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해산(全海山)은 본명이 기홍(基弘)이고, 초명은 종기(鍾棄)이며, 자는 수용(垂鏞)이고 본관은 천안(天安)이다. 해산(海山)은 그의 호이다. 그는 국망(國亡)을 눈 앞에 두고 전국 방방곡곡에서 반일의병항쟁(反日義兵抗爭)이 더욱 가속화되던 1907년, 1908년 무렵에 전라북도 지방에서 구국항일전(救國抗日戰)을 전개한 걸출한 의병대장이다.
전해산은 1879년 11월 24일 전라북도 임실에서 시골 잔반 전병국(全炳國)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누대에 걸쳐 출사하지 못해 당대에 와서는 겨우 그 고을의 향반으로 남아 빈한한 가세를 유지하고 있었다.
전해산은 어려서부터 아버지와 함께 가경(家耕)에 종사하는 한편, 당천(堂川) 이한룡(李漢龍)의 문하에서 학문을 연마하였다. 그는 특히 사장류(詞章類)의 학문에 장재(長才)를 보였는데, 특히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이라는 책에 심취하였고, 역학(易學)에도 밝아 신통한 예견력을 지녔다고 한다.
전해산은 또한 장성하면서 학식과 견문을 넓히기 위해 호남 각지를 두루 여행하면서 오성술(吳成述), 기우만(奇宇萬), 기삼연(奇參衍), 고광순(高光洵), 김영엽(金永曄) 등과 교유하게 되었고 이를 통해 날로 기울어가던 국운을 바로잡기 위한 구국(救國)의 방책도 생각할 수가 있었다. 특히 1903년에는 절의(節義)로 이름이 높던 연재(淵齋) 송병선(宋秉璿), 면암(勉菴) 최익현(崔益鉉)이 전북 임피의 낙영당(樂英堂)에서 회동하여 강회를 베풀 때에 그는 동향의 정재(靜齋) 이석용(李錫庸)과 함께 여기에 참여해 깊은 감명을 받았다. 이 강회에서 받은 느김을 그는 다음과 같은 칠언절구(七言絶句)로 표현하고 있다.
낙영(樂英)이라 이름하니 의리는 가볍지 않고
산을 우러러 쫓았으니 원근(遠近)의 정을 알겠더라
사해(四海)에 풍진(風塵)이 일어 정결한 곳이 없으니
무슨 말로 재생(諸生)에 답할 수 있으리오
그 뒤 1906년 최익현이 거의(擧義)를 위해 태인에 내려와 있다는 소식을 들은 전해산은 이석용과 함께 그곳으로 내려갔다. 이때는 최익현이 거의의 준비단계로서 각지에 격문을 돌리며 애국지사들과 장정들을 규합하던 시기였다. 그러나, 이들은 최익현의 의병부대가 전력과 전술면에서 빈약함을 알고는 항전에 참가하지 않은 채 얼마 뒤 귀향하고 말았다. 하지만, 위정척사의 거두로 그때까지 반일운동(反日運動)의 선두에 서서 일반 백성으로부터 지지를 받던 최익현의 거의(擧義)는 전해산이 의병항쟁에 투신하도록 하는 계기가 되는 것이다.
1907년 9월에는 전남 장성의 수연산(隨椽山)에서 기삼연(奇參衍), 김용구(金容球) 등을 중심으로 호남창의회맹소(湖南倡義會盟所)라는 의병부대가 결성되어 전해산은 이 부대의 종사(從事)로 발탁된다. 그러나 호남창의회맹소도 1908년 2월 김용구의 부대가 공음전투(孔陰戰鬪)에서 패배한 이후에는 사실상 그 활동이 중지되고 말았다.
그 즈음 전해산은 임실 등지에서 활동하던 이석용의 창의동맹단(倡義同盟團)에 합류함으로써 보다 본격적인 무장항일투쟁(武裝抗日鬪爭)의 대열에 참가하게 되었다. 창의동맹단은 진안과 임실을 중심으로 전주, 장수, 무주, 남원, 순창, 구례, 곡성 등 호남의 동부지역 9개 군(郡)에서 활동하였다. 그들은 도처에서 경찰서, 헌병대분견소, 우편취급소 등을 습격하고 일본 군경과의 교전도 수차례 벌이는 등 호남 동부지역을 휩쓸었다.
그러나 이처럼 활발한 항일전(抗日戰)을 벌이던 창의동맹단도 1908년 3월 사천전투(沙川戰鬪)와 4월 대운치전투(大雲峙戰鬪)에서 연패를 하여 그 활동이 크게 위축되고 말았다. 이에 전해산은 남쪽으로 내려가 기삼연이 일본군에게 살해된 이후 장성 부근에서 활약하고 있던 죽봉(竹峰) 김태원(金泰元)과 합류하기로 하고 이석용과 결별하였다. 이석용이 남쪽에서 세력을 키운 뒤 북쪽의 김태원과 서로 호응, 연합전선(聯合戰線)을 구축할 계획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전해산이 장성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김태원은 어등산전투(魚登山戰鬪)에서 전사한 뒤였다. 이에 그는 나주의진(羅州義陳)을 이끌던 오성술(吳成述)을 만나 재기의 방책을 논의한 끝에 김태원 휘하에서 의병항쟁을 벌였던 조경환(曺京煥)을 찾아가 잔여 의병들을 수습, 의병항쟁을 재개하게 되었다. 이로써 그는 1908년 8월에 오성술 등의 추대로 의병대장에 올라 독자적인 의병부대를 거느리고 무장항일투쟁(武裝抗日鬪爭)에 나서게 되었던 것이다.
'왜노(倭奴; 일본을 비하한 표현)는 우리 나라 신민(臣民)의 불구대천지원수(不俱戴天之怨讐)이다. 임진왜란(壬辰倭亂) 또한 그러하거니와 을미년(乙未年)의 국모시해(國母弑害; 明成皇后弑害事件)는 물론이고 우리의 종사(宗社)를 망치고 인류를 장차 모두 멸할 것이니 누가 앉아서 그들의 칼날에 죽음을 청할 것이요, 만일 하늘이 이 나라를 도우고 조종(朝宗)이 돌보아 이 구적(仇敵)을 소탕한다면 그날 우리들은 마땅히 중흥공신(中興功臣)이 될 것이다. 일체 폭략(暴掠)을 금하고 힘써 나라를 위해 싸우다 죽자!'
그는 이렇게 반일의병항쟁(反日義兵抗爭)의 당위성을 천명하고 의병부대의 명칭을 대동창의단(大東倡義團)이라 정하면서 선봉장을 정원집(鄭元執), 중군장을 김원범(金元範), 후군장을 윤동수(尹東殊), 호군장을 박영근(朴永根), 참모장을 이봉래(李鳳來)로 각각 임명하였다.
그리하여 대동창의단은 1908년 8월 항일전(抗日戰)을 개시한 이래 다음해 5월 의진(義鎭)이 해체될 때까지 10개월 동안 일본의 군경(軍警)과 수차례의 교전을 벌였다. 전해산 의병부대의 활동지역은 호남 서남부의 곡창지대인 함평, 나주, 영광, 장성, 광주 등지였고, 그 밖에도 장흥, 순창, 무안, 고창, 부안, 화순, 담양 등지에 이르기까지도 그의 활동영역에 들어갔다.
전해산 의병부대는 단독으로 전투를 수행하면서도 부근에서 활약하던 심남일(沈南一), 조경환(曺京煥), 김영엽(金永曄) 등의 의병부대와 자주 연합작전을 펼치기도 하였다. 전해산은 신속한 부대이동과 작전의 기동성을 살리기 위해 부장급의 간부들로 하여금 각기 50명~100명 정도의 병력을 통솔하게 하였으며 자신은 평소 100명~150명 정도의 부하들만 거느리고 작전을 수행하였던 것이다. 총 5백여명에 달하던 대동창의단의 의병들은 이처럼 평소 소부대 단위로 나뉘어져 통상적인 활동을 하다가 필요시에는 이들이 합동, 대규모 전투를 벌였던 것이다.
유격전술에 있어서는 지리적 여건이 매우 중요하므로 전해산 의병부대는 주로 영광의 불갑산(佛甲山)과 함평 석문내산(石門內山) 일대에 주둔하며 작전을 전개하였던 것이다. 불갑산은 호남 서남부의 고지대이며 석문내산은 장성, 광주, 함평, 나주 등지의 평야로 둘러싸여 있는 유리한 지형적 조건을 구비하고 있는 곳이다. 그러므로 이 두 지역을 근거지로 함으로써 전해산 의병부대는 유격전(遊擊戰)을 수행하면서 군수물자를 용이하게 조달할 수 있었던 것이다.
전해산이 이끄는 대동창의단은 1908년 9월 불갑산전투(佛甲山戰鬪), 10월 동화전투(東化戰鬪), 11월 대치전투(大峙戰鬪), 12월 월암전투(月岩戰鬪) 등에서 많은 전과를 올리며 호남 서남부 일대에서는 단연 두각을 나타내는 의병부대가 되었다. 전해산은 일본군과의 전투 외에도 각지에서 일진회(一進會) 회원과 순사 등의 부일매국노(附日賣國奴) 등을 처단하여 민생의 안정을 도모하는 활동도 벌였다.
대동창의단의 활동이 이와 같이 활발해질 무렵인 1908년 겨울에 전해산은 심남일, 김영엽, 오성술 등의 의병장과 함께 호남 의병부대의 연합군 결성을 상의한 끝에 호남동의단(湖南同義團)을 편성하고 총대장에 취임하였다. 그러자 일제(日帝)의 조선주차군사령부(朝鮮駐箚軍司領部)는 호남의 의병항쟁을 완전히 진압하기 위해 전해산이 활동하던 지역에 헌병대, 경찰, 수비대 병력을 집중적으로 배치하였다. 이에 따라 전해산 의병부대는 점차 시간이 흐를수록 그 활동이 크게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특히 1909년 4월에 오동전투(梧洞戰鬪)와 덕흥전투(德興戰鬪)에서 일본군에게 연패를 당한 뒤에는 의병들의 사기가 급격히 저하되어 전투력을 거의 상실하고 말았다. 더욱이 5월에 들어서자, 농번기로 인해 주변 농민들의 참여가 부진해져 의병부대의 활동은 더 이상 불가능하게 되었다.
일제의 토벌전(討伐戰)이 더욱 강화되자, 전해산은 최후의 방편으로 새로운 항전기지를 찾아 북상할 생각으로 1905년 영광 오동촌(梧東村)에서 부대의 지휘권을 호군장인 박영근에게 넘겨주고 장수(長水)로 들어갔다. 그 뒤 장수의 반암(蟠岩)에 은둔해 있다가 그 해 10월에 일본 경찰에게 체포되어 1910년 8월 20일 대구고등법원에서 사형을 언도받고 심남일, 오성술, 박영근 등 동지들가 함께 순국하였으니, 이때 전해산(全海山)의 나이 32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