돋보기 영성 2 - 7월호
마리아, 하느님의 어머니
어머니.
이 단어처럼 우리 가슴에 맺히는 단어는 없을 것 같다. 어려서부터 어머니의 따뜻한 사랑을 받은 사람은 어머니란 말만 들어도 당장 달려가 안기고 싶거나, 속상한 이야기를 종일 떠들어대도 다 들어주실 분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다. 종일 가족을 위해 일하신 어머니의 거친 손, 가족들의 짜증을 아무 말 없이 받아주시고, 늘 남은 밥과 음식은 당신 몫으로 챙기시는 분. 그래서 어머니의 노래를 부를 때면 가슴 한 쪽이 시리도록 아프게 해주는 그런 분일 수 있다.
하지만 어머니와 살가운 관계를 맺어본 경험이 없는 사람이나, 어려서부터 어머니 없이 살아온 사람, 혹은 어머니와 애증의 관계 속에서 소식도 전하지 않고 사는 사람에게 어머니란 단어는 왠지 가까이하기에는 너무 먼 당신과 같은 분으로 느껴질 수도 있겠다. 연세가 드실수록 늘어가는 어머니의 잔소리가 싫고, 늘 병으로 아파 누우신 어머니의 모습, 능력 없이 자식들에게 손을 벌리는 어머니가 미울 수도 있다. 거기에 ‘시어머니’를 어머니라고 부르는 며느리와의 고부간의 갈등은 세대를 넘어 피할 수 없는 현실인 것도 사실이다.
우리가 마리아를 어머니라고 부를 때에도 이와 비슷한 정서적 체험의 바탕이 필요하다. 마리아가 예수님을 낳은 어머니라는 점에 있어서 우리가 흔히 체험해온 과거의 어머니와 아들과의 관계를 생각해볼 수 있겠다. 처녀의 몸으로서 성령으로 잉태된 뜻밖의 아들로 말미암아 마리아는 결코 순탄한 인생을 시작한 것은 아니다. 비록 요셉이 평생 노총각 신세를 자처하면서 성가정을 위한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긴 했지만, 어린 예수를 성전에 봉헌하고(루카 2, 22-39), 예루살렘에서 잃은 아들을 찾았을 때 겪었던 당혹스런 순간들을(루카 2, 41-52) 마리아는 평생 마음에 간직하였다.
하지만 우리가 흔히 희생과 사랑의 어머니로서의 마리아의 진면목을 볼 수 있는 점은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과 죽음, 부활에 이르는 파스카 신비 안에서 만날 수 있다. 성경은 단순하게 어머니 마리아가 아들 예수의 십자가형에 따른 죽음의 현장에 함께 있었고, 어머니를 ‘사랑하는 제자’에게 맡기셨다고만 나온다(요한 19, 25-27). 하지만 많은 교회의 전승들은 십자가 밑에서 아들의 죽음을 지켜봐야하는 어머니의 찢겨진 상처와 고통에의 동참을 깊이 묵상하였고, 십자가에서 내려진 아들의 시신을 안고 슬픔에 빠진 어머니의 얼굴을 묵상해왔다. 그래서 마리아는 누구보다 예수님의 십자가 고통에 가장 가깝게 동참하신 분이시고, 그분의 부활의 영광과 은총을 어느 누구보다도 분명하게 받으신 분이라고 고백해왔다. 그래서 성모님은 통고의 어머니요, 모든 이들의 위로자, 협조자, 사랑의 샘, 은총이 가득하시고 자비로우신 어머니로 교회는 불러왔다. 우리가 가진 어머니에 대한 표상이 그대로 마리아에 대한 신심으로 발전한 셈이다.
하지만 마리아를 하느님의 어머니로 부르는 것은 우리가 알고 있는 어머니의 표상과는 무관하다. 오늘날 마리아 신심을 강조하는 이들은 성모님이 하느님의 구원역사에 이루신 놀라운 협력을 높이 공경하면서 그분이 ‘하느님의 어머니’라고 불릴 정도로 성령의 역사를 세상에 드러낸 살아 있는 표징이라고 말하기까지 한다. 그래서 성모님을 마치 여신과 같은 지위에 올려 ‘공동구속자’로 선포해주기를 청원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런 것들은 가톨릭 교리상 맞지 않을뿐더러 교회 밖의 사람들에게 가득이나 성모신심에 대한 왜곡된 편견을 더 가중시키는 악영향을 끼칠 수 있다.
마리아를 하느님의 어머니로 부르게 된 것은 성모님의 높은 성덕과 그분에 대한 신성을 직접 지칭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하느님의 어머니’란 칭호는 역사적으로 431년 에페소 공의회 당시에 초대 교회에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神性)과 인성(人性)에 대한 그리스도론적 교리 논쟁과정에서 발생한 것이다. 예수를 참된 인간이자 참된 하느님으로 선포하고자 했던 교회는 이에 대한 우의적 표현으로서 마리아가 인간 예수를 낳은 어머니이시라면, 당연히 하느님과 본질이 동일한 예수님의 어머니 역시 ‘하느님의 어머니’로 불릴 수 밖에 없다는 당위성에 근거한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교리적 결정 이후 초대 교회부터 이어온 신심의 역사 속에서 성모님에 대한 신자들의 공경심이 성장하고, 많은 교부(敎父)들이 성모님의 인격적인 면모에 대한 깊은 성찰 속에서 성모신심을 발전시켜왔다. 어머니로서 예수님의 수난의 길을 함께 걸어간 마리아에 대한 신심과 공경은 당대 교회 안팎에 불던 예수님의 수난에 대한 깊은 신심을 촉진시키는 힘이 되었고, 하느님의 뜻에 순종하여 ‘주님의 종’(루카 1, 38)으로서 자신을 철저하게 하느님의 뜻에 종속시킨 마리아의 삶이 신자들이 교회의 가르침에 순종하고, 알 수 없는 인생의 고통과 삶의 모순을 견뎌내는 데 큰 위로가 된 것도 사실이다.
한국 천주교 신자들에게 성모님에 대한 공경심은 한국인의 어머니가 지닌 한(恨)의 정서와 맞아 떨어지면서 특별한 형태로 발전된 것도 사실이다. 비록 우리 시대의 어머니상이 변하고 여성의 지위가 달라진 것도 사실이지만, 여전히 어머니가 지닌 모성적 본능과 자녀를 키우는데 필연적으로 요청되는 헌신적 사랑과 희생의 삶은 여전히 성모님 안에서 참된 어머니상을 발견하게 만들어 준다. ‘하느님의 어머니’란 호칭은 하느님께서 보여주시는 모성(母性)을 성모님의 생애 안에서 만날 수 있고,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통에 동참하는 완덕에로의 길을 가장 완전하게 보여주신 성모님께 대한 공경과 사랑을 가톨릭 신심에서 표현해준 말일 뿐이다.
오늘날 레지오 마리애가 추구하는 성모님 공경은 어느 정도 균형 잡힌 신심을 필요로 한다. 성모님에 대한 공경심은 예수님을 그리스도, 구원자로 고백하는 우리들의 신앙을 토대로 이루어져야 참된 신앙에로 인도될 수 있다. 하느님의 어머니로서의 성모님께 대한 공경도 그리스도 신앙에 대한 온전한 고백 속에서만 받아들여질 수 있는 믿음의 언어에 속하기 때문이다. 나는 과연 성모님을 공경하면서 참된 어머니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지 살펴볼 일이다. 참된 자기 봉헌과 희생, 겸손과 절제, 인내와 사랑의 삶이 내 안에 성장하고 있는지 물을 일이다.
송용민 신부
(인천교구 삼산동 성당 주임/인천가톨릭대학교 교수)
첫댓글 사랑의 위계 질서에서 하느님(예수님)은 사랑의 원천, 믿음의 대상이구요. 인간은 사랑의 대상, 섬김의 대상, 피조물은 이용의 대상, 식별의 대상으로 최근 배웠네요. 그리고 성모님은 우리들에게 신심의 모델인 것도요. 그럼 나는 사람들을 믿음의 대상이 아닌 사랑의 대상, 섬김의 대상으로 진정 생각하며 관계를 맺으며 살고 있는 지.. 피조물을 사랑하기 위한 이용의 대상으로 여기고 있는 지 신부님 덕분에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고 갑니다. 참된 어머니의 모습~ 흠...
천주교 신자가되면 미사안빠지고 기도잘하면 다인줄알았어요 한번에 많이 알수야없겠지만 노력하겠습니다 아무리 영세한지 얼마안되었다지만 교리부터 시작하면 벌써 얼마인지! 알려고도 한적이없으니 답답하네요
엄마의 얼굴을 모르는 저는 늘 '어머니'란 단어가 생경스럽습니다.
신부님, 제 카페로 모셔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