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란색이 뱅크스 군의 추격로이며, 붉은 색은 잭슨군의 기동로, 녹색은 프레몬트 군의 밀로이 사단의 도주로이다.
퀸스타운에서 패배한 후 3일 뒤, 잭슨은 마운트 잭슨으로 돌아왔다. 여기서 잭슨은 호치키스라는 지도 제작자에게 정밀한 계곡지도를 만들도록 했는 데, 지도 크기가 2.6미터나 되었다. 잭슨은 이 지도를 걸어놓고, 계곡의 통로나 지형, 북군의 배치와 남군의 기동로를 면밀히 연구했다.
한편 뱅크스는 퀸스타운에서 잭슨의 뒤를 추격하였다. 잘 알지 못하는 지형인데다 남군의 기습을 두려워하면서 무척 천천히 추적하였으며, 톰스 개울에서는 600명 남짓한 애슈비 기병대와 부딪치자 1주일동안 그 자리에서 정지하였다. 4월 2일에 다시 움직였지만, 이번엔 스토니 개울에서 애슈비 기병대와 만났다. 여기서는 다시 2주일 동안 정지했다. 당시 링컨이 증원해준 1만을 더해 3만 5천의 병력으로 그는 5천명 남짓한 남군을 그렇게 추격한 것이다.
북군이 이렇게 꾸물거리는 동안, 남군 사령관 존스턴은 잭슨에게 이웰 사단을 증원하면서 뱅크스의 군이 수도 리치먼드 근처에 오지 못하도록 임무를 내렸다. 뱅크스는 4월 16일에 뉴마켓에 도착했지만, 역시 애슈비 기병대와 남군 포병대에게 저지되어서 잭슨의 후퇴를 막지 못한다. 잭슨은 계곡을 빠져나와 스위프트 런 갭 근처의 콘라드 스토어에 숨었고, 뱅크스는 뉴마켓에서 잭슨의 행방을 놓치고 만다. 뱅크스는 워싱턴에 “잭슨은 영원히 계곡을 떠났습니다.”라는 보고를 한다. 4월 30일, 뱅크스는 계곡에서 할 일이 끝났기 때문에 맥클레란에게 가겠다는 보고를 올린다. 링컨은 5월 1일, 맥도웰의 쉴즈 사단과 뱅크스의 군은 계곡에 계속 남아있으라는 명령을 한다.
잭슨은 콘라드 스토어를 출발해서 계곡의 남단 포트 리퍼블릭 쪽으로 행군했는 데, 당시 비가와서 진흙이 사람 무릎까지 찼다. 한참 고생하다가 마침내 방향을 돌려 계곡 동쪽으로 빠져나갔다. 계곡은 이제 군사작전이 힘들정도로 지형이 안좋기 때문에, 리치먼드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누구나 생각했다. 부하들이 그럴 정도였으니 북군은 더할 나위가 없었다.
남군은 메쿰 철도역에 승차하고 리치먼드로 갈 생각을 하고 있는 데, 철도가 동쪽이 아니라 서쪽으로 가자 모두 깜짝놀랐다. 철도는 서쪽 스톤튼 역에서 정차했다. 당시 스톤튼 역에는 프레몬트 휘하의 밀로이 사단이 진격하는 중이었다. 스톤튼 역을 점령하면 잭슨과 남군 수도의 보급로가 차단되고, 뱅크스의 군과 프레몬트군이 연결될 수 있는 상황이었다. 잭슨은 스톤튼에서 하루 야영을 한 뒤, 10킬로 정도 떨어진 곳에서 존슨 사단과 합류했다. 당시 잭슨의 병력은 이웰에게서 연대를 증원받아 6천명 정도였고, 존슨의 병력은 3천명으로 총 9천명이었다. 밀로이 사단은 2개 여단으로 불과 2,500명이었다.
밀로이 사단은 맥도웰에서 잭슨과 존슨에게 기습당했다. 북군은 남군에게 압도되어 ‘단지 도주할 시간을 벌기 위해’ 공격을 시작했다. 밀로이는 남군의 우측 존슨 사단 쪽을 밀어붙여서 거의 돌파할 뻔했는데, 잭슨이 탈리아페로 여단을 증원해서 우익을 방어했다. 이어서 북군은 중앙을 공격하였고, 당시 남군 중앙에는 12 조지아 연대가 배치되었다. 이들은 후퇴하라는 명령조차 거부하면서 싸워서 북군을 격퇴한다.
전투가 종료하자 북군은 바로 백도웰을 빠져나왔다. 이 전투에서 남군의 사상자는 500명 정도였으며, 3분의 1이 12 조지아 연대에서 발생했다. 이 승리로 프레몬트군과 뱅크스 군의 연결은 실패하게 되며, 프레몬트의 선봉인 밀로이 사단은 북쪽으로 도주한다.
당시 이웰은 콘라드 스토어에 주둔하면서 뱅크스의 군이 계곡을 빠져나가는 것을 방지했다. 이웰은 콘라드 스토어에서, 잭슨이 무엇을 하는 지를 전혀 모르는 상태라 매우 불만이 많았다. “내가 보기에는 말야, 잭슨은 미친 것 같아. 그는 나를 여기 박아두고 어디가서 뭘하는 지 말하지도 않았어. 나는 상황봐서 여길 빠져나갈 거야. 내 부하를 저런 미친 놈 때문에 희생시킬 수는 없어” 이웰이 부하 참모에게 한 말이다.
한편 잭슨은 맥도웰에서 승리한 뒤, 북군을 계속 추적하여 밀로이 사단은 프랭클린까지 후퇴하였다. 잭슨은 호치키스와 상의하여, 프레몬트 군이 계곡 쪽으로 진입할 수 있는 고갯길을 차단하면서 계곡 내에 진입하였다. 링컨은 프레몬트에게 잭슨이 언급한 그 고갯길을 통해 진군할 것을 명령하자, 프레몬트는 계곡이 차단되었다고 답문을 보낸다. 그 후 10일 동안 프레몬트 군은 2만에 가까운 군대를 프랭클린 주변의 거점에 주둔하면서 혹시나 있을 지 모르는 남군의 공격에 대비한다. 물론 그런 공격은 없었으며, 결과적으로 프레몬트군은 잭슨이 자유롭게 계곡을 누비도록 시간을 벌어준 셈이 되었다. 뱅크스나 프레몬트나, 지나친 신중함으로 훨씬 열세한 남군을 제압하지 못하고 심리적으로 끌려다녔다.
맥도웰전투를 앞둔 잭슨과 존슨 장군
첫댓글 jager 님께서 남북전쟁을 연재하시니..한가지 질문이 있는데요.. 실제 남북간의 질적 군사력 수준은 몇대 몇 정도 였나요? 양적인 것 말고, 신식무기나 훈련도..이런 것이요 ^^ 초반엔 거의 남부군이 유리하게 진행되는 것으로 압니다. 지휘관들의 능력도 있지만..암만해도 무기수준의 도움도 있지 않았을까 싶은데?
남북전쟁 만큼 양쪽이 준비가 안되고 시작된 전쟁도 없었죠. 특히 초반에는 양쪽 병사의 질적인 수준은 형편이 없었습니다. 다만 남군이 초반에 기선을 잡을 수 있었던 몇가지 이유는, 첫째로 멕시코전쟁과 인디언과의 전쟁으로 실전경험을 쌓은 장교와 병사들이 남부출신이 많았고, 둘째로 공업화가 진행된 북부에 비해서 말타고 사냥할 일이 많았던 남부인들이 훨씬 승마술과 사격술이 뛰어났으며, 셋째로 연방보존과 노예해방이라는 북부의 대의가 북군병사에게는 별로 와닿지가 않지만, 자기 고향을 지킨다는 남부의 대의는 매우 이해하기가 쉬우며 절실했습니다.
특히 북버지니아군은 2배가 넘는 북군을 상대하면서 계속 갑절의 사상자가 나오게 만들었으니, 적어도 질적전투력이 2배는 넘는다고 봐야지요. 무기수준은 오히려 북부가 월등했습니다. 기병들이 장착한 7연발에서 무려 14연발까지 가능한 카빈총은 종종 남군의 대공세를 막아낼 정도였지요.
ㅇㅇ;; 흐미...결국 외적인 것은 죄다 북부에 유리했군요..감사합니다. ... 남부군이 유리한것은 실전경험과 정신력... 전쟁이란 것은 일반 전쟁수필가들의 글처럼 한줄로 정리하기가 힘든것 같습니다.
모 농구선수가 생각나는군요(한 때 한국에서 끗발 좀 날렸던.. 당시 그만큼 한국 농구 상황이 난감하기도 했지만;;). 북군에도 그랜트 등의 명장이 있긴 했지만, 남군의 스톤월 잭슨, 리 두 명장의 포스가..;
처음에 양측병사들의 질적 차이는 거의 전무했습니다. 오죽하면 링컨이 이 전쟁은 양측의 애송이들중 누가 먼저 겁에 질려 총을 떨어뜨리고 달아냐느냐가 승패를 결정할것이다, 라고 했겠습니까 ㅡㅡ;; 다만 잘 아시는바대로 장교의 질은 남군이 월등히 우세했고...(그나마 이게 남부의 장점이었죠, 우리의 리장군을 중심으로 뭉쳐진 최고의 장교들)전쟁초기 몇배의 물량차를 극복하게되는 원인중 하나가 됩니다(물론 가장큰것은 예거님말씀대로 고향을 지키겠다는 의지였죠) 헌데 그나마도 전쟁후반으로 가면 우수한 초급장교들을 잃은 남부에 비해 그랜트나 셔먼으로 대표되는 명장들이 합류해 전열을 가다듬은 북부가 유리해지죠
스펜서소총같은 경우엔 남부측에서 워낙 배알이 뒤틀렸던지 양키들은 총을 한번장전해놓고 일주일동안의 전투에 사용한다. 고 평가했구요(7연발이라는걸 은연중에 비꼬았던거죠 남부는 기병대조차도 이런 카빈을 장비할만한 공업력이 전무했습니다)
잭슨 장군이 정말 대단하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