령 1180)- 청옥산(1403.7)- 문바위재-박달재(1100)- 두타산(1357)- 1243 무명봉 우회- 목통령- 1029.2 무명봉 - 작은통골재- 명주목이-햇댓등 (963)- 댓재 (810)
동반자 ; 정선에서 고교동창 김성 님께서 백복령과 댓재에 차량이동 시켜줌. 아내와 단 둘이.
도상거리 29.2 km 실제거리 32,4Km.
백두대간 종주 첫번째 구간을 겁도 없이 백두대간 구간 길이 중 두 번째로 길고 가장 힘들다는 이 곳을 선택한 이유는, 장비가 부족하고 비박을 위해서는 춥지 말아야 한다는 절박함 때문이었다. 대간 길 중 길이가 길어 하루로는 종주가 너무 힘든 구간이 다섯 군데가 있는데, 지리산의 성삼재 비로봉 구간을 비롯, 이 곳 백복령 댓재구간, 덕유산의 영취산 신풍령 구간, 조령산의 버리미기 아우릿재 구간, 마지막으로 길지는 않지만 심한 너덜지대와 바위능선으로 유명한 미시령 한계령 구간이다. 그런데 다른 구간은 중간탈출이나 산장이 있어 이어산행이 가능하지만 이곳만은 불가능하다는 판단을 내렸다. 하여 여름에 종주를 감행하였다.
사람들은 인구가 늘어가면서 사방으로 흩어진다. 흩어질 때 어떤 방법으로 될까? 연안(沿岸) 이라는 한자어가 있다. 沿이란 물(水)을 따라 흩어진다는 것이고, 岸이란 언덕(山:높은 곳) 을 방패삼아(干) 그 아래에 사는 사람들이란 뜻이다. 사람은 근본적으로 물을 따라 낮은 곳에 따라서 살려는 본성이 있다. 따라서 마루금을 따라간다는 것은 물이 없는 곳을 걷는 일이고. 높은 곳을 찾아 다니는 일이다. 그러므로 사람의 본성에 반하는 행동을 하기에 묘미가 있고 힘이 든다. 마루금을 걷는다면 필연적으로 고개에서 시작하여 고개로 끝나야 한다.
백복령(780m)이라는 고개도 그 중에 하나이다. 필자는 한글 언어 풀이와 한자 의미 풀이를 즐겨 한다. 따라서 고양이가 생선가게를 그냥 지나치지 못하 듯 백복령이라는 의미 풀이를 한 번 해 본다. 과거 자료에는 白卜嶺, 希福嶺, 百伏嶺 ,白福嶺 이라고 표기 되어 있고, 현재의 정선군 안내에는 白茯嶺 이라고 되어 있다. 고개에 세운 돌에도 그렇게 새겨있다. 돌 뒤에 이런 문구가 있다. 정선 아리랑이다.
"우리집에 서방님은 잘났던지 못났던지/ 얽어매고 찍어매고 장치 다리 곰배팔이/ 노가지나무 지게 위에 엽전 석냥 걸머지고 / 강릉.삼척에 소금 사러 가셨는데/ 백복령 구비구비 부디 잘 다녀오세요." 소금 사러 백두대간을 넘는 남편을 걱정하는 아내의 마음이 담긴 노래다.. 그런데 문헌이나 자료를 뒤져 보아도 백복령에 대한 속 시원한 해답이 없다.'
백복령은 강릉과 동해 삼척에서 주로 소금장수들이 지게에 소금을 지고 넘나들던 고개였다. 또 동해안에서 나는 해산물과 정선지역에서 나는 약재나 특산물이 오가는 고개 이기도 했다. 옛날 무거운 등짐을 지고, 높고 험한 이 고개를 넘는 일은 몹시 고달프고 힘든 일이었을 것이다. 강릉, 동해에서 이른 새벽부터 소금장수들이 소금을 지게에 지고 서진하여 백복령으로 향했을 것이고, 같은 시간 정선에서 출발한 상인도 동진하여 여기서 만나 물물 교환이나 정보 교환을 했을 것이다.
아내와 백복령에 관한 대화 중에 이렇게 답했다. 동해 강릉에서 소금(白,希 : 흰것) 을 지고 오던 사람들과,정선에서 채취한 약재 (茯笭)를 지고 동해나 강릉으로 넘나 들던 사람들이 만나 정보와 애환을 나누던 고개일 거야. 믿거나 말거나 내 맘대로 해석해 보니 더 그럴듯하다..
오전 11시 경에 백복령을 뒤로 하고 댓재를 향해 백두대간 마루금 여정을 시작 한다.
친구와 함께 기념사진을 찍고 나서 표정을 보니 "너 정말 이 한여름에 지옥에 갈텐가" 하는 표정이다. 하긴 등반을 끝내고 댓재에서 정선으로 갈 때에 "난 돈 줘도 이 짓 안 한다" 라고 혀를 끌끌 차던 친구다.
아직은 한 낮인데다 덥고 지루한 길의 연속이다. 무명봉 몇 개를 지나고 계단을 내려서니 산죽지대가 펼쳐진다. 길이 참 좋다.
한참을 지나 점심을 먹는데 부시럭 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북진하는 등반객인줄 알았다. 하지만 짐승인가 보다. 소리만 있고 실체는 없다. 식사 후 노련한 산꾼들도 자주 알바를 한다는 1022m 높이의 달팽이산 동봉 헬기장에 도착했다.
정선군 임계면 가목리나 부수베리에서 바라 보면 달팽이 모양 같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곳 사람은 원방재를 달방재로 부른다 이유는 원방재서 달팽이산을 바라볼수 있다는 데서 붙여진 이름이리라. 이 헬기장에서 평평한 길을 따라 10여 분 직진해서 가면 1027.6m의 달팽이산에 도착할수 있다.
급 좌틀하여 내려가니 멋진 노송 군락이 나타 난다. 시간이 충분하다면 수십 분간 노닥거리고 싶다.
특이 상황도 없이 862m 산을 하나 넘고 평범한 오르락 내리락을 반복하다 보니 어느덧 원방재(720m)다.
遠方재! 어느 방향에서 와도 멀다는 뜻인가? 실제로 원방재는, 재 동쪽 동해 관촌마을과 서쪽 정선군 임계면 가목리를 잇는 고개다. 고개를 사이에 두고 가목리에는 부수베리 계곡이, 관촌마을에는 서학골 계곡이 흐른다. 원방재 마루에서 백두대간 능선을 따라 북쪽으로 6.8㎞를 올라야 42번 국도가 지나는 백복령(동해~정선)에 닿고, 남쪽으로 11.5㎞를 남하 해야 겨우 청옥산(1403.7㎞) 정수리와 만난다. 그러니 사방 어디로 가도 멀 수 밖에.....원방재를 버리고 급하게 치고 올라 간다. 상월산으로 올라 가는 길이다. 상월산은 실제 헬기장으로 쓰는 상월산 원봉 (980.7m)이 있고 상월산이라고 쓴 팻말이 있는 상월산(970.3m)이 있다.
상월산 동쪽 사면은 설악산의 공룡능선 만큼이나 경사가 급하여 마치 병풍을 둘러놓은 것 같다.
정상에 서면 남북으로 용처럼 꿈틀거리는 대간 줄기의 군봉 들이 행진을 하듯 나열하고, 집 한 채 보이지 않는 내륙의 하늘 아래에는 산봉우리들이 다도해의 섬 모양으로 떠 있는 광경이 시원스럽게 펼쳐진다. 검푸른 동해바다도 한 눈에 들어온다. 상월산은 ‘높은(上) 산’이라는 뜻으로 실제의 달(月)과는 전혀 관계가 없다. 월(月)은 우리말의 ‘달’인데 옛적에 이 말은 ‘달(達)’로 표기하면서 의미는 ‘산’이었다. 따라서 ‘월산(月山)’은 ‘산’의 겹쳐진 표현이며, 상월산은 ‘상산(上山)’, 즉 주변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이거나 ‘가장 빼어난 봉우리’인 것이다.
상월산을 작별하고 급하게 고도를 낮추니 이기령이다. 한자로는 耳基嶺 혹은 異冀嶺 이라고 하며, 이 곳에서는 더바지령이라고 부른다. 높이는 무려 810m 인데 실제로 이곳 사람들의 사투리에 그곳을 ' 그기~이' 이곳을 ' 이기~이' 라고 발음한다 . 이기령은 어차피 다른 곳으로 갈데 없이 이곳으로 넘어 가야만 한다는데서 유래 했다 한다. 이 곳에서 비포장 길을 150여m을 가니 샘물이 있다. 급히 물을 보충하고 예정 했던 야영지로 떠난다.
이기령에서 한시간 남짓 갔을까? 1143봉 직전에 나무의자 두 개가 있고 사방에 자작나무가 있는 산 중턱에 바위사이에서 솟아 나오는, 시원하고 맑은 샘터가 있는 곳에서 야영장비를 설치하고, 아내와 생전 처음으로 산속에서 야영을 한다. 밤에 청설모가 머리 위에서 나무를 갉고, 샘물 주위에는 멧돼지의 울움소리가 밤새 퍼진다. 고라니 비슷한 소리와 이름모를 산새의 지저귐도 있다. 초저녁에는 아내가 무서워 한다. 하지만 자정이 지나 잠속에 빠진다.
야영했던곳
아침에 장비를 챙겨 신속하게 다음 목적지로 향한다. 가다가 보니 오른 쪽 열린 암봉에서 지나온 상월산 능선이 보인다. 사진 왼쪽 끝 부분이 상월산 정상 부분이다.
898무명봉 을 지나 잠시 너덜 지대를 지나니 1143m산을 우측으로 따라 갈미봉에 이른다. 갈미봉은 수병산가는 갈림길이 있고 옛날 화전민이 많이 살던 배나무재나 도전리로 가는 중요한 길목이었다고 한다.
曷尾峰 (1271m)이라고 한자로 표기하는 데 무릉계곡의 북서쪽에 위치해 있으면서 이 부근에서는 가장 높다. 백복령 이후 나오는 청옥 두타의 화강암대가 이곳에서 시작된다. 남쪽의 시각에서는 이곳이 끄트머리인 셈이다. 진행방향 왼쪽으로 무릉계곡 쪽 사면은 벼랑에 가까운 낭떠러지다.
연이은 능선을 따라 고적대를 비롯해 망군대, 청옥산, 두타산, 쉬움산 등이 부채꼴 형태로 조망된다. 이곳에서 발원하는 냇물은 내도전을 지나면서 유명한 ‘도전계곡’을 만들어낸다. 갈미, 갈마 혹은 가리라고 붙여진 봉우리는 삿갓처럼 생긴 봉우리를 말한다. 인제의 가리산, 포천의 가리산, 그리고 남설악의 가리봉 등이 이에 속한다. ‘노적가리’나 ‘볏가리’는 꼭지가 우뚝한 형태를 표현하는 우리말에서 전성된 단어이며 이 산들은 하나같이 뾰쪽하다. ‘갈’은 ‘가리’의 준말이다. ‘미(尾)’는 ‘꼬리’ 혹은 ‘끝’이라는 뜻의 명사형 어미다. 그러므로 갈미봉은 ‘꼭지가 우뚝한 봉우리’인 셈이다. 무릉계곡을 병풍처럼 두르고 있는 연봉의 끝이라는 의미로 받아들여 진다.
좌측 능선에 가끔 이런 멋진 장면이 연출되고 가야할 고적대 청옥산 두타산 능선이 탄성을 자아낸다.
아래 사진 오른쪽 봉이 고적대 왼편이 청옥산이다
아래 사진 오른쪽 봉우리가 가야할 청옥산. 왼쪽 봉우리가 두타산.
급경사을 타고 내려서니 고적대 삼거리이다. 이곳 고적대 삼거리에서 점심을 먹는다. 이곳에서 사원터로 나가는 길은 겨울에 조난이 걱정될 정도로 급경사가 심하다.
식사 후에 고적대(1353.5m)로 향한다. 도중에 우연히 뒷쪽 경치를 찍었는데 갈미봉이 왜 갈미봉이라고 불리웠는지 알 수 있을 것 같다. 갈미봉에 있을 때는 사방이 막혀 알 수가 없었는데 이곳에서 보니 이름 그대로 끝이 뾰족하다. 사진 뒤 오른쪽 뾰족한 산이 갈미봉.
고적대로 올라가는 길도 한오름 한다. 숨이 턱밑에 차오를 즈음에 드디어 고적대가 생얼을 허락한다. 高積臺란 이름 그대로 ,정상은 臺처럼 작지만 망루같은 역할을 할 것 같다 . 정상에는 표지석과 함께 산림청 안내판이 서 있다. 이곳에서 정선군 임계면과 삼척시 하장면을 경계하는 중봉산 능선이 갈려져 나간다. 정상에서 보니 내륙으로 뚜렷하게 산줄기가 서쪽으로 보인다. 하지만 잡목이 있어 가기가 힘들것 같아 더 전진하지 못했다. 산줄기를 따라가면 중봉산이다. 산악에서 ‘대(臺)’라는 지명은 대체로 주변보다 높고 전망이 좋은 곳이다. 이곳 고적대는 특히 ‘높게(高) 쌓여 있다(積)’고 하니 여러 ‘대’ 중에서도 단연 으뜸이다. 무릉계곡을 정면으로 관찰할 수 있는 위치에 높이 솟아 있다.
고적대에서 가야 할 능선들 연칠성령이 보인다.
고적대에 오르는 것 만큼보다 더 가파르게 내리막길인데, 이곳은 곳곳에 자일이 설치되어 있다. 거의 70도 경사를 조심스럽게 내려간다. 이윽고 가파름이 어느 순간 순해지는가 싶더니 어느덧 망군대 바위 앞이다. 망군대는 연칠성령의 서쪽 봉우리다. 보통 嶺 하면 고개를 상상한다 그러나 특이하게도 연칠성령은 고개이자 봉우리역할을 한다. 고적대와 청옥산의 중간 낮은 곳에 있어 고개는 맞지만 고개의 면적이 크고 넓어 고개 양쪽으로 제주도의 오름처럼 바위봉이나 또 다른 작은 언덕들이 있어서 봉우리라 칭하기도 한다. 이곳은 망경대 혹은 망군대라고 하는데 고적대와 함께 전망 좋은 곳이다. 이곳은 특히 내륙으로의 조망이 훨씬 좋다. 삼척시 하장면을 뒤덮고 있는 산군(山群)‘은 물론 멀리 정선군과 태백시의 높은 봉우리들도 보인다.
조선때 재상을 지낸 택당 이식(李植)이 정계에서 은퇴해 중봉산 단교암에 머물면서 이 봉우리에 올라 한양을 바라보며 나랏일을 걱정했다고 한다. 그 후부터 ‘도성의 임금을 바라보다(望君)’ 또는 ‘한양을 바라보다(望京)’라는 의미를 부여했다고 한다.
지나놓고 보니 이번 산행 중 제일 후회했던 것이 망군대 바위에 올라가보지 않았던 일이다. 나도 그 바위 위에서 조선시대 이식 재상님의 그랬던 것처럼 서울을 바라 볼 것을 ...
평지같은 고원지대를 지나니 連七星嶺(1184m)이다. 백복령과 댓재 정 중앙에 있어 절반 쯤 온 것이다. 고적대와 청옥산 중간에 있고. 두타산 등반 후 하산을 시작하는 기점으로 가장 많이 이용한다. 연칠성령이라 칭함은 삼척 쪽에서 보았을 때 ‘빼어난 일곱 봉우리(七星)을 연결하는(連) 고개(嶺)’라는 뜻에서 온 말이다. 혹 어떤 이는 하늘에 칠성신을 연결하여 주는 높은 고개라고 이름한데서 왔다고 한다. 또한 이 연칠성령은 ‘난출령(難出嶺)’이라고도 부르는데, 이는 ‘하늘만 보이고 하도 험하고 멀어서 사방으로 빠져나가기 어렵다’는 뜻이기도 하다.
아무튼 인상 깊은 연칠성령을 작별하고 청옥산(靑玉山)에 오른다.
푸른 옥돌이 많아 청옥산으로 이름한 이 산은 근처에서 제일 높다. 실제 옥돌광산이 이 기슭 무릉계곡에 있었다.높이 1403.7m로서, 혹자는 산 위에 샘물이 있다고 하는데 필자가 직접 확인한 결과 샘물은 말라서 없다.
청옥산을 지나, 두타산까지 가는 길은 돌과 바위가 많이 있어 진전이 되지 않는다 .특히 박달령까지는 심하다.
문을 닮았다는 문바위재를 지나
박달령에 이른다. 이곳 사람들은 여기를 박달고댕이라고 하는데 고댕이는 고개의 강원도 방언이다.
세상에 태어나서 이렇게 숨이 찬적은 없었다. 두타산에서 청옥산 방향으로 내려오는 산객이 우리 부부에게 어디서 왔냐고 묻는다. 백복령이라고 했더니, 이곳 사람들은 절대로 청옥산에서 두타산 방향으로 산행을 하지 않는데 이유는 오름이 너무 심해서란다. 진심으로 걱정해 주는 그 분의 말이 허언이 아님이 바로 증명되었다.. 얼마나 힘든지 다시는 두타산에 오르지 않겠다고 다짐을 할 정도였다. 중간에 두어 번 쉬었으면 될 것을 ... 욕심부리다가 황천길에 갈 뻔 했다. 아무튼 우여곡절 끝에 두타산에 올랐다.
옛 정상석이 훨씬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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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타산(頭陀山:1352.7m) 두타산 정상에는 다람쥐가 많다. 이 놈들은 산객이 주는 도시락에 길들여져 나에게 마구 다가온다.
전국에 두타산으로 명명된 산이 많이 있다. 그 만큼 좋은 뜻이리라. 다른 두타산이라는 이름에서 명명되는 두타지맥은 백두대간 소황병산에서 시작된다. 그 많은 두타산 중 이 이 곳 두타산이 제일 압권이며 이 지방에서 가장 유명한 산이기도 하다. 두타(頭陀)는 산스크리트 어를 한자로 차용한 말로 속세의 번뇌를 버리고 불도(佛道) 수행을 닦는다는 뜻이다. 산의 형태가 부처가 누워 있는 것 같이 생겼다 해서 붙여졌다 한다. 삼척시의 영적인 모산으로서 신앙의 대상이며 예술의 연원이라 하여 오십정산제당(五十井山祭堂)이 있고, 예로부터 가뭄이 심하면 기우제를 지냈다고 한다.
두타산과 서쪽의 청옥산을 잇는 의가등(衣架嶝)은 병풍을 펼쳐 놓은 것 같은 가경(佳景)을 이룬다. 또한 북쪽으로 삼화사(三和寺)에 이르는 14km의 계곡에는 국민관광지인 무릉계곡, 조선시대 석축산성인 두타산성, 둥글게 패인 바위 위에 크고 작은 50개의 구멍이 있는 오십정(또는 쉰우물)을 비롯하여, 오십천(五十川)·학소대·옥류동·광음사·광음폭포·선녀탕·쌍폭포·천은사(天恩寺)·금란정·용추(龍湫)폭포 등의 명승 고적지가 있다. 수백 명이 앉을 만한 넓이의 무릉반석에는 조선 전기(前期) 4대 명필가의 하나인 봉래 양사언의 석각(石刻)과 매월당 김시습을 비롯하여 수많은 명사들의 시가 새겨져 있다. 한마디로 ‘금강산에 버금가는 관동의 군계일학(群鷄一鶴)’이란 옛 선인들의 칭송이 결코 과하지 않다는 것을 쉽게 깨닫게 하는 곳이다.
또한 두타산과 청옥산은 궁예시대부터 새 세상을 그리워하던 이들이 몸을 숨긴 채 때를 기다렸던 곳으로 전해지고 있다. 6.25 때는 인민군 병참기지가 들어서는 바람에 미공군의 융단폭격을 받기도 했다. 시간이 없어서 무릉계곡 쪽 두타산성을 못 가본 것이 아쉽다.
두타산에서 댓재까지 6.1km 남았다. 두타산을 뒤로 하고 능선을 따라 나오니, 1243m 산이 버티고 있는데 산길이 두개다. 직진하면 산 정상으로으로 가는 길이요, 왼쪽으로 따라 가면 지름길이다. 나중에 두 길이 만난다. 통골재 혹은 목통령이라는 곳으로 가는 길은 한참이나 내려간다. 비가 온 후에라서 상당히 미끄럽다.
목통령(木桶嶺) 혹은 통골재(980m)에서 잠시 쉬어간다. 구룡골과 거무소라는 계곡으로 내려가는 갈림길이 있다.
이곳부터는 길이 순하다. 1029.2.m의 산이 지도에 있는데 통과했는지도 모르게 지나간다. 비슷비슷한 산들이 자잘이 있어 그냥 지나친 듯하다.
명주목이. 이곳에서 직진하면 햇댓등으로 가고 우틀하면 댓재로 가는 지름길이다.
이곳에서 비가 많이 온다.
햇댓등(963m)
횟대는 경상북도 북부지방 그리고 강원도 동남부 에서는 '햇대'로 변음되는 이 지방 사투리로, '햇댓'은 '댓재'와 합하여 "햇댓"이라 한 것이며. 등(登)은 산줄기에서 전망하기 좋게 뛰어 나온(岬이나 臺)부분을 말하는 것이므로 세 곳의 뜻을 합성하여 "햇댓등"이라 지명한 것으로 판단된다.
거의 다 와서 이게 뭐람 햇댓등 아래 산신각에서 급하게 한장
댓재 도착
우리가 사는 인생에 있어서 돈으로 살 수 없는 훌륭한 경험들이 있다. 때로는 무의식적으로 오기도 하지만 , 이번처럼 만들기도 한다. 무모한 도전인 것 같았지만 정말 좋은 기회였다. 무엇 보다도 쥐가 나던 다리가 전혀 문제가 없었고, 몸 상태 또한 좋았다. 산행 중 우리 부부를 반겨준 천연계의 이름모를 들풀, 꽃, 그리고 나무. 곤충, 새, 들짐승 등 무엇 하나 소중하지 않은 것이 없다. 이 또한 내 인생의 역사가 되어 또 한 주를 살아 갈 것이다. 끝까지 탈없이 따라와 준 아내 그리고 차량운행을 위해 애쓴 친우 김 성에게 진심으로 감사한다.
총소요시간 18시간 (식사 휴식 포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