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된 은혜의 경우는 신적인 생명의 원리가 그 속에 있지만, 거짓 은혜는 그것이 없다. 생명은 탁월한 가치를 부여하며- 파리나 모기는 생명 있는 존재이므로 이런 점에서 영화롭기 그지없는 태양보다도 더 탁월한 것이다- 또한 강력한 힘을 부여한다. 산 사람이 너무나 허약하여 그 느릿느릿한 걸음으로 하루에 200미터도 채 가지 못한다 해도, 그 움직임이 생명으로부터 오는 것이므로 오히려 빨리 움직이는 배보다 더 강한 힘을 가졌다 할 수 있다. 배는 외부로부터 힘을 받아야만 움직이기 때문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외식자가 외형적인 임무의 양이나 질에서 참된 그리스도인을 능가할 수도 있지만, 그의 힘이 생명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바람이나 파도 등 외부적인 것에서 오는 것인 반면에 그리스도인의 힘은 내적인 원리에서 비롯되는 것이므로, 그리스도인의 연약함이 외식자의 지극히 화려한 성취보다 더 강력한 것이다.
외식자가 아무리 화려하게 자기의 성취를 드러내 보여도 연약한 그리스도인으로 하여금 그를 능가하게 만들어 주는 참된 은혜의 행위를 두 가지만 제시하고자 한다. 그리스도인이 미혹을 받아 죄를 범하게 될 경우 정말 은혜가 연약하다고 말할 것이다. 물론 육신적인 사람은 아무리 큰 죄라도 별 문제가 없다고 이야기할 것이지만 말이다. 은혜의 파고가 그렇게까지 낮아질 수도 있다. 하지만 참된 은혜라면 그런 썰물의 상황에서도 거짓 은혜보다 더 강력한 힘을 발휘하게 될 것이다.
1. 은혜의 원리는 결코 영혼을 떠나지 않고 마침내 영혼이 그렇게 선하신 하나님을 거역했다는 것에 대해 베드로처럼 슬피 울게 될 것이다. 오오 그대 외식자여! 대답해 보라! 하나님께 잘못을 범한 일 때문에 진심으로 한 방울이라도 눈물을 흘려 본 적이 있는가? 그대가 범한 죄들로 인하여 지옥에 마련된 그 질곡의 침상을 바라보며 눈물을 흘릴 수도 있다. 하지만 하나님의 이름에 해를 가한 것 때문에 슬피 울만큼 그렇게 하나님을 사랑한 적은 한 번도 없을 것이다.
히12:16,17의 에서의 눈물에 대한 아우구스티누스의 설명은 아주 적절하다. 그가 슬피 운 것은 복을 받지 못했다는 것 때문이지, 자기가 그 복을 팔아 버렸다는 것 때문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도의 눈물이 외식자의 눈물보다 탁월하다는 것을 보게 된다. 그리스도인은 죄를 범하는 동안에도 그 죄를 미워한다. 반면에 외식자는 죄를 견디는 중에도 그 죄를 사랑하는 것이다.
2. 시험 중에라도 참된 은혜가 있다면, 그 은혜가 마음속에 격렬한 복수의 욕구를 불러일으킨다. 이는 마치 원수의 손에 잡혀 있는 포로와도 같다. 포로는 도망쳐 나갈 방법을 생각하고 계획을 세우고, 또한 나가서 무엇을 할 것인지를 궁리하고 매 순간마다 밖으로 나갈 것을 사모하고 기다린다. 그리고 나가면 다시 무기를 들고 일어설 것이라 다짐한다. 삼손은 이렇게 아뢴다:“여호와여 구하옵나니 나를 생각하옵소서 하나님이여 구하옵나니 이번만 나를 강하게 하사 나의 두 눈을 뺀 블레셋 사람에게 원수를 단번에 갚게 하옵소서”(삿16:28).
은혜 있는 영혼은 이렇게 기도한다. 하나님께서 조금만 더 살려 주시고, 죽기 전에 한 번만 더 힘을 주사 자신의 교만과 불신앙에 대해, 그리고 하나님을 모욕하여 저지른 온갖 죄들에 대해, 복수하게 해 주시기를 구하는 것이다. 하지만 거짓된 마음은 원수 갚기를 궁리하기는커녕 하나님의 율법이 오히려 자신의 정욕을 불러일으켰다며 바닷물결처럼 촐랑거리며, 죄를 그렇게 좋아보이게 만들어서 그것을 취하여 영혼이 위험에 처하게 되었다는 것에 대해 하나님을 원망하는 것이다.
- 윌리엄 거널, 「그리스도인의 전신갑주 1」, pp 122-1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