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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임진왜란의 발발과 정부의 대응
1. 임진왜란 전의 朝․日 관계
1592년(선조 25년)에 왜군의 조선침략으로 시작한 임진왜란은 7년간이나 계속되어 조선은 말 할 것도 없고 침략의 당사국이었던 일본과 명에게도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이 전란으로 조선․일본․명의 3군은 모두 피폐되어 일본과 명은 정권의 교체가 이룩되었지만 조선은 정권이 유지되었다 하더라도 전란 중에 국가의 붕괴직전까지 이르는 위기를 겪었고 가장 참혹한 피해를 입었다. 이 전란을 겪은 후 조선은 인구의 감소와 전결의 축소로 재정의 궁핍에 허덕이게 되었고 문화재의 유실과 모든 제도의 붕괴라는 변화를 겪었고 의식구조상으로는 일본에 대한 적개심과 명에 대한 崇慕라는 변화를 일으켜 우리 나라 역사 발전에 커다란 전화기를 갖게 되었다.
국초부터 왜군과 여진에 의해 군사적인 위협을 받고 있던 조선 정부에서는 남해안 지방에 왜구들이 자주 침략하자 군국기무를 장악하는 비변사라는 합좌기관을 설치하여 이에 대비하였으나 선조 때에 지배계급은 당파를 중심으로 분열하여 서로 반목질시하게 되었다. 이와 같은 파쟁으로 중앙에서는 국방정책조차도 마련하지 않고 변해가는 동양의 국제정세를 명나라와의 친선관계만으로 해결하려 하였다. 또 안일 속에서 고식적인 대책에만 만족해하던 지배층은 인접국가인 일본이나 대륙의 여진족의 정치적 변동이나 사항을 구체적으로 탐지하려 하지도 않았을 뿐더러 16세기 말에 일본에 파견한 통신사도 당파적인 엇갈림에 치우쳐 상반된 내용을 보고하였다. 한편 이이는 10만 양병설 을 주장하기도 했으나 조선사회는 이미 오랜 평화 속에서 지배계층인 양반의 편당, 정치 기강의 해이, 전세제의 문란 등 여러 폐단으로 인심이 동요되었다.
조정에서는 각 도에 왜군의 침공에 대비하여 성곽을 수축하고 군비를 정비하라는 명령을 내려도 몇 곳을 제외하고는 민폐를 야기시킨다는 원성만 높았으며 이에 동조한 일부 수령들도 전쟁 준비를 중지하라는 장계를 올리기도 하였다. 조선 정부는 90년 3월 황윤길을 정사, 김성일을 부사, 허성을 종사관으로 한 통신사 일행을 파견하였고 이들은 이듬해 정월 일본의 답서를 가지고 귀국하였다. 일본의 답서에는 종래의 외교관례에 따르지 않는 무례한 구절과 정명가도를 뜻하는 글이 있어 침략의 의도가 분명하였으나 91년 3월 이들 사신이 복명하는 자리에서 정사 황윤길(서인)은 왜가 반드시 침략할 것이라고 한 데 반해 부사 김성일(동인)은 왜가 침범할 동정이 없다는 상반된 보고로 당파적인 엇갈림과 함께 조정의 의견도 통일되지 못하였다. 이어 제3차 일본 사신 일행이 조선 통신사보다 한달 늦게 입경하여 일본이 가도입명하리라는 통고에 조정은 놀라 그 해 5월에 일본의 서계 내용과 함께 왜정을 명에 알리는 한편 일본의 침공에 대비하여 김수, 이황, 윤선각 등으로 하여금 경상, 전라 연안의 여러 성을 수축하게 하고 각 진영의 무기를 정비하게 하였다. 신립, 이일에게는 변비를 순시하게 하는 등 요충지인 영남지방의 방비에 힘을 기울였으나 이미 시기가 늦었다.
일본을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대륙침공의 의도를 구체적으로 나타낸 것은 1585년경부터였고 1587년에 그는 국내 통일의 마지막 단계에 이르러 규슈정벌을 끝마치고 대마도주 소 요시시게에게 조선 침공의 뜻을 표명하였다. 그러나 조선 사정에 정통한 쓰시마도주는 이 계획이 무모한 것임을 알고 조선이 통신사를 파견할 것을 건의하였다. 따라서 쓰시마도주는 가신인 다치바나 야스히로를 일본국왕사로 하여 1587년 조선으로 파견, 일본 국내사정의 변화를 설명하고 통신사의 파견을 요청하였다. 이 첫번째 일본 사신이 부산에 도착하였을 때 그들의 영접에 대한 가부와 서계의 서사가 종래와 달리 오만하다 해서 문제가 되어 조정에서는 여러 논의가 있었다. 특히 공주교수 조헌은 만언소를 올려 시폐와 국방을 논하는 등 일본 정벌의 강경론을 주장하자 결국 조정에서는 수로미매를 이유로 통신사의 파견을 거절하였다. 도요토미의 첫번째 외교가 실패하자 다시 쓰시마도주의 알선으로 1588년 10월과 1589년 6월, 두 차례에 걸쳐 조공과 함께 통신사의 파견을 간청하고 앞서 왜구의 앞잡이가 되어 노략질한 조선인을 잡아 보내왔다. 조선은 황윤길, 김성일 등을 통신사로 보내어 일본의 동정을 살피고 왔다. 그 동안 일본의 침략계획은 더욱 성숙하여 내전을 통해 연마한 병법․무예․축성술․해운술 등을 정비하고 조총의 대량생산도 진행되었다.
2. 일본의 침략
1592년 4월 13일 경상도 가덕도 응봉봉수대에서는 왜군의 700여 병선이 쓰시마를 출항하여 부산포에 이르고 있다는 상황보고가 곧 경상, 전라도의 각 감영과 중앙에 전달되었다. 그러나 경상좌수영군은 저항도 하지 못한 채 궤멸되었고 14일에는 왜군 선발대인 고니시 유키나가의 약 1만 8000 병력이 부산성을 공격하여 십 수 시간의 혈전 끝에 부산성을 사수하던 부산진첨사 정발 등의 전사로 성을 빼앗겼다. 이튿날 동래에 진격한 왜군들과 맞선 동래부사 송상현 이하 군민은 끝까지 항전하다 순국하였다. 부산과 동래를 함락시킨 왜군의 후속부대는 계속 상륙해 와서 4월 18일에는 가토 기요마사 가 이끄는 제2군 2만 2000여 병력이 부산에, 구로다 나가마사가 이끄는 제3군 1만 1000여 병력이 다대포를 거쳐 김해에 상륙, 침공을 개시하였다. 이와 함께 구키 요시다카, 도토 다카토라 등의 9,000여 수군이 편성되어 바다에서 이들을 응원하였다. 일본 국내의 잔류병력과 쓰시마 등지의 주둔군 등 일본 침략군의 총병력은 약 20만이었는데 이 중 부산과 동래를 함락시킨 제1군은 중로로 동래→양산→청도→대구→인동→선산→상주→조령→충주→여주→양근→용진나루→경성 동로, 제2군 좌로는 동래→언양→경주→영천→신녕→군위→용궁→조령→충주→죽산→용인→한강, 제3군 우로는 김해→성주→무계→지례→등산→추풍령→영동→청주→경기도의 3로로 나뉘어 서울을 향하여 북상하였다.
상륙 20일만에 서울은 왜군에게 점령되었으며 서울에 입성한 왜군은 대오를 정비하여 고니시의 부대는 평안도, 가토의 부대는 함경도, 구로다의 부대는 황해도로 진로를 정하는 한편 서울을 지키는 부대를 두고 경상, 강원, 전라도 방면으로 진출하여 후방지역을 담당하였다. 강원도, 황해도 방면으로 모병하러 간 두 왕자도 왜병의 포로가 되고 파죽지세로 밀려드는 왜군에 의해 개성, 평양은 부산 상륙 이후 60일도 못 되어 함락, 거의 무방비상태인 전국토는 함경도까지 진출한 적에게 짓밟히게 되었다.
3. 관군의 대응
4월 17일 경상좌수사 박홍으로부터 왜군 침공의 급보가 전해지자 조정에서는 신립을 도순변사, 이일을 순변사, 김여물을 종사관으로 임명하여 왜군 침공에 대비하는 한편, 김성일을 경상우도초유사, 김근을 좌도안집사로 삼아 민심수습과 항전을 독려하도록 하였다. 북상하는 왜군을 막기 위해 이일에게는 중로인 조령 방면을, 유극량과 변기 등에게는 각기 죽령과 추풍령을 방비하게 하였고 도순변사 신립과 도체찰사 유성룡으로 하여금 이일을 응원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이일이 4월 24일 상주에서 가토에게 패하여 충주로 물러나자 왜군은 조령과 죽령 등지에서 저항도 받지 않은 채 충주까지 진격하였다. 이일의 뒤를 이은 신립은 충주 탄금대에서 방어작전을 폈으나 패하였다. 이일 등이 죽령, 조령, 추풍령 등의 요새를 방어하기 위해 출발한 후 조정은 적군의 수도 공격에 대비하여 우의정 이양원을 수성대장으로 삼아 도성의 성곽을 축성하게 하는 한편 전 북병사였던 김명원을 도원수를 삼아 한강을 수비하게 하였다. 신립의 패전보고가 있자 4월 30일 선조는 평양을 향하여 피난길에 오르고 임해군은 함경도로, 순화군은 강원도로 보내어 근왕병을 모집하게 하는 한편 명나라에 원병을 청하여 수복을 꾀하고자 하였다. 왕의 서천으로 백성들의 사기는 더욱 떨어졌고 특히 경상도, 충청도, 전라도는 무정부적 혼란상태가 더했다.
왕이 피난해 있는 사이 민이 일어나 공사노비의 문적이 있는 장례원과 형조의 건물을 불태우고 경복궁, 창덕궁 둥 궁궐과 관청에 들어가 약탈을 하였다. 서울이 함락되고 함경도 지역까지 왜군의 침략을 당하고 있을 때 해상의 싸움은 연전연승을 거두었다. 조선 수군의 편제와 전술은 고려 이래로 왜구 방어 위주였으므로 잘 정비되어 있었다. 따라서 각도에는 수영이 있어 이를 수군의 근간으로 하였다.
1592년 4월 14일 부산으로 침입한 왜선단에 경상좌수영과 우수영은 해상에서 제대로 싸움조차 하지 못한 채 패하였다. 전라좌수영의 수군절도사로 있던 이순신은 경상우수영으로부터 왜군의 침입보고를 받자 곧 출동하여, 옥포의 첫 해전에서 승리를 거둔 후 당포, 당항포, 한산도, 부산 등지에서 계속 큰 전과를 거두었고, 특히 한산도 앞바다의 해전을 진주성싸움, 행주산성싸움과 더불어 임진왜란 3대첩으로 꼽는다. 이순신의 활약으로 해상권을 완전히 장악한 조선군으로 인해, 해상으로 북진하여 육군과 합세하려던 왜군의 작전은 분쇄되었다.
해상에서의 승리와 함께 육지에서는 부산진, 동래의 수성전과 김해성의 저항, 경상우방어사 조경 휘하의 돌격대장 정기룡의 추풍령전투, 밀양 작원에서의 밀양부사 박진의 선전, 유도대장 이양원의 해유령 승전 등 치열한 접전이 있었다.
왕이 파천하는 도중 사신을 명에 보내어 구원을 요청하자 명에서는 조선 땅에서 왜군을 격퇴해야 한다는 판단 아래 파병을 결정하여, 선봉장으로 낙상지와 사대수 등이 먼저 건너오고 이어서 송응창, 이여송이 4만 5000의 동정군을 이끌고 조선의 김응서 등과 함께 평양성을 공격, 이를 탈환하였다. 계속 서울을 향하여 진격하던 명군은 벽제관에서 왜군과 일대 접전이 벌어져 개성으로 퇴각하고 왜군은 서울에 집결하여 함경도에서 철수하는 가토의 군대와 연합, 행주산성을 공격하였다. 행주산성에는 전 전라도순찰사 권율이 이치싸움에서 승리한 후 명의 원군과 호응하여 서울을 탈환하기 위해 웅거하였으나 벽제관싸움에서 명군이 패퇴하자 고립되었다. 권율은 조방장 조경, 승장 처영과 함께 약 2,300의 정병으로 행주산성에서 배수진을 치고 몇 차례의 격전 끝에 왜군을 물리치자 왜군은 다시 서울 이북에 출병하지 않고 서울 철수를 서두르게 되었다.
강화회담이 진행되고 있을 쯤 왜군은 앞서 김시민에게 패퇴한 진주성을 재차 공격해왔는데 김천일, 황진, 최경회 등이 역전했으나 함락되었다. 두 차례에 걸친 진주싸움은 행주싸움에 못지 않은 격전이었고 특히 제1차 진주성싸움은 임진왜란 3대첩에 든다.
관군은 오랫동안 전쟁이 없던 태평 시대였던 관계로 실전의 경험이 부족하였고 전략을 짜는 것도 부족하였다.
따라서 전투를 지휘할 마땅한 장군이 부족하여 군사들은 동요하고 각기 흩어져 제 힘을 발휘하지 못하였다. 또 지휘체제는 중앙에 있고 군인들은 지방에 흩어져 있는 것도 전투력 약화의 원인이 되었다. 전쟁이 나자 조정에서는 신립을 도순변사, 이일을 순변사, 김여물을 종사관으로 임명하여 왜군 침공에 대비하는 한편, 김성일을 경상우도초유사, 김근을 좌도안집사로 삼아 민심수습과 항전을 독려하도록 하였다. 북상하는 왜군을 막기 위해 이일에게는 중로인 조령 방면을, 유극량과 변기 등에게는 각기 죽령과 추풍령을 방비하게 하였고 도순변사 신립과 도체찰사 유성룡으로 하여금 이일을 응원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이일이 4월 24일 상주에서 가토에게 패하여 충주로 물러나자 왜군은 조령과 죽령 등지에서 저항도 받지 않은 채 충주까지 진격하였다. 이일의 뒤를 이은 신립은 충주 탄금대에서 방어작전을 폈으나 패하였다. 그러나 관군은 진주성싸움, 행주산성싸움, 한산도 싸움에서 큰 성과를 거두었다.
4. 의병의 활약
혼란과 흩어진 민심의 속에서도 위태로운 나라를 구하기 위하여 의병이 전국 각지에서 일어났다. 학문에 힘쓰던 선비 불도를 닦던 승려, 논밭에서 일하던 농민들도 나라를 구하기 위하여 나섰다. 영남에서는 유림 곽재우, 김면, 정인홍 등이, 호남지방에서는 고경명, 김천일, 호서에서는 조헌 등이, 함경도에서는 정문부가 거병하였다. 조헌은 충청도 옥천에서 일어나 청주의 왜병을 몰아내고 금산의 왜병을 공격하다 전사하였고 곽재우는 경상도 의령에서 거병하여 의령,창령 등지에서 적을 물리치고 진주에서 김시민과 함께 적병을 격퇴하였다. 고경명은 전라도 장흥에서 거병하여 금산을 공격하다가 전사하였으며 김천일은 수원에서 거병하여 제2차 진주싸움에 참가하였다. 정문부는 함경도에서 활약하여 경성, 길주 등을 회복하고 관동지방의 적을 축출하였다. 이 외에도 전국 각지에서 크고 작은 많은 의병이 봉기했으며 휴정, 유정 같은 승려들이 승병을 거느리고 싸움에 참가하기도 하였다. 이들은 비록 정식 군인은 아니었으나 각지에서 관군을 도와 큰 공을 세웠다.
5. 강화회담
임진강을 끼고 조선․명의 연합군과 왜군이 대치하고 있을 때, 일본측 고니시의 강화회담 제의로 이덕형과 일본의 야나가와 초신․겐소 사이에 강화회담이 시작되어 강화는 교섭단계에 들어갔다. 조선측의 강화반대에도 불구하고 명의 적극적인 개입으로 회담은 진척되어 심유경 등이 일본에 파견되었고 우리측에서도 황진을 통신사로 보내게 되었다. 강화회담이 계속되는 동안 전쟁은 소강상태로 들어갔고 명은 왜군의 재공격이 없을 것이라 판단하여 주력부대를 철수시켰다. 그러나 5년간 계속된 명․일간의 강화회의는 96년 9월 일본 오사카성 회담에서 결렬되었다. 회담이 결렬된 이유는 명에서는 도요토미를 일본의 왕으로 삼고 그 입공을 허락한다는 봉공안으로써 국면을 해결지으려 했으나 도요토미는 ① 명의 황녀로써 일본의 후비로 삼게 할 것, ② 조선의 8도 중 4도를 할양할 것, ③ 감합인을 복구할 것, ④ 조선의 왕자 및 대신 12명을 인질로 삼을 것 등을 요구하였다. 심유경은 이 요구를 명이 받아들이지 않을 것을 알고 거짓으로 본국에 보고하여 명은 봉공안에 의해 96년 도요토미를 일본 국왕에 봉한다는 칙서와 금인을 보냈는데, 화의는 결렬되었다.
Ⅱ. 정유재란과 명량대첩
1. 정유재란
화의가 결렬되고 이듬해 왜군은 재차 침입하게 되었다. 이 때에는 조선도 왜군의 재침에 대비하여 경상도의 금오, 공산, 화왕산성을 비롯하여 각도의 산성을 수축하는 등 군비를 갖추었고 양호를 경리, 마귀를 제독으로 한 명의 원군 5만 5000도 즉시 출동했기 때문에 일본군은 경상도를 중심으로 맴도는 데 그쳤다. 96년 12월에 고니시군이 부산에 상륙하고 이듬해 1월에는 가토군이 다대포에 상륙하여 양산을 함락하고 서생포에 진을 쳤다.
정유재란 때의 왜군 총병력은 14만 1500으로, 수군도 강화되었다. 왜군은 임진년 당시와는 달리 경상, 충청, 전라도의 완전 점령을 전략으로 하여 전주를 점령한 후 북진할 계획을 세워, 7월 말부터 좌군은 남해, 사천, 고성, 하동 방면에서, 우군은 광양, 순천 , 김해, 창원 방면에서, 가토는 밀양, 초계, 거창 등을 거쳐 각기 전주로 향하였다. 왜군은 황석산성의 싸움에서 고전 끝에 승리를 거두었으나 고령에서 상주목사 정기룡군에 패한 데 이어 직산 싸움에서도 패하여 더 이상 북진하지 못하고 남하하여 순천, 울산 등지의 연해안에 진주하게 되었다. 해전에서는 97년 1월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이 모함에 의해 하옥되고 원균(元均)이 그 후임이 되었으나 7월의 칠천량 해전에서 왜군의 기습을 받아 원균과 전라수사 이억기, 충청수사 최호의 수군이 전멸하였다.
2. 명량대첩
원균이 거느린 조선 수군은 칠천량 해전에서 대패하자, 그해 7월 22일 유성룡 등의 간곡한 건의로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된 이순신은 휘하 군사들의 전열을 재정비하였으나 남아있던 전선(戰船)은 겨우 12척에 지나지 않았다. 이때 일본 수군은 한산섬을 지나 남해안 일대에 침범하고 있었으며, 육군의 육상 진출과 더불어 서해로 진출하려 하였다. 따라서 이순신은 서해 진출의 몰목이 되는 명량을 지키기 위하여 이진․어란포 등지를 거쳐 8월 29일 벽파진(진도군 고군면 벽파리)으로 이동하였다.
일본 수군은 벽파진에 있는 조선수군에 여러 차례 야간 기습 작전을 전개하였으나, 우리측의 철저한 경계망에 걸려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적정(敵情)을 탐지한 이순신은 명량을 등 뒤에 두고 싸우는 것이 매우 불리하다고 판단하여 9월 15일 조선수군을 우수영(해남군 문내면)으로 옮겼다.
다음날인 16일 이른 아침 일본 수군은 명량으로 진입하고 있었으며, 망군(望軍)을 통해 이 사실을 알게 된 이순신은 출전령을 내리고 최선두에 서서 명량으로 향하였다. 그때 명량의 조류는 거의 정조(停潮) 시기였으며 일본 수군의 전선은 133척으로 확인되었다. 이순신은 명량으로 들어서면서 일자진을 형성하여 일본수군의 수로 통과를 저지하려 하자, 일대 혼전이 전개되고 조류는 서서히 남동류로 전류하기 시작하였으며, 일본 수군은 이순신이 타고 있는 전선을 포위하려는 기세였다. 매우 위급한 순간, 이순신은 뒤에 처져있는 거제 현령 안위(安衛)와 중군(中軍) 김응함(金應諴)등을 불려들여 적진으로 돌진하게 하자, 전투는 절정에 이르렀다.
또한 전류하기 시작한 조류는 소수의 전선이 활동하는 조선군에 비하여 많은 왜군을 거느리고 있는 왜군에게 상대적으로 불리하였으며, 협수로에서의 불규칙한 조류 분포로 인하여 서로의 진형과 대오가 붕괴되고 있었다. 격전 중 이순신과 동승하였던 투항 왜인 준사(俊沙)가 적선을 내려다보며 “꽃무늬 옷을 입은 저 자가 바로 안골포 해전 때의 일본의 수군 장수 구루시마(來島通總)다”라고 외치므로 이순신은 김석손을 시켜 그를 끌어올린 뒤 목을 베어 높이 매달자, 이를 본 일본 수군은 사기가 극도로 저하되었다. 이에 전기(戰機)를 잡은 조선수군은 현자총통과 각종 불화살을 쏘면서 맹렬한 공격을 가하여 녹도만호 송여종과 평산포대장 정응두 등 여러 장령들이 적선 31척을 분파하자 일본수군은 퇴주하고 말았다.
이 해전은 이순신이 지휘하는 조선수군이 10배 이상의 협수로의 조건을 최대한으로 이용하여 그들의 서해 진출을 차단함으로써 정유재란의 대세를 조선군에게 유리하게 전개할 수 있게 하였다. 한편, 열세한 병력을 지휘한 이순신은 위장전술로써 피난선 100여척을 전선으로 위장하여 뒤에서 성원하게 하였다는 것과, 철쇄(鐵鎖)를 협수로에 깔아서 적선을 전복시켰다는 기록도 일부 전해온다.
Ⅲ. 양란의 영향
전후 7년간에 걸쳤던 왜란은 조선, 명, 일본 3국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고 특히 싸움터였던 조선은 국토가 황폐화되고 백성은 도탄에 빠졌으며 정치, 경제, 문화, 사회, 사상 등 각 방면에 걸쳐 심각한 타격을 받았다. 따라서 위정자들의 급선무는 전란으로 인한 문물의 파괴, 재력의 탕진을 복구하는 것이었다. 정치, 군사적인 면에 있어서는 비변사의 강화와 훈련도감을 비롯한 군사기구의 개편이 시작되었다.
또한 난중에는 각종 무기가 제작되어 이장손은 비격진천뢰를, 변이중은 화차를 각기 발명하였고 왜의 조총과 명군이 사용한 서양식 대포인 불랑기포도 모조하여 사용하였다. 전화로 인한 농촌의 황폐, 은결의 증가, 국가질서의 문란 등으로 대동법의 실시, 면세전 확대의 방지, 균역법의 시행, 기민을 위한 환곡, 모곡의 회수책 등이 제도화되었다. 한편 혼란한 사회와 민심의 흉흉함을 틈타 이몽학의 난 등 사방에서 일어나는 민란과 함께 시행된 속오군제도, 공명첩의 발행 등은 조선의 신분제도 붕괴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게 하였다. 문화적 손실로는 왜병의 방화로 불국사, 경복궁 등의 건물과 사고에 보관 중이던 역대 왕조의 실록, 서적 등이 소실되고 많은 문화재를 약탈당하였다.
한편 전쟁으로 인한 질병의 만연으로 질병퇴치를 위한 의학서인 《동의보감》이 편찬되었고 사상적인 측면으로는 의병, 승병을 통한 애국심의 발로와 자아반성과 함께 명의 내원에 대한 사대사상이 고조되는 반면에 왜에 대한 재인식과 적개사상이 더욱 강해졌다. 전란 중에 대두하기 시작한 여진의 청나라에 의해 명나라가 망하고 일본에서도 도요토미 대신 도쿠가와의 막부 정권이 들어서게 되었다. 일본은 조선침략의 결과로 조선으로부터 금속활자에 의한 인쇄술을 처음으로 도입하게 되었고 포로로 잡아간 도자기 기술자에 의해 획기적으로 요업을 일으키게 되었으며, 약탈하여 간 많은 서적은 성리학 등 그들의 학문에 크게 기여하였다.
【 정유재란 관련 유적 】
♣ 우수영
조선시대에는 왜구와 접촉이 극심한 전라도와 경상도에 한하여 수군절도사가 상주하는 주진을 각각 두 곳에 설치하였는데, 서울에서 보아 각도의 서편, 즉 우편을 전담하는 주진을 우수영, 동편 즉 좌편을 전담하는 주진을 좌수영이라 하였다.
전라우수영이 설치된 것은 1440년(세종22)의 일이었다. 1432년(세종14) 무안 대굴포에 있던 처치사영(處置使營)이 현재의 목포로 옮겨지고 목포에 있던 병선들이 지금의 우수영인 황원의 주량(周梁)으로 옮겨 지면서 이곳에 목포만호를 두게 된다.
목포로 옮긴 대굴포수영은 다음해 부터 점차 그 본영을 황원으로 이동시키며, 1439년(세종21)에는 목포에 만호진을 개설하고 그 다음해에 본영을 완전히 이곳 주량(우수영)으로 이동시켰다. 주량의 전라수영이 우수영(전라우도수군절도사영)으로 된 것은 성종10년(1479)부터의 일로 전라도 서남해안이 너무 광범위하여 여수에 좌수영이 개설되면서 이곳은 우수영이 된 것이다.
경상우수영은 처음에 거제에 두었다가 1604년(선조 37) 고성(지금의 충무시)으로 각 수영에는 한학의 역학(譯學)과 왜학의 역학을 각 1인 두었다. 1907년 군대 해산령에 의하면 각 도의 수영은 폐영되었으나, 지금까지도 수영이 남았던 곳은 그 명칭과 함께 흔적이 남아있다. 우수영에 소속된 읍진과 병선수는 표와 같다.
당시 성의 둘레는 2,484척, 옹성(壅城)이 4개, 연못이 하나, 우물이 2개이며 태평정이 있고, 동문밖에는 충무공의 승첩비가 있었다.
관원은 전라우도수군절도사와 중군(中軍)이 한명씩 있어 나주, 영암, 진도, 영광, 해남 등을 속읍(屬邑)으로 삼았고 법성포, 군산, 고군산, 위도, 임하도, 고금도, 가리포, 금갑도, 어란포 등을 속진(屬鎭)으로 거느렸을 만큼 규모가 큰 곳이다.
또한 본영(本營)과 속음진의 배 130척을 관할 하였고 복파관, 망해루 등의 정자가 있어 해상을 관망하는 기지로 삼았다. 이곳의 성벽들은 북쪽이 높고 남쪽이 낮은 우수영의 지형에 따라 차이를 보이고 있다.
해안에 접한 남쪽 성벽은 크고 작은 돌들이 틈틈이 쌓아올려진 석축성(石築城)이고 북쪽은 흙을 이겨 빈틈없이 쌓아올린 토축성(土築城)이다. 또한 동벽(東壁)과 서벽(西壁)의 경우 남쪽벽에 연결된 부분은 흙으로 쌓아 올려 튼튼하게 축조했다.
돌로 쌓아 올려진 남벽은 문내면 서외리 문재훈 집에 남아 있는 길이 20m, 높이 1.5m와 선두리 박무림씨 집에 길이 20m, 높이 3m로 남아 있다.
동쪽벽과 서쪽벽의 석축 연결 부분은 거의 도괴되어 흔적만이 남아 있으며, 서쪽벽의 토축은 길이 50m, 하폭 5m, 안쪽높이가 3m, 하폭 5m, 상폭 1.5m이다.
동국여지지(東國輿地志)에 의하면 우수영 성은 4문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현재는 도로로 사용되고 있는 북벽(北壁) 중간부분에 북문 터 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그러나 성내에는 건항(乾降) 17년 임신(壬申) 9월, 가경(嘉慶) 9년 갑자(甲子)년에 세운 우물 건립비와 중수비가 우물과 함께 남아있다.
♣ 명량대첩비
해남군 문내면 학동리에 있는 조선 후기의 명량대첩비. 1688년 세움. 보물 제503호.
비문에 따르면 명량대첩은 이순신이 재기한 직 후 큰 기적을 세운 전공의 중흥이라 일컬으며, 충무공의 용병과 지리(地利)에 뛰어남은 귀신도 감동케하였으며, 또 공의 임난 토적에 있어 결책출기(決策出奇)함은 옛 명장들도 이에 미치지 못할 뿐 아니라 충의의 분발은 해와 달을 꿰뚫는다고 하였다. ‘통제사 충무이공 명량대첩비’의 12자 전액은 김만중의 글씨이고, 문장은 이민서, 비문은 이정명의 해서이다. 비문은 1696년에 쓰여졌으나, 비는 2년 뒤인 1688년 3월 전라우도수군절도사 박신준에 의해 세워졌다.
♠ 그밖의 유적들
[달량진 성지 (북평면 남창마음)]
구전에 의하면 정유재란때 충무공 이순신이 이 성을 이용하여 싸웠다고 하며 이곳에서 삼일간 머물렀다고 전해진다.
달량진은 북평면 남창리에 있었던 수군진으로 강진, 완도, 영암 등을 연결한 해로상의 요충지다.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했던 만큼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37년전 일본이 달량진을 침입한 사건이 발생한다.
달량진 사변 또는 을묘왜변으로 알려진 이 사건으로 강진, 장흥, 완도 일부와 병영이 왜구에게 함락 당하는데 이때 해남성만 왜구의 침입으로부터 성을 지켜낸다. 그로 인해 당시 해남현감이었던 변협은 그 공로로 장흥군수로 승진이 되고 성을 지켜낸 기념으로 심은 나무가 지금 해남군청 뜰에 있는 수성송이다.
(동국여지지)에 의하면 달량진 사변 이전에 달량진은 강진 가리포로 옮겨갔다고 하는데 이때 이곳의 공백을 틈타 왜구가 침입했다고 한다. 달량진 사변후 이곳의 방어상 공백을 메꾸기 위해 달량진하고 가까운 이진에 수군진을 설치하고 남창에는 수군진 대신 남창을 뒀다고 한다.
현재 이진과 남창에는 당시 성의 모습이 뚜렸이 남아있다.
[이진진 성지(북평면 이진리)]
이순신의 난중일기(정유전 8월 20일과 8월 26일)에 의하면 명량 해전이 발생되기 한달 전 이순신은 장흥 회령포에 머물다가 포구가 좁아 이진으로 진을 옮겨 싸웠다고 적고 있다.
이진성의 설치 년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달량진 사변 이우에 설치된 것으로 보인다. 즉 남창에 있던 달량진이 강진 가리포로 옮겨감에 따라 이 지역에 방어 상의 공백이 생기게 되고 이 공백을 틈타 왜구가 침임하기에 이른다. 그러자 조정에서는 다시 이곳에 수군 진을 설치하기로하여 이진에 수군 진을 설치한다.
이진 성은 현재 우리 지역에 남아 있는 성중 보존 상태가 가장 잘되어 있는데 구전에 의하면 이곳에 제주도 출입통제소였고 제주도 군마 및 개인말을 수송하는 곳이었다고 전한다.
[원문리 성지(문내면 원문마을)]
문내면 원문리의 해남-우수영간 18번 국도 양편에 위치한 평지성이다.
왜적의 침입을 막기 위하여 임진왜란 전 원동리 동쪽의 바다와 맞닿는 곳에 토석성을 쌓다고 한다. 이 성문은 우수영내로 들어오는 최초의 문으로 이곳에서 사람의 통행을 제한했다고 하며 구전에 의하며 이 성은 이순신 장군이 제주도에서 돌을 날라다 축성하였다는 전언과 함께 주위에서 기와편 등이 수습되고 있다.
[용정사 (해남읍 용정리)]
용정사는 이순신과 이순신을 도와 용맹을 떨친 유형, 이억기, 이유길, 이계년등 다섯충신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건립된 사우이다. 본래 이순신만을 모신 사우였으나 다른 네사람을 더 추배함으로서 오충신을 모시게 되었다고 한다.
▲ 유형-1597년 해남 현감으로 부임시 정유재란을 만나 통제사 이순신을 도와 명량대첩의 공을 세운 인물이다. 이후 이순신의 뒤를 이어 삼도수군통제사를 역임 하기도 한다.
▲ 이억기-1592년 전라우수군절제사로 부임하고 임란이 일어나자 이순신을 도와 옥포, 한상도 등의 해저에서 적선을 대파한다. 정유재란 때 원균과 칠전량해전에서 싸우다가 순절한다.
▲ 이유길-부친 선경이 임란을 만나 마침 병환중이던 어머님을 모시다가 적병에 의해 목숨을 잃었는데, 이러한 연휴로 17세의 어린 나이로 충무공의 막하에 들어가 정유재란 때 명량대첩에 활약 하였다.
▲ 이계년-임란때 상중인데도 불구하고 의병들을 모아 진주성으로 전격 입성하고 김천익, 최경희 등과 역전하다가 1953년 성이 함락 되자 여러 장수들과 함께 남강에 투신하여 순절한 인물이다.
[표충사 (삼산면 구림리 대흥사내)]
표충사는 임진왜란 때 승병을 중심으로 창의하여 왜적을 물리친 서산대사, 사명당, 뇌묵당등 3대사의 충의를 추모하기 위해 건립된 사우다. 그리고 표충사는 전남의 사우중 유일하게 승려를 배향하고 있다는 점에서 보기 드문 독특한 경우라 하겠다.
1592년에 왜구의 침입이 있자 서산대사는 선조의 특명을 받고 제자인 사명당, 뇌물당등과 함께 승병을 모집하여 왜구와 싸웠으며 1593년에는 명군과 함께 서울 수복의 공을 세우기도 했다.
서산대사가 죽고 그의 유물은 대사의 뜻에 따라 해남 대둔사에 모셔졌다. 스님이 열반한 후로 유물을 보관해온지 185년이 되는 1788년에 대둔사 양지에 사우를 짓고 세분 스님의 영정을 모시였고, 정조 대왕은 서산대사와 그의 제자와 충절을 크게 치하하며 표충사라는 액호를 내려 국가 중흥의 모범으로 삼도록 하였다.
[이유길유허비각 (삼산면 충리)]
이 비각은 이유길의 정유전 명량대첩에서 싸운 공과 1619년 建州출병을 기념하기 위해 공이 살았던 충리에 세운 것이다.
▲ 이유길-17세에 임란을 만나 부친 선경이 병환중인 부친을 모시다가 적병에 의해 목숨을 잃게 되자 복수를 결심하고 17세의 어린나이로 이순신의 막하에 들어가 명량대첩에서 활약한다. 이에 선조는 공의 기상을 장하게 여겨 9품직을 제수하면서 충효라는 2자를 내렸다.
그후 명나라가 후금을 토벌할 때 조정에 출병을 요청하여 建州출병이 결정되자 강흥립과 함께 출병하여 이 전투에서 산하한다.
[삼충사 (옥천면 대산리)]
삼충사는 통천최씨 삼층신을 모신 사우이다.
고려말과 조선초의 무장으로 왜구토벌에 공이 컷던 양장공 최운해 (1347-1404), 정열공 최윤덕,(1376-1445) 임진왜란 때 활약했던 주부공 최산정의 충의를 추모하기 위하여 건립된 것이다.
▲ 주부공 최산정-1570년 무과에 등과하여 수문장을 지내던 중 임진왜란을 만나 의주에서 선조를 호송 하였고 이천전투에서 적병을 사살하고 그들의 식량과 군기를 탈취하여 이를 의주로 보내니 선조가 크게 기뻐하며 軍資監主簿를 제수 하였다고 한다.
왕의 허락을 받아 노모를 받들고자 귀향하다가 적병에 맞은 상청에 독이 번져 금강에서 운명하였다.
[정운 충신문 (옥천면 대산마을)]
이충신문은 임진왜란때 이순신 장군의 막하에서 왜군과 싸우다가 부산 몰운대에서 전사한 정운 장군의 충열을 기리기 위해 선조의 영을 받아 그의 태생지인 대산에 건립된 것이다.
▲ 정운-정운 장군은 옥천면 대산리 태생으로 본관이 하동이다.
어려서부터 貞忠報國의 4자가 새겨진 집 대대로 내려온 칼을 들고 국가에 충성활 것을 다짐 하였다고 한다. 선조 3년(1572년) 무과에 급제하였고 평소 강직하고 원칙적인 성격 때문에 순탄한 벼슬길에 진출하지 못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49세 되던 해에 유성용의 천거로 인해 녹도만호 (현 장흥군)에 임명되니 이때가 임진왜란 바로 한해 전이었다. 정운은 만호로 부임하자 군기와 병선을 점검하여 전쟁에 대비하였다는 것이 난중일기에 나타나고 있고, 이로인해 상관이었던 이순신의 아낌과 칭찬을 받았다고 한다.
[운곡사 (계곡면 신기마을)]
임진왜란때 순절한 임희진, 임자영, 임영길, 임천감, 임식, 임준 등의 충열을 추모하기 위해 건립된 장흥임씨 사우이다.
▲ 임희진-임란이 일어나자 虎자 깃발을 앞세우고 의병을 모집, 영광의 병장 심우신과 더불어 오산과 청회 사이에서 큰공을 세웠다. 1593년 남으로 퇴각하는 적을 추격, 진주성을 입성하여 김천익, 심우신등 여러장수들과 함께 성이 함락되자 남강에 투신하였다.
▲ 임 식-임희진의 종손으로 할아버지인 희진과 함께 진주성 싸움에서 순절하였다.
▲ 임자영-임진왜란때 영남의 여러곳에서 활약하여 많은 공을 세웠고 1593년 적을 쫓아 역전 끝에 순절하였다.
▲ 임영길-임진난이 일어나자 죽음을 맹세하고 동궁저하 막하를 들어가 동궁의 글을 김천익 장군께 전달하고 돌아오기도 하며 1953년 왜군과 싸우다가 순절한다.
▲ 임천감-임진년에 집안 식구듥과 선조를 호송하여 강남에 이르렀다가 다시 동궁을 호송하고 이천으로 가는 도중 적병을 만나 싸우다가 임준과 함께 전사하였다.
[용연사 (계곡면 여수마을)]
흑석산 아래에 위치한 용연사는 정유재란시 충무공 이순신의 막하에서 명량대첩의 공을 세운 김정언, 김정윤 형제를 배향한 순천김씨 사우이다.
김정언, 김정윤 : 정유재란이 발생하자 아우 정윤과 창의하여 해남현감 유형 각하로 들어가 통제사 이순신을 도와 명량해전에서 수훈을 세웠다.
[용지사 (계곡면 용지마을)]
용지사는 정유재란 때 이순신을 도와 명량해전에서 공을 세운 오극신과 임란시 창의하여 큰 공을 세운 오홍적을 배향한 사우이다.
▲ 오극신-임란이 일어나자 아들 계적, 조카 홍적과 더불어 의병을 일으켜 이순신 막하로 들어가 수많은 적선을 격파하는 공을 세웠다. 이에 이순신이 조정에 장겨를 올려 벼슬이 제수되기도 한다. 정유재란시 명량해전에 다시 이순신 막하에서 적병 수십명을 참살하고 아들 계적과 함께 순절하였다. 공의 전사 소식을 들은 이순신은 크게 탄식하였다고 하며 후에 병조참의에 추증되었다.
▲ 오홍적-임란때 창의하여 의주로 피난간 왕의 행재소까기 사재를 털어 식량을 지원 그 공으로 벼슬이 내려지나 나아가지 아니하였다고 한다. 다시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인솔하고 여러 곳에서 적병을 연파하였다. 특히 해남 흑석산 전투에서 적병을 대파하는 큰공을 세워 벼슬이 내려지나 다시 나아가지 않았다 한다.
[영산사 (마산면 화내마을)]
임진왜란때 충청수사로 참전하여 공을 세운 이계정을 위시한 임진왜란때 활약한 원지 이씨 9충을 배향한 사우이다.
▲ 이계정-1차 진주성 전투에 김시민의 바깥쪽 원조군으로 의병장 곽재우와 함께 공을 세웠고, 1593년에는 무주 조방장(茂朱 助防將)이 되어 군비를 튼튼히 하고 김천익, 최경회의 진주성전투 이후 호남으로 진출하는 왜군을 방어한 공으로 1594년 충청수사에 발탁되었다. 1595년 충무공막하에서 3남의 군량을 관할하였고 한산대첩에서 순절하였다.
[노송사 (산이면 노송마을)]
임진왜란 충신인 김해김씨 삼현파 김안방, 김안우, 김선지가 배향되어 있는 사우이다.
▲ 김안방-임란이 일어나자 창의하여 고경명과 함께 금산에서 크게 싸웠다. 그후 정유재란때 명량해전에서 김성원 백진남, 동생 안우 등과 더불어 피난선 수십척을 인솔하고 군량을 수송하여 이순신을 도왔다.
▲ 김안우-정유재란때 형 안방과 함께 명량해전에 참여하여 군량수송과 적선을 대파하는 공을 세웠다.
▲ 김선지-김안방의 장남인 김선지는 1588년 무과에 급제하고 임진왜란시 선전관(宣傳官)으로서 선조를 호종하였다. 그 공으로 곡포만호에 제수되었고 그후 좌부장을 거쳐 보성군수를 지냈다.
[왜군포로수용소 (삼산면 평활마을)]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 수많은 왜군을 사라잡아 가두어 두었던 왜구포로수용소 터이다. 현재 평활리에서 양촌저수지 아래쪽으로 계단식 택지가 그 곳이다.
정유재란이 끝날 무렵 명량해전에서 왜군이 이순신 장군에서 대파되고 남원에 있던 소서행장 부대가 해남을 거쳐 순전으로 퇴각한 점으로 미루어 이곳에 왜군포로수용소가 있었던 것은 더욱 확실시되고 있다.
이곳 주민들에 따르면 1920년까지 양촌저수지 아래둥성에 신분이 뚜렷하지 않은 사람들이 4-5가구를 형성하며 살았다고 하며 왜군포로 후손으로 보였던 이들은 큰일이 있을때마다 의무적으로 나무 한짐씩을 해왔었다는 것이다. 그뿐 아니라 그 사람들은 마을 앞을 곧장 지나가지 못하고 마을 뒷산으로 으레 돌아서 다녔다고 한다.
[성산 만의총 (옥선면 성산마을)]
만의총은 정유재란때 옥천면 성산마을 앞 대교틀 싸움에서 순절한 의병장 윤현, 윤 검형제와 윤륜, 윤신형제 그리고 수백 의병들의 시신을 합장한 묘이다.
만의총은 현재 성산 사거리에서 영춘으로 가는 길 좌우편에 3기가 남아 있다. 그 크기는 집채 만한데 줄 잡아 한 무덤에 2-300명의 시신이 합장되어 있을 것으로 보여 그 싸움이 얼마나 치열하였던가를 짐작케 해준다. 이외도 3-4기의 만의총이 더 있었다고 전하나 현재는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
(호남절의록)에 의하면 대교틀 싸움의 의병장으로 윤현, 윤검, 윤륜, 윤신 등이 활약하는데 윤현, 윤검 형제는 달마산에서 기병하여 이 대교틀 싸움을 거쳐 장흥석대 싸움에서 순절하고 윤륜, 윤신형제는 병치재(옥천과 강진을 넘은 고개)에서 기병하여 대교틀에서 순절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감당리 소나무 (삼산면 감당마을 입구)]
이 소나무가 바로 임진왜란 당시 해남 지역 출신 김인수가 의병을 모집, 훈련시켜 출전시킨 기념으로 심었다는 소나무다. 남평현감과 추파만호직을 지낸 바 있는 김인수는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아들인 정옥, 정벽, 정진과 조카 정서, 창서 등을 그의 동생인 삼도방어사 김인영에게 보내 전란에 참가케 하고 향리 인근에서 의병을 모집, 훈련장을 만들어 군사를 조련시켰다고 한다.
정유재란이 발발하자 의병 1백1명을 파견 그것을 기념하기 위해 1백1수의 소나무를 감당리 입구에 심었다고 전하며 현재 1구루만이 남아있다.
[감당리 우물 (삼산면 감당마을 입구)]
당시 훈련을 받았던 의병들이 식수로 이용했던 곳이고, 지금은 확장되어 크지만 예전에는 조그만한 저수지에 불과했던 신흥 저수지는 말을 씻기고 물을 먹이던 곳이었다고 한다.
< 참 고 문 헌 >
1. 이이화, 『조선과 일본의 7년전쟁』, 한길사, 2000.
2. 이순신 저, 이석호 옮김, 『난중일기』, 예림당, 1996.
3. 전라남도지편찬위원회, 『전라남도지』4집, 전라남도, 1993.
4. 해남문화원․해남군 편, 『명량대첩의 재조명』, 해남문화원․해남군청, 1987.
출처 :문화관광해설가 원문보기▶ 글쓴이 : 해남현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