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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개토대왕의 삶과 업적 |
★ 영락대왕
- 이름은 담덕(談德)이며 소수림왕의 정치적 안정을 기반으로 최대의 영토를 확장한 정복 군주이다. 그의 완전한 묘호는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이며, 생존시의 칭호는 영락대왕(永樂大王)이었다. 광개토대왕은 약칭이고, 그가 쓴 영락(永樂)이란 연호는 한국에 알려진 최초의 연호이다. 즉위 초부터 대방(帶方) 탈환전을 개시하여 백제의 북쪽을 진격하여서 석현(石峴) 등 10성을 함락하였고, 396년(광개토왕 6: 백제 아신왕) 친히 수군을 거느리고 백제를 정벌하여 58성을 차지하였으며, 왕제(王弟)와 대신 10인을 볼모로 삼아 개선하였다. - 이리하여 한강 이북과 예성강 이동의 땅을 차지하게 되었다. 400년에는 신라 내물왕의 요청으로 5만의 원군을 보내어 왜구를 격퇴시켰으며, 동예(東濊)를 통합하고(410), 신라와는 하슬라(何瑟羅)를 경계로 삼았다. 또 연(燕)나라의 모용 희(慕容熙)를 반격하여 신성(新城) ·남소(南蘇)의 2성 등 700여 리의 땅을 탈취하였고, 405∼406년 후연(後燕)의 모용 희의 침입을 2번 받았으나 요동성(遼東城)과 목저성(木底城)에서 모두 격퇴하였다. 407년 모용 희를 죽이고 자립한 고운(高雲)과는 수교를 맺기도 하였다. 410년에는 동부여(東夫餘)를 정벌하여 64성을 공파함으로써 철령(鐵嶺: 安邊) 이북의 동부여가 고구려의 판도 안에 들게 되었다. 또한 남하하여 한강선까지 진출하였으며, 서쪽으로 후연을 격파하고 요동지역을 확보함으로써 만주의 주인공으로 등장하였다. 그의 능은 소재 미상이나 장수왕이 414년에 세운 광개토대왕비(中國 吉林省集安縣 通溝 소재)에는 왕의 업적이 기록되어 있다. - 치세가 얼마나 훌륭했기에 그토록 많은 정복사업에도 불구하고 태평성대를 이룩. 1. 광개토대왕의 內治(내치) - 삼국사기에서 광개토대왕 재위 22년 동안 광개토대왕이 남긴 내치라고 할 수 있는 것이라면, 재위 2년(392)에 아홉개의 절을 세운 것과 재위 16년(406)의 궁궐의 중축과 수리 그리고 재위 18년(408) 독산성 등 여섯 성을 쌓고 평양 주민을 이주한 것과 그 해 8월에 남쪽 지방을 순행한 것이 전부다. - 먼저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광개토대왕조'의 기록을 제시해 둔다. 2년(392) 평양에 아홉개의 절을 창건하였다. 16년(406) 봄 2월에 궁궐을 중축 수리하였다. 18년(408) 가을 7월에 나라 동쪽에 독산 등 여섯개 성을 쌓고 평양 주민들을 옮겼다. 화려한 광개토대왕의 외치에 비해 내치가 이처럼 초라하게 나타나는 것은 말할 것도 없이 왕의 외치에 따른 업적이 너무나 컸기 때문에 나타난 상대적인 현상일 것이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우리가 알아야 할 사실은 고구려의 기본적인 내치가 왕 이전에 이미 충분히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즉 광개토대왕의 조부인 소수림왕 시대에 이미 국가체제가 전반적으로 정비되었던 것이다. 불교의 국가적 공인, 태학 설립, 율령 반포 등 고구려를 동북 아시아의 대국으로 성장할 수 있게 하는 내부 정비가 이미 소수림왕 때에 이루어졌던 것이다. 광개토대왕은 바로 이러한 기틀 위에서 다져진 힘을 외부로 마음껏 발휘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 그러나 이 짤막한 기록에 보이는 광개토대왕의 내치는 상당한 의미를 내포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392년 평양에 아홉개의 절을 세운 것은, 불교를 국가적으로 공인한 조부 소수림왕의 정책을 계승한 것으로 국가와 국민의 정신적 통일을 꾀하기 위한 종교정책의 일환으로 보인다. 이는 부왕 고국양왕 재위 9년째인 392년 불교를 숭배하여 복을 받게 하라는 교서를 내린 정책과도 맥을 같이 한다고 하겠다. 아홉개의 절을 평양에 창건했다는 사실은 평양의 중요성도 아울러 인식케 한다. 406년 궁궐의 중축과 수리는 커져가는 국가의 규모와 정치의 효율성을 위한 조치로 보이며, 이 역시 부왕 고국양왕이 392년 사직을 세우고 종묘를 수리케 한 정책에 뒤 이은 상당히 중요한 조치로 생각된다. 그리고 408년 7월 나라 동쪽에 독산성 등 여섯개의 성을 쌓고 평양 주민을 이주시킨 조치 역시 매우 의미심장한 조치이다. 이에 따라 평양에 대해서도 모종의 조치가 뒤 있었을 것이다. 그것은 이주 정책을 실시한 바로 그 다음달인 8월에 왕이 친히 남쪽 지방을 순행하고 있는 사실에서 그 가능성을 찾을 수 있다. 그 아들 대인 장수왕이 재위 15년째인 427년에 수도를 평양으로 옮긴 것도 광개토대왕 때 이미 그 시초가 마련되었기에 순조롭게 진행될 수 있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평양의 중요성이 광개토대왕 때에 와서 부각되고 있다는 사실도 위 짤막한 기록들에서 확인할 수 있다. 광개토대왕은 이러한 의미있는 내치와 외치를 통해 영토확장과 국내안정을 동시에 도모했고, 결과적으로 그 아들인 장수왕대에 고구려의 최대 판도가 연출되고 그 후 약 2백년간 태평성세를 이루는 기초가 닦여졌다. - 광개토대왕릉비에 의하면 광개토대왕은 '國岡上廣開土境平安 好太王(국강상광개토경평안 호태왕)'으로 불렸다. 또 國內城(국내성) 부근에서 발견된 牟頭婁墓(모두루묘)의 墨書銘(묵서명)에는 '國岡上廣開土地好太聖王(국강상광개토지호태성왕)'으로 부르고 있다. {삼국사기}에서는 '廣開土王(광개토왕)'이라 하였다. 모두가 국토를 넓힌 왕이라는 점을 강조하기 위한 표현들이라 할 수 있다. - 종래 광개토대왕의 외치에 대한 논의는 북진적 영토확장을 강조하던 경향과 질적인 측면에서 남진적 성격을 강조하는 경향이 대립되는 양상을 보였다. 북진적 성격에 대한 강조는 일제 시대 독립투쟁의 일환에서 민족주의 사가들에 의해 이루어졌고 이는 오늘날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치고 있다. 반면에 고구려 대외정책을 입체적으로 검토하여 광개토대왕의 외치가 주로 남진적 성격이 강하다는 것을 밝힌 연구도 나왔다. 광개토대왕의 외치는 그 후 장수왕의 대외정책의 성격과 평양천도로 미루어 볼 때 남변에 상당히 큰 중점을 두었다고 보여진다. 그러나 남진 정책이 제대로 수행되기 위해서는 서변과 동북변, 즉 중국과 북방 민족에 대한 정책이 선행되어야만 했다. 따라서 광개토대왕의 외치에 대해서는 이 양자를 계기적으로 이해할 때 그 진상을 바르게 파악할 수 있으며, 광개토대왕의 업적도 이에 따라 어떤 왜곡이나 편향없이 평가될 것이다. (1) 서변정책 - 광개토대왕의 즉위 당시 고구려의 서변 정세는 고구려에 상당히 유리하게 전개되고 있었다. 3세기 말에서 4세기 초 西晉(서진) 왕조의 내부에서는 이른바 '8왕의 난'이라는 제왕들간의 정권쟁탈전이 벌어져 결국은 361년 서진이 멸망하고 말았다. 이후 중국 역사상 '5胡 16國(5호 16국)', '南北朝 時代(남북조 시대)'로 불리는 혼란기가 초래되었다. 이 혼란은 그로부터 약 300년 간 계속되었다. - 이러한 정세에 따라 고구려 서변에서는 4세기에서 5세기 초에 이르는 기간에 前燕(전연:337 370) 前秦(전진:350 394) 後燕(후연:384 407) 北燕(북연:407 436)이 잇달아 일어났다 망하는 상황이 이어졌다. 이밖에도 南燕(남연:398 410) 西燕(서연:384 394) 前凉(전양:317 376) 後凉(후양:386 403) 南凉(남양:397 414) 北凉(북양:401 414) 西凉(서양:400 421) 등이 잇달아 생멸했다. 광개토대왕의 서변 개척에 관한 기록으로는 비문에서 永樂 5年(영락 5년:395) 碑麗(거란) 정벌과 영락 17년(407) 후연에 대한 정벌을 찾을 수 있고, {삼국사기}에서는 재위 원년의 거란 정벌을 들 수 있다. (2) 남변 정책 - 고구려의 남변 정책은 광개토대왕의 즉위 초부터 주로 백제를 주된 대상으로 하여 적극적으로 단행되고 있다. 여기에 왜와 신라가 한데 어우러져 상당히 복잡한 양상을 띤다. 기록에서도 나타나다시피 고구려의 남변 정책의 주요 대상은 백제로 보인다. 그리고 여기에 왜와 신라가 얽혀 있는 상황이다. 백제는 일찍이 고구려의 남쪽 변경을 위협해 왔다. 특히 근초고왕은 371년(고구려 고국원왕 41년) 3만을 이끌고 평양성을 공격하여 고국원왕을 전사시켰다. 고구려의 남변 정책에 있어서 백제라는 존재는 눈엣가시와 같았다. 따라서 광개토대왕의 남변 정책이 백제에 집중되어 있는 것도 당연하다 하겠다. 비문에 백제 및 백제와 손잡은 왜를 百殘이나 倭寇(賊)로 표현하고 있는 것도 과거 백제에게 당한 수모를 갚는다는 의식의 발로일 것이다. - 한편 백제는 직접 고구려를 공격하는 외에도 왜와 연계하여 신라를 침공하는 우회전략으로 고구려에 압박을 가했고, 곤경에 처한 신라는 고구려에 구원을 청하지 않을 수 없었다. 396년의 공격으로 한강 유역까지 내려가 백제에 대한 주도권을 크게 장악한 고구려는 400년 신라 구원을 계기로 신라와 주변 지역에 대한 영향력도 확대했으며, 404년 왜를 크게 격파하여 한반도는 물론 해상권에까지도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기반을 닦았다. 장수왕 때 백제를 공격해 개로왕을 살해할 수 있었던 원동력이나 중원 고구려비가 설 수 있었던 힘도 실은 광개토대왕 시대에 이미 마련되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종래 비문의 辛卯年 기사는 마치 왜가 백제와 신라를 신민으로 삼았다는 식으로 해석되었다. 그러나 광개토대왕릉비는 고구려, 특히 광개토대왕의 업적을 기록한 것이다. 왜구의 공적비가 아닌 이상 이런 해석은 합리적이지 못하다. 결국 신묘년 기사의 왜를 둘러싼 여러 논쟁들은 고구려 남변 정책의 큰 틀 안에서 합리적으로 이해해야 제 가닥을 잡을 수 있을 것이다. 앞서도 잠시 언급했듯이 고구려의 남변 정책은 광개토대왕 당시부터 상당히 치밀하게 준비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백제의 침공을 막기 위해 쌓은 일곱개의 성이나 평양 주민의 이주정책 그리고 대중국 정책 등이 모두 계기적으로 연결되어 고구려의 남변 정책에 반영되었다고 할 것이다. (3) 동북변 정책 - 기원전 1세기 말 이후 계속되어온 고구려와 부여간의 통합 전쟁은 5세기 말인 494년 경에 부여왕이 '처자를 데리고 와서 나라를 바치고 항복함'에 이르러 고구려의 승리로 끝나는데, 승리의 결정적인 주역은 역시 광개토대왕이었다. 이 부여에 대해서는 한반도 동북부에 비정하는 종래의 설이 있었으나 최근의 고고 발굴성과에 따른 부여 전기의 왕성 확인 등으로 볼 때 고구려 동북부에서 그 존재를 찾는 것이 합리적일 것이다. 이로써 고구려는 부여의 넓은 지역을 개척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했다. - 광개토대왕 당시의 동북변에 대한 정책의 모습을 이 단편적인 기록만으로 확인하기는 어렵겠지만, 고구려가 서변과 남변에 대한 확장 정책과 함께 동북변에 대한 관심도 결코 소홀히 하지 않았다는 점은 확인할 수 있다. 요컨대 광개토대왕의 대외정책은 서, 남, 동북 모든 방면에 걸쳐 효율적으로 추진되었다고 할 수 있다. 1. 용병술 - 병법에 의하면 장수가 선봉에 서서 위태로운 곳에 먼저 이르면 모든 병사는 더 없이 막강하여진다고 했지만 광개토대왕이야말로 이러한 병법을 실천에 옮긴 명장이었다. 친히 전쟁터에 나간 광개토대왕은 위태로운 형세에 이르렀을 때도 피하라는 부하들의 권유도 뿌리치고 선봉에 서서 병사들과 더불어 싸웠다고 한다. 그런가하면 적은 정예 병력으로 쏜살같이 달려가 공격하곤 했는데 그의 전격전 모습은 구천지상(九天之上)에서 벼락치듯 했다고 한다. 솔선수범하여 병사들과 동고동락하는 지극히 인간적인 지휘관의 참모습을 그는 실천에 옮긴 장수였던 것이다. 2. 통치방법 광개토대왕이 주변국을 정복한 후 피정복국에 취한 정책은 조금씩 달랐다. - 신라, 전에 백제의 요서분국과 중국동해안분국의 장군들, 전에 후연의 유주자사 진과 13군 태수들 군사를 보내어 정복한 후 피정복국으로부터 복속을 맹세받고 인질과 주민들을 포로로 잡아왔다.「고구려왕 담덕은 재위 초년 10월에 남으로 백제를 정벌하여 수십성을 빼앗고, 담덕과 연나라는 백제의 태자와 왕친자 1인을 인질로 받았다. 麗王談德在位初年冬十月南伐濟數十城之入德燕取人質濟太子外王親子一人」燕書「광개토대왕(廣開土王) 원년(A.D 392년) 9월 북으로 거란(契丹)을 쳐 남녀 5백 명을 사로잡고 또 본국에서 흩어진 인구 1만 명을 타일러 데리고 돌아왔다.九月北伐契丹虜男女五百口又招諭本國陷沒民口一萬而歸冬」「8년은 무술년이었다. 정예부대를 백신과 토욕에 보내어 동정을 살피고 막0라성과 가태라곡을 쉽게 차지하여 그곳의 남녀 300여명을 포로로 잡아왔다. 그들은 이때부터 조공을 바쳐오게 되었다. 八年戊戌敎遣偏師觀帛愼土谷因便抄得莫0羅城加太羅谷男女三百餘人自此以來朝貢0事」 고구려에 가장 적대적인 구태백제와 구태백제의 후국인 응신조왜는 군사를 보내어 멸망시켰다. 광개토대왕은 신라, 백제, 가야, 왜를 복속시킨 다음 해상교통의 요지인 대마도에 10국으로 구성된 연립정부인 임나연정을 설치하여 수군(水軍)을 두고 백제, 왜, 신라, 가야를 통제하였다. 「영락(永樂) 10년(A.D 400년)에 3가라(加羅)가 모두 고구려에 속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바다와 육지의 여러 왜인들은 모두 임나(註 임나연정 지칭)에 통제되었으니 열 나라로 나누어 통치하면서 연정(聯政)이라고 했다. 그러나 고구려에 속하여 열제(烈帝)가 명하는 것이 아니면 스스로 마음대로 하지 못했다. 十年三加羅盡歸我自是海陸諸倭悉統於任那分治十國號爲聯政然直割於高句麗非烈帝所命不得自專也」桓檀古記 高句麗本紀」桓檀古記 高句麗本紀 「전략..뒤에 임나(任那:註 임나연정 지역 지칭)를 병합하여 연정(聯政)을 세워 이를 통치케 하였다. 3국은 바다에 있었고 7국은 뭍에 있었다. 後倂于任那聯政以治三國在海七國在陸」桓檀古記 高句麗本紀 임나연정의 역할 중 백제와 일본열도 사이 해상통로 통제는 A.D 404년에 왜(구태백제)가 바다를 건너 고구려의 대방계를 공격하는 등 초기에는 통제에 실패하였으나 후에는 대체로 성공하였다. 임나연정의 역할 중 왜 통제는 A.D 404년에 일본열도로 피신한 구태백제 지배층이 왜를 동원하여 바다를 건너 고구려의 대방계를 공격하는 등 초기에는 실패하였으나 후에는 대체로 성공하였다. 대화왜(大和倭)는 임나연정 시기에 임나왕(任那王)의 요구에 따라 임나(任那)에 신(臣) 또는 장군(將軍)들을 보내었고, 임나(任那)에 파견된 일본부(日本府) 장군들은 임나왕(任那王)의 지시를 받았다. 임나연정의 역할 중 신라(新羅) 통제는 초기에는 성공하였으나 후에는 실패하였다. 신라는 초기에 미사흔(未斯欣)을 임나연정에, 복호(卜好)를 고구려에 각 인질로 보내고 임나연정과 고구려에 복속하였으나, A.D 418년에 인질로 가 있는 복호(卜好)를 고구려로부터 돌려받고, 같은 해 가을 임나연정에 인질로 가 있는 미사흔(未斯欣)을 몰래 빼내 온 후부터 고구려와 임나연정의 통제를 벗어났다. 눌지마립간(訥祗痲立干) 2년(A.D 418년) 봄 정월 왕의 아우 복호(卜好)가 고구려에서 내마(奈麻) 제상(提上)과 함께 돌아왔다. 가을 왕의 아우 미사흔(未斯欣)이 왜국(倭國:註 대마도 임나연정)에서 도망해 왔다. 二年 春正月王弟卜好自高句麗與堤上奈麻還來秋 王弟未斯欣自倭國逃還」 - 광개토대왕 사후 몇 년이 지나지 않은 A.D 416년에 중국동해안지방의 전 백제분국 장군들이 도로 백제에 복귀함으로써 고구려가 중국동해안 지방을 상실한 것과 A.D 418년에 신라가 고구려의 세력권에서 벗어난 것 등은 장수왕의 통치술에 문제점이 있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 광개토대왕의 주변국 정복순서는 고단자들이 바둑을 두는 것처럼 아주 교묘한 수순으로 진행되었다. 만약 이러한 수순에 의하지 아니하고 정복활동을 벌였더라면 광개토대왕의 정복활동은 틀림없이 성공하지 못하였을 것이고 고구려는 백제와 후연 등 주변국의 합공을 받아 멸망했을 것이다. 광개토대왕의 주변국 정벌순서를 정리해 본다. - 광개토대왕은 고구려 주변에서 가장 강력한 나라인 백제와 후연 중 백제를 먼저 정벌하였고, 백제를 정벌하기 위하여 A.D 386년에서 392년 사이 어느 해부터 후연에 조공하여 후연과 백제를 적대관계로 만들고 후연과 고구려를 동맹관계로 만들었다. - A.D 392년 정월에 백제의 측방에 있는 신라를 복속시켜 백제를 북쪽과 동쪽 방면에서 포위하였다. 같은해 7월에 후연과 같이 온조백제를 공격하여 같은해 10월에 온조백제를 항복받았다. 같은해 9월에 훗날 후연과의 전쟁에 대비하여 후연의 북쪽에 있는 거란을 미리 정벌하였고, 그뒤 A.D 395년에 후연과의 전쟁에 대비하여 다시 거란을 정벌하였다. - A.D 396년에는 수군을 금강하류에 상륙시켜 구태백제를 괴멸시키고 이어서 보기병이 한강을 건너 온조백제를 공격하여 항복받았다. - A.D 398년에 북위가 후연과의 전쟁에서 이기고 유주 방면으로 동남진하자 정예군사를 북위의 서쪽에 있는 토욕혼에 보내어 토욕혼을 정벌하므로써 북위를 동쪽(고구려.후연)과 서쪽(토욕혼) 양 방면에서 포위하였고, 또 군사를 동부여의 동쪽에 있는 숙신에도 보내어 숙신을 정벌하여 동부여를 동쪽(숙신)과 남쪽(고구려) 양 방면에서 포위하였다. - A.D 399년에는 구태백제가 응신조 왜 군사를 동원하여 신라를 공격하자 A.D 400년에 이를 물리치고 왜를 정벌한 다음 임나연정을 만들어 신라, 백제, 왜를 통제케 하였다. - A.D 400년에 후연을 사방으로 고립시키기 위하여 유성에서 북평 사이 백제의 요서분국 장군들과 후연의 유주자사 진과 태수들을 귀복시켜 요서지방과 유주를 고구려가 차지함으로써 고구려는 후연을 동(고구려), 서(유주), 남(유성에서 북평 사이 전에 백제의 요서분국), 북(거란) 4방에서 포위하였다. - A.D 402년에 북진에서 단단대령 사이 후연 지역을 빼앗아 후연을 더욱 고립시켰고, A.D 407년에는 4방에서 후연을 공격하여 후연을 괴멸시키고 후연 지역에서 일어난 북연을 위성국으로 만들었다. - A.D 410년에 동부여를 정벌함으로써 만주, 한반도, 일본열도 정벌을 마쳤다. 만주 정벌을 마친 광개토대왕은 마지막으로 중국을 전부 정벌하기 위하여 당시 북중국의 강자이던 북위(A.D 398년에 이미 토욕혼을 정벌하여 북위를 동서쪽에서 포위해 놓았다) 정벌을 준비하던 중에 갑자기 사망함으로써 광개토대왕의 정벌활동은 끝이 났다. 광개토대왕은 한반도에서는 백제, 신라와, 중국쪽으로는 후연, 북위 등 여러 나라들 틈바구니에서 여러 나라와 화친하기도 하고 공격하기도 하며 영토를 늘리는데 성공한 조조와 비교되는 외치에 중점을 둔 명군이라고 보여집니다. 광개토 대왕은 문헌상으로 장수나 모사의 이름이 나오지는 않지만 , 많은 모사들과 특히 첩자를 많이 썼다. 백제는 그들의 정보가 모두 첩자들에 의해서 고구려에 유출되었기 때문에 고구려에게 연전연패했다. 광개토대왕은 이를 통해 백제라던지 왜국, 옥저, 부여, 후연 등을 물리칠 수 있었다. 또한 광개토 대왕의 전체적인 군통솔능력도 감각적이고 임기응변적인 면이 많다. 이 말인즉 전투 전에 미리 온갖 책략을 세워 놓는다던지 한 적이 없다는 것이다. 천부적으로 군사적 능력이 탁월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1. 당시 39세가 젋은 나이는 아니었을겁니다. - 중국을 최초로 통일시킨 진시황은 제국의 영속만큼이나 불로장생(不老長生)에 대한 집착이 강했지만 불로초를 찾았던 진시황은 49세의 나이로 사망했고, 진나라도 수년 뒤 수명을 다했다. 고대 그리스의 평균수명이 19세, 16세기 유럽의 평균수명이 21세였습니다. - 고려 왕실의 혼인 관행은 근친혼이었으며, 1명의 왕에 평균 4명의 왕비가 있었다. 고려 국왕의 평균 수명은 44세로, 고려전기 39.3세에서 고려후기에 이르면 49.79세로 평균 수명이 길어지고 있다. -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조선시대 왕들의 평균수명은 44세이다. 평균 즉위 연령은 24세이고, 평균 재위기간은 19년 2개월이었다. 가장 오래 산 왕은 82세까지 산 영조였고, 그 다음으로 태조가 73세까지 살았고, 세종대왕은 53세에 돌아가셨다. 왕들의 평균 수명이 요즘 일반인들의 평균수명만도 못한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첫째는 운동부족, 둘째는 보약중독이었다. 왕들은 태어나서부터 사망할 때까지 손발을 쓸 일이 거의 없었다. 왕은 세수도 순수 할 필요가 없었다. 사람의 몸은 쓰지 않으면 퇴화한다. 적극적으로 움직이라는 생명의 원리이다. 왕들은 거의 운동은 하지 않았기에 팔다리도 위축됐을 터이며, 그로 인해 심장-폐-신장-간 등 장기의 기능도 떨어졌을 것이다. 혈액순환도 원활치 못해 몸의 각 기관들도 많은 문제가 일어났을 것이다. 많은 왕들이 고혈압이나 당뇨병 등 퇴행성 질환으로 사망한 사실이 이를 잘 말해주고 있다. 왕들은 심신이 피로하거나 몸에 조그만 이상이라도 있으면 몸을 보한다는 약을 먹었다. 그런데 한약재는 기본적으로 산과 들에서 나는 나무나 풀, 뿌리, 열매, 물고기 등을 말려 사용한다. 이런 생약제제는 분리 정제되지 않았기 때문에 정도관리나 불순물 오염이 문제였다. 특히 보약의 주 목적이 불로장생이다 보니 이른바 丹藥(단약)이 선호됐다. 그런데 단약의 재료가 朱砂(주사)나 光明丹(광명단) 이었다. 그런데 단약의 재료가 수은이고, 광명단은 납이다. 보약에 이런 성분을 섞어 불로장생을 바랐으니, 요즘 의학으로 보면 어처구니가 없는 일이다. 2. 일찍 출세하면 일찍 죽는다? - 캐나다 노바스코샤주 케이프 브레턴컬리지의 매캔박사에 의해 `출세와 수명'에 대한 연구결과가 나와 주목을 받고 있다. 그는 미국 건국이래 지난 1978년까지 역대 남성 주지사 1천6백72명의 선출연령(23~81세)과 사망연령(32~1백3세)을 조사한 결과 비교적 젊은 나이에 주지사에 선출된 사람일수록 일찍 죽는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 이처럼 젊은 나이에 출세하면 일찍 죽는 이유는 무엇일까? 조기성취 과정에 따른 과도한 스트레스는 물론 남은 인생에 대한 목표의 상실 때문이라고 한다. 이른바 또 다른 성공에 대한 동기의식의 부족이라고나 할까. 하지만 이러한 정신적굛육체적인 감퇴의 이유와는 별도로 `질투'라는 인간 근원의 악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도 있다. 동양의 알랙산더라 불리우는 `광개토대왕' 역시 만주 벌판에 대제국을 건설했지만 38세의 나이에 요절하고 말았다. 이들의 죽음을 하늘이 질투하여 내린 운명이라 생각됩니다. | |
첫댓글 고구려만 생각하면 가슴이 떨려오면서 그 옛날 드넓은 만주벌판을 누볕을 우리의 광개토대왕님이 간절해 집니다, 좋은글 감사 함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