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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6대 고종실록]
[1. 수난의 왕 고종과 조선왕조의 몰락]
(1852-1919. 재위 기간 1863년 12월-1907년 7월, 43년 7개월)
안동 김씨의 60년 세도 정치는 왕권을 극도로 약화시켰으며, 그것은 곧 사회의 혼란과불안으로 이어졌다. 게다가 일본과 서구 열강이 점차 조선을 압박해 오고 있었다. 고종은 이 같은어려운 시기에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올라 몰락해가는 왕조와 풍전등화와 같은 국가를 지키기 위해안간힘을 쓰지만 수난과 고통 속에 외세에 의해 강제 퇴위당하고 만다.
고종은 1852년 남연군의 아들 흥선군 이하응과 여흥부대부인 민씨의 둘째아들로 태어났다.
아명은 명복, 자는 성임이다. 이후 헌종의 모후 조대비에 의해 익성군에 봉해지고 1863년 12월
조선 제26대 왕으로 등국했다. 이때 그의 나이 12세였다.
고종이 왕위에 오를 당시 조정은 안동 김씨으 손아귀에 있었다. 그들은 순조 이후 반세기이상을 계속해서 권력을 독점하고 있는 상태였는데, 헌종의 어머니이자 효명세자(익종)의 부인인신정왕후 조씨는 이 같은 권력 구도를 깨뜨리기 위해 남연군의 아들 이하응과 결탁하여 그의아들 명복을 왕위에 앉히게 된다.
둘째아들 명복을 즉위시키기 위한 이하응의 계략은 치밀했다. 안동 김씨 세력의 경계에서벗어나기 위해 건달들과 어울려 지내는가 하면, 안동 김씨 가문을 찾아다니며 구걸을 하기도했다. 이 같은 호신책 덕분으로 목숨을 부지한 그는 철종의 죽음이 임박하자 익종비 조대비와연줄을 맺어 자신의 둘째아들 명복을 왕위에 앉히려 한다. 조대비 역시 그와 마찬가지로 안동김씨의 세도에 짓눌려 지내던 처지였기에 이하응과 뜻을 같이하게 된다.
1863년 12월 철종이 죽자 조대비는 이하응의 둘째아들 명복을 양자로 삼아 익종의 뒤를 잇게
하고, 자신이 수렴청정을 하였다. 그리고 흥선군 이하응을 흥선대원군으로 봉하고 섭정의 대권을그에게 위임시켰다. 이로써 고종을 대신한 흥선대원군은 향후 10년 동안 권력을 쥐고 자신의
의지대로 정사를 운영하게 된다.
섭정의 대권을 위임받은 흥선대원군은 가장 먼저 안동 김씨의 세도 정치를 분쇄하여 쇠락한왕권을 되찾고 조선을 압박해오는 외세에 대적하기 위한 과감한 개혁 정책을 추진한다. 그는 우선 당색과 문벌을 초월하여 인재를 고루 등용하고 당쟁의 근거지가 된 사원을철폐하는 한편, 토색을 일삼아 주구로 전락한 탐관오리들을 처벌하고 양반과 토호의 면세 전결을철저히 조사하여 국가 재정을 충당했다.
이 밖에 민간의 부담을 줄이기 위해 무명잡세를 없애고, 궁중에 특산물을 바치는 진상제도를
폐지했으며, 은광산을 개발하는 것을 허용하여 경제에 도움이 되도록 했다. 또한 사회의 악습을
개선하고 복식을 간소화했으며, 군포세를 호포세로 변경하여 양반도 세금을 부담하도록 했다.
한편 '대전회통', '유전조례', '양전편고'등의 법전을 편찬하여 법질서를 확립시켰고 비변사를
폐지하고 의정부를 부활시켜 삼군부를 두어 군국 기무를 맡게 함으로써 정무와 군무를분리시켰다
흥선대원군은 이처럼 민심을 수습하고 국가 재정을 확립했으며 경제, 행정 개혁 등으로세도 정치의 폐해를 완전히 일소하는 성과를 거두어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몇 가지 무리정책과 세계 정세를 정확하게 읽어내지 못한 채 지나친 쇄국 정책을 폄으로써 어려움에 처하기도한다.
우선 왕의 위엄을 세우고자 경복궁을 중건하는 과정에서 원납전을 징수하고 문세를 거두는것도 모자라서 허락 없이 전국에서 거석과 거목을 징발하여 백성들의 원성을 사기도 했다. 또한천주교도들에 대한 지나친 박해로 인해 자신의 정치 생명에 타격을 입기도 했다.
그는한때 천주교도들이 건의해온 이이제이(오랑캐로써 오랑캐를 제압한다)의 논리에 흥미를 가진적도 있었지만 이 때문에 도리어 정적들에게 탄핵의 빌미를 주게 되자 정치적 생명에 위협을느낀 나머지 천주교 박해령을 내려 1866년부터 1872년까지 6년 동안 8천여 명의 신자들을학살하였다. 이것이 바로 '병인박해' 혹은 '병인사옥'이라 불리는 사건이다.
천주교 신자에 대한 이 같은 박해로 프랑스 신부 9명이 죽자 프랑스는 그 보복으로 1866년10월 군함 7척에 총병력 1천 명을 승선시키고 강화도를 점령하였다. 이에 조선군은 강화도 수복계획을 구상하고 그들을 공격했지만 화력이 밀려 실패하였다. 그러나 제주목사 양헌수의전략으로 정족산성 싸움에서 승리하여 프랑스 군을 격퇴하였다. 이 사건을 '병인양요'라고 한다.
그리고 이 사건보다 2개월 먼저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온 미국상선 제너럴셔먼 호가 통상을 요구하다가 평양군민의 화공으로 불타버린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은 5년 뒤인 1871년에'신미양요'로 발전하게 된다.
미국은 셔먼 호 사건이 발생하자 조선 개항 문제에 적극적인 관심을 표명하게 된다. 그리고 두
번에 걸친 탐문 항행을 실시하면서 셔먼 호에 대한 손해 배상을 요구하는 동시에 통상 관계를수립하기 위해 두 번에 걸쳐 조선 원정을 계획했지만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하지만 그들은1871년 5월 조선 원정을 결행하기로 하고 군함 5척, 병력 1천2백여 명, 함포 85문 등으로무장하고 강화도 해협으로 침입해왔다.
미국 군함이 강화도로 접근해오자 조선군은 그들에 대한 기습 공격을 감행한다. 이것이 이른바'손돌목 포격 사건'으로 조·미간의 최초의 충돌이었다. 이 사건 이후 미국은 보복 상륙 작전을 벌이겠다고 위협하면서 평화 협상을 제의했다.
하지만조선의 거부로 평화 협정이 결렬되자 그들은 대대적인 상륙 작전을 감행해 강화도 초지진에 무혈입성하였다. 이후 조선 수비병은 광성보에서 전투를 벌였지만 패하였고, 강화도는 완전히 미군의손아귀에 넘어가고 말았다. 하지만 그들은 흥선대원군의 강력한 쇄국 정책에 밀려 결국 점거1달여 만에 강화도에서 물러갔다.
병인양요와 신미양요는 프랑스와 미국이 조선과 통상 무역을 하기 위해 벌인 침략 전쟁이었다.이는 오히려 조선민들의 감정만 자극시켜 척화비를 세우는 등 흥선대원군의 쇄국 정책이 더욱강화되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하지만 흥선대원군의 쇄국 정책은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12세의 어린 나이로 즉위한 고종이어느새 20세를 넘겨 성인이 되면서 친정을 원하고 있었으며, 1866년에 입궁한 고종비 민씨가대신들과 유럽을 앞세워 대원군 하야 공세를 벌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마침내 1873년 고종이서무를 친히 결재하겠다는 명을 내리고 통치 대권을 장악하게 되자 대원군은 정계 일선에서물러나게 되었다.
고종의 친정이 시작되자 정권은 왕비 민씨의 척족들이 장악했다. 민씨 척족들은 흥선대원군이
취했던 강력한 쇄국 정책과는 달리 안으로는 일부 세력의 대외 개방 여론과, 밖으로는 운요 호
사건 이후 무력 시위를 하고 있던 일본의 국교 요청을 받아들여 1876년 일본과 강화도에서'병자수호조약'을 맺었다.
신미양요 이후 쇄국 정책을 더욱 강화한 조선에서 대원군이 물러남으로써 점차 대외 개방에
대한 여론이 높아가자 일본은 1875년 2월부터 군함을 이끌고 동해와 남해, 황해 등에서 무력
시위를 벌이게 된다. 그리고 결국 병력을 이끌고 강화도로 침입해오자 조선군은 영토에 대한불법 침입을 이유로 발포한다. 일본은 이 조선군의 발포를 빌미로 대대적인 공격을감행해 영종도에 상륙했고 그에 대응하기 위해 조선군은 군사를 동원해 그들과 일전을 벌였지만패배하고 말았다.
일본군은 한동안 영종도를 점거하고 있다가 조선의 감정이 악화되자 일단 물러났다. 하지만
조선 영해에 계속해서 군함을 진주시켜 무력 시위를 벌이며 개항을 요구했고, 마침내 1876년 2월강화도에서 조·일수호협약이 체결되면서 제물포항이 개항되고, 이후 부산과 원산항도개항되었다.
일본과 수교 이후 고종은 미국, 프랑스, 러시아 등의 구미 열강과도 차례로 조약을 맺고 통상관계를 가지는 개항 정책을 실시하였다. 또한 이러한 일련의 개화 시책을 실시하면서 한편으로는관제와 군제를 개혁하고 젊은 개화파로 형성된 신사유람단과 수신단을 일본에 지속적으로파견하여 새로운 문물을 학습하게 했다.
하지만 개항 이후 일본의 정치적, 경제적 침투가 가속화되자 국내에서는 개화파와 수구파의
대립이 심각한 양상으로 치닫기 시작했다. 1881년 황준헌이 '조선책략'을 유입하여 반포한사건을 계기로 수구를 주장하던 위정척사파는 마침내 척사상소운동을 일으켜 민씨 정권을규탄한다. 이때 안기영 등의 대원군 주변 세력은 고종의 이복형인 이재선을 왕으로 옹립하기위해 국왕 폐립운동을 전개하였다. 이 역모는 일부 관계자들의 고변에 의해 서전에 적발되었고,고종과 민씨 일파는 이를 빌미로 척사상소운동을 강력히 제압하여 가까스로 정국을 수습하였다.
하지만 개화파와 위정척사파의 알력은 더욱 심해졌다. 그리고 마침내 1882년 구식 군대 폐지와관련하여 5군영에 소속됐던 군인들에 의해 임오군란이 일어났으며, 이어 1884년에는 개화파의갑신정변이 발생했다.
임오군란 때는 흥선대원군이 반란 세력을 등에 업고 궁중에 들어와 대권을 장악했다가 곧청군에 의해 납치되었고, 1884년 갑신정변 때는 궁중을 습격한 개화 세력이 정권을 장악했다가청군에 의해 밀려남으로써 왕권이 크게 실추되었다. 뿐만 아니라 청과 일본이 이 변란을 계기로조선에 진주해 세력 다툼을 벌여 조선의 자주권은 치명적인 손상을 입게 되었다.
이 두 사건 이후 민씨 정권과 고종은 친청 정책을 펼치면서 새로운 국면을 모색했지만급격하게 변화하는 동북아시아의 정세에 효과적으로 대처하지 못해 혼란은 점차 가중되었고 전국곳곳에서 반봉건, 반외세의 기치를 내건 민란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급기야 그것은 1894년 3월동학혁명으로 폭발되어 관군과 농민 사이의 전면전으로 발전하였다.
'보국안민'과 '폐정개혁'을 기치로 내건 농민들의 기세가 걷잡을 수 없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자
고종과 민씨 세력은 청에 원병을 청하였고, 청이 이에 응하자 일본 역시 그들간의 조약을 빌미로군대를 동원하였다. 이처럼 외세가 개입하자 농민군과 관군은 회담을 통해 화의를 약속하고
싸움을 중단하였다.
하지만 조선에 진주한 청·일 양국군은 돌아가지 않았다. 일본은 청에게 함께 조선의 내정개혁을 실시하자고 제의하였지만 청은 이 제의를 거절했다. 그러자 일본은 단독으로 민씨 정권을
몰아내고 흥선대원군을 앉혀 꼭두각시 정권을 탄생시켰다. 그 뒤 개혁 추진 기구로서군국기무처가 설치되었고, 김홍집이 중심이 되어 내정 개혁이 단행되었다. 이것이 갑오경장이다.
일본은 이처럼 단독으로 조선의 내정 개혁을 단행함과 동시에 조선에 주둔하고 있던 청군을
공격하여 승리한 뒤 정식으로 청에 선전포고를 하였다. 7월에 시작된 청·일 전쟁은 두 달 만에
구미 열강의 지지를 등에 업은 일본의 승리로 끝났다.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정복을 위해 내정 간섭을 시작했다. 이때문에 해산되었던 동학군이 '외세배격'을 기치로 내걸고 다시 소집되어 대일 농민전쟁을감행하였다. 하지만 관군과 일본군의 화력에 밀린 농민군은 그 해 12월 패배하여 동학 농민군의봉기는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이후 일본의 조선에 대한 내정 간섭은 더욱 강화되었다. 그러나 당시 일본은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대가로 받은 요동반도를 러시아, 독일, 프랑스의 삼국 동맹군의 힘에 굴복해 다시 청에
돌려준 상태였다. 조선 조정은 이 같은 정세를 감지하고 배일친러 정책을 실시하여 일본군을
조선에서 몰아내고자 하였다. 이에 위기감을 느낀 일본은 1895년 8월 대러 관계를 주도하고
있던 명성황후를 시해하고 친일 세력으로 하여금 조정을 장악하게 하는 '을미사변'을 일으킨다.
을미사변으로 왕비를 잃은 고종은 일본의 압력으로 다시 죽은 명성황후를 폐위시켜 서인으로
전락시키는 조처를 취하게 된다. 그러나 일본의 을미만행은 국제 사회에 알려져 지탄을 받게되었고, 일본은 이 사건을 사죄하고 형식적인 진상 조사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서인으로폐위되었던 명성황후는 다시 신원될 수 있었다.
한편 명성황후 시해 사건이 일반 민간에 알려지자 전국 각지에서 의병이 일어나 관군과일본군에 대항하여 치열한 싸움을 전개했다. 이에 당황한 일본은 전국 각처로 주력 부대를출동시켜 진압을 서둘렀지만 의병은 좀체 사라지지 않았다.
을미사변 후 신변에 위협을 느끼고 있던 고종은 일본 군대와 친일 세력의 어수선한 틈을이용해 은밀히 러시아와 내통하고 1896년 2월 러시아 영사관으로 몸을 옮긴다. 고종은 여기에서
친러 정권을 수립하여 친일 내각의 요인들을 역적으로 규정지으며 단죄하였고, 갑오경장 때
실시된 단발령을 철폐하는 한편 의병 해산을 권고하는 조칙을 내렸다.
그러나 친러 내각이 집권하면서 열강에 많은 이권이 넘어가는 등 나라의 위신이 추락하고
권익을 잃어 국권의 침해가 극심해진다. 이에 독립협회를 비롯한 국민들은 국왕의 환궁과 자주
선양을 요구하기에 이른다. 이 같은 여론에 밀려 고종은 1897년 2월 아관으로 떠난 지 1년 만에
환궁하여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고치고 황제에 올라 연호를 '광무'라 하였다.
대한제국이 성립되자 고종의 신변 위협은 더욱 심화된다. 1898년 7월 안경수가 현역, 퇴역
군인들을 매수하여 황제 양위를 계획하다가 실패하였고, 또 9월에는 유배되어 있던 김홍륙이
차에 독을 타는 사건이 발생하는 등 고종을 위협하는 일이 연달아 일어났다. 또한 그 무렵독립협회 회원들을 중심으로 만민공동회가 만들어져 맹렬하게 자유민권운동을 전개하고 있었다.
그러나 고종은 보부상과 군대의 힘을 빌려 이들을 진압하였다.
1904년 러시아와 일본간에 전쟁이 일어나 일본군의 군사적 압력이 격해지는 가운데 장호익
등이 다시 황제 폐립 음모사건을 일으켰고,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고종에게 군사적
압력을 가하여 제1차 한·일협약을 강요했으며, 1905년에는 일본과 을사보호조약을 체결하고
말았다.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자 고종은 미국에 이 조약의 무효를 호소하기 위해 1905년 11월 미국
공사로 있던 헐버트에게 밀서를 보냈다. 하지만 미국은 그 당시 이미 필리핀에서 미국의우월권을 인정받는 대신 대한제국에 대한 일본의 지배를 용인하는 '가쓰라·태프트협정'을 체결한상태였다. 따라서 미국이 고종의 밀서에 호응할 까닭이 없었다.
일본의 강제적인 보호 조약에 대한 무효를 선언했지만 미국의 호응을 받지 못한 상태에서고종은 일본이 설치한 통감부에 의해 외교권이 박탈당하자, 대한제국 문제를 국제 사회에 알리기위해 1907년 6월 네델란드 헤이그에서 개최된 제2차 만국평화회의에 특사를 파견할 계획을세웠다. 특사로 내정된 사람은 전 의정부참찬 이상설과 전 평리원감사 이준이었다.
이들을 특사로파견한 고종은 다른 한편으로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에게 친서를 보내 이들 특사 활동을지원해 줄 것을 요청한다. 그러나 영국과 일본의 방해로 고종의 밀사 계획은 수포로돌아가고 이사건으로 이완용, 송병준 등 친일 세력과 일본의 강요에 의해 고종은 이 해 7월 20일 퇴위하게된다.
고종은 순종에게 선위한 후 태황제로 물러났고, 1910년 일제가 대한제국을 무력으로 합방하자이태왕으로 불리다가 1919년 정월에 68세를 일기로 세상을 떴다. 이때에 전국 각지에 그가
일본인에 의해 독살당했다는 소문이 퍼져 민족의 의분을 자아냈으며, 국상이 거행될 때3·1만세운동이 일어났다.
고종은 명성황후 민씨를 비롯한 7명의 아내를 두었으며, 그들에게서 6남 1녀를 낳았다. 능은
홍릉으로 경기도 미금시에 있다. 고종에 이어 순종이 즉위하긴 하지만 실질적으로 보면 고종이 조선의 마지막 왕이나 다름없다.그것은 이미 그가 집권하던 시기에 일본에 의한 강제적인 보호조약이 이루어졌고, 또한 그가일본의 강권에 의해 퇴위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 이후에도 경술국치를 보았고, 다시 9년을 더살며 일본의 식민 통치를 목격했기 때문이다.
어느 나라든 망국의 상황에서는 많은 사건들이 벌어지게 마련이다. 조선의 멸망 과정에서도예외는 아니었다. 이 사건들이 발생한 것은 지금으로부터 불과 1백 년도 되지 않았다. 따라서당시의 상황이 아주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게다가 그 사건들은 아직까지 우리 사회에 막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는 실정이다.
[2. 고종의 가족들]
고종은 명성황후 민씨를 비롯하여 7명의 아내에게서 6남 1녀를 얻었는데, 명성황후 민씨가
왕자 척(순종)을 낳았으며, 귀비 엄씨가 영친왕을, 귀인 이씨가 완화군 등 2남을, 귀인 장씨가
의친왕을, 귀인 정씨가 1남, 귀인 양씨가 덕혜옹주를 낳았다.이들 중 명성황후와 영친왕, 의친왕의 삶을 약술하고 참고로 흥선대원군의 약력을 함께 붙인다.
흥선대원군 이하응(1820-1898)
인조의 셋째아들인 인평대군의 6대손인 남연군의 넷째아들이다. 남연군이 어릴 때 사도세자의둘째아들 은신군의 양자로 입적되었기에 촌수로 따지면 흥선대원군은 영조의 고손자가 되는
셈이다. 그의 이름은 하응이며, 자는 시백, 호는 석파였다. 12세에 어미니를 여의고 17세에 다시아버지를 여읜 뒤 사고무친의 상태에서 불우한 청년기를 보냈다. 21세가 되던 1841년 흥선정이되었고, 1843년 흥선군에 봉해졌으며, 1846년 수릉천장도감의 대존관이 된 뒤 종친부의 유사당상, 오위도총부의 도총관 등의 한직을 지내면서 안동 김씨의 세도 정치하에서 불우한 시절을 보냈다.
철종 시대에는 안동 김씨가 권력을 독점하며 왕실과 종친에 갖가지 통제와 위협을 가했으므로,호신책으로 천하장안이라고 불리는 시정의 무뢰한인 천희연, 하정일, 장순규, 안필규 등과 어울려파락호 생활을 하였다. 또 이때 그는 안동 김씨 가문을 찾아다니며 구걸도 서슴지 않았기에궁도령이라는 비웃음을 사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시정잡배와 어울려 지내는 호신 생활을 통하여서민 생활을 체험했으며, 민간의 바람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그러던 흥선군은 1863년 12월 자신의 아들 명복이 왕위에 오르고 자신 또한 흥선대원군으로
봉해져 신정왕후로부터 섭정의 대권을 위임받자 대대적인 개혁을 단행하였다. 서원 정리,무명잡세 폐지, 법전 편찬, 비변사 폐지 등을 시행하면서 안동 김씨의 세력을 눌러 왕권을강화하고 외부적으로는 철저한 쇄국정책을 추진하였다.
그의 이러한 혁신으로 인해 조선 사회는 조금씩 제 모습을 찾아가고 있었지만, 한편으론경복궁의 무리한 중건과 지나친 쇄국 정책으로 인한 천주교 박해 등으로 말미암아 안팎으로의어려움이 초래되기도 했다.
그는 1873년 11월 고종과 명성황후에 의해 대권에서 손을 떼야 했다. 외척세력을 두려워 한
나머지 영락한 향반 여흥 민씨 가문에서 왕비를 간택했지만, 오히려 그녀에 의해 정치적으로
수세에 몰리게 되었다. 고종은 그 당시 이미 22세의 성년으로 친정을 원하고 있었고, 왕비 민씨는 대원군 축출 작업을추진하여 마침내 최익현의 대원군 탄핵 상소를 이끌어내게 한다.
그 결과 1873년 11월 창덕궁의대원군 전용 출입문이 사전 양해 없이 왕명으로 폐쇄되었고, 대원군은 하야하여 양주 곧은골에은거하였다. 하지만 타의에 의해 축출된 그는 이때부터 왕비에 대한 악감정이 생겨 끊임없이정계복귀를 꾀하게 된다.
1881년 '조선책략' 반포를 계기로 민씨 일파의 개화 시책을 비난하는 전국 유림의척사상소운동이 격렬히 전개되자, 대원군 계파인 안기영은 고종의 이복형 재선을 옹립하여 민씨척족 정권을 타도하려는 국왕 폐립 음모를 꾸몄다. 대원군은 재집정을 위해 이 계획에가담하지만 사전에 발각되어 오히려 척사상소운동을 탄압할 빌미를 제공하였고, 대원군 자신의입지도 더욱 위축되었다.
그러나 1882년 구식 군대 폐지와 봉량미 문제로 일어난 임오군란 때 난병들에 의해 정국개입을 요청받아 왕명으로 사태 수습을 위임받고 재집권하였다. 이때 그는 명성황후의 사망을공포하고 다시 정국을 주도하려 했지만, 명성황후의 요청으로 원세개가 이끄는 청국군이개입함으로써 사태는 반전되어 청국으로 연행되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그는 청에 연행되어 3년동안 중국 바오딩에서 유수 생활을 해야 했다.
그는 1885년 2월 조선통상사무전권위원으로 부임하는 원세개와 함께 귀국한 후 여전히 정계
복귀를 노리다가 1886년 민씨 정권이 조·러조약을 체결하자 불만을 품은 원세개와 결탁하여큰아들 재황을 옹립하고 재집권하려다가 실패하고, 1894년 동학혁명이 일어나자 농민 세력과도
연합하려 하였다. 하지만 이것은 동학 농민운동이 실패로 돌아가 실현되지 못하였고, 청·일전쟁
이후 온건개혁파가 갑오개혁을 추진할 때 영입되어 군국기무를 총괄하기도 했다.
하지만 일본이 바라는 것과 달리 그가 자신의 소신대로 개혁을 추진하려 하자 은퇴를강요당했고, 김흥집 내각에 의해 경장 사업 추진이 진행된다.이 이후에도 그의 정계 복귀 노력이 계속되자 그의 행동을 제약하는 대원군 존봉의절이제정되어 사람들과의 접촉을 제한받았을 뿐 아니라 외국 사신들과의 만남도 정부의 관헌입회하에서만 가능해지게 되었다.
을미사변 때 일본의 요청에 따라 입궁하여 왕비 민씨가 죽은 후 일시적으로 재집권하였으나
고종이 러시아 공관으로 옮겨감에 따라 다시 실각하여 곧은골로 내려와야 했다. 그리고 3년 후인1898년 79세를 일기로 마침내 생을 마감하였다.
죽은 뒤 부대부인 민씨와 함께 공덕리에 안장되었다. 1907년 대원왕에 추봉되었다.
명성황후 민씨(1851-1895)
여성부원군 민치록의 딸이다. 8세에 부모를 여의고 혈혈단신이 되었으며, 흥선대원군의 부인
민씨의 천거로 왕비에 간택되어 1866년 한 살 아래인 고종과 가례를 올리고 입궁하였다.
그녀가 왕비로 간택된 것은 순전히 배경이 미흡하여 외척의 득세 가능성이 없다는 점때문이었다. 흥선대원군은 외척에 의하여 정권이 장악된 순조, 헌종, 철종 3대 60년간의 세도정치의 폐단 때문에 왕실이 안정되지 못했다고 판단하고 있었고, 그래서 부인 민씨의 집안에서왕비를 들여 왕실과 정권의 안정을 도모할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왕비 민씨는 어릴 때부터 총명하고, 수완이 능란한 여자였기에 왕비에 오른 지 몇 년
지나지 않아서 왕실 정치에 관여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민비는 시아버지 흥선대원군과 정적관계에 놓였고, 결국 그를 몰아내고 정권을 장악하기에 이른다.
민씨와 대원군의 사이가 벌어진 직접적인 원인은 궁녀 이씨의 몸에서 태어난 왕자 완화군을
대원군이 편애하여 세자로 책립하려 했기 때문이다. 그 배후에는 민씨를 중심으로 한 노론세력과 새로 등용된 남인과 일부 북인을 중심으로 한 세력간의 정치적 갈등이 작용하고 있었다.
대원군과 사이가 악화된 이후 그녀는 끊임없이 그를 정계에서 밀어내려 하였고, 마침내 대원군의 정적 안동 김씨 세력과 대원군의 권력 독점을 염려한 조대비 세력, 그리고 대원군의장자 재황의 세력 및 최익현 등의 유림 세력과 결탁하여 최익현의 대원군 탄핵 상소를이끌어낸다. 1873년의 이 상소를 계기로 대원군은 실각하게 된다.
대원군이 실각한 후 그녀는 민씨 척족을 앞세워 정권을 장악하고 고종을 움직여 일본과강화도조약을 맺는 등 일련의 개화 시책을 추진했다. 그러나 그녀는 개화 정책을 추진하는과정에서 많은 위협을 받게 된다.
1882년 민씨 세력의 개화 정책에 불만을 품은 위정척사파와 대원군 세력이 봉량미 문제로임오군란을 일으켜 그녀를 죽이려 하였으나, 그녀는 재빨리 궁을 탈출하여 충주목사 민응식의집에 피신하였다. 그리고 비밀리에 고종과 접촉하여 청나라에 군사 지원을 요청하였다. 그녀의
요청으로 출동한 청국군은 대원군을 납치하여 청나라로 끌고감으로써 위기를 넘겼다.
그 사건 이후 그녀는 친청 정책을 실시하였는데, 이 때문에 개화파의 불만이 높아져갑신정변이 일어나고 일시적으로 개화당이 정권을 장악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때에도 민비는청국군의 도움으로 다시 정권을 되찾는다. 이때부터 그녀는 외교에 눈을 뜨고 매우 민첩한 외교 능력을 발휘하였다. 1885년 거문도사건이일어나자 묄렌도르프를 일본에 파견하여 영국과 사태 수습을 협상하는 한편 러시아와도접촉하였고, 또한 청나라와의 관계에서도 흥선대원군의 환국을 묵인하는 등 유연성 있는 관계를유지하였다.
1894년 동학교도를 중심으로 한 농민봉기가 일어나 조선의 정국이 혼미 상태가 되었을 때,
조선에 적극적인 공세를 펼치던 일본은 갑오경장에 간여하면서 흥선대원군을 내세워 그녀의
세력을 제거하려고 하였다. 하지만 그녀는 일본의 야심을 간파하고 친러 정책을 쓰면서노골적으로 일본에 대항하였다. 이때는 이미 영국, 독일, 러시아 등의 삼국간섭으로 일본의국제적 지위가 실추된 상황이었기에 그녀의 친러 정책은 효과를 볼 수 있었다.
이에 일본공사 미우라는 조선에서 밀려날 것을 염려한 나머지 일부 친일 정객과 짜고 민씨를
포함한 친러세력을 제거하기 위해 을미사변을 일으켜 그녀를 시해하는데, 1895년 일본 군인과
정치 낭인들이 흥선대원군을 내세워 왕궁을 습격하고 민씨를 시해한 뒤 정권을 탈취한 사건이
그것이다. 민비를 살해한 일본인들은 그녀의 시체를 불사르는 등 천인공노할 만행을 저질렀다.
그리고 고종으로 하여금 민비를 폐위하여 서인으로 전락시키도록 강요했다.
하지만 그 해 10월 10일 그녀는 신원되어 태원전에 빈전이 설치되고 국장에 의해 숙릉에안치되었다. 그리고 1897년 명성황후로 추책되고, 11월 양주 천장산 아래에 이장되어 홍릉이라하였고, 1919년 고종이 죽자 2월에 미금시로 다시 이장되었다. 그녀의 소생으로는 순종이유일하다.
영친왕 이은(1897-1970)
고종의 넷째아들이며 귀비 엄씨 소생으로 순종의 이복동생이다. 1897년에 태어났으며, 1900년8월에 영왕에 봉해졌고 1907년에 황태자에 책봉되었으며, 이 해 12월 조선 총독 이토 히로부미에의해 유학이라는 명목으로 일본에 인질로 잡혀갔다.
1910년 국권이 상실되어 순종이 폐위되자 왕세제로 격하되었다. 1920년 4월 일본 황실의내선일체 정책에 따라 일본 왕족 나시모토의 맏딸인 마사코(방자)와 정략 결혼했다. 1926년 순종이 죽자 형식상으로 왕위 계승자가 되어 이왕이라 불리었으나 일본에 머문 채귀국하지 못했다. 일본에 강제 체류하는 동안 철저한 일본식 교육을 받았으며, 일본육군사관학교,육군대학을 거쳐 육군 중장을 지내기도 하였다.
1945년 해방이 되어 환국하고자 하였으나 국교 단절 및 국내 정치의 벽에 부딪쳐 귀국이좌절되었다. 한편, 일본의 패망으로 인해 황족의 특권이 상실되고 재일 한국인으로 등록하여1963년까지 일본에서 보냈다.
그 후 1963년 11월 당시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의장의 주선으로 국적을 회복하고 부인이방자와 함께 귀국하였다. 귀국 당시 뇌혈전증으로 인한 실어증에 시달리면서도 1966년오랫동안 숙원하던 심신장애자 재활원인 자행회, 1967년에는 그의 아호를 빌린 신체장애자훈련원 명휘원을 설립하여 운영하였다. 하지만 지병으로 1970년 74세를 일기로 세상을 떴다.
그가 죽은 후 부인 이방자는 영친왕기념사업회, 정신박약아 교육시설인 자혜학교, 1982년신체장애아 교육시설인 명혜학교 등을 설립하며 그의 유업을 계승하였다.
는 부인 이방자 여사에게서 진과 구, 두 아들을 얻었으며, 맏아들 진은 어려서 죽고, 둘째
아들 구는 현재 생존해 있다. 능은 경기도 미금시 금곡동 홍유릉 내에 있으며, 1989년 4월 30일 이방자 여사도 이곳에 함께묻혔다.
의친왕 이강(1877-1955)
고종의 셋째아들로 귀인 장씨 소생이며, 순종의 이복동생이고 영친왕 이은의 이복형이다.
1877년에 태어났으며, 15세가 되던 1891년에 의화군에 봉해지고, 1893년 9월 김사준의 딸을 맞아가례를 올렸다.
1894년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의 전승을 축하하는 보빙대사로 임명되어 일본에 갔다가 그
해 10월에 귀국하였다. 이듬해 5월에는 특파대사에 임명되었으며, 8월에는 특파대사 자격으로
영국, 독일, 러시아, 이탈리아, 프랑스, 오스트리아 등을 차례로 방문하였다.
1900년에는 미국으로 유학하였고 같은 해 8월에 의친왕에 봉해졌다. 1905년 4월 미국 유학을
마친 뒤 귀국하여 그 해 6월에 적십자총재가 되었다. 1910년 일제에게 나라를 빼앗긴 뒤에는
항일 독립투사들과 접촉하여 1919년 대동단의 전협, 최익환 등과 상해 임시정부로의 탈출을
모의하였으며, 계획을 실행에 옮기던 중 그 해 11월 만주 안동에 일본 경찰에 붙잡혀 강제로
본국에 손환되었다.
그 뒤 여러 차례 일본으로부터 도일을 강요받았으나 거부하여 항일의 기개를 굽히지 않았고,
해방과 6.25를 경험한 뒤 서울 사가에서 곤궁한 생활을 하다가 1955년 79세를 일기로 세상을
떴다. 슬하에 우와 건, 두 아들을 두었다.
[3. 떨어지지 않는 녹두꽃 전봉준과 동학혁명]
동학이라고 하면 폐쇄적이고 고리타분한 단순한 민족 종교 단체로 잘못 인식하고 있는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이 동학은 단순히 서학으로부터 민족의 문화와 국가를 지키겠다는의미만이 아니라, 서학을 적극적으로 응용하여 새로운 세계를 구현하려 했다는 점에서 위대함을가지고 있었다. 다시 말해서 동학은 외세의 영향 없이 조선 사회의 봉건 질서를 무너뜨림과동시에 계급을 철폐하고 새로운 근대 국가의 형성을 통해 민족의 부강을 꾀한 가장 자주적인정치 조직이었다.
뿐만 아니라 당시의 어떤 단체보다도 가장 탄탄한 조직과 힘, 그리고 이념을 가지고 있었기에
대다수의 농민과, 선각적인 양반의 상당수를 참여시킬 수 있었던 거대한 민족 조직이었다. 따라서동학은 그 어떤 이름보다도 민족적이며, 적극적인 민중 사회운동체였다고 단언할 수 있다.
만민이 평등하고, 인류애가 살아 있는 이상적 사회 건설을 목표로 하고 있던 동학들은 1894년
민란을 주도하면서 이른바 혁명적 농민봉기를 주도한다. 이 농민들의 봉기는 제도적, 정치적으로근대화를 목표로 하였던 한국 역사상 최초의 시민 혁명이었다. 이 혁명을 주도적으로 수행한
사람이 바로 전봉준이다.
전봉준의 출생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으나 1854년 전라도 고부군 궁동면 양교리(지금의정읍시)에서 향교의 장의를 지낸 전창혁의 아들로 태어났다는 설이 가장 유력하다. 그의 초명은명숙, 호는 해몽이지만 체구가 작았기 때문에 흔히 녹두라 불리었다.
그는 젊은 시절 생업을 위해 약을 팔기도 했고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무술을 배우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하는 일과 상관없이 늘상 버릇처럼 '크게 되지 않으면 차라리 멸족하는 것이낫다'고 말하였다 한다. 그만큼 그는 젊은 시절부터 사회를 개혁하기 위한 원대한 포부를 품고있었다.
그는 약을 파는 것으로 생계를 잇지 못하자 태인 산외리 동곡 마을로 이사하여 세 마지기의
전답을 소유한 소농으로 지내면서, 스스로 선비를 자처하며 동네 아이들에게 글을 가르치는 훈장노릇을 겸하였다.
그렇게 세월을 보내고 있던 그는 19세기말로 접어들면서 사회가 급변하고 외세가 밀려드는
것을 보고 민족과 나라를 지켜야겠다는 신념으로 1890년 37세의 나이로 동학에 입교하였다.
그리고 이때부터 그는 사회 개혁을 꿈꾸는 혁명가적인 기질을 발휘하게 된다.
입교한 직후 그는 동학 제 2대 교주 최시형으로부터 고부 지방의 동학 접주로 임명된다. 그의
인품과 지도력을 높이 평가한 주변 교도들의 추천에 힘입은 일이었다. 접주가 된 전봉준은자신이 살던 곳에서 5리 정도 떨어진 말목장터에서 주로 포교 사업에 전념한다. 그는 포교의일환으로 병자들을 고치는 일도 함께 하였다. 일찍이 읽은 의서들과 한때 약초를 취급한 경험을바탕으로 환자들에게 처방전을 내릴 수 있었던 것이다.
1892년 그가 접주로 있던 고부군에 조병갑이란 자가 군수로 영전하여 왔다. 조병갑은농민들에게 과중한 세금을 부과하는 것은 물론 무고한 사람의 재물을 빼앗아 갈취하고 이에대항하는 사람들에게는 가차없는 형벌을 가하였다. 조병갑의 학정이 심해지자 고부 주민들을대신하여 전봉준의 아버지 전창혁은 관청에 면세를 신청하는 탄원서를 제출했고, 이로 인해심하게 매를 맞고는 귀가한 지 한 달 만에 장독으로 죽게 된다.
조병갑의 횡포는 비단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자신의 아버지 비각을 세우기 위해 농민들로부터천 냥이나 되는 돈을 거둬들이기도 했고, 또 주민들에게 갖가지 죄를 뒤집어 씌워 2만 냥이라는엄청난 돈을 벌금으로 긁어냈다. 게다가 대동미를 대신하여 돈을 거두고, 만석보라는 저수지를만든답시고 쌀 700석을 착복하기도 했다.
학정에 시달리다 못한 고부 주민들은 1893년 11월과 12월 두 번에 걸쳐 군수에게 감세탄원서를 제출하였다. 하지만 조병갑은 진정서를 제출하려고 온 농민 대표들을 붙잡아하옥시키고 고문을 가하는 것으로 탄원서에 대한 대답을 대신했다.
탄원과 진정으로 아무런 효과를 보지 못한 농민들은 결국 힘으로 군수를 내쫒아야 한다는결론에 도달했고, 마침내 전봉준을 중심으로 한 20명의 농민 지도부는 동학교도들에게사발통문을 돌렸다. 사발통문의 내용은 고부군수 조병갑을 처단하는 것은 물론이고 전주영까지함락시키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었다. 이는 바로 농민과 관의 대대적인 전쟁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동학 농민군의 봉기는 1894년 1월 10일에 시작되었다. 이날 새벽 1천여 명의 농민군은 이마에
흰띠를 두르고 죽창과 농기구를 무기로 삼아 말목장터에 집결하였다. 전봉준은 그 전날 밤에
태인의 최경선과 함께 3백여 명의 농민들을 이끌고 야음을 틈타 40리 길을 행군하여 말목장터에미리 당도해 있었다.
대열을 가다듬은 농민군은 가장 먼저 고부 관아를 습격하여 점령하였다. 그리고 무기고를부수고 무장한 후 그 동안 억울하게 빼앗겼던 세곡들을 창고에서 꺼내 농민들에게 나눠주었다.
그러나 고부군수 병갑을 생포하는 일은 실패하였다. 조병갑은 농민군이 쳐들어온다는 소식을
듣고 황급히 전주감영으로 피신하고 없었기 때문이다.
고부 관아가 농민군에게 점령당했다는 소식을 들은 조정은 조병갑을 처벌하고, 새로 장흥부사
이용태를 안핵사로 삼고, 용산현감 박원명을 신임 고부군수로 임명하여 사태를 수습하고자 했다.
이때 전봉준이 이끄는 농민군은 세를 확대하여 백산으로 이동하여 그곳에 주둔하고 있었다.
그리고 안핵사로 내려온 이용태가 동학교도들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을 자행하자, 그 해 3월
전봉준은 인근 각지의 동학교도들에게 통문을 보내 봉기할 것을 호소하였다. 이에 따라 백산에
집결한 농민군은 일시에 1만으로 불어났다.
집결한 교도들에 의해 농민군의 동도대장으로 추대된 전봉준은 손화중과 김개남을 총관령,
김덕명과 오시영을 총참모, 최경선을 총솔장, 송희옥과 정백현을 비서로 삼고 조직적인 전투
준비에 돌입했다.
그는 싸움에 앞서 살인과 재물 탈취를 금지하고, 일본군과 권력 귀족들을 몰아내는 것을목표로 하는 4대강령을 발표하고, 규범 12조로 농민군의 규율을 바로잡고 군사훈련을 강화하였다.
태세를 갖춘 농민군은 4월 4일 부안을 점령하고, 4월 7일 황토현에서 관군을 대파하는 한편정읍, 흥덕, 고창 지역을 습권하였다. 그리고 영광, 함평, 무안 일대를 거쳐 마침내 4월 27일전주성을 점령하였다.
동학군의 힘이 점차 강성해지자 조정은 청국군을 요청하였고, 청국군이 인천에 상륙하자텐진조약을 빙자하여 일본군도 조선에 진출하였다. 이렇듯 국가의 운명이 위태로워지자 동학군과관군은 화의를 약속하고 교섭에 들어갔다.
교섭에 들어가 전봉준은 폐정 개혁을 골자로 하는 27개조에 달하는 조건을 내놓았고, 이에 관군
대표인 홍계훈이 무조건 수용함으로써 '전주화약'이 성립되었다. 그리고 동학군은 각 지방에
집강소를 설치하여 잘못된 정치의 개혁을 위한 행정 관청 구실을 하게 하였다. 말하자면 전라도
지역은 동학의 자치 구역이 된 셈이었다.
집강소의 행동 강령은 총 12개조로 양반 중심의 봉건 사회를 혁파하고, 신분차별을 없애며,인습에 갇혀 사는 여성들을 해방시켜 농민의 생활을 풍족하게 만든다는 것을 골자로 하고있었다. 이 같은 집강소 행동 강령은 17세기 이래 진보적인 실학자들이 내걸었던 개혁안과1884년 김옥균 등의 개화파가 주장했던 정책보다 훨씬 진보된 내용이었다.
그만큼 시대를 멀리 내다보았던 전봉준의 개혁 사상은 봉건 사회인 조선이 도저히 수용할 수
없는 혁명적인 기치를 내걸고 있었다.농민군이 해산되고 집강소가 설치된 후 전봉준은 20여 명으로 기마대를 조직하여 전라도 내각지를 순회하며 집강소 설치를 지도하고, 개혁 정책의 실시 상황을 점검하였다. 그 결과 전라도내에는 53군에 모두 집강소가 설치되었다.
전라도 관찰사 김학진은 집강소의 원만한 운영을협의하기 위해 전봉준을 전주감영으로 초청했고, 감영 내에 '대도소'를 설치하기로 합의하였다.동학 세력의 힘을 두려워 한 전라감사는 자신의 집무소인 선화당을 대도소로 내주고, 자신은 그곁의 작은 건물로 옮겨갔다.
그러나 집강소의 설치과정에서 양반들의 강한 반발에 부딪쳤다. 그들은 집강소의 행동 강령
속에 들어 있는 '빈부의 차이를 없애고 산전과 노비의 구별을 없애고, 또한 양반과 유림의방자함을 허락하지 않는다'는 내용들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집강소는 인륜을 저버리는 것이므로 양반과 유교의 적'이라고 규정했다. 특히 양반 세력이강했던 나주, 남원, 운봉의 세 곳에는 좀처럼 집강소를 설치하지 못했다.
이에 전봉준은 마침내 무력으로 집강소를 설치할 것을 결심하고 김개남, 김봉득, 최경선 등에게각각 3천 명의 병력으로 남원, 운봉, 나주를 접수하도록 했다. 남원과 운봉은 쉽게 함락시키고집강소를 설치하였으나 나주의 저항은 완강하였다.
나주 관아에는 많은 동학교도들이 붙잡혀있었고, 또한 나주목사의 저항이 만만치 않은 상태였기 때문에 최경선은 나주 입성을 감행하지못했다. 이 보고를 들은 전봉준은 단신으로 나주 목사를 만나 그를 설득하고 동학교도들을석방시킨 뒤 나주에 집강소를 설치할 수 있었다.
러나 동학의 자치 행정은 오래가지 못했다. 청군과 함께 조선에 진주한 일본은 힘으로 내정
개혁을 단행하려 했고, 이 때문에 청일전쟁이 일어났다. 그리고 이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조선 조정을 장악하였다. 보국안민과 외세배격을 기치로 내걸었던 동학은 이러한 일본의 국권침탈 행위에 분개하며 다시 한 번 봉기했다.
동학 농민군의 제 2차 봉기는 그 해 9월에 있었다. 전봉준을 중심으로 한 남접은 교주최시형의 북접에 도움을 청해 연합 전선을 폈다. 제2차 봉기에 동원된 농민군은 남접 10만과북접 10만을 합해 약 20만 병력이었다. 하지만 동학 농민군은 숫적으로만 우세할 뿐 훈련을 받은군인도 아니었고, 병기도 원시적이어서 신식 무기로 무장한 일본군과 관군의 상대가 되지 않았다.
10월 중순 10만 부대로 공주성을 포위하고 대공격전을 전개하였으나 패퇴하였고, 11월 다시공주 부근의 우금치전투에서 패배하여 후퇴하게 된다. 그리고 나머지 농민군도 금구 싸움을마지막으로 일본군과 관군에 진압되어 전봉준은 쫓기는 신세가 되었다.
동학군과의 싸움에서 승리한 일본군과 관군은 전봉준을 생포하면 막대한 상금을 준다는포고문을 내걸었다. 전봉준은 정읍과 순창 등지를 전전하며 몸을 피하다가 과거 자신의 부하였던김경천의 밀고로 체포되어 12월 2일 한양으로 압송되었다.
고 1895년 3월 29일 손화중, 최경선, 김덕명, 성두한 등의 동지들과 함께 사형에 처해졌다.이로써 동학 농민봉기는 완전히 막을 내리게 된다. 이때 그의 나이 41세였다. 이렇게 일본군에 의해서 동학군의 봉기는 실패로 돌아갔지만 전봉준은 영원히 민중의 영웅으로남아 그 뒤에도 계속된 농민군과 의병의 항일 투쟁의 정신적 지주로 자리하게 된다. 그는 영원히떨어지지 않는 민족의 녹두꽃이 되었다.
[4. '고종실록'편찬 경위]
고종실록'은 본문 48권 48책과 목록 4권 4책을 합쳐 총 52권 52책으로 구성되어 있며,1863년 12월부터 1907년 7월까지 고종 재위 43년 7개월간의 역사적 사실을 일본의 조선총독부가중심이 되어 기록하고 있다.
편찬 작업은 망국 이후인 1927년 4월에 시작되어 1935년 3월에 완료되었다. 이 책이 편찬된
것은 일제 통치 기간으로 1927년 '이왕직'을 설치한 뒤 임시 고용원 10명과 집필생 26명을배치하고, 실록 편찬에 필요한 자료인 '승정원일기', '일성록' 등 각종 기록 2,455책을경성제국대학에서 빌려 자료를 추출하였다.
그리고 편찬 작업에 필요한 자료가 확보되자 1930년 4월에 편찬위원을 임명하여 역대 실록
편찬의 예에 따라 실록 찬술 작업에 착수하였다. 편찬 초대 위원장은 일본인 이왕직 차관 시노다였으나, 그는 1932년 7월 이왕직 장관에임명됨에 따라 이왕직의 예식과장이던 이항구를 차관으로 승격시켜 부위원장에 임명하고 실록찬술의 책임을 맡겼다. 그러나 실제 편수의 총책임은 감수위원으로 임명된 경성제국대학 교수오다가 맡았다.
편찬실에는 위원장, 부위원장 밑에 편찬에 필요한 공·사의 문서를 수집하며 사적의 조사 및 관계자로부터의 사실 청취의 일을 맡는 사료수집부, 각 사료에 기초하고 역대 실록에 준하여편년체의 실록 편찬을 담당하는 편수부, 편집된 원고에 대하여 사실의 정확성을 기하고 문자장구를 장리하여 실록 원고를 작성하고 간행할 때 교정하는 일을 맡는 감수부의 3부서를 두었다.
그리고 편집부만은 다시 1, 2, 3반으로 분리하고 각 부에는 위원, 보조위원, 서기를 두었다.
한편, 위원장 직할로 서무위원, 회계위원을 배치하고 편찬실 서무는 보조위원서기가 담당하였다.
편찬위원들은 기술, 체제, 편찬을 위한 역대 실록, 특히 <철종실록>의 예에 따른다는 작업 원칙을 세우고 <고종실록>과 <철종실록>을 편찬하였다. 이 실록은 민족 항일기에 일본인들의 간여하에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에 사실이 왜곡되었을가능성이 높다. 왜냐하면 편찬 각 위원회에서 편찬된 원고가 편찬 총책임자인 경성제국대학 오다
교수에 의해 감색, 감증 등의 손질이 가해졌고, 또한 실록 원고는 일본인인 이왕직 장관의 결재를얻어 간행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실록은 <승정원일기>나 <일성록>, 그 밖의 관찬 기록들에서 중요한 내용을채록하였기 때문에 고종 시대사를 연구하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된다.
고종 시대의 세계 약사
고종 시대의 세계 정세를 살펴보면 우선 동아시아는 일본의 팽창이 뚜렷해져 조선에 대한침략을 강화하는 한편, 중국과 러시아에 선전포고를 감행해 전쟁에서 승리하고 동아시아의주도권을 장악한다. 이 시기에 중국 내부에서는 만주족이 세운 청을 무너뜨리기 위한 한족의독립운동이 전개된다.
한편 영국, 독일, 프랑스 등의 유럽 제국들은 아시아와 아프리카에 대한 침략을 가속화해아프리카 분할을 위한 회담을 개최하는 한편, 인도, 미얀마, 인도네시아, 베트남 등의 동남아국가에 대한 신민 정책을 수립한다. 아메리카에서는 미국의 영토를 확장하기 위해 러시아로부터 알래스카를 매수하고, 내부적으로남·북전쟁을 종식시키면서 본격적인 대외 팽창 정책을 감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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