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석 유영모선생님에 관한 internet자료들을 모아 보았읍니다. 다석선생의 전문적 web site가 없음이 아쉽습니다.)
유영모 柳永模 서울 (1890 ~1981) 교육자·종교인.
호는 다석(多夕). 어려서 한학(漢學)을 수학했으며, 1905년 기독교에 입교하고 경성일어학당과 경신학교를 수료했다. 1910~12년 오산학교 교사로 있다가 1912년 일본의 도쿄[東京] 물리학교에 유학했으며 종교적 신념에 의해 도중 귀국했다. 1921년 오산학교 교장으로 1년 재직했으며, 1928년에는 이후 35년간 지속된 대한기독교청년회연맹(YMCA) 성경연구반의 지도를 받았다. 1942년 〈성서조선〉에 발표한 글이 문제되어 종로경찰서에 구금되었다. 1955년 이후 〈다석일지〉를 썼으며 〈노자〉를 국역하기도 했다. 그는 톨스토이에 깊은 영향을 받았으며 무교회주의적 입장을 고수했다.
얼사람 人子
하나님은 제나 없는 하나(전체)로 오직 하나 (大我無我一唯一)
참 하나님은 잡신이 아닌 영원이요 무한이라 (眞神不神恒是恒)
영원한 한님은 오직 절대존재로 고요해 (恒一唯是絶對定)
시새우지 않고 바라지 않아 자유로운님 (不猜無求自由郞)
(1957.8.23)
깨달은 이(크리스천) 基督者
정중한 기도는 성령을 숨쉼이요 (祈禱陪敦元氣息)
찬송의 반주는 튼튼한 맥박의 울림 (讚美伴奏健脈搏)
옳고 극진한 먹거리 감사는 날로 바로 먹기 (嘗義極致日正食)
하늘 제사를 참 잘 밝힘은 밤에 맡기고 잠 (諦誠克明夜歸託)
(1956.12.8)
얼나를 모신 마음 基督心
가고 서는 제나의 삶은 꿈, 거짓, 헛뵘이라 (自行自止夢弄幻)
웃님 뜻에 살며 죽도록 밝히고, 살피고, 깨닫자 (命生命死覺省梧)
탐욕을 채우고 음란에 빠져 나를 끝장내랴 (貪厭淫淪沈沒我)
밥을 잊고 고디를 맵게 가져 제나를 불살라 (忘食貞烈炎存吾)
(1956.12.11)
http://my.netian.com/~cbosn/
서구 기독교 도입 초기부터 근본주의 신학과 보수주의적 성향을 지닌 선교사들에 의해 배제되어왔던 우리의 고귀한 전통 종교들은 선교 114년을 맞이하는 한국 개신교 내에서 여전히 외면당하고 있고, 영성적 측면에서도 신학적으로 신앙적으로 그 뿌리를 캐내어 명확히 입장 정리를 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라 할 수 있겠다. 그나마 1960년대에 토착화 신학이라는 주제아래 한국의 문화-사상사에 깊이있는 논의를 처음으로 주도해왔던 감신에서 조차도 1992년에 있었던 현대판 마녀사냥! 종교재판의 회오리를 통해서 보여주듯 아직도 한국 개신교의 교권주의의 힘이 얼마나 학문의 자유와 신학함의 양심을 재단하고 상처를 주는가를 가늠하는 한국 개신교 신학과 신앙토양의 바로미터가 되어주고 있다. 이처럼 한국 개신교의 신학적 풍토가 척박하고 답답한 현실 속에서 나는 또 다시 최제우, 김재준 목사, 문익환 목사, 함석헌 선생과 같은 분들을 마주 대할 때 느꼈던 거대함과 존경심, 가슴 설레임을 동일하게 다석 유영모 선생의 삶과 사상 앞에서 느끼게 된다. 그리고 우리 동북 아시아의 핏줄 속에서 이처럼 훌륭한 선생이 태어나 사상적으로 우리의 전통종교와 기독교 간의 깊이있는 통찰과 대화를 통해 우리의 정신사에 큰 영향을 끼치고 있다는 사실에 새로운 자긍심을 가지게 된다.
특히, 그가 보여준 그리스도교의 신앙이해는, 아우구스티누스, 아퀴나스, 칼빈, 루터, 슐라이에르마허, 바르트, 브루너, 틸리히, 니버 등으로 이어지는 서구 신학자들의 그리스도교 사상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거나 아니면 오히려 그들의 사상을 훨씬 극복하고 있다는 점에서 제도권 목회의 답답한 현실에서 느꼈던 감정과는 달리, 나는 한국에서 신학함의 자부심을 느끼게 한다. 여기서 나는 그의 사상의 특징 중 몇 가지 요소에 주목해본다.
첫 번째 특징은 '열려진 믿음'이다. 그는 절대적 하나인 하나님께 가는 여러 길 중에서 자신이 중생을 체험한 그 길만을 절대적으로 인정하거나 설득시키려 하지 않았다. 즉 그는 유교·불교 등의 여러종교를 통해서도 하나님을 만날 수 있고, 더욱 중요한 것은 깨달은 것과 깨달은 자신의 삶의 자세가 내 안에 내재하면서 동시에 초월해 계시는 하나님을 찾고 그 길을 행하는 것에 중심을 둠으로써 신앙의 궁극성에 이를 수 있는 길을 전면 개방하였다는 점이다.
그의 두 번째 사상적 특징은 '내재적 초월 신앙'이다. 많은 종교가 형식화되고 도그마 되어가는 궁극적 문제는 하나님에 대한 초월성만을 강조하는 데에서 시작하는 것이다. 유영모는 적어도 참 신앙이 도그마 되고 사장되며 인간의 실존적 삶과 유리되고 고착화되는 신앙의 교리와 체계에 정면 도전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예수를 하나님의 존재 즉 '없이 계신 이'를 믿고 그 자신의 육신을 통해 하나님의 내재성과 초월성을 드러내고 행하신 분이라고 고백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자신의 고백과 신앙이 고착화되는 것을 염려하여 그는 예수를 자신에게 하나밖에 없는 선생이라고 하면서도 스승으로 믿는 것과 아는 것은 다르다고 하는 자신의 사상을 드러낸다.
그는 이처럼 서구신학에서 종교다원주의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지기 60여년 전에 이미 그 이치를 깨달아 종교의 길에 다양성을 열어 놓았다. 그가 추구하고자 했던 가장 큰 것은 각 종교가 가지고 있는 바르다고 생각되는 진리를 타종교라 배척하지 않고 받아들였다는 것이다. 하지만 깊은 내면에는 예수와 하나님이 계셨다는 것을 그는 분명히 하고 있다. 우리는 신앙의 껍데기를 보고 살고 있지는 않은가? 머리와 입으로만 실천하고 있지는 않은가? 글을 마치면서 껍데기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내면의 속성'과 '행함'이 중요한 것임을 분명히 가르쳐주신 다석 유영모 선생님께 감사드린다.
http://www.doingtheology.co.kr/otherpaper/paperroom/spirit8.html
다석 유영모의 종교사상 1. 2
유영모 - 다원주의 신학의 선구자/ 다석일지/ 유영모의 생애 -188-196쪽
톨스토이, 간디 內村鑑三의 영향 - 196-203쪽
비교종교연구시- 각 종교에서 말하는 진리는 결국 하나/ 종교들간의 공토점을 찾아내는 일에 열중/
신관- 범재신론에 가까움/
인간관- 예수, 석가, 단군, 아담등 모든 사람은 똑같다. 단지 본보기가 되었을 뿐./ 누구나 다 신이 될 수 있고 그러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그러나 짐승은 다르다/
구원관- "아담과 해와가 무엇을 따먹어서 그의 자손이 이같이 되었다고 자손들에게 죄다 뒤집어 씌우는데 그 따위 말이 어디 있는가. 그것은 일종의 신학으로 그렇게 생겨 나온 것이다." 모든 인간이 원죄를 지니고 있다는 기독교의 교리를 부인 함.
그의 구원관은 자, 타력 병행구원관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점에서 그의 구원관은 유교나 불교, 그리고 기독교의 그것과 분명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http://www.aks.ac.kr/bk21/religion/bk21article/lee1.htm
유영모선생님의 성경을 보면 창세기 1장1절부터 묵시록까지 온통 빨간줄이 그어져 있어요. 빨간줄 긋고 또 긋고 해서 성경이 새빨개요. 그런데 유영모 선생님은 어떻게 했냐하면 한 장이면 한 장 다 읽고서 자기 식으로 이렇게 시를, 시조를 쓰는거예요. 7권까지 그것을 자기 나름대로 파악해서 나오면 자기 나름대로 그것을 표현해 보는 거예요.「가온씨 잇다감 생각 그저 나므롬 업시 제게로 브터」 이것은 데살로니가 전서 5장, 16-18절 말씀이예요. 이 성경말씀이 김활란 박사 비석에 새겨져 있지요.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니라>. 진리를 깨닫는 것을 「가온찌기」라고 해요. 이것은 유영모 선생님의 말투지요. 「잇다감 생각」 이것은 항상 기도하라 이거예요. 「나므름」 거저예요. 「제게로부터」 '제'라는 것은 그리스도이고 '게'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예요. 이것도 유영모 선생님의 독특한 내용이지요. ― 현제(鉉齊) 김흥호(金興浩) 해설
http://www.habiram.or.kr/Seed/24/24-6.htm
유영모(함석헌의 스승)선생
오산학교(근대 기독교 전통을 이끈 인재들 배출)3대교장
영락교 한경진 목사,근세 기독교 운동의 거인 김교신 모두 유영모선생의 제자.
우리나라 근세 기독교는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기독교와 틀리게 민족의 선각자들이 역사를 바로잡기 위해 기독교신봉.
우찌무라칸조오의 사상이 우리나라 근대 기독교의 선구자들을 자각시켰다.
그는 무교회주의를 주장하였는데.. 기독교를 가장 일본식으로 받아들인 사람. 무교회주의라는것:인간중심이 아닌 하느님중심의 교회가 되어야 한다. 성서를 통해 기도하는 자리가 교회.성서본위이기 때문에 제도권자들(목사등..)이 일반 교도들에 비해 권위를 가질수 없다.성서는 개인적으로 깨닫는 것이기 때문에 해석의 강요를 할수 없다.
김교신등 근대 기독교의 선두자들은 그의 사상을 받아들여 근대 한국 기독교를 역사를 위해서 발전시킴.
유영모(1890-1981) 선생은 노자사상의 대가.
노자를 늙은이로 번역,도를 길로,만물을 '잘몬'으로 곡신을 '골검'(옛말로 계곡의 신)으로 번역하는등 독자적 해석.
철저한 기독교인. 예수를 최고의 효자로서 해석. 하느님이란 식색을 초월한 분.
인간이 산다는 것은 식과 색에 대해 철저한 자기 주관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
호:다석(많을다, 저녁석)-하루 세끼를 저녁에 몰아먹어서...
http://my.netian.com/~4blove/theme/lecture/kim100.htm
이 무렵 함석헌 선생은 매우 어려운 곤경에 처해 있었다. 선생님은 원래 종교적으로 개신교(장 로교)쪽에 뿌리를 두고 있었는데 오산시절 은사님이신 유영모 선생님과 일본 유학시절 우찌무라 선생의 영향을 받아 무교회주의에 몰입 김교신 선생과 함께 한국 무교회주의 운동(?)의 젊은 지 도자가 되어 종교잡지 《성서조선》을 발행하고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 역사'(후에 그 유명한 -뜻으로 본 한국역사-)를 연재하며 무교회주의를 신봉하는 많은 분들의 사랑과 존경을 한몸에 받 으며 지내셨다. 특히 일제 강점기 조선의 3대 천재로 일컬음을 받으며 약관 21세에 남강 이승훈 선생이 설립한 오산 학교의 교장으로 초빙되었던 유영모 선생님의 사랑과 기대는 남다른데가 있 었다. 유 선생님의 애제자이신 김교신 선생이 요절하자 더욱 유별난 기대를 받게 되었었다.
다석(多夕) 유영모 선생님은 쉽게 말하여 우리 ?捌껐柄? 특유의 〈님〉사상과 〈얼〉사상을 독 특한 한글철학(?)으로 체계를 세웠으며 함석헌 선생께서 일생동안 즐기고 아껴 쓰시던 〈씨ㅇ〉 이란 낱말을 직접 창안해 내신 어른으로 '무교회계' 또는 속칭 '씨알동네'에서는 절대적인 존경과 흠모를 받는 선생님이셨다. 함석헌 선생 자신이 항상 "해 아래에서 제일 무서운 분"이라고 입버릇 처럼 말씀하실 정도로 수 십년 동안 이 세상에서 가장 가깝게 존경하여 모시는 선생님이셨다. 그랬었는데 '하루아침에' 그 스승을 죠지폭스로 바꾸고 무교회에서 퀘이커로 개종을 해버렸다 는 것이다. 그리하여 선생님께서 종교사회적으로 성장해 오시고 사회정치적 출현의 탄탄하고 굳 센 배경이었던 무교회 계통과 '씨알동네'가 왈칵 그야말로 온통 뒤집혀 있는 판이었다.
http://www.bumwoosa.co.kr/b_life/1104.html
다석 유영모: "학문을 낳지 못하는 신앙은 미신이다. 아버지의 신비를 찾는 일은 그것이 학문을 낳는 데 있다. 신앙인은 연구에 연구를 계속하여 학문의 기 도가 되어야 한다. 기도는 보편적이고 심오한 추리가 되어 우리 정신생명이 최고의 활동을 하도록 해야 한다."
박영호, 다석 유영모의 생각과 믿음 (서울:문화일보, 1995), 255쪽
http://myhome.dreamx.net/cgoodman/learn1.htm#주6
음식을 앞에 두고 기도하는 것은 기독교뿐 아니라 종교들의 공통된 특징 중의 하나입니다. 불교에는 식사 때 읊는 오관계라는 게송이 있는데 밥에 대한 깊은 경외의 마음을 담고 있습니다. 유영모 선생님의 아름다운 풀이로 들어보자: "손에 손이 많이 가고 힘에 힘도 퍽은 드러, 곱게도 지고 지며 바로도 되고 되어온 이 밥을 우리 지은 노릇으론 이에 구태어 받을 수 있사오리까. 거듭 잘못이 없게스리 걸챔부지의 마음을 막고 오직 깨나는 약으로 우리 맡은 것을 맞추기까지 이바지어 삼가 들렵니다." 사람의 힘과 정성으로 올려진 밥을 받기에 자신의 삶이 부족하지만 마음의 온갖 욕심 버리고 그 밥을 약으로 받들어서 진리(道)를 행하기 위해 음식을 먹겠다는 아름다운 게송입니다.
http://www.hyanglin.org/목회와선교/향린지/31/62.htm
유영모(柳永模 1890∼1981)선생의 다석어록(多夕語錄)에서 "사람의 혓바닥과 생식기를 돼지나 개에게 바꾸어 붙여준다면 돼지나 개가 우리 사람이 저지르는 일같이는 저지르지 않을 것이다. 인생이란 참으로 불행하다. 짐승이 할 수 없는 일을 잔인하게도 할 수 있는 것이 인생이다"라고 쓰여 있습니다.
류영모 선생은 "온전한 사람이라면 사람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한다. 교육을 하는데도 사람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가르치는데 그 근본을 두어야 한다. 운동이나 잘 한다고 교육하는 것이 아니다. 인생의 본질을 외면한 교육은 도둑놈의 교육이다. 얼나(靈我)를 뺀 교육이 어디 있나. 종교 없는 교육은 지식의 매매는 될지언정 사람의 구원은 되지 않는다. 구원 안된 사람을 가지고 아무리 애써도 그것은 지옥이지 천국은 아니다. 청소년들을 강제로 바로 잡을 수는 없다 청소년들에게 경전을 읽히우고 말씀을 들려주면 스스로 정신을 차리게 된다. 나는 16살 때부터 성경을 읽고 20살 때부터 불경과 노자(老子)를 읽었다. 그렇지 못했으면 내가 무엇이 되었을지 모른다. 기독교만 말씀(로고스)이 아니다. 불교도 말씀이다. 말씀을 읽히우고 들려 주어야 한다. "라고 말씀하셨습니 다
http://callip.wonkwang.ac.kr/student/박영호초청강연회.htm
'궤좌' 란 무릎을 꿇고 앉는 자세로 흔히 '정좌 (正坐)' 라고 일컬어지기도 한다.
오랜 옛날부터 무릎꿇고 앉는 자세가 바른 자세라고 여겼기에 생겨난 말이다.
하루종일 궤좌로 앉아 90평생을 수행한 다석 (多夕) 유영모 (柳永摸)는 이 좌법을 '하나 (一)' 를 찾는 '일좌 (一坐)' 법이라고 했다.
함석헌 (咸錫憲) 의 스승인 다석은 '씨' 사상의 창시자일 뿐 아니라 '일좌' 의 수행으로 몸생명에서 얼생명으로 솟았다고 추앙받았다.
다석은 '일좌' 와 태식 (胎息) 으로 '참 (眞)' 의 경지에서 이승을 떠났다.
그런데 다석이 추구한 '하나' 는 바로 일시무시 (一始無始) 의 그 '하나' 였다.
'하나' 는 우리 겨레뿐 아니라 인류의 시원 (始源) 을 뜻하는 거룩한 '하나' 인 것이다.
그런 뜻에서 일좌법 곧 궤좌법은 천부 (天符) 의 좌법인 셈이다.
http://ycw3810.hihome.com/ImportedFiles/dan.htm
첫댓글 그랬었군요. 함석헌 선생님과 유영모 선생님 사이에 그런 일이 있었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