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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 단어> 배달(倍達) 밝달에서 유래됨, 한민족을 배달겨레라고 하는 이유. 환웅(桓雄): 제정(祭政)일치 사회의 정치지도자겸 종교 지도자의 직위를 가리키는 명칭으로 큰 스승(桓雄稱大雄天, 태백일사 삼신오제본기)을 말하며,부처를 모신 법당을 대웅전(大雄殿)이라 하는 것은 여기서 유래(원래:환웅전) 되었음. |
배달국(倍達國,B.C3,898~2,333년)은 신시배달(神市,1~13대 환웅)과 청구배달(靑丘,14대~18대 환웅)로 나누어지는데, 신시(神市)배달은 제1대 배달(倍達) 환웅(桓雄)께서 B.C 3,898년에 홍익인간(弘益人間), 재세이화(在世理化), 광명이세(光明理世)의 건국이념을 가지고서 백두산 신시(神市)에 개국한 것을 말한다.
18대 환웅 |
재위기간 |
수명 |
청구배달(靑丘14대~18대 환웅) |
ㅊ |
ㅊ |
그리고, 청구(靑丘)배달은 제14대 치우(蚩尤) 천황께서 B.C.2,707년에 재위에 오른 후, 청구(靑丘) 즉 지금의 만주산동반도 태산(泰山)아래로 도읍을 옮긴 것을 말한다.
신시(神市)는 서불로도 불리다가 서라벌(서불의 사투리)로 바뀌다가 오늘날의 서울이란 말로 바뀌었다고 한다. 또한, 중국이 우리나라를 예로부터 청구(靑丘)라고 불렀는데, 배달국의 청구(靑丘) 시대의 영향 때문이다.
원동중의『삼성기(三聖紀)』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환국(桓國)의 말기에 환인(桓仁)이 환웅(桓雄)에게 천부인(天符印) 3종을 주어, 환웅(桓雄)은 3000명을 이끌고, 백두산(白頭山) 꼭대기의 신단수(神壇樹) 아래에 내려와 도읍을 정하니, 신시(神市)라고 불렀다.” 『신불역대기(神市歷代記)』에는 더욱 상세하고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배달국(倍達國)은 환웅(桓雄)이 정한 나라 이름이고, 도읍은 신시(神市)이다. 뒤에 배달국(倍達國) 14세 치우(蚩尤)환웅이 청구(靑丘)로 도읍을 옮겼다.” 라고 적혀 있다.
<고고학적으로 밝혀진 신시배달문화의 생생한 증거들> 1. 홍산문화(紅山文化, BC4,000~BC2,300)신시(神市) 환족(桓族)의 일원이 되어 중원지역에 신시문화를 전파시킨 웅씨국(熊氏國)의 유적으로 추정됨 2. 홍산유적:1930년대 내몽고 적봉(赤峰) 동북쪽 홍산에서 발굴, 중국학계에서 양상: 채도(彩陶)문화나 삼황오제에 연결시키려 했으나 1979년 본격적인 발굴결과 전혀 다른 문화임이 확인. |
환웅 천황께서는 상기 3대 이념을 토대로 민중들에게 신교의 경전이었던 천부경(天符經)과 삼일신고(三一神誥)를 설하고 하늘의 진리로 교화하였다.
배달국 시대는 교화의 시대로서 초대 배달환웅은 화백(고대의 민주주의 제도)으로 선정을 베풀면서 역법(달력)을 만들어 1년을 365일로 정했으며, 신지(神誌=사관) 혁덕(赫德)에게 명하여 ‘녹도(鹿圖)문자’를 만들게 했다(BC 3898년, 사슴 발자국의 흔적을 보고 문자를 만들었기 때문에 녹도문자라고 불렀다). 또한 음양, 오행, 팔괘, 십간십이지 및 청동기와 불을 발견하였다.
- 배달의 동방 9족(九夷) 가운데 풍이(風夷)족 출신.
- 제5대 태우의 천황의 12대 막내아들(「태백일사」의「신시본기」에 기록)
- ‘태호’는 복희의 호이며 ‘크게 밝다(대광명)’는 뜻임
- 하도(河圖)를 계시받아 한민족의 국기인 태극기의 팔괘를 최초로 그은 동양 역철학(태극·음양·오행·팔괘의 우주관)의 창시자이며, 우주의 변화원리를 음양논리로 처음 밝힘. 따라서 주역은 중국이 아니라, 우리 민족에서 시작된 것이다. 뒤에 역학을 계승 발절시켜 나간 성인들(문왕, 주공, 공자, 소강절, 김일부)도 모두 동이족 혈통출신. 주역이라 불리게 된 것은 복희 8괘가 후일 신농씨를 거쳐 주나라로 전해졌기 때문.
- 제8대 안부련 환웅의 신하로서 웅씨족의 후손이었던 소전(少典)의 아들.
- 중국 섬서성 강수(姜水)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성을 강(姜)씨로 정함(풍씨 성의 단절로 강씨가 인류최초의 성씨가 됨).
- 쟁기와 보습을 처음 만들어 경농을 시작, 백가지의 약초를 맛보아 동양의학을 창시.
- 도읍을 청구(산동반도에 소재)로 옮김.
- 중국의 하북, 하남, 산동, 강소, 안휘, 절강설까지 영토를 크게 확장하여 역사상 처음으로 동방을 대통일함.
- 중국의 시조로 알려지고 있는 황제 헌원(기원전 2692~2593년)과 그 유명한 탁록(鹿, 하북성 소재)에서 10년간 73회의 전투를 벌여 마침내 그를 사로잡아 신하로 삼음.
- 이후 동아시아에서는 치우천황의 이름만 들어도 무서워했고, 그를 무신(武神)의 원조로 섬기게 됨. 한고조 유방도 무신의 원조인 치우천황에게 제사지낸 후 군사를 일으키며, 항우에게 이긴 뒤에는 치우천황의 사당을 장안(지금의 서안)에 짓고 더욱 공경함(이 사당은 지금도 존재함).
- 당시 치우천황의 국사(國師)인 자부(紫府) 선사는 헌원에게「삼황내문」을, 창힐에게는 문자를 가르침.
- 신교의 대도를 전수받은 황제 헌원은 ‘황노학(黃老學)’이라 불리는 도교의 시조가 됨.
<치우천황의 탁록대전> 1. 신농국의 쇠퇴: 8대 염제(炎帝)인 유망대의 정치 혼란, 제후들간의 쟁탈전 시작.
3. 전쟁의 결과: 4. 이후의 한중관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