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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
1.삼황오제
삼황오제라 해서 삼황은 태호 복희씨와 염제 신농씨와 황제헌원씨를 말하고 오제는 소호금천씨와 전욱고양과 제곡고신과 요임금과 순임금을 말한다. 중국 역사에는 옛날 삼황(三皇)·오제(五帝)가 있었다는 전설이 있으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전설에 속하는 것이고 실증을 할 수는 없다. 오제 중에서 특히 서경이라는 역사책에 보면 요(堯)·순(舜)임금 두 임금에 관한 이야기가 보이고, 그 다음에 우(禹)임금이 임금자리를 이어 받아서 하(夏)의 시조가 되었다고 한다. 하 다음에 나온 왕조가 '상'이다. 상나라는 중간에 '은(殷)'이란 곳으로 도읍을 옮겼기 때문에 국호를 '은'이라고 고쳐 불렀다. 이 상나라때의 유물은 지금도 갑골문자 등에 나타난다. 중국 문명의 개조로 일컬어지는 황제(黃帝)는 황하 유역의 반대 세력들을 물리치고 여러 가지 발명품을 만들어 백성들의 생활을 편안하게 하였다. 黃帝가 죽은 후 얼마 지나지 않아서 요임금이 천자가 되어 어진 정사를 폈으며 효행으로 이름 놓은 순을 발탁하여 그에게 천자의 자리를 선양하였다. 이 요(堯)·순(舜)의 치세는 지금까지도 태평성대의 대명사로 불리며 두 임금은 성군의 이상형으로 높이 추앙되고 있다. 순임금은 우(禹)에게 천자의 자리를 물려주었으며 우의 아들 계(啓) 때에 이르러 세습 왕조 체제로 바뀌어 하(夏)왕조가 이어진다. 17대 걸(桀)왕에 이르러 말희라는 절세 미녀에게 빠져 폭정을 폈기 때문에 은(殷)의 탕(湯)왕에게 멸망하였다.
2.은 나라
은(殷)왕조(BC1600~BC 1046)는 중국의 역사상 최초의 국가라고 여겨지는 나라이다. 은나라 이전에도 하나라가 존재하였다고 전하고 있지만 아직 그에 관련된 유물이나 유적이 발견된 적이 없어 인정받고 있지는 않다. 이에 반해 은나라는 1899년 우연히 갑골문자가 발견된 후 은의 수도였던 은허의 발굴이 1928년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고, 여기서 수많은 유물이 발굴됨에 따라 전설 상이 아닌 실재하였던 왕조였음이 밝혀졌다. 은나라는 역사상으로 증명할 수 있는 중국 최고,최초의 왕조인 것이다. 은이 세워진 후 후대 왕들은 여러차례 도읍을 옮기다 20대 왕 반경이 은허(현재의 허난성 안양현 샤오툰촌)로 옮긴 후 주나라의 무왕에게 멸망당할 때까지 도읍을 옮기지 않았다. 은 왕조 말기 주왕은 자신을 신과 같은 절대자라 해서 백성위에 군림에 백성들을 혹독하게 다스렸고, 동이국가를 정복하려다 국력이 소모되었고, 방탕한 생활을 해 연못을 파 그곳에 술을 담고 나무에 고기를 걸어놓은 뒤 3천여명의 남녀가 벌거벗고 서로 쫒아다니는 것을 보고 즐겼다. 이를 주지육림이라 한다. 은나라 주왕이 이렇게 하고 있을 때 주나라는 산시성에서 세력을 기르고 있던 강태공 등의 도움을 받은 문왕은 은을 압박하였으며 문왕의 뒤를 이은 무왕은 은의 주왕과 목야에서 격돌하여 대승을 거두었다. 그 후 무왕이 은허에 입성하여 주왕을 죽여 은을 타도하고 주왕조를 세웠다. 은의 멸망에 관해 백이,숙제의 고사가 유명하다. 백이,숙제형제는 은나라에 살던 선비였는데 주가 은왕조를 치려하자 "주왕이 비록 도리에 어긋나지만 엄연한 군주"라며 신하된 도리는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다가 은나라가 멸망하자 주의 녹을 먹고 살지 않겠다며 수양산에서 고사리를 캐먹고 살다 죽었다고 한다.
3.주
주(周) 왕조는 BC 1122~BC 256년까지 존재하였던 중국의 고대 왕조이다. 덕치를 강조하는 천명사상과 가족제도 및 제례의식을 중시하는 예 사상을 중심으로 요순시대를 이어 받은 이상의 치세라 불린다. 고공단부라는 사람의 손자 문왕은 위수를 따라 동진하여 은나라를 칠 준비를 하였으며 태공망 여상을 등용하여 덕치를 펼쳤다. 이에 수많은 제후들이 문왕을 따랐으며 결국 문왕의 아들 무왕이 목야에서 은의 주왕을 죽이고, 주 왕조를 창시하였다.
4. 춘추 전국시대
BC 8세기에서 BC 3세기까지의 제후 난립의 혼란기. BC 453(또는 BC 403, 설에 따라 유동적임)년 이전을 춘추시대, 그 후를 전국시대라 하여 구분한다. 주나라가 도읍을 옮긴 후 철기의 발달과 현(縣)체제의 등장으로 각지의 제후들의 세력이 점점 커지게 되었다. 세력이 강해진 제후들은 서로 왕을 자처하기 시작하였으며 이러한 세력이 1000여개에 달하였다. 오랜 전쟁 후 중원의 제후는 1000여국에서 10여국으로 압축되는데 이중 강력했던 5명의 제후를 춘추오패라 하여 구분하고 있다. 춘추오패에는 여러 가지 설이 있는데 제 환공, 진 문공, 초 장왕 3명이 이에 들고 나머지 2명은 설에 따라 유동적이다. 여러 가지 설에서 나머지 2명에 들 수 있는 제후는 오 합려(손무의 손자병법과 오자서), 월 구천(구천은 오의 부자와 같이 와신상담의 주인공), 송 양공, 진 목공, 오 부차 등이다. 제의 환공은 포숙아, 관중 등 명재상의 도움을 받아 부국강병을 이루었고 존왕양이를 내세워 첫 번째 중원의 패자가 되었다. 당시 노나라에는 공자가 있었다.
5. 진 나라
진은 주(周) 왕실 제후국의 하나로 출발하여 중국 역사 최초의 통일 제국을 이룬 나라이다(BC 221~BC 207). BC 10세기 경 서융을 견제하면서 일어나 주의 평왕이 견융의 침략을 피해 낙읍으로 천도할 때 이를 호위한 공으로 제후로 승격하였다. 진은 춘추시대 목공 대에 이르러서는 서방을 통일하여 서방의 패자가 되었으며 BC 362년 효공이 즉위하자 상앙이 재상으로 임명되었고 강력한 법가개혁이 시행되었다. 진나라의 국력 신장에 적지 않은 위기의식을 느낀 연, 조, 제, 위, 한, 초 6국은 남북으로 길게 반진연맹을 구축함으로써 진에 대항하려했다. 이를 합종책이라 한다. 이에 진의 혜왕은 공손연에게 합종책을 깰 방안을 구하라 명하고 마침내 진 재상 장의가 6국을 돌며 뇌물로 회유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무력으로 협박하면서 진나라와 단독강화를 맺게 하는 "연횡"에 성공하였다. 이후 장군 백기의 도움에 크게 힘입어 초나라, 조나라와의 전쟁에서 대승을 거두었고 서쪽에는 진, 동쪽에는 제가 맞보는 형국이 된다. 시황제는 죽기 전에 장자 부소에게 제위를 넘긴다는 유서를 남기고 죽었다. 그러나 당시 장자 부소는 흉노족 방비를 위해 북방에 주둔중이었고 시황제의 유서는 환관 조고와 승상 이사에 의해 조작되어 호해가 제위에 올라 2대 황제가 된다. 이후 권력을 쥔 조고와 이사는 장자 부소 외 황자 12명과 공주 10명을 모조리 누명을 씌어 죽이는 등 공포 정치를 행하였다. 환관 조고는 승상 이사마저 죽이고 모든 권력을 손아귀에 쥐게 된다. 무서울 것이 없어진 조고는 2대 황제마저 시해하고 3대 황제를 세우는데 자신 또한 3대 황제에 의해 주살되었다. 이후 진승, 오광의 난(BC 209)이 일어남으로써 진은 점점 파국으로 치닫고 있었고 결국 한중에 들어온 한왕 유방의 군대에 3대 황제(진왕 자영)이 항복함으로써 진은 통일 후 불과 16년 만에 역사 속으로 살아지고 말았다.
6. 한
진 말기에 진승, 오광이 진나라에 반란을 일으키자 각지에서 무장들이 봉기하였다. 한고조 유방도 이러한 무장 중 하나였다. 유방은 원래 농가태생으로 장년에 진의 하급관리가 되었으며 진시 황릉의 공사에 인부 호송 책임을 담당했었다. 각지에서 군웅이 봉기하자 유방도 패땅에서 패공이라 칭하고 군사를 일으켰다. 그후 항양(항우의 숙부), 항우와 연합세력을 구축하여 진나라를 타도하였는데 항우의 군대가 진의 주력부대와 전투를 벌이는 사이 유방은 항우보다 먼저 수도 함양을 함락시키고 진왕 자영으로부터 항복을 받았다. 이보다 조금 늦게 함양에 이른 항우는 홍문에서 유방에게 항복을 받아내고 아방궁을 불태웠으며 팽성에 도읍하여 서초패왕이라 칭하였다. 유방은 BC 206년 항우로부터 한왕으로 봉해졌으나, 그 후 4년 동안 항우와의 쟁패전에서 장량, 한신 등의 도움을 받아 해하에서 항우를 대파하고 천하통일을 이루었다. BC 202년 유방은 황제의 자리에 올랐으며 장안에 도읍하였다.(BC 202년) 7대 무제는 수많은 북벌을 단행하여 한제국의 영역을 최대로 넓혔다. 수많은 원정 끝에 흉노세력을 고비사막으로 내쫒았으며 한반도에도 한사군을 설치하였다. 서방으로는 장건의 원정을 통해 서역제국들을 복속시켰으며 장건에 의해 실크로드가 개척되었다. 그러나 많은 원정과 궁정의 사치, 토목 사업 등으로 문제, 경제 때 비축되었던 국고를 많이 소진하였으며 이를 극복하기 위한 방안으로 증세, 화폐제도 개선, 소금, 철, 술의 전매제 등의 재정 정책이 취해졌다. 이로 인해 백성들의 부담이 늘어나게 되어 무제의 뒤를 이은 소제, 선제 때에는 내정 안정에 힘을 기울이게 되었다. 오랜 시간 계속된 무제의 독재적 통치기간 동안 황제의 측근들은 정치적 실권을 잡게 되었다. 그리하여 10대 원제 이후 황실은 급속히 약해지기 시작하였으며 13대 평제는 외척 왕망에게 독살당하게 된다. 평제를 시해하고 실권을 잡은 왕망은 스스로 황제를 칭하고 국호를 신이라 함에 따라 한제국은 일단 멸망하게 된다. 이 때를 기준으로 AD 8년 이전의 한을 전한, 그 후의 한을 후한이라 하여 구분한다. 왕망 잘못된 이상주의 정치로 내부 모순은 극에 달하였으며 이에 각지에서 농민과 호족이 들고 일어선다. 이 반란 세력 중 6대 경제의 후손인 유수가 농민과 다른 호족 세력을 물리치고 25년 낙양을 도읍으로 하여 한 왕조를 재건하는데 이가 곧 광무제이다. 한 왕조를 재건한 광무제는 여러 개혁을 단행하여 통일 왕조의 기틀을 다졌으며 후한 2대 명제부터는 다시 적극적인 대외정책을 펼쳐 북으로는 흉노를 압박하고 서로는 카스피해 동쪽까지 세력이 미치었다. 그러나 그 이후 다시 외척과 환관세력이 득세함에 따라 정치의 문란이 심화된다. 이를 현신들이 비판하자 두 번에 걸쳐 탄압을 받게 되는데 이것을 당고의 옥이라 하며 이후 한 왕조는 국력 쇠퇴의 길을 걷게 된다.
7.위진남북조
후한 말, 환관들의 횡포로 나라가 어지러울 때 각지에서 농민과 호족세력이 봉기하여 거병하였다. 수많은 영웅들의 세력다툼 속에 확실하게 입지를 굳힌 세명이 있었는데 조조, 유비, 손권이 그 세명이다. 이 세명이 각각 세운 위, 촉, 오의 삼국 시대 속에서 한 왕조는 조조의 아들 조비에 의해 대가 끊기고 세로운 위 왕조가 들어서게 된다. 그러나 곧 위의 실력자였던 사마의의 손자 사마염이 끝까지 남았던 오를 쓰러뜨리고 새로운 왕조인 진을 창시하며 천하통일의 대업을 이루었다. 무제 사마염은 즉위한 후 정권강화 정책을 펴며 검소한 생활을 하여 모범을 보이는 듯 하였는데, 그후 점점 사치와 향락에 빠져들 게 되었다. 진 왕실의 사치가 도를 넘어서는 수준이 되자 귀족들도 사치향락 경쟁에 빠져들어 나라가 급격히 기울었다. 무제는 아들 25명을 각지역 군왕으로 봉하고 영토를 나누어 주어 통치하게 하였다. 290년 진 무제가 사망하자 혜제가 즉위하였는데 혜제는 무능하여 같은 해 다른 형제들이 난을 일으켰는데 이것이 팔왕의 난이다. 이 팔왕의 난은 무제의 황후 양씨 일족과 혜제의 황후 가씨 일족들의 권력 다툼으로 비롯되었는데 이를 계기로 여남왕, 초왕, 조왕, 제왕, 장사왕, 성도왕, 하간왕, 동해왕의 팔왕이 16년에 걸쳐 싸움을 벌였다. 팔왕의 난 중 몇몇 세력은 북방의 흉노족을 용병으로 이용하기도 하였는데 이를 계기로 많은 유목 민족들이 중원에 대한 침략을 감행하였다. 전쟁에 종군했던 다른 민족들도 민족의 독립을 위해 난을 일으켜 영가의 난이 발생하였다. 이에 나라 정세가 극히 어려워지고 농민층이 몰락하였다. 중원에 들어온 유목 민족 세력 중 남흉노의 수장이었던 유연이 자립하여 황제라 칭하였으며 한(나중의 전조)를 세웠다. 유연의 아들 유총은 311년 진 수도 낙양을 함락시키고 진 3대 회제를 살해하였다. 그 후 장안에서 즉위하였던 진 4대 민제가 316년 유요(후 삼국지)에게 사로잡힘으로써 진(이때까지의 진을 서진이라 칭함)은 멸망하게 된다. 진의 왕족이었던 사마예는 오나라의 수도였던 건업(지금의 남경)에 새로운 도읍을 정하고 진을 다시 세우는데 이것이 동진이다. 동진은 양쯔강 유역에 장원을 형성하며 귀족 중심의 국가를 이루어 문화면에서 많은 발전을 이룩하였다. 장강 이남 동진이 들어선 사이 장강 이북 지역은 5개의 북방 민족이 나라를 세웠는데 흉노족의 전조, 선비족의 전연, 갈족의 후조, 저족의 전진, 강족(이들을 5호라 한다) 등이 그것이다. 서진의 멸망으로 화북 지역은 이들 유목민족들의 전쟁터가 되었는데 그 중 왕맹의 개혁으로 국력을 발전시킨 전진이 가장 우세하였다. 결국 전진의 3대 왕 부견은 376년 화북 지역을 평정하여 중국은 장강 이북의 전진, 장강 이남의 동진으로 양분되었다. 동진과 전진은 383년 비수에서 격전을 벌였는데 전진이 완패하여 국력에 급격하게 쇠퇴하였다. 이에 선비족의 탁발규가 북위를 세우는 등 화북 지역에 7개나 되는 국가가 한꺼번에 생겨나게 되었다. 419년 평민 출신인 유유는 동진의 장군이 되었다가 황제인 공제로부터 선양을 받아 국호를 송으로 바꾸고 새 왕조를 개창했다. 그동안 화북 지역은 북위 태무제에 의해 평정되어 남북조 시대가 시작되었다. 북위는 변방의 수비를 주로 선비족에게 맡기었는데 중앙 선비족과 변방 선비족의 차별로 변방군대에서 반란이 자주 일어났다. 게다가 효무제가 한때 충신이었던 고환을 제거하려하자 고환이 난을 일으켜 낙양을 함락시키고 동위를 일으켰다. 이에 효무제는 장안의 우문태에게 피신하였는데 우문태는 효무제를 죽여 버리고 서위를 건국하였다. 그 후 동위는 북제에게, 서위는 북주에게 교체되었다가 북주가 북제를 멸망시키고 한때 화북지역을 통일하였으나, 얼마 못가서 외척 양견(수 문제)이 제위를 양위 받고 수를 건국하였다. 남조는 송 이후 제, 양, 진 의 4 왕조가 교체되다가 589년 수 문제의 아들 양광(수 양제)의 군대에 의해 진 황제 숙보가 사로잡힘으로써 끝나게 된다.
8.수
수(隨) 문제 양견은 북주의 외척 세력으로 사위 정제로부터 황제 자리를 선양 받아 수왕조를 세웠다. 587년 남조 양의 황실 자손이 다스리던 후량을 무너뜨렸으며 589년 그의 차남 양광을 시켜 남조의 마지막 왕조인 진을 멸망시킴으로써 통일을 완성하였다. 원래는 문제의 장남 양용이 태자였으나, 진을 무너뜨리는 데 공을 세운 차남 양광이 태자가 되었으며 그는 아버지문제를 죽이고 제위에 올라 양제가 되었다.(581년) 양제는 문제의 뒤를 이어 대운하 공사를 계속 하여 중국의 남북을 수로로 이었으며 남북의 통일을 추진하여 동도를 낙양에 조성하고, 토욕혼과 돌궐을 토벌하였다. 또한 돌궐과 손을 잡을 수 있던 고구려를 정벌하기 위해 3번에 걸쳐 대군을 일으켰으나 모두 실패하였다. 통일왕조를 이룬지 얼마 되지도 않아 대규모의 토목공사와 수차례에 걸친 원정이 감행되자 백성들의 생활은 피폐해져 갔다. 이에 각지에서 백성들의 불만이 폭발하여 반란이 일어났는데 이러한 혼란 속에서도 양제는 사치스러운 생활에 빠져있었다. 617년 태원 유수 이연은 내란이 격화하여 양제가 있던 강도가 고립되자 태원의 호족들을 끌어 모아 군사를 일으켜 장안을 탈취하고 양제의 손자인 유(공제)를 옹립하였다. 그러나 618년 양제가 강도에서 우문화급에 의하여 살해되자, 이연이 공제로부터 양위 받아 스스로 즉위, 당조를 창건함으로써 수나라는 멸망하였다.
9.당
태원 유수 이연은 양제의 폭정에 반기를 든 농민반란을 진압하다 617년 자신이 반란군을 일으켰다. 그는 군사를 일으킨지 1년 만에 수도 장안을 점령하였는데 이 때 양제가 그의 친위대장인 우문화급에게 살해당하자 그가 양제의 손자인 양유를 공제로 세웠다. 그리고 공제에게 제위를 선위받아 당(唐)을 건국하였다.(618년) 당 건국의 제1공로자는 이연의 차남 이세민이었는데 태자인 형과 동생이 시기하자 이들을 궁궐로 불러 죽인 후 이연을 몰아내고 2대 태종이 되었다. 태종은 제위에 오른 후 돌궐, 설연타, 위구르 등을 압박하여 조공을 바치게 하였다. 그는 내정에도 힘써 수나라의 균전제, 조용조, 부병제를 개선하여 효율적인 통치체제를 마련하였으며 민생안정에도 힘썼다. 이에 나라가 안정되어 태평성대를 누리게 되었으며 태종의 연호를 따 이 시기를 '정관의 치'라고 한다. 당 태종이 중앙아시아 서부에까지 안서도호부와 북정도호부를 설치하여 실크로드는 한 이후로 다시 크게 번성하게 되었다. 태종의 뒤를 이어 즉위한 고종은 말년에 황후를 폐하고 태종의 궁인이었던 무씨를 황후로 내세웠다. 무씨는 고종에 이어 즉위한 자신의 아들 중종, 예종을 폐하고 스스로 제위의 자리에 올라 국호를 주로 바꾸었다. 이가 측천무후로서 중국 역사 상 유일한 여황제이다. 측천무후는 무씨가문의 정권을 꿈꾸며 공포정치를 하다가 재상 장역지 일파의 쿠데타로 제위에서 내려갔다. 그 후 중종이 즉위하여 다시 국호를 당으로 바꾸었으나 곧 황후 위씨 세력에게 독살을 당하였다. 이에 이융기(현종)이 무력으로 위씨 세력을 축출해내고 예종을 복위시킨다. 이어 현종이 제위에 올라 통치를 하게 된다. 현종은 부병제를 모병제로 바꾸어 실시하고, 과다한 관리를 해고시키는 등 내정과 사회안정에 힘쓰었다. 이에 당나라는 당 태종의 '정관의 치'이후 최고의 전성기를 맞이하는데 이를 '개원의 치'라 부른다. 그러나 현종은 환관에 의존하는 경향이 있었고, 말년엔 여색에 빠져 정사를 돌보지 않아 당의 멸망을 초래하게 된다. '정관의 치'에 비길 만한 '개원의 치'를 펼쳐 당 최고의 전성기를 이루었던 현종은 말년에 양귀비를 얻어 여색에 탐닉하게 되었다. 현종은 양귀비의 일족인 양국충에게 재상 자리를 주어 정사를 돌보게 하였는데 이에 권력에서 점점 소외되는 것을 느낀 절도사 안록산이 '변경의 반란세력의 토벌'을 명분으로 군사를 일으켰다. 안록산의 군대는 수도인 장안까지 진격하였는데 이에 현종은 장안을 버리고 사천 지방으로 피난을 갔으며 이 과정에서 양귀비도 살해되었다. 안록산에 이어 그의 부장이었던 사사명이 계속해서 반란을 이끌었으나 안록산과 사사명이 모두 아들에게 살해되는 등 내분으로 세력이 약해졌다. 이에 8대 황제 대종은 위구르의 지원을 받아서 낙양 등을 수복하고 반란군에게 항복을 받아내는 데에 성공하였다. 안록산의 난이 진압된 후에도 당의 어려움은 계속 되었다. 당 말기에는 환관들이 세력을 넓히고, 보수적인 전통 문벌귀족과 지주 세력의 신흥관료가 국정 주도권을 얻기위해 대립함에 따라 국정이 더욱 혼란스럽게 되었다. 중앙이 이러하자 각지에서는 크고 작은 반란이 끊이지 않았으며 881년에는 황소의 군대에 당 수도 장안이 점령되었다. 이를 황소의 난이라 한다. 원래 황소는 평민 출신의 소금 상인이었으나 막대한 재력을 가지고 북방 출신 병사들을 끌어들여 황소의 난을 일으켰다. 이에 호응하여 불만이 많던 농민층까지 가세, 장안까지 점령하게 된 것이다. 황소의 난은 사천절도사 고변에 의해 평정되었다. 황소의 후퇴에 당시 고변의 휘하에 있던 최치원의 <토황소격문>이 썼던 일화는 유명하다. 황소의 난 이후 강회 지역의 곡창 지대가 황폐화되어 국가 재정은 막대한 타격을 받았다. 한때 황소의 부장이었던 주전충은 황소를 배신, 황소의 난을 진압하였으며 재상파와 손잡고 권력을 잡아 소종을 시해하고 애제를 옹립하였다. 그러나 907년 스스로 애제를 폐위시키고 황제의 자리에 올라 국호를 후량이라 함으로써 290년에 걸친 당의 역사는 끝나게 된다.
10. 5대10국
오대십국이란 당 멸망부터 송 건국까지(907~960) 중원에 들어섰던 5개의 정통 왕조와 지방에 들어섰던 10개의 작은 나라들을 지칭하는 말이다. 오대에는 양(梁), 당(唐), 진(晉), 한(漢), 주(周)가 속하는데 이전에 존재하였던 같은 왕조와의 구별을 위해 앞에 후(後)자를 붙여 구분한다. 십국은 오(吳), 남당(南唐), 오월(吳越), 민(:福建,), 형남(荊南), 초(楚), 남한(南漢), 전촉(前蜀)·후촉(後蜀), 북한(北漢)을 말한다. 당이 망하고 후량이 건국된 뒤 각지에서 세력을 키우던 절도사 및 번진 세력들이 각각 왕이나 황제를 칭하였다. 이때 북방에는 거란족이 발해를 멸망시키는 등 세력을 굳히고 있었는데 후진의 건국을 도운 대가로 연운 16주를 할양받고 폭정을 일삼았다. 이런 와중에서 결국 후진도 거란에 의해 무너지고 말았다. 이쯤 후주(후의 주나라)에서는 세종이 통일의 기틀을 닦고 있었다. 그러나 갑자기 세종이 병으로 사망하자 7세의 어린 황제 공제가 즉위한다. 후주의 친위대 사령관이었던 조광윤(송 태조)은 북한과의 전투를 위해 진군했던 진교역에서 회군하여 조보, 조광의 등의 추대로 공제로부터 제위를 이어받게 된다. 이후 조광윤은 국호를 송이라 하고 남당 등의 여러 나라를 병합하여 통일 제국 송나라의 시대를 열 게 된다.
11.송
당(唐)이 절도사 주전충에 의해 멸망하자 오대십국(五代十國) 시대가 시작되었다. 이때 통일을 위한 기반을 닦고 정치를 잘하여 명군이라 불려졌던 후주의 세종이 병사하였다. 이때 송(宋) 태조 조광윤은 후주 친위대의 총사령관이었다. 세종이 병사하자 7세의 황제 공제가 즉위하였다. 이에 조광윤은 북한을 치려고 진교역에 주둔하고 있었는데 곧 개봉으로 회군하여 공제에게 제위를 선양받고 국호를 송으로 고쳐 960년 송 왕조를 창시하게 된다. 태조 조광윤은 즉위 후 최우선급무로 천하통일을 내세웠으며 강력한 중앙집권체제를 구축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지방군사 세력을 억제하고 절도사의 권한을 빼앗았으며 지방의 관료들도 문관만 임명하는 정책을 폈는데 이것이 이른 바 '문치주의'이다. 태조 생전에 강남 및 사천에 난립하던 오대십국 시대의 국가들은 모두 멸망하였으나 산서 지방의 북한은 요나라(거란족이 세운 나라)의 도움을 받아 계속 남아있게 된다. 2대 태종 때 요와 북한 사이 외교적 마찰이 생기자 태종은 북한을 멸망시키고 계속 하여 요나라의 연운 16주를 수복하려 하였지만 실패하였다. 1005년 송과 요(거란족)는 전연에서 '전연의 맹'을 맺어 송이 형이 되고 요가 아우가 되는 형제의 의를 맺었다. 여기서 송은 해마다 비단과 은을 요에 보내기로 합의하였는데 이에 한참동안 요와의 전쟁은 일어나지 않고 평화의 시대를 맞이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실상 굴욕적인 강화였다는 평이 지배적이다. 평화가 계속 되자 오대십국 시대 소도시의 발달을 발판으로 송의 경제는 호황을 누리게 되고 국가 재정도 풍족해졌다. 그러나 인종 대에 이르러서는 서하와의 수년에 걸친 전쟁 때문에 재정이 적자를 기록하게 되었으며 경제공황에 빠지게 되었다. 인종의 뒤를 이어 즉위한 신종은 왕안석을 등용하여 신법을 시행하였다. 신법개혁의 목적은 대지주 및 대상인의 기득권을 뺏고 중소농민 및 상인의 경제적 지위향상에 있었다. 신법에는 청묘법, 시역법, 방전균세법, 보갑법, 모역법 등이 있는데, 이에 따라 연리 2할의 저리 융자를 받을 수 있게 되었으며 노역의 의무를 화폐로 대신할 수 도 있게 되는 등 농민들의 부담을 덜어주는 획기적인 조치들이 많았다. 또한 매년 토지를 측량하여 그간 탈세해온 토지를 적발하여 세수를 늘리는 방법 등으로 재정은 적자에서 흑자로 전환되었다. 말기에 북방에는 만주의 여진족이 국력을 키워 국가체제를 정립하고 국호를 대금(고려 천추태후의 아들 김준)이라 칭하였다. 결국 흠종 대에 이르러 송은 수도인 개봉을 금나라에 함락당하고 전대 휘종, 흠종을 비롯하여 수많은 황족이 금으로 호송되어 갔다. 이를 '정강의 변'이라 하며 그전까지의 송을 북송, 이후 고종부터의 송을 남송이라 하여 구분한다. '정강의 변' 때 수많은 황족들이 금으로 호송되어 갈 때 흠종의 동생만이 남쪽으로 도주할 수 있었다. 그는 흠종의 뒤를 이어 제위에 오르는 데 이거 바로 고종이다. 고종 때 송의 조정은 두 개의 파로 나뉘게 되는데 금을 치고 북방을 수복하자는 주전파과 현실을 받아들여 금나라를 인정하자는 화의파가 그것이다. 고종 때의 대표적인 주전론자로는 악비를 들 수 있다. 그는 호북 일대의 대군벌 이었는데 회하, 진령 등에서 금을 물리치는 등 많은 공을 세웠다. 그러나 화평론자였던 재상 진회에 의해 누명을 쓰고 숙청되어 송은 금과 화평을 하게 되었으나 그도 오래 가지 못하고 깨어지게 된다. 이후 양산박 송강의 난 등 여러 곳에서 반란이 일어나고 왕권마저 약해져 송은 풍전등화의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이때 몽골의 초원지대에는 칭기즈칸을 지도자로 하는 강력한 제국이 탄생하였는데 이가 몽골제국이다. 파죽지세로 영토를 확장해나가던 몽골은 금나라를 함락시키고 서하도 공략하는 등 세계 최강의 제국을 만들어 간다. 금 정복 이후 몽골제국은 남송 공략을 계속하였으나 험준한 강과 산맥을 넘어 인구가 조밀한 대도시를 상대해야 했기에 계속 실패를 거듭하였다. 그러나 결국 1279년 쿠빌라이에 의해 남송은 멸망하였다.
12.원
13세기 초 몽골 초원지대를 근거로 하던 몽골족에 칭기스칸이라는 영웅이 탄생하였다. 칭기스칸은 몽골고원을 통일하고 칼을 남쪽으로 돌려 금나라도 멸망시켰다. 몽골은 계속적인 원정으로 역사상 전례가 없는 사상 최대의 영토를 소유하며 유라시아 전역을 지배했다. 그러나 유목민 지배층과 농경민 피지배층이라는 사회 구조는 정치적, 경제적 모순을 불러일으켰다. 이에 칭기스칸의 손자인 쿠빌라이는 유목과 농경이 공존할 수 있는 아건조지대에 강대한 제국을 세우려 하였다. 그는 형인 대칸 몽케의 뒤를 이으려 했던 막내 동생 아릭 부케를 몰아내고 대칸 자리에 올랐다. 그 후 수도를 몽골고원의 카라코룸에서 연경(지금의 북경) 부근에 새 수도인 대도를 건설하여 천도하였다. 1271년에는 국호를 대원(大元)이라 칭하고 중국식 정통 왕조임을 자처하였다. 이후 1279년에는 회하 이남의 남송을 평정하였고 그 이남까지 침략하여 대제국을 이루었다. 한때 오고타이칸국의 왕 카이두가 원의 종주권을 부정하며 반란을 일으켰으나 카이두가 사망함으로써 이는 무마되었다. 이후 원나라는 칸국들과 친교를 맺어 제국의 종주권을 회복하였으며, 하루가 다르게 국력이 발전하여 국제 무역이 성행하게 되었다. 원은 고려와도 강화를 맺어 정동행성을 설치하였으며 일본 정벌도 시도하였으나 태풍에 의해 실패하였다. 거대한 영토 위에서 번영을 누리던 원도 점점 정치가 문란해져 갔다. 정치권은 부패하였으며 관리들은 뇌물 긁어모으기에만 탐닉했다. 또한 몽골족은 한족 차별정책을 써 수많은 한족의 불만을 샀고 대규모의 공공사업에 노동력이 징발되어 감에 따라 백성들은 가혹하게 착취당했다. 게다가 강남 일대에 갑자기 수해가 일어나자 식량난이 심해져 한족 농민들이 급기야는 반란을 일으켰다. 사회가 어렵게 되자 미륵불을 믿는 종교인 백련교가 창시되어 수많은 신도들이 몰려들었고 백련교도 또한 반란에 가담하였다. 이들 반란군은 머리에 붉은 두건을 두르고 다녀 홍건적이라 불렸으며 이 난이 '홍건적의 난'이다. 불만이 많던 한족들이 홍건적에 계속하여 가담함에 따라 홍건적의 수는 늘어만 갔다. 홍건적의 무리에 주원장이라고 하는 탁월한 평민 출신 지도자가 탄생하면서 반란은 급물살을 탔고 결국 1368년 수도인 대도가 함락되었다. 이에 원 마지막 황제 순제(토곤 테무르)는 몽골로 피신하게 되었고 원나라는 멸망하게 되었다.
13. 명
원나라 말기 정치권이 부패하고 각종 재해까지 발생함에 따라 백성들의 삶이 어려워졌다. 이때 강남에서 한족 농민과 백련교도들이 이른 바 '홍건적의 난'을 일으켰다. 이때 명(明) 홍무제 주원장은 홍건적에 가담하여 대장이 되었다. 주원장은 원래 유랑농민의 아들로서 기근으로 고아가 되어 탁발승 생활을 하며 걸식으로 끼니를 때우던 미천한 신분이었다. 그는 황각사에서 탁발승 노릇을 하다가 홍건적에 가담하여 전투력과 지도력을 인정받아 홍건군의 대장이 된다. 주원장이 이끄는 홍건적은 마침내 1368년 원의 수도 대도(大都)를 함락시키고 금릉(지금의 남경)에서 명(明)나라의 건국을 선포하고 제위에 오름으로써 홍무제가 되었다. 그는 즉위 후 수도 남경에 거대한 성곽을 세웠으며 강력한 중앙집권체제를 구축하기 시작하였다. 중앙집권을 위해 재위기간 동안 무려 4차례나 숙청을 단행하였으며 재상직 마저 없애 버렸다. 그 결과 각 지방의 통치마저 중앙에서 통제하고 관리하는 특급(?) 중앙집권체제가 마련되었다. 주원장의 뒤를 이은 건무제를 축출하고 제위에 오른 영락제는 유목계 북방민족의 원정을 위해 5번이나 고비사막을 넘고 3번은 그들의 본거지를 함락시켰는데 이를 오출삼리라 한다. 1449년에는 몽골의 한 부족인 오이라트부의 남침으로 친히 정벌에 나섰던 영종 정통제의 군대가 대패하여 종군했던 문무관료들이 전멸하고 황제가 적국에 포로로 잡혀가는 일이 생겨났다. 이를 ''토목의 난'이라 하는데 이후 명은 정통제의 동생을 황제로 내세우고 결전을 다짐한다. 결국 북경을 공략하다 몽골쪽에 내분이 일어나 정통제는 다시 명으로 돌아왔으며 8년만에 동생을 몰아내고 다시 황제자리에 선다. 이미 '토목의 난'으로 고초를 겪었던 명은 북방 수비의 중요성을 느끼고 유명무실해진 만리장성의 재건에 힘을 쏟았다. 지금의 만리장성은 이때 명나라가 쌓은 것이다. 13대 신종 만력제가 죽고난 후 그의 아들 광종 태창제가 즉위하였는데 한달 만에 죽고 만력제의 손자가 제위에 올랐는데 그가 희종 천계제이다. 희종은 명대 황제 중 가장 어리석은 황제로 꼽힌다. 희종은 즉위 후 환관인 위충현을 총애하였는데 위충현은 빚쟁이었다가 스스로 거세하고 환관이 된 자로 간악무도한 간신의 전형이었다. 위충현은 어린 황제를 등에 없고 비밀경찰기관인 동창을 장악하여 관료들을 탄압하였다. 위충현의 횡포가 어찌나 심했는지 자신이 지나갈 때 사람들에게 "구천세"를 외치게 했다고 한다. 황제에게 외치는 만세보다는 천세가 적은 구천세를 외치게 하여 자신의 권세를 나타내기 위함이다. 이후 희종이 즉위 7년 만에 죽었는데 그 뒤를 이어 17세의 동생인 16대 의종 숭정제가 즉위하였다. 어린 나이의 황제였지만 그는 파국으로 치닫는 명황실을 구해내고자 노력했다. 즉위 후 숭정제는 권세를 쥐고 있던 환관 위충현을 제거하였으며 내각을 여러번 교체하는 등 나라를 일으키기 위한 여러 시도를 하였으나 능력있는 인재를 구하지 못하여 국력은 점점 더 약해져만 갔다. 그 무렵 명의 이곳저곳에서는 도적세력이 계속해서 나타났는데 이중 이자성의 무리가 가장 세력이 컸다. 이자성은 역졸 출신으로서 도적의 무리를 몰아 탐관오리를 제거하고 부호들의 토지를 빼앗아 농민들에게 나누어 주는 등 의적 행세를 했다. 그의 인기는 계속 치솟아 1644년 국호를 대순이라 하고 스스로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황제가 된 그는 곧바로 군대를 몰아 북경을 쳤는데 그때 명의 정예부대는 모두 청나라(여진족이 세운 나라)의 침입에 대비하여 국경에 전진배치되어 있었다. 속수무책으로 맞설 군대도 없이 황궁은 포위되었고 명의 마지막 황제 숭정제는 황태자와 황자들을 외가로 피신시키고 황후는 스스로 자결하게 하였으며 스스로 두 공주를 죽였다. 그리고는 자금성의 뒷산 만세산에 올라 옷깃에 "나는 죽어 지하에 가도 선왕들을 뵐 면목이 없어 머리털로 얼굴을 가리고 죽는다. 짐의 유해가 도적의 손에 찢기는 것은 상관하지 않으나 단 한명의 백성이라도 상하게 하지 말라."라는 유서를 남기고 목을 매어 자결했다. 이로써 1644년, 명의 276년에 걸친 역사는 끝을 내리게 되고, 한족에 의해 성립된 마지막 통일왕조는 막을 내렸다
14.청
청(淸)왕조는 만주인이 세운 나라이다. 만주인은 퉁구스족의 일파로서 여진이라고도 불린다. 그 일부가 화북에 진출하여 금나라를 세운 이후에는 점차 정착농경생활을 하게 되었다. 명조 말기에는 3부로 나누어져 명나라의 통치를 받고 있었다. 이들의 사냥기술은 대단히 뛰어났는데 이 사냥 기술을 전투에 이용한 것이 팔기제도이다. 여진기병은 대단히 강인하여 '천명의 중국병사가 한명의 여진기병을 이겨낼 수 없다'라는 말까지 생겨날 정도였다. 명 말기 임진왜란 출병 등 '만력의 3대정'으로 만주족에 대한 통제력이 약해지자 여진족의 추장이던 누르하치가 여진족을 통일하고 국호를 후금이라 하여 스스로 한의 위에 올랐다. 누르하치(청 태조)는 명을 계속 공격하는 등 청나라의 기반을 닦은 후 2대 홍타이지(청 태종)에게 후금제국을 넘겨주었다. 이후 그는 조선을 두차례에 걸쳐 침략하여 강화를 성사시켰으며(병자호란) 1636년 국호를 대청(大淸)으로 고치고 제위에 올렸다. 이때 이자성을 주축으로한 반란군이 북경을 함락시키고 황도에 진입하여 명(明)을 멸망시키게 된다. 청나라에 대한 방비를 위해 산해관에 전진배치되어 있던 오삼계는 청에 투항하여 청군을 북경으로 인도했다. 오삼계는 북경을 공략하여 대승하였으며 이자성 세력은 서안으로 후퇴하다 청 군대의 추격을 받고 호북으로 달아난다. 이로써 중원은 청나라의 손에 들어가게 된다. 24세의 나이로 젊은 순치제가 죽자 그의 둘째 아들이 8세의 어린 나이로 제위에 올랐는데 이가 희대의 명군인 4대 황제 강희제(康熙帝)이다. 강희제는 나이 16세가 되던 해 스스로 친정을 선언하고 직접 정사를 담당하게 된다. 당시 청은 번이라는 것을 설치하여 변방의 방비를 맡기고 있었는데 유력한 군벌을 왕에 봉하여 번에 파견하였다. 그런데 이 번세력들이 점점 강해져 막대한 부와 강한 군대까지 거느리며 황도를 위협하는 세력으로 성장하게 되었다. 이에 강희제는 번 제도를 폐지하기로 결정하는데 가장 큰 번세력이었던 오삼계가 이에 반란을 일으키게 된다. 오삼계는 다른 3번세력을 모두 모아 막강한 군대를 조직하여 청 왕조를 위협하였는데, 이에 강희제는 팔기군을 소집하고 선교사로 북경에 머물던 베르비스트에게 명해 경량 대포를 각 전선에 조달하도록 하였다. 강희제는 각 전황을 모두 조사하여 친히 전투를 지휘하였는데 섣불리 나서지 않고 장기전을 펼쳤다. 명 황실을 스스로 배신했던 오삼계는 명을 다시 재건한다는 모순된 명분으로 반란군을 일으켰는데 이런 명분으로는 전쟁이 길어질수록 불리했다. 게다가 나이가 70을 바라보게 되면서 다급해진 오삼계는 국호를 주(周)라하고 스스로 제위에 오르지만 같은 해 병을 얻어 죽고 만다. 이후 반란군은 힘없이 모두 무너졌으며 8년 여에 걸친 '3번의 난'이 평정되었다. 강희제는 또한 러시아와 네르친스크 조약을 맺어 러시아의 남하를 견제하였고 조선과는 백두산 정계비를 세워 국경 경계 문제를 확실히 하였다. 그는 술과 담배를 입에 대지 않았고, 사서삼경은 물론이며 서양의 선교사들에게 서양의 학문도 배워나갔다. 또한 궁중의 화장품과 향응비를 모두 없애고 환관, 궁녀의 수를 대폭 줄였으며 자신의 옷 치장도 매우 검소하게 하였다. 치국에도 힘써 황하 치수 공사를 완성하였으며 흉년이 들었을 때 토지세와 소작료를 감면하게 하는 등 사회 안정에 힘썼다. 강희제의 뒤를 이어 제위에 오른 5대 옹정제는 강력한 중앙집권체제를 마련하였으며, 그 뒤를 이은 건륭제는 선대 2대에 걸친 선정 덕에 많은 수확을 거둘 수 있었다. 건륭제는 티벳, 미얀마, 베트남 원정 등을 통하여 청나라의 영토를 최대로 만들어 동아시아 전역을 지배했으며, 사고전서의 편찬 등의 문화 사업과 내정에도 충실하여 선대 2대에 이어 청대 최고의 전성기를 누렸다. 건륭제의 뒤를 이은 가경제 즉위 1년 만에 각지에서 백련교도의 난이 일어나게 된다. 이 백련교도의 난은 10년 동안 계속 되는데 이 난으로 청 팔기군의 무력함이 드러났다. 그 동안 영국은 중국인들에게 아편을 팔아 돈을 벌어들이고 있었는데 이로 인해 아편중독자가 급증하는 등 여러 가지 사회 문제가 발생하게 되자 도광제는 임칙서에게 아편금연대업을 맡기게 된다. 이에 임칙서는 광주에 부임하여 아편 밀매자들을 처벌하고 동인도회사 소속 선박 튜나 호를 억류하여 튜나 호에 있던 아편을 모두 폐기 처분했다. 이에 영국 의회가 소집되어 쟁을 결의하였으며 2년 간에 걸친 '아편 전쟁' 끝에 청나라는 패배하여 불평등조약인 남경조약을 맺게 되며 홍콩을 영국에 할양하고 광주, 상해 등 5개 항을 개항하게 되었다.(1844) 1851년 청나라 내부에서도 불만이 가중되어 태평천국의 난이 일어났다. 이들은 기독교의 천국을 지상에 건설한다는 취지로 태평천국이란 나라를 건국했으며 북상을 거듭하여 남경을 점령한 후 남경을 천경이라 개칭하여 태평천국의 수도로 삼았다. 그러나 태평천국에서도 민생은 안정되지 않았고 내분이 발생하여 세력이 약해져 갔다. 결국 이홍장 등의 한인 관료가 조직한 향용 등에 의해 태평천국의 난은 진압되었다. 태평천국의 난을 진압하고난 이홍장은 상해에 서구식 무기 공장을 세워 가동하는 등 서양 것을 배워 근대화를 하자는 '양무운동'을 일으킨다. 그러나 양무운동은 사회, 정치적인 개혁은 하지 않고 무력적인 것에만 제한되었다는 데에 한계가 있었다. 결국 청일전쟁에서의 패배는 양무운동의 한계를 여실히 드러내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 서구의 기술만이 아니라 정치, 사회 체계도 개혁해야 한다는 강유위의 변법자강운동(무술변법)이 일어나 황제 광서제의 동조까지 받았으나 서태후 등 수구파의 반대로 100일 만에 막을 내리는데 이것을 100일 유신이라 한다. 변법자강운동이 실패로 돌아가자 농민들이 봉기하여 외세에 대항하기 시작하였다. 의화단이라는 비밀결사단이 만들어져 서구를 타도하였으며 "청을 받들고 서양 세력을 멸한다"는 구호를 내세워 세력을 확장시켰다. 의화단 세력이 수도 북경을 위협하는 지경에 이르자 영국, 러시아, 일본 등 8개국 연합군이 북경에 진입하여 의화단을 모조리 처형하였으며 청은 이후 열강의 식민진출에 재기불능의 상태가 되어 버린다. 이후 청나라는 유명무실한 종이 호랑이에 불과한 신세가 되며 1912년 손문의 신해혁명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지자 중국 역사상 마지막 황제인 선통제 부의의 퇴위와 함께 멸망한다.
15.현재
중국은 황하문명의 발상지로 5,000여년의 유구한 역사를 가지고 있는 나라이다. 4천년 전에 이미 고유문자를 만들고, 나침반, 화약, 인쇄술, 제지술은 중국의 4대 발명품으로 중국인의 자랑거리이다. 은 왕조때 나라의 체제를 갖춘 후로 첫 통일국가인 진, 한, 수, 당, 송, 원, 명, 청으로 이어오면서 한족을 중심으로 여러 주변 민족들과 어울려 통일과 분열을 거듭하여 그들만의 문화를 형성했다. 청나라 말기에는 서양세력과 일본의 침략을 받았지만, 1912년 손문이 이끄는 중화민국이 건국되었다. 그 뒤에도 일본의 침략으로 중 .일전쟁이 일어나는 한편 공산당과 국민당의 30년간의 내전이 계속되다가 2차 세계대전후 1949년 승리한 공산당이 대륙부를 차지하면서 패배한 국민당은 타이완섬으로 밀려났다. 중국은 공산당을 주체로 한 중화인민공화국이 성립된 후, 1954년 헌법을 제정하여 지금까지 독자적인 사회주의의 길을 걸어왔으나 등소평의 개혁 개방 정책으로 중국의 문호는 세계를 향해 열리고 있으며 또한 자본주의의 우수성이 유입됨으로서 21세기의 새로운 발전을 꾀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