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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8월 27일 일요일 맑음 이었다가 오후늦게 구름이 낌
산행거리 25.8Km(접속구간 조침령 임도1.3Km포함)
잃어버린 이름 오색령을 모든 사람이 부르기를 바라면서..
양양 연구에 일생을 바치는 이기영님이라는 분이 있다. 그분은 옛 자료와 여러 문헌을 종합하여 한 연구 논문을 발표 하였는데, 결론은 지금의 한계령이라 부르는 고개는 원래 한계령이 아니라 다른 이름으로서 ,임란 전까지는 소솔령(所率嶺), 임란 후에는 오색령(五色嶺)이라 불리웠었다고 한다. 본래 한계령이라는 이름은 지금의 남교리에서 대승령에서 능선을 따라가다가 안산(鮟山) 즉 한계산성을 따라, 지금의 귀때기청봉 으로 이어지는 능선의 한 고개였고. 오색령보다 1Km이상 북쪽에, 지금은 희미하게 잔영만 남아있었던 고개였다. 또한 원 한계령은, 안산(한계산성)에서 대승폭포, 귀때기청봉, 소승폭포로 이어지는 기암 절경지로서, 예로부터 풍류객들과 군인들만이 즐겨 찾던 구간에 있었던 고개로, 일반인들은 길이 험하여 주로 이용하지 않았고, 지금의 오색령 북쪽의 이름없는 군사령이었다.
원래 오색령의 이름은 조선 초기만해도 소솔령이었다. 所率嶺이란 여러 개를 거느리는 으뜸고개라는 뜻으로,왜란을 거치면서 군사적 이유로 오색령으로 바뀐다.
1589년 강원도 관찰사를 역임한 八谷 具思孟의 "팔곡집(八谷集)"에 寒溪山 詩의 주석에 의거하면. “양양에서 소솔령(所率嶺)을 넘어 인제로 가던 사람들이, 한계사(寒溪寺: 장수대 인근의 절)에서 투숙함으로, 이들을 접대하기 힘들고 감내할 수 없어, 스님들이 절을 버려두고 떠나 절은 허물어져 빈터만 남아있다”라고 적고 있다. 또한, 秋江 南孝溫의 "遊金剛山記"에 “五色驛을 출발하여 所率嶺을 올라 보니 여기를 소금강산이라 부르는 것이 빈말이 아니구나, 하고서 嶺 위에서 동해를 하직하고 원통을 지나 麟蹄縣에서 묵었다"라는 기록이 있다.
이를 종합하면 오색에서 장수대(한계사)를 지나 인제를 통하는 지금 한계령의 옛 이름은 소솔령이었다.
선조실록 권72 기록에 의하면 , 1596년 2월 1일(戊戌)에 비변사가 아뢰기를 “적병이 경상도의 寧海 연해를 따라 북상하게 되면, 평해와 울진이 가장 먼저 적을 맞이할 것입니다. 이곳을 만약 지키지 못하여 적병이 깊숙이 영동으로 침입하면, 추지령(楸池嶺), 미수파(彌水坡), 오색령(五色嶺), 백봉령(白鳳嶺) 등의 곳은 모두 영(嶺)을 넘는 길이 될 것이니, 방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라고 적혀 있다.
그토록 이용이 많았던 소솔령(所率嶺)이라는 고개명은,이 때부터 모든 기록과 지도에서 사라지고 오색령(五色嶺)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한다. 이는 임진왜란을 치르면서 복잡한 이근처의 고개명칭, 소파령(미시파령 지금의 미시령), 소솔령(오색령), 소어령(지금의 북암령 소동라령으보 불리기도 함) 등의 이 세 고개의 이름 앞자가 '소'자 시작하여, 비슷한 이름을 헷갈려 함으로, 군사적으로 중요했던 소솔령을 혼돈으로 쉽게 구별하고 , 고개의 위치를 쉽게 기억하기 위해 오색령으로 고쳐 불렀다.
후에 金壽增의 寒溪山記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1691년(辛未) 5월 9일(甲午)의 記文 중에 “寒溪寺 옛터를 지나니 북쪽 편의 모든 산봉우리들은 곧게 솟아 있고, 나무들이 무성하여.... 개울가 돌 위에서 점심을 먹은 후 , 지나 가는 스님을 만나 어디로 가느냐고 물으니 곧 대답하기를 五色嶺을 경유하여 襄陽으로 가는데 거리는 약 80리가 된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위에서 우리는 양양에서 오색을 거쳐 한계사 터를 지나 인제로 가는 영이 소솔령임을 기록을 통해 확인했었다.
뿐만 아니라, 養窩 李世龜) "양와집(養窩集)"에 1691년(辛未) 10월 3일(甲申) 東遊錄에도 “조침령의 북쪽은 오색령이고, 그 동쪽은 襄陽이고, 서쪽은 獜蹄이며, 오색령 북쪽에 미시파령을 이룬다.”라고 적고 있으며, 息山 李滿敷의 "錦江山叢記"서두에 “대체로 우리나라의 산은 백두산에서 비롯되었으며 白頭山의 落脈이 남으로 흘러 철령에 이르며 남북의 경계를 이룬다. 이곳에서 동으로 흘러서 추지령·쇄령·온정령 등 세 고개가 팔백리를 관통하며, 온정령에서 남쪽으로 삼십리 지점이 금강산이다. 금강산은 동해 바다를 따라 백리를 내려가 진보령이 되며 진보령에서 오십리를 더 가면 석파령, 그곳에서 삼십리를 더 가면 미치령, 다시 육십리를 가면 한계산이 되고, 다시 삼십리를 가면 오색령에 이르며, 이곳에서 구십리를 가면, 오대산에 이르고, 삼십리 거리에 대관령이 되고, 사십리 거리에 백복령이 되고, 백리 거리에 태백산과 황지가 된다. 이것이 금강산을 중심으로 한 그 위 아래의 형승이 막히고 험준한 모습의 대략이다.”라고 적고 있다.
오색령이 과거의 소솔령이 분명하다고 할 것이며 오색령은 당시에도 양양과 인제를 연결하는 가장 중요한 영로로 지금의 한계령임을 알 수 있다. 아울러 필자는 오색령으로 바로잡고자 한다.
등산지도 개요
이런 저런 연유로 역사를 사랑하고 인정하려는 어설픈 지식인이라고 자부하는 필자는, 한계령이라고 부르지 않고 오색령이라 부르고 싶다. 잃어버린 이름 오색령에 도착한 것은 새벽 4시 20분쯤이었다. 서울에서 2시 반에 출발하여 졸린 눈을 억제하고 오색령 휴게소에 도착했지만, 휴게소 주차장은 막아서 들어 갈 수 없다, 차를 다시 몰고 필례약수 입구에 있는 들입을 확인하고, 세울 만한 적당한 곳을 찾느라. 20여 분을 허비하고 잠시 숨을 고른 뒤, 10여분 걸어서 들입에 도착하니 정확히 새벽 5시다.
아래 사진 촤측으로 가면 작은 초소와 함께 철창이 있고 철창 끝을 돌아 절개지를 다라 올라가면 바로 대간 길에 닿는다.
앞선 선탑자들이 꼭두새벽에 일찍 등반하는 이유은, 단목령까지 최소 7시 이전에 도착해야 국공을 피할수 있기 위함이었다면, 우리는 단목령을 앞두고 우틀해 돌아가로 계획하였기에, 이 곳 오색령의 공원 지킴이 초소만 6시 이전에 통과하면 된다고 판단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 코스의 경치가 너무 매력적이라 절대 놓칠 수 없어서 통틀 무렵에 시간을 잡았다.
출발하자 평탄한 길이 이어지다가 곧바로 암릉지대가 나타나니 랜턴이 필요 없을 정도로 뚜렷하게 앞이 보인다. 여기서부터는 암릉지대가 나타난다, 혹여 아내가 어려워할까봐 자일을 미리 준비 했지만. 모든 구간이 여분의 자일을 사용할 필요 없이 잘 구비되어 있다. 괜한 노파심이었나 보다.
일출이 시작되어 사진을 몆장 찍어 본다.
암릉에서 보여지는 사방의 풍광은 정말 감탄을 자아낼 만 했다. 특히 암릉구간에서 동편으로 십이당계곡, 선녀탕쪽은 수많은 뾰쪽 바위들이, 북쪽에는 대청봉 소청봉 끝청봉 구루포기산 그리고 서쪽에는 가리봉산 능선들이 하나같이 아름다워 눈을 뗄 수 가 없다.
아래쪽 사진 정면이 동쪽의 가리봉이다.
우로부터 대청봉 중청봉 끝청봉, 그리고 오색령이 보이고 44번국도가 보인다.
이런 바위능선이 거의 한시간 가까이 이어지고, 1158 고지를 넘자 마자 . 드디어 안부(鞍部)가 나타난다.
이곳에서 대간 길은, 이 사진 우측으로, 그러니까 남진할 때는 급좌틀을 해야한다. 사진의 앞쪽 작은 바위방향으로 가면 용수골로 가는 2시간 짜리 대형알바를 하게 된다.
조금 더 가서 아침 예배를 드리고 식사를 한다. 사진 뒷쪽으로 가야 대간 길이다. 앞쪽으로 오면 안 된다.
드디어 암릉 구간이 지나고 상당히 긴 조릿대구간을 지난다. 조릿대가 죽었는지 아니면 이맘 때면 색이 원래 그런건지 누렇게 되었다.오늘은 우리보다 앞서 아무도 지나가지 않았나 보다. 등산 스틱으로 엄청나게 많은 거미줄을 제거하면서 가야 했다.
드디어 평평한 휴식장소가 나오고 유명한 UFO바위 앞에 잠깐 앉았다. 이곳도 사방에 조릿대 천지다. 남진방향 좌측으로 가면 12담계곡 으로 갈 수 있다.
망대암산으로 향하는 길은 평범하고 오르락 내리락이 심하지 않다. 그러다가 망대암산 직전에부터 상당히 치고 올라 간다.
아내가 여보 이거 통풍바위네! 하면 까르륵 웃는다. 그럴 듯 하다. 여기서 조금 여유롭게 않아 있으니 정말 바람이 시원하게 우리를 감싸고 바위로 지나 간다. 한 번 웃는다. 웬 병을 저리 버렸누! 등반 자격없는 사람 같으니라구!
망대암산(望待巖山:1236m)에 왔다.
망대암산은 인제군 동쪽 21km 지점, 양양 서쪽 18km 지점에 있다. 북동쪽에 최고봉인 대청봉, 남쪽에 점봉산, 남서쪽에 시선봉(侍仙峰) 등이 같은 산군 안에 있는 형제봉으로서 삼각형을 이루어 대좌하고 있다. 산은 정상이 첨봉(尖峰)이고 망대암과 금표암 등 기암괴석으로 덮여 있다. 소양강과 양양 남대천의 분수령으로서, 사면에서 발원하는 하천이 좁고 긴 협곡과 폭포, 벽담(碧潭)을 이룬 데다 삼림이 울창하여 설악산국립공원의 일부를 이룬다.
점봉산 능선에서 발원한 천이 여신폭, 12폭, 선녀탕등의 명소가 되어 주전골이 오색약수를 경유 남대천으로 유입된다. 주전골 바위굴에서 사전(私錢)을 주조하려고 놋그릇을 부셔 위조 주전을 만들다 적발되어 이후로 이곳을 주전골이라 하였다. 망대암산은 이를 망 보며 대기하는 바위 봉우리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과연 이름 그대로 바위봉이 일품이다. 남쪽으로는 점봉산 능선이 멋지게 보이고 동으로는 가리봉 주걱봉 삼형제 봉이 보이고 동으로 대청봉 소청봉 끝청봉이 보이고 양양읍도 보인다.
아래 사진은 망대암산에서 본 점봉산 능선.
망대암산의 야생화
동쪽 바위에서 본 점봉산 쪽 경관.
이좋은 경관을 못보고 새벽에 왔으면 평생 후회할 뻔했다. 망대암산의 금표암 앞에서 찍은 사진에서 보이는 대청봉의 뒷배경 . 너무가 아름답다. 멀리 인제 가리산 까지 조망된다.
망대암 꼭대기에 올라가서 찍은 사진 왼쪽에 귀때기청봉도 보인다.
망대암산을 홀로 남겨두고 점봉산 오르는 능선에서 본 망대암산. 맨 앞의 바위가 있는 봉우리가 망대암산이다.
점봉산(點鳳山:1423m에 올랐다.
점봉산은 인제군 기린면과 양양군 서면에 걸쳐 있는 산으로. 잠깐 허리를 낮춘 한계령을 사이에 두고 설악산 대청봉과 당당하게 맞장을 뜨며 봉황이 살았다 하여 점붕산(點鵬山)이라고도 하며, 옛이름은 덤붕산이었다. ‘덤’은 둥글다는 뜻으로 이것이 한자화한 것이다. 부드러운 육산과 날카로운 암봉이 조화를 이룬이 산은 등벙산 또는 등붕산(登朋山)이라 불리기도 한다. 설악산국립공원 중 남설악의 중심이 되는 산으로, 북동 쪽에 대청봉이 있고, 북서쪽에 가리봉, 남서쪽에 가칠봉 등이 솟아 있다. 산의 동쪽 비탈면을 흘러내리는 물은 주전골을 이루어 오색약수를 지나 백암천에 합류한 뒤 양양의 남대천으로 흘러든다. 산자락에 12담계곡, 큰고래골, 오색약수터,망월사,성국사터 등 명소가 많으며, 오색약수를 거쳐 오르는 주전골은 가을의 단풍 천하명소로서 흰 암반 위를 흐르는 계곡물과 단풍이 어우러져 매우 아름다운 풍경을 빚어낸다.등산로는 약수터와 온천이 있는 오색에서 시작하고 정상에 오르면 대청봉,가리봉 등 설악산의 영봉과 푸른 동해가 한눈에 들어온다. 2028년 까지 입산이 금지되어있다. 그때 되면 내 나이는 67세인데 그때까지 도저히 기다릴 수 없다. 산 일대에 펼쳐진 원시림에는 젓나무가 울창하고, 모데미풀 등 갖가지 희귀식물을 비롯하여 참나물,곰취,곤드레,고비,참취 등 10여 가지 산나물이 자생한다. 특히 한반도 자생식물의 남북방 한계선이 맞닿는 곳으로서 한반도 자생종의 20%에 해당하는 8백 54종의 식물이 자라고 있어, 유네스코에서 생물권 보존구역으로 지정하기도 하였다. 주전골 성국사터에 보물 제497호인 양양 오색리 삼층석탑이 남아 있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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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상에 올라 설악의 장대한 연릉과 동해바다의 드넓음을 조망하는 것은 점봉산 산행의 백미다.
정상에서 본 경치 양양 시내가 보인다.
설악산 방면 경치
동남쪽 풍경이다.
점봉산이 입산이 금지된 이유는 이곳이 한반도에서 자라는 식물의 남북방한계선이 만나는 곳이라는 점이다. 북에서 서식하는 바람꽃 류가 설악산을 거쳐 이곳에 내려와 있으며 남에서 자라는 모데미풀이 여기서 멈춘다. 목본식물로는 북에서 자라는 이노리나무를 이곳에서 찾아볼 수 있으며, 하늘소의 숙주로도 알려진 서어나무의 경우 설악산과 함께 이곳이 북방한계이다. 남쪽 도서지방의 난대림 식물을 제외한 대부분의 식물을 이 한곳에서 볼 수 있는 자리이다. 입산이 금지된 것을 이해 할만 하다. 그러나 대간꾼에게는 양보할 수없는 곳이기도 하다. 입산이 제한적으로 허가제로 했으면 한다.
북극의 식물들이 태고로부터 백두대간을 타고 내려오고 남쪽의 친구들이 올라와 한 데 사는 식물들의 만남이 이루어지는 곳이다.
송암산(757m)으로해서 화채봉(1300m)을 끼고 화채능선을 길게 누이고, 설악산 대청봉(1707.9m)에서 그 위용의 최고치를 드러내면서 거만하게 양양과 동해바다를 호령하다가, 중청봉(1666)과 끝청봉(1610m)을 지나 오색령(1003.6m)겸손하게 허리를 낮추는가 싶더니, 다시 활처럼 빙글 허리를 돌려 망대암산에 이르다가 다시 꿈틀거려 점봉산에 와서는 그의 장대함의 극치를 이루니, 점봉이야 말로 더 머물고 싶은 충분한 이유가 있는 곳이 아니겠는가? 시간이 허락하면 1박을 하면서 아름다움을 마음 속에 각인하고 싶다. 그러나 정상를 아쉬움을 남긴채 화살표 방향으로 하산을 한다.
점봉산에서 1.5km정도 급경사길을 가다 보니 아가시 한 분이 겁도 없이 혼자서 산행 중이다. 오색약수에서 올라 오는 길이란다. 사람이 너무 없어서 반갑기는 한데 조금은 걱정된다. 오색삼거리를 지나
평범하기 그지없는 오솔길 같은 길을 지난다. 푹신하기 그지 없다. 오색사거리를 건너서
단목령을 향해 간다. 가까이 갈 수록 더욱 두근거린다. 과연 국공을 피 할 수 있을까? 없을 가능성이 많지만 하는 찰라에..
일단의 완장을 찬 무리를 만나니 가슴을 쓸어 내린다. 그냥 담대하게 부딪치려고하니 "학술조사단"이라는 완장을 차고 우리를 희끗 보더니 눈총을 날린다. 뭔 얘기를 할 듯하다가 그만 둔다 나중에 알고보니 그 중 두 명은 국공이었다.
이런 계단이 나오면 단목령 직전이다.
이계단을 끝을 지나 조용히 길도 없는 곳을 무조건 우틀하여 나가니, 진동리에서 올라오는 길을 만난다. 올라오는 능선을 따라 조금 오니 단목령 초소다 . 당연히 국공은 없다. 사진을 찍다가 CCTV에 잡혔나 보다. 안내 멘트가 니온다. 얼른 조침령 방향으로 간다.
단목령(檀木嶺 809m). 박달나무가 많아 박달령이라고도 불린다.박달령은 점봉산에서 내려온 잘록한 고개목으로 조침령, 북암령과 마찬가지로 양양군 서면 오색의 마산에서 인제군 기린면 진동리를 잇는 고개이다. 1217년(고려 고종 4년) 김취려 장군이 거란군을 제천, 원주에서부터 추격하여 이 곳 박달령에서 섬멸했다고 양양지방에 전해내려 온다. 그러나 실제로는 1216년에 침범한 거란군을 1217년에 김취려 장군이 전군병마사가 되어 충북 제천군 박달령에서 크게 무찔러 격퇴시킨 것으로 옛 문헌에 적혀 있는 것으로 보아, 고개 이름이 같은 것에 주목한 누군가 이야기를 와전시킨 것이 지금껏 전해 내려오는 듯하다.
옛적부터 박달령을 넘는 길은 현재 오색초등학교가 있는 박달마을에서 시작한다. 오색마을 사람들은 '박다룩'이라고도 하고, 학교가 있다 하여 '학교마을'이라고도 한다. 옛적에는 산의 형태가 말 같기도 하고, 조선 초에 오색역을 거쳐 갈 때, 이 곳에서 말을 갈아타고 갔다고 해서 '마산(馬山)'이라고 불렀다.
오색초등학교 맞은 편 오색천에 놓여진 돌 징검다리를 건너 박달골을 따라 넉넉히 2시간이면 박달령 정상에 올 수 있다. 그러나 지금은 출입금지 팻말이 쳐 있다. 한참 오르다 보면 우거진 풀숲에 가려진 길을 찾기가 쉽지 않는 곳도 있으니 주의해야 한다. 한낮에도 어두컴컴한 원시림 숲 속을 산책하듯 걷다 보면 중턱 쯤에는 장년의 두 팔 폭 정도의 난치나무가 있는 난치고개에 이르게 된다. '난치나무란 오래된 단풍고목을 이야기하며 박달령 오르는 길 주위에는 박달나무와 단풍나무가 유난히 많다. 난치고개 주변에는 머릿짐이나 지게를 올려놓기 좋을 만큼의 돌들이 쌓여 있는데 고개를 오르던 아낙네들은 혼자서 머릿짐을 내리고 다시 올리기 좋도록 높이를 맞추어 놓은 돌들이 있다. 사람들은 여기에서 가쁜 숨을 죽이고 다시 단목령을 올랐다. 옛날의 아낙네가 짐을 이고 오르던 고개였다니 그 삶의 무게가 얼마나 되는 지 짐작이 되고도 남는다. 여인들이여 지금 태어남에 감사하시라.
조금 가다 보니 시원한 계곡을 만나고 거기서 30분 간 쉰다. 우측으로 가면 계곡으로 1분 거리다. 직진은 조침령 방향 .
875m 1028m 산을 활처럼 오른 쪽으로 도니 북암령이다.
북암령(925m): 한계령을 사이에 두고 설악산 대청봉(한계령을 기준으로 할 때 북쪽)과 마주보고 서 있는 점봉산의 동쪽 산줄기에 해당하는 북암령은 세계적인 희귀식물인 한계령풀의 집단 분포지로 알려진 곳이다.조침령이 도로공사로 옛길이 사라져 버렸지만, 그 북쪽에 위치한 북암령과 박달령은 아직도 옛길 그대로이다. 북암령은 양양군 서면 북암리에서 서쪽 2km가량 지점에 있으며, 북암리는 미천골 선림원지에서 북쪽에 위치한 암자가 있었다 하여 북암리라 했다. 양양을 사투리로 '예양'이라 부르는 것처럼, '북애미'라고도 부른다. 국내 최대 한계령풀 군락지 매자나무과의 이 식물은 국내에서는 그 이름과 달리 설악산 일부 지역과 점봉산에서만 서식하는 희귀식물로, 중국 동북부와 러시아 연해주지방에서도 있으나 그곳에서의 것들과 달리 이곳 한국에서의 서식지 영향으로 또 다른 개체종으로의 성격을 띄게 된 종이다. 제철에 잠깐 노란색 꽃을 피웠다가 이내 몸째로 녹아 없어져 뿌리로서만 동정이 가능한 한계령풀은 전세계에서 내노라는 초본식물원(herbatium)들도 그 표본을 제대로 갖고 있지 못하고 있다.아래 두 사진은 한계령풀 사진이다.
지난 ‘90년대 중반 점봉산 양양 양수발전댐 건설반대 운동중 이 지역을 조사했던 우이령보존회의 식물학자들에 의해 북암령 일대에 대규모 서식 군락을 발견 당국에 천연기념물 지정이나 보호구역 설정을 건의했으나 아무런 조치가 따르지 않고 있다.
아 북암령! 그 옛날 소동라령, 소등라령 혹은 소어령으로 부르던 고개. 사람이나 장소나 잊혀지면 쇠락한다던가! 옛날에는 이 북암령을 소동라령(所冬羅嶺)이라고 불렸다.세종 시절까지는 所等羅嶺 이었다가 문헌상 소동라령으로 바뀌었다 한다. 삼국시대부터 이어져 내려 온 이름 "바드라재"를 이두식으로 바꾼 것이다. 이곳 진동리 사람들이 양양장을 보고 넘어올 때, 가까운 박달령 즉 단목령을 이용하지 않고 조금 먼 이 북암령을 이용한 이유는 훨씬 고개가 부드럽고, 우마차 소달구지가 갈만한 완만한 길이었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양양쪽 송천까지는 동해안쪽 치고는 길이 완만하다. 또한 추운 겨울에도 근처의 많은 고개가 험하고 미끄러워 다니지 못할때 유일하게 내어주던 고개였다. 주막도 있었고 역참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 흔적만 남아 있을 뿐이다.필자가 흔적을 찍었다. 아래 작은 사진들은 양양 방면의 길 흔적들 (이기용님의 논문사진에서 발췌)
양양 방면서 본 사진들 뚜렷하게 주막 흔적들 길의 흔적들이 보인다. 아래는 마방의 흔적
아래 지도는 북암령 엣길을 설명한 것 이곳 사람들은 이곳을 북음령이라고 발음한다. 지금도 길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다.
이제 북암령을 홀로 남겨두고 1136m 봉우리로 향한다. 체력이 다해 죽을 힘을 써서 한참만에 거침 숨을 몰아쉬며 이곳에 도착하지마자 물을 마시는데 꿀맛이다. 아내의 표정에 답이 있다. 나보다 훨씬 더 튼튼한 다리를 타고 났으나 오늘은 유난히 힘들어 한다.
이제 마지막 종착지를 향해 간다 . 양수발전소가 오른 쪽에 보이고 이런 경고문을 몇개 지난 후에
데크가 나타나고
드디어 조침령에 도착한다.
조침령! 인제땅 끝 조경동에서 가까운 곳. 지명이 희한(稀罕)하다. 팔도 지명에 동물을 넣는 것은 이곳 인제가 유일하다. 인제(麟蹄)는 한자로 ‘기린발굽’이란 뜻이다. 왜 하필 기린발굽일까. 인제군의 모양이 기린발굽을 닮아서일까? 하기야 고구려와 고려 때는 ‘돼지발굽’을 뜻하는 저족현(猪足縣)이었다. 하늘에서 보면 발굽처럼 생긴 것은 틀림이 없을 것이다. 어쨌든 인제는 초식동물 발굽처럼 폭에 비해 남북이 길쭉한(72.1km) 장방형이다.
인제는 1000m 넘는 산이 무려 96개나 된다. 사방에 우뚝우뚝 기둥처럼 서 있다. 설악산 향로봉 점봉산 방태산 소뿔산 주억봉 구룡덕봉 가칠봉 한석산 매봉 안산 가리봉 가마봉…. 그 아래로 800m 이상 봉우리 200여 개가
촘촘하게 이 틈새를 채우고 있다. 그러니 논 농사는 꿈도 꾸지 못했다. 마치 호리병 속에 꽉 갇혀 있는 모양이다. 인제에서 경작지는 “100평 200평…” 식으로 세지 않는다. 보통 ‘가리’나 ‘둔(屯)’을 쓴다. ‘가리’는 골짜기 곳곳의 ‘밭갈이할 만한 땅’을 말한다. 가령 ‘아침가리’란 아침햇살이 잠깐 비칠 때 밭갈이할 만한 땅이다. 한자로는 ‘朝耕洞' 이라고 한다. 연가리는 옛날 담배농사(연초)를 많이 했던 밭이다. 적가리는 가을에 단풍이 붉게 드는 곳이다.
보름가리는 보름은 갈아야 하는 넓은 땅이다. 인제에서는 4가리가 유명하다. 아침가리 연가리 적가리(곁가리·방태산휴양림 자리) 명지가리가 바로 그곳이다.
홍천군 내면 쪽에는 3둔이 있다. 둔은 사람들이 모여 살 만한 산기슭의 평평한 둔덕을 말한다. 살둔(생둔) 월둔 달둔이 그렇다. 곰배령 바로 아래 인제 쪽엔 귀둔리(주민들은 ‘귀뚠’이라고 부른다)도 있다. 방태산을 중심으로 북쪽엔 4가리가, 남쪽엔 3둔이 숨어 있다. 방태산 언저리는 예로부터 은둔자들이 스며들어 살기에 안성맞춤인 곳이다.
밖으로 한 번 나가려 해도 진부령(529m) 미시령(826m) 한계령(935m) 곰배령(1164m) 단목령(760m) 북암령(925m) 조침령(770m) 같은 큰 고개를 넘어야 한다. ‘하늘이 3000평’이라는 말이 실감난다. 산이 높으니 하늘이 손바닥만 하게 보일 수밖에 없다. 인제는 전국에서 두 번째(1위 홍천군)로 넓지만, 인구밀도는 가장 낮다(km²당 20명).
조침령은 인제의 동남쪽 끝자락에 있다. 조침령은 阻沈嶺 즉 험한 곳에 사이에서 잠깐 가라 앉은 고개라는 의미로도 쓰이고. 신경준 님의 산경도에는 曺枕嶺, 즉 무리 지어 하루 밤을 지내면서 넘었다는 뜻도 되고, 지금은 鳥寢嶺이라고 표기하며, 하도 험하여 새 조차 자고 간다는 뜻으로 쓰인다. 무슨 뜻이든 험한 것에는 에외가 없을 듯하다. 대간을 일부러 찾지 않고는 올 수도 없고 오지도 않는 곳으로, 그저 경치를 즐기거나, 100대 명산을 찾거나, 산에서 다른 즐거움을 찾는 이들에게는 험하여 외면하게 하는 곳이다.
길을따라 10여분오니 또 다른 조침령 정상석이 있다.
옛 조침령이 이 곳이 아니라, 이 곳에서 2km 정도 구룡령 방향으로 가는, 지금의 쇠나드리로 부르던 고개였다. 옛조침령에서 양양 서면 서림리로 내려가는 계곡 길은 가파르고 험하다. 엣적에는 선질꾼(산간지역 간 교역을 담당했던 소상인)들이 하루 50여 명씩 옛 조침령을 넘었다. 그들은 양양에서 소금이나 어물 등속을 사서 지게에 지거나 말에 싣고 인제 땅에 팔았다. 하도 가난해 새끼손가락 꽂을 땅도 없었다는 옛 조침령 근처의 사람들, 진동리에서 서림까지 70리 길을 가난을 해결하기 위해 오갔다. 당시에는 지금의 조침령을 넘는 사람은 옛 조침령을 넘는 사람의 3분의 1밖에 되지 않았다고 한다. 이곳 사람들은 현재의 조침령을 반부둑 고개라 부른다. 반부득이라는 말은, 10만평 정도의 땅을, 이 곳 말로 부득이라고 하는데, 지금의 조침령에서 서림방향으로 가면 중턱에 대략 5만평 정도의 땅에 소반처럼 넓은 평지가 있다고 한다.
길을 따라 10여분을 가니 처음에 세웠던 정상석이 있다.
1983, 84년 3군단 공병여단이 인제군 기린면 방동리에서 현재의 양양군 서면 서림리에 이르는 21㎞의 비포장길을 닦았다. 전시에 대비한 군사작전도로였을 것이다. 비포장길이라 하지만 당시 이곳 사정으로선 고속도로나 다름없는 길이었을 터. 큰 길을 놔두고 작을 길을 갈리 만무했다. 당시 선질꾼들은 더 이상 옛조침령의 고갯길을 힘겹게 넘을 필요가 없어졌다. 이 고개가 조침령이라는 이름을 얻게 된 것은 그때부터였다. 21㎞에 이르는 비포장 고갯길 밑으로는 '조침령터널'이 뚫려있다.
길을 따라 20여분 가니 택시기사가 기다리고 있다.
다음에 갈 구룡령까지의 들입을 확인한다.
총 산행시간 13시간30분 산행시작 오전 5시 00분 종료 6시 30분
같이한 아내에게 감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