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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의 길 : 제2단원 - 부활의 능력
제 1과 예수님은 어디에 계십니까?
제 2과 성령님께서 우리 안에 계신 증거 ①
제 3과 성령님께서 우리 안에 계신 증거 ②
제 4과 성도가 부활의 능력으로 살지 못하는 이유
제 5과 부활의 능력으로 사는 성도의 삶
제 2단원 부활의 능력
요절
[갈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제 1과 예수님은 어디에 계십니까?
일제 시대, 평북 영변 산골 마을에 할머니 한 분이 서양 선교사의 전도를 받고, 예수를 믿었습니다. 나중에 그 아들이 목사가 되었고, 손자들 중에 많은 목사, 장로가 나왔고, 그 증손자 대에는 예수 안 믿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게 되었고, 3대 목사가 나왔다. 그 4대손자 중 한 사람이 접니다.
예수님은 과연 누구입니까? 가난한 목수의 아들로 태어나서, 33세에 십자가에서 사형수로 처형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전세계에 가장 큰 영향력을 끼쳤습니다. 세계 역사를 AD와 BC로 나눈 분으로 역사의 주인공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영접하는 사람과 가정, 나라마다 다 복을 받았습니다. 도데체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누구든지 예수님을 영접하면,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정말 그에게 오셔서, 항상 그와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질문> 갈 2:20을 천천히 읽어 보고, 내용을 세 부분으로 나누어 써 보십시오..
①
②
③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두 번째, 부분에서 사도 바울은 무엇이라 고백하고 있습니까? 놀랍게도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했습니다. 이 고백은 사도 바울 뿐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고백입니다. 그런데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 놀라운 사실을 바로 체험하지 못한 채, 억지로 믿고 있습니다.
<질문>
① 예수님은 지금 어디에 계십니까? 눈을 감고, 가슴에 손을 얹고, 느껴 보십시오.
② "예수님은 당신 안에 계십니까?"
③ 예수님께서 당신 안에 계시지 않다면,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만약 예수님께서 당신 안에 계시다면, 그렇게 믿는 증거는 무엇입니까?
당신은 "예수님은 제 안에 계십니다" 하고 고백하실 수 있습니까? 그렇다면, 당신은 바로 고백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당신 안에 계신 증거는 무엇입니까?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자기 안에 느껴지는 놀라운 평안과 사랑과 은혜를 그 증거로 말합니다. 이것들도 그 증거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아무리 충만한 그리스도인이라 할지라도, 항상 그런 마음을 유지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만일 죄나 시련으로 인한 낙심과 좌절, 고독과 슬픔에 빠져 있을 때는 예수님은 떠나 버리신 것일까요?
<질문> 예수님은 당신이 죄 지을 때, 막으실 수 있나요?
예수님은 당신 부부의 부부싸움을 말리실 수 있나요?
"예수님께서 내 안에 계십니다" 하고서도 오랫동안 부부싸움을 하는 그리스도인 부부도 있습니다. 목사만 있어도 싸우겠습니까? 그러니 예수님은 목사 만도 못한 존재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내 안에 계십니다" 하고 고백하면서도, 아는 사람만 주위에 없으면, 죄의 유혹에 넘어가 버리는 성도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같은 교회 성도 중에 한 사람만 그 시간 그 자리에 같이 있어도, 죄의 유혹을 이길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교인만도 못하다는 말입니까? 이것이 우리 믿음입니다.
97년 강릉 해변으로 침투했던 북한 잠수함을 신고하여, 정부로부터 표창과 포상금을 받았던, 택시기사 분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포상을 하기 위하여 당시 상황을 조사하면서, 그 택시에 함께 탔던 여인이 그 가사의 애인이었음을 드러났답니다. 유부녀였던 그 여인의 가정은 그 일로 깨어졌고, 이 여인은 자기 신세가 이렇게 되었으니, 포상금을 나눠달라고 요구하게 됨으로, 그 기사의 가정도 깨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불륜이 그렇게 드러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강릉 잠수함 침투사건은 우리에게 매우 귀중한 교훈을 또 하나 남겼는데, '사람이 죄짓고는 못 산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람들의 눈만 피하면, 아무도 안보는 줄 압니다. 그래서 보는 사람만 없으면, 별의 별 말과 행동을 다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보고 계십니다. 그리고 천국의 허다한 증인들이 우리를 지켜 보고 있습니다.
미국 아이비리그에 속한 어느 대학에 제리라는 미식축구선수가 있었습니다. 그는 만년 후보선수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늘 성실했고, 연습에는 빠진 적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졸업이 얼마남지 않은 어느날, 중요한 시합을 앞두고, 이 청년은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받았습니다. 감독은 "시합은 걱정하지 말고 다녀오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시합 바로 전에 돌아 온 이 청년은 그 시합에 자신을 출전시켜달라고 요청했습니다. 감독은 대단히 망설였지만, 그 간절함에 못이겨, 출전시켰습니다. 그런데 그 선수는 전혀 예상을 깨고, 맹활약을 하였고, 팀은 승리하게 되었습니다. "감독님, 저의 아버진 장님이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경기하는 모습을 한 번도 보실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천국에 계십니다. 오늘 처음 제가 뛰는 모습을 보셨을 거예요"
여러분, 이 얼마나 큰 차이입니까? 이 세상에는 두 부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몇 년전 캐나다 토론토 집회 중 그 교회 교인이 아닌 한 집사님 내외가 시간 시간 참석하여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는 25년 공직 생활 청산하고 캐나다에 이민을 갔는데, 사업을 위한 진로문제로 고민하다가, 집회 소식을 듣고 참석였다가, 집회 후에 감사 인사를 하시면서 질문을 하셨습니다. "어떻게 주님의 인도하심을 바로 분별할 수 있는지, 한가지만 조언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 때, 주님께서 주시는 말씀이 있어서 전해 드렸습니다. "사업의 성공보다는 주님과의 관계를 더 중요하게 여기십시오. 그러면 주님께서 반드시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많은 성도들이 하나님과의 관계보다 성공에 더 집착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실패합니다. 하나님께서 때때로 좋은 일인데도 좌절시키시는 이유를 깨달았습니다. 주님을 잘 모른 채, 성공에만 매달려 살기 때문입니다.
<질문> 정말 예수님께서 내 안에 계신 증거가 무엇인지 생각해 보십시오.
제 2과 성령님께서 우리 안에 계신 증거 ①
제자훈련을 받으시던 어느 집사님께 "성령님께서 지금 집사님 안에 계십니까?" 하고 물으니, 한참 고민하시다가 "지금은 제 안에 안 계신 것 같은데요" 하고 대답을 하셨습니다. '실제로 직장 생활에 지치고, 세상에 부데끼며 살다 보니, 영적으로 메마르고, 말씀도 못 보고, 기도도 못하고, 이런 저런 세상 죄에 빠지고 살았으니, 성령님께서 자신 안에 계시다면 어떻게 그럴 수 있겠는가?' 생각할 만 하지요.
그러나 성령님으로 우리 안에 오신 부활하신 예수님을 분명히 아는 것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이것을 몰라서 신앙생활 제대로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질문>
①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볼 때, 하나님의 자녀인지 아닌지를 구분하시는 기준이 무 엇일까요? 고후 13: 5을 읽고, 그 답을 써 보십시오..
고후 13:5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 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리운 자니라"
② 예수님께서 자신 안에 계신 것을 분명히 알지 못하면 어떤 자가 된다고 말씀하 셨습니까?
③ 요 14:18에서 예수님은 어떤 약속을 해 주셨습니까?
요 14:18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 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하나님께서는 구원받은 자 안에 거하시는 성령님을 통하여, 그가 하나님의 자녀인지를 아십니다. 만약 성령님이 계시지 않다면, 그는 버리운 자입니다. 실제로 성령님께서 모든 믿는 자 안에 거하십니다. 그러나 실제로 성령님을 알지 못한 채, 고아처럼 사는 성도들이 많이 있습니다. 고아란 부모가 없는 아이와 같아서, 자기 문제를 자기 힘으로 해결하며 살아야 하는 자를 말합니다.
그러나 부활 승천하신 예수님은 분명히 우리를 고아로 내 버려 두시지 않고 우리에게 오시겠다고 약속하셨고, 약속하신대로 그의 영이신 성령님으로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 151장 다시 사신 구세주
"... 그 은혜로운 손길 부드러운 음성 내 평생 주님 함께 늘 계시네
예수 예수 늘 살아 계셔서 주 동행하여 주시며 늘 말씀하시네
예수 예수 내 구세주 예수 내 맘에 살아 계시네 늘 살아 계시네"
그러면 성령께서 우리 안에 계신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저는 첫 목회지인 여주에서 어느날 새벽기도회를 마치고, 강단에서 기도하면서, 방언을 체험했습니다. 그 때의 놀라움과 영적인 충격은 대단했으며, 성경의 모든 내용과 살아계신 하나님, 나를 기억하시고 사랑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확신이 생겼습니다. 그러나 그 이후, 저는 체험보다 더욱 중요한 것이 말씀인 것을 깨달았습니다. 체험은 강한 확신을 주나 순간적이어서, 그 후 한동안 저는 성령의 체험을 얻지 못하였습니다. 그 반면에, 말씀은 은근하나, 지속적이고 영원한 것임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 안에 계신 예수님을 체험으로 알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그러면 오히려 예수님을 바로 알지 못하게 됩니다. 체험은 우리를 속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말씀으로 만나야 합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셔서, 우리 가운데 계십니다. 그 분은 성령님으로 우리와 계시기 때문에 말씀으로 만나주십니다.
요 20;16에서 막달라 마리아가 부활의 주님을 보고는 몰랐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마리아야"하고 부르실 때, 그 음성을 알아듣고 예수님이신 줄 알았다고 했습니다.
[요 10:27]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저희를 알며 저희는 나를 따르느니라
눅 24:32에서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도 예수님을 눈으로 보고는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으로 지금도 우리와 함께 계심을 믿게 하십니다.
<질문 1> 고전 12:3에는 어떤 증거를 말씀하고 있습니까?
고전 12:3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않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 라 할 수 없느니라"
불신자에게 "예수님이 누구냐?"고 묻는다면, "나의 구주이십니다"라고 고백할 사람이 있겠습니까? 예수님을 구주라고 고백하는 것이 성령님께서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지 않으면 불가능한 것입니다. 만약에 당신이 언제 어디서 누구에게라도 예수님이 당신의 구주임을 고백할 수 있다면, 당신 안에는 성령님께서 계신 것입니다. 만약에 성령님이 당신을 떠나셨다면 당신은 예수님을 구주로 고백할 수 없을 것입니다. 불신자와 구원받은 성도는 얼마나 다른지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질문 2> 롬 8:15-16에는 어떤 증거를 말씀하고 있습니까?
롬 8:15-16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 계 21:7-8 약 2:19
불신자가 하나님을 믿는다 하더라도,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며 기도하는 사람을 보았습니까? 당신이 기도할 때,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은 당신 안에 성령님께서 역사하시기 때문인 것입니다.
불신자에게는 '무서워 하는 종의 영'이 역사하고, 구원받은 자에게는 '양자의 영'이 역사함을 알아야 합니다. 계 21:7,8, 약 2:19을 읽어 보면, '무서워 하는 종의 영'에 대하여 알게 될 것입니다.
제 3과 성령님께서 우리 안에 계신 증거 ②
<질문 3> 고전 2:12에는 어떤 증거를 말씀하고 있습니까?
고전 2:12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당신은 찬양하며 예배를 드릴 때나 말씀을 들을 때, "은혜롭다!"고 느껴 보신 적이 있습니까? 무엇이 그렇게 느끼게 해 주었을까요?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불신자도 그럴까요?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를 깨닫는 것은 성령님의 역사이기 때문입니다.
한 기독교 연구소에서 유명 대학 불신대학생들에게 큰 교회 예배를 참관케 하고 리포트를 작성케 하였습니다. 그런데 설교가 은혜스럽다고 정평이 나있는 큰 교회 일수록, 더 감동이나 도전을 못 받은 것입니다. 한국교회의 문제를 제시하는 의도였으나, 사실 문제가 있는 시도였던 것이, 은혜를 깨닫는 능력이 없는 자에게 은혜를 평가하는 것이 불가능한 일임을 알아야 합니다.
<질문 4> 요일 4:12-13에는 어떤 증거를 말씀하고 있습니까?
요일 4:12-13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느니라 그의 성령을 우 리에게 주시므로 우리가 그 안에 거하고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아느니라"
만약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어떤 사람이, 어떤 사람에 대하여 상처를 받았을 경우, 그 사람에 대하여 용서할 마음도 생기지 않는다면, 정말 예수님을 믿고 거듭난 사람인지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 안에 게신 성령님은 용서하고 사랑하라는 말씀을 반드시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부부싸움을 했다면, 그 문제를 가지고 하나님께 기도해 보십시오. 반드시 먼저 용서하고, 사과하고 화해하라는 권면을 받을 것입니다.
어떤 부인에게 전도했더니, 그 부인이 말하기를 "시어머니를 용서할까봐, 교회 못나가겠다"고 대답하였습니다. 전에 교회에 다닌 적이 있었는데, 교회에 다녔더니 마음이 싱숭생숭 해지는 데, 꼭 시어머니를 용서하게 될 것 같더라는 것입니다.
<질문 5> 엡 4:30에는 어떤 증거를 말씀하고 있습니까?
엡 4:30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속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
계 3:19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
한 청년이 제게 찾아와서 괴롭게 고백했습니다. "목사님, 저는 예수 헛 믿었어요, 저는 전혀 변하지 않았습니다" 그 청년은 직장 생활 중에 반복하여 짓는 죄된 생활로 인하여, 깊은 좌절감, 낙심에 빠져 있었습니다. 저는 그 청년에게 말했습니다. "그러면 정말 변한 것이 없는지 확인해 봅시다. 오늘 죄 지은 일로 인하여 당신이 이렇게 괴로워 하는 까닭이 무엇입니까? 다른 사람들도 그렇겠습니까? 당신이 괴로운 것은 바로 당신 안에 계신 성령님께서 근심하시고 계시다는 증거인 것입니다" 그 청년은 엡 4:30 말씀을 읽고, 한없이 울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확신을 회복하였습니다.
구원받은 자에게는 반드시 구원받지 못한 자가 깨닫지 못하는 성령의 책망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경건치 못한 삶에 대한 책망, 예배와 기도생활에 대한 책망, 사랑없음에 대한 책망 등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생활 바로 하지 못하여, 마음에 괴로움이 있는 것은, 그 성도 안에 계신 성령님께서, 그 성도가 복되게 살지 못하는 것으로 인하여 근심하기 때문임을 알아야 합니다.
<질문 6> 빌 2:13에는 어떤 증거를 말씀하고 있습니까?
빌 2:13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하나님과 교회를 위하여 헌신하고자 하는 마음이 불신자에게도 생길까요? 마음에 일어나는 하나님의 마음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질문 7> 마 10:19-20에는 어떤 증거를 말씀하고 있습니까?
마 10:19-20 너희를 넘겨줄 때에 어떻게 또는 무엇을 말할까 염려치 말라 그 때에 무슨 말할 것을 주시리니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속에서 말씀하시는 자 곧 너희 아버지의 성령이시니라
전도해 보면, 성령님께서 우리 안에서 역사하심을 가장 분명하게 알 수 있습니다. 전도는 그 분의 일이기 때문입니다.
<질문> 이제는 예수님께서 당신과 함께 계신다고 분명히 답할 수 있겠습니까?
제 4과 성도가 부활의 능력으로 살지 못하는 이유
아직도 한 가지 풀리지 않는 질문
성령님께서 우리 안에 계신데도, 우리의 삶이 여전히 실패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질문>
① 요 2 :1-11을 읽고, 예수님께서 어디에 계셨는지 찾아 보십시오.
② 요 21 :1-5을 읽고, 예수님께서 어디에 계셨는지 찾아 보십시오.
그렇습니다. 이상할 것이 없습니다. 성경에 예수님께서 함께 계셔도, 기쁨의 상징인 포도주가 떨어지고, 밤새도록 물고기 한 마리 잡지 못하는 일이 생긴다는 것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원인이 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내 안에 계셔도, 내가 주인 노릇하면, 부활하신 주님의 역사는 나타나지 않습니다.
여기서 사도 바울과 우리의 다른 점을 주목해 보아야 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
사도바울은 "이제 내가 산 것이 아니라"고 고백했습니다. 당신도 그렇게 고백할 수 있습니까?
<질문> 예수님과 당신이 싸우면, 예수님이 이깁니까? 당신이 이깁니까?
여러분은 여러분의 고집대로 사는 자가 아닙니까? 예수님께서 여러분에게 기도, 성경읽기, 헌신, 용서, 봉사, 무슨 일을 하나 시키려면 얼마나 어려우십니까?
어떤 여 성도에게 만약 "예수님이 신랑이라면 행복하겠습니까? 불행하겠습니까?" 질문했더니, "당연히 행복하겠지요"라고 대답했습니다. 정말 그럴까요? 예수님과 마음이 맞다면 그럴 것이지만, 자기 마음대로 살고 싶어 하는 사람은 결코 행복하지 않을 것입니다. 예수님께 바가지를 긁지나 않을지 염려됩니다.
교회도 예수님이 교회의 머리라고 고백은 하지만, 예수님 마음대로 피아노 하나 이 교회에서 저 교회로 옮길 수 있는 교회가 드뭅니다.
<질문> 롬 6:4-5을 읽고, 세례받는 것이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 써 보십시오.
예수를 믿는 자는 살았지만, 사실은 죽은 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인정하십니다. 그러므로 심판이 없습니다. 이미 죽은 자에게 무슨 심판이 있습니까?
그때, 놀라운 일이 일어나는 데, 부활하신 주님과 함께 다시 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과 함께 죽는 것이 분명하지 않는 이들은 예수를 믿는 것 같아도, 부활의 능력을 체험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질문> 당신은 '죽으라'는 주님의 명령을 들어 보신 적이 있습니까?
제가 은헤의 눈이 뜨였을 때, 하나님께서는 저에게 "죽으라"고 하셨습니다.
"죽으라!" 이것이 저를 향한 하나님의 평가였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사실은 놀라운 축복임을 나중에야 깨달았습니다.
독일 퀼른한인감리교회 부흥회를 갔을 때, 한 남자 권사님께서 식사를 대접하시면서, 하신 말이 기억에 남습니다. "목사님, 나는 죽는데, 저 자식들이 안 죽잖아요?" 이 말로 인하여 모두 웃었습니다만, 죽음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증거입니다.
많은 교인들이 "아이구, 내가 죽어야지, 죽어야지" 합니다. 그러나 죽으려 한다고 우리가 죽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미 장례식을 치른 자임을 믿어야 합니다. 죽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죽음을 받아 들이는 것입니다. 이것을 믿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저는 예수님과 함께 죽었습니다" 이렇게 계속 고백하며 나아갈 때,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진 [죽음]이 임하는 것입니다.
[롬 6:11]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지어다
자아가 죽은 자는 죄의 지배에서 해방됩니다.
[롬 6:6]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롬 6:14] 죄가 너희를 주관치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음이니라
그렇습니다. 죽으면 죄에 지배당하지 않게 됩니다. 또 '내가 죽으면' 배우자가 나를 통하여 예수님을 만나게 되고, 가족들이 예수님을 만나게 됩니다. 가정이 천국이 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학교도, 직장도,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죽으면' 나를 통하여 모두 예수님을 만나게 됩니다.
우리 자신의 노력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실천하려고 하면 반드시 실패합니다. 그러므로 기도하려고, 용서하려고, 참으려고, 성결하려고 노력하지 말고, 믿음으로 자신의 죽음을 인정하고, 예수님 안에 거하는 자가 되면, 예수님께서 하십니다. 오직 주의 관심만 있습니다. 주님의 소원만 있습니다. 눈이 뜨입니다. 천국이 보입니다. 영혼구원의 중요함을 깨닫게 됩니다. 사랑의 역사가 나타납니다. "살아도 주를 위하여, 죽어도 주를 위하여" 하는 고백이 나옵니다. 비로서 주님께서 나를 통하여 일하시게 됩니다.
<질문. 이 과에서 당신이 깨달은 것은 무엇입니까?
제 5과 부활의 능력으로 사는 성도의 삶
우리 자신의 노력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실천하려고 하면 반드시 실패합니다. 그러므로 기도하려고, 용서하려고, 참으려고, 성결하려고 노력하지 말고, 예수님 안에 거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 안에 거하면, 예수님께서 우리의 삶을 주관하여 주십니다.
고아가 되어 까다로운 성격의 고모의 손에서 자란 소녀가 있었습니다. 고모는 조카를 정성껏 키웠지만, 고모 자신이 상처가 많은 여자인지라, 조카의 마음에 쓴뿌리를 많이 심어 주었습니다. 고모에 대한 원망과 상처가 깊은 이 소녀는 예수님을 믿고, 가장 먼저 고모를 용서하고 사랑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노력해도 고모를 용서하고 사랑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금식도 하고, 기도도 했지만, 잠깐 뿐이고, 고모를 만나면 화부터 났습니다. 어느 날, 이 소녀는 이 모든 문제를 자신의 노력으로 해결하는 것을 포기하고, 자신은 죽고, 자기 와 함께 하시는 예수님께 다 맡겼습니다. 집으로 들어 가기 전에 잠깐 기도했습니다. "예수님, 저는 죽었습니다. 제 안에 예수님만 사십니다. 문을 열면 제가 고모를 만나지 않고, 예수님께서 고모를 마나 주세요" 그런데 그 날 고모의 잔소리를 듣고도, 화가 나기는커녕, 자신을 위하여 젊음을 희생한 고모에 대해, 불쌍한 마음과 감사의 마음이 일어나는 것이었습니다. 그 고모는 결국 조카로 인하여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예수님 안에서 나의 죽음'을 인정하고 나면, 모든 문제가 바뀌고 맙니다. 두려움도, 염려도, 걱정도, 미움, 원망도, 욕심도 조바심도 다 사라지고 맙니다. 그 주체인 내가 죽었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나의 문제'가 없습니다. 오직 주의 관심만 있습니다. 주님의 소원만 있습니다. 눈이 뜨입니다. 천국이 보입니다. 영혼구원의 중요함을 깨닫게 됩니다. 사랑의 역사가 나타납니다. "살아도 주를 위하여, 죽어도 주를 위하여" 하는 고백이 나옵니다. 비로서 주님께서 나를 통하여 일하시게 됩니다.
어느 제자반에서 "염려 말라!"는 주제로 성경공부를 하고, 염려하지 않고, 한 주간을 사는 과제를 내어 드렸더니, 한 집사님께서 "한 주간 동안 염려하지 않아야 하는 염려가 하나 더 생겼다!"고 하신 적이 있습니다.
실제로 염려하지 않고 산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꼭 죽으라는 말과 같습니다. 그렇습니다. 정말 믿음으로 사는 것은 우리 자신이 죽는 것입니다. 그러면 염려도 없어집니다.
죽음이란 자기를 자기 소유가 아니라, 주님의 소유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롬 6:13]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드리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산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의 지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어떤 청년이 자신의 몸을 하나님께 산제사로 드리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어느날 직장 동료들이 화투를 하지고 했으나, "미안하지만 나는 팔이 없어서 못합니다""이 양손이 나의 것이 아닙니다" 했다는 것입니다.
빌리 그래함, 소년일 때, 자신을 하나님께 드렸더니, 세계 제일의 전도자로 쓰시지 않습니까?
불신자는 자신이 죽으면 끝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해서든지 안 죽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구원받은 성도는 죽으면 예수님께서 드러나십니다. 죽으면, 놀라운 역사가 일어납니다. 예수님 안에서 죽는 죽음을 바로 이해해야 승리하는 성도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아무 돈도 없이 수 많은 고아를 먹여 살렸던 죠지 뮬러 목사님에게 사람들이 물었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능력있는 삶을 살 수 있었습니까?" 그 때 죠지 뮬러 목사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능력이라니요? 제게는 저 자신의 죽음이 있었을 뿐입니다."
성령이 없는 사람은 자신의 죽음이란 곧 모든 것의 종말을 말합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임재하여 계신 성도에게는 자신의 죽음은 곧 능력있는 삶의 시작을 말합니다.
부활의 능력으로 사는 성도의 삶은 억누르는 것이 아니라 나타내는 생활입니다.
많은 성도들이 죄와 교만과 성질을 힘들여 누릅니다. 그 정도만 되어도 이겼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죄악을 억누른 것에 불과한 것입니다. 속으로 찡그리고 겉으로 웃습니다. 성질이 나오는 것을 힘써 누릅니다.
이렇게 함으로 예수 믿는 것이 힘들고 참 기쁨을 모르고, 육신의 병도 생깁니다.
식사 중 귀한 손님이 오셨습니다. 천으로 상을 덮었습니다. 겉으로는 문제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상이 깨끗한 것은 아닙니다.
이것이 많은 성도들의 이김입니다. 드러나지 않았다고 이겼다고 여깁니다. 겉으로 겸손한 척합니다. 머리를 많이 숙입니다. 그러나 속은 머리를 듭니다.
그러나 부활의 능력으로 사는 성도는 억누르지 않고 나타냅니다. 과거에는 감출 수록 좋았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드러낼 수록 좋습니다. 전혀 두려움이 없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살아 계시기 때문입니다.
유교의 공자는 修身을 가르쳤습니다. 이것은 계속 함양하고 억제하는 것으로서 이것이 성공해야 聖人이 됩니다. 그리스도인이면서도 이런 유교식으로 사는 성도가 많습니다. 그는 매사에 조심하고 또 조심합니다. 이것이 율법적인 신자입니다.
그러나 예수의 제자는 드러내고 또 드러냅니다. 조금도 억누르지 않고도 문제가 없다고 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