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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도 시세계
그리움과의 화해와 시대적 성찰
-이영도의 시 세계
민 병 도 (시인)
1. 이영도의 삶과 생애
정운(丁芸) 이영도(李永道)는 1916년 10월 22일 경북 청도군 청도읍 내호리(당시 대성면 내호동) 259에서 출생하였다. 본관은 경주이고 선산군수를 지낸 아버지 이종수와 어머니 구봉래 사이의 1남 2녀중(실제로는 3남 2녀였으나 장남과 3남이 일직 사망)은 막내로 태어났다. 아호는 초기 정향(丁香)으로 쓰다가 정운(丁芸)으로 고쳤다.
아버지가 지방 군수로 집을 자주 비웠지만 할아버지 이규현은 한학과 서화에 능하여 일찍부터 그는 할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천자문과 소학을 배우는 한편 타고난 문재(文才)를 키웠다. 1924년 밀양보통학교에 입학하여 기차로 통학하는 한편 조부가 운영하는 의명학당에서의 공부도 계속하였다. 그의 여러 수필에 의하면 지나친 총명과 곧은 성격이 오히려 조부모의 염려를 사서 더 이상의 객지로 나가서 공부하는 대신 학당의 현창식 선생에게 사숙을 하였다.
이영도의 유년기는 급변하는 주변 상황들 가운데서도 특별한 데가 있었다. 증조할아버지는 망국의 한을 달래기 위해 승복으로 갈아입고 마을 뒷산에 대운암(大雲庵)이라는 암자를 지어 속세를 등졌다. 할아버지 또한 증조할아버지의 정신을 이어 농촌에 신학문을 가르치기 위하여 <의명학당>이라는 사학을 세워서 후진들을 가르쳤다. 할아버지는 이영도의 아버지를 의명학당 1회 졸업생으로 키웠으나 결국은 집안의 기대를 져버리고 일제의 협력자가 되고만 것이다.
부모를 모셔야하는 그의 어머니와의 어린 시절은 아버지에 대한 실망과 원망으로 점철되었다. 상대적으로 조부모가 숭상한 불교와 전통적 가치관에 대한 믿음과 어머니에 대한 사모의 정을 키워준 시간이기도 하였다. 그런 만큼 어린 시절 이영도의 정신을 키운 자양분은 조부모였고 몸을 키운 요소는 어머니였다. 말하자면 아버지를 두고 옳고 그름에 대한 자신의 판단력을 저울질하였으니 운명치고는 유별난 운명이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게다가 경성고등보통학교를 다니면서 문학적 재능을 키워온 이호우 시인이 오빠라는 점도 그를 보다 빨리 정신적으로 올곧게 성숙시킨 요인이었다. 그리하여 자연스레 시조공부에 발을 들여놓았으나 한편으로는 중국 북경대학 유학의 꿈도 버리지 않았다. 하지만 시대 상황이 날로 어수선해지자 조부모의 뜻을 따라 1935년 그는 그의 나이 20세에 대구의 부호인 밀양 박씨의 자제 박기주(朴基澍)와 결혼을 하게 된다. 그러나 신혼의 꿈도 잠시 1936년 10월 딸(박동지, 나중에 진아로 개명) 하나를 얻었으나 원래 병약한 남편의 병간호에 매달리다가 1945년 8월 남편과 사별하게 되었다. 그나마 해방이 남편을 잃은 청상과부라는 슬픔과 충격에서 벗어날 수 있는 용기와 희망을 가져다 주었다. 그는 결혼 전에 쓰다가 덮어두었던 시조노트를 꺼내 들었고 통영여자중학교(1945년 10월∼1953년 5월)를 시작으로 부산 남성여자고등학교(1953년 5월∼1954년 10월), 마산 성지여고(1954년 10월∼1956년 9월) 등 교편생활을 하였다. 이 무렵 그는 딸아이의 양육을 언니(이남도)에게 맡겼다.
이영도는 통영여자중학교 수예선생님으로 부임하면서 그러나 또 한번 생애의 커다란 전기를 맞이하게 된다. 청마 유치환 시인과의 만남이다. 마침 그 학교에는 유치환 외에도 작곡가 윤이상, 화가 전혁림, 시인 김춘수, 초정 김상옥 시인 등 유능한 예술가들이 근무하고 있었다. 그 가운데서도 특히 청마 유치환과의 인연은 장차 두 사람의 삶의 모습을 결정적으로 바꾸어 놓은 계기가 되었다. 청마의 일방적 애정 표현으로 시작된 사랑은 많은 안타까움과 우여곡절을 거듭하며 1967년 청마가 유명을 달리할 때까지 20여 년 간 변함 없이 지속되어 서로의 문학세계 속에 온전히 스며들었다. 청마가 이영도에게 보낸 연서가 5000통에 이르렀고 청마 사후 그 일부가 『사랑하였으므로 행복하였네라』라는 서간집으로 묶어져 세간의 큰 반향을 불러왔다.
통영여자중학교에서의 이러한 분위기는 결국 이영도로 하여금 문학의 길로 접어들게 하여 1946년 5월 ≪죽순≫ 창간호에 「제야」를, 같은 해 8월 제2집에 「낙화」, 「춘소」를 발표하면서 등단하게 된다.
천성이 부지런하였던 터라 시조 쓰는 일에다 아이들 가르치는 일, 기숙사일마저 나서서 열정을 쏟다보니 자신을 추스르는 데 게을리 하여 그는 폐침윤 발병으로 1949년 5월 마산 결핵요양원에서 1년 간 요양을 하게 된다. 이즈음 그는 불교에서 기독교로 개종을 하게 된다. 1954년에는 심신이 지친 상태에서 변화를 꾀하던 중 당시 국어교사였던 초정 김상옥의 추천으로 부산 남성여고로 근무지를 옮겼다. 그리고 당호를 "수연정"이라 짓고 거기서 첫 시조집인 『청저집』을 준비하고 출간하여 시조문단의 중심인물로 떠올랐다.
그러나 그의 삶은 언제나 굴곡이 많았다. 1955년에는 폐침윤이 재발하여 요양을 겸하기 위해 다시 마산 성지여고로 임지를 옮겼고 이번엔 당호를 '닭이 운다'는 의미의 "계명암鷄鳴庵"이라 지어 불렀다. 2년여의 요양 끝에 건강상태가 좋아지자 다시 거처를 부산으로 옮겨 부산여대에서 강의를 시작하였으며 <부산일보>에도 고정적으로 집필을 하였다. 이 무렵 동래 온천장 부근에 주택을 마련하고 당호를 "애일당愛日堂"으로 지었으며 본격적인 "애일당"시대를 열어나갔다. 여기서 첫 수필집 『춘근집春芹集』을 발간하였고 수필가로서도 주목의 대상이 되었다. 1964년에는 부산어린이회관(애성회관) 관장에 취임하였으며 '여성 교양문화 모임'인 "달무리회"를 창설하여 범부산시민운동으로 발전시켰다. 이 같은 사회전반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1966년에는 '말없이 행동하는 문화인에게' 수여한다는 취지의 눌원(訥園) 문화상을 수상하였다. 같은 해에 두 번째 수필집 『비둘기 내리는 뜨락』을 발간하는 등 절정의 문학활동을 펼쳤다.
이영도에게 이처럼 뜨거운 열정의 시간은 그리 오래 주어지지 않았다. 1967년 2월 13일 밤, 부산시 좌천동 685번지 앞길에서 불의의 교통사고로 청마 유치환이 유명을 달리하였기 때문이다. 이 때 그의 슬픔과 충격이 얼마나 컸었는지는 그의 글을 통해서 보면 유추가 가능하다. 그는 수필 「유성」에서 "일찌기 나는 사랑하는 이와 더불어 흐르는 별똥을 향해 아픈 기원을 나누어 왔다. 우리들의 목숨이 같은 날, 같은 시각에 죽어서 멀고도 창창한 영겁의 길을 동반할 수 있기를 빌었던 것이다. 그러나 뜻하지 않은 죽음으로 본의 아닌 배신을 그는 저질렀고 남은 나는 함께 우러르던 그 날의 성좌를 버릇처럼 우러러 섰다"라고 당당히 밝히고 있다.
물론 그의 마음을 아프게 한 죽음은 청마 외에도 사별한 남편이 있지만 청마가 1959년 이영도에게 보낸 다음의 편지를 보면 "우리'란 분명 이들 두 사람을 지칭하고 있음을 알수 있다.
"마지막 죽음의 길을 가는 날에는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당신과 함께 떠납시다. 이것만은, 이 한만은 서로 풀도록 기약합시다. 그렇지도 못한다면 영혼도 눈감을 수 없는 애달픔인 것입니다."
그리고 청마가 남긴 편지들 가운데 일부를 간추려 청마 서간집 『사랑했으므로 행복하였네라』를 발간하였다. 그는 청마가 떠난 부산에 남아 있기가 힘들어서였을까 그 해 9월 서울시 마포구 하수동 95번지로 이사를 단행하였다. 1968년에는 오빠 이호우와 함께 공동 시조집 『비가 오고 바람이 붑니다』(이호우 분-휴화산, 이영도 분-석류)를 발간하였고 1969년에는 청마 서간집의 인세를 기본으로 그의 아호를 딴 정운(丁芸)문학상이 제정되어 시상하였다. 같은 해 딸(박진아)이 철학자 김이준과 결혼하여 함께 살게 되었다.
1970년에는 이영도 시조의 또 하나의 커다란 기둥이었던 오빠 이호우의 갑작스러운 작고로 크게 상심하였고 1971년에는 수필집 『머나먼 사념의 길목』을, 1975년에는 수필선집 『애정은 기도처럼』을 간행하였으며 1974년부터는 중앙대학교 예술대학에서 강의를 맡기도 하였다. 한편 이 무렵 한국시조시인협회 부회장과 여류 문학인회 부회장을 맡기도 하였으나 이에 못지 않게 중요한 업적은 서울생활을 시작하면서 재능 있는 시조시인들을 지도하여 문단에 등단시킨 일일 것이다.
그는 평생토록 몸과 마음이 건강하지 못했다. 일찍이 고생한 폐침윤이 아니더라도 고혈압에 시달려야 했고 두 번씩이나 유서를 써둔 채 조마조마하게 삶을 달래며 살아왔으나 끝내 1976년 3월 6일 12시 5분 뇌일혈로 운명을 달리했다. 3월 8일 이은상 시인을 장례위원장으로 문인장을 치른 뒤 화장을 거쳐 3월 9일 경남 밀양시 상동면 고정리 산 314번지 고향 앞산자락, 친정의 선영에 묻혔다.
글의 서두에 다소 장황하리 만치 그의 삶과 생애를 살펴본 까닭은 그의 삶이 지닌 개별성이 곧 그의 시가 지닌 독자성과 맞물려있기 때문이다.
2. 시 세계
시인은 시를 통해서 이해되어야 한다. 그런 면에서 보면 이영도의 경우 시조 외적인 삶의 차별성으로 인해 시조에서 거둔 성과가 상대적으로 축소된 면이 없지 않다. 물론 고시조는 논외로 하더라도 시조가 본격 문학의 영역으로 재편된 이후로도 김오남, 장정심 같은 여성 시조시인의 주목할만한 활동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시조 안에서 자신의 삶을 담금질하고 시대외 민족의 미래를 진단하고 시조의 형식실험에 그토록 치열했던 사례는 찾아보기가 쉽지 않다. 시조라는 형식질서 안에서 전통의 정서를 수용하고 퇴고를 거듭하여 가장 한국적인 정신과 민족시의 외형을 일체화시키고자한 그의 필생의 노력이 문학 외적인 요소들에 의해서 훼손된다는 것은 지극히 경계하지 않으면 안될 부분이다.
지금까지 적잖은 이들이 그의 시를 연구하고 해석한 사례들을 발표해 왔다. 그리고 그의 작품들 또한 거의 대부분이 밝혀져 있다. 생전에 발간한 『청저집』(1954년, 문예사 간), 『석류』(1968년, 오누이시조집, 중앙출판공사 간), 유고집으로 간행된 『언약』(1976년, 중앙출판공사 간)에 그의 모든 작품들이 수록되어 있다. 그 외에 선집으로 『너는 저만치 가고』(2000년, 우리시대 현대시조 100인선 12, 태학시 간)가 있고 이영도시조전집으로 『보리고개』(2006년, 이영도 30주기기념문집, 목언예원 간)에 모든 작품들이 망라되어 있다. 특히 시조전집에는 개작의 추이와 발표작품의 전체 목록이 게재되어 있다.
1) 일생을 관류한 그리움
이영도 시의 미학은 삶 속에서 조우하는 그리움이다. 그리움은 인간의 내면에 깔린 원초적이고 본성적인 정서이다. 누구라도 이 그리움을 독점할 수 없고 누구라도 이 테제 안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그러나 그것에 대한 자리 매김은 판이하다. 긍정과 부정을 동시에 지녔으되 선택과 의미부여에 따라서 상승작용과 하강작용을 부추기는 촉매가 되기도 한다.
이영도에게 그리움은 대체적으로 한(恨)으로 인도되고 다시 그 한을 극복하는 수단으로도 원용된다는 점에서 긍정적이고 상승적인 측면이 크다. 그리움을 통하여 자기 중심의 감상주의에 빠지는 대신 끊임없이 바깥 세상과의 화해를 시도하는 동기재생의 발판으로 삼았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거기에는 그의 인성을 형성시켜준 유년시절에 겪어야 했던 보편적이지 못한 가족사의 아픔과 상대적으로 그를 감싸준 고향과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 그리고 유복하지 못한 결혼생활과 청마 유치환 시인과의 만남이 가져다 준 숙명적 그리움이 주조를 이루고 있다. 물론 그의 모든 시가 그와의 만남과 연관되어 있지는 않다. 하지만 그의 정신을 관류하는 한 흐름을 감당하고 있는 것만은 부인할 수가 없을 것이다.
①고결한 인간애, 혹은 그 향수
이영도 시의 처녀작은 1945년 12월에 쓴「제야」이다. 그 시기는 남편과 사별하고 혼자된 그가 다시 처녀시절의 습작노트를 끄집어내어 본격적으로 시조공부를 시작한 때였다. 당시의 정황으로만 보면 개인적 슬픔에서 쉽게 벗어나기 힘든 시기였음에도 맨 먼저 다가선 곳이 고향이었다는 점이 눈에 띄는 대목이다.
"아득히 그리워라 내 고향 그 모습이/ 새로 바른 등에 참기름 불을 켜고/ 제상에 제물을 두고 밤새기를 기다리나."(「제야」 네 수 가운데 둘째 수) 결혼을 하면서 고향을 떠난 지 10년이 지났음에도 첫 시가 고향의 어린 시절을 회상한다는 것은 그의 정신에 뿌리내린 고향의 의미를 미루어 짐작할 수가 있겠다.
고향의 여러 모습들 가운데서도 이영도에게 가장 큰 그리움의 대상은 역시 어머니였다.
우러르면 내 어머님
눈물 고이신 눈매
얼굴을 묻고
아, 우주(宇宙)이던 가슴
그 자락
학(鶴)같이 여시고, 이 밤
너울너울 아지랭이
-「달무리」 전문 (『언약』, 1976. 10)
그에게 어머니는 그리움이자 동시에 마음의 빚이었다. 이 땅의 모든 어머니가 다르지 않겠지만 그 이름만으로도 눈물나게 하고 가까이 다가서면 세상의 모든 절망이 일시에 멈춰지는 넓은 대지이자 끝없는 우주 그 자체이다.
이 시는 전체 글자수가 46자밖에 안 되는 단시조의 그릇이지만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큰 내면의 공간을 지니고 있다. 초장에서는 어린 시절의 기억 가운데 지워지지 않는 달무리가 등장한다. 대기 중의 빙점에 의해 빛이 굴절되거나 반사하여 나타나는 자연현상의 하나이지만 그 달무리의 기억 속에는 아버지를 기다리며 뜨개질로 시간을 보내는 어머니의 모습이 있다. 부창부수(夫唱婦隨)니 삼종지덕(三從之德)이니 하면서 언제나 자숙하고 인내하기를 강요받아온 우리네 어머니들의 모습은 항상 눈물에 젖지 않았던가.
중장에는 아픔을 묻으려고 서로의 품속으로 파고들던 한 영상이 애잔하게 그려져 있다. 그러나 그 아픔도, 아픔을 어루만져 준 시간들도 다 사라지고 덩그러니 기억만이 남았다. 종장에서는 추억도, 그 추억을 떠올리게 한 시간들도 모두 벗어나 만남과 헤어짐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 자연의 질서만이 남은 것이다. 어머니에 대한 사모의 마음도 함께 시공을 초월한 것이다. 지극히 개인적인 체험이면서도 우리네 보편적인 정서를 잘 조화시킨 작품이다.
「달무리」와 관련한 어머니에의 연민은 그의 수필을 보면 얼마나 사무치는 그리움인지 이해할 수가 있을 것이다.
"바람둥이 남편은 떠도는 구름일 뿐 층층 시하에 고달팠던 하루가 저물면 어리광으로 기댈 애정 하나 없는 외롭고 허전한 정한(情恨)을 오직 바늘 끝에 맡겨 푸시다가, 밤 깊어 자리에 들면 막내둥이 저의 어깨를 어루만지시며 속으로 내어 뱉던 핏빛 한숨, 그 물기 어린 눈매가 오늘 밤 허공에 높이 후광처럼 저의 서정을 윤색하고 있습니다. 세상에 다시없을 높고 향그러운 이름, 어머니!" (『머나먼 사념의 길목』 가운데 「어머님께」 부분)
한 편 그런 그도 또한 한 딸아이의 어머니였다. 오직 한 사람뿐인 혈육을 키우면서 이번에는 어머니로서의 진한 애정을 작품으로 형상화하였다.
아이는 글을 읽고
나는 수를 놓고
심지 돋우고
이마를 맞대이면
어둠도
고운 애정에
삼가는 듯 둘렸다.
-「단란」 전문 (『청저집』, 『석류』에 재수록)
이 작품은 그의 초기작품으로 1954년에 발간한 『청저집』에 실려 있다. 그럼에도 이 시에서는 「제야」에서 보였던 관념적인 시어나 의고조의 전개가 사라지고 새로운 생활시의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
시적 공간으로 보면 호롱불을 켜둔 작은 방에서 동화책을 읽는 딸아이 옆에서 수를 뜨고 있는 이영도 자신의 스냅사진이다. 시기적으로는 겨우 초등학교 1, 2학년이었을 딸아이를 바라보는 엄마의 사랑이 진솔하게 나타나 있다. 앞서 읽은 작품에서 보여준 어머니에 대한 사모가 그랬듯이 딸아이에 대한 애정 또한 얼마나 절절한 것인가를 느끼게 해 준다.
자칫 절망하기 쉬운 어려운 시기였지만, 그리하여 가까이 어둠이 둘렸지만 엄마와 자식사이에 흐르는 따스한 사랑 앞에서는 삼갈 것으로 믿는다. 여기서 우리는 미래에 대한 희망을 읽을 수가 있다.
그러면서도 이 작품에 깔려져 있는 배경은 우리들에게 또 다른 상상력을 자극시킨다. "심지 돋우"면 "이마"가 "맞대"일 수밖에 없는 좁은 방이 그렇고 "고운 애정"을 "삼가는 듯 둘"러 주는 "어둠"이 그렇다. 이 시가 쓰여진 시기가 가까스로 전쟁의 공포에서 벗어난 힘겨운 시절이었음을 감안하면 한국적 모성애의 단면이 상대적으로 돋보이는 장면이다.
이 외에도 많은 시편들이 고향의 체험에서 확보한 식물성 짙은 감성들로 조형언어와의 조화에 성공하고 있다. 또한 그에게는 그를 둘러싼 환경적 요소 외에도 이호우의 동생이라는 점에서 오빠의 영향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처럼 한 어머니의 딸로서, 혹은 한 딸아이의 엄마로서 갖는 여성 특유의 정감을 격조 높은 시조로 승화시켜냈다는 점에서 아주 다른 색깔과 차별화된 맛을 지녔다고 봐야 옳을 것이다. 이호우를 바위에 비교한다면 이영도는 나무와 비교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②고독과의 화해
언제나 한 점 흐트러짐도 용납하지 않는 단아한 외모를 가꾸었고 다정다감한 성품이었던 만큼 그를 스쳐간 세월은 언제나 적지 않은 상처를 남기기 마련이었다. 끝끝내 떨쳐내지 못한 그 깊은 상처의 이름이 바로 고독이었다. 그 자신도 이미 수필 「봄의 서곡」에서 "의롭고 슬기로움이 항상 고독을 동반하기 마련이듯, 가장 아름다운 것일수록 크낙한 슬픔의 밑받침을 입고 있는 것"이라고 규명한 바 있다.
하지만 그 치명적 고독을 대하는 자세는 보편성과 상투성을 벗어나 독자적인 처방을 지니고 있었다. 고독을 피하려는 소극적인 자세이기보다는 화해하고 극복하려는 적극적인 자세를 취한다는 점에서 보다 다양한 양태의 심상을 작품 속에 남겨놓지 않았나 생각된다.
어루만지듯
당신
숨결
이마에 다사하면
내 사랑은 아지랑이
춘삼월(春三月) 아지랑이
장다리
노오란 텃밭에
나비
나비
나비
나비
-「아지랑이」전문 - (『석류』, 1968)
이 시는 이영도의 전성기 작품이다. 이 작품은 그러나 발표 당시 세간의 많은 주목을 받았다. 우선은 형식질서를 전혀 손상시키지 않고도 자유시 이상으로 자유로운 배행에 주목하였고 나아가서는 자유시의 전유물처럼 여겨지던 회화성을 도입하여 마치 한 폭의 그림을 보는 듯한 공간구조를 시연하여 시각화에 성공하였다는 점이 그랬다.
행간에 나타난 '당신/ 숨결'이나 '내 사랑'과 같은 시어만으로 좁게 해석하면 이 시는 개인적인 사랑의 체험에서 오는 감사나 그 사랑을 이루게 해준 자연에 대한 고마움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이영도가 지칭하는 '당신 숨결'은 만물이 소생할 수 있도록 따스한 온기를 뿜어주는 신(神)의 섭리라는 해석이 타당하다. 신의 은총 위에 힘겨웠던 겨울이 가고 맞이한 봄, 아지랑이처럼 아른거리기만 하는 '내 사랑'을 탓하기보다는 아른거리는 '아지랑이'의 시간에 뒤따라 오게될 운명으로 눈을 돌린다.
거기에는 무작위로 다가오는 장다리 노란 텃밭이 있고 나비들이 짝을 이루어 날아가고 있다. 지극히 현실적인 상황에 포커스를 맞추면서도 무릉이 아니면 만날 수 없는 화면을 불러들이고 있다. 일종의 대리만족이며 자신의 비관적 처지를 완화시키는 카타르시스적 화해라 하겠다. 결과적으로 이 시는 시조라는 형식이 결코 지나간 시대의 유물이 아니라 호흡의 절제와 율격의 체득여하에 따라서는 자유자재할 수 있다는 점을 입증해 주었다.
반면에 자신의 실체적인 그리움의 정서를 진솔하게 노래하여 공감대를 넓히고 주목을 받은 작품들도 많다.
①그대 그리움이
고요히 젖는 이 밤
한결 외로움도
보배냥 오붓하고
실실이
푸는 그 사연
장지 밖에 듣는다.
②오면 민망하고
아니 오면 서글프고
행여나 그 음성
귀 기우려 기다리며
때로는
종일을 두고
바라기도 하니라
정작 마주 앉으면
말은 도로 없어지고
서로 야윈 가슴
먼 창만 바라다가
그래도
일어서 가면
하염없이 보내니라.
①은 「비」 전문이고 ②는 「무제 1」 전문이다. 두 편 모두 『청저집』에 실린 작품으로 비교적 초기 시에 해당된다. 30대 중반의 나이에 겪어야하는 개인적인 사모의 심사치고는 너무나 애잔할 정도로 소극적으로 묘사된 작품들이다. 어쩌면 위선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우리네 전통방식의 그리움과 정서가 닿아 있어 읽는 이로 하여금 연민의 정을 배가시킨다.
「비」의 경우, 비가 내리는 밤에 잠을 이루지 못하고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는 모습이 진솔하고 정갈하게 잘 표현되어 있는 작품이다. 시적 화자인 나와 하나가 된 비가 들려주는 사연을 듣고 있노라면 "외로움도/ 보배냥 오붓하"게 느껴지는 것이다. 기다리는 마음이야 안타깝지만 그러나 기약할 수는 없지만 그 날이 있기 때문이다. 나직이 내리는 빗소리에서도 영성을 읽어내는, 이영도다운 사모의 자세가 어떤 것인지를 짐작하게 해 준다.
「무제 1」 역시 실체적 체험 안에서 얻은 심경의 변화가 마치 동영상을 보듯 잘 묘사되어 있다. 가장 큰 감동의 요인은 체험에서 오는 솔직함이라 했던가. 그리워하고 함께 하고자하는 본성적인 감정은 신이 생명체에게 준 고귀한 선물이다.
하지만 "정작 마주 앉으면/ 말은 도로 없어지고// 서로 야윈 가슴/ 먼 창만 바라다가" 보내야하는 사랑을 체험해보지 않으면, 그리하여 현실적 장애로 인한 사랑의 아픔을 숙명으로 승화시키지 못하면 "하염없이 보내"지는 못할 것이다.
좋은 시는 침과 같고 약과 같은 기능을 지녀야 한다. 스스로 해소하기 힘든 불편을 풀어주고 아픔을 치유해 주어야 한다. 그러므로 아무리 위급한 상황을 맞아도 시인에게 지나친 흥분과 속단은 금기사항이다. 그것이 자신의 경우라면 더더욱 그러할 것이다. 하물며 그 아픔이 마음의 영역이라면 더 말할 나위가 없다.
그런 점에서 그리움의 정한을 푸는 이영도의 자기 조절법은 분명하다. 황토흙물을 가라앉히듯 자신의 남달리 예민한 감성을 가라앉히고 또 가라앉혔다. 그리하여 흙의 흔적마저도 사라진 지장수를 만들었다. 그의 시조가 정제미의 극치를 이뤄낸 것은 더 이상 걸러낼 것이 없고 더 이상 정갈할 수 없는 자기정화의 과정이 있었기에 가능하였다.
2) 시대에 대한 진단, 혹은 역사적 고발
이영도 시의 출발은 자신과 자신을 둘러싼 주변 환경을 돌아보는 것으로부터 출발하였다. 그의 초기 시 10편을 발표순서대로 적어보면 「제야」,「낙화」,「춘소」,「먼 생각」,「맥령」,「병고」,「먼 등불」,「제승당」,「세병관」,「노을」등인데 대체로 자신과 주변을 돌아보는 모습으로 자신의 자리 매김에 다름이 아니다. 그 같은 접근은 바람직한 자기규명의 한 방법이겠지만 이영도의 시각은 시간이 지날수록 보다 근원적인 문제이거나 사회상을 겨냥하고 있다는 점에서 차별화 된다.
사흘 안 끓여도
솥이 하마 녹 쓸었다
보리 누름 철은
해도 어이 이리 긴고
감꽃만 줍던 아이가
몰래 솥을 열어보네.
-「보리 고개」 전문 (1946년 12월 『죽순』 3집에 첫 발표)
이 시에서 말하는 '보리 고개'란 우리민족이 외세의 핍박에 시달리며 굶주림에 허덕여야 했던 시대, 그 중에서도 가장 힘겨웠던 시기를 상징적으로 일컫는 말이다. 이 시가 지어진 시대는 1946년으로 일제침략으로부터 해방된 바로 그 이듬해이다. 아직 우리 정부가 수립되기 전인 미군정 시대에 우리 민족이 겪어야 했던 처연한 모습의 일단을 이 시는 잘 드러내 주고 있다.
보리 누름 철은 그야말로 풀뿌리로 연명해야 하는 가장 힘겨운 시기이다. 가을 추수에서 얻은 양식은 이미 바닥이 나고 아직 보리는 채 익지 않아 아침마다 앞다투어 감나무 밑으로 감꽃을 주우러 갔다. 주운 감꽃을 실에다 꿰어 약간씩 마를 때까지 기다렸다가 허기를 채우던 그 시절 아이들의 모습이 너무도 생생하게 그려져 있다. 혹시나 싶어 이미 양식이 떨어져 녹이 슬도록 버려 둔 가마솥을 열어보는 그 힘겹던 시절이 마치 흑백사진처럼 선명하다. 그만큼 안타까운 시대상황을 바라보는 그의 눈이 예리하고 포근하다.
이「보리 고개」가 처음 발표될 때는 「맥령麥嶺」이라는 제목 하에 2수로 되어 있었으나 「석류」에서는 단수로 고쳐서 발표하였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것은 마치 고발성 시사다큐멘터리 같은 「보라 고개」가 그의 초기 작품이라는 점이다. 그는 우리의 관념적 인식처럼 결코 자아독백형 순정시를 쓰다가 사회로 눈을 돌린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현실을 직시하는 시정신의 준열성이 남달랐던 것이다.
시인의 시대적 사명 가운데는 현실에 대한 정확한 진단이 필수적이다. 물론 그 진단에 따른 정확한 처방전이 내려진다면 바람직하겠지만 많은 경험과 시행착오를 겪은 후에나 가능한 일이다. 우선은 오진을 하지 말아야 한다. 오진을 피하기 위해서는 순리를 따르는 안목을 지녀야 한다. 그 안목 안에는 보편적 가치가 들어 있고 민족관이나 역사관도 들어있을 것이다.
이영도는 여러모로 탁월한 안목을 지녔다. 비록 그의 삶이 특정한 양태로 비쳐져 시대정신을 진단하고 처방하는 역량이 가려진 게 사실이지만 동시대에 활동한 다른 시인들에 비해 차별화 된다. 그런 관점에서 주목할 작품으로 「진달래」와 「애가」등을 들 수 있다.
너는 내 목숨의 불씨
여밀수록 맺히는 아픔
연련히 타는 정은
연등(煙燈)으로 밝혀 들고
점점이
봄을 흔들며
이 강산을 사루는가
-「진달래 -조국에 부치는 시」 3수중 첫 수 (『언약』, 1976 )
4·19를 노래한 또 다른 「진달래」와 달리 이 시는 남북 분단의 조국현실이 지닌 아픔을 노래하고 있다. 봄이면 이 강산 어느 산에나 흔하게 피는 진달래를 '연등'으로 환치하여 시적 화자가 갈구하는 평화와 통일의 세계를 꿈꾼다. 비록 지금은 "여밀수록" "아픔"만 맺히는 현실이지만 마치 약손처럼, 등불처럼 남북을 동시에 쓰다듬고 지나가는 '진달래'는 "세월이 어두울수록/ 밝혀/ 뜨는 언약"이 아니겠는가. 여기서 '진달래'는 재생과 환생의 이미지를 지닌 연등과 하나됨으로서 조국에 대한 시인의 깊은 발원(發願)을 나타내고 있다.
특히 마지막 수에서 "석문 밖/ 북녘 하늘은/ 꽃샘만이 설렌다"라고 북녘에 대한 연민을 안타까움으로 나타내었다. 이처럼 이영도의 일반적 이미지인 개별적 정한과는 판이한 이 작품도 엄밀히 관찰하면 또 다른 '그리움'의 하나다. 다만 그의 삶이 건너온 힘겨운 시대사에 비추어 볼 때 결코 외면할 수 없는 민족사적 그리움이며 진단이다.
③눈에 포탄을 박고 머리는 맷자국에 찢겨
남루히 버림받은 조국의 어린 넋이
그 모습 슬픈 호소인 양 겨레 앞에 보였도다.
④신 벗고, 탑 앞에 서면
한 걸음 다가서는 조국
그 절규(絶叫) 사무친 골엔
솔바람도 설레어 운다.
푸르게
눈매를 태우며, 너희
지켜 선 하얀 천계(天啓)
시 ③은 '-고 김주열군에게'라는 부제가 붙은 「애가哀歌」 3수중 첫 수이고 ④는 '-사월 탑앞에서'라는 부제가 붙은 「천계天啓」 전문이다. 이름을 가리고 이들 시를 보면 이영도의 작품이라고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사뭇 격정적이고 피를 뜨겁게 한다. 작품을 쓴 시차가 크지만 분명하고 단호하다.
「애가」는 3·15 마산의거 때 경찰에 의해 희생당한 김주열의 죽음을 애도한 작품이다. 김주열은 1960년 당시 마산상업고등학교 1학년 학생이었다. 그 해 마산에서 3·15 부정 선거를 규탄하는 학생시위에 참가하여 행방불명이 되었는데 약 한 달 뒤인 4월 10일, 최루탄 파편이 머리에 박힌 채 마산 앞 바다에 시체로 떠오른 것이다. 이에 격분한 학생들의 분노가 전국적으로 확산됨에 따라 4·19의거의 도화선이 되었다. 조국의 민주화과정에서 꽃다운 목숨을 잃게 된 안타까움과 정부의 폭압에 대한 질정(叱正)을 나타낸 작품이다.
참으로 놀라운 용기가 아닐 수 없다. 그것도 어린 학생들의 순수한 정의감을 총칼로 제압한 독재정권 아래서 이처럼 들어내놓고 꾸짖은 문학인이 얼마나 있었던가. 우리가 이영도 시조를 다시 읽어야 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천계」 역시 조국의 민주화와 정의를 향해 목숨을 바친 4·19 희생자들을 향한 곡진한 추모의 정이 담긴 작품이다. 지난 날 이영도가 보여주었던 개인적 그리움의 테두리에서 벗어나 민족과 조국에 대한 사랑으로 관심이 확장되었음을 이 시에서도 보여주고 있다. 현실에 대한 참여라기보다는 역사에 대한 참여이며 정의에 의한 진단이라 하겠다.
3) 개작과정에 나타난 시정신
이영도는 밖으로 드러난 단아하고 기품 있는 외모 못지 않게 자신의 시에 대해서도 시종일관 엄격했다. 함부로 시를 발표하지도 않았지만 설사 발표한 시라 할지라도 몇 번이고 수정을 거듭하였다. 몇 수씩 통째로 파기하기도 하고 토씨 하나를 두고 몇 년씩 고심하기도 하였다. 시의 소재나 주제, 그리고 전개과정에서 드러난 시정신과는 별도로 이러한 개작과 퇴고, 첨삭의 형태를 통해서도 그의 시에 임하는 정신성은 치열함을 나타내었다.
이영도는 생애를 통틀어 167편의 시를 발표하였다. 그가 남긴 시집은 『청저집』, 『석류』, 그리고 유고집인 『언약』 등 3권인데 여기에 실린 전체작품을 합치면 204편이다. 그러나 그 가운데 37편은 두 번씩 중복으로 게재하였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1946년 ≪죽순≫ 창간호로부터 『청저집』 이전에 발표한 작품이 21편이었는데 그 가운데 5편(「먼 등불」, 「낙화」, 「가는 길」, 「너 노래」, 「등대」)을 제외하고 16편만 『청저집』에 실었는데 선집격인 『석류』에는 그 16편 가운데도 4편(「낙화」, 「폭포」, 「춘소」, 「노을」)을 제외시켰으니 초기시의 절반을 스스로 버린 셈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1968년 오빠인 이호우 시인과 2권 합본 시집으로 출간한 『비가 오고 바람이 붑니다』의 이영도 분 『석류』에서는 『청저집』에 실린 신작 44편 가운데서도 25편만 재수록하고 19편을 제외시켰다. 심혈을 기울여 이미 발표까지 한 자신의 작품을 버리는 일은 각오를 넘어선 결단이 필요하다. 한데 그는 이 같은 일을 평생토록 반복하였다.
개작과정은 더욱 더 집요하고 치열하다. 그는 초기 발표상태로 그냥 둔 작품이 거의 없을 정도로 퇴고에 퇴고를 거듭하였다. 제목을 바꾸는가 하면 세 수를 두 수로, 두 수를 단 수로 바꾸고 몇 년을 두고 자구를 수정하였다. 이 같은 그의 개작은 물론 완벽주의를 지향하는 성격에서 기인하겠지만 오빠인 이호우의 영향 또한 적지 않았으리라 여겨진다. 이호우 역시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많은 퇴고와 개작으로 정평이 나 있다. 이러한 자세는 시인이 갖추어야 할 가장 기본적인 자세이겠지만 그렇게 일반화되어 있지 못하다.
이영도의 개작과 관련해서는 보다 체계적이고 본격적인 연구가 필요하겠지만 다만 여기서는 아주 작은 한 사례를 소개하는 것으로 마무리하겠다.
대구에서 발간된 1946년 12월호 ≪죽순≫ 3집에는 '-병술년 어느 봄날'이라는 부제가 붙은 「맥령麥嶺」이 발표되었다. 2수 1편으로 된 작품을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사흘 안꺼린는데 하매 솥에 녹이 씃나
보리 누름ㅅ철은 해도어이 이리긴고
감꽃만 줍든 아이가 몰래 솥을 열어보네
쉰길 강물보다도 한끼니가 어려워라
고국을 찾어온 겨레 몸둘 곳이 없단 말이
오늘도 밥얻는 무리속에서 새얼굴이 모인다.
맞춤법과 상관없이 당시의 표현을 원용하였지만 '병술년 어느 봄'이면 1946년 봄이다. 해방의 기쁨도 잠시 밥을 얻어서 목숨을 지탱해야하는 당시의 암울한 정경이 눈에 선하게 다가온다. 첫 수에서는 보리 고개를 극복해 나가는 정황이 영상 메시지처럼 그려져 있고 둘째 수에서는 시사비판이 곁들여진 보다 큰 시대상이 그려져 있다. 그런데 『청저집』에는 둘째 수 초장을 바꿔서 게재하였다.
"쉰길 강물보다도 한끼니가 어려워라"를 "한 끼 건너기가 강물보다 어렵던가"로 바꾸었다. '쉰길 강물'에 맞추어졌던 초점이 '한 끼 건너기'로 바뀐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바꾸고 고심을 해도 두 수간의 조화가 원만하지 않다고 생각했었던지 『석류』에서는 둘째 수를 아예 지워버리고 지금과 같은 단수로 고쳐버렸다. 그리고 배행도 아주 다른 보습으로 바꾸었다. 최초 발표로부터 20년이 지나서 본 모습을 찾은 것이다. 비록 「보리 고개」 한 편을 예로 들었지만 그가 지닌 정형시 정신을 가늠할 좋은 잣대가 될 것이다.
「보리 고개」에서 보는 바와 같이 『청저집』이후 이영도는 배행에 관한 많은 고심을 한 흔적이 역력하다. 그것은 창사(唱詞)였던 고시조에서 필기문화시대를 거쳐 인쇄문화시대에 걸맞은 변화, 즉 시각적 조화를 염두에 두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3. 문학적 성과
어떤 면에서 이영도는 문학적 성과 면에서 상당부분 객관성을 침해당하는 면이 없지 않았다. 그의 시조가 확보한 시대사적 성과나 준열한 시정신의 우월성에도 불구하고 인간 이영도가 지닌 삶의 차별성으로 인해 정당한 평가를 제약받아온 것이 사실이다. 그러기에 '나는 감히 단언한다. 우리 고시조에 황진이가 있다면 현대시조에 이영도가 있다고'(김동준, 『시조문학론』) 문학 외적인 삶에 초점이 맞춰지거나 '이영도는 정한(情恨)의 시인으로, 그의 오라버니 이호우가 절벽처럼 버티어선 거부(拒否)의 시인이었다면, 그는 어스름에 타는 목련처럼 한향(寒香) 속에 젖어 있는 시인이었다' (정완영, ≪한국문학≫ 1976년 5월. 정운 추모특집에서)는 식의 가족과도 비교되곤 하였다.
황진이와 비교되거나 이호우의 영향을 거론한다고 해서 결코 이영도 시가 평가절하 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선입관으로 인해 독자적 가치가 훼손당할 개연성은 항상 열려있다는 점이다.
이영도 문학의 성과는 우선 생활 속에서 찾은 전통적 민족정서를 시로 승화시켰다는 점이고 다음은 개인적 정한의 정서를 보편적 시어로 환치시킴으로써 시조의 현대화에 기여하였다는 점일 것이다. 그리고 또 한 가지는 시대와 시대의식에 대한 간단없는 진단으로 시조의 영역을 획기적으로 확장시킨 점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이 부분은 예의 그 감성비평에서 벗어나 앞으로는 본격적인 연구가 이루어져 민족문학의 위상을 제고하고 시조문학의 방향성을 열어나가는 자료로 삼아야 할 것이다.
이영도의 삶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그에 대한 주관적인 평가는 비교적 이원화되어왔고 앞으로도 다양할 것이다. 다만 여기서는 그에 대한 몇몇 기억들을 통하여 이해를 돕는 잣대로 삼고자 한다.
이은상 시인은 "이영도는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다정다감한 여인이었다. 그러나 그보다는 맑고, 고요하고, 격조 높은 시를 쓰고, 시를 이야기하고, 또 시를 생활화하고 간 여인이었다고 하는 것이 오히려 그의 참모습을 전해주는 가장 적절한 말"(이영도 시조집, 『언약』 책머리에, 중앙출판공사, 1976.)이라고 밝히고 있다.
고두동 시인은 "정운은 고독이란 불행 때문에 오히려 그 고독을 인고하고 극복하고 승화시켜 남달리 피나는 정한의 시를 많이 남겼다. 역경이 오히려 값어치 있는 생활을 안겨다준 셈이다"(이영도 추모특집 <청초와 재화의 여인상>에서, 《한국문학》 1976년 5월호)라고 회고하였다.
소설가 이주홍의 표현을 빌리면 "'마지막으로 남았다가 간 조선여인'. 이렇게 말하면 정운 이영도 시인의 모습을 얼마쯤 그려진 것이 될까? 그 새첩한 자태와 그 깔끔한 성격이 아무래도 현대인 속에서는 만나기가 어려운 여인이었기 때문이다." (이주홍의 수필 <정운생각>에서, ≪죽순≫ 1979년호)라고 기억하고 있다.
지금까지 이영도의 삶과 시력을 일별해 보았다. 언제나 한복차림으로 한국적 전통과 문명 비판적 가치관을 함께 아우르며 작품 속에 낱낱이 배태시켜온 그의 삶은 시보다 더 시적이었고 시인보다 더 시인적이었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그의 삶이 지닌 개별성으로 인해 지금까지 그의 시조는 객관적 평가의 공정성을 침해받아왔다. 이를테면 그의 시조가 거둔 성과, 즉 정형시 형식질서를 가장 현대적으로 승화시킨 점이나 동서문화의 대립양상 속에서 한국적인 정신의 가치를 지향한 점과 시대의 아픔을 역사적인 관점에서 성찰한 점은 이제 그의 삶과 분리되어야 한다. 그리하여 이영도의 시정신이 새로운 시조의 미래를 향한 눈부신 길라잡이가 되어야 할 것이다.
이영도 연보
1916년 10월 22일 경북 청도군 대성면(현재 청도읍) 내호동 259번지에서 선산군수였던 아버지 이종수(慶州 李鍾洙청)와 어머니 구봉래(具鳳來) 사이의 1남 2녀중 막내로 태어남. 시인 이호우(李鎬雨)의 누이.
1924년 밀양보통학교에 입학하는 한편 조부(李圭晛)가 세운 의명학당에서 수학. 대구여자고등 보통학교 중퇴.
1937년 대구시 인교동 명문 부호 박기주(朴基澍)와 혼인.
1938년 10월 10일 딸 박동지(뒤에 박진아로 개명) 출생
1945년 8월 10일 남편 박기주 위궤양으로 사망.
1945년 12월 첫 시조 「제야」를 써서 1946년 5월『죽순』 창간호에 발표.
10월부터(53년 5월까지) 통영여자중학교 교사로 근무
1945년 10월(∼1953년 5월) 작곡가 윤이상, 시인 유치환 등이 근무하던 통영여중 교사로 부임.
1949년 5월(∼1950.6) 폐침윤 발병으로 마산 결핵요양원에서 휴양. 이 무렵 불교에서 기독교로 개종.
1953년 5월(∼1954년 10월) 부산 남성여고 교사로 부임. 사택에 기거하면서 당호를 '수연정'으로 사용함.
1954년 첫 시조집 『靑苧集』 발간.
1954년 10월(∼1956년 9월) 폐침윤 재발병으로 휴양 겸 마산 성지여고로 옮김. 당호를 '계명암'으로 사용.
1956년(∼1959년) 부산여대 강사로 취임하고 동래 온천장 부근에 거처를 마련, 당호를 '애일당'이라 부름. 이 무렵부터 시조창작활동을 왕성하게 함.
1958년 첫 수필집 『春芹集』 발간.
1960년 어머니 시조모임인 <달무리>회 결성.
1964년 5월(∼1967년 10월) 부산 어린이집 관장으로 부임.
1966년 수필집 『비둘기 내리는 뜨락』 발간. 제8회 눌원문화상 수상.
1967년 9월 서울 마포구 하수동 95-10으로 거처를 옮김.
1968년 4월 서울 마포구 하수동 95-2로 이사.
1968년 오빠 이호우와 두 권으로 된 오누이 시조집 『비가 오고 바람이 붑니다』 발간. 이영도 시집편은 『석류』.
1969년 5월 <정운시조문학상> 제정. 딸 진아 씨 철학자 김이준과 결혼.
1970년 1월 6일 오빠 이호우 시인 급서(急逝).
1970년 서울 마포구 서교동 438-7호로 신축 이사.
1971년 수필집 『머나먼 사념의 길목』 발간.
1974년 중앙대학교 예술대학 강사 취임.
1975년 한국시조작가협회 부회장, 한국여류문학인회 부회장 피선.
1976년 수필집 『애정은 기도처럼』발간.
1976년 3월 6일 12시 5분 뇌일혈로 사망.
1976년 3월 8일 문인장 거행. 장례위원장 이은상 시인, 조사(弔詞) 구상 시인.
1976년 3월 9일 경남 밀양군 상동면 고정리 산 31번지 선영에 안장.
1976년 유작 수필집 『나의 그리움은 오직 푸르고 깊은 것』과 유작 시조집 『언약』 발간.
1986년 자유문학사에서 발췌한 수필집 『인생의 길목에서』 발간.
1996년 부산 금정산 공원에 시비가 건립됨.
2003년 고향 청도군에서 정운시조문학상을 승계한 <이영도시조문학상>이 제정됨.
고향의 비파강 강둑에 <오누이시조공원>이 조성되어 시비가 건립됨(달무리).
2006년 30주기를 맞아 고향 청도에서 <이영도문학의 밤> 행사가 열리고 제20회 이영도시조문학상이 수여됨.
2006년 이영도 시조를 망라한 이영도시조전집 『보리고개』 발간(목언예원).
2007년 제21회 이영도시조문학상과 아울러 제1회 이영도시조문학상 신인상이 제정되어 시상됨.
2008년 제22회 이영도시조문학상과 제2회 이영도시조문학상 신인상이 시상됨.
첫댓글 정운의 작품세계를 소상히 알 수 있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청도문학신문 '오누이 시조작가' 방으로 스크랩하여 갑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