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천 왜성 [順天倭城]
순천 왜성
순천 왜성 [順天倭城]
지정번호 : 전남기념물 : 제171호
지정년도 : 1999년 2월 26일
소재지 : 전남 순천시 해룡면 신성리
시대 : 조선시대
크기 : 외성 길이 2,502m 높이 5m 내성 길이 1,342m 높이 4m
면적 : 188.428m2
분류 : 성지(성곽)
1999년 2월 26일 전라남도기념물 제171호로 지정되었다. 1963년 1월 21일 사적 제49호로 지정되었다가 지방기념물로 격하된 것이다. 면적은 188,428㎡이고 이름이 왜교성, 왜성, 왜성대, 왜교, 예교(曳橋), 예교성, 망해대(望海臺), 신성리성, 순천성 등 여러 가지로 기록되어 있다.
순천 왜성은 정유재란(1597) 당시 육전에서 퇴진한 왜군 선봉장 우키타 히데이에[宇喜多秀家], 도다카도라[堂高虎]가 전라도를 공략하기 위한 전진기지 겸 최후 방어기지로 삼기 위해 3개월간 쌓은 토·석성이다. 또한 침략 최정예 부대로 왜장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가 이끄는 1만 4000여 명의 왜병이 주둔하여 조·명 수륙연합군과 두 차례에 걸쳐 최후·최대의 격전을 벌인 곳이기도 하다. (남해안 26개 왜성중 유일하게 한곳만 남아 있다.)
중국 명의 육군 장군 유정(劉綎)과 조선 육군 도원수 권율이 이끄는 육군 3만 6000여 명, 명의 해군 제독 진린(陳璘)과 이순신(李舜臣)이 이끄는 수군 1만 5000여 명의 병력이 순천 왜성을 비롯하여 장도(노루섬) 등을 오가며 왜군을 격퇴하였고, 이순신이 27일간 머물면서 고니시를 노량 앞바다로 유인하여 대첩을 거두었다. 바로 이 노량해전에서 이순신이 전사하였다.
임진란 패인이 전라도의병과 수군의 용전에 있었다고 보고 전라도를 철저히 공략키 위해 풍신수길의 야심에 따라 전라도 각처에 진지를 구축해 공세를 강화하였으나 무술년(1598연) 8월 그가 급사 후 왜성에 주둔해 있던 침략 최정예 부대인 소서행장 왜군과 조․명 수륙연합군 사이에 2개월에 걸친 최후․최대의 격전을 펼친 곳이다.
순천시가지에서 여수 쪽으로 6㎞ 정도 가다가 왼쪽으로 6㎞ 더 가면 신성리 마을과 이순신을 배향한 충무사가 나오고, 여기에서 남쪽 200m 지점의 광양만에 접한 나지막한 송림에 순천 왜성이 자리 잡고 있다.
수륙요충지로, 성곽규모가 36,480평이고 외성 길이 2,502m, 내성 길이 1,342m로 외곽성(토·석성) 3개, 본성(석성) 3첩, 성문 12개로 축조되었다. 평면이 직사각형을 이루는데 지금도 끊긴 데가 한 곳도 없이 거의 완벽하게 남아 있다. 성을 쌓은 돌의 크기는 1.5∼2m이고 내성높이 4m, 외성높이 5m, 둘레길이 약 3,000m이다.
왜교 또는 예교란 명칭은 축조 당시 왜군들이 피습이 두려워 조·명 연합군이 축조한 순천 검단산성(사적 418) 쪽의 육지부를 파내고 바닷물을 끌어들여 마치 해자의 역할을 하도록 하고 출입하기 편리하게 연결다리를 설치한 데서 유래하였다. 전라도 지방에 유일하게 남아 있는 왜성이다.
* 상세 설명
정유재란 - 임진왜란이 일어난 지 5년 후 풍신수길은 15만 명의 왜군을 이끌고 정유재란을 일으킨다. 다시 전쟁을 일으킨 왜군은 임진왜란 때와는 달리 전라도를 철저하게 유린하며 가는 곳마다 무자비한 살육을 자행한다. 하지만 명량에서 대패한 소서행장은 순천으로 퇴각, 왜성을 쌓고 주둔하게 된다.
남해안의 왜성들 - 소서행장이 순천 왜성에서 주둔한 기간은 약 11개월. 소서행장뿐만 아니라 다른 일본 장수들도 남해안을 따라 성을 쌓아 정유재란 전쟁 기간의 절반 동안을 주둔해 있었다. 이 왜성들은 일본으로 끌고 갈 조선인들이 잠시 머문 임시수용소의 역할을 했는데, 이곳을 통해 일본에 포로로 건너간 조선인의 수는 15만 명을 넘었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이 왜성은 문화약탈의 센터였다.
조‧명 연합군의 왜성공격 - 조선과 명나라 연합군은 어마어마한 규모의 왜성들이 25군데나 포진해 있는 남해안 일대에 대한 대대적인 공격을 준비한다. 이른바 4로(四路) 병진작전이다. 四路 병진작전은 남해안 일대에 있는 왜성들을 육군과 수군이 네 개의 방향에서 동시에 공격한다는 것이다. <임진정왜도>는 이 수륙합동작전이 전개되는 60일간의 순천 왜교성 전투를 처음부터 끝까지 세세하게 담고 있다.
노량해전 - 피비린내 나는 격전, 노량해전. 숱한 왜병의 시체와 난파선이 바다를 피로 물들인 이 유명한 노량해전은 순천 왜교성 전투의 수륙합동작전이 연합수군의 참패로 끝나고 일시적으로 소강상태에 빠져든 지 한 달 뒤에 대대적으로 재개된 전투이다.
임진왜란의 마지막 전투, 남해성 소탕작전 - 흔히 임진왜란 7년 전쟁은 노량해전과 함께 완전히 끝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노량해전이 끝난 뒤에도 <임진정왜도>의 그림은 계속되고 있었다. 임진왜란 마지막 전투가 노량해전이 아니라는 것이 이 그림을 통해 새롭게 밝혀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