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에 친구 따라 개를 무리를 지어 키우는 곳에서 찾아갔던 기억이 새삼스럽게 떠오른다. 물론 친구네 집인데 개를 방목에 가깝게 키우고 있었다. 집 옆에 텃밭 공터에 블록 담으로 에워싸고 수십 마리를 키우고 있었던 걸로 기억된다. 삼복(三伏)에 육식으로 팔 가축용으로 기르고 있어 개별적인 칸막이가 아니라 떼를 지어 그냥 노천(露天)에서 뛰어놀게끔 40평 공간이었고 비를 피할 슬레이트 지붕의 공간만 있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그들 세계에도 두목이 있고 철저한 서열체계가 있다는 점이었다. 대장급의 개는 사람이 알 수 없는 그들의 방식대로 그 무리를 통괄하고 있었다. 새로 영입되는 개가 그 집단을 들어갈 경우에는 새로운 서열등급을 위하여 투쟁은 계속되고 그 싸움이 평정되면 위계질서가 철저한 조직사회를 이루고 있었다.
이러한 형태는 축생계에서 힘의 논리가 지배하는 것은 약육강식의 지배형태로 보는 것이 타당하리라 본다. 그렇게 힘의 우위에 선 우두머리 개라도 언제 도전을 받아 권좌에서 물러날지 모른다. 병약하거나 노약할 경우에는 물려날 수밖에 없는 조직사회이다.
만물의 영장이라고 자부하는 인간들이라고 별 차이가 없다. 인류사는 약육강식(弱肉强食)으로 점철된 역사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므로 도전(挑戰)과 응전(應戰)의 맞대결 양상을 띠어왔다. 서양사에서만 봐도 종교전쟁으로 살육과 약탈의 역사이고 이념의 양극대결로 오늘날까지 이르렀다. 전쟁도 평화를 유지하기 위한 것으로 미화되고 있는 실정이다.
학자들은 짐승들의 무리에서 지도자격 우두머리의 자질을 분석한 적이 있었다. 보이지 않는 그 뭔가에 의해 자질이 생길 것이라는 과정에서 해부학 측면에서 실험했을 것이다. 그런 결과는 우두머리에게는 뇌 속에 그들 무리보다 다른 우두머리에게만 독특한 호르몬이 분비한다고 결론지었다. 정령(精靈)의 본질은 알 턱이 없는 현상적인 도출인 것이다.
2. 합리적이라는 과학의 세계
저기 펄럭이는 깃발은 저절로 움직이는 것인가. 아니면 바람에 의해 움직이는 것인가를 논쟁을 보고 혜능(慧能)은 펄럭이는 깃발은 저절로 움직이는 것도 아니고 바람에 의해 움직이는 것도 아닌 네 마음이 움직이는 것(풍번동심, 風幡動心)이라 한 선종(禪宗) 6대 조사이다.
이것을 서양의 고전철학으로 보면 아리스토텔레스학파는 깃발이 저절로 움직이는 것에 해당하고, 데카르트의 기계론적인 학파들은 바람에 의해 움직인다는 것에 흡사하다. 그런 면에서 기계론자의 견지에서는 아프리카 들판에서 영양(羚羊)의 일종인 누우가 사자에게 잡히면서 지르는 비명소리를 기계소음이라 한 것이다. 물질현상계 작용의 극치라 하겠다. 그리고 깃발이 펄럭이는 것은 마음이 움직이는 것이라 한 것은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 겨레의 정통철학은 현상(現象)과 본질(本質)을 초월하여 성성일영(惺惺一靈)으로 귀일(歸一)하여 신화(神化)하는 것이기에 시대의 조류를 타고 너울거리며 나부끼는 깃발 같은 학설이 아니다. 더욱이 축생들처럼 힘의 논리에 지배하는 그런 조직과 사회를 지향하는 것도 아니다.
3. 통일조직의 입지조건
통일을 대비하여 남쪽의 종교단체는 막대한 자금과 조직을 결성하여 그때를 준비하고 있다. 북쪽이 사회주의 체계의 붕괴될 경우를 대비하여 포교나 선교를 준비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북쪽에서도 만약의 사태를 대비하여 남쪽을 교란하거나 적화하기 위한 정예부대를 양성하고 있는 것과 다를 바가 없을 것이다.
사실 우리 주변의 강대국이라 불리는 국가에서 한국의 통일을 진정으로 바라는 나라는 없는 실정이다. 오히려 견제하고 있다는 표현이 적절할 것이다. 그렇다고 남쪽의 자본주의나 북쪽의 사회주의조차 하나의 핏줄이라는 동질성을 띠고 있을지라도 어느 체계나 개념에 예속되면서까지 통일하려는 노력은 바랄 수 없다. 짐승들의 조직처럼 자기를 양보하면서까지 덕을 베풀 소양은 없기 때문이다. 아무리 지금의 북녘에서 인민군들의 관동구호가 단군이라고 하지만 4천만 동포가 대종교인이라 칭할 수는 없고, 남녘의 대종교 조직으로는 조직학(組織學)의 연구대상조차 안 되는 실정이다.
대종교(大倧敎)가 중광(重光)할 당시 일제의 탄압으로 포교를 할 수 없어 결국 만주로 망명하였다. 몇 년 만의 포교에 힘입어 50여 개의 시교당과 폭발적인 20만 내지 30만여 명의 신도를 갖게 되었던 것은 선종사(先宗師)님들의 영적 지도력과 우국충정(憂國衷情)이었다. 또한 국조(國祖)에 대한 구심점을 삼아 그 시대의 사명인 독립을 쟁취하려는 신도들의 결심과도 공명하였기 때문이다.
38명 중 33명이 대종교인이었던 무오독립선언에서 이에는 이, 칼에는 칼로 최후의 일인까지 무쟁투쟁을 고수하려 했던 것은 일제의 만행을 유추해보면 당연지사였을 것이다. 무혈투쟁은 그 당시 상황으로 보아 어물전을 고양이에게 맡기는 꼴이다. 그 선언으로 말미암아 2.8독립선언과 기미독립선언의 도화선이 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청산리 전투와 봉오동 전투에서 대부분 대종교인이었고 상해임시정부의 법통도 대종교였음은 숙지의 사실이다.
이제는 통일일꾼들을 양성해야 할 시기이다. 지금은 총을 든 통일일꾼이 아니라 이화세계(理化世界)를 만들기 위한 홍익인간(弘益人間)이 통일일꾼이다. 지금은 강태공인 강여상(姜呂常)이 미늘 없는 낚싯바늘을 드리우고 숱한 세월을 낚더라도 육도(六韜)를 건질 때가 아니다. 병기를 들고 싸울 전투가 우리의 통일에는 필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때가 그냥 다가오는 것은 아니다. 그때란 만물을 구제하는 데에 적절한 때를 가리킨다. 만물을 구제하는 것은 그 시기에 따라 적당히 행하지 아니하면, 마치 봄철에 오는 제비와 가을철에 날아가는 기러기가 서로 다르며 산에 사는 털 난 짐승과 바다에 사는 껍질이 있는 조개와는 거리가 떨어져 서로 다른 것과 같다(時 濟物之時也 濟不以時 燕鴻相違 水與山遠 毛甲不同). 한결같은 정성으로 준비되어야 한다. 그런 정성은 마음속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것으로서 심혈을 기울여 자신의 참 본성을 지키는 것이다(誠者 衷心之所發 血性之所守). 자신의 참 본성을 지키고 수련하여야 동일한 목적을 지닌 무리가 생기고 나아가 인류를 구원할 수 있는 자질이 생기기 때문이다. 바로 코앞에 다가왔는데도 감을 못 잡는 것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4. 통일을 향한 조직의 여건
한반도가 세계이념의 변소라든지, 세계종교의 쓰레기통이라든지 극단적인 발언을 하더라도 다 존재이유가 있기 때문에 몰려들어 왔다. 그런 것은 책갈피를 파먹는 좀벌레와 같은 학술적으로 풀 문제는 절대 아니다. 세계 7대 성자(聖者)들은 인간으로 태어나 현상계를 바라보는 일체를 남다른 선각(先覺)으로 통해 만상을 구제하려 했다. 그리하여 형이하학의 세계에서 짐승처럼 머물고 있는 중생들을 교화시킨 것이다. 그것도 홍익이다. 자기 경지에 갈음하여 뭇 생명들을 우둔함에서 이끌려고 노력한 것이다. 그런 경지에서는 고차원적인 영적 에너지의 본질을 가르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러나 우리의 정통인 신교(神敎)는 그런 수준이 아니라 영육(靈肉)일체를 지닌 이 땅에서 모든 생명체가 영적으로 진화되어 완성된 열매를 맺으려고 한 것이다. 성자들이 내세운 종교들은 각기 오행상의 법칙대로 그 지역과 그 영역에 맞는 포교되어 왔으나 한얼의 본질과 성자의 영통을 분간하지 못하고 있다.
2천 년 동안 형성한 모든 종교들이 사방에서 생겨 인류를 구원해 온 것이 사실이지만 성자들이 깨우친 형이상(形而上) 세계는 우리의 신교(神敎)의 맥락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 채 성자와 한얼과 대등한 수준에서 세뇌되어 현대까지 흘러온 셈이다. 그러므로 형이하학의 세계에서 한얼을 느끼고 있다.
이제는 고조선이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진 이후에 성장해온 모든 학문과 종교로는 미래를 개척할 수 없다. 지식의 발전은 있었지만 정신의 함양은 후퇴되어 있기 때문이다. 인성개발과 영성함양과는 거리감이 있는 것이다. 인간의 본성을 되찾기에는 혼탁만 가중시키는 꼴이다.
여해(如海) 도형(道兄)은 삼혼(三魂)에 대해 일반사람들이 알 수 있게 인간이 어머니 뱃속에 점지(點指)할 때가 1혼이고, 태어나 고고성(呱呱聲)을 울릴 때가 2혼이며, 3혼은 천상에 나와 함께함을 풀었다.
인중천지일(人中天地一)의 천부경(天符經) 해독도 나의 존재가 한얼과 함께 함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이 점지할 때의 혼(魂)은 유정(幽精)으로 지신삼계(地神三界, 치화삼계)의 그윽한 정기가 태중(胎中)에 다가와 칠백(七魄)을 작용으로 인간의 몸을 형성하는 것이다.
고고성(呱呱聲)을 울릴 때는 혼은 상령(爽靈)으로 수신삼계(水神三界, 교화삼계)의 맑은 영이 내려와 인간으로 태어나는 것이다.
3혼은 태광(台光)으로 천신삼계(天神三界)의 밝은 영이 나와 우주의 존재가치를 지키고 있는 것이다. 우리의 영적 기운은 우주에 흩어져 산재하는 밝은 에너지를 나와 함께하여 밝은이(哲人)로 양생하여야 할 것이다.
그래서 성자(聖者)인 밝은이는 혼으로 백을 움직이는(이혼운백, 以魂運魄) 것이고 중생들은 백으로 혼을 끌어당기는(이백섭혼, 以魄攝魂) 말에 공감할 수밖에 없고 그 개념에 타당하는 것을 느끼게 된다.
그것을 일러 등신불(等身佛)이고 신인합일(神人合一)이며 수도를 통하여 원신배양(元神培養)으로 3혼의 태광(台光)은 원신출태(元神出胎)를 가리키고 영혼의 교통을 말하는 구경(究竟)이다. 그러나 우리는 흔히 혼비백산(魂飛魄散)을 혼과 백이 어지러이 흐트러진다는 뜻으로 몹시 놀라 넋을 잃는다는 낱말로 쓰고 있다. 그 비슷한 말로 혼 줄이 떨어진다는 말로 표현하기도 하지만 혼백(魂魄)을 합일하는 것은 영성수련이고 혼백이 흩어지는 것은 죽음으로 영산(靈散)일 뿐이다.
5. 통일일꾼의 개념
미 국방장관실에서 의뢰한 랜드연구소의 한국통일 시나리오 3가지로 분석하고 있다. 한국을 겨냥한 동북아 섭정을 위한 자료일 것이다. 흡수통일이 될 경우 북한이 남한의 국민총생산액 22분의 1정도의 수준이므로 독일통일과 달리 500억 달러 내지는 최고 6,700억 달러를 잡고 있고 북한내분으로 인한 전쟁을 통한 통일 등등 여러 가지로 모색하고 있다.
그들이 근대사의 로마제국처럼 힘의 논리에 따라 세계경영의 일환으로 각색하고 있지만, 현대학문의 합리화라는 것에 길들여진 우리들조차 그 논리가 탁상공론(卓上空論)에 치우친 경향이 들 수밖에 없다. 정보력이란 자료를 기반으로 유추해야 할 판국이니 과거 독일통일이나 월남전 등 이념과 경제력, 문화적 측면에서 포괄적이고 다각적인 사고의 결집처럼 보이지만 미래가 과거와 현재의 추측으로는 삼화(三火)의 등식이 성립할 수 없다.
한말 국운이 풍전등화(風前燈火)와 같은 시절에 유교적인 사고에 젖어있던 선비들이 식민통치의 국치를 알고 대처하였겠는가. 해방 후 일부 지식층들은 남북분단을 감지하고 그에 대한 대책을 강구했는가.
오늘날 미국은 냉전체계가 허물어지고 세계를 주도하려는 망상에 젖어있을 뿐 아니라, 망국적인 사대사관으로 볼 때 그동안 중국의 속국을 면치 못하였으므로 통일이 되면 중국으로 기울 것으로 여겨 통일을 바라지도 않고 있다. 냉전시대에도 미완성을 미덕으로 삼았다고 보면 타당할 것이다. 그러므로 분단의 책임을 얄타회담의 당사국들이 통일분담금을 처리해야 할 판에 분단의 책임도 그들에게 있고 자유수호라는 명목으로 한국전 참전의 선심으로 미화하고 있다. 그것이 병 주고 약 준 꼴을 우리도 감지덕지(感之德之)하고 있을 뿐이다.
중국도 문화혁명의 암흑기에서 시장경제로 돌입하면서 놀라운 속도로 경제성장에 힘입어 2030년도에는 미국을 따라잡을 것이라는 큰 착각에 사로잡혀 있다. 꿈이 크면 실망도 클 수밖에 없다. 그래서 한반도 통일을 대비하여 고구려와 발해를 변방국으로 편입하려는 시도를 동북공정(東北工程)이란 과제로 수십 년 전부터 해온 것이다. 그들도 통일을 바라지 않는 것은 마찬가지이다. 그런 예로 우리가 문화유산으로 유네스코에 강릉단오제를 등록하려니까 중국은 단오를 자기들의 고유풍습이라 하여 ‘문화약탈’이란 말을 서슴지 않고 있다.
우리 배달겨레는 천부경과 삼일신고 원리에 따라 홀수를 좋아하여 삼월 삼짓날, 오월 단오, 칠월 칠석, 구월 중양절, 동짓날을 명절로 삼았다. 3・3, 5・5, 7・7, 9・9, 11・11의 중양(重陽)은 장구의 채편으로 두 번 두드리듯 양 점이 겹쳐 길하다는 풍습인 것이다. 또한 애틋한 사랑이 깃든 전설로 곡해하고 있는 칠석(七夕)도 사실 최초로 인간의 혼백(魂魄)이 거듭 진화된 그 시조인 아만(阿曼)과 나반(那般)이 밝한물을 사이에 두고 오랫동안 만나지 못하다가 한얼의 영성으로 접선한 것을 우리조차 알지 못하고 있으니 우리 문화가 짝수를 좋아하는 지나족에서 나온 것으로 잘못 알고 있다.
일본은 독도문제도 오랫동안 연구해왔다. 국제재판소 판례를 중심으로 한국을 재판소로 출정을 요구하고 있다. 그만큼 그들은 자신감에 차 있다. 그러한 배경은 일왕 세자비의 부친도 재판관임을 감안할 때 일익을 하고 있는 셈이다. 또한 그들은 일본의 지반이 침몰할 경우 60%가 한국을 침략해야 한다는 것은 그들의 군사력과 경제력이 바탕이 되기 때문일 것이다.
어찌 운행질서대로 모든 현상이 태극기의 형극과 같게 움직이는 것일까. 남북한이 이념대결로 적청(赤靑)으로 겨루고 있는데 네 귀에 앉아 콩나라 팥나라 참견하는 4대 진영의 모습과 등식을 같이하고 있는 것이다. 남한은 미국과 일본을 우방으로 러시아와 중국을 견제하고 북한은 중국과 러시아를 우방으로 미국과 일본을 견제하고 있다.
이제는 팔짱을 낀 채 엉겨 붙은 남북한이 뒤틀어 휘돌려야 시국이다. 그 원심력은 네 귀에 미치는 파장이 일대 변혁으로 치닫게 된다. 개들의 무리에서 본 것처럼 우두머리가 되기 위해 피를 흘리며 싸워 이겨야 하는 축생에 가까운 후천시대가 아니기 때문이다. 지금은 지극성(地極星, 지구)의 나이 60억 년을 하루로 환산하여 12월 31일 오후 4시경에 인류라는 짐승이 탄생한 것은 우주에너지의 순환질서에 따라 진화결과이다.
이제는 우주운행의 계절은 생명체가 수억 년간 생명체의 창생과 진화와 발전을 거듭하여 무극(無極), 태극(太極), 황극(皇極)의 변리대로 이어온 결과로 환절기이다. 남북통일이란 문제도 우리 민족의 개념이 아니라 인류사의 새로운 질서로 개혁하는 도화선(導火線)이다. 만일 다이너마이트에 연결된 도화선에 불이 붙어 타들어가고 있는 도망을 가든지 불을 끄든지 무슨 대책을 세워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신명계의 혼란과 인간계 타락을 바로잡고 순천(順天)을 위한 필연적(必然的)인 과정이다. 일적십거(一積十鉅)이자 상생(相生) 십황(十黃)으로 완성되는 길이다. 그러므로 천부경(天符經)에서 천일일 지일이 인일삼(天一一地一二人一三)은 선천(先天)시대로 낙서(洛書)의 상극(相剋)으로 그 수리를 합하면 1+1+1+2+1+3으로 그 합이 낙서와 같이 9가 된다.
또한 천이삼 지이삼 인이삼(天二三地二三人二三)은 하도(河圖)의 후천시대의 상생(相生)으로 2+3+2+3+2+3으로 도합 15의 수리가 형성되는데 오황(五黃)의 순리대로 일적십거(一積十鉅)로서 구자계(九紫界)를 넘어선 완성단계로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근세기에 이르러 손자이고 제자의 나라인 일본에게 임진왜란(壬辰倭亂)의 수모에 이어 일제침탈 35년은 오욕(汚辱)의 역사이기보다 축생(畜生)의 기록인 것이다. 그런 까닭에 과거의 기록은 팔이 안쪽으로 굽는 것처럼 자기 집단의 무지갯빛의 모래성일 수밖에 없다.
우리 대종교도 그런 소용돌이 속에서 거듭 태어났다. 조국과 민족을 무궁한 광영(光榮)을 위하여 가슴에 못을 박는 민족애로 표출한 것이다. 오로지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 싸웠다. 핍박받던 겨레와 망국의 한을 함께 하였다. 대종교도 국내에서 포교할 수 없을 정도로 탄압이 심하여 결국 발해의 고토에서 포교활동과 독립투쟁을 전개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선종사(先宗師) 4분의 위업은 상해임시정부의 법통이 대종교였고, 민족학교를 세우고 짧은 시간의 포교로 50여 시교당이 형성되었으며 30만에 가까운 교인들이 웅집하였던 것이다. 오늘날 남쪽 사회만 하더라도 단군이라면 신화(神話)와 실사(實史)에서 오락가락하여 갈피를 못 잡는 것을 감안한다면 그 당시의 포교는 파격적인 영적 지도력을 갖추고 있었던 것이다.
이제는 해방된 지 환갑에 접어들었다. 일제치하에서는 간악한 일제만행을 대항하기 위해 총을 들고 민족독립을 위해 청산리 전투와 봉오동 전투처럼 온몸으로 뛰어들었다면 통일일꾼의 역할은 총을 들고 무장혁명으로는 절대 불가능하다.
통일일꾼으로 앞으로 3천2백4십여 년간 인류사의 일등국으로 나가는 발판이므로 축생의 사회처럼 힘의 우위에 서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우리나라의 형상을 토끼모양으로 산토끼가 깡충깡충 뛰면서 어디를 가는지 모를 판국은 아니며 그것을 빌미로 식민지배의 정당성을 내세우던 시대도 아니다.
또한 민족 자긍심을 높이기 위해 대륙을 포효하는 호랑이 형상도 더욱더 아니다. 한반도가 호랑이라면 대륙은 밥이 된다는 소리인가. 축생시대의 연장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얘기이다. 정신세계에 몰입하면 선과 악의 경계선을 없어지듯이 선과 악이란 방안의 전깃불이 켜지고 꺼지는 것에 불가하다. 다른 사람들의 가슴에 못을 박아 결태가 되는 업도 없는 세계가 홍익의 세상인 것이다.
25시 작가 게오르규가 앞으로의 세계에 홍익인간처럼 강력한 민주체계가 없다고 하였다 하여 그 주장에 부화뇌동(附和雷同)할 필요조차 없다. 홍익의 차원은 원리론과 방법론과 공효론에서 현대학문과 사관으로는 풀 수 없는 고계제의 차원이다.
그러므로 홍익인간과 이화세계는 도반(道伴)이 모여 사는 지구촌을 가꾸는 것이다. 하늘과 땅의 이치대로 생활 속의 종교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종교의 이름으로 인간세상을 현혹하고 신명계를 어지럽히는 현상은 없어지게 될 것이다. 도의 세계를 들어가는 것은 물과 불의 형상을 나뉘는 것이라 했다(水火形分). 뜰에 있는 이름 모를 잡초를 바라보자. 뿌리로부터 한 여름날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물을 빨아올리고 있다. 잎사귀로부터 무진장한 빛을 받아 광합성을 하고 가을을 대비하여 꽃과 열매를 준비하고 있다. 수승화강(水昇火降)의 원리를 잡초조차 응용하고 있다. 인간은 그 정도에 못 미치는 수준이 되어서야 되겠는가. 통일일꾼은 총을 들고 정신무장하는 수준은 아니다. 북쪽의 수뇌부가 붕괴하여 민중봉기를 대비하여 악업을 업장으로 만드는 통일 시나리오는 있을 수 없다.
지금은 플라스크에 박테리아가 살 수 있는 환경조건을 만들고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면 스스로 번식에 의해 자멸하는 지극성(地極星, 지구)에서 우리는 살아가고 있다. 환경오염을 걱정하고 자연과 친화력을 갖추려고 노력을 하지만 이미 돌이킬 수 없는 극한상황에 도달했고, 과학이란 이름으로는 그 해결책을 강구하기에는 너무 더디게 진행될 뿐이다. 이렇게 인류의 운명이 경극에 이르렀을 때 인류를 홍제(弘濟)하기 위해 준비하여야 할 것이다.
그것이 대종교(大倧敎)의 교리(敎理)에서 철(哲) 지감(止感) 조식(調息) 금촉(禁觸)으로 10년 이상 다져져야 할 것인데 자숙해보면 이제는 유비무환(有備無患)을 느끼게 된다. 하철보(下嚞保) 중철지(中嚞知) 상철통(上嚞通)은 남대문 문턱이 있는지 없는지 안 가본 사람들이 말이 많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