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콤 달콤 매콤한 맛집에 얽힌 사람 이야기(5)
조각가 최기원과 해장국집 <청진옥>
김 승 환
호백구(狐白裘)를 아시나요? 여우 겨드랑이 흰털로 만든 겉옷으로 전국시대에 1만 냥을 호가하던 명품 중에 명품이다.
맹상군의 목숨을 구한 것은 소양왕의 애첩의 간청 때문이라는 것을 앞에서 말한바 있는 데, 애첩은 조건을 달기를 맹상군이 소양왕에게 바친 호백구를 자기도 꼭 갖고 싶다는 게 아닌가. 이미 왕에게 선물한 (세상에 한 벌 밖에 없는)옷을 어디서 구한단말인가. 맹상군의 등에는 식은땀이 흐르고 곁에 앉은 천하의 식객들도 유구무언이었다. 이때 말석에 앉았던 구도(狗盜)가 나섰다.
“소인이 미천한 잔재주를 부려 보지요.” 왕의 보물 창고로 숨어든 하찮은 개 도둑, 아니 구도의 귀신 같은 훔치기로 애첩에게 호백구가 전해졌음은 물론이다. 대저 명품뇌물이란 이렇게 목숨까지 살리는 약발이 있었던 것이다.
우리 시대의 뛰어난 조각가인 최기원 교수도 그 구도의 기발 찬란한 기지로 당대의 재원을 내자(內子)로 맞았으니 그가 오늘의 부인인 김성희 여사다. 최기원의 눈에 띈 경기대의 배구부장인 여인을 얻기 위해 꾸민 자살극의 주모자는 윤효중의 사촌 동생인 윤항중이었다. 윤항중은 윤효중의 살림을 도맡은 당차고 임기웅변에 뛰어난 집사(執事)였다. 그는 일꾼들에게 간식으로 제공되던 건빵을 이용, 그 빵 가루를 ‘그대가 나를 받아들이지 않으니, 우리의 인연을 저 세상에서나 맺고자 먼저 간다’는 쪽지를 보고 달려온 부산출신의 순진한 여인 앞에서 먹게 했으니, 당대의 구도 같은 모사라 아니할 수 없다.
1959년, 요새는 친일 작가군(作家群)에 끼여 그 명성에 얼룩이 갔지만 좌우간 뛰어난 조각가였던 윤효중(尹孝重)의 삼선교 작업실에서 일어난 사건이다.
1948년 홍익대 미술학부의 실질적인 창설자인 윤효중은 김복진(金復鎭)의 제자(배제 고보)였고 후배(동경미술학교)이기도 한 데, 성격이 대담하고 활발하며 해방 이후의 우리 미술계의 스타였다. 그의 능력은 불과 38세(1955년)에 예술원 회원이 되기에 이른다.
1958년 홍대 교수를 사임하기 직전 대방동에 <전통 도자기 생산 공장>를 차렸을 때, 이 대통령이 찾아올 정도여서 세간에서는 그를 ‘미술계의 대통령’이라 불렀다.
1957년, 남산 중턱에 세워졌던 <이승만 동상>도 그런 역학과 함께 이미 선보인 동상 제작의 탁월한 실력 때문인 듯 싶다. 윤효중이 약관에 선전(鮮展/조선미술전람회)에 내리 4회나 특선했듯이 최기원도 국전(國展)에 내리 4번이나 특선하여 추천작가가 되었다. 조각예술의 재능면에서 최기원과 윤효중은 닮은꼴이다.
그런 스승을 도와 동상 작업의 마무리를 총지휘 할 때였다.
김성희 여사와의 인연은 혜화동에 있던 경기 대학 운동장에서 배구 연습경기를 하던 팔등신의 그녀를 본 순간에 점화되었다. 배구경기장에서의 그녀는 미로의 비너스 그것이었고 그런 나신(裸身)을 꿰뚫어 보는 최기원의 안목은 가히 로댕에 비견되는 심미안이라 아니할 수 없다.
그보다 앞서 1957년, 종로 장안 빌딩 곁에 있던 작업장에서 윤효중과 동상 제작의 쌍벽인 김경승(金景承)이 인천상륙작전을 기념하여 세운 <맥아더 장군상>도 그 디테일 작업은 최기원이 마무리했다. 이때, 그는 공사장 옆에 살던 어느 여대생과의 불꽃같이 타올랐던 열정도 여체의 신비탐구가 빚어낸 작가적 모색이라 하겠다.
그는 그 바쁜 중에도 명동에 나와 글쟁이와 어울려 술값을 내고 또 친구들을 연지동 자택으로 끌고가 어머니가 하던 구멍가게 한 켠의 술독에서 술을 퍼날라 밤새도록 취하게 했다. 조흥은행 동대문 지점장을 지낸 아버지는 일체 그런 행동을 모른 채 했다.
술꾼 일행에는 나를 비롯해 송혁, 강민이 있었는데 얼마나 취했던지 송혁이 그만 이불에다 방뇨를 하여 새벽에 그 집을 달아나와야 했다. 최기원은 그런 우리들을 쫓아 나와 기어코 연지동의 유명한 추탕집으로 끌고가 작취미성인 우리들의 황망한 속을 달래 주었다.
지금도 말술을 서슴지 않는 최기원은 특히 해장국을 좋아했다. 종로를 기점으로 할 때는 주로 청진동 해장국집을 드나들었다. 나도 시간만 나면 그를 찾아가 <청진옥>의 낡은 식탁에 마주 앉곤 했다. 지금도 3대에 걸쳐 영업을 하고 있는 청진옥(종로점 02)(730)1693 / 양재점 02)(579)1690)의 칼칼한 선지와 입안 가득히 고여 넘어가는 야채의 담백미와 내장들의 꿈결 같은 맛이라니!
5, 60년대는 화가의 누드 모델이란 직업관이 설립되기 전이라 모델 구하기가 하늘의 별 따기였다. 종로 3가 사창가의 여인들은 웃돈을 쳐주어도 공개적으로 옷을 벗으려 하지 않았다. 그런 그녀들은 우선 자존심을 살려가면서 모셔(?)와야 했다. 그런 작업에는 여인을 보듬을 줄 아는 탁월한 사교의 달인이 필요했다. 적임자는 말할 것도 없이 최기원이었다. 이렇게 골라 선보인 어느 모델은 서로 한눈에 이끌린 학생과 열렬히 사랑하여 결혼까지 하기도 했다.
종로 3가에서 누드모델을 조달하던 최기원은 어느 날 뜻하지 않게 술 취한 해병대 패거리와 시비가 붙었다. 최기원은 왈패는 아니었지만 완력 앞에 물러 서지도 않았다. 그 잘생긴 얼굴 아래턱에서 빛나던 앞니가 몽땅 빠져 달아난 것은 이때의 사건 때문이다.
5,16 군사혁명이 나자 이미 유명한 작가였던 그는 자의 반 타의 반으로 군에 입대했다. 그는 국전 추천작가였고 국립현대미술관의 초대 작가이며 홍익대 전임강사이기도 했다.
그가 군에 몸담고 한 일 가운데 가장 기록할만한 작품으로 <국립묘지 현충탑>이다. 국가원수는 물론, 외국원수가 방한하더라도 제일 먼저 찾는 호국영령이 잠든 국가 최고의 상징물이 현충탑이다. 그것을 제대로 만들어 낸 것이다.
이어서 그의 성가는 파리 비엔날레(1963)의 출품(프랑스 현대미술관 소장)으로 당시 문화상이던 앙드레 말로의 각별한 관심과 찬사를 이끌어 내어 국제적 청년작가로 조명을 받기 시작했다.
ㅡ최기원의 국제무대에서의 데뷰가 그와 같이 성공적이었던 것은 그의 타고난 능력과 투철한 작가정신에 비추어 볼 때 당연한 것이었는지 모른다.ㅡ 이일(미술평론가)
ㅡ그가 즐겨 사용하는 <탄생>의 표제는 씨앗에서 발아하는 생명의 유동성과 더불어 한 순간 한 순간의 결정체로 응어리지는 형태는 생명의 내적 리듬과 존재의 구체성을 동시에 표명해내는 것이라 할 수 있다.ㅡ오광수(미술평론가)
ㅡ <탄생>은 세계의 본질에 대한 동양의 마음을 형상화한 것이다.ㅡ 김영복(미술평론가)
그는 부산 현충탑 군상, 독립기념관 조형물 <비천상>을 비롯하여 참전기념비, 전적비, 대학의 상징물, 박정희 대통령상(육사, 경북대)을 비롯하여 창업자 동상, 상징탑, 천안 태조산에 세계 최대의 청동 좌불 동상 등을 건립하기도 했다. 그는 조용이 있으려 해도 그의 주변이 용서치 않았다. 국전 심사 위원, 홍익 조각회 회장, 공간 미술대상과 중앙미술대상, 동아미술제 운영위원 겸 심사위원, 한국 조각가협회 회장과 예술의 전당 미술관 운영자문위원 등이 그것이다.
80년대 이후 경제적 성장에 따라 새로운 건물이 도심의 곳곳에 들어설 때, 건물의 조형적 아름다움을 살리기 위해 건물 전면에 세우도록 한 기념조형물은 이 땅의 조각계에 일대 부흥기였고 또한 작가마다 개성 있는 작품을 선보이게 하는 동기를 부여했다.
최기원의 이 기념물 조형물의 주제는 <탄생>이었다.
ㅡ’탄생’은 일종의 원초적 생명, 약동하는 이미지를 표상하는 것으로 볼 수 있고 동시에 거기에는 하늘과 땅, 또는 음(陰)과 양(陽)이라는 다원적인 우주적 대비(對比)의 조율이 내포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ㅡ 이일(미술평론가)
그는 놀라운 언변과 함께 배짱 또한 두둑했다. <국립묘지 현충탑>의 모형을 만들어 청와대에서 브리핑을 할 때 얘기다. 호사다마라고 일에는 구설수가 따르기 마련이다. 특히 참모진에 줄을 대고 있던 모 작가가 최기원을 모함하기도 했다. 브리핑실에 대통령과 이후락 실장이 나타나자 최기원은 이 실장에 다가가 “이 실장 오랜 만입니다.”라고 반갑게 인사를 했다. 청와대 실세였던 이 실장도 이야기는 들었던 터라 “참 오래간만입니다. 수고 좀 해 주세요.”라고 응답하지 않을 수 없었다. 좌우간 그 후 참모의 뒷소리는 살아지고 브리핑 이후의 작업은 일사천리였다.
최기원은 따뜻한 사람이다. 내가 신월동 단독 주택에 살 때, 마루가 주저 앉자 와서 보고는 몽땅 뜯어 고쳐준 사람도 그다. 그때만해도 가기가 만만치 않았던 동해 해수욕장에 우리 집 식구들을 자가용으로 데려가 아이들을 즐겁게 하기도 했다. 그는 모래 사장에 나가 대합을 소쿠리가 넘치게 캐오는 특별한 재주도 있었다.
그는 문인들과의 교우를 끔찍이 여겼다. 송혁 시인의 시비나 황명 시인의 시비도 그의 작품이다. 이번 오월 달에는 강민 시인의 부인인 소설가 이국자의 문학비도 그녀가 묻힌 양주에 세워질 모양이다.
아아. 머지 않아 우리도 묻히거나 태워질 사람 일시 분명하거늘, 그래서 일까? 그가 한 소리는 귓가에 오르간 소리같은 여운으로 남는다.
“언제 한 번 청진옥으로 나와. 수육에다 소주나 한 잔 하게. 저쪽 세상에서도 먹고 오는 귀신이 대접 받는다더군. 때깔 좋다고
첫댓글 가져갑니다 순풍카페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