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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심을 얻어먹고 배부른 내가
배고팠던 나에게 편지를 쓴다
옛날에도 더러 있었던 일,
그다지 섭섭하진 않겠지?
때론 호사로운 적도 없지 않았다
그걸 잊지 말아주기 바란다
내일을 믿다가
이십 년
배부른 내가
그걸 잊을까 걱정이 되어서
나는
자네한테 편지를 쓴다네
‘편지’ 전문
박재가 되어버린 웃음소리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한 여름, 그러니까 1971년 칠월 그믐이었다. 그날은 강홍규가 모처럼 이발도 하고 때도 빼고 광도 낼 겸해서 한국기원을 나서는 중이었다. 한데 한동안 안 보이던 천상병이 한국기원 현관문기둥을 붙잡고 서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뿐이 아니다. 누군가 입다가 싫증나 버렸음직한 색깔의 너덜너덜한 남방셔츠에 배배꼬인 넥타이를 맨 모습은 마치 새끼줄을 목에 달고 서있는 피에로의 모양이라 보는 사람의 목이 숨 막힐 지경이었다. 그런 천상병이 강홍규를 향해 ‘홍규야, 홍규야’를 외쳐댔다. 한동안 모습이 보이지 않아 여러 문인들이 궁금해 했지만 막상 길거리에 쓰러질 것 같은 반바지차림의 몰골을 한 채 서있는 천상병은 하얀 이를 내보이며 허물어질 것 같은 웃음을 지어보였다.
천상병의 하얀 이가 내비치지 않았더라면 분명 비아프라난민과 다름없었다. 검게 탄 얼굴이며 뼈만 앙상하게 들어난 천상병은 분명 병자였다. 그런 천상병이 서울에 올라온 내력을 속사포처첨 얘기했다.
‘지금 부산에서 자전거를 타고 서울에 왔다. 추풍령고개를 넘어왔는데 얼마나 힘이 들던지 혼났다. 추풍령고개를 내려와선 쉼 없이 달려왔지. 자전거는 서울역 근처에 있는 여인숙에 맡겨놓고 왔다.’
상대가 혹시라도 하는 마음인지 자전거를 타고 서울에 왔다는 얘길 자신 있게 했다. 그뿐만 아니라 한무숙씨 남편한테 들려 5백만 원이나 빌려왔다고 했다.
강홍규는 생각했다. 말은 청산유수처럼 하고 있지만 그 돈이 거금인데 무얼 믿고 천상병에게 돈을 주었을까? 턱이 없는 얘기다. 그는 천상병이 미쳤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천상병에게 잠시 기다리라고 해놓곤 몇몇 문인들에게 천상병이 왔다고 전화를 했지만 아무도 나오지 않았다. 난처하니까 피해버린 것이다.
할 수 없이 천상병이 있는 곳으로 내려가서 연락이 안 된다고 얼버무렸다. 그러자 천상병은 피곤하니까 여관으로 가자고 했다. 강홍규의 입장에선 한시바삐 여관이라도 찾고 싶었는데 다행이라 여겼다. 솔직히 이런 꼴을 한 천상병에게 누가 선뜻 방을 내줄 것인가. 어림 반 푼어치도 없다. 그러나 천상병은 꼬깃꼬깃한 오천 원짜리 한 장을 내밀며 어서 가자고 재촉했다. 잠시 미적거리자 천상병은 알았다는 듯 신동문한테 가겠다고 했다. 강홍규도 신동문이라면 천상병을 잘 돌봐줄 것이라 여겼다. 그래서 내일이면 다시 얼굴을 볼 수 있으려니 생각하곤 수송동쪽으로 멀어져가는 천상병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다음 날 출근해 여러 곳으로 수소문했지만 천상병을 만났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초조해진 강홍규는 신동문에게 전화를 했다. 그러나 신동문은 천상병을 만나기는커녕 소식조차 알지 못했다. 그제 서야 혼자서 해결 할 수 없다는 걸 깨닫곤 김국태를 비롯해 여러 문우들에게 연락을 취했다. 그러나 소식은 고사하고 오히려 천상병이 언제 서울에 올라왔느냐고 되묻는 촌극이 벌어졌다. 허탈했다. 서울바닥에선 천상병을 찾는다는 게 어렵다는 사실을 절감했다. 종종 바람과 함께 사라지는 천상병이었기에 아픈 몸을 끌고 잠시 쉬려고 부산에 내려갔거니 여기곤 마음을 놓았다.
한 달, 두 달, 세 달이 지나도 소식이 없자 혹시나 싶어 부산으로 소식을 전했다. 하지만 돌아온 답은 내려오지 않았다는 것이다. 다급해진 문우들은 별별 수단을 동원했지만 찾을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그가 나타나 주기만 기다려야할 판국이었다.
1960년대, 명동에서 김관식이나 천상병의 얼굴을 보지 못하면 허전했다고 했던 시인 박영우의 말처럼 아무 때고 명동에 들어서면 만날 수 있는 천상병, 그가 다시 종로에 터를 잡은 이후 부산바닥이 아닌 한 아무 때고 관철동이나 인사동에서 그의 얼굴을 대할 수 있는 천상병, 그러나 그가 종로바닥에서 얼굴이 보이지 않자 조금씩 초조해했고 길거리에서 죽었거나 바람과 함께 실종되었을지도 모른다고 했다.
천상병이 오래 동안 안 보이자 문우들은 그가 죽은 것으로 간주하기 시작했다. 어느 문우는 그가 행려병자가 되어 이미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를 유고대신 썼는지도 모르겠다고 했다.
이렇게 되자 아직 시집 한 권도 못 내고 이승을 떠난 천상병을 위해 유고시집이라도 내야겠다는 얘기가 돌아 시인 민영이 앞장서서 원고를 모았고 박재삼, 송영택, 정인영 등의 시인도 동분서주했다. 흩어진 시들은 그럭저럭 모아졌는데 시집에 자리할 사진이 없어서 그 또한 걱정을 하는 중에 김영태가 천상병의 얼굴을 기억해내 컷을 그렸다. 시집출간은 성춘복이 맡아 여러 문우들의 도움으로 ‘새’를 출판했다. 물론 부족한 시편들은 부산의 몇몇 문우들이 구해서 서울로 보내왔다.
시집 제목이 새가 된 건 1951년 송영택과 천상병이 동인지 ‘처녀지’를 만들 때 천상병의 시에는 유독 ‘새’라는 시가 많았다는 걸 기억해내고 송영택이 유고집에 ‘새’란 제목을 붙인 것이다.
안장현의 시처럼
‘언제나 날개를 달고 싶어 한 너
그러나 새는 날개를 잃고
날지를 못하는 파닥거림으로
부산 남포동과
서울 명동을’
파닥인 새라고 노래했듯 천상병의 삶이 그랬다.
그는 한 잔의 술에도 자유인이었고 두 잔 의술에도 영원히 정신이나 육체가 자유를 희원希願했다. 그는 머물 곳이 없는 자유인이었고 먹을 것을 구하지 않는 여유로운 게으름뱅이였다. 어쨌거나 그는 태생적 자유주의자였다.
그날 천상병의 시집 ‘새’가 상재되자 김구용이 천상병의 시집무덤에 발문을 썼다.
‘이 사람아, 내 말이 들리는가. 모두 보고 싶어 하네. 글쎄 왜 그러나. 그러지 말게. 그대 노여움을 풀어드려야지. 그대는 책이 나오기까지 무고한 여러 친우들에게 정리로라도 감사하는 말을 해야 하지 않나. 간청일세. 어서 대답 좀 하게나. 잊지 못할 사람아’
그런데, 그런데 천상병은 시집이 상재된 날 서대문에 있는 정신병원에 누워 속으로 희희낙락하며 이렇게 중얼거렸다. ‘내가 이렇게 멀쩡히 살아있는데 내 유고시집을 내, 내 인세는 어떻게 됐는데, 난 아직 계약서에 사인 안 했어. 내가 병원에 나가면 보자고, 응 그리고 술 한 잔도 없이 웬 발문을’
술이 좋아 맞선 본 천상병
천상병, 그는 대학을 중퇴하고 1960년대 초반까지 네 번의 직업을 가졌다. 첫 번째는 잡지사였고 두 번째가 부산시장 공보비서였다. 세 번째와 네 번째는 잡지사와 작은 신문사였다.
그가 잘 나갔다고 여기는 때가 공보비서시절이다. 물론 공보비서라는 직책이라야 원고를 써주는 것이지만 그때만 해도 군사정권시절이니까 대단한 위력일 텐데 그에겐 그런 힘은 있지도 않았고 그런 만용은 생각해본 적도 없었다. 그래서일까. 매사에 초연한 그에게 시장의 부인이 중매를 서 너 번이나 주선했다.
맞선이라는 것보다는 그 자리가 궁금해 처음 나간 날 천상병은 깜짝 놀랐다. 상위에 음식과 술이 그득했기 때문이다. 천상병은 맞선 보러 나온 여자는 뒷전이고 그 여자를 앉혀놓고 편하게 술잔만 기울였다. 그러다보니 맞선이 없는 날은 은근히 상위에 그득한 술들이 생각날 정도였다.
시장부인은 처음엔 여자가 마음에 안 들어 술만 마사나 보다 했는데 두 번째 맞선을 볼 때도 상대여자는 신경도 안 쓰고 술이요, 세 반째 맞선을 볼 때도 술만 마시는 그를 보고선 천상병의 속셈을 알았다는 듯 네 번째 맞선을 끝으로 중매라는 말을 입 밖에 내비치지 않았다. 그게 천상병의 중매전말이다. 그때 술보다는 맞선보러 나온 여자를 아내로 맞아들였다면 그의 인생이 어떻게 변했을까 사뭇 궁금해진다.
그가 공보비서를 그만 둔 건 술 탓이다. 그가 술을 마시면 실수를 하게 되고 그러면 자연스레 파출소를 가게 되다보니 비서실에서도 그의 음주기행을 알게 됐을 것이고 그래서 여러모로 부담을 느끼고 훨훨 나는 자유인이 됐을 것이다.
자유인, 그가 내던진 사표는 결코 남에게 주눅 들지 않고 살아가기 위한 발 디딤이었다.
천상병은 밥보다 더 술을 좋아했다. 물론 김관식도 그랬고 구자운도 그랬지만 천상병은 그들과는 달랐다. 안주는 도통 입에 넣지 않고 술만 마셨다. 그래서일까. 김관식과 천상병은 닮은꼴처럼 안주는 멀리하고 술을 좋아했다. 그래도 천상병의 술 마시기는 김관식하곤 차원이 달랐다.
김관식은 술을 입에 댔다하면 종일토록 안주도 없이 아무 술이건 가리지 않고 마신반면 천상병은 이집에서 막걸리 한 잔 마시고 한 시간이 지나면 다시 다른 집에서 한잔 마시며 곡기를 대신하는 여유를 가졌다.
그렇지만 젊은 날의 천상병도 청탁을 불문하고 며칠이고 술만 마시는 날이 비일비재했다. 술이 있는 자리라면 만사를 제쳐두고 달려가 술을 마셨고 술을 권하면 거절할 줄을 몰랐다. 그저 주는 대로 마셨다.
주머니가 빈 날은 어디에 가면 술친구들이 있다는 걸 기억해내곤 그곳으로 달려갔다. 그렇게 마신 술이 세월을 훌쩍 뛰어넘어 술의 나이테만 채워갔다.
그러다보니 맞선은 옛말이 돼버렸다. 그래도 천상병이 사랑한 여자가 있었다면 믿을까? 믿어야 한다. 분명 서로가 사랑을 주고받은 건 아니지만 일방적으로 짝사랑한 여자가 한두 명은 있었다.
그가 첫 번째로 사랑한 여인은 정치인 박순천의 딸이다. 정치가 뭔지도 모르는 천상병이 어떻게 박순천의 딸을 알게 되었는지는 지금도 수수께끼지만 과년한 딸을 짝사랑한 것만은 사실이다. 그가 ‘문예’지에 당선된 후 추천 완료소감에 자신을 바보온달, 박순천의 딸을 평강공주라고 썼기 때문이다. 그뿐만이 아니라 후배시인 황명걸에게 엄연한 사실이라고 강변했다고 한다.
천상병이 부산에 있을 때의 러브스토리 한 토막.
시립도서관을 출입하던 어느 날, 우연찮게 옆자리에 앉은 소녀를 본 순간, 마음이 진정되지 않고 자꾸만 두근거렸다. 그는 매일같이 도서관에 나가 그 소녀의 옆자리에 앉아 애만 태웠다. 그렇다고 그 소녀에게 사랑한다는 말은 고사하고 아무 말도 걸어보지 못했다. 어느 날 소녀가 보이지 않았다. 도서관에 함께 온 친구들에게 수소문하니 영도로 이사를 갔다는 것이다. 이 소녀가 떠나고 난 후에 그녀가 소설가 김말봉의 딸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가 처음으로 마음 졸였을 첫사랑은 그렇게 시작되고 끝났다.
천상병은 더 넓은 바다로 여행을 떠났다. 바로 현대문학의 편집장인 김수명을 향한 여행이다. 그는 만나는 문우들에게 김수명이 내 애인이라고 주장했다. 김수명이 누구인가. 김수영의 동생이다. 그래서일까. 그녀도 통이 크다. 어지간한 풍설에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다. 천상병이 그녀가 애인이라고 동네방네소문을 냈지만 김수명은 그저 웃기만 했다. 그러니 천상병은 더더욱 신이나 애인이라고 우겼다.
현대문학에서 편집을 보는 그의 친구 박재삼도 천상병이 김수명을 사랑한다는 그 말에 그저 피식 웃기만 했다. 그뿐이 아니다. 김수영은 아예 콧방귀만 뀌었다. 그러니 그 사랑이 흘러가는 구름이 되는 건 당연지사다.
그래도 그는 결혼을 했다. 그가 시립정신병원에 있을 때 목순옥을 만났다. 아니 만났다기보다는 그녀가 천상병의 간호를 했다. 목순옥의 오빠 목순복은 천상병의 술친구다. 천상병이 행려병자로 병원에 입원하자 그녀는 정성으로 간호했고 오빠 목순복은 인연이라고 여겨 천상병과 짝이 되라고 했다. 그녀도 싫지 않았다. 그래서 두 사람은 부부의 연을 맺었다.
천상병의 술 마시기는 꽤 늦은 나이에 시작됐다. 무애나 수주를 봐도 이제 대여섯 살이 될까 말까할 때 술을 마셨는데 천하에 천상병이 겨우 대학교 2학년 때부터 술을 마시기 시작했으니 상당히 늦게 배운 술이다.
늦게 배운 도둑질 밤새는 줄 모른다고 늦게 배운 술이 사람 잡았다. 처음엔 한두 잔, 그러다가 서너 잔, 시간이 가면서 술도 늘었고 늘은 술은 사람을 잡았다. 그가 시인의 길에 접어들면서 시인과 소설가들 그리고 평론가들과 어울리며 마신 술은 그가 제어하기에는 이미 늦었다.
천상병이 삼십대 초입, 평론가 조연현이 자기 집에서 신인작가들에게 술자리를 마련했다. 조연현으로서는 커가는 신인들이 대견스러웠을 것이다. 그날 소설 쓰는 오상원, 김양수, 중견작가인 오영수 그리고 시를 쓰는 구자운을 비롯해 20여명의 문인들이 술을 마시며 환호작약했다. 여기까지는 좋았다. 그런데 무슨 귀신이 씌웠는지 아님 술 귀신이 술자리가 싱겁다고 난투장을 만들라고 했는지 술에 취한 천상병이 느닷없이 조연현에게 핏대를 올리며 이 새끼야, 저 새끼야 하고 삿대질을 해댔다.
조연현이 누군가. 현대문학의 주간 이다. 그뿐인가. '문예'지에 평론을 추천한 것도 조연현이 아닌가. 그런 조연현에게 욕설을 바가지로 해댔으니 이미 사단은 나고 만 것이다. 가장 난처해진 건 오영수다. 그는 현대문학의 편집장이었다. 조연현은 그의 상사다. 그렇다고 누구 편을 들기도 뭣한 상황이라 오영수는 천상병을 다독거려 김양수와 함께 그의 집으로 데려가 술을 마시며 천상병을 나무랐다.
훗날 천상병은 이렇게 회고했다. ‘나를 아껴주시는 분에게 요 모양이니, 나는 평소 얼마나 친구들의 욕을 하며 놀았겠는가. 그러니 흔하디흔한 문학상도 탈수가 없고, 문인의 각종회합의 참석도 안 되고, 여간해서는 원고청탁도 받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니 그 원고료도 많이 받지 못하는 것이다.’ 라고.
그런 그에게도 그림을 그리는 친구가 수월찮다. 자신은 몇 사람밖에 모른다고 했지만 몇 사람이면 어떠랴. 언제 천상병이 수많은 친구를 가져본 적이 있었던가.
그런데 그는 수많은 친구를 가졌다. 그가 시인이라서가 아니라, 그가 술꾼이라서가 아니라, 그는 천상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천상병이기 때문에.
그가 많지 않다고 한 친구들 중에 수화 김환기를 비롯해 박노수, 남관, 천경자, 이준, 문학진, 임호, 김영덕, 하인두, 문우식 등 열 명이나 된다. 이 정도로 당대의 화가를 친구로 두었다면 그는 정녕 시인이 아닌 화가다.
김환기의 조카 중에 소설 쓰는 서근배가 있다. 천상병이 조카인 서근배를 통해 김환기를 알게 되었는지 아님 김환기와 친구사이인 조연현을 통해 알게 되었는지는 알 길이 없지만 여하튼 김환기와 천상병은 막역지간이다.
천상병과 엇비슷한 연대는 아마 천경자와 하인두, 김영덕 그리고 문우식 정도다. 부산에 거주하는 화가 임호는 천상병의 고등학교은사다. 그래서일까. 천상병의 미술점수는 95점으로 일급이다. 이렇듯 적재적소에 화려한 문우나 화가들이 있다는 건 천상병의 복이다.
나는 술을 좋아하되
막걸리와 맥주밖에 못 마신다
막걸리는
아침에 한 병(한 되) 사면
한 홉짜리 작은 잔으로
생각날 때만 마시니
거의 하루 종일이 간다
맥주는
어쩌다 원고료를 받으면
오백 원짜리 한 잔만 하는데
마누라는
몇 달에 한 번 마시는 이것도 마다한다
세상은 그런 것이 아니다
음식으로
내가 즐거움을 느끼는 때는
다만 이것뿐인데
어찌 내 한 가지뿐인 이 즐거움을
마다하려고 하는가 말이다
우주도 그런 것이 아니고
세계도 그런 것이 아니고
인생도 그런 것이 아니다
목적은 다만 즐거움인 것이다
즐거움은 인생의 최대목표이다
막걸리는 술이 아니고
밥이나 마찬가지다
밥일 뿐만 아니라
즐거움을 더해주는
하나님의 은총인 것이다
‘막걸리’ 전문
시인과 술과 클래식
아무리 생각해봐도 클래식은 김종삼의 전매특허다. 물론 천상병도 클래식을 좋아했지만 김종삼처럼은 아니다. 하긴 클래식으로 밥벌이를 한 김종삼인데 웬만한 클래식애호가라도 그 앞에선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을 것이다.
클래식을 얘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시인이 있다. 정운삼鄭雲三과 전봉래全鳳來다. 1951년 부산피난시절, 전봉래는 남포동 지하의 ‘스타’다방에서 약을 먹고 혼미해진 상태로 다방을 나와 어두운 부둣가를 홀로 걷다가 다음 날 국제시장근처에서 싸늘한 시신으로 발견되었으며 정운삼은 다방 ‘密茶園’에서 약을 먹고 자살했다. 정운삼은 고독한 발레리였으며 바흐를 좋아했다. 그는 애인이 떠나간 후 밀다원의 벽화가 되어 벽화처럼 앉아서 죽어갔다.
그가 밀다원에서 자살한 날 김말봉, 조연현, 이봉구가 김말봉이 사준 우동을 먹고 다방에 들어서자 정운삼의 시신 앞에서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 있었다. 그때 허윤석이 조연현에게 정운삼의 접혀진 종이쪽지를 내밀었다. 첫 장에 고별告別이란 제목이 쓰여 있었다.
‘나는 미리 준비하고 있었던 페노발비탈 육십 알과 새콜사나돔 다섯 알을 한꺼번에 먹었다.
나는 진실로 오래간만에 의식의 투명을 얻었다. 나는 지금 편안하다.
나는 지금 출렁거리는 바다 저편에서 나를 향해 웃음을 보내는 나의 애인의 얼굴을 본다. 그리고 지금 나의 앞에는 나의 친애하는 벗들이 거의 다 모여 있음을 본다. 나는 그들이 나를 지켜주고 있는 이 시간 이 자리에서 더 나의 생애를 연장시키고 싶지는 않다.
잘 있거라, 그리운 사람들’
오십일년 일월 팔일
정운삼
어쩌면 海溢이 있을
듯한 저녁때
나는
홀로 바닷가에
섰다
저 어리광을 부리듯 한
푸른 물결에
마음은
드디어 무너져
가는가
먼 바다 저쪽
흰 옷의 신부는
등대같이 섰는데
나는 나를 살라
불을 켜는가
정운삼의 유작 시 ‘燈臺’ 전문
김종삼과 전봉래, 전봉건 형제는 명동의 ‘돌체’ ‘오아시스’ ‘라 뿌륨’에서 고전음악을 즐겨들었다. 그 라 뿌륨다방도 전쟁의 와중에 소실됐지만 조병화가 처음으로 전봉래를 만난 것도 다방 라 뿌륨에서다.
‘나는 바흐와 브람스를 좋아하는데,
바흐는 나왔으나 브람스가 안 나왔다
내일은 브람스가 나올 테지요’
‘희망음악’ 3연
천상병, 그가 클래식을 좋아하긴 했어도 오디오시스템을 준비해놓고 클래식을 듣지 않았다. 그런데 음악을 좋아한다? 참으로 궁금하다. 생전의 김종삼은 방송국에 근무했기에 늦은 밤에라도 소주 한 병 사들고 녹음한다는 핑계를 대고 방송국에 들어가 듣고 싶은 음악을 마음껏 들을 수 있었다. 그러나 천상병은 집이 있나, 돈이 있나. 그렇다고 어엿한 오디오를 갖췄나. 아무 것도 갖춘 게 없을뿐더러 그런 시도를 해보지도 않았다. 다만 그에겐 KBS라디오가 있다. 라디오에서 흐르는 고전음악을 들으며 시를 썼고 술을 마셨다. 그런 그가 바흐를 얘기하고 브람스를 얘기하노라면 마치 클래식애호가가 아닌 전문 꾼이란 착각이 든다. 그만큼 그의 클래식사랑은 대단했다.
종삼형님 가시다
그렇게도 친했고
늘 형님 형님으로 부르던
종삼 형이 드디어 가시다
언제나 고전음악을 좋아했고
사랑한 종삼 형은
너무나 선량하고 순진하던
우리의 종삼 형이 천국에 가셨다
내가 늘 신세졌고
가르침을 주던 종삼 형
참으로 다감하고 다정하던 종삼 형
말 없던 그 침묵의 사나이
언제 내가 죽어서 다시 만나랴?
‘김종삼(金宗三)씨 가시다’ 전문
그래서일까. 김종삼이 세상을 떠난 후 그는 시의 한 행을 ‘언제나 고전음악을 좋아했고’라고 썼다. 그렇게도 고전을 좋아했던 건 두 사람이 닮았다. 다만 김종삼은 천직처럼 고전음악을 들었고 천상병은 다방이나 혹은 라디오로 고전음악을 들었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하지만 시인에게 시가 숙명이듯 술 또한 숙명처럼 따라다녔다. 술을 떠난 두 사람은 시인으로서나 인간으로서나 존재하지 않았다.
천상병이 젊어서 마신 술이 지개에 지고 가지는 못해도 배에 넣고 간다는 식의 술 마시기였다면 김종삼은 어땠을까? 훗날 천상병이 행려병자로 병원에 실려 갔다가 퇴원 한 후에는 맥주 한 두병 혹은 막걸리 한 두병이 고작이었지만 김종삼은 술이 없이는 견디지 못하고 무슨 짓이라도 해서 술을 마셔야 되는 두주불사였다.
천상병을 처음 만난 날을 시인 황명걸은 그 장소가 인사동에 있는 음악다방 ‘르네상스’라고 회고했다. 그렇다고 천상병이 르네상스만 다닌 건 아니다. 명동에도 ‘엠프레스’라는 음악다방이 있어 두 사람은 아침저녁으로 이곳을 오갔다.
그 시절 이규태는 르네상스에서, 정영일은 엠프레스에서 아르바이트로 디제이를 하고 있었다. 더불어 이 다방은 예술계와 깊은 인연이 있다. 그 시절 이곳에 아지트를 삼은 이들로는 요절한 전혜린, 한국화단에 추상표현주의의 비정형인 앙포르멜을 정착시킨 박서보, 시인으로 활동하다가 미술평론으로 전업한 이일은 흰 베레모에 흰 고무신을 신고 두 다방을 오갔다.
명동에는 엠프레스 말고도 음악다방이 여럿 있었다. 물론 시차는 있다. ‘동방살롱’ ‘모나리자’ ‘갈채다방’ ‘음악회관’ ‘청동다방’ 등이 고전음악을 전문으로 했지만 엠프레스에 비해서는 늦게 명동에 입성했다.
어쨌거나 천상병도 이들 다방이 입성하기 전에는 엠프레스에 둥지를 틀었다. 그러다가 여러 다방을 전전하면서 다방에 앉아있는 후배시인들이 술에 굶주려하면 그는 만사 제쳐놓고 문예회관으로 달려갔다. 그때 문예회관에는 잡지 ‘문예’의 사무실이 있었다.
‘밍겔아, 여기 있그라. 내 잠시 문예에 다녀오마. 술값 좀 있어야제. 한 잔 근사하게 하는 기라’
이렇게 말하곤 휭 소리 나게 문예에 갔다 오면 주머니엔 돈이 두둑했다. 그는 문단선배들에게 돈을 얻어와 후배들과 어울려 하루 이틀 술값걱정 없이 마음껏 마셨다. 그 자리엔 항상 밍겔이 함께 했다. 후배 밍겔은 바로 황명걸이다. 많은 이들이 천상병은 잔돈푼이나 얻어 술이나 마시는 걸로 알려졌지만 그의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항상 후배들이 굶주려있으면 염치불구하고 선배문인들에게 손을 내밀어 그 돈으로 후배시인들을 챙겼다. 그만큼 후배를 챙기는 의리파도 드물 것이다.
술집 순례기
폐허의 명동엔 낭만이 모여 있다. 그 낭만은 예술가들이 만들어냈다. 그 중에서도 시인과 소설가들이 낭만의 주인공들이다. 하지만 시인들은 더 많은 낭만의 주인공으로 등장했다. 수주도, 공초도, 박인환도, 천상병도, 김수영도, 박봉우도 시인이다. 그 시인들이 있어 명동은 낭만을 구가했고 폐허에서도 여유가 넘쳐났다. 이젠 모두 불귀의 객이 되었지만.
찌그러진 문이며 때 국물이 줄줄 흐를 것 같은 탁자며 의자 그리고 바람이 불면 눈 깜짝할 사이에 넘어질 것 같은 얼기설기 만들어진 건물은 누추라는 단어가 화를 낼만큼 누추했다. 그래도 그런 주막이 있어 술꾼들은 행복했다. 그 중에서도 명동엔 ‘쌍과부 집’을 비롯해 ‘기차 집’ ‘은성’ ‘할머니 집’ ‘마산 집’ ‘서서먹는 집’ ‘25시’ 등이 있었다. 하지만 ‘쌍과부 집’은 천상병이 아니면 도저히 찾아내기 힘든 집이었다.
명동엔 이름 있는 유명한 집이 몇 개 있다. 송원기원, 시공관, 송옥양장점, 유네스코회관이다. 그런 이름들 사이로 허름하기 그지없는 주막들이 유명세를 떨치며 자리 잡았다는 건 아이러니다.
어쨌거나 쌍과부 집은 1960년의 중반에 문을 열었다. 그것도 송원기원을 내려와 조금만 걸으면 맞은편 골목길 오른편에 자리해서 기원을 나온 문인들은 얘기 몇 마디 나누다보면 그런 술집이 있는지도 모르고 지나치기 일쑤다. 그래 그들이 찾아가는 집이래야 할머니 집이나 마산 집 혹은 서서먹는 집이다.
그럴 수밖에 없다. 그들이 단골로 찾아가는 주막엔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술값이 싸야 했고 안주가 푸짐하면서 맛이 있어야 했고 주모와 말이 통해야 했다. 그러다보니 단골로 정해 놓은 집엔 언제나 외상이 있기 마련이다. 그래서 좀체 단골집을 바꾸지 않았다.
하지만 단골을 정해놓지 않고 아무 때나 술 생각이 나면 이집 저집 찾아들어가 한잔씩 마시고 나오는 천상병에겐 단골집이 있을리 없었다. 그저 이 골목 저 골목을 누비며 눈에 띄는 집으로 들어가 한잔 마시고 나오면 그만이었다. 그러다보니 그에겐 새로운 집을 수시로 찾아내게 된다.
그렇게 발견한 집이 마음에 들면 문인들을 데리고 가 술을 마신다. 쌍과부 집도 그렇게 해서 찾아낸 집이다. 그래서 숱한 문우들이 쌍과부 집을 제집처럼 드나들었다. 김수영이나 박봉우는 명동에 은성이 아니면 술집이 없다고 생각했었는데 쌍과부 집을 안 후 부터는 아예 문턱이 닳도록 드나들었다.
쌍과부 집의 초대 터주 대감 천상병은 아무하고나 인사를 하지도 않았지만 특히 쌍과부 집에 드나드는 박기원하고는 소원한 관계였다. 그를 만나도 인사를 하는 법이 없이 그저 문디 영감장이를 연발하는 것이 그의 버릇이었다.
그는 좋고 싫고를 분명히 했다. 그가 이어령과 남재희가 근무하는 신문사 논설위원실로 찾아간 적이 있다. 물론 반들반들한 손바닥을 내밀고 몇 푼의 돈을 받아오기 위해서였다. 그날 그 자리에 소설가 전광용이 와있었다. 그런데 천상병이 전광용의 얼굴을 마주하지 않고 두 사람에게서 돈을 받아 쥐고 나가려하자 전광용이 천상병의 이름을 부르며 ‘이리와, 내가 돈을 줄게’ 라며 지갑을 꺼냈다.
그러자 천상병이 ‘문디 자식! 내가 언제 니보고 돈 달라 카드나 응’ 하고 내뱉었다. 머쓱해진 전광용의 모습이 어땠을까. 그런 천상병이 화장실에서 박기원과 소변을 보다가 밑에서부터 위를 훑어가다가 고개를 들어보니 한없이 커 보이는 박기원에게 그만 ‘아이쿠 선생님’하고 절을 꾸벅해버렸다. 평소 아는 채도 안 하던 천상병이 인사를 하니 박기원도 웃음을 머금고 돌아섰다. 그날 천상병이 박기원을 보고 인사를 한 건 키가 커서인지 아니면 오줌발이 굵고 커서인지 헤아릴 길이 없다. 헤아릴 수 있는 사람은 천상병 본인뿐이지만.
1960년대는 참으로 어려운 시절이었다. 그런 암울한 시절에도 천상병은 술을 거르지 않고 매일 술집을 순례했다. 그것은 땟국 물이 반질반질한 그의 손바닥 덕분이었다. 남에게 손바닥을 보여주므로 해서 술값을 얻었고 그 돈으로 그는 유유자적하게 술을 마실 수 있었다. 그 다운 천진난만이었다.
상병은 1930년 1월 19일 일본 효고(兵庫)에서 태어났으며 중학교 2학년 때 해방을 맞아 귀국했고 마산에 정착해 마산중학교 3학년에 편입했다. 그는 어린 나이에 엄청난 양의 독서를 해서인지 학교에 입학해서도 쉽게 진도를 따라갔다. 너무 일찍 조숙해버린 천상병이 바라본 세상은 별것 아니었다. 그래서일까. 그에게 술은 시처럼 달콤했다.
이제 천상병은 귀천했다. 그의 자취만이 인사동 ‘귀천’에 소복이 담겨있다.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새벽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노을빛 함께 단둘이서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하면은,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귀천’ 전문
참고한 책들
詩 와 삶-문성당, 천상병
김동리대표작선집 1권-삼성출판사, 김동리
나 하늘로 돌아가네-청산, 천상병유고시집
주막에서-민음사, 천상병 시선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미래사, 천상병 시선
관철동시대-일선출판사, 강홍규
저승 가는데도 여비가 든다면-일선출판사, 천상병
천상병은 천상 시인이다-오상, 천상병
천상병 약력
1930년-일본에서 출생. 간산에서 초등학교를 마치고 중학교 2년 재학 중 해 방을 맞음
1945년-일본에서 귀국한 후 마산에 정착함
1946년-마산중학교 3학년에 편입학함
1949년-마산중학 5년 때 담임교사 김춘수의 주선으로 시 ‘강물’이 <문예> 지에 추천됨.
추천시인은 유치환.
1951년-피난지 부산에서 서울대학 상과대 입학. 송영택, 김재섭과 함께 동 인지 ‘처녀지’를 발간.
<문예>지에 평론 ‘나는 거부하고 저항할 것이 다’를 전재하고 평론활동을 시작함.
1952년-모윤숙의 3회 추천으로 시 ‘갈매기’가 게재되어 시인으로 활동
1954년-서울상대 4년 중퇴
1956년-현대문학에 월평을 연재하면서 번역을 함
1964년-부산시장공보비서생활을 2년 동안 함
1967년-동백림사건으로 6개월간 옥고를 겪음.
1971년-고문후유중과 영양실조로 거리에서 쓰러진 후 행려병자로 오인돼 시립정신병원에 입원함.
하지만 문우들은 이 소식을 모르고 3개월이 지나자 죽은 것으로 여겨 민영, 성춘복, 송영택
등의 노력으로 유고 시집 ‘새’가 발간됨. 훗날 김종해박사의 노력으로 문단에 소식이 알 려짐.
1972년-친구 목순복의 누이동생 목순옥과 결혼.
1978년-시집 ‘주막에서’ 민음사 간행.
1984년-시집 ‘천상병은 천상 시인이다’ 오상출판사 간행.
1986년-천상병문학선 ‘구름 손짓 하며는’ 도서출판 문성당 간행.
1987년-시집 ‘저승 가는데도 여비가 든다면’ 일선출판사 간행.
1989년-삼인시집 ‘도적놈 셋이서’ 도서출판 인의 간행.
시 선집 ‘귀천’ 도서출판 살림 간행.
1990년-산문집 ‘괜찮다 괜찮다 다 괜찮다’ 도서출판 강천 간행.
1991년-시 선집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미래사 간행.
시집 ‘요놈 요놈 요 이쁜 놈’ 도서출판 답게 간행.
1993년-동화집 ‘나는 할아버지다 요놈들아’ 민음사 간행.
시집 ‘새’ 도서출판 답게 번각 간행.
1993년-4월 28일 오전 11시 20분 의정부 의료원에서 별세.
1993년-유고 시집 ‘나 하늘로 돌아가네’ 도서출판 청산 간행.
첫댓글 그리운 이름들, 김수영, 박봉우, 김관식, 김종삼, 신동문... ..., 이규태는 다방 르네상스에서, 정영일은 엠프레스에서 디제이를 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