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4 아씨시의 귀족 가문에서 탄생.
1206~11 프란치소꼬의 회개 과정을 목격하고 1210년 그의 사순절 설교에 감동되어 몇 차례 프란치스꼬를 만나 자기 뜻을 밝힘
1212 3월 18일 밤에 글라라는 자기 집을 몰래 떠나 포르치웅쿨라에서 프란치스꼬 앞에서 그이 동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착복식을 하고 순종을 서약함. 임시로 바스티아의 성 바울로에 있는 베네딕도회 수녀원에서 머물다가 얼마 후 수바시오 산 밑에 있는 성 안젤로의 베네딕도회 수녀원으로 자리를 옮김. 글라라의 친동생 아녜스가 여기서 입회하여 언니와 같은 생활을 시작함.
1212~3 1212년 말~1213년 초, 글라라는 아녜스와 동료 몇 명과 함께 자기들을 위하여 프란치스꼬가 마련한 성 다미아노 수녀원으로 이주하여 이곳을 "가난한 자매들의 회" 모원으로 삼음. 이즈음에 프란치스꼬는 자매들을 위하여 "생활양식"을 써줌. 같은 시기에 글라라는 사도직에 관한 프란치스꼬의 의문을 풀어 줌.
1215 성 다미아노 공동체는 제4차 라테란 공의회의 결정에 따라 베네딕오회 회칙을 따르게 됨. 이에 글라라는 프란치스꼬의 명에 따라 "원장" 이라는 명칭으로 원장직을 맡게 됨.
1216 글라라는 인노첸시오 3세로부터 "가난의 특전" 을 얻음.
1218 씨토회 출신인 암브로시오가 성 다미아노 수도원의 "순시자" 로 임명됨.
1218~9 프란치스꼬와 작은 형제들의 정신에 따라 성 다미아노 공동체와 같은 공동체들이 여러 곳에서 발생함. 이 자매들을 처음에 "다미아니테" 라고 부름.
1219 우골리노 추기경이 성 다미아노 수녀원이나 다른 "다미아니테" 공동체들을 위하여 고유한 회칙을 씀. 이에 따라 자매들은 1219년부터 1247년까지 우골리노의 회칙을 따라야 했고, 법적으로 베네딕도회의 회칙을 서약해야 했음. 작은 형제회의 회원으로서 필립보 롱고 형제가 성 다미아노 수녀원의 첫 "순시자"로 임명됨. 그러나 1년 후에 프란치스꼬의 명으로 사임해야 했음.
1224 교구 소속 브르네토 신부가 성 다미아노 수도원의 세 번째 "순시자" 로 임명됨.
1225 프란치스꼬가 성 다미아노 수녀원에서 글라라와 자매들로부터 눈병 치료를 받음.
1226 10월4일, 성 다미아노 수녀원의 자매들이 세상을 떠나신 사부의 유해를 눈물 가운데 공경하고 작별함.
1227 우골리노 추기경이 겨황 그레고리오 9세가 되어 순시나 기타 제2회를 돌볼 책임을 작은 형제회에 맡김.
1228 프란치스꼬의 시성식 관계로 아씨시로 간 그레고리오 9세가 글라라는 만나 그녀의 요청을 받고 9월 17일자로 "가난의 특전" 을 재확인함.
1230 글라라는 친동생 아녜스를 피렌체에 있는 몬티첼리 수녀원의 원장으로 파견함.
1234 프라하의 아녜스에게 첫째 편지를 보냄.
1235~8 프라하의 아녜스에게 둘째와 셋째 편지를 보냄.
1238 글라라는 프란치스꼬의 "생활양식" 과 우골리노의 회칙을 기초로 하여 손수 작성한 회칙의 인준을 요청했으나, 그레고리오 9세로부터 거절당함.
1240 글라라는 프레데렉 2세와 동맹하여 아씨시를 습격한 사라센인들을 성체의 기적으로 쫓아냄.
1243 두 개의 회칙 - 베네딕도 회칙과 우골리노 회칙 - 을 지킬수 없다는 이유로 글라라는 자기의 고유한 회칙의 인준을 재차 인노첸시오 4세에게 요청했으나 다시 거절당함.
1245 인노첸시오 4세 교황이 우골리노 회칙을 재확인함.
1247 교황 인노첸시오 4세가 제2회 자매들을 위하여 새 회칙을 작성하여 인준함. 내용은 우골리노 회칙과 큰 차이가 없지만, 회칙 안에서 베네딕도 회칙의 법적인 효력을 폐지시키고 프란치스꼬의 회칙을 서약할 것을 결정함. 따라서 교회법상 제2회 자매들이 처음으로 프란치스칸이 되었음. 또한 교황은 자매들을 작은 형제회에 직속시켰음.
1248 6월17일, 라이날도 추기경이 글라라회의 "보호자 추기경" 으로 임명됨.
1252 글라라가 인준받은 프란치스꼬회의 회칙을 관상생활에 적용하여 자매들을 위하여 적접 고유한 회칙을 씀. 라이날도 추기경이 교황의 이름으로 9월16일 이 회칙을 인준함.
1253 글라라는 프라하의 아녜스에게 넷째 편지를 보냄. 글라라가 유언을 씀. 8월9일, 인노첸시오 4세가 글라라가 쓴 회칙을 인준함. 8월11일, 글라라가 회칙을 가슴에 안고 세상을 하직함. 그의 유해는 성 제오르지오 성당에 안치됨.
1255 교황 알렉산드로 4세가 아낙니 대성당에서 글라라를 성녀품에 올림.
1255~6 토마스 첼라노가 글라라의 전기를 저술함.
1260 10월 3일, 글라라의 유해는 성녀를 위하여 새로 건축된 글라라 성당에 안치됨.
1850 글라라의 시신이 상하지 않은 체로 발견됨.
1893 글라라 회칙의 원본이 성녀의 수도복 속에서 우연히 발견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