쾌도난담(快刀亂談) : 가톨릭 사제, 도량에서 부활을 논(論) 하다.
“무상의 이치를 깨닫고 이기적인 마음 버리고 이타적인 삶을 살아야 합니다. 먼저 나 자신이 깨달아야 합니다. 깨닫고자 하는 열망은 괴로움에 빠진 사람들을 구제하기 위한 것입니다. 명상을 통해 스스로의 자아를 깨닫고 해탈에 이르게 되면 나 자신을 구할 수 있고, 더 나아가 인류를 구하고 우주까지 정화시킬 수 있습니다. 욕망을 추구하고 이웃에게 고통과 상처 주는 것, 감정에 치우치는 삶을 사는 것, 이것이 바로 죽음의 삶입니다.”
▨ 현장 스님
법정 스님(1932~2010)의 속가 5촌 조카이기도 한 현장 스님은 현재(2012년) 전남 보성 대원사의 회주로 있다. 티베트 박물관장, 사단법인 자비신행회 이사장, 생명나눔실천회 광주·전남지역본부장, 한꽃 외국인노동자 쉼터 회장 등 활발한 사회활동도 함께 병행하고 있으며, 최근에는 죽음과 명상에 관한 심도 깊은 성찰과 저술 작업에 힘쓰고 있다.
“부활은 가까이 있는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바로 옆에 있는 사람을 사랑의 눈으로 바라보는 것, 사랑을 위해 온 몸을 바치는 것이 바로 해탈이고 부활입니다.”
▨ 곽승룡 신부님
1989년 서울에서 가톨릭대학교를 졸업하고 대전에서 사제 서품을 받았으며 충남 당진 천주교회와 대전 용전동 천주교회에서 사목(1989~1991) 했다. 이후 1991년부터 1996년까지 로마 우르바노 대학교에서 교의신학을 전공, 신학 박사학위(S.T.D)를 받았다. 1999년 2월부터 대전 가톨릭대학교 교수로 재직하면서 「아름다움의 사랑」 「귀찮게 하는 신부님」 「도스토예프스키의 비움과 충만의 그리스도」「성부와 성자와 성령과 함께」등 다양한 저술 활동을 해오고 있다.
▲ 일시 : 2012년 2월 17일
▲ 장소 : 전남 보성군 문덕면 대원사
▲ 대담 : 곽승룡 신부님. 현장스님
조선 후기 실학자 연암 박지원(朴趾源, 1737~1805)은 불교와 그리스도교를 유교적 입장에서 다음과 같이 묶어 비난했다.
“한쪽은 있는 것을 없다하고, 또 다른 한쪽은 없는 것을 있다 한다.”
이 같은 비판의 중심에는 불과의 공(空) 사상과 그리스도교의 부활 교리가 있다. 진정으로 불교는 있는 것을 없다 하고, 그리스도교는 없는 것을 있다고 하는 것일까.
스님과 사제가 만났다. ‘쾌도난담(快刀亂談) 가톨릭 사제, 도량에서 부활을 논(論) 하다’ 기획을 통해 죽음과 부활에 대한 예리하고 심도깊은 논(論) 속으로 들어가 본다.
곽승룡 : 이렇게 시간을 허락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산 속이어서 그런지 공기가 차갑습니다. 세상이 모두 죽은 듯, 고요합니다. 스님은 죽음과 관련한 많은 글을 써 오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죽음에 대한 고견을 듣고 싶습니다.
현장 : 죽는 이유는 한 가지입니다. 태어나서 그렇습니다. 태어났기 때문에 죽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태어났을까요. 불교에서는 그 원인을 두 가지로 봅니다. 원력(서원)으로 태어난 존재가 있고 업으로 태어난 존재가 있습니다. 서원의 힘으로 오는 분이 보살입니다. 일반적으로 대부분의 사람은 업의 힘으로 이 세상에 태어납니다. 번뇌 때문에 해탈에 이르지 못하고 이 세상에 다시 온 것입니다. 번뇌를 벗고 불성 신성을 깨우쳐서 지극히 큰 축복의 자리 안에서 보살이 되어 지혜를 나누는 것이 중생을 제도하는 일이고 영원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이는 그리스도교에서 말하는 부활과 비슷한 개념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곽승룡 : 가톨릭 교회에선 죽음이 죄 때문에 왔다고 봅니다. 이것이 신약과 구약 성경 전체를 관통하는 통찰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교에서는 죄를 경계합니다. 특히 죄 때문에 남을 죽일 수 있습니다. 백화점과 다리가 무너지는 것은 인간의 욕심 때문입니다. 우리들의 죄가 다른 이들을 죽입니다. 업과 번뇌, 그리고 집착과 죄에 대한 종교인들의 각성이 필요한 시점입니다.
그리스도교는 얼핏 불교와 달리 직선적 역사관을 가진 듯하지만, 죽음에 대한 관념은 상통하는 면이 없지 않습니다. 천주교에서 죽음은 또 하나의 시작입니다. 그래서 천주교가 복음을 전하고 불교가 부처님 말씀을 살아가는 것은 내용면에서는 하나라고 볼 수 있습니다.
현장 : 탐욕에 의해 업이 쌓입니다. 그래서 고통이 옵니다. 불교에서는 죄가 번뇌에서 생긴다고 말합니다. 번뇌는 실제 없는데 그 번뇌를 붙잡고 고통을 받습니다. 있는 것은 참된 즐거움과 행복입니다. 이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인류의 죄를 대신해 죽었습니다. 여기에 참으로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이미 죄를 거둬가셨습니다. 당신이 죄를 다 거뒀으니까, 본래의 신성을 회복하고 축복 속에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이제 진정한 부활의 삶, 죄의식을 벗어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죄는 내가 나라는 존재를 모르는 것입니다. 내가 나를 모르는 게 무지고 무지가 모든 죄를 만드는 원천적 뿌리입니다. 불성을 갖고 있는 나를 깨닫지 못하는 것이 죄입니다. 자아를 각성하지 못하는 것이 바로 죄입니다.
곽승룡 : 천주교에서는 부활을 일어난다는 의미입니다. 정확히 말하면 일으켜 지는 것입니다. 인간의 힘이 아닌 하느님께서 일으켜 주십니다. 일으켜 져서 새로워집니다. 우리 모두 부활로 초대된 은총 가득히 받은 존재입니다.
불교는 스스로를 알아가는 과정 속에서 수행을 하며 세상을 맑고 밝게 하는 것 같습니다. 천주교는 반대로 하느님을 알아가면서 자신을 알게 되고 세상도 밝게 합니다. 이 점에서 불교와 천주교가 방법적으로는 차이가 있지만 세상을 맑고 밝게 한다는 종착점은 같습니다. ‘부활의 삶’‘새로운 삶’이라는 종착점이 같은 이상 두 종교는 반목할 이유가 없습니다. 천주교 신자들은 불교에서 수행과 기도, 정진을 배워야 합니다.
현장 : ‘비타꼰’은 라틴어로 함께 하는 삶이라는 뜻이라고 들었습니다. 함께 할 때, 상대방을 인정할 때 공존 공생이 가능합니다. 울타리에 갇혀 있으면 공존이 어렵습니다. 울타리는 자아, 아집, 신념 등입니다. 이런 것들을 비우고 정화하고 자기를 소멸시켜 우주적인 큰 자아가 나타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인도 갔을 때 예수 성심 수녀회를 방문했는데, 좌선하는 그리스도 상(像)이 있었습니다. 인상적이었습니다.
곽승룡 : 천주교 신앙인들은 피정을 통해 하느님을 만나면서 자신을 발견하고, 더 나아가 세상의 빛과 누룩이 될 것을 다짐합니다. 부활은 새로움의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부활은 살았던 곳으로 되돌아오는 것이 아닙니다. 살았던 곳으로 되돌아오는 것은 환생입니다. 진정한 부활의 모델은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을 통해 우리는 부활의 의미를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죽음을 이기고 완전히 새로운 모습으로 다시 오셨습니다. 천주교 신앙인들은 피정을 통해 이러한 새로움을 갈망합니다. 새로운 삶, 새로운 희망이 바로 부활의 삶입니다.
현장 : 동의합니다. 대승 불교의 한 분파 중에 밀교가 있습니다. 밀교에서는 욕망과 감정으로 사는 삶을 죽음이라고 봅니다. 우리는 무상의 이치를 깨닫고 스스로를 정화해서 이타심을 발휘하고, 자비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영생의 삶입니다. 밀교에서는 모든 존재를 이롭게 하고 그들을 괴로움에서 구제하기 위해 명상합니다. 이를 위해 먼저 나 자신이 깨달아야 합니다. 깨닫고자 하는 열망은 괴로움에 빠진 사람들을 구제하기 위한 것입니다. 명상을 통해 스스로의 자아를 깨닫고 해탈에 이르게 되면 나 자신을 구할 수 있고, 더 나아가 인류를 구하고 우주까지 정화시킬 수 있습니다. 못 깨닫고 욕망을 추구하고 이웃에게 고통과 상처 주는 것, 감정에 치우치는 삶을 사는 것, 이것이 바로 죽음의 삶입니다.
곽승룡 : 옳음 말씀입니다. 불교에서의 깨달음이라는 개념은 천주교의 통찰이라는 의미와 상통합니다. 구약성경은 관찰서, 신약성경은 통찰서입니다. 관찰과 통찰이 만나야 합니다. 관찰만 하다보면 통찰을 하지 못합니다. 스님 말씀대로 깨닫는다는 것은 알아차린다는 것이고 그것은 일어난다, 새로워진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부활입니다. 새로워지면 사랑하게 됩니다. 마치 부처님이 중생을 구제하기 위한 마음이 일어나듯, 새로운 삶을 체험하면 자신도 모르게 사랑의 열망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부활한 사람은 가까운 이웃을 사랑합니다. 그리스 사람들은 하느님을 우주에서 발견하고자 했습니다. 그래서 점성술이 발달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구약 역사 안에서, 집단 안에서 하느님을 발견하고자 했습니다. 하지만 하느님은 우주도 역사도 아닙니다. 예수님 안에서 하느님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 증언이 신약입니다. 그 예수님이 “여기있는 사람 중에서 가장 헐벗은 사람”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지금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 그 사람이 바로 예수님입니다. 이웃 사랑의 기초가 탄탄해야 역사 안에서의 하느님, 우주의 하느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이런 차원에서 진정한 부활, 진정한 해탈은 먼 곳을 바라보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옆에 있는 사람을 진정으로 사랑하며 바라보는 것이 곧 해탈이고 부활입니다.
요즘 많은 이들이 물질에 매몰되어 살아가는데, 더 중요한 것은 영의 나눔, 정신 수행의 나눔입니다. 영의 나눔을 위해 천주교와 불교가 협력했으면 좋겠습니다. 한국 사회와 한국인들의 영적인 해방과 부활을 위해 우리가 해야할 일이 많습니다.
현장 : 예수님께서 가장 보잘 것 없는 이에게 해준 것이 곧 나에게 해준 것이라고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참으로 귀하신 말씀입니다. 예수님처럼 신령스러워져야 합니다. 단순히 외형만 보는 것이 아니라 그 존재 자체의 본질과 내면까지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산에 갈 때 산을 보는 것이 아니라 산에 깃든 신령함을 보아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 스스로가 다른 사람을 정화시킬 수 있어야 합니다.
곽승룡 : 인간학적인 관점에서 볼 때 부활은 인간은 본래의 모습, 하느님의 모상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본래 하느님이 나를 만드신 본 모습대로 돌아가야 합니다. 산은 산이고 물은 물입니다. 산이 산이 되는 것이 회개입니다. 여기서 회개라는 말은 외적인 모습만 아니라 내면 본질까지 내 모습을 찾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도 돌아가시기 전에 거룩한 변모를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본 모습으로 변하는 것인데 이 본모습은 신성한 모습입니다. 우리도 신성한 예수님을 모시기 때문에 신성한 모습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본래 하느님의 원했던 나의 길로 가는 것, 이것이 회개입니다.
인간이 죽고 사는 것이지. 하느님 입장에서는 산 사람, 죽은 사람 모두 살아있는 사람입니다. 죽음은 인간의 육체적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과 동떨어진 것을 의미합니다. 반대로 부활은 하느님과 함께 하는 것입니다. 부활은 죄로부터 부활. 죽음으로부터 부활. 불의에서 정의로 옮아감입니다.
현장 : 오늘 좋은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가톨릭 교회의 영적 깊이를 느낄 수 있는 좋은 시간이었습니다. 앞으로 자주 뵙고 영적인 수행도 함께 했으면 좋겠습니다.
한국인들이 김수환 추기경님과 법정 스님이 돌아가셨을 때 큰 반향을 보인 것도 알고보면 영적인 갈망 때문인 듯합니다. 삶 안에서 사랑과 자비, 무소유를 성취한 분들이 많지 않습니다. 가톨릭 교회와 불교에서 앞으로 많은 분들이 정신해서 이 사회에 빛과 누룩의 역할을 했으면 합니다. 그래서 진정한 부활의 삶으로 인도 했으면 합니다. 이 사회가 진정한 부활의 의미, 새로운 삶의 의미, 자비의 삶를 구현해 낼 수 있기를 명상 중에 기억하겠습니다. 합장합니다.
대담 정리 및 사진 : 우광호, 윤정희, 권선형
첫댓글 우왕~멋져요^^너무쪼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