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라이트는 일제강점기를 항일독립운동이나 민중운동 중심으로 볼 것이 아니라, 조선이 식민지 통치를 경험하면서 자본주의적인 발전을 이루었다는 이른바 '식민지근대화론'에 입각하여 자본주의 발달이라는 입장에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뉴라이트 교과서는 일제의 한국 지배가 "한국인의 정치적 권리를 부정한 폭력적 억압체제"(78쪽)에 입각해 있었다는 점을 인정한다. 그리고 "국내외의 한국인의 불굴의 투쟁으로 독립을 쟁취하였다"(78쪽)고 기술하고 있다. 그러나 뉴라이트 교과서는 식민 통치 시기가 '억압과 투쟁의 역사'만은 아니었으며, 일제 식민통치의 '의도하지 않은 효과'와 한국인 자신들의 노력에 의해 "근대문명을 학습하고 실천함으로써 근대국민국가를 세울 수 있는 사회적 능력이 두텁게 축적되는 시기"(78쪽)였다고 새롭게 규정한다. 식민지 시기가 "오늘날 한국 현대문명의 제도적 기초가 그 과정에서 닦인"(96쪽) 근대문명에 관한 학습기 즉 근대문명의 제도적 확립기라는 주장으로, 식민지근대화론의 입장인 것이다. 그 결과 반민족 행위자인 친일파는 일제의 식민 통치와 식민지 근대화 과정에 잘 적응해 근대적 능력을 배양하고 대한민국 발전의 초석을 놓은 '근대화의 선구자'로 둔갑되었다.
근대화, 자본주의화, 경제성장, 문명화 등으로 일제의 식민지통치를 미화하는 뉴라이트의 '식민지근대화론'은 국민정서는 물론이고 학계의 연구동향과도 한참 거리가 있는 이론으로, 다음 문제점이 있다.
▲ 지난 2008년 자유교육연합과 뉴라이트학부모연합 등 보수성향의 5개 교육·사회단체 회원들이 7일 서울 세종로 정부중앙청사 뒤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반대한민국 교과서 추방을 촉구하는 구호를 외치고 있다 ⓒ연합뉴스
첫째, 일제의 지배제도나 정책이 가진 수탈성이나 억압성이 거세될 수밖에 없다. 식민지근대화론이 식민지지배미화론이라고 비판하면, 뉴라이트는 마지못해 '이식근대의 수탈성과 폭력성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억지 주장을 하지만, 논의의 초점은 근대적 제도의 이식이나 보편 문명의 수용이지, 결코 이런 제도의 식민지성 혹은 억압과 수탈성에 있는 것이 아니다.
둘째, 근대 사회를 이식한 주체가 일본 제국주의이므로, 우리 역사 발전의 주체는 일제가 될 수밖에 없다. 일체의 권리를 박탈당한 식민지시기에 우리 민족의 주체적 근대수용이라는 말은 논리적으로 성립할 수 없다. 일제시기 식민지 근대화의 주체(혹은 역사발전의 주체)는 일제(총독부와 일본인 자본)와 이에 기생한 이른바 민족자본가(기업가나 테크노크라트)라고 서술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들의 사회적 성공을 가져다준 일제의 식민지 지배에 협력적이었던 친일파들이 한국의 근대화를 주도한 계층이었다는 것이다.
셋째, '항일운동은 독립 쟁취, 친일활동은 건국역량준비'라는 기괴한 도식이 성립하게 된다. 서로 적대개념인 항일과 친일이 둘 다 국가건설을 위한 애국 활동이 되는 것이다. 사실 뉴라이트는 근본적으로 '근대화‧경제성장=문명화'라는 시각에서 역사적 사실을 해석하기 때문에, 항일보다는 친일에 보다 높은 가치를 부여하고 있다. 뉴라이트는 전체적인 관점에서 일제의 지배가 억압적이었다고 말하고 있지만 기존의 교과서와 비교할 때, 식민지 지배정책의 억압성과 독립운동에 대한 서술은 줄이고, 그보다는 일제강점기가 자본주의 정착기였다는 점에 역점을 두어 서술하고 있다.
2. 서술 내용
일제강점기의 역사를 서술할 때 가장 중요한 전제는 한국이 일본 제국주의의 지배를 받은 식민지 상태에 있었다는 점이다. 따라서 식민지시대의 역사서술은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지 지배는 어떻게 이루어졌으며, 그에 대한 한국인들의 대응은 어떠했는가가 중심이 될 수밖에 없다. 반면 뉴라이트 교과서는 수탈과 억압을 강조하는 이른바 '수탈론'은 민족적 편견에 입각하여 사실을 왜곡하거나 과장한 터무니없는 주장이라며, 일제강점기를 다음과 같이 새롭게 규정하고 있다.
첫째, 일제 식민통치 당국은 조선인을 경제적으로 수탈한 바가 없으며 자본주의 관계에 의해 정상적으로 통치했다. 폭력적 수탈은 존재하지 않았으며 순수하게 자본주의적 경제교환관계에 입각한 재화의 이동이 있었을 뿐이므로 제국주의의 수탈과 억압은 과장되었거나 터무니없는 주장이다.
둘째, 식민통치의 '의도하지 않은 효과'와 한국인 자신들의 노력에 의해 "근대문명을 학습하고 실천함으로써 근대국민국가를 세울 수 있는 '사회적 능력'이 두텁게 축적되는 시기"(78쪽)였다. 식민지지배는 한국인에게 근대문명을 가르쳐 주었으며, 해방 이후 근대국민국가를 건설할 수 있는 능력은 근대문명을 학습한 세력 즉 친일파한테 있다.
셋째, 일제강점이 조선의 근대화를 촉진시켰고, 이 시기에 구축된 인적·물적 인프라가 해방 이후 대한민국 고도경제성장의 역사적 동력이 되었다. 일제 침략 하에서도 조선인이 능동적으로 경제생활을 영위하여 자기 성장을 이룩하였으며, 1930~1945년간에 조선에서 이루어진 맨파워(man power)의 성장이 1960~1970년 경제발전의 역사적 기원이다.
이상 뉴라이트는 일제강점기를 '자본주의의 정착과 근대 문명의 축적기'인 동시에 '한국자본주의 고도성장의 역사적 기원'으로 간주하고 있다. 일제의 민족적 차별과 폭력적 억압의 실상 대신 일제 식민통치의 근대적 효과와 그 성과에 주목함으로써 '식민지 근대화론'이나 '제국주의 시혜론'에 입각해 식민지시기를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은 뉴라이트교과서 '식민지 시기의 경제적 변화'(94~101쪽) 서술에 집중적으로 드러나 있다.
1) 시장경제 기반의 형성
(1) 사회간접자본의 확충
뉴라이트 교과서는 "총독부는 인력과 물자의 이동을 활성화하고 지배체제를 공고히 하기 위해 교통 통신망을 대거 확충했다"(94쪽)며, 철도, 도로, 항만 등 사회간접자본의 확충 실태에 대해 구체적으로 서술하였다. 그리고 "이 같은 사회간접자본의 확충은 식민지 한국에서 자본주의적 시장경제를 활성화하였다"(94쪽)고 서술하여, 마치 일제가 조선의 자본주의적 발전을 위해 사회기반시설을 확충한 것인 양 오해할 수 있도록 하였다.
교과서의 서술은 일본이 조선에 철도, 항만과 같은 사회기반시설을 확충하여 조선을 근대화시켰다는 일본 극우파들의 '식민통치 시혜론'을 그대로 되풀이한 것이다. 이를 근거로, 1953년 한일회담 수석대표였던 구보다 강이찌로(久保田貫一郞)의 "36년간의 일본의 조선 통치는 한국인에게 유익했다"는 망언 이후로 "나는 일본의 조선 식민통치가 한국 국민에게 불행이었다는 생각을 가져본 일이 없다"(1958년, 기시 노브스케(片信介) 총리대신), "일본은 조선을 위해서 좋은 일을 많이 한다. 한 20년쯤 더 통치했으면 좋았을 것이다"(1964년, 다까스기 상이찌(高衫晉一) 한일회담 수석대표)는 망언이 이어졌으며, 오늘날 역사교과서 왜곡 사태까지 나오고 있다.
그러나 조선인의 희생에 따른 사회간접자본의 확충은 조선인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먼저 철도건설은 일본이 이권을 확보하기 위한 것이었다. 철도는 일본에 각종 특혜를 주었다. 일본은 조선인의 희생에 힘입어 부설된 철도를 독점 운영하면서 높은 수익을 독차지하였다. 게다가 철도가 건설됨으로써 군 병력의 이동, 식량의 일본 수출, 공업 지대에서의 원료와 생산물의 수송 등을 차질 없이 할 수 있게 되었다. 결국 일본은 철도 건설과 독점을 통해 조선에 대한 군사 및 정치적 지배기반을 굳히는 한편 경제약탈을 효과적으로 하였다. 해운 또한 일본자본에 의해 독점되었다. 해운업의 독점과 확장은 자연히 항만시설의 확장을 가져왔으며, 확장된 항만은 확대된 철도망과 연결됨으로써 식민지적 경제침탈의 중요한 거점이 되었다. 전신 전화 등 통신망의 확장 역시 식민지 지배망의 확립을 위한 것이었다.
전국 각지에서 일어나는 항일의병전쟁을 탄압하고 식민지 지배기구를 확립하기 위해서도 도로망의 정비・확대 또한 시급했다. 도로 건설 역시 식민지 지배망의 일환으로서 적극 추진되었는데, 도로 용지로는 농토가 무상 몰수되었으며 사용된 노동력은 대부분 농민의 부역동원이나 강제노동으로 충당되었다. 결국 식민지시기에 철도, 항만, 전신, 전화, 도로 등 사회간접자본이 확충되었으나, 이들을 일본이 독점함으로써 일본 자본주의 발전을 뒷받침하는 자원이 되었으며, 식민지 지배체제를 공고히 하는 시설로 활용되었다.
▲ 독립기념관의 독립선언도. 독립기념관에 전시된 민족대표 독립선언도. 민족대표들은 1919년 3월 1일 서울 종로 태화관에 모여 독립선언식을 갖고 세계 만방에 '조선의 독립국임과 조선인의 자주민임'을 선언하였다.ⓒ연합뉴스
(2) 도시화의 진전
뉴라이트 교과서는 인구 증가를 말하면서, "도시의 발전도 있었다. 도시인구, 즉 부(府) 인구는 1920년 전체 인구의 3.4%에서 1930년 5.6%, 1940년에 11.6%로 증가하였다"(95쪽)고 하여, 도시의 발전을 강조하였다.
식민지시기 도시의 발전을 얘기하려면 반드시 언급해야 할 것이 일본인 인구의 증가다. 일제 말기에 약 75만 명의 일본인이 조선에 들어와 살고 있었고 그 가운데 대부분이 도시에 집중되어 있었으므로 도시의 발전은 일본인들의 조선 이민과도 깊은 관련이 있다. 또한 이 시기 도시의 발전을 언급할 때, 주요 도시들이 일본인들에 의해 주도되는 식민도시의 성격을 강하게 띠고 있었다는 점을 언급하지 않으면 안 된다. 서울이나 개항장에서 발전한 도시들은 구조적으로 일본인 거주지인 남촌과 조선인 거주지인 북촌으로 분리되어 있고, 도시 시설 면에서도 양자 사이에 커다란 격차가 있는 이중도시(dual city)의 모습을 띠었다. 즉 일본인 거주지역에 대한 우선 개발과 특혜가 주어졌고, 전기나 상수도 그리고 도로의 보급도 일본인 거주지를 중심으로 이루어졌으며, 도시의 상권과 문화시설의 소유권자는 일본인이었던 것이다. 이처럼 대도시들은 '식민 도시'의전형적인 모습을 띠고 있었다. 이와 같은 실태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이 없는 가운데 '도시의 발전이 있었다'고 쓰는 것은 조선의 식민지성을 은폐하고 근대성만을 부각하는 것이다. 게다가 교과서는 토막민과 같은 도시빈민 문제는 생략하고 있으며, 도시 건설의 미명하에 성읍 등 한국 도시의 정체성을 파괴하고 기형적인 도시 발전을 이룬 폐단에 대해서도 아무런 언급이 없다.
2) 식민지의 경제개발
(1) 경제성장률
뉴라이트 교과서는 "전체적으로 식민지 한국의 연평균 총생산은 인구 증가율 1.3%를 능가하는 3.6%의 성장을 보였다"(99쪽)고 하여, 식민지시기에 조선이 상당한 경제 성장을 이루었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이러한 서술이 지닌 가장 큰 문제점은 한반도에 존재하는 지배자이며 착취자인 일본인과 피지배자이며 피착취자인 조선인을 구분하지 않고 이들 모두를 한반도인으로, 사실상 조선 민족으로 동일시한다는 데 있다. 민족문제야말로 식민지 조선경제를 이해하는 데 가장 본질적인 것이다. 일제강점기는 일본인에 의한 조선인 지배가 핵심이고 따라서 그러한 사회에 대한 분석에서는 민족문제를 핵심적 요소로 포함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일제시대의 개발은 식민지체제하에서 이루어진 개발이었고, 조선경제가 사실상 일본인들에 장악되었던 상황에서 경제성장률을 말하는 것은 식민지 조선의 역사상을 왜곡할 가능성이 높다. 당시 식민지 조선에 투자된 자본은 대부분 일본 자본이었으며 조선에서의 경제 성장에 따른 수익은 대부분 일본 자본과 재조선 일본인의 몫으로 돌아갔기 때문이다.
1930년대 이후 조선에 들어선 공장들은 일본 본토의 대규모 자본투자에 의한 것이었고, 전시 중 연간 총생산액은 북부지방을 중심으로 수많은 자원 약탈이 포함된 것이다. 일본의 대자본은 만주까지 넓어진 시장을 위해 만주와 한반도를 포괄하는 '대일본 자본주의 경제권'을 설정하고, 만주와 한반도의 시장을 목표로 조선에 공장을 짓기 시작하였다. 특히 북한 지역에 많은 공장을 지었다. 따라서 이 시기 조선 경제는 '일본 자본주의권' 안에서만 의미가 있었다. 당시 한반도 경제라는 것은 독자적인 경제권이 아니었다. 조선인의 자본 비중은 10% 정도밖에 안 되었다. 식민지 조선에서의 경제 성장 수익은 대부분 일본 자본에 돌아갈 수밖에 없었으므로, 경제 성장률을 말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조선의 경제가 고도성장하고 있던 바로 그때, 조선 농민들의 생활은 점점 더 곤궁해져 갔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전체 조선인 호수에서, 생활이 궁박한 상태에 있지만 반드시 타인의 구호를 받을 정도에는 이르지 않고 간신히 생계를 세울 수 있는 세민(細民)과 생활이 궁박하여 긴급히 누군가의 구제를 필요로 하는 상태에 있는 궁민(窮民)의 호수가 차지하는 비중은 1926년의 13.8%에서 1934년 35.5%로 늘어났다. 같은 기간 동안 전체 조선인 중에서 이들 세궁민(細窮民)이 차지하는 비중은 11.6%에서 28.2%로 급증했다. 전체 조선인의 3분의 1 가량이 세궁민인 것이다.
결국 일본 제국주의의 지배 동안 조선은 급속한 개발을 경험했으나 그 개발의 이득은 조선인들에게 거의 귀속되지 않았고, 조선인들의 경제적 처지도 거의 개선되지 않았고 또 개선될 전망도 없었으며, 극심한 경제적 불평등과 그것에 의한 민족차별이 구조적으로 확대 재생산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해방과 더불어 이 개발의 유산은 물거품처럼 사라졌다. 바로 그 의미에서 일제시대의 개발은 조선인에게 있어 '개발 없는 개발'이었다. 조선에서 일어난 놀라운 경제성장에도 그것이 조선인들의 생활수준을 개선시킬 전망이 없고 오히려 불평등과 차별만을 확대재생산하는 과정이었던 것이다.(허수열, 28쪽)
(2) 한국인 상공업자의 성장
뉴라이트 교과서는 "식민지 경제발전은 일본인과 일본자본이 주도하였지만 한국인과 한국인 자본이 배제된 것은 아니었다. 한국인 상인과 기업가 중에는 경제 환경의 변화에 잘 대응한 자도 많았다.(……) 불리한 여건에도 한국인 상공업자들은 공장을 건설하고 시장을 개척하는 수완을 발휘하였다"며, 그 대표적인 사례로 경성방직과 화신을 들었다. 그리고 이들이 "면방직업과 백화점 부분에서 일본인 기업과 치열한 경쟁에서 살아남아 대기업으로 성장하였다"(99-100쪽)고 하였다.
그러나 "법인으로 등록된 회사 자본 가운데 한국인 자본 비중은 10% 정도에 불과"(100쪽)한 식민지 현실에서, 전체 자본 규모의 10분의 1에 불과한 한국인 상공업자의 성장에 의미를 부여하기는 어렵다. 게다가 경성방직이나 화신과 같은 기업이 친일의 대가로 특권을 부여받아 성장에 성장을 거듭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마치 일본인 기업과의 순수한 경쟁에서 살아남은 것인 양 왜곡하였다.
사실 일제치하에서 조선인이 일본인과 경쟁해 자본가로 성장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일제시대의 조선인 대지주 가운데 자본가로 살아남은 사람은 절반도 안 된다는 연구결과는 조선인의 기업 경영이 쉽지 않았음을 잘 보여 준다. 이처럼 열악한 여건에서 경성방직이 지주자본에서 산업자본으로 전환하는 데 성공할 수 있었던 까닭은 총독부의 적극적인 지원과 협력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1919년 10월에 창립된 경성방직은 출발하자마자 좌초의 위기를 맞았다. 경성방직은 1926년경부터 완전 조업에 들어감으로써 기사회생할 수 있었는데, 총독부가 1924년부터 매년 자금을 제공하였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거족적인 저항운동인 3.1운동에 직면하여, 조선의 귀족, 양반, 부호, 실업가, 교육가, 종교가 등에게 얼마간의 편의와 원조를 주어 친일단체를 만들려는 방침에 따른 것이었다.
이후 경성방직은 일제의 만주 진출에 발맞추어 1938년 만주 봉천에 지점을 설치하였다. 이즈음 경성방직 사주 김성수는 중일전쟁의 의미를 확산시키고 일반 민중들의 시국인식을 철저히 하기 위해 시국강연을 하고 다녔다. 또한 일제가 각종 관변기구와 민간단체를 총망라하여 조선인을 통제할 목적으로 조직한 전시통제기구인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발기인으로 참여하였다. 이와 같은 김성수의 주도적이며 적극적인 친일·반민족행위에 대해, 최근 서울행정법원은 "일제에 의하여 국권이 침탈당하여 국가와 민족의 자주권이 박탈되고 한민족의 뿌리와 생존 자체가 위협받는 절박한 식민지배 하에서 당시의 유력한 기업인이자 교육자가 자신의 기업 및 학교 경영활동 유지를 위하여 일제의 식민통치 및 침략전쟁에 도움이 되는 행위에 가담하거나 이를 용인하였다는 것은 그 내심의 의사나 동기가 어떠하였는지에 불구하고 친일반민족행위로 평가받을 수밖에 없"다라고 하였다. 경성방직처럼 일제에 협력한 자본가들은 성장을 거듭한 반면 백산상회와 같은 항일기업은 몰락했다. 백산상회의 몰락과 사주인 안희제의 옥사는 국민국가를 갖지 못한 민족자본의 비극적인 운명을 여실히 보여준다.
▲ 일제강점기 수탈의 흔적이 남아 있는 항구도시, 군산. 일제는 조선의 쌀과 자원을 수탈해가는 창구로 전북 군산을 선택하고 철도와 항만 등을 조성했다. ⓒ연합뉴스
3) 농촌 경제의 동향
(1) 쌀의 수탈과 지주제
뉴라이트 교과서는 "쌀은 일본에 수탈된 것이 아니라 경제 논리에 따라 일본으로 수출되었으며 그에 따라 일본인을 포함한 한반도 전체의 소득은 증가하였다"(98쪽)고 하여, 이른바 '식민지수탈론'을 비판하였다. 일제 식민 통치당국의 공권력에 기초한 폭력적 수탈은 존재하지 않았으며, 순수하게 자본주의 경제 교환관계 즉 시장논리에 입각하여 자율적·자발적 교환을 통한 부의 축적이 있었을 뿐이라는 주장이다.
그러나 수탈론에서 말하는 쌀의 수탈이란 유통 과정에서의 수탈보다는 생산과정에서의 수탈에 더 중점을 두는 것이었다. 무엇보다도 지주제와 고율 소작료 관행은 총독부권력에 의해 강력히 뒷받침되고 있었다. 일본인 지주와 조선인 지주가 총독부 당국의 지원을 받으면서 소작인들로부터 고율의 소작료를 거두어들이는 것 자체가 사실상 수탈에 해당한다. 일제 통치자들은 쌀 생산을 늘리고 지세 수취를 원활히 하기 위해 소농민과 소작인을 외면하면서 지주를 보호하고 육성하는 정책을 광범위하게 시행했다. 그 결과 조선의 소작인 경작 비율은 조선 시대에 상상도 하지 못한 수준으로 뛰어올랐으며, 소작제는 일제시대에 이르러 가장 악랄한 형태가 되었다. 지주한테 소작농이 얽매인 정도가 더 심해졌으며 수탈성도 한층 강화되었다. 1920년대 중반 암태도소작쟁의를 기점으로 조선의 소작농민들은 소작료를 4할로 낮추는 운동을 전개했으나 총독부 경찰 당국은 이를 극력저지하고 탄압하였다. 소작료는 5할 혹은 그 이상이 되는 경우가 일반적이었다.
한편 일제는 1918년 '쌀 소동'으로 식량공급문제가 사회문제가 될 정도로 악화하자, 한반도를 식량 공급지로 삼기 위해 식민지 지주제를 정착시키는데, 이 역시 쌀이 시장의 논리에 의해 생산‧수출된 것이 아니었음을 말해준다. 식민 통치의 혜택을 가장 크게 받은 집단은 지주층이었다. 지주층이 전통 사회에서 허용되지 않던 가혹한 조건으로 소작인을 착취할 수 있게 된 것은 일제 식민 통치 덕분이었고, 그에 대한 보답으로 일본에 쌀을 보내 식민지의 임무를 수행하고 지세를 납부함으로써 식민 통치의 비용을 조달했다. 조선 후기에 정부는 지방 지주 세력의 통제가 약해져 소작료가 수확량의 절반을 넘게 된 현실을 개탄하곤 했다. 그러나 식민지 시대에는 조선을 일본 제국의 쌀 생산 기지로 이용하는 정책에 의해, 농지 소유의 집중이 심화하고 소작료가 살인적 수준까지 올라갔다. 소작인의 최저 생계비가 보장되지 않는 이런 사태는 정상적 국가 경영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로 식민지 경영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식민지 조선의 재부는 일본인 회사와 일본인 지주층, 그리고 일부 조선 지주층에게 집중되었다.
게다가 일제는 조선을 미곡생산지대로 규정하여 일본으로 저가의 쌀을 수출해서 일본 경제의 임금부담을 줄일 수 있도록 하였다. 식민지정책에 따라 조선의 농업이 쌀 단작으로 바뀐 것이다. 1920년 이후 산미증식계획이 시행된 결과 일본에 대한 쌀 수출량은 증가하지만, 조선인 자작농들은 지주들에게 땅을 헐값에 빼앗겨 소작인이 되거나 먹고 살길을 찾아서 만주, 연해주 등으로 이주해야 하였다. 산미증식계획 실시 과정에서 수리 조합비를 내지 못한 농민들의 토지를 지주들이 헐값에 사들임으로써 우리나라 농민들을 더욱 궁핍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과정이 계속되는 동안 농경지는 점점 극소수의 일본인, 한국인 지주들이 독점하게 되었다. 1920년대와 1930년대에 전체농가의 3~4%밖에 안 되는 소작농과 자소작농이 지주들의 땅을 경작하면서 전체 생산량의 반 이상을 현물로 소작료를 내게 되었다. 일제는 1930년경에는 조선에서 생산된 쌀의 40% 이상을 헐값으로 가져갔다.
소수의 일본인이 조선의 부의 많은 부분을 장악하게 되면서 민족별 경제적 격차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커졌고, 시간이 경과하면서 그 격차는 더욱 확대되어갔다. 민족별 경제적 격차의 확대는 민족차별을 더욱 조장함으로써 차별은 일상화되었다. 많은 조선인이 경제적 궁박을 견디다 못해, 농촌을 떠나 도시빈민으로 흘러들어 가거나 혹은 만주나 시베리아로 유민화되어 떠나갔다. 한 사람의 일본인이 이민으로 들어올 때마다 다섯 사람꼴로 조선인이 유민화되어 조선을 떠나간 것도 바로 이러한 경제적 궁박이 가장 큰 원인이었다. 조선인 유민과 일본인 이민, 이것이 다름 아닌 식민화의 과정이었던 것이다.
(2) 조선인의 생활수준
일제시대에 조선인들의 생활 수준이 저하되었음을 증명하는 지표로 흔히 1인당 미곡 소비량의 감소가 거론된다. 이에 대해 뉴라이트 교과서는 "쌀을 대신해서 만주에서 조와 콩이 대용식품으로 수입되었다. 쌀의 1인당 소비가 감소한 것은 사실이지만 잡곡 등 대용식품과 기타 가공식품을 종합적으로 고려할 때 1인당 열량섭취가 줄었다고는 단언할 수 없다"(98쪽)고 하였다.
그러나 이 분야에 대한 실증적인 연구에 따르면, 일제시대에 조선의 1인당 미곡소비량은 현저히 감소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조선총독부의 인구자료와 생산량 자료를 그대로 사용하는 경우 1911~1934년간의 1인당 미곡소비량의 감소는 확실하게 나타난다. 1911년 0.786석에서 1934년 0.379석으로 52%나 감소하게 되는 것이다. 쌀을 제외한 다른 곡물의 1인당 소비 역시 1918~40년간 감소경향이 뚜렷하게 나타난다. 쌀, 보리 및 대두의 소비에서 얻어지는 조선의 1인당 칼로리 섭취량은 1918년이 정점이고 그 뒤로 계속 감소하여 1936년에 최저점에 도달한다. 1인당 칼로리 소비량을 통한 곡물소비량의 종합에서 알 수 있듯이, 일제시대에 1인당 곡물소비량은 결코 증가했다고 할 수는 없다. 일제시대는 아직 엥겔계수가 매우 높은 시기였기 때문에, 이러한 1인당 곡물소비량의 동향은 조선인들의 생활 수준이 향상되었다거나 혹은 1인당 소득이 증가했다는 주장을 하기 어려움을 짐작하게 해준다.(허수열, 271~277쪽)
▲ 일제의 전쟁물자 수탈. 일제가 공출제도라는 명목으로 수탈한 각종 물자 ⓒ연합뉴스
4) 식민지 지배 정책
(1) 조선민사령(朝鮮民事令)
뉴라이트 교과서는 식민지 시기 가장 큰 성과로서 근대적인 사유재산제도의 성립을 들고 있으며, 이를 자유민주주의의 초석이 놓인 것으로 확대하여 해석하였다. 뉴라이트가 일제강점기 자본주의에 입각한 경제활동이 조선인에게도 전면적으로 보장되었다는 증거로 든 것이 1912년에 공포된 조선민사령이다.
"민사령을 통해 식민지 한국에서 근대적인 사유재산제도가 성립하였다. 민사령은 일본인이 한국에서 토지와 자원의 재산권을 확보하고 자유롭게 경제활동을 하도록 보호하였다. 민사령은 일제가 한국을 지배할 목적으로 공포하였지만, 한국인의 사유재산권과 경제활동의 자유 역시 보장하였다. 이처럼 민사령을 통해 한국인도 근대적 사권(私權)의 주체가 되었다"(84쪽)
뉴라이트의 이론가인 이영훈 교수는 민법을 주목하고, 해방 후 대한민국이 일제의 민법체계를 그대로 온존시킨 것을 높이 평가하고 있다. "대한민국은 일제를 통해 이 땅에 들어온 시장경제체제를 복구하고 발전시켜 오늘날과 같은 번영하는 시장경제를 성취하게 된 것이지요"(이영훈, 『대한민국이야기』, 기파랑, 2007, 173쪽)라 하여, 식민지 지배 유산으로서 민법이 있음으로써 대한민국이 '번영하는 시장경제'를 성취할 수 있었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인식은 역사적 사실과 매우 동떨어진 것이다. 일제가 한국에서 자유로운 경제활동은 보호했다고 하나, 그것은 전면적이었다고까지 말할 수는 없다. 엄혹한 식민통치하에서 식민지정책에 소극적이거나 독립운동에 찬동하는 기업가의 활동까지 보장했던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또한 제헌헌법의 재산권 조항이 식민지 지배유산, 특히 일제 민법의 연속이라는 주장에 대해서는, 제헌헌법 기초위원이었던 유진오 박사의 답변을 언급해 둘 필요가 있다.
"여기서 말씀드릴 것은 이 재산권에 관한 생각이 가령 그 전 일본 민법에 있던 돈 재산권에 관한 생각과는 대단히 다르다는 점을 한마디 말씀드려 두겠습니다. 그전에는 재산권은 절대적으로 해 가지고 그랬지마는, 지금은 공공필요에 의해서 불가불 이것을 수용해야 하는 경우에는 법률의 정하는 바에 의해서 상당한 보상을 지불함으로써 행한다... 그래서 재산권을 절대적인 것이라고 보지 않고 법률로써 재산권의 내용을 정하고 법률로써 그 한계를 정해 가지고 그 법률이 허용하는 한계 내에서 재산권은 용인된다는 그 규정입니다"(헌법제정회의록, 147쪽)
제헌헌법 제10장 부칙 100조는 "현행법령은 이 헌법에 저촉되지 아니하는 한 효력을 가진다"고 하였다. 이는 다시 말해, 식민지 지배 유산으로서 민법은, 사회경제적 민주주의, 사회적 시장경제와 사회국가이념에 기반을 둔 제헌헌법에 저촉되지 않는 범위 내에서만 효력을 가진다는 것이다.
(2) 근대적 규율의 강요와 수용
뉴라이트의 규율 예시는 제국주의의 폭력적 획일주의와 훈육의 실상보다는 근대의 긍정적 양상을 예로 들고 있다. 뉴라이트 교과서는 근대규율에 의한 시간 사용의 합리화와 생활습관의 개선, 양력제, 염색옷, 제복착용 등 새로운 근대 생활상을 제시하고, "이처럼 한국인에게 가해진 새로운 규율은 일제의 식민지 지배를 위한 것들이지만, 근대사회의 규율로서 한국인의 일상생활과 정신문화에 점차 내면화되어 갔다"(104쪽)고 함으로써, 식민시기 규율의 '문명화·근대화' 양상을 부각했다. 무단통치기 교사도 제복을 입고 칼을 차고 다니던 살벌한 상황이나 민족차별에 대한 서술보다는 조선총독부가 근대적 법치에 입각한 통치를 했다는 점을 은연중 강조함으로써 식민통치의 폭력성은 사라지고 근대적 체제로의 정비만 부각된 것이다. 그 결과 조선총독부는 식민통치기구가 아니라 효율적인 국가기구로 인식된다.
그러나 일제가 엄격한 일과시간, 체계적인 금지나 의무의 조항 등의 근대규율을 통해서 조선 사람들을 재구성하려고 애쓴 것은 사회계약의 기본적 이해관계 속에 걸려 있는 권리의 주체가 아니라 복종하는 주체, 습관이나 규칙, 명령에 복종을 강요당하는 개인을 만들어내기 위함이다. 가정, 학교, 공장 등을 군대나 감옥과 다름없는 감시 통제기구로 만듦으로써 하나의 거대한 감금사회로 만들기 위한 것이었다. 이는 식민지 지배체제에 대한 저항운동을 미리 방지하는 효과도 있지만 노동력의 효율적인 동원과 착취에 도움이 되기 때문이었다. 결국 일제가 만들어낸 근대성에는 근대 시민사회의 정신적 기초인 개인의 자율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진정한 의미의 근대 시민정신이라고 할 수 있는 개인의 자율성은 해방 이후 일제의 식민잔재를 극복하는 민주화 투쟁과정을 통해서 비로소 획득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조선총독부는 합법적인 절차를 통해 권한을 위임받은 권력체가 아니다. 조선총독부는 국가(공적 주체)가 아닌 것이다. 일제는 근대 사회의 핵심 가치인 자유 평등을 부정하였으며, 조선인의 정체성, 존엄성을 인정하지 않았다. 특히 전시총동원체제 시기에는 일방적인 복종과 규율과 통제 그리고 돌격전을 요구했고, 이 과정에서 인명 희생과 국가테러리즘에 의한 인간 파멸이 있었다.
해방 이후 잇따라 발생하는 국가테러리즘의 근원은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지배에서 비롯한다. 조선인은 자신의 정부를 갖지 못한 채 일제의 파시즘의 폭력정치에 의해 일체의 권리가 무시되고 복종과 굴욕의 노예적 상태를 강요당했다. 일제는 항일운동세력에 대한 탄압뿐만 아니라 조선 민중 전체에 대한 노예교육과 강압적 정치, 그리고 조선의 인적 물적 자원을 총동원하기 위한 수립한 국가총동원체제를 통해 조선 민중 전체에 대해 무차별한 탄압과 인권유린을 자행했다. 그 결과 일체의 민주주의적 정치훈련을 받을 기회를 박탈당한 채 식민지 노예의 길을 강요당했는데, 이는 인권문제 등 인간의 기본 권리에 대한 의식을 키우는 데 결정적인 장애로 작용하였다.
(3) 교육 정책
뉴라이트 교과서의 식민지 시기의 교육과 관련한 서술 역시 문제가 심각하다. 어떠한 교육이며 누구를 위한 교육인가에 대한 설명이 없기 때문이다. 먼저 취학률에 대한 기술을 보자.
"총독부는 보통학교의 보급에 주력하여 1918년 3개 면마다 보통학교 1개를 둔다는 3면1교제를 계획하여 1922년까지 완료하였다. 1928년에는 보통학교의 1면1교제 정책을 추진하여 1936년에 완료하였다. …한국인의 지속적인 학교 설립 및 확충 요구에 직면한 총독부는 1936년부터 1946년까지 취학률 60%를 목표로 하는 제2차 확충계획을 세웠다. 그 결과 식민지 말기의 취학률은 40%를 넘었다"(89쪽)
1920년대 30년대 학생 맹휴사건의 가장 많은 요구가 민족차별 철폐였음에도 교과서는 식민지 교육과 조선인 학생의 갈등 구조보다는 조선인의 교육열 증대에 초점을 맞춰 일제가 이를 수용하였다는 식으로 묘사하고 있다. 또한 왜 1936년부터 총독부가 취학률을 높이려 했는지도 설명하지 않고 있다. 전환의 배경은 (준)전시체제에 따르는 황국신민의 육성이라는 일제의 교육방침의 변경 때문이었다. 동양의 히틀러라고 불리는 미나미 지로 총독이 1936년 부임하여 내선일체와 황국신민화를 강조하면서 황국신민화를 목표로 하는 보통교육이 확장되었다. 이듬해 중일전쟁이 발발한 이후에는 보통교육의 확장이 더욱 요구되었다. 그것은 징병제를 시행하여 조선의 청년들을 전장에 동원하기 위해서는 일본어를 가르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 시기 초등교육은 사실상 어린 조선인 학생들을 조기에 황국신민으로 만들어 전쟁의 총알받이로 끌고 가기 위한 조선인 징병제 계획과 맞물려 운영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내용을 쓰지 않은 채 취학률이 40%를 넘었다는 점만 쓰게 되면 총독부가 조선인 교육을 위해 크게 노력하였다는 식으로 해석될 수밖에 없다.
다음은 중학교진학의 문제에 대한 서술이다. "1930년대에는 공업화가 이루어지자 학교 졸업자에 대한 수요가 커지는 가운데 중등학교 입학난이 심화되었다. 이에 총독부에 중등학교 설립을 청원하거나 사립중등학교를 설립하는 운동이 활발히 펼쳐졌다"(105쪽)
교과서는 중등학교 설립운동이 활발히 일어났다고 쓰고 있으나, 대부분의 중등학교 설립 운동이 총독부에 의해 좌절되었고 총독부 또한 중등학교를 거의 설립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쓰고 있지 않다. 그리고 그것이 총독부의 교육정책이 우민화 교육정책 즉 보통교육 위주였기 때문이었다는 언급도 없다. 총독부는 조선인을 위한 인문계 중등교육은 최대한 억제하고 실업계 중등교육만 다소 숨통을 틔워놓았다. 1938년부터 중등학교가 늘어났다. 중일전쟁이 발발한 이후에야 중등학교 학생 수가 늘어난 것은 일본인들이 다수 전쟁에 동원되면서 그들의 자리를 충원할 인적자원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면서도 일제는 정작 근대화 필요한 기술 인력을 양성하는 고등교육기관은 거의 확대하지 않았다.
(4) 강제동원
일제 식민지배의 폭력성과 야만성을 잘 보여주는 것이 노동력의 강제동원이다. 일제는 침략전쟁의 원활한 수행을 위해, 인적·물적 자원의 통제 운용을 규정한 '국가총동원법'(1938년 5월)과 이에 근거하여 인적동원을 위한 통제법령인 '국민징용령'(1939년 7월 15일)을 반포하였다. 이에 따른 노동력 강제동원에 대해, 뉴라이트 교과서는 "일본의 민간기업은 총독부로부터 지역과 인원을 할당받아 노무자를 확보했는데(……) 돈을 벌기 위해 자발적으로 모집과 알선에 응한 사람도 많았으며"라고 하여, 강제동원을 국가권력에 의한 인력동원의 강제성보다는 경제적 교환관계에 의한 노동력의 취업 문제로 파악하고 있다. 이는 반인도적인 강제동원 자체를 불법으로 보고 있는 헌법의 핵심적 가치와도 충돌하는 것이다.
▲ 강제징용자의 애환. 일본 북해도 탄광으로 끌려간 조선인 노무자의 애타는 심정을 담은 낙서 ⓒ연합뉴스
특히 정신대 명목으로 일본군위안부로 끌려간 문제에 대해서는 일본군이 강제동원을 주도했다고 서술하였다(92~93쪽). 그리고는 심문을 맡았던 미국군이 남긴 기록을 인용하여 "1942년 5월 상순 일본인 대리업자가 '위안봉사'를 시킬 한국인 여성을 모집할 목적으로 한국에 도착했다. 이 대리업자가 여인들에게 제시한 것은 큰 돈벌이, 가족의 빚 갚기, 쉬운 일, 신천지 싱가포르에서의 새로운 삶 등이었다. 이러한 꾐에 빠져 많은 여성이 해외 취업에 지원하고, 몇백 엔의 선대금을 받았다. 이들은 대부분 무지했고 교육을 받지 못한 여성이었다"(93쪽)고 하여, 실제로는 업자들이 여성들에게 큰 돈벌이가 있다고 하자 무지한 여성들이 그 꾐에 빠져 따라갔다는 '취업사기'식으로 서술하였다. 그리고는 이 문제와 관련해서 피해자들이 증언하고 있는 강제연행, 인신매매, 유괴 등을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또한 정신대로 끌려간 즉 강제동원 된 조선인 여성의 숫자와 정작 심각한 문제가 되고 있는 일본군위안부의 동원 규모는 언급하고 있지 않다. 교과서는 "일본군은 노예제를 금한 국제협약을 위반한 범죄를 저질렀다"(93쪽)고 하면서도, 정작 일본군이 저지른 범죄행위의 구체적 실상을 서술하는 데는 인색하다.
맺음말
이상 뉴라이트 교과서의 일제 강점기 경제적 변화 등에 관한 서술 내용은 다음 세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 식민지에 대한 효율적이고 조직적인 수탈을 위한 인프라 구축과 개발을 자본주의 시장경제 구축으로 미화하였다.
둘째, 친일·반민족행위자를 일제의 식민통치와 식민지 근대화 과정에 잘 적응해 근대적 능력을 배양하고 대한민국 발전에 초석을 놓은 '근대화 선구자'로 둔갑시켰다.
셋째, 식민통치기구인 조선총독부를 사회를 효율적으로 운영되는 합리적인 근대국가기구로 이해하였다.
이러한 입장을 수용할 경우, 대한민국은 헌법에서 말하는 것처럼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 것이 아니라, 일제식민통치의 근대화(문명화)성과를 계승‧발전시켜 성립한 것이 된다. 그리고 친일반민족행위는 건국역량을 준비하기 위한 애국 활동으로 미화되며, 그 완결판은 근대문명을 학습한 세력이 중심이 되어 세운 1948년 정부수립이다. 뉴라이트가 1945년 해방보다 1948년 건국에 더 의미를 부여하고 건국절을 기념일로 제정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들의 주장대로라면, 대한민국은 항일독립운동의 산물이 아니라 조선총독부의 법통을 승계한 국가가 되는 셈이 된다.
참고한 글: 박찬승, 「식민지 근대화론에 매몰된 식민지 시기 서술」 『뉴라이트 위험한 교과서, 바로 읽기』 , 서해문집, 2009. 박한용, 「뉴라이트 교과서의 친일문제 인식과 문제점」 『뉴라이트 위험한 교과서, 바로 읽기』 , 서해문집, 2009. 허수열, 『개발 없는 개발』 은행나무, 20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