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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문학 / 원로와의 대화 3>
저항과 순수 서정의 조화
- 박인술 시인의 근황과 문학 세계
심후섭 아동문학가
시인이란 참으로 고독한 사람들이다. 현대의 부조리와 소외감과 불만 속에서 그 모순과 상처를 메우기 위해 무엇인가 호소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것이 내가 시를 쓰는 동기이다. 나는 앞으로 시론을 읽기보다는 시를 몸으로 쓸 것이다. 참된 시인이란 “시는 이런 것이다. 시는 이래야만 된다.”라는 깃발 밑에서 열을 올리는 사람이 아니라, 시를 읽고 시를 사랑하며, 시를 쓰는 일에 매달려야 하기 때문이다.
- 박인술, 제4시집 <사랑변조> 후기 중에서
어느 시대이거나 시인은 힘없고 방황하는 무리들의 대변자로 태어나 스스로 우리 시대의 고뇌를 한 몸에 짊어지고 무상의 밤을 불면으로 지새우는 사람들이다. 발은 대지를 밟으면서도 뜻은 구름 위에 얹어놓고, 이룰 수 없는 이상과 현실을 극복하려고 피 흘리는 사람들, 그들이 때로는 미치광이 대접을 받는 것은 융합할 수 없는 정신과 물질의 이질성 때문인지도 모른다
- 박인술, 산문집 <길은 아무데도 없었다> 중에서
2003년 11월 마지막 주 토요일, 대구아동문학회 월례회는 어김없이 열렸고 박인술 선생님도 어김없이 참석하셨다. 그는 대구아동문학회 창립 회원이자 제3대(1978~1987) 회장답게 모임 때마다 언제나 맨 먼저 도착하였고 빠지는 법이 없었다. 대구아동문학회가 1957년 창립되었으니 박인술 선생님은 46년째 개근을 하는 셈이다. 아무리 다른 일이 바쁘셔도 먼저 대구아동문학회에 참석하신 다음 다른 볼일을 보러 가실 정도이다. 나는 이 자리에서 자연스러운 공개 질문을 통해 이 인터뷰 기사를 완성하기로 마음 먹었다.
“먼저 그 동안 걸어오신 길을 잠시 소개해 주시기 바랍니다.”
“허허! 그거 참! 뭐 별다른 게 없어요.”
선생님은 언제나 너털웃음으로 서두를 꺼내신다.
그 너털웃음 속에는 세상에 대한 달관이 들어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언뜻 짙은 페이소스도 함께 깔려있는 듯 하였다. 그만큼 그가 걸어 온 길이 예사롭지 않을 것이라는 느낌이 든다. 또 한편으로는 사람 사는 길이 다 같지 않겠느냐는 동류애를 표함하고 있기도 하였다. 이는 평소 그의 이야기에서 자주 느끼는 바이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그와 마주 하는 사람은 누구나 아무런 거부감 없이 그에게 끌려들고 마는 것이다.
- 먼저 제가 언제 이 세상에 나왔는지 그것부터 말씀드려야 될 것 같습니다. 저는 1921년 4월 18일생입니다. 그러니 올해로써 여든 셋입니다. 쓸데없이 나이만 많이 먹은 것 같습니다. 사람이 세상에 태어나 나잇값을 못하는 것만큼 슬픈 일도 없을 것입니다. 어찌 보면 사람은 나무와 비슷합니다. 좋은 열매와 무늬를 가진 잣나무와 춘양목 같은 나무는 100년, 200년 나이를 먹을수록 훌륭한 세월 값을 하지만, 오리나무나 쥐똥나무 같은 것은 나이를 먹을수록 속이 썩거나 벌레가 생겨 천덕꾸러기가 되기 쉽습니다. 나잇값을 제대로 해야 할 터인데 그렇지 못해 걱정입니다. 사실 젊었을 때보다 아무 것도 부담이 없는 지금이 오히려 더 조심스럽습니다.
- 제 고향은 경북 선산군 산동면 신당동입니다. 원당골이라고도 불리었는데 봄이면 살구꽃이 아름다운 평화로운 시골마을이었습니다. 아버지는 맨손으로 이삼백 석을 추수하는 농토를 장만하셨습니다. 정말 억척같은 분이셨습니다. 덕분에 저는 어린 시절 배는 곯지 않았습니다. 어머니도 대단하신 분이셨습니다. 제가 열네 살 되던 해였습니다. 콩 닷 말, 쌀 서 말을 팔아 제가 졸랐던 피겨스케이트를 선뜻 사주셨습니다. 당시 그 스케이트 값은 대단하였습니다. 아마 당시 군내에 그런 스케이트를 가지고 있었던 아이는 나밖에 없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듭니다. 나는 그 스케이트에 미쳐 밤중에도 타고 새벽에도 얼음판으로 달려나갔습니다. 나의 체력은 아마도 그 때 다 길러지지 않았는가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시에서 생계를 위해 헐떡거리다 보니 어머니를 제대로 모시지 못한 것이 여간 후회스럽지 않습니다. 적어도 부모님에 대한 일만큼은 언제나 죄송한 마음뿐입니다.
- 1936년 3월 칠곡군 인동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통신 중학 강의록으로 2년간 독학하여 중학과정을 마쳤습니다. 그 후 1939년 4월 중국 북만주 하얼빈 국도 건설국에 일자리를 얻어 6년간 근무하게 되었습니다. 그 때 나는 가도 가도 들판밖에 보이지 않는 넓은 세상을 달리면서 새삼스레 나의 존재 의미를 되새기곤 하였습니다. 그러다가 광복이 되어 1945년 10월 귀국하였습니다. 광복의 기쁨도 잠시 온 나라 안이 몹시 뒤숭숭하였습니다. 서로 죽이고 빼앗는 일이 도처에서 벌어졌습니다. 과연 이 시대에 내가 해야할 일은 무엇인가? 여간한 고민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던 중 1946년 8월 초등 교원 채용 시험에 합격하여, 그해 10월 고향인 경북 산동초등학교에서 교편을 잡기 시작하였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참말로 희망이 넘치는 때였습니다. 고향 후배들을 가르친다는 자부심도 대단하였습니다. 기한이 차서 1949년 3월 산동면 임봉초등학교로 근무지를 옮겼다가 1955년 3월 다시 대구 중앙초등학교로 근무지를 옮기게 되었습니다. 대구로 온 것은 순전히 운이었습니다. 당시 대구중앙초등학교는 문교부 지정 연구학교였습니다. 거기에 근무할 요원으로 내가 선발된 것입니다. 그랬으니 아마 모르기는 해도 그 때에는 남의 눈에 벗어날 만큼 게으름을 부리지는 않았던 모양입니다. 이 때 대부분의 초등학교에서는 학급 경영 잡비를 학부형의 도움에 의지하고 있었습니다. 교육청에서 정해진 예산이 엄연히 나오고, 또 사친회비도 받으면서 학부형들에게 부담을 주는 일이 있었습니다. 나는 이것이 불만이었습니다. 그래서 회계 담당 교사와 교감 선생님에게 여러 번 이러한 부당성을 지적하고 시정할 것을 요구하였습니다. 그러던 중 4■19 학생 의거가 일어나고, 각 학교에서는 노조운동이 일어났습니다. 나는 만장일치로 당시 교원노조 분회장으로 뽑히게 되었습니다. 무엇을 고쳐보려고 하면 많은 제약이 따랐습니다. 이 때 나는 말할 수 없는 절망감과 암울한 심정을 맛보아야만 했습니다. 이 때 나는 무엇인가 휘갈겨서라도 써놓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심정이 들었습니다. 그 해 10월 나는 당시 향토 2대 일간지였던「영남일보」와 「대구 매일신문」등에 시, 동시, 수필 등을 발표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답답한 현실에서 무엇인가로의 탈출과 새로운 모색이 나를 문학의 길로 들어서게 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문학을 하시게 된 동기를 좀더 구체적으로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 사실 나는 문학과 인연이 먼 사람이었습니다. 1945년 8월 해방으로 6년간의 중국 생활을 끝내고 고향으로 돌아와 머슴을 두고 농사를 지었습니다. 그런데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생각한 바가 있어 향리 국민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기 시작하였습니다. 1949년 여름으로 기억됩니다만 대구의 한 서점에 들렀을 때에 이태준의『문장 강화』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사실 나의 문장 공부를 위해 그 책을 집어들었기에 그것이 나를 문학의 길로 마구 휘몰아갈 줄은 미처 몰랐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 책에 빠져들면서부터 이상하게도 설명할 수 없는 설레임과 용기에 사로잡히기 시작하였습니다. 굳이 말한다면 그 책을 사게 된 것이 나의 문학 수업의 동기라 해야할 것입니다. 300여 페이지나 되는 이 책은 제1강 <문장 작법의 새 의의>로부터 시작하여, 제9강 <문장의 고대와 현대>까지 그 시절 문학에 관한 책으로서는 분량면에서나 내용면에서 드물게 보는 좋은 책이었습니다. 이 책으로 하여 나는 시와 소설, 그리고 수필이 무엇인가를 어렴풋이나마 알게 되었고 우리 나라에도 유능한 작가들이 많이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 책에는 김기림, 정지용, 이광수, 박종화, 이 상, 김소월 등 40여 명의 시, 소설, 수필, 평론을 예문으로 들고 있어서 1920년에서 1940년대의 우리 나라 문학인들을 한눈에 알아볼 수도 있었습니다. 나는 이 책 덕분으로 비로소 우리 나라에 존재하는 문학가의 위치를 짐작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나는 그때까지도 우리 국어를 옳게 못 배워 일본어 책을 주로 보고 있었습니다. 그것도 문학에 관한 책은 아니었습니다. 나는 중국에서 측량기사로 일본인들과 함께 국도 건설국에 있었기 때문에 내가 읽는 책은 주로 산업기술에 관한 일본어 책이었습니다. 즉 측량, 토목, 건축 등에 관한 책이었습니다. 그러나 가끔씩은 종교, 역사책도 즐겨 읽은 기억이 있는 것으로 보아 문학에의 소질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었던 것으로 짐작이 됩니다. 나는 이『문장 강화』를 본 후로는 문학에 관한 글을 즐겨 보게 되었습니다. 1955년 대구로 전근이 되고부터 국민학교 교사도 무엇인가 전문적인 특기가 있어야 되겠다는 생각으로 체육, 과학, 미술, 서예, 문학을 생각하다가 나는 문학에 관심을 가지기로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마음먹고 시내 서점을 돌아다니며 아동문학책을 찾아보았습니다. 그러나 이때만 해도 알맞은 책이 없어 겨우 이야기책 대여섯 권을 구하여 읽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런데 ‘무식이 더 용감하다’더니 이듬해부터 대구매일신문, 영남일보 등에 작품을 몇 편씩 발표하고 있었고, 대구아동문학회에도 가입하여 이응창, 김성도, 김진태, 윤운강, 정휘창, 여영택, 이민영, 신현득, 윤사섭 등 문우들을 알게 되어 자주 모여 문학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그러나 작품을 써 보고 문학 창작에 관한 책을 몇 년 읽는 동안 나는 나의 국어 소양이 너무나 빈약한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사실 나는 일제 시대에 보통학교(국민학교)에 다니면서 조선어 시간에 우리 한글을 잠시 배운 것뿐이어서 우리 말 우리 글에 대한 지식이 너무나 부족하였던 것입니다. 조선어 시간은 1주일에 1시간뿐이었습니다. 이래가지고는 교사나 문인이 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하여 늦게서야 청구대학 국문과에 입학하여 조윤제, 이은상, 김사엽, 심재완, 김종길, 구상 선생님으로부터 현대문학, 고시조, 국문학사, 석보상절, 향가 등을 배우면서 고전문학과 현대문학을 조금씩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1961년 원화여고로 전근이 되어 박목월, 조지훈, 이육사, 이 상, 이상화의 시를 가르치면서 동시로는 고등학생의 욕구에 충실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어 이때부터 서점 집현전 등에서 일본 시론 서적을 10여 권을 구하여 <시란 무엇인가>를 공부하면서 시와 동시를 함께 쓰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대구아동문학 동인지에는 동시를 이후문학회(以後文學會) 동인지에는 시를 발표하였습니다. 그러니 아동문학을 한 지는 34년, 시문학을 한 지는 30년이 되는 셈입니다. 그렇지만 나는 중국에서 살아 그런지 그저 만만디식이었습니다. 날개를 달고 날아도 바쁠 터인데 멀고 먼 문학의 길을 게으름 피우며 어정어정 걸어가고 있으니 누가 보아도 참 답답한 노릇입니다. 어떤 이는 마음을 비워야 시를 쓴다고 하고 또 누구는 일이 바빠야 시가 쓰여진다고 하는데, 나는 내 마른 가슴을 속속들이 쓸어보아도 허허로이 빈 늦가을 들판 같을 뿐입니다. 그리하여 과수원에 나가 진종일 바쁘게 일해보아도 흙바람에 먼지만 날릴 뿐 좋은 시의 종적은 간데 없으니, 이것이 게으름 탓인가 아니면 나이 탓인가? 하고 부끄러워합니다. 일찍이 괴테는 82세 때에도 주옥같은 <파우스트>를 완성하지 않았던가를 생각하면 인간으로서의 한계를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 뒤에는 또 어떤 활동을 계속하셨습니까?”
- 1957년 3월 대구■경북 지방을 중심으로 아동문학회가 결성되자 창립 회원으로 참여하였습니다. 당시 창립회장은 이응창 선생님이셨는데 우리 고장을 아동문학의 고장으로 발전시킨 큰 업적을 세우신 분입니다. 당시 창립 회원으로는 이응창(작고), 김성도(작고), 김진태, 윤운강(작고), 여영택, 이민영, 박인술, 신송민, 정휘창, 서월파, 윤혜승, 서광민(작고)등이었는데 그 의지가 대단하였습니다. 아무 것도 없는 맨손으로 줄판에 한 자 한 자 글을 새겨 작품집을 펴내었습니다. 이때 이응창 회장님과의 깊은 인연으로 나는 이응창 회장님이 교장으로 근무하고 계셨던 원화여자고등학교로 근무지를 옮기게 되었습니다. 이에 나는 실력의 부족함을 느끼고 영남대학교의 전신인 구 청구대학 국어국문과에 입학하여 1961년에 졸업하였습니다. 만학이었습니다. 당시는 대학을 나오면 호봉이 높아진다 하여 처음에는 많이 입학하였지만 제가 입학을 하였을 때에는 그 제도가 없어졌습니다. 그리하여 함께 입학하였던 많은 사람들이 중도에 그만 두었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호봉이 목적이 아니었기에 끝까지 다녔습니다. 이 때 비로소 우리말의 쓰임에 대해 새로운 눈을 뜨게 된 계기가 되었습니다.
- 그러던 중 1961년 3월 대구 남산초등학교로 정기 이동된 나는 그해 6월 이응창 회장님의 권유로 대구 원화여자고등학교로 자리를 옮기게 되었습니다. 거기에서 평소 절친하게 지내오던 정휘창 교장과 더욱 깊은 인연을 맺어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그 뒤 1966년 4월과 1971년 10월 각각 한글학회와 외솔회에도 가입하여 우리말 가꾸기에 노력하였습니다만 미미할 뿐입니다.
“첫 작품집은 언제 내셨습니까?”
- 1964년 10월 그 동안 대구아동문학회 연간집, 「대구 매일신문」 및 「영남일보」그 밖의 어린이 관련 신문과 잡지 등에 발표해 온 동시들을 모아 첫 동시집 <계절의 선물>을 신아문화사에서 발간하였습니다. 지금 보면 부끄럽기 짝이 없지만 그 때에는 아주 기고만장하였지요. 그 뒤에 그 부끄러움을 메꾸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습니다만 아직도 그 때 그 수준을 넘지 못하여 여간 답답하지 않습니다.
- 그러는 중에도 1978년 대구아동문학회 제3대 회장에 선임되어 연간집 21회 <스물 하나>, 22호 <풀같이 나무같이>, 23호 <늘 푸른 나무>, 24호 <늘 푸른 마음>, 25호 <늘 푸른 언덕>, 26호 <늘 푸른 하늘>, 27호 <늘 푸른 동산>, 28호 <늘 푸른 들판>, 29호 <늘 푸른 강물>을 발간한 것이 그나마 위안이 됩니다. 회장을 하는 9년 동안 매년 1권씩 연간집을 내어야 하는데 그 때는 요사이와 달라 회원들의 회비만으로는 책을 낼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여러 곳에 고충을 털어놓던 중 경상제분 최 회장님이 선뜻 50만원을 희사해 주셨습니다. 정말 고마운 일이었습니다. 그 은혜를 오래도록 잊지 못해 자구책을 찾던 중 그 후 제가 몇 해 동안 근근히 모은 100만원을 대구아동문학회에 내어놓았던 일이 생각납니다.
- 1980년 하청호■이무일과 함께 3인 공동 동시집 <봄이 오는 길>을 교학사에서 내었습니다. 이 시집에는 그 동안 쓴 것 중에서 뽑아 모은 일종의 선집이었습니다. 저는 시를 쓸 때마다 이리 뜯어 고치고 저리 뜯어 고치다 보니 저절로 과작(寡作)이 되고 말았습니다.
- 1981년 4월에는 한국아동문학가협회 부회장에 선임되었으며, 1985년 7월에는 제2동시집 <새들의 고향>을 첫 성인시집 <사랑 변조>와 함께 발간하였습니다.
- 1986년 8월 교직에서 정년 퇴임한 이후, 농장을 돌보며 몇 편을 보태어 1994년 4월 제3동시집 <이 땅의 아이들>, 제2성인 시집 <어디로 가고 있는가>, 산문집 <길은 아무데도 없었다> 등 세 권을 동시에 간행하였습니다. 마침 제 생일도 겹치고 하여 소위 출판기념회라는 것도 가졌습니다. 분에 넘치는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제3동시집 덕분에 전통적으로 동시인에게만 주어지는 한정동 아동문학상을 수상하기도 하여 저에게는 대단한 영광이었습니다.
한 바탕 울고나서/ 또 한 바탕 뛰어 놀고/ 철이의 시간표는/ 먹고 놀고/ 울고 자고,//
엄마는 밉다면서도/ 젖을 먹이고// 아빠는 찻시간이 늦어도/ 안아 준다.// 눈물 콧물/ 얼룩진 뺨 위에/ 온 식구 입맞추는/ 우리 철이/ 우리 철이
- <우리 철이> 전문
“선생님의 시에는 ‘사랑’이라는 말이 많이 등장하고 있는데 그 까닭은 무엇입니까?”
-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1955년 3월 대구로 나는 전근이 되었습니다. 6■25후 나라의 사정은 말이 아니었습니다. 겉은 멀쩡하게 보였으나 속은 썩어가고 있었습니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교육 어느 것 하나 제대로 되어 가는 것이 없었습니다. 나라만 찾으면 모든 것이 잘 될 줄 알았는데■■. 몇 번인가 그만 두고 고향으로 돌아가 농사나 지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때 만약 혼란과 빈곤, 권력에 의한 부조리의 난무가 없었던들, 나는 시에 매달리는 불행한 일은 없었을 것입니다. 무엇인가 터질 것 같은 가슴속을 털어놓고 싶었습니다. 부글부글 끓는 배신감을 뱉어내고 싶었습니다. 하도 답답하여 처음에는 동시를 썼으나 1961년 원화여고 시절부터 동시와 현대시 양쪽을 쓰게 되었습니다. 나의 문학 수업은 너무나 늦게 시작되었고, 솔직히 말씀드려 그 후에도 게으름을 피우며 자주 붓을 들지 않았습니다. 3인조, 5인조 부정 관권 선거가 판을 치고 뜻 있는 젊은이들이 무더기로 끌려가던 시대, 그 흉물들에 빌붙어 하늘을 모르고 깨춤을 추던 시대에 조금만 바른 말을 하면 사흘이 멀다하고 경찰서로 끌려가던 시대였습니다. 이에 아무 거리낌없이 쓰기에는 사랑이 최고였습니다. 사랑을 주제로도 얼마든지 사회의 부조리를 우회적으로 나무랄 수 있으리라고 본 것입니다. 사랑에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인간의 힘으로도 도달할 수 없는 신의 사랑도 있고 자식, 형제, 친구와 같은 지극히 세속적인 사랑도 있습니다. 나는 그 중에서 가장 평범한 이성간의 사랑에 매달리고 싶었습니다. 어쩌면 현실 돌파구로 핑계 좋은 유미주의(唯美主義)를 택하였는 지도 모를 일입니다. 내가 여학교의 교사로서가 아니라 사랑은 인생의 영원한 노래요, 너무나 신비로운 만인의 감정이기 때문이었습니다. 바이런도 하이네도 소월도 상화도 모두 사랑의 시를 썼습니다. 어느 시, 어느 소설, 어느 영화에도 사랑을 노래하지 않은 것이 과연 몇 편이나 되겠습니까? 시인이 이 세상에 있는 것은 사랑의 원리를 증명하기 위해서가 아니겠습니까? 사랑은 시의 원천이요, 만물의 정열임에 분명합니다. 따라서 나는 당분간 이것을 좀더 깊이 캐내려 갈 것입니다. 그리고 여력이 있으면 더 큰 사랑인 위대한 조국과 죽음에 대한 시를 쓸 것입니다.
<대구아동문학회 월례회장에서 박경선 동화작가(오른쪽)와 함께>
“또한 선생님의 작품 가운데에는 ‘시’를 노래한 ‘시’가 많은데 그 까닭은 무엇입니까?”
천의 얼굴/ 만의 몸짓으로/ 멀리 가까이/ 내 영혼/ 어두운 늪으로 내려 와/ 새도록 울고 있는/ 한 마리 새여//(가운데 줄임)// 무성한 언어의/ 밀림 속에서/ 의미의 헝클어진/ 맥을 짚다가/ 무지갯빛 리듬을/ 따라 갔다//(가운데 줄임)// 새야/ 지금 어느/ 말의 바다 속에서/ 주인을 찾고 있느냐
-<시라는 새> 제 1, 3연의 일부
냇가에서 고기잡이를 하는데/ 문득 시의 냄새가 났다/ 기슭에 흩어진 돌 돌 돌/ 그 모양과 색깔에서 시의 냄새가 풍겨 나온다(아래 줄임)
-<시의 냄새> 제1연 일부
날이 새면 시를 찾는다/ 천장에도 뜰에도 없다/(가운데 줄임)/ 집시처럼 들판을 헤맨다/ 언제 한번/ 막힌 가슴을 활짝 열어/ 바다 같은/ 하늘 같은/ 시를 쓸 것인가(아래 줄임)
-<시를 찾아> 제1연 일부
- 시를 찾는다는 것은 시인만이 하는 일이 아닙니다. 바로 사람이 살아가는 길입니다. 일찍이 유명한 심리학자이자 문필가인 독일의 에리히 프롬(Erich Fromm)이 말했습니다. ‘의학이나 공학이나 미술만이 예술이 아니다. 산다는 것 자체가 예술이다. 사실 산다는 자체는 인간이 행하는 예술 중에서 가장 중요하고, 그리고 동시에 가장 어렵고 또한 가장 복잡한 예술이다.’라고 말입니다. 에리히 프롬인지 에라이 폼인지는 모르겠지만 구태어 그의 말이 아니더라도 우리는 이미 이 말을 가슴에 품고 있습니다. 시인 뿐만아니라 모든 사람은 그 삶 자체가 예술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시 한 줄 쓰지 않아도 온몸으로 열심히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은 그 삶 자체가 바로 시인 것입니다.
“예술은 예술 그 자체만으로도 생명력을 가지고 있습니다만 선생님이 보시기에 예술로서 시의 생명력을 더 높이기 위해서는 어떤 조건을 갖추어야 한다고 보십니까?”
- 예술이 예술로서 생명력을 지니려면 두 가지 요소가 필요하다고 봅니다. 첫째는 개성이요, 둘째는 독창성입니다. 시인이 쓰는 시도 이와 같아야 합니다. 각자가 자기 나름대로의 개성과 독창성을 발휘하고 실현해 나가는 예술과 같은 삶이 바로 인간의 삶이고 시인의 삶이어야 합니다. 이 지구상에 숱한 인간이 과거에 살았고, 지금 살고 있고, 또 앞으로도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그들은 모두 살아 온 흔적을 시로 남겼습니다. 사실 그들의 족적이 모두 시입니다. 그렇게 많고 많은 사람들 중에 나는 왜 태어났고 어떤 일을 해야 할까? 나만이 할 수 있는 생각은 무엇이며 나만이 빚을 수 있는 시의 결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라는 질문에 대한 답이 바로 나의 존재 이유가 되고, 시를 쓰는 이유가 되는 것입니다. 즉 살아있는 인간이면 누구나 시를 생각해야 하고 시의 이상대로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시를 마음에 둔다는 것은 곧 사람다운 삶을 의미합니다.
- 각종 이론들이 시가 뭐라고 하여도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시의 고향이 감동이라는 것입니다. 감동이 없으면 시가 아니고 삶이 아닙니다. 우리는 어디에서나 감동 거리를 찾아야 합니다. 사회 생활에서나 자연물이거나 문화재에서든 무엇인가 느껴야 합니다. 감동이 없으면 붓을 들 수도 없고, 설령 들었다 해도 모두 거짓말이 되고 맙니다. 감동이 크면 클수록, 울분과 반항의 메아리가 멀면 멀수록, 그리움의 기다림이 길면 길수록, 폭소와 공허와 고독의 벽이 두꺼우면 두꺼울수록, 증오와 사랑의 열도가 뜨거우면 뜨거울수록 좋은 시가 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것은 바로 살아가는 이유가 되기도 하고요.
“시인의 태도에 대하여 말씀해 주십시오.”
- 부단히 자기를 해체하고 재조직하지 않으면 한 걸음도 나아갈 수 없는 비극의 주인공, 고독한 사람이 바로 시인입니다. 쉴 새 없는 몸부림, 쉴 새 없는 새 사실, 쉴 새 없는 변화를 직시하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생각을 찾아 느낌을 찾아 우리는 부지런히 뛰어가야 합니다. 선악의 비판을 넘어 모든 명예의 유혹을 넘어 우둔하리만치 자기 세계로 질주하는 의지가 있어야 합니다.
- 요사이 제자들이 가끔씩 시는 어떻게 공부해야 하느냐고 물을 때가 있습니다. 나는 답이 궁하지만 간신히 많이 읽어야 하고, 많이 생각해야 하며, 또 많이 써 보아야 한다고 대답합니다. 그리고 가슴이 아파보아야만 한다고 합니다. 시에는 스승이 없습니다. 깊은 밤에 제 홀로 책을 읽으며 고민해서 찾아야 하고 고치고 또 고쳐 써야 합니다. 당송 8대가인 구양수가 말한 다독(多讀), 숙고(熟考), 다작(多作)은 지금도 변치 않는 문학 수업의 3대 요체라고 생각합니다. 스승의 이야기도, 문학의 밤도, 문학 강연도 그 소리가 그 소리, 시를 이야기하는 사람은 많아도 진실로 시를 아는 사람은 드뭅니다. 시는 그만큼 어려운 것입니다. 시에는 언제나 문제가 있을 뿐이지 결론이란 영원히 없는 것입니다. 좋은 시의 길잡이가 될 책을 읽으면서 혼자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시는 불교의 선과 같아서 말로 배우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깨달음만이 있을 뿐입니다.
“선생님은 대구아동문학회 이외의 또 어떤 단체에서 활동하고 계십니까?”
- 노인문학회, 이후문학회, 불교문학회, 한글학회, 외솔회 회원으로도 참여하고 있습니다. 노인문학회에는 오랜 문우이자 술친구인 목인 전상렬 시인의 제의로 구성된 모임입니다. 그를 처음 만난 것은 1960년대 초였는데, 당시 나는 원화여고에 그는 칠곡중학교에 근무하고 있었습니다. 그 무렵 대구 중앙통 <가보세> 맥주집에서 처음으로 만났는데, 그는 맥주보다 소주를 더 잘 마셨습니다. 그리고 술 마시는 습관도 나와 비슷해서 2차, 3차를 해야만 직성이 풀렸습니다. 그 뒤 목인 형이 1970년대 후반 영일군 흥해중학교 교장직을 끝으로 퇴직하였을 때에 더욱 자주 만나곤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만들어진 것이 노인문학회였고 남은 생도 보람있게 살아가자는 뜻으로 <여백(餘白)>이라는 기관지를 내게 되었습니다.
- 또 한글 학회와 외솔회에도 가입하였습니다. 한글 학회 경북대구지회는 1966년 5월 27일에 창립되었는데 제가 이 모임에 가입하게 된 것은 친구인 정휘창 교장과 여영택 시인의 적극적인 권유가 큰 역할을 하였습니다. 당시 지회장은 여영택, 총무이사는 정휘창 교장이 맡았습니다. 당시 창립 회원은 정휘창, 채희문, 여영택, 황병팔, 신현석, 김을수, 이석우, 엄재현, 박인술, 곽두석, 허영수, 정문교, 송숙이, 박두표, 윤운강, 김시현, 김진기, 정대화, 김형수, 이현규, 이동희, 남기심 등으로서 한글을 바르게 지키기 위한 열정이 대단하였습니다. 그 후 외솔 최현배 선생님을 크게 따르는 친구들이 모여 외솔회도 창립하였습니다. 정휘창 교장이 많은 애를 썼는데, 나중에는 계명대 서재극 교수를 회장으로 영입하고부터 각 대학의 많은 교수들도 동참하여 지금도 활발한 한글 전용 및 한글 연구를 전개하고 있습니다.
- 이후문학회는 창립된 지 4~5년이 지난 다음 김장수 형이 적극 권하여 가입하게 되었습니다. 당초 명칭은 순수문학회로 하자는 의견이 있었으나 조각가 겸 시인으로 활동하고 있던 홍성문 교수가 모든 일은 항상 그 다음이 중요하다는 주장을 펴면서 以後文學會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이후문학회의 주요 회원은 이성수, 윤태혁, 윤운강, 홍성문, 여영택, 김장수 등이었습니다.
- 불교문학회는 비교적 최근에 창립되었습니다. 불교의 심오한 가르침을 문학으로 재구성하는 일을 주로 하고 있습니다. 기관지인 <녹야원(鹿野苑)>이 나오고 있습니다. 저는 이 모임에 현재 주제넘게도 고문으로 되어있습니다. 순전히 나이 때문이 아닌가 합니다. 허허허!
“술친구 이야기가 나오니 선생님의 친구분들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
- 제 친구야 뭐 지금 이 자리의 친구가 가장 절실하고 소중하지요. 서양말로 ‘Here and Now’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일일이 다 거론할 수는 없고요. 앞서 말씀드린 전상렬, 정휘창, 여영택 말고도 여러 사람이 생각납니다. 우선 김장수 형이 생각납니다. 내가 그를 알게 된 것은 4■19 직후 교원노조운동을 할 때입니다. 그는 능인고등학교에 근무하고 있었는데 중등 노조 회장을 맡고 있었고, 저는 대구 중앙초등학교 분회장을 맡고 있었습니다. 그는 성질이 걸걸하고 막힘이 없었습니다. 대단한 호남아였습니다. 그래서 그와 금방 흉허물없이 모든 것을 털어놓을 수 있는 사이가 되었습니다. 그는 5■16이 일어나자 1년 반 동안 구금되었는데, 출소하여서는 복직이 이루어지지 않자 학교 친구들을 찾아다니며 참고서 장사를 하였습니다. 그는 주고 받음이 분명하였을 뿐만 아니라 적은 이익으로 많이 파는 전략으로 일약 사업가 반열에 올랐습니다. 종업원을 많이 두고 대구 시내뿐만 아니라 시외로도 사업의 영역을 넓혔습니다. 그는 지기를 만나 술을 자주 나누기도 하였습니다. 나도 그와 자주 어울렸습니다. 그는 나를 만날 때마다 형님 대신에 “형놈, 형놈!” 하면서 껄껄 웃어댔습니다. 한번은 남산동의 이름난 술집이었던 <초가장>으로 불러내기에 나갔더니 <옥이집>, <김천집> 등으로 그와 내가 알고 있는 술집을 모두 돌았습니다. 물론 나는 이튿날 지각을 하고 말았습니다. 언젠가 <가보세> 맥주집에서 술을 마시는데 두둑한 배를 보이며 “속이 약간 거북하여 병원에 갔더니 간이 조금 부었다고 하니 앞으로 나를 부를 때는 간비(肝肥)라고 해라.”라고 하였습니다. 그로부터 얼마 후 병상에 있다고 하기에 문병을 갔더니 “갈 때가 되었으면 가야지.” 하며 호기를 부렸습니다. 그러더니 한 1년쯤 뒤에 그만 이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참으로 한 많은 삶을 사신 분이었습니다.
- 윤윤강 형도 보고 싶습니다. 그와 사귄 지는 40여 년이 됩니다. 그는 계성고등학교에 근무하였고 나는 그 이웃에 있는 원화여고에 근무하고 있어서 더욱 자주 만날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대구아동문학회에 함께 나가 동시를 쓰면서 막역한 사이가 되었습니다. 1970년대 중반에 무슨 행사가 있어서 청구고등학교 앞을 지나게 되었는데 근처에 자기 집이 있다며 기어이 나를 끌어당겼습니다. 그는 부인에게 당시는 귀했던 맥주를 사오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둘 다 취하여 그의 부인이 무려 네 번이나 맥주를 사러 가야만 하였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여간 미안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밀가루 막걸리를 마시던 시절에 비싼 맥주를 취하도록 마셨으니, 여러 형제를 학교에 보내고 있었던 그에게는 상당한 지출이었을 것입니다. 그는 대쪽같은 선비였습니다. 허실비실한 사람을 싫어하는 분명한 사람이었습니다. 이상하게도 나는 그와 만나기만 하면 밤 새워 술을 마시고 싶어졌습니다. 그는 정말 말끔하면서도 다감한 사람이었습니다.
- 최춘해 교장도 오래 사귀었습니다. 아동문학회에서 만나게 되었는데 그는 정말 부지런한 사람입니다. 지금은 교직에서 퇴임하였지만 젊은 사람 못지 않게 컴퓨터를 잘 다루어 대구아동문학회 홈페이지를 손수 만들어 개통하였습니다. 그는 ‘흙의 시인’이라고 불리울 정도로 ‘흙’이라는 주제에 천착한 바 있습니다. 그는 ‘흙’시리즈로 한국아동문학상을 받았을 정도입니다. 한번은 그가 나의 모교인 구미시 인동초등학교 교장으로 근무할 때에 무슨 행사 때문에 내가 모교를 방문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자 매우 반가와 하며 행사를 마치고 함께 대구로 오게 되었는데 기어이 자기 집으로 나를 초대하였습니다. 최 교장 집에서 그 당시 구하기 어려웠던 안동소주를 몇 병이나 내어놓는 바람에 그만 녹초가 되고 말았습니다. 평소 술 조심을 많이 하는 최 교장도 그 날만은 나와 함께 녹초가 되었습니다. 최 교장 부인께서 차를 불러 나를 집으로 보내었다는 데 나는 그만 소위 필름이 끊기는 바람에 몇 주일 뒤에야 그 사실을 알게 되어 몹시 부끄러운 적이 있습니다.
- 정휘창 교장에 대해서는 앞서 약간 언급이 있었지만 많은 시간 더 말해도 다 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는 원화여고에서 저와 25년 간을 함께 근무하였습니다. 그는 참으로 부지런하고 늘 공부하는 친굽니다. 그는 아동문학뿐만 아니라 역사에도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역사이야기 책도 낸 바 있습니다. 경북 지방 의병 대장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져 주말마다 문중을 찾아다니며 자료를 모았습니다. 문집을 복사하고 사진도 찍고 하여 20여년 간 모은 자료가 수십 상자에 이를 정도였습니다. 그가 모은 자료 중에는 재판 판결문, 문집, 서간문 등 매우 다양하였습니다. 그는 그것을 일일이 검토하고 대조하여 마침내 1991년 330여 쪽이나 되는 방대한 분량의『항일독립운동사』를 발간하였습니다. 이 공적으로 그는 매일신문사가 제정한 광복상을 수상하였습니다. 그는 대학을 나오지 않았으나 대학을 나온 사람보다 더 많이 알 정도로 노력을 많이 하는 사람입니다. 독학으로 광복 직후 초등학교 교원 시험에 합격하였으며, 나아가 중등 교사 시험에도 합격하였습니다. 그리고는 중학교 교장까지 한 기민한 노력가입니다. 나는 그러한 정 교장으로부터 늘 배움을 받습니다. 그는 또한 독실한 한글 연구가입니다. 1960년 초부터 최현배 선생님의 지도를 받아 여영택, 운운강 등과 함께 대구 한글학회를 창립하였습니다. 저도 이에 적극 호응하여 참여하였습니다. 지금도 길을 걷다가 잘못된 간판을 보면 일일이 잘못되었음을 고치게 하는 열성을 보입니다. 정말 배울 것이 많은 좋은 친구입니다. 이 밖에도 김진태, 여영택, 윤사섭, 이윤수, 이성수, 윤태혁, 지준모, 정재호, 신송민, 이원성, 김동극, 김성도, 윤장근, 최정석, 김선주, 전정남, 김녹촌, 이순우 등 많은 문우들이 있으나 이만 줄이겠습니다.
“끝으로 선생님의 대표작에 대해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 제 가까이 있는 분들은 졸시 ‘가뭄’을 저의 대표작으로 들곤 합니다. 그러나 솔직히 말해서 아직 나는 나의 대표작을 가지지 못했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잘 씌어지지는 않지만 금방이라도 곧 좋은 시가 씌어질 것 같은 충동에 사로잡히곤 합니다. 아마 곧 씌어질 것으로 기대합니다. 허허허.
하늘아/ 비,// 바람아/ 비, 비,// 구름아/ 비, 비, 비.// 백 도를 넘어/ 타는 논밭/ 푸나무야/ 오늘도 먼/ 기상대 소식// 산천/ 숨차는 한낮/ 돌멩이도 앓아 누워/ 하늘을 본다
- <가뭄> 전문
그는 이 시에 대한 해설을 다음과 같이 붙인 바 있다.
보통 밭곡식은 두 주일, 논곡식은 3주일마다 비를 기다립니다. 그래서 ‘비’ 한 글자를 15일 가뭄으로 생각했습니다. 비 온 뒤 15일이 가물면 한낮에 보통 밭곡식은 잎이 시들시들 목이 말라 자라질 않고 맥이 없어집니다. 그래서 ‘하늘아, 비’ 했습니다.(가운데 줄임) ‘바람아, 비 비’는 한 달을 가문 셈입니다.(가운데 줄임) ‘구름아, 비 비 비’는 45일을 가문 셈입니다.(가운데 줄임) 이 시는 1, 2, 3연만으로 충분한데 4, 5연은 군소리일지 모릅니다.
이 해설을 보면 그가 시어를 구사할 때에 글자 하나하나에 얼마나 많은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가를 알 수 있다. 이 시는 <가뭄>을 노래하였지만 실제로는 ‘민주에의 가뭄, 인권에의 가뭄, 질서에의 가뭄’ 등으로 그 메시지를 확장시켜 해석할 수 있다.
그는 모든 사람에게 성실히 대했음이 분명하였다. 필자가 면담을 위해 그의 아파트를 방문하고 있을 때에 밤 12시가 가까운 시각임에도 불구하고 60이 넘은 여제자로부터 전화가 왔다. 선생님의 부인이 그 전화를 받아 스스럼없이 안부를 나누고는 남편에게 수화기를 넘겼다. 그는 반가이 그 동안의 안부를 나누었다. 그가 아직도 청년처럼 살아갈 수 있는 것은 그의 성실한 대인관계가 큰 역할을 했으리라는 느낌이 들었다.
그는 요즘도 만날 때마다 오늘의 사회 현상에 대해 개탄해마지 않는다. 그러면서 교원노조 시절을 떠올리고 두 주먹을 쥐기도 한다. 그러면서도 이내 꽃과 구름과 푸른 바다를 떠올린다. 그의 시작은 현실 개선을 위한 참여 문학이었지만 지금은 모든 것을 감싸 안으시는 순수 서정과 사랑에 미소를 짓고 있음이 분명해 보였다. 그는 영원한 청년으로 우리들 가슴에 남아있을 것이다.
박인술 시인 연보
1921. 4. 18. 경북 선산군 산동면 신당동(원당골) 625번지에서 아버지 기안, 어머니 손성운의 3남 2녀 중 차남으로 태어남, 본관 밀양.
1936. 3. 칠곡군 인동보통학교 졸업.
1936. 3. 일본 통신중학 강의록으로 2년 독학.
1939. 4. 중국 북만주 하얼삔 국도 건설국 6년 근무.
1945. 9. 해방으로 귀국.
1946. 8. 초등 교원 채용 시험에 합격.
1946. 10. 경북 산동초등학교 근무.
1949. 3. 산동 임봉초등학교 근무.
1953. 7. 선산군 교육감 표창장 받음.
1955. 3. 대구중앙초등학교 근무.
1955. 10. 영남일보, 매일신문에 작품 발표.
1957. 3. 대구아동문학회 창립 회원.
1960. 6. 대구중앙국교 교원노조 분회장 피선.
1961. 3. 영남대학교(구 청구대학) 국어국문과 졸업.
1961. 3. 대구남산초등학교 근무.
1961. 6. 대구 원화여자고등학교 근무.
1965. 10. 동시집『계절의 선물』(신아문화사) 발간.
1966. 4. 한글학회 회원.
1971. 10. 외솔회 회원.
1978. 3. 대구아동문학회 제3대 회장으로 취임 1987년 제4대 정휘창 회장님에게 인계하기 까지 9년간 재임. 당시 제가 총무간사를 맡은 관계로 오늘 이렇게 분에 넘치는 사회도 보고 또한 오늘 받으신 책에서 박인술 론을 쓰게 되었습니다.
1980. 10. 동시집 『봄이 오는 길』 하청호 이무일 시인과 (공저, 교학사) 발간.
1981. 4. 한국아동문학가협회 부회장.
1985. 7. 동시집 『새들의 고향』 (도서출판 대일) 발간.
1985. 7. 시집 『사랑변조』 (도서출판 대일) 발간.
1986. 8. 대구 원화여자고등학교 정년 퇴직
1986. 8. 대통령으로부터 국민훈장 동백장 받음.
1994. 4. 시집 『어디로 가고 있는가』 (도서출판 대일) 발간.
1994. 4. 동시집 『이 땅의 아이들』 (도서출판 대일) 발간.
1994. 4. 산문집 『길은 아무데도 없었다』 (도서출판 대일) 발간.
1994. 10. 한정동 아동문학상 수상
1996. 5. 불교문학회 회원이 되시고 현재는 고문으로 추대되셨습니다
2000. 2. 대구노인문학회 회장
2004. 11. 시집 <날이 갈수록>
2004. 11. 동시집 <강남은 멀어>
2004. 11. 수필집 <길은 멀기도 하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