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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도 상반기 신인상
조영희
숫돌 외2편
오일장이 서는 날은 첫새벽부터 가슴이 뛴다. 이곳 저곳을 눈요기만 하고 다녀도 마음이 넉넉해지지만 억지로 장거리를 만들어 낸다. 처음 김해 오일장을 구경할 때만 해도 대형 마트의 편리함에 익숙해진 생활 때문인지 별기대를 걸지 못했다. 그러던 것이 횟수를 거듭할수록 시골장의 정취에 마음이 빼앗겨 간다.
“요번 장에는 전을 펴고 계실까?” 저지난 장날부터 뵈지 않는 할아버지가 은근히 걱정스러워진다. 매번 갈아야 할 칼이 있는 것이 아니지만 엿장수의 좌판과 뻥튀기가게를 거쳐 철물점을 서둘러 지났다. 간간이 들려 오는 “칼 갈아요”라는 쇳소리를 따라 시장 골목길로 접어드니 할아버지가 보였다. 장터에는 장꾼들과 장을 보러 온 사람들이 북적댔지만 칼갈이 할아버지를 찾아 그 곳까지 온 사람은 언제나 드물었다. 멀찌감치 서서 할아버지의 굽은 등을 바라보다 발길을 돌렸다.
몇 달 전, 할아버지와 딱 한 번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었다. 숫돌에 우리 집 부엌칼을 갈면서 풀리기 시작한 이야기는 할아버지의 가족사까지 이어졌다. 숫돌질로 다섯 남매를 키웠다는 자랑에 곁들여 자식들이 아무리 섭섭해도 숫돌 앞에 앉으면 모든 시름을 삭일 수 있다고 했다. 저려 오는 가슴으로 무릎을 꿇고 구부정하니 앉은 칼갈이 할아버지를 지켜보니 어디선가 본 듯하기도 했다.
친정집 수돗가에는 오래된 숫돌이 하나 있었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신 후 친정을 찾아갈 때마다 숫돌은 마냥 흙먼지를 뒤집어쓴 채 뒹굴고 있었다. 너무 지저분하다 싶어 물을 뿌려 주면 잠시 반들거리다가도 이내 추해져 버렸다. 그래도 옴폭 닳아진 숫돌 부분에 고인 물은 쉽사리 흘러내리지 않았다.
아버지는 늘 장독대 옆 수돗가에서 숫돌을 가셨다. 나이 탓으로 허리가 조금 구부정해졌는데 칼을 갈기 위해 무릎을 굽히면 등짝이 활처럼 휘었다. 가위와 부엌칼을 갈았고 낫과 호미 날도 갈았다. 정성스럽게 간 날을 빛을 향해 비춰 볼 때의 아버지는 흡사 명검을 만드는 장인같이 보였다. 날렵해진 무쇠 칼날에 손가락을 대어 보면서 고개를 끄덕대시기도 했다. 아버지는 우리 집의 칼갈이였지만 무쇠 같지 않는 아버지였다.
숫돌은 징검다리였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남들처럼 종종 부부싸움을 했다. 헌데 다음날 아침이면 아버지는 숫돌 앞에서 더욱 오래도록 칼을 갈았다. 나중에야 눈치로 알게 되었지만 그것은 화해의 손길이었다. 입을 삐쭉거리면서도 곱게 간 칼을 부엌으로 가져 가는 어머니의 걸음도 아버지의 마음을 받아 준다는 의미였다. 어머니와 아버지는 부부애를 말이 아니라 몸으로 표현한 것이다. 마음에도 없는 말로 정을 표현하는 요즈음과는 딴판의 시대를 산 사람들이었다.
심한 언쟁이 있던 다음날에는 아버지의 은근한 봉사가 남달랐다. 어머니보다 먼저 일어난 아버지는 부엌 아궁이의 재를 긁어냈다. 아궁이 바닥을 긁는 고무래 소리가 구들을 타고 올라올 때면 엄마 젖을 물고 잠든 아기처럼 편안함을 느꼈다. 그리고 쇠죽을 삶아 놓고 칼을 갈기 시작하였는데 칼 소리가 느릿느릿 사그라질 즘에야 어머니는 마지못해 앞치마를 둘러매고 수돗가로 가셨다. 그제야 나는 긴장이 풀렸는지 그루잠에 빠지곤 하였다.
어머니는 한 번도 칼을 갈지 않으셨다. 어쩌면 그 일만큼은 집안 대주의 몫으로 남겨 두고 싶었던 모양이다. 아버지가 떠난 지도 십수 년이 지났지만 숫돌이 그대로 남아 있는 이유도 어머니에겐 아버지의 분신이기 때문이 아닐까.
하루는 오빠가 월사금의 일부를 몰래 써버린 적이 있었다. 오빠는 일찌감치 도망가 버렸고 어머니는 안절부절못하며 방안에서 서성거렸다. 추녀 사이로 고개를 디민 서녘해가 힘없이 수돗가를 비추고 있었다. 아버지는 말없이 낫을 갈기 시작했고 등뒤에서는 냉기가 뿜어 나온 듯했다. 두려움을 이기지 못하고 나도 도망을 가야겠다는 생각에 슬슬 꽁무니를 뺐다.
삽짝에서 돌아본 풍경은 지금도 잊지 못한다. 아버지의 어깨는 가느다랗게 흔들렸다. 허연 뿌리를 드러낸 채 세풍에 가늘게 떨고 있는 빈 대궁만 남은 수수깡처럼 느껴졌다. 어느새 저녁노을이 마당에 내려와 있었고 목덜미는 벌겋다 못해 불에 타고 있을 정도로 애써 감정을 억제하는 뒷모습이 어린 나에게는 무서우면서도 처연해 보였다. 골목 어귀에서 멈칫거리는 나를 본 척도 않은 채 아버지는 시퍼렇게 간 낫을 지게에 얹고 휑하니 밭으로 나가 버리셨다.
저뭇해져서야 아버지는 바지게에 소꼴을 가득 채우고 돌아왔다. 소꼴 한 짐을 지겟작대기에 의지할 아버지가 아닌데 땅을 짚는 소리가 유난히 무겁게 들렸다. 오빠는 그때까지 돌아오지 않았다. 저녁 밥상을 물리친 아버지는 오빠를 찾아 밥 먹이라는 한마디만 던지고 마구간 앞에 모깃불을 지펴 놓고 다시 밖으로 나갔다. 자리를 피해 주신 것이다. 어머니와 난 그때서야 안도의 숨을 내쉬고 오빠를 찾아 나섰다. 그날 이후 오빠는 다시는 월사금에 손을 대지 않았다.
요즘에 생각해 보면 그때 숫돌 위로 흘러내리던 숫돌물은 속탄 눈물이고 손가락이 아프도록 숫돌을 갈았던 손길은 섭섭함을 삭이려는 몸짓이라고 생각된다. 자식들에게 제대로 군것질 한 번 시켜 주지 못했던 처지를 자책하신 마음이기도 하다. 여름철까지 땀 흘리며 키우던 농사가 초가을 태풍을 맞아 쭉정이가 될 때보다 더 낮게 가슴이 내려앉았으리라.
김해 장터에서 집으로 돌아오니 어느덧 땅거미가 내려와 있었다. 도마 위에다 야채를 올려 놓고 칼질을 하는데 무딘 칼이 들지 않는다.
‘가는 것은 칼이 아니라 바로 무딘 네 자신이야.’
속 외침이 들려 온다.
칼날은 숫돌에서 다시 태어난다. 칼날은 간다고 그냥 날을 얻는 게 아니라 숫돌이 제 몸을 서서히 닳아 가며 날을 세워 주어야 한다. 자신에게 의탁한 칼에게 제 몸을 아낌없이 갈아내는 숫돌이 아버지의 깊은 사랑으로 여겨진다. 마음이 무디어져 갈 때 갈아 줄 숫돌이 곁에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만, 숫돌 같은 아버지는 지금 세상에 계시지 않는다.
그날 이후 오일장에서도 할아버지는 보이지 않았다.
이랑과 고랑
옹기에 넣어 둔 고구마 껍질 위로 노란 순이 돋아나 있다. 바위를 뚫고 나온 애솔나무 같은 여린 새싹의 꿈틀거림이 삶을 위한 몸짓으로 보인다. 뿌리를 내리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지 샛노랗던 몸이 서서히 기지개를 켜기 시작하자 새로운 생명의 흔적이 햇살에 비춰 나온다. 꿈을 잃지 않고 견뎌 온 고구마 순에게 제대로 된 터전을 마련해 주고 싶어진다.
볕이 잘 드는 창가에 며칠을 더 두었다. 고구마 순도 험한 세상으로 나갈 준비를 하는지 연초록 순은 이내 초록으로 변했다. 투실한 몇 줄기를 잘라 내어 아파트 옆 빈터에 심어 볼 양으로 정성스레 손질을 해 두었다. 먼 길 떠나는 자식에게 어머니가 매무시를 하는 마음이 이러했으리라.
빈터 푸새밭에는 봄이 한창이었다. 동네 아낙들이 부산스레 호미질을 하고 있었고 풀들이 봄나들이를 나온 듯 볕을 쬐고 있었다. 주인이 없을 법한 공터 귀퉁이를 차지한 후 잡초를 뽑아내고 돌멩이도 주워내기 시작했다. 한나절이 지나자 제법 근사한 햇밭이 만들어졌다. 누가 욕심이라도 낼까 봐 돌멩이를 한 줄로 쌓아 담을 만들고 나무꼬챙이를 박아 영역표시를 해 두었다. 처음으로 집을 장만했을 때의 기분이 다시 들었다.
다음날, 밭고랑을 만들었다. 고랑을 만드니 이랑이 절로 생겨났다. 이랑에 삐쭉삐쭉 올라온 석죽, 쇠비름, 소리쟁이들이 더러는 꽃을 피우고, 더러는 푸릇푸릇 폼만 잡다가 내 손에 뽑혀 나갔다. 사람들의 이기적이고 하찮은 밭일에 풀들은 청천벽력같이 삶의 터전을 빼앗기고 말았다.
“어이! 새댁, 와 이랑을 글케 크게 잡노?”
할머니 한 분이 쯧쯧 혀를 차면서 다가섰다. 고구마를 심으려면 이랑을 넓게 잡는 게 아니라 좁게 만들되, 언덕처럼 북을 돋구어야 뿌리가 잘 내린다며 한 골을 시범 삼아 만들어 주셨다. 골을 파고 이쪽 저쪽으로 알맞게 흙을 몰아 올리는 능숙한 손놀림 따라 땅속에 숨어 있던 흙이 세상구경을 하게 되었다. 세상 밖으로 나온 보드랍고 촉촉한 기운이 숨을 쉬는지 흙내가 코를 스친다.
어머니는 늘 밭에 살았다. 넓지 않았지만 호락질로 밭을 가꾸다 보니 진종일 그 곳에서 살다시피 했다. 어머니가 오리처럼 뒤뚱거리며 지나간 뒤에는 이랑에서 뽑아낸 비름, 바랭이, 방동사니들이 고랑 가득 쌓였다. 나는 어머니가 야단치는 소리에도 아랑곳없이 폭신폭신할 만큼 풀 더미가 쌓인 고랑을 따라 깨금발을 하며 뛰어다녔다. 이랑에는 제법 키를 올려가는 깨, 고추, 녹두대가 열 살바기 계집아이의 손장난에 움찔거렸다. 어머니의 밭이었지만 걸을 때마다 이랑에서 자라는 엄마의 꿈이 다친다는 걸 그때는 알 턱이 없었다.
어느 날 부모님이 밭에서 심하게 다투고 계셨다. 밭고랑을 내면서 어머니가 고랑을 좁게 잡으려 했다. 어머니는 한 포기라도 더 심을 욕심으로 고랑을 좁혀 가능한 이랑을 늘렸고, 아버지는 고랑이 너무 좁으면 이랑에 심은 채소가 제대로 자라지 못한다고 나무랐다. 욕심을 너무 부리면 농사를 망치게 된다는 아버지의 말이 어린 시절에는 이해가 잘 되지 않았다. 고랑이 좁으면 지나다니기 힘들지만 이랑이 많으면 소출이 많을 게 아닌가. 하지만 지금에는 이랑과 고랑에도 균형이 있어야 한다는 밭의 법칙을 깨닫게 되었다.
고랑이 없는 이랑은 있을 수 없다. 고랑이 있어 길이 되어 주고 식물들도 적당하게 거리를 두어야 잘 자란다. 풀과 마찬가지로 사람도 할 수만 있다면 이랑에서 살고 싶어할 뿐, 고랑에서 버티려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렇다고 모든 땅이 이랑이 될 수 없고 고랑이 아니 될 수 없다. 고랑에서 견뎌 가는 사람들이 있기에 이랑이 존재할 수 있는 게 아닐까.
텃밭을 만든 후, 비가 자주 오지 않아 해거름만 되면 물 주는 게 일과가 되어 버렸다. 이랑에 물을 주는데도 물은 아래로 흘러 고랑에 고였다. 이랑에 사는 식물들이 더 목마르게 되고 정성을 기울인 이랑의 채소보다 고랑에서 자라는 풀이 더 싱싱하고 무성하게 자라게 되었다. 그런데 살아 남기 위해 강할 수밖에 없는 저들을 사람들은 성가시게 여겨 짓밟고 뭉개 버리기도 한다. 애당초 사람이 밭을 만들지 않았다면 저 터는 풀들의 보금자리이고, 소용없는 풀들도 잡초로 불리지 않을 게다. 헌데 잡초가 썩어야 땅이 기름지고 식물들이 자란다는 사실을 사람들은 외면하고 있다.
이랑이 고랑을 내려다보고 고랑은 이랑을 쳐다보고 있다. 이랑에서 자라는 식물이 고랑에 내려오면 잡풀이 되고, 고랑에서 자라는 풀도 어느 순간 이랑으로 올라서면 채소가 될 수 있다. 다음해에 밭주인이 바뀌면 고랑과 이랑의 처지가 바뀌게 될지도 모른다. 이랑 한가운데를 뚝 가르면 고랑이 생기고 이랑의 흙을 고랑 쪽으로 몰아붙이면 고랑과 이랑의 자리가 뒤바뀐다. 인간 만사가 새옹지마라는 사실을 고구마를 심으며 새삼 되짚어 보게 되었다.
거실에는 이랑으로 옮기지 못한 고구마 줄기가 유리병에 담겨져 있다. 창턱에 놓인 유리병 속에는 뿌리가 가득 찼고 창턱에서는 줄기는 줄기대로 넌출지게 뻗어 나가고 있다. 찬찬히 지켜보니 물 속에는 이랑과 고랑이 없다. 그래서 그런지 줄기와 뿌리만 무성할 뿐, 고구마가 달리지 않는다. 땅에 옮겨 주어야 뿌리는 알뿌리가 되고 고구마의 잎도 본모습을 가지게 된다.
나는 지금 이랑에 서 있는 걸까. 아니면 고랑을 걷고 있는 걸까. 이랑에 서 고랑으로 내려서는 중인지 고랑을 걸어 이랑으로 올라서는 길인지 알 수가 없다. 어딘들 어떠랴. 절벽에서 뻗대는 애솔나무처럼 뿌리만이라도 단단히 내릴 수 있다면 좋겠다.
조각보
창문을 밀어내니 알싸한 기온이 밀려온다. 일요일 오전이라 그런지 주차장의 자동차들이 형형색색의 조각보를 펼쳐 놓은 듯하다. 중간 자리쯤 자동차 한 대가 미끄러지듯 빠져 나가며 한 순간 휑하니 도드라진 빈자리가 커져 보인다. 한 오라기 햇빛이 주차장에 반사되어 밝게 갠 하늘이 더없이 눈부시다.
이불을 한 아름 안고 나와 볕쬐기를 해 준다. 창틀에 늘어놓은 이불 가운데서 닳은 이불 하나가 유난스럽게 눈에 박힌다. 조각보 이불이다. 시집올 때 두고오려 했는데 마실 나서는 어머니의 치맛자락 끝에 매달린 아이처럼 이사할 때마다 따라다닌다. 낡을 대로 낡은 데다 촌스럽기까지 하지만 쉬이 버리지 못하는 까닭은 어머니가 손수 챙겨 준 이불이라 더욱 그러한가 보다.
어머니는 손재주가 남달랐다. 특히 옷을 만들거나 편물을 다루는 솜씨는 온 동네에서 소문이 났다. 농한기의 이른봄날이면 어머니는 손수 지어 만든 자주색 반회장저고리와 풀색 민치마를 곱게 차려 입으셨다. 자투리 천으로 끝동을 이어 단 반회장저고리는 스란치마 부럽지 않게 민치마와 어울렸다. 아버지도 이런 아내의 모습을 은근히 좋아하셨을 만큼 지금도 가끔 만나는 친구들이 기억하고 있는 내 어머니의 고운 모습이다. 그러나 어머니는 딸이 자신을 닮지 않은 걸 다행으로 여겼다. 손재주가 뛰어난 여자는 팔자가 세다는 속설을 믿는 까닭에서였다.
여고시절이었다. 조각보로 이불을 만들어야 하는 제법 큰 과제물이 있었다. 서투른 솜씨로 겨우 조각보에다 수를 놓긴 했는데 이불을 만들 만한 작품은 되지 못했다. 그런데도 어머니는 잘했다며 이불집에 가져가 작은 이불을 만들어 주셨다.
결혼을 하고 첫아이가 태어났을 때다. 그 동안 쳐다보지도 않던 조각이불이 배냇짓을 하며 잠든 아이를 통해 새롭게 다가왔다. 촌스럽기보단 울긋불긋한 무늬도 그럴싸하게 보였다. 산후조리차 딸네집에 머무는 어머니도 버리지 않기를 잘했다고 웃어 주셨다. 그러다 마치 마음을 맞춘 듯 두 사람의 마음은 한 가지 생각으로 모아졌다.
큰고모 집에는 반치매에 걸린 시어머니가 계셨다. 고모댁에 놀러 가면 늘 안방을 지키고 계신 할머니를 먼저 뵈어야 했다. 할머니는 우리를 알아보는 둥 마는 둥 말 한마디 않고 웅크리고 앉아서 오린 종이 쪼가리를 벽에다 붙이고 계셨다. 벽뿐만 아니라 이불이랑 옷가지에도 헝겊 쪼가리를 붙이셨다. 어디에든 붙이는 게 할머니의 유일한 소일거리였다. 할머니의 헝겊 조각은 풀칠이 고르지 않아 반입체모양이 되었지만 여러 조각이 모인 자리에서는 반듯한 솜씨를 부려 나름대로 모양이 났다. 사방이 헝겊 조각으로 메워진 방은 기괴하였고 그 방에 들어가면 나는 마녀 앞에 끌려온 겁먹은 소녀가 되었다.
어느 날, 할머니가 방에 계시지 않았다. 반은 호기심으로 반은 두려움으로 방문을 열었다. 방안에서는 고모가 칼과 대나무 자를 가지고 덕지덕지 붙어 있는 종이 쪼가리를 떼어내기도 하고 새로 붙이기도 하면서 벽면을 고르고 계셨다. 그때서야 왜 마법의 성처럼 훌륭하게 보였는지 알게 되었다. 고모는 한 번도 시어머니의 행동을 나무라지 않고 보이지 않는 사랑으로 할머니의 위신과 체면을 지켜 주신 것이다. 고모는 동네방네를 돌며 구해 온 듯한 헝겊 쪼가리와 색지를 눈에 잘 띄게 두고, 바늘에는 실을 꿰어 놓은 다음 가윗날을 찬찬히 훑어본 후 나가자고 하셨다. 어린 나이지만 뭐라 표현할 수 없는 뭉클한 감동이 가슴을 가득 채웠다.
고모가 친정에 오신 날이었다. 밤이 깊은 줄 모르고 어머니와 긴 이야기를 나누고 계셨다. “성아, 우리 어머이 돌아가시면 눈물이 안 나올까 봐 내 억수로 걱정했데이. 죄받을지도 모르지만 어머이가 돌아가시길 바란 적도 있었다 아이가. 근데 막상 돌아가시자 얼마나 눈물이 나오던지, 징그러운 정 때문이겠제?” 난 그 말이 참 정스럽게 느껴졌고 고모는 눈으로 운 게 아니라 가슴으로 울었던 것을 알게 되었다. 고모는 시어머니가 돌아가신 한참 후까지 그 방을 치우지 않고 그대로 두었다. 쉽게 빈방을 정리하지 못한 까닭은 벽에 붙어 있는 조각조각 하나가 시어머니가 채워 온 시간들이기 때문은 아닐까.
고모는 사랑으로 할머니의 방을 가꾸었다. 그리고 숨은 사랑으로 시어머니를 보살피신 것이다. 헝겊이나 종이 쪼가리 하나하나를 아무렇게나 붙였을 때는 촌스럽고 흉하게 보였을 테지만 그것을 잘 다듬어 내던 고모가 있었기에 손님들이 찾아 들어도 흉물스럽지 않은 방이 되었으리라 믿는다. 어머니께서 조각이불을 내게 만들어 주신 이유도 어쩌면 고모댁의 그 방과 연결되어 있는지도 모른다.
언제부턴가 조각보 가족이란 말이 생겨났다. 조각 하나하나를 이어 붙이면 작품으로 완성되는 조각보처럼 어우러지는 가족을 의미한다. 어디 가족에게만 그런 어울림이 필요할까. 천조각을 이어 붙이듯 여럿이 모여 하나가 되고 그것들이 서로 조화를 이룰 때 세상은 조각보처럼 어우러진다. 조각보를 이루고 있는 하나의 천조각으로 세상을 봐야겠다.
세월이 지나면서 조각이불 여기저기 보풀이 생겼다. 가장자리 쪽으로 촘촘하던 실땀이 세월에 닳아 나슨해져 떨어져 나갈 태세다. 그래도 제자리를 묵묵히 지켜 가고 있다. 장롱 속에 누워만 있어 볕쬐기시킨다고 창틀에 펼쳐 놓으니 올 하나가 즐거운 듯 나풀거린다.
조각이불은 어머니가 내게 주신 선물이다. 세상을 비춰 보는 거울인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