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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http://lloydjones.org/zbxe/?mid=Puritan05&category=94&document_srl=41109
율법의 마침(The End Of The Law) | 스펄전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롬10:4)
당신은 지난 안식일 아침 '인자의 아들의 날들'에관한 말씀을 기억할 것이다. 모든 안식일은 이제 매우 영적인 의미의 날짜가 되었을 것이다. 나는 예수님께로 사람들의 모임이 인도될 수 있도록, 우리가 예수님 안에서 매우 즐거워하고, 예수님을 위해 일하며, 더욱더 절실한 기도들을 통하여 예수님에 대하여 대부분을 생각함으로써 각각의 주일이 주님의 하루로 만들도록 노력하기를 바란다. 우리는 많은 안식일들을 함께 하지 못할 수 있으며, 죽음이 우리를 곧 갈라놓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크리스쳔 모임으로 만날 수 있다면, 예수님의 함께 하심이 우리의 가장 중요한 것임을 결코 잊지말며, 그것을 위해서 기도하며, 항상 빛과 삶과 사랑 안에서 주님께서 현존하심을 보이시도록 주님께 간구하자! 나는 점점 모든 설교시간이 영혼 구원의 시간이 될 정도로 정직해지고 있다. 나는 "내 마음에 원하는 바와 하나님께 구하는 바는 이스라엘을 위함이니 곧 저희로 구원을 얻게 함이라"(롬10:1)고 말한 바울과 깊히 공감한다. 우리는 너무나도 많은 설교를 해왔지만, 그러나, 상대적으로 말해서, 예수님을 믿는 자들은 너무 적다; 만일 그분에 대한 믿음이 없다면, 율법도 복음도 그것의 목적을 얻지 않은 것이며, 우리의 노력도 전적으로 헛된 것이었다.
여러분중 어떤 이는 들어왔고, 들었고, 그리고 또 들을 것이다. 그러나 당신은 예수님을 믿지 않는다. 만일 복음이 당신의 청각에 도달하지 않는다면, 당신은 그것을 거부한 것에 대해서 유죄는 아니다. "그들이 듣지 못하느뇨" 사도가 말한다. "아니요, 듣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그들은 복음을 전혀 순종하지 않는다" 바로 이순간까지 마음의 귀로 듣지 않는 자들이 있다. 우리가 사랑하는 많은 자들의 경우에 있어서, 영혼에서 믿음의 역사가 일어나지 않는다.
동역자들이여, 항상 그럴 것인가? 얼마나 오랫동안 그럴 것인가? 외부적으로는 방법들을 수용하지만 내부적인 은혜는 거절하는 이러한 것의 끝이 곧 오지 않겠는가? 현재의 구원을 위해 당신의 영혼은 곧 예수님께로 가까이 가지 않을 것인가? 깨어라! 깨어라, 오 이 천국의 날이여, 이 무지한 자들에게, 왜냐하면 우리의 영혼들이 그들에 대해서 깨어지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로 오지않는 이유는 ,어떤 의미에서, 정직하지 않거나, 신중하지 않거나, 구원받으려는 열망이 없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하나님의 구원의 방법을 용납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은 지식에 의하지 않고, 하나님에 대해서 질투한다" 그들이 영생을 얻기를 갈망하도록 우리는 지금까지 우리의 권고를 통해 그들을 이끌었으나,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였느니라" (롬10:3) 마가는 "그들 자신을 복종시켰다."
그것을 위해 복종이 필요하다. 자만한 자는 그 자신을 구원하기를 원하고, 그는 스스로 그것을 할 수 있다고 믿고, 그는 불행한 실패들로 인해 자신이 무기력함을 발견할 때까지, 그 일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은혜로 인한 구원은, 극도의 궁핍상태에서 간청되고, 자격없는 혜택처럼, 값없고 분에 넘치는 은혜가 요구되어질 때까지, 육적인 사고가 그것을 도울 수 있는 동안은 이르지 못할 것이다: 여러분들중 어떤 이들이 그것을 도울 수 없게 하시기를 주님께 간청한다. 그리고 오, 나는 그것을 기도하고 있다, 이 아침에 내가 예수님을 율법의 마침으로써 설명하고자 하며, 하나님께서 그것으로 몇몇 영혼들에게 축복을 주셔서, 그들이 예수님께서 하셨던 일을 깨닫게 되고, 그것이 그들이 할 수 있는 어떤 일보다 더 큰 위대한 일임을 인식하기를 원한다:
예수님께서 끝내신 일을 알고, 그들 자신들이 지금까지 노력해온 것들에 지치게 되기를 바라며, 이 날에 심지어는 그것들이 잘 시작되지 않았기를 바란다. 아마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원의 완성으로 그들을 매혹시킨다면 그것이 주님을 기쁘게 해드릴 것이다. 번연이 말한 것처럼, "그것은 아마도, 그들의 입들에 그 후에 살수기를 달게 될 것이다." 그리고 신성한 식욕이 시작되면, 그 주연이 흥겨운 것이 되기 전까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을 것이다. 그들이 예수님께서 벗은 영혼들에게 아무 값없이 하사한, 정금의 의상을 볼 때, 현재 그들이 그토록 친밀하게 끌어안고 있는 자신들의 불결한 누더기들을 던져버릴 것이다.
나는 이 아침에 두가지에 관하여 말씀드리고자 한다, 하나님의 성령이 나를 도우시기를 원한다: 첫째는 예수님과 율법의 관계로서 - 그분은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신다; 그리고 두 번째는 우리 자신들과 예수님과의 관계로서 -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 (롬10:4)
율법 앞에 두려워하는 인생
첫째, 예수님과 율법의 관계. 율법에 대해서 죄인들로서의, 우리는 모든 항목들에 대하여 두려움을 느낀다; 왜냐하면 사망의 쏘는 것은 죄요, 그리고 죄의 권능은 율법이기 때문이다. 우리들을 향해서 율법은 게걸스런 욕망을 화살처럼 쏘아대는데,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를 정죄하고, 그리고 비장한 용어들을 사용하여 우리를 저주받은 자들과 함께 하는 곳으로 임명하기 때문이다.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갈3:10)
그러나, 이상한 열중이다! 모기를 그 날개들을 태울 촛대로 유혹하는 미혹처럼, 인간들은 본성으로 구원을 위한 율법으로 날아가지만, 그것으로부터 피할 수는 없다. 율법은 죄를 드러내어 죄인에게 정죄를 선고하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으며, 우리는 인간들을 그것으로부터 구출할 수 없는데, 비록 얼마나 다정하게 예수님께서 그들과 율법 사이에 서계심을 그들에게 보인다해도 말이다. 그곳에 그들이 붙잡을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을 때까지, 그들은 그것을 붙들려는 합법적인 희망에 그토록 사로잡혀 있다;
그들은 갈보리보다 시내산을 더 선호한다, 비록 시내산이 그들에게 다가올 심판에 대한 트럼펫 경고와 번개 외에는 그들을 위해 가진 것이 아무 것도 없어도 말이다. 오, 내가 예수님을 내 주로 설명할동안, 당신이 신중하게 청종한다면, 당신은 그분 안에서 율법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이제 우리의 주님께서 율법과 무슨 상관이 있는가? 그분은 그것의 모든 것인데, 왜냐하면 그분은 고귀한 목적 즉 의를 이루기 위하여 그것의 마침이 되시기 때문이다. 그분은 "율법의 마침"이시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나는 그것이 세 가지를 의미한다고 생각한다:
첫째, 예수님은 율법의 목표이자 목적이시다;
둘째, 그분은 그것의 성취이시다;
그리고 셋째 그분은 그것의 종결이시다.
먼저, 우리의 주 예수님은 율법의 목적이자 목표이시다. 그것은 우리를 그분께로 인도하도록 주어졌다. 율법은 우리를 예수님께로 인도하는 몽학선생 혹은 예수님 학교로 인도하는 우리의 보좌관이다. 율법은 물고기가 들어있는 커다란 그물이며, 그들은 죄의 요소들로부터 밖으로 건져올려 질 수 있다. 율법은 폭풍이며 영혼들을 항구나 혹은 피난처로 데려간다. 율법은 사람들을 그들의 죄에 대하여 감옥에 수감시키는 보안원들이며, 그들이 석방을 위해 오직 하나님의 값없으신 은혜만을 바라도록, 그들 모두를 정죄 아래 둔다. 이것이 율법의 목적이다: 그것은 은혜가 채울 수 있도록 비워주고, 은총이 치유할 수 있도록 상처낸다. 율법이 우리들에게 있는 구원의 방법으로서 간주되어지는 것은 결코 타락한 사람들인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의도는 아닌데, 왜냐하면 그것은 결코 구원의 길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사람이 결코 타락하지 않았다면, 그의 본성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든 대로 남아있을 것이며, 율법은 그가 걸을 수 있는 길을 그에게 보이는 그에게 가장 유용한 것이였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지키면서 그는 살았을 것인데, 왜냐하면, "이것들을 행하는 그는 그 안에서 살리라".
그러나 인간이 타락한 이후로, 주님은 그에게 행위를 통한 구원의 방법을 요구하시지 않으셨다, 왜냐하면 그분은 그것이 죄있는 피조물에게 불가능한 것임을 알고 계시기 때문이다. 율법은 이미 깨어졌다; 그리고 인간이 무엇을 하든, 그는 결코 그 고장을 수리할 수 없으며, 그는 이미 저질러 버린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공로의 희망에 관해서는 뜰 밖에 있다. 율법은 완전을 요구한다, 그러나 인간은 이미 그것에 부족하게 타락해버렸다; 그리고 그래서 그로 하여금 최선을 다하게 한다. 그는 절대적으로 필수적인 것을 성취할 수 없다. 율법은 다른 어떤 방법으로도 불가능함을 보여주며, 죄인들을 예수님에 대한 믿음으로 인도하고자 의도된 것이다. 그것은 양떼를 목자에게로 몰고가는 검은 개이며, 여행자를 힘겨운 땅에서 커다란 반석의 그늘로 데려가는 타는 열기이다.
율법이 어떻게 이렇게 수용되는지를 살펴보라; 왜냐하면 첫째, 그것은 사람에게 그의 죄를 보여준다. 십계명을 읽어보라. 그러면 당신이 그것들을 읽을 때 전율할 것이다. 자신이 기준에 훨씬 못미치게 타락했음을 즉시 자각하지 않고, 신성한 지침의 두가지 서판과 나란히 자신의 인격을 둘 수 있는 자가 누구겠는가? 율법이 영혼의 집으로 들어올 때, 그것은 감지할 수 없는 먼지와 티끌을 밝혀주는 어둔방의 불빛같은 것이다. 그것은 영혼에 죄라는 독의 존재유무를 조사해주는 테스트이다. "나는 율법없이 살았다" 사도는 말했다, "계명이 이르매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도다"(롬7:9)
율법이 그것을 드러내면 우리의 고상함은 완전히 자취를 감춘다. 계명들을 보라, 그리고 그것들이 얼마나 무시무시한지, 얼마나 영적인지, 얼마나 광범위한 것인지를 기억해라. 그것들은 단순히 외적인 행동만을 건드리는 것이 아니라, 내적인 동기를 살피며 영혼, 마음, 정신을 다룬다.
규례들에는 표면에 드러난 것보다 더욱 깊은 의미가 들어있다. 그것들의 깊이를 찬찬히 살펴보면 그것들이 얼마나 무서운 거룩함을 요구하는 지를 알 수 있다. 여러분이 율법이 요구하는 것을 이해한다면, 여러분은 자신이 얼마나 그것을 이행하는 것으로부터 멀리 있는지, 그리고 여러분은 죄가 아주 적거나 혹은 아예 없다고 생각하는 그곳에 얼마나 풍성한 죄가 있는지 자각할 수 있다.
여러분은 자신이 선에 있어서 다른 아무것도 필요하지 않을 만큼 부요하고 점점 확장되어 간다고 생각하지만, 그러나 깨어진 율법이 당신을 방문할 때, 당신의 영적 파산과 전적인 빈곤이 당신과 대면하게된다. 진정한 균형은 부족한 무게를 드러내고, 그렇게 율법의 첫 번째 영향력은 인간의 양심에서 나타나게 된다.
율법은 또한 죄의 결과와 해악을 보여준다. 구약 모세의 섭리의 형태를 보라. 그러면 그것들이 사람들로 하여금 자기들의 불결한 조건들과 그들의 오직 주님만이 주실 수 있는 그런 세제의 필요성을 알게함으로써 인간들을 예수님께로 인도하게끔 의도되었음을 충분히 알 수 있다. 모든 형태는 우리의 주 예수 그리스도를 지적했다. 만일 인간들이 병 혹은 불결함으로 분리되어졌다면, 그들은 죄가 어떻게 그들을 하나님으로부터 그리고 그분의 사람들로부터 분리시켰는지를 깨닫을 수 있게 되있었다; 그리고 그들이 진홍색 양털과 우슬초와 기타 다른 것들에 있는 신비한 의식으로 깨끗해졌을 때, 그들은 자신이 오직 예수 그리스도, 대제사장에의해서만 회복될 수 있음을 깨달을 수 있게 되었다. 한 마리의 새가 죽임을 당했을 때, 나병환자가 깨끗해졌으며, 한 생명의 희생에 의한 깨끗해짐의 필요성이 설명되어 있었다. 매일 아침과 밤에 한 어린양이 매일의 용서의 필요성을 알려주며 죽었다, 만일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거하신다면 말이다.
우리는 때때로 우리가 너무나도 피에 관하여 많은 말을 함으로해서 과실을 발견하곤 한다; 그러나 구약에서 피는 모든 것이였고, 그리고 기록되었을 뿐만아니라 실제로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히브리서에서 사도는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하는가? "이러므로 첫 언약도 피 없이 세운 것이 아니니 모세가 율법대로 모든 계명을 온 백성에게 말한 후에 송아지와 염소의 피와 및 물과 붉은 양털과 우슬초를 취하여 그 책과 온 백성에게 뿌려 이르되 이는 하나님이 너희에게 명하신 언약의 피라 하고 또한 이와 같이 피로써 장막과 섬기는 일에 쓰는 모든 그릇에 뿌렸느니라 율법을 좇아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케 되나니 피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 (히9:18-22)
그 피는 휘장 위에, 제단 위에, 걸치는 천 위에, 그리고 성막의 바닥 위에 있었다: 누구도 그것을 보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동일한 성격의 내 사역을 하고자 결심하며, 더많이 그것에 속죄의 피를 뿌릴 것이다. 이제 구약의 많은 피는 죄가 그토록 우리를 오염시켜서 하나님의 속죄없이는 근접할 수 없음을 명백하게 보여주고자 의도된 것이였다: 우리는 반드시 희생의 방법에 따라 가야한다 그렇지 않다면 아무것도 아니다. 우리 자신으로는 너무나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에, 만일 주님께서 우리 위에 덮힌 예수님의 피와 함께 우리를 보시지 않으신다면, 그분은 반드시 우리와 함께 하실 수가 없다. 구약 율법은, 그것의 상징과 외형에서, 인간들 자신들에 관한 것과 오실 구세주에 관하여 많은 진리들을 설명하고 있으며, 모든 사람에게 예수님을 전파하고자 의도된 것이였다. 만일 누군가 예수님께 못 미쳐서 멈춘다면, 그들은 율법의 의도와 목적을 잃어버린 것이다. 모세는 여호수아에게 인도하였고, 율법은 예수님에게서 끝났다.
율법앞에 힘없는 죄인
다시 율법의 의식적인 면보다 윤리적인 면으로 돌아가보면, 그것은 인간들에게 그들의 전적으로 무기력함을 가르치려고 의도된 것이다. 그것은 인간들이 바람직한 자신들의 모습에서 얼마나 부족하게 타락하였는가를 보여주며, 또한 그들이 그것을 신중하게 살펴볼 때, 그들이 그 규범을 따르는 것이 얼마나 철저히 불가능한 지를 그들에게 알려준다. 율법이 요구하는 그 거룩함은 어떤 인간도 스스로는 도달할 수 없다. "계명은 몹시 폭넓은 것이다" 만일 인간이 그가 율법을 지킬 수 있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그가 율법이 무엇인지를 모르기 때문이다. 만일 그가 시내산의 흔들리는 측면을 기어올라 천국까지 올라갈 수 있다고 자처한다면, 분명히 그는 결코 불타는 산을 본 적이 없는 것이다. 율법을 지켜라! 아, 형제들이여, 우리가 그것에 관하여 이야기하고 있는 동안에, 우리는 그것을 깨뜨리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그 문자들을 성취할 수 있는 척 하는 동안, 우리는 그것의 정신을 범하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자만은 정욕 또는 살인만큼 율법을 깨뜨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누가 깨끗한 것을 더러운 것 가운데서 낼수 있으리이까 하나도 없나이다"(욥14-4) "여인에게서 난 자가 무엇이관대 의롭겠느냐" (욥15:14) 아니다, 영혼들이여,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을 이점에 있어서 도울 수 없다, 왜냐하면 오직 완전함으로만 여러분은 율법에 의해서 살 수 있고, 그 완전함은 불가능하며, 여러분은 행위의 약속에서는 어떠한 도움도 발견할 수 없을 것이다. 은혜 안에는 희망이 있다, 그러나 빚과 관련해서는 거기에는 아무것도 없다, 왜냐하면 우리는 진노 밖에는 아무것도 공이 없기 때문이다. 율법은 우리에게 이것을 알려주고, 우리가 더 빨리 그것을 알수록, 더 좋은 것인데, 왜냐하면 우리가 더 빨리 예수님께 날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율법은 또한 우리에게 우리의 가장 시급한 것- 죄사함, 물과 피로 죄 씻음의 필요성을 알려준다. 그것은 우리에게 우리의 불결함을 알려주고, 이것은 자연스럽게 만일 우리가 하나님께로 가까이 가고자 한다면, 우리가 반드시 그것으로부터 씻김받아야 한다고 느끼게 한다. 따라서 율법은 우리가 우리를 깨끗케하실 수 있는 유일하신 분, 그리고 우리를 가장 거룩하신 분의 임재 앞에 있는 휘장 안에 서기에 적합하게 만드실 수 있는 유일하신 분으로써 예수님을 받아들이도록 우리를 인도한다. 율법 그 자체는 오직 먼지만 불러 일으키지만, 그러나 복음은 그 먼지 위에 깨끗한 물을 뿌려주고, 모든 것은 영혼의 방에서 정돈된다. 율법은 죽이고, 복음은 살리신다; 율법은 벗기고, 그때 예수 그리스도께서 들어오셔서 영혼에 아름답고 영광스러운 옷을 입혀주신다. 모든 명령들과 모든 형태들은 직접적으로 우리를 예수님께로 인도하는데, 만일 우리가 그것들의 명확한 의도만 주의한다면 말이다. 그들은 우리를 자아에서 떼어놓으며, 그것들은 우리를 자칭-의로움의 거짓 기초들로부터 떼어놓으며, 그리고 예수님 안에서만 우리의 피난처를 발견할 수 있음을 우리로 하여금 알게 한다. 따라서, 무엇보다도, 예수님은 율법의 마침이시며, 그 안에서 그분은 그것의 지대한 목적이시다.
이제, 두 번째로, 그분은 율법의 성취이시다. 우리중 누구도 의로움없이 구원받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늘과 땅의 하나님께서는 불변의 법칙으로서 모든 그분의 피조물들에게 의로움을 요구하신다. 이제, 율법이 요구하는 그러나 율법이 결코 줄 수 없는 의로움을 우리에게 주시기 위해 예수님께서 오셨다. 우리 앞에 있는 장에서, 우리는 "믿음으로 되는 의로움" 또는 "하나님의 의로움"이라고도 불리는 것에 관하여 읽을 수 있다; 그리고 우리는 "부끄럽지 않은" 자들에 관하여 읽을 수 있는데 왜냐하면 의로움에 관하여 믿음에 따라 그들이 의롭기 때문이다. 율법이 할 수 없는 것을 예수님께서 하셨다. 율법이 요구하는 대신 행하지는 못하는 의로움을 그분께서 주신다. 율법 자체만큼 넓고 깊고 길고 그리고 높음에 틀림없는 그 의로움이 얼마나 놀라운 것인가? 명령은 과도하게 넓지만, 그러나 예수님의 의로움은 명령만큼 넓고, 그것의 마침이 되신다. 예수님은 율법을 보다 부드럽게 하시려는 것이 아니며, 혹은 율법이 우리의 비뚫어지고 망가진 복종과 일종의 타협으로써 받아들이도록 하시려는 것도 아니다. 마치 율법이 근본적으로 너무 많이 요구했던 것처럼, 그것의 규정들을 더 낮추도록 명령하시지 않는다; 그것은 거룩하고 의로우며, 선하고, 그것은 조금도 변경되어서는 안되고, 그럴 수도 없다. 우리의 주님은 율법이 원하는 모든 것-부분이 아니라-을 율법에게 주신다. 왜냐하면 그렇지않다면 율법이 최초보다 덜한 것으로 만족할 수도 있음을 시인하는 것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율법은 한 점, 한 흠, 실패 혹은 결점없이 완전한 복종을 주장하며, 예수님께서 그와같은 의로움을 가져오셨다, 그리고 그것을 그분의 사람들에게 주신다.
율법은 의로움이 의무의 예외가 없어야하고, 범죄함이 없어야한다고 요구하고, 에수님께서 가져오신 의로움은 하나님께서 그분의 사람들을 받아들이시고, 그들에게 점이나 혹은 주름이나 혹은 다른 어떤 것들이 없다고 간주하실 만큼 그러한 것이다. 율법은 정신적인 복종 없이는 만족하지 못할 것이고, 단순히 외적인 복종은 만족시킬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주님의 순종은 그것이 넓은 만큼 깊은데, 왜냐하면 그분을 보내신 그분의 뜻을 따르려는 그분의 열정이 그분을 사로잡았기 때문이다. 그분 스스로 말씀하신다,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의 뜻 행하기를 즐기오니 주의 법이 나의 심중에 있나이다 하였나이다"(시40:8) 그러한 의로움을 그분은 모든 믿는 자들에게 주셨다.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롬5:19)
예수님 안에는 완전하고 충만한 의가 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마련해주신 정당한 하얀 세마포의 값비싼 옷을 기쁘게 입는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가 무서움에 떨지 않고 천국의 지극하신 분 앞에서 그것을 입고 설 수 있다. 이것은 숙고해야할 문제이다, 벗들이여. 오직 의로운 자로서만 우리는 구원받을 수 있으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의롭게하셨고, 따라서 우리는 구원을 얻었다. 그분은 그분을 믿는 자들을 의로 여기시며, 이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었고, 그것이 그의 의로움으로 여겨진 것과 같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롬:8:1)
왜냐하면 그들이 예수님 안에서 의로워졌기 때문이다. 그렇다, 바울의 입을 통해 성령께서 모든 사람들, 천사들, 그리고 마귀들에게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그분의 선택의 대가로 무언가를 놓으라고 도전하셨다. 오 율법이여, 네가 나에게 완전한 의로움을 요구할 때, 나는 믿는 자로써, 그것을 네게 준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믿음이 나를 의로운 자로 간주하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의는 나의 것이다, 왜냐하면 나는 믿음으로 그분과 하나이며, 따라서 그분이 불리 우시는 그 이름-"우리의 의로움 되시는 주님"이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율법의 근본적인 요구들을 성취시키셨으나, 여러분, 형제들이여, 우리가 율법을 깨뜨린 이후, 거기에는 다른 요구들이 있음을 안다.
첫댓글 정말로 가슴이 벅참을 느낍니다.
율법을 사람이 하나님의 기준에 도달하거나 '의롭게' 되기 위한 가이드로 생각해서는 안될것입니다.
율법은 파고들면 들수록 더욱 엄중해 져서 결국 '하나님의 완전함' 을 우리에게 요구할 것입니다.
십계명은 우리가 지켜야 할 최소한의 '법' 이 아니라 모든 율법이 축약되어 있는 계명입니다.
누구든지 이 계명을 '지킴'으로 하나님께 의로움을 얻으려 하는 사람은
모든 계명들을 지키지 않으면 안될것입니다.
"우리중 누구도 의로움없이 구원받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늘과 땅의 하나님께서는 불변의 법칙으로서
모든 그분의 피조물들에게 의로움을 요구하신다"
자신이 구원을 얻은 자임을 증명하기 위해서 ...
끊임없이 죄를 자복하고, 형편없이 부족한 자임을 드러내려 할 지 모릅니다.
그것은 겸손해 보이나 ...복음을 아는 자의 태도가 아닐 수도 있습니다.
구원, 곧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의로운' 자라야 할 것입니다.
그곳에는 결코 죄가 있을 수 없기 때문이지요.
여러분은 지금 어떤 상태입니까?
율법의 마침이 되시며 율법의 완성이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당신의 십자가의 보혈은 우리에게 어머어마한 축복을 가져다 주셨습니다.
죄와 율법으로인하여 죽을 수 밖에 없었던 우릴위해 죄를 용서하시고 율법의 요구를 모두 이뤄주심 주님!
참으로 쓸모 없고 벌레만도 못한 우릴 구원하사 주님의 의를 소유하게 하사 의인되게 하셨으니
아! 이 놀라운 축복! 오! 주님! 감사합니다,
우릴 이렇게 구원하심은 오직 주님의 은혜입니다. 주님 한 분만을 높힙니다.
"오직 우리 주 곧 구주예수그리스도의 '은혜' 와 저를 아는 지식 에서 자라가라"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와 그 크신 뜻은...
알아 갈수록 놀라울 뿐입니다.
실로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은
모든 찬양과 감사와 경배를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이십니다. 아멘.
아멘.
오직 우리 주 곧 예수그도의 은혜 와 저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길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