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안의 『색, 계』(3)
『색, 계』의 문화적 두터움
『색, 계』의 배경에 1940년대 초 상하이가 놓여 있어 영화의 ‘문화적 두터움(cultural thickness)’을 더해 주고 있다. 『색, 계』에 재현된 1942년의 상하이는 상당히 다채롭다. 특히 국제화 수준이 남다르다. 행인은 말할 것도 없고 커피숍과 보석점 등의 직원부터 교통경찰, 레스토랑의 피아니스트 등에 이르기까지 외국인의 모습이 심상(尋常)하다. 주인공도 수시로 외국인 점원에게 영어로 의사소통한다. 심지어 배급으로 연명하는 줄 선 외국인들과 가창(街娼)으로 보이는 거리의 외국 여성까지도 눈에 띈다.
그러나 꼼꼼하게 보면 『색, 계』에서 보여주는 상하이 모습은 1990년대에 크게 유행한 ‘상하이 노스탤지어’의 상상과 크게 다르지 않다. 큰 길의 모습은 난징루(南京路)에 국한되어 있고 주인공의 패션은 대형 화보 잡지 『양우(良友)』의 수준을 넘어서지 못한다. 모던 치파오(旗袍) 여성과 서양식 정장 남성의 조합은 모던한 ‘재자+가인’의 패턴을 창출했다. 수십 곳의 치수를 재야하는 모던 치파오는, ‘순수하고 소박한 올드 상하이’(푸단대 陳思和 교수)가 끼어들 여지가 없는 억압으로 변모해 그 속의 사람들이 숨쉬기 어렵게 만든다. 리안이 구성한 상하이는 영화의 주요한 공간인 침실과 마찬가지로 ‘상상된 공간(imagined place)’인 것이다.
상상된 노스탤지어
여기에서 우리는 ‘상상된 노스탤지어(imagined nostalgia)’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상하이 노스탤지어는 1990년대 이래 중국 전역을 풍미하고 있는 중요한 문화현상 가운데 하나이다. 1930-40년대 국제적 수준에 올랐던 중국의 자본주의는 사회주의 중국 30년 동안 ‘숨은 구조(hidden structure)’로 억압되었다가 개혁개방 시기에 들어 부활했다. 1990년대 중반 이후 중국 전역에서 일어난 ‘상하이 노스탤지어 붐’은 그 부활의 한 형태라 할 수 있다. 그것은 사회주의 이전의 상하이, 특히 1930-40년대 상하이, 즉 ‘올드 상하이’를 주요 대상으로 삼고 있다. 노스탤지어는 상하이에만 국한된 현상이 아니다. 그것은 도시민의 소비욕망을 겨냥하는 지구적 자본주의가 지닌 상업전략의 핵심이기도 하다. 그것은 역사와 기억을 소비 상품으로 유통시킨다. 그래서 수많은 중국인들은 부자의 꿈을 안은 채 공부를 하고 주식과 부동산 투자를 하며 살아간다. 이는 또한 사회주의 이전의 자본주의 착취에 대한 ‘기억이 배제된 노스탤지어’이기도 하다. 그러기에 상하이 노스탤지어 현상은 탈역사적이고 탈영토적이다.
상하이 노스탤지어의 빛과 그림자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노스탤지어 현상 이면에 존재하는 소수자(minority) 또는 타자화(othernization)에 대한 ‘역사들’과 ‘또 다른 기억’이다. 그것은 노스탤지어의 주체들에게는 지워버리고 싶은 역사들이고 ‘망각하고 싶은 기억’이다. 개혁개방과 ‘사회주의 현대화’의 구호에 가려진 ‘중국적 맑스주의’의 실험이 전자를 대표한다면, ‘동방의 파리’라는 기표에 가려진 소외된 계층의 존재는 후자의 주요한 측면이다. 조계와 이민의 도시 상하이에서, 외국인은 중국인을 타자화시켰고 똑같은 이민이면서 먼저 온 사람은 후에 온 사람을 주변화시켰으며 중상층은 하층을 소외시켰고 자유연애와 모던 신여성의 등장에도 불구하고 남성은 여전히 여성을 억압했다. 그리고 개혁개방 이후 시장은 혁명을 포섭했고 자본주의는 사회주의를 통합했다. 그러나 다음의 의문은 여전히 남는다. 설사 사회주의 실험이 실패했다 하더라도, 사회주의 이외의 역사, 다시 말해 자본주의의 역사는 아름답고 순수한 기억일까? 이런 문제설정(problematic)은 ‘순수 과거’의 밖에 존재하는 ‘현실 과거’를 되살리는 작업을 요구하게 된다. 그 작업은 때로는 기억을 위한 투쟁이 될 수도 있지만, 때로는 기억의 고통을 수반하기도 한다. 거대서사에 대한 미시서사의 탐구, 정치사에 대한 생활사의 복원, 전통과 근현대의 중층성에 대한 고찰, 근현대성의 양면성에 대한 성찰, 포스트식민주의적 접근 등은 바로 이런 문제의식과 연결되어 있다.
외국인 조계와 이주를 통해 중국의 새로운 중심으로 부상한 모던 상하이는 1930-40년대 이미 세계적인 국제도시의 이름을 날렸다. 1843년 개항 이래 상하이에는 세계 각지에서 오는 이민의 행렬이 끊이지 않았다. 나라 안팎에서 전쟁의 포화가 그치지 않는 가운데, 상하이는 정치적 이민의 ‘세외도원(世外桃園)’이 되었다. 1917년 러시아 10월 혁명이 발발하자, 수만 명의 러시아 귀족과 부르주아들이 상하이로 이민했고, 제2차 세계 대전 기간에 히틀러가 유대인을 박해하자 상하이는 유대인들의 피풍항이 되어, 유럽을 탈출한 1만 8,000명에 달하는 유대인들이 대거 상하이로 이주해 들어왔다. 당시 상하이 외국인 이민자의 수는 10만 명에 달했다. 상하이는 ‘전 세계 모험가들의 낙원’이라는 명성을 얻게 되었다.
그러나 1949년 이후 그 영광을 홍콩에게 넘겨주었다. 식민지였으면서도 20세기 자본주의 정점의 하나를 구축했던 홍콩의 발전은 상하이의 후견 아래 이루어졌던 셈이다. 1930년대 서양인들에게 ‘동양의 파리’ 또는 ‘모험가들의 낙원’으로 일컬어졌던 상하이가 왕년의 영광 회복을 선언하고 나선 것은 1990년대 들어서였다. 푸둥(浦東) 지구 개발로 뒤늦게 개혁개방을 실시한 상하이는 10여년 만에 중국 최고 수준의 발전을 이루는 저력을 과시하고 있다. 특히 2008년 베이징 올림픽에 이어 열린 2010년 세계박람회는 21세기 초강대국으로 비상하고픈 중국의 염원을 상하이라는 특수한 공간에 투사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동방명주와 와이탄(外灘) 야경 그리고 신톈디(新天地) 등으로 대표되는 상하이의 경관을 보면서 그 이면에 가려있는 농민공과 실직 노동자 등 하층 인민들의 모습을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