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례자의 교회 이야기 #1
목회를 시작한지도 어느덧 강산이 한번 변한다는 10년 세월이 흘렀다.
그동안 여러 교회를 경험했다. 어떤 교회에서는 교육전도사로 어떤 교회에서는 담임목사로 또 어떤 교회에서는 임시목사로 어떤 때는 전도목사로 그리고 지금은 선교사라는 이름으로 제주에서 사역하고 있다.
여러 목회현장을 떠돌면서 많은 일들을 경험했다.
시골교회의 열악한 환경과 그런 환경을 스스로 만들어가는 교회 구성원들의 삶의 자리를 보면서 안타까움으로 눈물로 밤을 지새기도 했다.
스스로의 삶에 대한 반성은 잊은 채 교회에 나오지 않는 사람들과 자신들은 구별된 자라는 선민의식으로 꽉 차, 자신들의 의가 세상으로 하여금 다가서지 못하게하는 경외에서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 자신이 세상의 조소와 비난의 대상이 되어 세상으로부터 점점 더 고립되어 가는 것도 의식하지 못한채 서서히 뜨거워지는 물에서 자신도 의식하지 못한채 삶겨지는 청개구리와 같은 모습을 한 교회구성원들을 바라볼 때 그 고통은 죽음보다 더했다.
작은 생각의 감옥에 스스로 갇혀 세상으로 나아가지도 들어오려는 세상도 수용할 수 없도록 굳건히 닫아놓은 생각의 창을 의식하지도 못한채, 자기들만의 축제를 즐기는 집단과의 충돌이 있었을 때는 정말 미칠 것 같은 고통을 느꼈다.
그들을 보노라면 이솝우화의 '여우와 두루미'를 보는 것 같았다. 서로를 자신의 만찬에 초대했지만 초대받은 손님의 입장은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자신의 입장에서만 식탁을 준비한 모습이 그들의 모습과 얼마나 닮았는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 모습을 지켜보며 손님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그들이 보다 더 편안하게 느끼고 참여 할 수 있는 진정 그들과 함께 할 수 있는 축제의 장을 만들고 싶었다.
나는 그것이 또 다른 전도의 방법이라 생각하고 실천에 옮겼다. 그러나 돌아온 건 결국 작은 생각의 감옥에 갇힌 자들의 돌팔매질이었다. 자신들과 다르면 도저히 참고 봐주지 못하는 속좁은 인간의 대표자격인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당시 그들의 사회와 종교질서에 맞섰던 예수를 이단처럼 생각해서 공동체를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게 했던 것처럼 엄청난 돌팔매질을 했던 것이다.
크고 웅장한 건물, 그에 못지 않은 재정능력, 적지 않은 교인수를 자랑하던 교회에 싸움이 났단다.
벌써 6개월,
주변에 이미 싸움난 교회로 소문이 났고 주일과 공예배 시간에 아직도 이편 저편으로 갈려 한 쪽은 건물내에서 다른 한 쪽은 마당에서 자신들이 드리는 예배가 진짜예배라 주장하며 악을 쓰고 있었다.
하나라도 더 많이 상대방의 약점을 잡겠노라고 설치해 놓은 비디오카메라,
비디오카메라로 촬영한 증거물을 법정에 제출하여 상대를 비방하고 공격하는 모습,
그런 이전투구의 싸움판을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치리하여 교회의 본을 세우기보다
하나님의 말씀의 법은 실종된채 정치적으로 해결하려는 노회의 자세,
그로인해 더욱더 지체되어가는 문제해결의 기미,
이제는 바뀌어야 한다는 마음속의 열망은 있지만 개인적인 이해관계 때문에 또다시
개가 토하였던 곳, 몸을 깨끗이 씻었던 돼지가 다시 자기가 누웠던 더러운 으로 돌아가는 것처럼 문제 해결 한 달도 채 되지 않아 문제가 발생했던 상황으로 회귀하는 어처구니 없는 상황 등....
이 모든 일이 어느 한 교회, 한 신앙공동체만의 문제가 아니라 한국교회전체에 만연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며칠 전,
인터넷 검색을 하다 한국교회 성직매매 실태를 고발하며 목사직을 반납한 김성학씨에 대한 기사를 읽게 되었다.
그의 주장대로라면 한국교회는 이미 자정능력을 상실한, 신앙공동체이기보다는 모임을 통해 개인적 이익을 추구하는 이익집단으로 변질되어버린 것이다.
자본에 의해 성직이 잠식당하는 것을 보고도 질병에 걸렸지만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신체의 무통기관처럼 되어버린 것이다.
오히려 그런 치부를 드러내는 사람을 공동체에 이익에 반하는 사람취급하여 골고다로 보내버리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득세하며 그들의 생각대로 한국교회전체가 움직여가고 있는 실정이다.
그들이 자칭 한국교회의 지도자들이라고 행세하고 있고 또 그들의 위력에 주눅들고 닮아가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전도의 목적은 무엇이며
여러가지 전도의 방법론이 제기되고 있지만 그 실효성은 과연 얼마나 될까?
얼마전,
로마교황청, WCC, WEA 등 기독교3대 진영이 기독교 복음 전도 규범을 마련했다고 한다.
다종교 속 선교12원칙 중에 두 항목이 특히 가슴에 와 닿는다.
'상호존중과 협력, 타종교 간 관계 형성'이다.
이 두가지 항목의 핵심내용은 '상호존중 안에서 기독교진리 수호 및 발전 전파'다.
얼마전 기독교인으로 자처하는 몇몇 사람들이 소위 '땅 밟기'라는 정체모를 종교행위로 봉은사와 그 사찰신도 그리고 불교계 전체의 심기를 자극했던 사건이 우리나라에서 있었다.
그 기사를 읽고 얼마나 황당했는지 모른다.
그러나 더 황당한 것은 사건의 파장이 커지자 사건의 당사자들이 봉은사를 찾아가 무릎을 꿇고 사죄하는 모습이 담긴 포토기사가 언론을 통해 세상에 알려지게 된 것이다.
그렇게 무릎꿇고 석고대죄 할 것이면 처음부터 그런 일 하지를 말지 일 저질러 놓고 수습하기 힘드니까 가서 '잘못했으니까 용서해 달라'고 사정하는 것은 뭡니까?
그 기사를 보고 황당하기도 하고 부끄러워 나 자신이 기독교인이라는 사실을 드러내기가 힘들 정도였다.
뿐만 아니라,
좀 지난 일이지만 2007년인가 'Again 1907'이란 주제로 부산에서 열린 집회 동영상을 인터넷을 통해 우연한 기회에 볼 수 있었다. 기독교를 무척이나 싫어하는 사람이 올려놓은 자료라 생각하면서 보게 되었는데, 기도인도를 맡은 사람이 기도인도를 하면서 부산전지역 불교사찰위치도가 프리젠테이션 되면서 그 사찰들이 무너지게 해달라고 고래고래 소리지르는 것을 보았다. 순간 목사지만 속에서부터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그리고 이어 '기독교가 어디로 가고 있나?'하는 탄식이 저절로 나왔다. 세상에서 제일 위험한 것이 '무지한 자들이 힘을 갖는 것'일 것이다. 힘을 갖되 쓸데를 제대로 알지 못해 남용하게 되면 그 보다 위험한 일이 세상에 또 어디 있겠는가? 그것은 쓰나미나 지진보다 더 위험한 일일 것이다
이것이 현대 한국기독교의 현실이라 감히 말하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이런 현실을 감안할 때 한국기독교 선교에에 '선동은 있어도 선교는 없다'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선교라는 명분으로 하는 일이 다 그모양이니 아무리 선교를 해도 열매가 없는 건 당연한 일일 것이다.
속담에 '미꾸라지 한마리가 온 웅덩이 물을 다 흐린다'는 말처럼 회심을 통한 삶의 변화, 그 변화된 삶을 보여주는 것이 진정한 선교의 방법일 것이다. 누군가 "세상은 복음을 더 이상 듣고 싶어하지 않는다 다만 그들은 복음을 보고 싶어 한다."라고 했던 것처럼 복음은 선교와 선동을 착각하는 자들에 의해 전파되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선동하는 자들은 선교를 방해하는 적그리스도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 한국선교 현장에는 선동을 선교로 착각하고 있는 자들이 선교에 막대한 장애물이 되고 있다.
기독교선교는 전도세미나나, 일시적인 봉사프로그램, 열정적 선동, 감성에 의한 것이 되어서는 안된다.
성령의 은혜로 회심한 사람의 삶의 변화와 실천에 의해 이루어져야 한다.
은혜를 입은 자들의 삶의 변화를 본 사람들이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변화된 삶을 사는 사람들을 통해 발견할 수 있게 되고 그들 또한 눈에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을 확신하게 될 것이다.
예수님도 그런 선교방법을 실천하셨다.
섬김, 치유, 겸손, 필요의 채움 등등...
예수님 당시 팔레스틴 지역에 타종교 및 철학 등 수많은 종교적 활동과 사상적 활동이 있었음에도
예수님은 그들과 대립하지 않았다. 예수님께서 대립각을 세웠던 사람들은 단지 율법의 행위가 없는 율법주의자들이었던 바리새인 서기관 등 당시 유대사회의 종교적 지도자 그룹이었다. 그들은 그들의 율법과 종교적 전통에 정통했던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회칠한 무덤과 같은 존재들이었다. 즉 행함이 없이 율법만 아는 자들이었기에 예수님의 대적이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들을 향한 책망은 구원받아야 할 영혼에 대한 예수님의 긍휼함의 발로였을 것이다.
예수님께 있어서는 구원의 열외는 없었다.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다 구원의 대상이었다.
그가 비록 원수라할지라도....
타종교와 대립각을 세우며 점점 더 전시상황으로 몰고가는 선동적 자세를 버려야한다.
상호존중하면서 기독교의 복음의 진리를 선포하는 것이 아니라 복음을 보여줌으로써 하나님 앞에 무릎꿇게 해야 한다.
'순례자의 교회'는 그런 사역을 하려고 한다.
순례자의 교회 사역 대상은 세상 모든 사람들이다. 그들이 누구든 그들의 필요를 예수님처럼 채워 줄 것이다.
그래서 그들이 순례자의 교회를 통해서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볼 수 있도록 안내할 것이다.
첫댓글 선동과 선교 나를 돌아보게 합니다.
복음을 듣고 싶어하기 보다 복음을 보고 싶어한다는 귀한 말 나의 가슴에 신선한 충격을 줍니다.
아멘 할렐루야 귀하신 말씀 감사합니다
그리스도의 제자도를 추구하고 실천하는 선교사님을 뵈니 반갑군요
감사합니다
저는 해외 선교를 다니다 이제 국내에 가장 기독 인구가 적은 제주나 울산에 개척을 위해 기도하고 있습니다
귀하신 동역자 선교사님의 중보를 부탁 드립니다
항상 주님과 동행하는 축복이 있으시길 기도합니다..아멘
주님의 동행하심을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