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잡지 - 세상 속 신앙 읽기 2월호
상처 받는 신자, 상처 입은 사목자
송용민(사도요한) 신부
교회 생활에서 가장 힘든 부분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대부분의 신자들은 바쁜 세상에서 신앙생활에 대한 피로감과 의무감 때문이라고 말하곤 한다. 먹고 살기 힘든 세상이다 보니 신앙적 가치들보다는 세속적 가치들이 당장 더 중요하게 여겨지니 그럴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것은 주일 의무를 지키는 정도로 신앙생활을 하는 신자들의 이야기고, 조금 열심한 마음으로 신앙생활을 하는 신자들은 대개 교회 안에서 주고받는 상처 때문에 교회 생활에 염증을 느낀다고 한다. 속된 말로 ‘누구 보기 싫어서’ 성당 안 나가는 셈이다.
교회는 말 그대로 ‘믿는 이들의 공동체’ 혹은 ‘하느님의 백성’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이 말 속에는 믿음을 살아가는 하느님의 백성의 구성원들 모두가 같은 뜻과 같은 지향을 갖고 사는 것은 아니란 뜻도 숨어 있다. 믿음은 하나이지만, 그 믿음을 이해하고, 실천하는 방식과 가치관이 다른 이들끼리는 얼마든지 서로 오해와 편견, 갈등과 분열이 생길 수 있다. 인간의 본성상 불완전성과 죄성은 교회가 지닌 인간적 요소로 피할 수 없는 것이기도 하다. 교회가 거룩한 것은 하느님의 성령께서 현존하시는 신앙 공동체가 거룩하다는 것이지 교회의 구성원이 모두 거룩하다는 뜻은 아니다. 이점은 굳이 교회의 오랜 역사를 되돌아보지 않고 오늘의 교회 모습만 보아도 쉽게 알 수 있다. 교회 구성원인 신자들이나 성직자들이 모두 거룩하고 완전하기 때문에 교회가 거룩한 것이 아니라, 그들을 하나의 신앙으로 묶어주시는 성령의 거룩함이 믿음을 고백하는 공동체 안에 현존하시기 때문에 거룩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자들이 착각하는 것이 하나 있다. 세상살이가 그렇듯이 교회 안에는 천사들만 사는 줄로 잘못 아는 것이다. 아무리 선한 의지와 하느님을 향한 열정을 가졌다 해도 신자들이나 성직자들이 윤리적으로나 인격적으로 결함이 없는 그런 신앙 공동체란 지구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거룩함은 티 없는 완벽함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죄와 악의 상처를 딛고 일어서는 인간의 회심과 숭고함에서 나오는 것이다. 십자가 자체가 거룩한 것이 아니라, 십자가를 통해서 인류 구원을 위해 자신을 바치신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사건이 거룩한 것과 마찬가지다.
신학교에 처음 발을 딛는 새내기 신학생들이 가장 먼저 충격을 받는 일이 있다. 그들 생각에 신학교에 들어오는 사람은 그야말로 신부가 되고 싶어 하는 착하고 흠 없고 기도도 열심히 잘하는 이들뿐이라고 착각한다는 점이다. 그래서 처음에는 서로 조심하고 배려하며 살다가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공동생활에서 오는 다양한 형태의 갈등과 다툼, 이제까지 살면서 익숙해진 생활 방식과 가치관의 차이로 적지 않은 상처를 주고받는다. 새내기 신학생들이 이런 갈등의 시간을 잘 이겨내면 공동체 안에 있는 모순적 상황을 견뎌낼 수 있는 힘이 생기지만, 그런 일로 상처를 받고 견디지 못하면 신학교에서 살 수 없는 경우가 많다. 내가 신학교에 다닐 때만해도 너무 기도만 열심히 하고, 동료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며 신심 좋은 신학생을 ‘상투스(Sanctus)’라고 별명지어 부르던 기억이 난다. 그런 동료들은 오래가지 못해 신학교를 떠나곤 했다.
일반 성당에서도 이와 비슷한 상황이 벌어진다. 세례를 받고 신앙생활을 시작한 새내기 신자들은 교회에 대한 좋은 이미지와 환상이 시간이 지날수록 사회와 별반 차이가 없다는 걸 느끼며 상처 받고 환멸을 느껴 떠난다. 신앙생활을 오래 한 신자라도 조금 교회에서 봉사를 하다보면 서로 다른 생각과 관점 때문에 서로 상처주고 상처 받으며 힘들어 한다. 나름대로의 신심이 깊지 못하거나, 신앙의 뿌리가 없는 신자들은 동료 신자들의 인간적인 결함과 잘못을 덮어주거나 용서해주지 못한다. 심한 경우에는 그런 동료들의 모습이 보기 싫어 교회를 떠나거나 냉담해 버리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상처 입은 신자들이 가톨릭교회에 늘고 있다는 사실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통계적으로도 신자들의 3분의 2가 명시적인 가톨릭 신자로서 살지 않는다. 물론 그들이 하느님을 거부하고 사는 것은 아닐지라도 교회와 관련을 맺지 않고 자기만의 세상에서 신앙을 지키고 사는 경우가 많다. 신자들 상호 간에 입은 상처는 이사를 하거나, 소속 본당이 아닌 다른 본당으로 미사를 참례하는 정도로 신앙을 이어가지만, 그런 상처를 치유할 수 있는 사목적 배려가 개인의 신앙 체험이나 신앙 쇄신을 통한 회심 이외에 지금으로선 없는 듯싶다.
상처 입은 신자들만큼이나 상처 입는 사목자들도 늘고 있다. 성직자들이 과거에 누렸던 지위나 축성된 그리스도의 사제들이란 신앙적 존경심이 사라진 지 오래다. 아직 구교 신자들이 오랜 가톨릭 전통에 따라 사제들을 존경하고 허물을 덮어주는 것이 교회정신이라고 말할지는 모르지만, 사제들이 급속도로 세속화되고 있는 현실 속에서 신자들은 사제들이 받은 사제직에 대해 깊은 존경심도 없고, 사제 개인의 인격적 결함과 때로 잘못된 판단으로 인한 실수들을 덮어 주려하지 않는다. 그것은 역설적으로 사제들만이라도 이 어지러운 세상에서 거룩하고 도덕적으로 흠 없는 삶을 살아달라는 요청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상처 입은 신자나 상처 입은 사목자 모두가 믿음 안에서 서로 위로하며 격려하고 기도해주며 살지 않으면 안 되는 세상이 되었다. 우리 시대는 내가 상처 입은 것만 기억하고, 상처준 일들은 빨리 잊거나 용서 받으려는 세상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기적인 판단과 욕심 때문에 교회가 가진 소중한 신앙의 유산들을 너무 쉽게 잃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마음의 힘과 시련을 견뎌내는 인내심은 그저 인간적이 노력으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신앙의 가장 기초인 기도할 줄 아는 능력이 상처를 이겨낼 수 있는 힘이란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예수님은 공생활 가운데 언제나 기도하는 일을 잊지 않으셨다. 그분은 기적을 일으키신 후, 말씀을 선포하시기 전에, 그리고 당신의 전 생애를 하느님께 봉헌하시며 하느님께 기도하는 일을 멈추지 않으셨다. 오늘날 서로가 주고받은 상처 때문에 교회생활을 포기하는 이들이나 상처받아 쓰러져가는 사목자들, 그래서 신자들에게 그 상처를 되돌려주거나 비정상적인 방식으로 상처를 치유하고자 하는 이들은 스스로에게 물을 것이 하나 있다. 과연 나는 그런 시련 중에 기도하고 있는지. 하느님께서 내게 그런 고통의 시간을 주신 이유가 무엇인지 자신을 되돌아보며 치유를 청하며 신앙을 청하고 있는 지 물을 일이다. 제자들이 예수님께 부탁했듯이 “주님, 저희에게 믿음을 더하여 주십시오.”(루카 17, 5)라는 간절한 기도가 어느 때보다 필요한 시대이다.
주한 교황대사관 입구에 걸린 손자수로 만든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 사진과 베드로 성인의 열쇠입니다.
베네딕토 16세 교황님의 퇴위와 더불어 교황님들의 십자가가 더 무겁게 느껴집니다.
첫댓글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되어라~~용서하여라,그러면 너희도 용서받을것이다." 어제 신부님의 강론말씀을 들으며, 용서는 정의와는 다르다~하심에 마음과 정신을 끄덕였답니다. 옳고 그름을 따지기보다,주님께서 자비하신것처럼 나도 자비로워지자~~다짐했지요~
또한,사순기간동안 주님께 드린 나의 작은 결심, 내 마음 한 구석에 자리잡고 있는 미워하는 그 사람을 용서하도록 노력하겠다던 그 약속을 지킬 수있는 은혜도 청하며 복된 하루하루를, 기쁜 은총의 날들을 보내고있답니다~~^^
신부님.. 저는 제 한생애가 마칠 때까지 주님을 바라보고 갈랍니다...
사목자나 신자들 사이의 상처는 때때로 자연스러운게 아닌가 합니다....
다양한 연령층.. 다양한 직업을 가진 사람들의 집단이다보니... 저보다 잘난 사람보면 질투도 나고.. 또 저의 부족한 면을 보고 있노라면 화도나지만.. 그런 과정에서 저 자신 더 단련이 되고... 튀지 않으려 노력하는 가운데 겸손도 배우게 되는거 같습니다...
... 그리고 다수의 평신도들이 좀 더 예의바르고.. 좀 더 생산적인 쪽으로 마음을 모아간다면 더 신바람나는공동체가 되지않을까 합니다.. 주님..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신부님 글에서 지혜를 얻고 갑니다... ^
신부님의 글을 읽어가면서
모든 교회 공동체에서
안고 있는 문제임을 생각해 볼때
신부님의 말씀처럼 상처입은 신자나
상처입은 사목자 모두가 믿음안에서
기도로써 서로를 위로해 주는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요즘들어 신부님들의 사목현장을
조심스레 들여다보면서 얼마나 힘든여정을 보내고
계시는지 바라볼때 캐톨릭 신자로써 갖고있는 고정된 틀을
깨고 보다 유연한 사고로 접근할 필요성을 느끼게 되더군요^^
기도의 필요성을 느끼게 해 주시는글 고맙습니다.~~*^^
신부님의 좋은 글 잘 읽고 갑니다.
하느님께서는 사제를 통하여 하늘나라의 보화를 우리들에게 주신다는
그 당연한 진리를 깨닫는다면 그 누구도 사제를 위하여 기도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며,
공동체 안에서 서로의 짐을 나누려는 마음으로,
또는 주님의 자비를 통하여 다른이를 바라본다면
상처란 잇을 수없을 것이니
그저 하늘나라가 오시기를 기도할 뿐입니다.
신자들도 교회서 때때로 상처받지만
의 외로 신부님 그리고 수녀님께서도 신자들로부터 상처를 많이 받는다는 사실이 맘 아픕니다
저번 저희 성당 행사때 각 단채 별로 장끼자랑이 있었답니다
시상식때 상을 못받은 어느 단채 자매님께서 신부님 식사하시는데 찾아가 "우린 뭣 때문에 상을 안 주냐고 따지는걸 보고 전 깜짝 놀랐답니다
이런 일도 있구나!!싶어서예,,,상품은 초코파이 몆 통인데예,,,
신부님 글이 참 좋습니다. 교회 구성원간의 상처를 잘..진단하시고...쉽게 풀어주시니, 도움이 됩니다.
사람들을 사랑하려 노력하며... 신앙, 믿음은 ...교회 안의 사람들을 믿는 것이 아니고...하느님을 믿는 것이지요.
신앙의 궁극적인 목적인 '하느님'을 인식한다면...상처를 극복하기 쉽겠지요. ㅎㅎ
결국 서로 주고 받는 상처를 치유해 주시는 분도 주님이시고,
용서도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완전한 용서는 주님을 통해야만...가능한 것이지요~~ㅎㅎ
(저희 본당에도 어느 신자분이 기증해 주셔서...똑같은 요한 바오로 2세 손십자수 성화가 있답니당! )
성숙한 신앙인이 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상처 받고 때로는 나도 모르게 상처를 주고...도의 몸으로 충만해 있는 교회에 가는 까닭은
그래도 그
주님께서 성체로 계시기 때문입니다.
저도 주님만 바라보고 성강에 갑니다.
신부님 좋은 말씀 감사해요.
서로사랑 하여라 는성경구절을 묵상하며
잘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신부님 좋은 글 잘 읽고 제 카페로 모셔갑니다.
대면 대신 이렇게 글로써 신부님 생각합니다.
어떤 신자는 신부님 뵙는 것이 예수님 뵙는 것 같다고 하고 어떤 분은 신부님 글이 너무 좋다고 은혜 가득하다고 하는데 저는 신부님 웃는 모습에 웃는 마음 그 속에서 주님께서 하시고 싶은 말씀이 가득하다고 봅니다. 주님께 감사합니다. 신부님 주심을 ......
얼마전 본당신자들이 신부님께 큰 상처를 받은 일이 잇엇어요
결국 그 신부님은 떠나셧지요
상처입은 마음들을 추스르면서 예수님의 상처를 다시 한 번 묵상하는 계기가 되엇답니다
새로 오신 신부님의 영성으로 저희 성당엔 다시 평화가 출렁입니다~~
언제나 심지 굳고 지혜로우신 신부님 글 읽으며 마음의 힘을 얻고
믿음의 힘도 얻어갑니다
찬바람 부는 계절 건강 조심하시길 빌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