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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사를 연구하시는 분의 카페에서 가져온 글입니다.
고려 VS 백제 1,2차 교전
고려군 후퇴와 3차 교전
4차교전인 공산전투에서 고려군 궤멸 / 왕건의 홀연단신 도주로
전체적으로 이 3장의 그림이 당시 교전상황을 말해줍니다. 당시 고려군과 백제군의 교전상황은 사서에는
고려사 927년 9월 기사中
<친히 정예(精銳)한 기병(騎兵) 5천 명을 거느리고 견훤을 공산 동수(公山桐藪)에서 맞아 크게 싸웠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견훤의 군사가 매우 급하게 왕을 포위하여 대장 신숭겸(申崇謙)ㆍ김낙(金樂)이 힘껏 싸우다가 죽고, 모든 부대가 패배하니 왕은 겨우 단신으로 탈출하였다. 견훤이 이긴 기세를 타서 대목군(大木郡 경북 칠곡군(漆谷郡) 약목면(若木面))을 빼앗고 전야에 쌓아두었던 곡식을 불태워 없애 버렸다.>
이렇게만 나옵니다. 허나 현재에도 그당시의 전투에 관한 지명과 전설이 내려져 오고 있습니다. 하여 모든 지명의 연관관계를 종합적으로 분석해본결과 위그림과 같은 고려군과 백제군의 동선을 그릴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럼 순차적으로 공산전투가 어찌 돌아갔는지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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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고려군 VS 백제군 1,2차 교전
우선 5부에서 언급한대로 시중 강공훤이 이끄는 병력 1만은 기주(영주)를 출발하여 백제군을 추격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견훤이 서라벌에 들어간 직후에 진군을 멈췄던 것으로 짐작됩니다. 이미 서라벌로 들어가 상황이 끝난터라, 강공훤이 독단적으로 백제군과 싸울 이유가 없었지요. 황도에서 정예기병 5천이 남하하고 있는데 굳이 각개격파의 빌미를 제공할 필요는 없었지요.
이에 사학자 몇몇 분은 1만병이 공산전투 이전에 백제군에 의해 궤멸되었다고 하시던데, 그럴 가능성은 낮다고 생각됩니다. 일단 시일이 너무 촉박하기 때문이지요. 만약 1만병이 공산전투이전에 궤멸되었다면 그 장소는 영천이 되어야 맞는데, 영천은 견훤군과 왕건군의 주력이 처음으로 맞붙은 은해사에서 10km 이내에 있습니다. 서라벌에서 나와 은해사까지는 고작해야 40km입니다. 고작 1~2일만에 도착할 거리에 전장이 두곳이라는것은 말이 되지 않고, 그렇게 싸웠다면 강공훤은 중죄중에 중죄겠지요.
만약 공산전투 이전 강공훤군 격파설이 맞으려면 다음과 같은 일이 벌어져야 합니다.
공산전투 이전 고려 1만병 격파설이 성립하려면
하여 저는 칠곡(대구 북구 학정동)에서 강공훤군과 왕건군의 합류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강공훤군이 왕건이 오기전에 백안동을 거쳐갔을 확률이 없다는 점이 이 가능성을 더 높혀 준다고 생각합니다. 이 백안동 이야기는 조금후에 다시 언급하겠습니다.
앞서 언급했듯이 강공훤이 이끄는 병력은 1만이였습니다. 병력구성은 일단 주로 기병을 이끌었던 대상 관직의 손행과 연주의 병력은 기병 3~5천으로 추산되며, 이들은 기주 인근의 고려진에 주둔중이였겠지요. 강공훤은 인근에서 호족들의 병력 5~7천을 끌어모아 총1만병을 이끌고 백제군을 추격했습니다. 그들이 칠곡(대구 북구 학정동)에 다다르자 서라벌이 이미 함락되었다는 급보를 전해듣고 강공훤은 이곳에서 왕건의 친위군을 기다립니다. 강공훤과 합세한 고려군은 총1만5천에 이르렀습니다. 기병의 비율은 1만 가까이 되었지요.
고려군 무태 → 백안동 진군로
고려군은 칠곡을 거쳐 오늘날 무태(無怠)를 지나게 되었습니다.
무태는 이곳을 지나면서 왕건이 군사들에게 태만하지 말고 경계를 늦추지 말라고 한데서 유래되었다고 합니다.
혹은 고려군이 2차 교전후 퇴각하면서 태만하지 말고 빨리 발걸음을 해 도망치자고 해 무태이촉족(無怠以促足) 이란 설도 있습니다. 또다른 설은 왕건과 신숭겸이 이곳을 지나가면서 밤늦게 길쌈을 하는 아낙네들을 보고 동직조이무태(動織組而無怠), 일을 함에 있어 게으르지 않다고 하여 무태란 설도 있습니다.
또 왕건군이 오늘날 연경(硏經)을 지나면서 어떤 마을사람이 경서를 읽고있는 소리를 듣게 됩니다.
하여 이마을은 경서를 연구한다 하여 연경이 되었습니다.
이때 고려군이 무태, 연경을 지나던 시각은 오전이라고 추측합니다.
(위에 동직조이무태 설에 의하면 늦은 밤이 될수도 있습니다만, 매복지를 서라벌과 칠곡사이의 한가운데 은해사로 잡은점등을 미루워 이른 아침일 가능성이 높다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칠곡(대구 북구 학정동)에서 왕건이 매복한 은해사, 금호면까지는 대략 35km,
서라벌에서 은해사,금호면(경북 영천 금호읍)까지는 대략 45km쯤 되기 때문입니다.
대략 10km의 여유를 두고 왕건은 매복지를 은해사로 정한것이지요.
당시 후삼국 보기병이 하루에 진군할수 있는 거리는 30~70km 정도로 추산합니다.
제가 15년전에 공수특전부대에서 군생활을 할당시 산길,논길로 100km를 딱 26시간만에 주파했던 기억이 나네요.
기병의 비중이 많았던 고려군은 칠곡에서 은해사까지 꽤 빠른 속도로 진군했을 것이고 오후 3~4시경에는 은해사에 도착했던 것으로 추측됩니다. 반면에 서라벌에서 많은 인물을 포획한 백제군의 진격속도는 상당히 느렸을 것으로 파악되지만, 고려군의 반격을 예상했던 견훤이니 만큼 포획한 인물은 소수병력으로 후방에서 천천히 오게 하고 주력군은 상당히 빠른속도로 영천을 향해 진군했을 가능성도 있다 하겠습니다. 하지만 두 주력군이 맞붙은 은해사에 맨먼저 도착한 군은 오후 3~4시 경의 고려군이였을 겁니다. 이때 백제군은 5km~10km 인근에서 금호면을 향해 진군하고 있었겠지요.
일단 앞으로 돌아가 고려군은 이른 아침에 무태와 연경을 지나가게 됩니다. 그렇게 진군하다가 드디어 백안동에서 백제군과 처음으로 교전하게 됩니다.
당시 백안동에는 백제 첨병 수십과 동화사 승병 1천 정도가 있었던 것으로 짐작됩니다.
도대체 동화사 승병 1천은 왜 고려의 앞길을 막은 것일까요? 후삼국 당시 이근방에는 파계사와 동화사의 큰절이 있었는데
특히 동화사(桐華寺)는 친백제계 사찰이였습니다. 그 연유는 150년전으로 돌아가 백제율종(百濟律宗)을 이어받은 금산사의 진표(眞表) 대사가 크게 깨우침을 얻고 팔공산 동화사에게 진표율종(眞表律宗)를 개창함으로써 시작됩니다. 뿌리가 백제계 종파인만큼 후삼국당시 견훤을 지지했던 것이지요. 고려사 병지에 동화사의 승병 1100여명을 수시로 동원했다는 구절이 나오는데, 하여 동화사의 승병은 대략 1천정도로 추산합니다. 일설에는 파계사도 고려군의 앞길을 막았다는데, 그렇게 되면 많게 잡아 2천정도의 승병이 백안동에서 고려군을 맞이한 셈입니다.
그런데 고려15000 vs 백제 첨병+동화사 승병+(파계사 승병) 1천~2천의 전투는 아주 싱겁게 끝이 나고 맙니다.
공산전투후 왕건이 견훤에게 보낸 답서에 이런 글귀가 있습니다.
삼국유사 견훤편中
桐藪 今桐華寺 望旗而潰散 : 동수 지금의 동화사 는 깃발만 바라보고 도망쳐 흩어졌고
즉 1만5천의 대병을 본순간 1천정도의 동화산 승병들은 우루루 무너져 산으로 도망쳤다는 이야기이지요.
일단 동화사 승병들이 산에서 내려와 백안동에서 고려군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은, 백제군의 정보망이 고려군의 움직임을
이미 꿰뚫고 있었다는 이야기이겠지요. 이는 고려군도 마찬가지였을 겁니다. 하니 실상 매복이나 요격등은 불가능하지 않았겠나 하는 생각도 듭니다. 1만명 이상의 대병들이 움직이는데, 게다가 이동로도 뻔하고 곳곳에 첨병이 배치되어 있는 판국에
드라마처럼 <여기에 매복한다~ 불화살과 돌덩이를 쏴대며 돌격하라~> <앗 매복이다~ 후퇴하라~>는 성립되기 힘든 전장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게다가 전장으로 선택한곳은 죄다 넓디 넓은 평원이였으니 말입니다.
여하튼 동화사 승병은 우루루 산으로 도망쳤고, 같이 있던 백제 첨병도 이사실을 견훤에게 알리기 위해 급히 동쪽으로 말을 몰았을 겁니다. 삼국유사에 동화사 승려 석충(釋沖)이 고려왕 왕건에게 진표율사(眞表律師)의 가사 한 벌과 계간자(戒簡子) 189개를 바쳤다고 하는데, 이 시점이 언제인지는 알수 없으나 급하게 군을 이끌고 가는 고려군을 생각해 보면 훗날의 일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여유있게 동화사 승병을 물리친 고려군은 진군을 계속합니다. 백제군의 정보망에 노출됐다는것을 알아챈 왕건은 군의 진격속도를 높혀 서둘러 은해사로 달려갔을겁니다.
고려 vs 백제 2차교전(주력군)
은해사입구에 도착한 시각은 오후 3~4시경으로 추측합니다. 은해사 입구에 임시로 진을 친 왕건은 곧 군사회의를 열고, 백제군의 위치확인, 백제군을 요격할 장소 등 구체적 작전을 짯을겁니다. 그리고 지금의 외촌 면사무소 등지의 사각에 병력을 배치하고 백제군을 기다립니다. 아마 백제군이 동강을 건너는 직후에 적의 측면을 공격할 요량이었던듯 싶습니다. 황혼이 지는 6~7시경에 드디어 백제군의 선봉이 지금의 금호면에 도착합니다. 아마 고려군이 없었다면 이곳에 진을 치고, 하룻밤을 자고 갔을지도 모를 노릇이겠지요.
당시는 음력 9월 중순을 넘은터라, 벼는 대부분 추수되었고 논바닥은 바짝 말라있던 상태였습니다. 고려군의 움직임을 모를리 없는 견훤왕도 이미 만반의 준비를 하였을 터이지요. 점심도 든든히 먹었을 것이고 군의 사기도 신경쓰면서 곧 교전이 펼쳐지리라는 것을 병사들에게 주지시켜 주었을 것입니다. 죽음을 각오하고 적진 깊숙히 들어와 신라왕을 죽이고 마음껏 신라왕도에서 약탈을 자행한터라 병사들의 사기는 상당히 올라가 있었을 것입니다.
많은 학자들이 말하듯이 매복과 역매복의 전술도 펼쳐졌을 가능성도 있다 하겠습니다. 만약 역매복이라면 일부 병력을 후방으로 빼 적의 좌익 측면을 노렸을 가능성이 높을듯 하네요.
백제군이 역매복을 하였다는 가정하에 가정해본 백제군 별동대 기습로
2차 교전에서 고려군은 수세에 밀리게 됩니다. 진형이 흐트러지자 곧 고려군은 퇴각명령을 내립니다. 좌익부터 동강과 산사이의 평지를 급히 도주했을 것이고 이에 비례하여 고려군은 길게 늘어지게 됩니다. 급하게 퇴각하던 왕건은 은해사 초입의 한 언덕에 올라 속속 태조지앞에 허겁지겁 도주해 오는 아군을 진형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을 겁니다.
이곳에서 군을 수습하고 임시 군사회의를 열었던 곳이라 하여 이봉우리의 지명이 태조지(太祖指)가 되었다 하는데 자세한 곳을 알수가 없고, 단지 은해사 초입이라고만 알려져 있더군요.
태조지에서 임시로 군사회의를 연 왕건은 본군의 피해없는 퇴각을 위해 후위 방어를 맡을 장수를 선택했을 것이고,
남은 장수가 죽음을 각오하고 이곳을 사수하여 본군의 퇴각시간을 조금이나마 벌어주었을 것입니다.
이 장수가 누구인지는 모르나 아마 8장군중 한명이 될듯 하네요. 8장군에 대해서 뒤에 다시 언급하겠습니다.
급하게 퇴각하는 고려본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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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고려군 후퇴와 살내 3차교전
고려군은 아주 급하게 현 지묘동 위에 있는 고개를 넘어갔습니다. 뒤에서는 백제군이 추격나팔을 불며 급하게 추격하였지요.
하여 이 고개를 나팔고개라고 지명이 붙었습니다.
역시 고려왕 왕건이 퇴각중에 왕산에 올랐다고 하여 이산의 이름은 왕산(王山)이라 이름이 붙었습니다.
계속 후퇴를 거듭하던 고려군은 드디어 살내에서 전열을 가듬듬고 반격준비를 시작합니다.
혹은 살내에서 고려증원군이 합류했을것이라는 설도 있더군요.
여하튼 고려군을 추격하느라 역시 길게 늘어졌던 백제군의 선봉도 살내에서 고려군의 반격을 받고 주춤하게 됩니다.
곧 백제군의 본군이 도착하게 되고 양군은 살내에서 재차 대치하게 됩니다.
나팔고개 → 왕산 → 살내까지의 고려군 퇴각로
고려군과 백제군의 제3차 교전장소인 살내천
이 살내는 오늘날 서변천하류로 큰강인 금호강이랑 만나는 지점입니다. 동국여지승람에는 폭이 좁아 물살이 쎄다하여 저탄(猪灘)이라 기록하였으며, 고려군과 백제군이 서로쏜 화살이 내에 가득찼다 하여 살내천이라 이름 지어졌습니다. 한문으로는 전탄(箭灘/화살이 쌓인 여울)이라고 불리더군요.
그럼 여기서 잠깐 시간변화에 대해 알아보지요.
오후 6,7시경에 와촌,금호면 일대에서 2차교전을 시작한 양군은 아마 오후 8~10시까지 격전을 벌렸을 것입니다.
오후 10시경부터 퇴각을 개시한 고려군은 태조지부터 살내까지 약 30km 거리를 급히 도주하기 시작합니다.
뒤쳐지면 죽는 급박한 퇴각길에서 병사들은 죽을힘을 다해 말을 몰거나 뛰었을테니, 새벽녘에는 살내에 도달했을 것입니다.
살내에서 전열을 가다듬은 고려군은 그곳에서 말을잡든, 인근 고을에서 양식을 착출해오든 혹은 원군이 왔던간에
급히 밥을 해먹고 속속 도착하는 고려 패잔병을 수습했을 겁니다. 와촌벌판에서의 전투에서, 추격전에서 많은 손실을 입었더라도
1만명정도로 추산되는 백제군을 이곳 살내에서 일시 몰아부쳤던 기세로 보아 고려군도 족히 1만명은 되지 않았을까 짐작해 봅니다.
한편 고려군을 추격하느라 길게 늘어진 백제군도 속속 살내천에 도달해 감히 도강하지 못하고 본군이 도착하길 기다렸겠지요.
곧 백제 본군이 도착하고 양군은 살내를 두고 치열한 화살싸움을 하게 됩니다.
일단 먼저 도강한 고려군이 상당히 유리한 입장이였지요. 물살이 쎈터라 백제군이 도강하고자 한다면 큰돌을 놓던가, 교각을 설치하던가 해야하는데 이걸 고려군이 가만히 놔두지 않겠지요. 이게 아니다면 멀리 북쪽의 산을 넘어 우회하는 방법도 있긴한데 이렇게 되면 진형이 흐트러질 위험성이 높았지요.
또한 위그림에서 보듯이 고려군은 살내 서쪽에 진을 펼쳤는데, 쫒아온 백제는 살내천에 의해 진형이 둘로 갈린 상태였지요.
지형적으로 고려가 왜 살내에서 반격을 시도했는지 알수 있는 대목입니다. 전장에서 평생을 살아온 왕건 또한 지형지물을 군사적으로 이용하는데 도가 튼 사람이기 때문이였죠.
게다가 또한가지 먼저 기다리는 고려군은 일시 휴식도 취하고 배도 채웠을 터이지만, 밤새 고려군을 쫒아온 백제군은 상당히 배가 고픈 상태였겠지요.
하여 견훤은 일시 후퇴를 결정합니다. 그러나 이 후퇴는 고려군을 궤멸시키고자 하는 술책이였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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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4차교전 공산전투
공산일대에서 고려군 추격개시, 복현동에서 백제군 매복 기습작전 개시
견훤군이 살내에서 퇴각하기 시작하자, 고려군은 이틈을 놓치지 않고 도강하여 추격을 개시합니다.
백제군은 해가 뜰무렵 퇴각을 개시해 무태 → 연경 → 공산까지 퇴각한후 방향을 남쪽으로 돌려 오늘날 불로동 → 지저동쪽으로 도주하기 시작합니다. 허나 이는 유인책이였지요. 지리적으로 불리한 살내에서 싸우기 보다 고려군을 유인하여 매복을 통해 적의 허리를 끊어 버리는 작전을 짜게 된것이였습니다.
고려군은 백제군의 후미를 쫒아 현 불로동까지 추격하게 되었습니다. 이 불로동의 지명의 의미는 조금 후에 다시 언급하겠습니다. 고려군이 금호강을 따라 지저동을 통과하게 됩니다. 이때 복현동(伏賢洞)에서 매복한 백제의 군사가 비교적 물이 얉은
신암 5동일대의 금호강을 도강해 고려군의 측면을 공격하기 시작합니다.
복현동(伏賢洞)은 견훤의 군사가 매복(埋伏)했다하여 복현동, 권훤념이란 지명이 되었습니다.
매복작전에 걸린 고려군
게다가 도주하던 백제 본군도 말머리를 돌려 반격을 시작합니다. 고려군은 앞뒤로 허리가 짤려 전면 선봉은 백제 본군의 공격을 받게 되었고, 우측과 후방은 백제 기습군의 공격을 받게 됩니다. 그야말로 우왕좌왕 허둥대기 시작하지요.
통상적인 진군상태에서 매복기습작전을 당한게 아니라, 급하게 백제군을 추격하는 와중에 기습을 당한터라 군의 동요상태는 한층더 심각한 상태였습니다.
왕건은 패색이 짙어지자 급히 퇴각명령을 내리고 공산까지 퇴각을 합니다.
공산에서 완전히 포위당한 고려군
고려군을 현 지묘동 왕산앞까지 몰아붙인 백제군은 곧 포위섬멸전에 돌입합니다. 고려군은 완전히 독안에 든 쥐였으며 도망칠 곳은 좁다란 산을 기어올라 뿔뿔히 흩어져 도망가는 길밖에 없었지요. 그렇다 하더라도 좁고 험준한 산길로 도망쳐보았자, 얼마 가지 못해 백제군의 추격에 모조리 척살당할 가능성이 높았습니다.
패배는 기정사실이였으며, 이제 남은 병사는 1천도 채되지 않았겠지요. 이에 신숭겸과 김락등은 마지막 묘안을 짜냅니다. 바로 고려왕 왕건을 이 사지에서 벗어나게 하려 했습니다. 만약 오늘 이 전투에서 왕건이 백제군에 사로잡히거나, 목숨을 잃는다면 고려는 사직자체가 흔들려 최악의 경우 망국의 길로 들어설수도 있는 절대절명의 위기였습니다.
하여 국왕을 탈출시킬 묘안을 짜낸 곳이라 하여 이곳의 지명은 지묘동(智妙洞)이라 이름 지어졌지요.
고려군의 최후의 돌격과 파군재에서 괘멸 진행도
신숭겸과 김락이 최후의 돌격을 준비하는 동안 국왕 왕건은 변복을 하고 홀연단신으로 지묘동 북동쪽 산으로 기어올라 동쪽으로 크게 우회하여 남쪽으로 도주합니다. 북쪽으로 향할경우 곧바로 백제군의 추격을 받기 쉬웠기 때문에 왕건은 백제군의 허를 치기 위해 남쪽으로 향하게 됩니다. 그러나 왕건은 곧장 남쪽으로 도주하지는 않았습니다. 죽음으로 자신을 지켜줄 여러 장수와 군졸들의 최후를 직접 보기 위해서인지 현재의 독암서당이 있는 산으로 기어올라가 파군재가 보이는 바위에 숨어 전황을 지켜보고자 하였습니다.
결국 왕의 복장을 한 신숭겸과 김락은 각기 부대를 이끌고 혈로를 뚫어 돌격을 개시합니다. 아마 고려국왕이 도주했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몇몇 장수들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허나 고려병사들은 신숭겸을 국왕으로 알고 모두 마지막 희망을 쫒아 혈로를 뚫었겠지요.
그러나 고려군은 채 1km도 가지 못하고 드디어 오늘날 파군재 삼거리에서 모조리 궤멸되고 맙니다. 그 모습을 300m도 채안되는 독암 바위에서 왕건은 눈물을 흘리며 지켜 보았겠지요.
고려군사가 모두 파군된 언덕이라 하여 이름 붙혀진 파군치(破軍峙)/파군재 (재는 당시 왕도 개성의 사투리로 언덕이란뜻)
고려왕 왕건이 홀로 앉은 바위라 하여 독암(獨巖)/독좌암(獨坐巖)
그러나 신숭겸과 김락은 아직 죽은게 아니었습니다. 평생을 전장에서 보낸 기마대장들 답게 끝까지 저항을 계속 했습니다.
신숭겸의 최후
신숭겸은 파군재에서 모든 고려군사가 괘멸하고 김락이 남쪽으로 도주하자, 방향을 선회해 북쪽으로 말을 몰고 갑니다. 거의 홀연단신으로 백제군을 뚫고 지나가던 신숭겸도 결국 현재의 고려장절신공순절지지(高麗 壯節申公殉節之地)가 세워진 그곳에서 숨을 거두게 됩니다. 당시의 병사들이 신숭겸을 고려왕으로 알고 신숭겸의 목을 베어 창에 꿰고 갔다는 말로 미루워, 당시 백제군내에는 고려왕을 생포 또는 척살하라는 명령이 하달된 상태였던듯 싶습니다. 병사들에게 적왕의 목이란 거의 최고수준의 포상이 기다리고 있던 터라, 앞다퉈 신숭겸을 쫒았던 모양입니다.
왕건은 신숭겸이 전사한곳에 지묘사(智妙寺)를 세워 신숭겸의 명복을 빌었지요.
한편 파군재에서 고려군이 궤멸되고, 북쪽으로 신숭겸이 도주하자 김락은 그 틈을 이용해 계속 남하합니다.
하지만 김락도 얼마 가지 않아, 부상이 심하였던지 산속으로 도주하게 됩니다.
김락의 전사
백제군은 공산전투 당시 김락의 시신을 찾지 못한듯 싶습니다. 워낙 관심이 고려 국왕으로 분한 신숭겸에게 집중되어 있었기에
김락을 끝까지 추적하지는 못한듯 싶습니다. 그러나 김락은 심각한 부상을 입은 상태에서 결국 미리사앞에서 쓰려져 죽게 됩니다.
김락의 죽음에 관한 기록은 역시 공산전투후 견훤이 왕건에게 보낸 서신에 나와 있습니다.
927년 12월 고려사 기사中
月內,左相金樂,曝骸於美利寺前 : 이번달(12월)에는 좌상 김락이 미리사 앞에서 해골을 들어냈고
그런데 고전번역원이나 많은 서적에서 이를 오역하는 덕에 많은 혼란이 있게 됩니다.
고전번역원의 고려사절요 국역中
(12월)이달 안에 좌상(左相) 김낙(金樂)이 미리사(美利寺) 앞에서 쓰러져 죽었으며
또한 동사강목의 안정복은 고려사절요의 기록을 보고 김락의 죽음을 12월로 생각해
견훤의 서라벌 입성을 11월로 보아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동사강목 927년 기사中
동11월 진훤이 왕을 포석정(鮑石亭)에서 시해하고 문성왕(文聖王)의 후손 김부(金傅)를 세워 왕을 삼은 다음, 크게 노략질하고 돌아가니, 고려가 구원했으나 미치지 못하였다.
또 인터넷에 떠도는 국역된 삼국유사에서는 역시 김락의 전사를 12월로 적어 놓았더군요.
국역 삼국유사中
또 이달(12월) 안에는 좌장(左將) 김락(金樂)이 미리사(美利寺) 앞에서 전사(戰死)했소
삼국유사 원본中
月內, 左將 金樂 曝骸 於 美利寺 前, : 월내에는 좌장 김락이 미리사앞에서 해골을 들어냈으며
이렇듯 김락의 죽음에 대한 오역으로 인해 공산전투가 12월에 벌어진것이 아니냐?는 의견을 일부 사학자들이 주장하기도 하였으나 앞뒤 정황상, 또한 견훤이 왕건을 추격하기 위해 들판에 쌓아둔 벼를 불살랐다는 기록으로 미루워 한겨울인 음력 12월이 아니라, 늦가을인 음력 9월이 공산전투가 벌어진것이 확실하다고 생각됩니다. 또한 김락의 해골이 발견된것이 산중 미리사 앞인것을 생각해보면 부상을 입고 도주중인 김락이 산을 올라 미리사까지 갔다가 쓰러져 그자리에서 죽은걸로 생각됩니다. 공산전투 직후 견훤은 왕건을 추적하기 위해 공산일대를 쥐잡듯이 수색하였으며, 결국 12월초에 미리사앞에서 찾은 시신이 김락의 시신임을 알게 된것은 아닌지 생각해 봅니다.
미리사는 현재 그 위치를 알수 없으나 제 짐작으로는 위그림의 장소가 아닐까 얼핏 짐작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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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홀연단신 왕건 도주
다시 시간변화를 살펴보지요. 새벽녘에 살내에서 반격전을 시도했던 고려군은 아침무렵까지 살내천을 사이에 두고 치열한 화살싸움을 벌인듯 합니다. 곧 해가 뜨자 백제군은 살내에서 허기진 배를 채우고, 공산으로 퇴각을 개시합니다. 아침 8~9시부터 추격전을 개시한 고려군은 7km가량을 추격하여 오전 11시쯤에 지저동까지 추격하게 됩니다. 오전 11시 복현동에서 매복한 백제군이 측면을 기습하자 고려군은 일대 혼란에 빠지게 됩니다. 치열한 교전끝에 퇴각명령을 내린 왕건은 오후 2~3시쯤 지묘동까지 밀리게 됩니다. 포위망을 구축하고 급하게 몰아쳐 오는 백제군을 따돌리기 위해 왕건이 변복을 하고 도주를 시작한때는 오후 3시경이 되겠지요. 3시부터 동쪽으로 크게 돌아 독암에 올라갔을때는 오후 5시쯤. 끝까지 시간을 벌고 있던 신숭겸과 김락이 최후의 돌격전을 감행한 시각은 역시 오후 5시경. 드디어 해질무렵 신숭겸은 석양을 뒤로하며 숨을 거두었고, 김락도 초저녁에 미리사까지 올라가 그곳에서 최후를 맞이 했습니다.
시간변화는 왕건이 도주하면서 들린 지역의 지명을 통해 얼추 유추가 가능합니다. 허나 위에 언급한 시간은 제가 짐작한것이지,
실제일지 아닐지는 그때 살았던 사람이 아니면 아무도 알지 못할듯 하네요.
자그럼 절체절명의 위기 고려국왕 왕건은 대체 어떻게 혈로를 뚫고 무사히 황도로 돌아갈수 있었던 것일까요?
이제부터 알아보겠습니다만, 정말 글이 너무너무 길어져 부득히 하게 다음편으로 넘기고자 합니다.
매번 약속을 못지켜 정말정말 죄송합니다. 원래는 이글의 주제인 강주호족관련글을 위주로 쓰려 하였는데,
이 공산전투는 대충 넘기기가 아쉬워 부득히 굉장히 상세하게 글을 쓰게 되었네요.
다음 7부에는 정말 끝을 내도록 하겠습니다.
-2009년 추석에 길공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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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공산전투에서 전사한 8장군에 대한 글을 깜박할뻔 했네요.
일단 제가 2년전에 후삼국인물열전 900여명을 조사하면서 알아낸 바있는
8장군중 6인 신숭겸(申崇謙), 김락(金樂), 호의(扈義), 전의갑(全義甲), 전이갑(全以甲), 전락(全樂)은 거의 확실한듯 싶습니다.
나머지 2인에 대해서는 최근에 조금 생각하고 알아본바 유력한 인물 둘을 찾아냈습니다.
바로 김철(金哲)과 손행(孫幸)입니다. 저는 김락의 동생으로 김철(金鐵)[공산전투 직후 태조에 의해 특별히 원윤으로 승진, 후에 대상까지 벼슬이 올라 일리천 전투에서 우익을 맡음]만을 생각했는데 고려사를 살펴보다 다음의 기록을 찾아내게 되었습니다.
고려사 열전 윤소종(尹紹宗)편中
在太祖時,金樂金哲,尙不得與六功臣之列
윤소종이 말하기를 "상벌은 나라의 최대 권한이니 함부로 내릴 것이 아닙니다. 우리 태조는 40년간 정벌하였는데도 공신이라고 부르는 자가 6명이었습니다. 김락(金樂), 김철(金哲)은 태조 대신에 죽었으나 그래도 6공신의 대열에 들지 못하였습니다."
김철(金哲)이 김락의 또다른 동생인지는 알수 없으나, 당시 공산전투에서 유독 형제들이 많이 참전한것으로 미루워, 같은 부대에 형제장수들이 배속이 많이 되어 있던 모양입니다. 하여 김철(金哲)도 김락의 형제중 한명으로 김락(金樂),김철(金哲),김철(金鐵)
3형제가 아니었을까 생각됩니다. 물론 김락(金樂),김철(金哲)은 공산에서 전사한것으로 보구요.
나머지 1인은 처음에 저는 동국여지승람에 모사태조 하였다가 견훤과 싸워죽었다는 김홍술(金洪術/金弘述)도 포함되지 않나 생각했는데, 만약 의성의 홍술과 김홍술이 동일인물이라면 당시 홍술은 2년후에나 전사함으로 8장군은 아닌듯 싶습니다.
하여 확실치는 않지만 단지 공산전투에 참전했을것으로 생각되는 앞서 말한 1만병을 거느린 공훤,손행,연주중에
공훤과 연주는 일리천 전투에 참전하지만 손행은 그이름이 더이상 사서에 나오지 않는점 때문에 손행이 2인중 1인이 아닐까 짐작해 봅니다. 대상정도의 벼슬을 지낸 손행이 일리천 전투에 참전치 않았다는 것은 상당히 의외이기 때문이지요. 왕건은 신임한 무장은 끝까지 믿어주는 군주였기에 손행이 더이상 사서에 등장하지 않는다는 점은 그가 공산에서 전사했을 가능성도 있기 때문 아닐까 짐작해 봅니다.
하여 제가 조사한바 공산에서 전사한 팔공신은 다음과 같습니다.
신숭겸(申崇謙),김락(金樂),호의(扈義),전의갑(全義甲),전이갑(全以甲),전락(全樂),김철(金哲),손행(孫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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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삼국인물열전 1100여명中
김철(金鐵) 고려
고려의 개국공신 김락의 동생으로 김락이 공산전투에서 전사하자 태조가 애통해하여 김철을 원윤(元尹)으로 삼았다. 일리천 전투에 벼슬은 대상으로 홍유, 수향(守鄕),왕순(王順),준량(俊良)과 함께 보병과 기병 3만 명을 인솔하여 우익(右翼)을 맡았다.
김철(金哲) 고려
중화김씨(中和 金氏)의 시조로 신라 문성왕의 5세손이다. 당악김씨(唐岳 金氏)의 시조인 고려 개국공신 장절공 김락(金樂)의 동생이며, 김철 또한 고려의 개국공신이 되었다. 본향은 순천(順天/평남 순천)이였으나 후에 중화(中和/평남 중화)로 나왔다. 중화는 고려초에 서경에 편입되어, 형 김락과 함께 서경개척에 공을 세웠다. 927년 9월 공산전투에서 형 김락과 함께 참전하여 전사하였다.
호의(扈義)/호원보(扈元甫) 고려
(?~927) 신평호씨(新平扈氏)의 시조이며, 고려 태조 1년 건국에 공을세워 개국공신에 책록되었고, 서기 927년(고려 태조 10년) 평장사(平章事)로서 공산(公山) 전투에 참전하였다가 후백제 견훤군에게 포위되어 위기에 처한 태조 왕건을 신숭겸(申崇謙)과 함께 역전고투(力戰苦鬪) 끝에 구출하고 전사(戰死)하여 태사(太師)로 추증되고 희개(禧開)라 시호(諡號)를 받았다. 배현경,신숭겸, 복지겸, 홍유, 유금필와 함께 6태사로 불리운다.
전의갑(全義甲) 고려(정선호족)
( ?~927 ) 정선호족 전우상(全禹相)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릴적부터 형 전이갑과 더불어 정선의 두영웅으로 불리었다. 형 전이갑(全以甲)과 더불어 공산전투에서 왕건을 호위하다 전사했다. 죽산군 봉호를 받고 시호는 충강(忠康)이다.
전락(全樂) 고려(정선호족)
(?~927 ) 고려의 장수로 환성군 전섭의 16대손이며 천안 전씨의 시조이다. 전이갑의 사촌 동생으로 삼사 좌복야에 임명되어 공산전투에서 왕건을 호위하다 전사했다. 천안군 봉호를 받고 시호는 충달(忠達)이다.
전이갑(全以甲) 고려(정선호족)
( ?~927 ) 정선호족출신으로 자는 자경(子經), 호는 도원(桃源), 시호는 충렬(忠烈)이다. 고려 개국 때 태사공(太師公)으로 공을 세워 개국공신에 책록되었다. 정선전씨의 중시조이며 정선군 전휘선(全諱宣)의 7세손 전우상(全禹相)의 아들로 태어났다. 자라면서부터는 용모가 빼어나고 지용이 절륜하여 문사에도 통달하였다고 한다. 동생 전의갑과 더불어 정선의 두영웅이라 불리었다. 태봉의 기랑(騎郞)일때 왕건을 만났는데 왕건이 그 임물됨을 알아보고 크게 기뻐하며 말하기를 이는 세상의 영웅이라 삼수의 창생들이크게 구제하기를 기대한다고 하였다.그후 왕건을 왕으로 모시고 고려를 세우니 무우년(戊牛年)에 양주(楊洲)를 정벌하여 평정하고 경신년(庚申年)에 광주,청주를 정벌하여 적을 전멸하고, 병인년에 견훤을 상주에서 몰아 내고 그 땅을 개척하였으며 정묘년에 또 견훤을 나주에서 대파하여 진을 설치하고 돌아오니 그때에 태조(왕건)의 이름이 크게 떨치어 조정과 백성이 모두 그를 따르게 되었다.태조3년에 견훤이 신라를 침공하므로 신라의 사신 금율이 와서 도와줄 것을 간청하여 태조가 전이갑과 신숭겸에 명하여 구원케하니 견훤이 그 소문을 듣고 싸우지도 않고 퇴각하였다.이때 전이갑이 신숭겸에게 이르기를 견훤이 강폭해서 항상 변방의 우환꺼리가 되니 이 기회에 그를 전멸시킴이 좋겠다 하고 그를 끝까지 쫓아 추격하니 그의 군사는 거의 전멸하고 견훤만 겨우 목숨을 건져 도망쳤다.태조8년에 태사에 임명되었으며 태조10년에 다시 견훤과 달성 공산 오동나무 숲에서 격전하다가 드디어 패하여 궁지에 몰리었다.견훤이 포위하고 맹공을 가하므로 사태가 위급한지라 신숭겸이 태조와 옷을 바꾸어 입어 왕을 탈출시키고 전이갑은 동생 전의갑, 사촌동생 전락과 더불어 끝까지 싸우다 전사하였다. 그후 태조가 크게 슬퍼하시며, 전이갑에게 정선군(旌善郡) 봉호와 시호를 충열(忠烈)이라 내리고 후손에게는 조세와 각종 국가의 부역(부역)을 면제해 주었다고 한다.
신숭겸(申崇謙)/능산(能山) 고려
신숭겸(申崇謙)의 처음 이름은 능산(能山)이니 광해주(光海州) 사람이다. 체격이 장대하고 용맹이 있었다. 10년에 태조가 공산(公山) 동수(桐藪)에서 견훤(甄萱)과 싸우다가 불리하게 되어 견훤의 군대가 태조를 포위하였는데 형세가 심히 위급하였다. 이때 신숭겸이 대장으로 있었는데 원보(元甫) 김락(金樂)과 더불어 힘껏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태조가 그의 전사를 매우 슬퍼하였으며 시호를 장절(壯節)이라 하고 그의 동생 신능길(申能吉), 아들 신보(申甫) 및 김락의 동생 김철(金鐵)을 모두 원윤(元尹)으로 등용하고 지묘사(智妙寺)를 창건하여 그의 명복을 빌게 하였다.
손행(孫幸) 고려
고려의 대상(大相)으로 태조10년 9월 백제가 고울부를 점령하고 경주에 다다르자, 신라는 급히 연식(蓮式)을 파견하여 원군을 요청하였다.태조이 명을 받고 손행은 시중 공훤(公萱)과 더불어 1만의 군사를 이끌고 구원하러 갔으나 때가 늦어 신라 황도는 이미 점령된 후였다. 이에 태조가 급히 기병 5천을 더해 원군으로 내려오자, 공산에 합류하여 견훤과 대결하였으나 크게 패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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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증동국여지승람 의성현(義城縣) 편中
사직단은 현 서쪽에 있다. 문묘 향교에 있다. 성황사(城隍祠) 현 북쪽 3리에 있다. 속담에 전하기를, “김홍술(金洪術)의 모습이 고려 태조(太祖 왕건(王建))와 비슷했는데, 백제의 견훤(甄萱)과 싸우다 패배하여 죽었다. 이에 여기에서 제사지낸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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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좋은 자료 감사합니다.
제가 건강이 좋지못해 자주 들어올수 없어서 이제야 귀한 것을 봤네요!
잘 읽었습니다.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