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巡狩(순수)'란 천자가 제후의 封地(봉지)를 직접 순회하면서 현지의 통치상황을 보고받는 의례로 巡行(순행)이라고도 하며 이를 기념하여 세운 비석을 순수비라고 하는데, 진흥왕순수비의 비문 속에 나타나는 巡狩管境(순수관경)이란 구절에서 비롯되었다.
신라 진흥왕은 가야 소국의 완전병합, 한강 유역의 확보, 함경도 해안지방 진출 등 활발한 대외정복사업을 수행하여 광범한 지역을 새로 영토에 편입한 뒤 拓境(척경)과 순수를 기념하여 비석을 세웠다.
북한산비는 신라의 한강 하류 진출을 밝혀 주는 비문이며, 561년에 세워진 창녕비는 신라의 대가야 정복 사실을 증명하는 순수비, 568년에 세워진 것으로 알려진 황초령비, 마운령비는 신라의 함흥지방 진출을 밝혀 주는 비문으로 알려져있다.
현재 남아있는 진흥왕 순수비는 이번에 소개하는 북한산비와 함께 창녕비(국보 제33호), 그리고 북한지역에 위치한 황초령비와 마운령비(모두 북한의 국보로 지정되었음)가 있으며, 그동안 고려 태조 왕건이나 무학대사의 비로 알려졌던 북한산 순수비는 조선후기 금석학자 추사 김정희에 의하여 진흥왕 순수비임이 밝혀졌다.
<국립중앙박물관에 전시중인 북한산 순수비 진품>
<순수비에 새겨진 글자를 판독하여 적어 놓았다. 윗부분 일부는 마모가 심하여 읽을수 없고, 군데군데 글자판독도 어렵다.>
<옆면의 3줄 새김중 오른쪽에는 병자년(1816년) 7월 김정희(추사), 김경연이 와서 비문을 읽었다. 라고 씌어있고
왼쪽에는 정축년(1817년) 김정희, 조인영이 함께 남아있는 글자 68자를 심정하였다고 새겼다.
가운데 줄에는 기미년(1859년) 8월 20일 용인사람 이제현이라고 새겨져있는데 추사 김정희의 판독과는 무관한 낙서(?)로 보인다.>
<뒷면에는 6.25전쟁중 상흔으로 보이는 총탄자국이 선명하다.>
<북한산 비봉에는 문화재청에서 모의 비석을 세웠다. 진흥왕 순수비가 있어 비봉이라고 부르는 까닭이다.>
< 계 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