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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시래 이야기
들에 나가 일을 하다 새참이나 점심을 먹을 때 또는 야외에서 식사를 할 때 첫 숟가락을 떠서 들판에 던지며 "고시래"라고 말하는 풍속이 있다. 그래야 풍년이 들고 복을 받는다고 한다. 여기에는 도선국사 또는 진묵대사, 그 외 이름난 지사의 이야기라고 하는 설화가 있다.
고씨 성을 가진 예쁘고 착한 처녀가 있었다. 하루는 냇가에서 빨래를 하는데 탐스럽게 생긴 복숭아가 하나 떠내려와 남몰래 건져서 먹었다. 그런데 그 후로 잉태하여 배가 불러오더니 아들을 낳았다. 처녀의 부모가 이를 망칙한 일이라 하여 어린아이를 개울가에 갖다 버렸다. 그때는 마침 엄동설한이라 몹시 추운 날이었는데 갑자기 까마귀 수천 마리가 무리를 지어 날아와서는 날개를 서로 이어 어린아이를 덮어주고 먹이를 구해다 주어 수십 일이 지나도 어린아이가 죽지 않았다. 이를 보고 처녀의 부모가 이상히 여겨 다시 데려다 길렀다. 그리고 복숭아를 먹고 낳은 아들이라 하여 이름을 도손(桃孫)이라고 지어 주었다.
도손은 자라서 출가하여 스님이 되었으며 중국에 건너가 도통한 스승으로부터 천문과 지리와 음양의 비법을배워 풍수지리에 통달하게 되었다. 그가 귀국하자 시집도 못 가고 혼자 산 어머니가 죽었다. 도손은 명당을찾아 어머니를 묻기로 했다. 그러나 다른 자식도 없고 복숭아를 먹고 태어난 자신도 중이 되었기 때문에 발복이 무슨 소용이겠는가 하면서 어머니를 산에 묻지 않고 들 한가운데에 묻었다. 사람들은 풍수지리에 통달한 사람이 어머니를 산에 묻지 않고 들에다 묻었다고 욕하였다. 그러나 도손은 "여기가 배고프지 않은 명당이다."하며 그대로 두었다.
농사철에 근처의 농부가 일을 하다가 점심을 먹을 때 제사를 지내주는 자손도 없는 묘를 보니 불쌍한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그 농부는 들에서 일하다가 밥을 먹을 때면 "고씨네-"하면서 그 여자의 성을 부르며 밥 한술 을 던져주었다. 그런데 그 해에 가뭄으로 흉년이 들어 다른 집들은 농사가 다 망쳤는데 그 농부의 농사만 풍년이 들었다. 사람들은 그것이 고씨네 무덤에 적선을 했기 때문이라며 그 다음부터 서로 묘에 음식을 갖다주며 "고씨네-"하고 불렀다.
그 후로 들에 밥 한술을 던지며 "고시래"하는 습관이 생겼다고 한다.
26. 한국 풍수사상과 지배 이데올로기와 반 지배 이데올로기
풍수사상이 개국(開國)의 이념적 바탕과 혁명의 당위성을 확립시켜 주는데 역사적으로 큰 역할을 해왔다. 지배 권력자에게 있어서도 그들의 지배 논리를 제공하였고, 여기에 저항하여 새로운 세상을 기대하는 민중들에게도 변혁과 혁명의 이념을 심어 주었다.
1) 나말여초(羅末麗初)
신라 말 중앙 귀족들의 왕위 쟁탈전은 왕권을 약화시키고 국가의 지배 질서를 붕괴시켜 중앙 정부의 지방 통제력을 상실하게 되었다. 일찍이 지방에 파견되었던 지방 수령과 본래부터 지방에 토착하여 살고 있는 호족(豪族)들은 중앙의 통제력이 약화되자 독자적으로 그들의 세력 기반을 확대해갔다. 그들은 그들의 지배권이미치는 영역에다 성을 쌓아 스스로 성주(城主)라 칭하면서 경제적인 것은 물론 군사와 행정에 이르기까지 지배권을 확대하여 독립적인 지위를 행사하였다.
당시 지방 호족들에게 지배 이념을 제공한 것은 풍수설을 터득하고 이론을 확립한 선종(禪宗)계통의 승려들이었다. 그들은 지방 호족들의 전략가 역할을 하면서 신라의 서울인 경주가 국토의 동남쪽에 치우쳐 있어 정치 지리학적으로 적절치 못하다는 논리로 지방 호족들의 세력을 확장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이들은 경주를 단봉포란형(丹鳳抱卵形)이라고 설명하면서, 경주 남산이 단봉(丹鳳, 붉은 색의 상서로운 봉황새)인데 애석하게도 경주에는 알이 없으므로 봉황이 날아갈 것이라고 소문을 퍼뜨렸다. 이것은 곧 신라가 망할 것이라는 소문을 나게 함으로서 지방 호족들의 독립성을 확보하기 위한 것이었다. 또 이들은 알이 없는봉황이 날아가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는 봉황이 먹을 물을 마련해 주어 빨리 알을 낳게 해야 한다며 깊은 우물을 파도록 하였다. 그런데 실재 경주는 행주형(行舟形)의 대길지로 우물을 파면 지기가 쇠퇴하는 곳이다.경주라는 거대한 배 밑에 우물이라는 구멍을 뚫어 배(신라, 경주)를 침몰시키겠다는 의도였다.
나말여초의 후삼국시대에 왕건을 비롯한 지방호족들이 신라에 반하여 그들의 독자적인 세력을 확보하고 권력을 쟁취하기 위해 풍수 사상을 이용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많은 호족 세력 중 송악을 근거지로 한 왕건은 도선의 제자 경보(慶甫)와 천문 지리에 능한 최지몽(崔知夢)과 같은 학자의 도움으로 삼한을 통일하여마침내 고려를 개국하게 된다.
2) 고려시대(高麗時代)
풍수설을 신봉한 태조 왕건은 왕이 되어서 그의 통치 논리를 풍수에서 찾았다. 왕건은 그의 훈요십조(訓要十條)에서 "제2항 모든 사원(寺院)의 터는 도선이 산수의 순역(順逆)을 보아서 추점(推占)한 것이니 함부로 다른 곳에 창건치 말라. 다른 곳에 사원을 함부로 지으면 지덕(地德)을 손상시켜 국운이 길하지 못하다."했는데이는 사찰을 중심으로 한 지방 호족 세력들의 기반을 원천적으로 없애려는 고도의 정치적 의도였다.
"제5항 짐(왕건)은 삼한 산천의 음우(陰佑)를 받아 대업을 이룩한 것이다. 서경(西京)은 수덕(水德)이 순조로와 우리 나라의 지맥의 근본이므로 대업을 이룰 수 있는 만대지지다. (후대 왕들은) 의당 사계절에 한번씩 순유(巡遊)하여 백일을 유(留, 머물다)하라. 그래야 나라가 안녕(安寧)하다."했다. 이 내용은 자신의 고려 건국의 당위성을 강조하고, 서경을 예찬하여 고구려 영토 회복의 대업을 이룰 수 있는 전진기지로 삼을 것을 은연중에 강조한 북방정책이었으며, 침체된 국정의 기운을 쇄신하기 위한 서경 천도의 의도가 숨어있는 대목이다.
"제8훈 차현(車峴, 차령산맥) 이남의 공주강(금강) 외에 있는 산형지세(山形地勢)가 병추배역(竝趨背逆,)하였으므로 인심 역시 그러할 것이니 그 지방 사람이 혹 조정에 참여하거나, 왕후국척(王侯國戚)과 혼인을 하거나, 국정을 맡게 되면 혹 국가를 변란하고 병합에 대한 원한이 남아 있으므로 필시 난이 일어 날 것이므 설령 양민(良民)일지라도 벼슬자리에 앉히지 말라."고 하였다. 이는 왕건이 후삼국을 재통일하면서 후백제인들의 끈질긴 저항을 받아 자신이 죽음의 직전까지 빠진 경험이 있었고, 견휀과 그의 아들 신검의 폐륜적 내분에 대한 혐오감이 금강 이남 사람들에 대한 편견을 가지게 된 것이다. 그러나 실재로 왕건을 측근에서 보좌한 사람들은 경보와 최지몽 등 대개 나주를 중심으로 한 호남 사람들이었는데 왜 이러한 말이 나왔는지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다. 왕건이 풍수지리설을 교묘하게 역이용한 지역 차별 정책은 오늘날까지도 호남 인들에 대한 편견과 차별의 시초가 되었다.
그후 역대 왕들은 수도 개경(개성)을 비롯하여 서경(평양), 동경(경주), 남경(한양)의 사경(四京)을 설치하여풍수지리 적으로 지덕을 얻고자 하였지만 정치적으로는 지방 호적들의 세력을 견제하려고 하였던 것이다.
고려 건국 이후에도 풍수지리설은 크게 성행되어 왕권강화 정책에 이용되었는데, 고려 건국 초기에는 건국공신(建國功臣)세력뿐만 아니라 호족들의 세력이 대두하여 지방 행정은 호족에 의하여 좌우되는 형상이 계속되었다. 고려의 삼한 통일은 호족들의 연합에 의한 것이었기 때문에 그들은 일정 부분 기득권을 가지고 상당한 세력을 유지하였다. 이러한 것은 왕권신장(王權伸長)을 크게 저하하여 이를 제압할 필요가 있었다. 고려 왕실은 지방 호족의 자녀를 서울에 머물게 하여 불모로 삼는 기인제(其人制)를 실시하고, 과거제도를 시행하고, 중앙에서 장관(長官)을 파견하여 지방 행정을 다스리게 하고, 지덕(地德)을 입는다는 명분으로 왕도수시로 순시를 하여 그들을 견제하였다. 이렇게 풍수지리설을 정치적으로 이용한 왕권 강화 정책은 광종 때중앙 집권체제 강화에 따라 지방 호족을 중앙 귀족으로 흡수시키거나 일반 향리(鄕吏)의 지위로 전락시키는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지방 호족을 견제하려던 중앙집권정책은 또 다른 문제를 야기 시켰다. 개경의 중앙 귀족으로 성장한새로운 지배층은 새로운 문벌(門閥)을 형성하여 정치, 경제의 강력한 권한을 가지고 개경 중심의 정책을 폈는데 그들은 그들의 지위를 높이기 위해 보다 나은 귀족과 통혼(通婚)하고, 특히 최고의 귀족인 왕실과의 통혼은 왕실의 외척으로서 정권을 장악하여 권세와 영화를 누리려고 하였다. 이들 권문세족(權門勢族)이 정권을 장악하여 왕위계승 문제에도 종종 간섭을 하여 복잡한 사태를 자아내기도 하였는데 그 대표적인 것이 왕실과 중복된 외척관계를 맺은 인주(仁州) 이씨(李氏) 이자겸(李子謙)이었다.
인주 이씨는 문종 임금부터 인종 임금까지 무려 7대 80여 년간을 왕실과 외척을 맺어온 집안으로 15대 임금인 숙종만이 인주 이씨와 혼인 관계를 맺지 않았지만 숙종의 아들 예종(16대)과 손자 인종(17대)은 이자겸의 장녀와 3, 4녀 둘을 각각 왕비로 맞아들였다. 이들 인종비와 예종비 사이는 친누이이면서 동시에 시어머니, 며느리 관계가 되었다. 이는 이자겸이 예종 및 그의 아들 인종과 동시에 사돈을 맺고 다른 가문으로부터왕비의 유입을 극구 막아 엄청난 위세를 떨치려고 했던 것이다. 그는 왕의 장인이라는 신분을 가지고 왕을 위협하고, 방자와 탐학으로 국정을 전횡하더니 지어 십팔자참(十八子讖) 즉 이(李)씨가 왕이 된다는 예언을믿고 왕위를 탐내고 난을 일으켜 왕을 독살하려 하다가 실패하였다. 이자겸의 난은 귀족 사회의 대립과 분쟁을 자아내게 하여 고려 사회를 크게 동요시켰다.
내적으로는 귀족 정치가 동요되고 있을 때 대외적으로는 고려가 야만 시 했던 여진족이 성장하여 금(金)나라를 건국하더니만 고려를 신하의 나라로 취급하며 군신(君臣)의 관계를 요구하자 당시 실권자였던 이자겸과척준경이 국제 정세와 고려 영토의 지리적 위치를 고려하여 금의 요구를 받아들이자 고려인들은 자존심을 크게 상하게 되었다. 개경 중심의 귀족들의 권세와 횡포 그리고 금에 대한 굴욕적인 외교로 고려 사회가 정치적 사회적으로 불안해지자 지역 차별 철폐와 민족의 자주적 독립과 새로운 유신정치를 기도한 일군의 정치세력이 풍수지리사상을 이념으로 하여 나타났다.
음양가인 승 묘청을 중심으로 문신 정지상, 일관 백수한 등 서경인(평양인)들은 풍수지리설을 이용하여 "서경에는 왕기(王氣)가 있으니 마땅히 지덕이 왕성한 서경으로 도읍을 옮겨 왕이 그 곳에서 거처하면 천하를 가히 병합할 수 있고, 금도 저절로 와서 항복을 할 것이며, 그밖에 36개 나라가 조공을 받치러 올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또 이들은 왕을 황제로 칭하고 독자적인 연호를 세울 것과 금의 정벌을 주장하고 나섰다. 이는고려인의 자주정신과 주체성을 강조하여 당시 왕인 인종의 관심을 끌었을 뿐만 아니라 일반 민중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았다. 이리하여 인종은 직접 서경에 가서 임원역(林原驛) 땅에 대화궁(大花宮)을 짖고 자주 그궁궐에 왕래하였다. 그러나 개경을 중심으로 한 귀족 세력의 반발을 사게 되어 사대주의에 찌든 김부식 같은유신(儒臣)은 금에 대한 군신(君臣)의 명분론을 내세워 묘청을 반대하였고, 임원주와 같은 유신은 황당무계한 설로서 민심을 현혹시키고 왕을 기만한다고 하여 묘청의 주살(誅殺)을 강청 하였다.
이와 같은 귀족세력의 집단적인 반대가 심해지고 묘청에 대한 배척 운동이 크게 일어나 인종도 서경 행차를중단하게 되자 묘청은 국호를 대위(大爲), 연호를 천개(天開), 그 군대를 천견충의군(天遣忠義軍)이라 하여서경에서 난을 일으켜 개성의 귀족세력과 대치하였다. 그러나 묘청 반대파의 거두인 김부식의 지휘를 받은중앙 군대에 의하여 1년만에 서경이 함락됨으로써 붕괴되고 말았다.
이와 같이 풍수지리는 변혁을 시도하려 했던 개혁파에게 명분과 수단을 제공하였다. 사실 개경은 태조 왕건이 도읍을 정한이래 200여 년간 고려의 수도였고, 귀족 세력의 전통적인 본거지였기 때문에 서경천도 운동은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고 금국정벌 역시 당시의 국제 정세로 보아 실현성이 불가능한 것이었다. 그럼에도묘청 등이 난을 일으킨 것은 지역 차별에 대한 반발이었고, 서경으로 도읍을 옮김으로서 국가적으로 유신(維新)의 새로운 기풍을 불러일으키게 하고 그 자신은 중흥의 공신이 되어 서경인 중심으로 정권을 장악하여 보려는 의도가 있었다. 결국 풍수지리설을 이용한 묘청의 난은 고려의 귀족 정치를 크게 동요케 하였으며, 이후 정치 상황은 정중부 등에 의한 무인정권 수립에 크게 영향을 주었다.
고려 귀족 정치의 문치주의는 무신을 정치의 실제에서 소외시키고 문벌 귀족 정치의 모순이 극도에 달해 관직을 독점하고 농장을 확대하는데 광분하였으며, 뇌물이 공행(公行)하였고 농민에 대한 수탈이 극심히 자행되어 정치 기강이 문란하여지고 국가의 재정난이 심하여지자 정중부, 이의방 등이 쿠테타를 일으켜 개경의귀족 문신들 대부분을 학살하고 무인 정권을 수립하였다.
문인정권이 모화사상(慕華思想)으로 중국의 범위를 벗어나지 못한 점에 비해 무인정권은 몽고와의 근 30년동안 항쟁을 할만큼 대외적으로 주체성이 매우 강해 독자적이고 자주적인 성향이 강했다. 이때는 사회 경제적인 면에서 많은 변화가 있었는데 문신의 학대를 받던 무신이 문신을 호령하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미천한신분 층에서 귀한 자리에 오른 자가 많이 생겨났으며, 학대에 신음하던 노비 등 하부 층에서 신분해방 운동이 활발하게 일어났다.
전통적 신분 질서에 동요가 생기자 이에 자극을 받은 농민, 노비 등 하층민 등이 전국 각지에서 민란을 일으켰는데 그 중에서도 동경(경주)을 중심으로 한 김사미, 효심 등의 민란이 가장 치열하였다. 이들은 "개경의 지기가 다해 고려의 왕업이 끝나고 동경의 신라가 다시 지기를 얻어 부흥할 것이다."라는 풍수지리설을 이용하였다. 또 경주 출신인 이의민(李義旼)은 도참에 나오는 "용손십이진(龍孫十二盡) 갱유십팔자(更有十八字)"의 설 즉 왕씨(王氏)가 12대에 그치고 이씨(李氏)가 득국(得國)한다는 설을 이용하여 신라 부흥의 야망을가지고 반란을 일으켰다. 이들은 신라 부흥을 구호로 삼았지만 이는 경상도 일대의 호응을 얻기 위한 것이었다. 또 신분 해방운동을 위한 노비, 농민들의 투쟁은 개성의 사노(私奴) 만적의 봉기가 최충헌에 의해 진압됨으로써 실패하고 말았지만 신분해방 운동은 역사적으로 크게 주목을 끄는 거사로서 노비, 농민 등 하층민들에게 혁명의 이념과 그들이 서로 규합하여 지역별로 연합할 수 있게끔 한 수단은 역시 풍수지리설이었다.
여기서 풍수지리는 집권세력뿐만 아니라 민족의 주체성을 확립하고자 했던 개혁세력과 소외되어 천대받던일반 민중들에게도 신분타파의 혁명적 반 지배 이데올로기적 이념을 제공하였음을 알 수 있다.
고려는 14세기 중엽에 들면서 외환(外患)과 내우(內憂)가 겹치고 경제질서의 붕괴, 정치기강의 해이, 신진세력의 대두 등으로 사회가 크게 동요되어 혼란할 때 31대 공민왕은 반원자주정책을 수행하고 내정쇄신에 힘써 각종의 개혁으로서 강력한 기반을 가진 권문세족의 세력을 제압하기 위해서 어느 세력과도 관련이 없고,신분적으로도 계급을 초월한 사비 승 신돈을 국사로 등용하였다. 신돈은 권세가와 부호들이 점령하고 빼앗은 토지와 노비를 조사 정리하여 이를 원래 주인에게 돌려주고, 노비로서 양인이 되기를 원하면 이들을 해방시켜 주었다. 이로서 신돈은 하층민들 사이에서는 크게 환영을 받았지만 상층 계급에서는 원한과 비난을 받았다. 이와 같은 신돈의 전민(田民)정책은 급진적이었고 혁명적이었지만 정치 경험이 없는 일개 중에 지나지않아 권세가 들의 줄기찬 반대에 봉착하게 된다.
그는 권세가 들의 세력을 꺾기 위해 권문세족의 본거지인 개성에서 도읍을 옮길 필요성 때문에 도선비기(道詵秘記)를 들어 서경과 충주를 그 후보지로 추천하여 왕에게 권하고 이를 서둘게 하였다. 그러나 개성에서의기득권을 유지하려는 권문세족들에 의해서 개혁정책은 실패하고, 신돈은 국왕 살해의 혐의로 유배되었다가마침내 주살 되고 만다. 고려 말기 공민왕과 신돈의 개혁 정치를 뒷받침 한 것은 풍수지리설이었고 신돈은 풍수설로서 인심을 다스려했으며 자기의 세력 기반을 닦으려 하였다.
고려말 내적으로는 귀족들의 권력 다툼과 외적으로는 원과 명나라의 세력 교체기에 외교정책을 둘러싸고 귀족간에 대립이 오래 계속되었다. 최영은 명나라의 무리한 요구에 대항하여 요동 정벌에 나서자 이성계는 이에 반대하여 위화도에서 회군하여 고려를 멸하고 조선을 세웠다. 그는 정치적인 실권을 장악하기 위하여 구귀족 세력기반을 빼앗는 동시에 이성계 자신을 중심으로 하는 새로운 세력기반을 구축할 필요가 있었다. 그는 친명외교, 억불숭유, 사전개혁 등 여러 정책을 통하여 집권의 지도이념을 세웠으나 역성혁명에 대한 거부감과 지나치게 명에 대한 사대사상 때문에 고려 왕씨를 추종하는 구세력이 뿌리 깊게 남아있는 개경을 떠나새로운 땅에 도읍을 옮기고 국가의 면목과 인심을 새롭게 할 필요성을 느꼈다. 그래서 그는 무학대사의 풍수지리 의견을 들어 개경의 지덕이 이미 쇠했기 때문에 새로운 국도 후보지를 모색하여 1394년(태조 3년)에 지덕이 왕성하다는 남경(한양)으로 천도하였다. 여기서 이성계는 풍수지리 사상을 자신의 역성 혁명에 대한당위성과 명분을 쌓는데 이용하였다.
3) 조선시대(朝鮮時代)
조선 왕조는 유교를 지배이념으로 삼았는데 풍수는 유교의 기본 전제인 효(孝) 사상과 결합하여 큰 발전을 보게 된다. 풍수지리 논리에 의하여 궁전인 경복궁을 위시하여 종묘, 사직을 짓고, 전장 17Km나 되는 도성이 연인원 19만7천명이나 동원하여 축조되었다. 또 북악산, 인왕산, 남산 등에서 흘러나오는 물과 민가의 하수구에서 흘러나오는 물을 모아 흐르게 하는 청계천 공사를 하였고, 종로를 도시의 심장부를 이루게 하는 시가 건설을 시행하였고, 각 고을의 도읍을 정하였다. 이러한 것은 도시 계획 등 국토의 재편성 사업과 도읍의행정체제 정비에도 풍수지리가 학문적 이론을 제공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풍수지리가 도읍의 결정과 도성 및 궁궐의 수축, 각지방의 행정체제 정비에 긍정적인 역할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서울의 주산 문제를 두고 인왕산과 북악산으로 나누어 첨예한 대립을 한다. 무학대사는 인왕산으로 주산을 삼고 북악산으로 청룡, 남산으로 백호를 삼아 유좌묘향(酉坐卯向)으로 궁궐을 동쪽으로 향하게 하자며 풍수지리 이론을 적용하였다. 반면에 정도전은 예로부터 군주는 남쪽을 바라보며 정사를 펼쳐야하는 만큼 북악산을 주산으로 삼아 인왕산을 백호, 낙산을 청룡으로 하여 임좌병향(壬坐丙向)으로 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결국 유신인 정도전의 주장대로 북악산을 주산으로 한 경복궁이 건설되었다. 그러나 풍수 이론가인 무학대사와 현실 정치가인 정도전 사이의 풍수 논쟁에서 풍수가인 무학대사가 밀리자 조선 풍수는커다란 전환점을 가져왔다. 양기양택 위주의 풍수가 음택 중심으로 치중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양반 관료체제로 안정되던 조선사회가 건국 지배이념인 성리학이 발전하면서 당파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이(理)와 도(道)를 중요시하며 보수적 성향이 강한 퇴계학파(退溪學派) 동인(東人)과 기(氣)를 중요시하며 진보적 성향이 강한 율곡학파(栗谷學派) 서인(西人)으로 분파 되어 권력 투쟁이 시작되었다. 이러한 당쟁과 임진왜란, 병자호란의 양란을 거치면서 왕권은 약화되고, 외척세력이 발호 하여 세도정치를 실시하였다. 세도정치는 정치를 부패시키고 전정(田政), 군정(軍政), 환곡(還穀) 등 삼정(三政)이 문란하게 하여 민중에 대한 수탈이 심하여졌다. 이러한 정치적 혼란은 민중의 항거로 나타나게 되는데 조선정부를 비난하고 저주하면서 비기(秘記)와 도참설(圖讖說)이 민간에 널리 유행하였다. 비기와 도참은 풍수지리 사상을 바탕으로 도탄에빠진 민중들을 구한다는 내용이다. 풍수 사상이 고난과 고통에 처한 민중들에게 희망과 혁명의 이념을 심어주고 신분해방을 위한 투쟁을 할 수 있도록 방법을 제시하였다. 그 처음이 바로 홍경래의 난(1811년)이다.
청강의 풍수지사(風水地師) 홍경래와 가산의 풍수지사 우장서, 태천의 역사 김사용의 주도하에 민중들은 세도정치의 반대와 반봉건적인 사회건설을 외치면서 서북지방에서 대규모의 반란을 일으켰다. 반란을 주도한홍경래는 농민과 광산노동자, 반정부적인 지식인, 몰락 잔반층, 소외된 토호층, 신흥 사상층을 회유하고 규합할 때 풍수지리설로 그 방편을 삼았다. 당시 반란 주도자들은 풍수사로 지칭하여 관서지방 이곳 저곳을 돌아다니면서 사회 기층 세력을 규합하였던 것이다. 당시만 해도 일반 서민들은 공간활동의 제약을 받았지만풍수사들은 언제 어느 때라도 행정구역에 상관없이 왕래할 수 있었다. 이는 조선사회가 효를 중요시하는 유교사회였기 때문에 조상의 묘 자리를 찾아다니는 풍수활동은 제약을 받지 않았다.
홍경래의 반란과 같은 체제에 대한 항거가 자주 일어나 사회질서가 더욱 혼란스러움에도 불구하고 일족전제적(一族專制的)인 세도정치는 안동 김씨(安東 金氏)에 와서 왕권은 쇠약해지고, 사회 기반은 피폐되어 조선은 대수술을 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오랜 세도정치 하에서 왕실 종친의 인물들이 모두 희생되기도 하였다.이때 온갖 박해와 수모를 당하면서 남다른 기지와 위장된 탕행으로 인내하면서 왕실의 복권을 꿈꾸던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흥선군 이하응이었다. 그는 왕실의 복권을 위하여 대 명당을 찾아 아버지 남연군을 이장하고 그 발복으로 태어난 둘째 아들 명복을 보았다. 철종이 후사가 없이 죽자 열두 살의 어린 아들을 즉위케 한후 대원군으로서 섭정의 정권을 잡고 과단성 있는 개혁정치를 단행하였다.
우선 그는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서 안동 김씨 일파를 몰아내고, 문벌과 지방 차별을 철폐하고, 능력과 기능위주로 인재를 등용하였으며, 지방 세력의 본거지이고 당쟁의 소굴이었던 서원 철폐를 단행하고, 외세 침략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 천주교를 탄압하고 쇄국정책을 실시하였다. 대원군이 세계 열강들의 개방 압력을 강경하게 물리치고 쇄국 정책을 더욱 강화하자 통상의 압력과 침략이 번번하게 실패했던 외세는 대원군의 기세가 충청도 덕산 땅 가야산에 있는 그의 아버지 남연군의 묘 기운에서 나온다는 조선 천주교 신도들의말을 믿고, 남연군의 묘를 도굴하여 유골을 가지고 대원군에게 압력을 넣기 위해 야밤에 도굴을 강행한다. 그러나 분묘 내부가 견고하여 실패하고 마는데 이 사건은 조선 정부로 하여금 서양인에 대한 반감을 한층 더강렬하게 하였으며, 쇄국의 결의를 더욱 굳게 하였다. 여기서 풍수지리는 외세의 침략 도구로서도 이용되었음을 알 수 있는데 결국 풍수사상에 의한 남연군묘 도굴 사건은 역사적으로 우리 근세사에 막대한 영향을 주었다. 풍수사상은 민족 주체의 사상으로 구미 열강의 다툼 속에서 외세에 대항하여 민족적, 반 외세적 저항을 할 수 있는 자극을 주었다.
조선 왕조의 사회질서를 확립하는데 절대적 역할을 했던 성리학이 더 이상 지배 사상이 될 수 없게 되자 일반 민중들 사이에서 동학이 창도되었다. 인간은 곧 하늘이라는 인내천(人乃天) 사상을 신조로 제시된 동학은초세속적(超世俗的)인 윤리관만으로는 민중을 흡수할 수 있는 힘을 지니지 못해 여기에 주술(呪術)로서 악질을 치료할 수 있다는 민간신앙과 풍수지리설을 이용한 정감록 등을 이용하였다. 개벽사상과 함께 퇴폐적인 양반사회를 일소하고 외세도 물리칠 수 있다는 민족주의를 강조하여 일반 민중들을 폭넓게 흡수하였다. 동학의 지도자 전봉준은 비기를 믿어 천하의 명당이라는 곳을 찾아다니면서 일시적으로 머물기를 좋아하였는데 세력을 규합할 때는 풍수사로 가장하여 돌아다녔다. 그런데 동학 난의 주모자 전봉준을 잡기 위해조정에서 파견된 토벌군 대장 박동진은 상복으로 변장하고 나머지 병사들은 하인으로 변장하여 태인으로 내려가 전봉준에게 쉽게 접근하여 체포하였다고 한다. 동학혁명의 주모자는 풍수설을 신봉하였고 또 그를 잡아들이기 위해서 풍수설을 이용한 것이었다. 동학혁명을 통하여 표출된 자주적 민족적 반외세적 이념에는 풍수지리 사상이 이었던 것이다.
4) 일제시대(日帝時代)
한일합방에 성공한 일제는 그들의 식민지 통치를 위하여 민족정신 말살정책을 폈다. 그들은 조선침략 정책의 일환으로 실시한 한반도의 쌀이나 지하자원을 수탈해 가기 위해서 전국에 걸쳐 토지조사를 실시하였다.이때 풍수지리에 밝은 조선인 13명을 선정하여 소위 "13인 위원회"를 만들어 이 땅의 명당 즉 장군이 나올만한 자리라든가, 큰 인물이 나올만한 장소를 물색하여 혈맥을 끊었다. 도로나 철로를 내면서 고의로 산맥을 자르고, 험준한 산악지대같이 혈맥을 끊을 수 없을 때는 쇠말뚝을 박아 산의 정기를 끊으려했다. 이것은 매우 교활한 민족정기 말살정책의 하나였다. 당시 풍수사상은 민족사상으로서 고통과 고난받는 민족과 백성들에게 희망과 위안을 주고 있었다. 각 고장의 마을이나 산, 바위 등에는 장군봉 이라는 이름으로 전설이 있는데 나라가 어지럽고 백성이 고난을 당할 때 장군이 나타나 나라와 백성을 구해준다는 것이다. 일반 백성들은이를 통하여 독립에 대한 희망을 저버리지 않고 일제에 항쟁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일제는 우리 민족의 토지관이자 인문지리관인 풍수사상을 미신화 시킴으로서 민족사상을 비하하고 말살하려는 정책을 썼던 것이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한반도의 지형이 나약한 토끼 형국이라고 하였는데 이에 대해육당 최남선은 한반도 지형은 호랑이가 발을 들고 동아 대륙을 향하여 나르는 듯 생기 있게 달려드는 형상이라고 반박하였다. 일제는 조선왕조 500년 동안 왕이 집무하던 경복궁 근정전 앞에 있는 건물을 허물고 근정전 앞을 가로막는 조선 총독부 청사를 지었다. 하늘에서 내려다보면 대(大)자인 북악산과 일(日)자인 조선총독부 건물, 본(本)자인 경성 시청(현 서울시청)과 어울려 대일본(大日本)자의 형상을 한 것이다. 일제는 민족문화를 말살하기 위해서 신사참배를 강요하고 신사의 위치를 각 도읍의 진산 정혈(正穴)에다 설치하였다. 또한 일제는 매장 및 화장에 대한 취재규칙을 제정하여 개인 묘지를 일체 불허하고 공동묘지만을 허용하고 화장을 적극 장려하였는데 이는 우리의 전통 풍속과 관습을 무시한 조치였다. 이러한 일제의 탄압으로 풍수사상은 침체되었고 왜곡되어서 지금까지 내려오고 있다.
5) 현대(現代)
일제의 탄압으로 침체된 풍수사상이 해방 후에도 미신으로 격하되었다. 6.25전쟁을 통하여 물밀 듯이 들어온 서구문화의 영향으로 풍수사상 뿐만 아니라 우리 전통문화는 비합리적인 것으로 천시를 받았다. 그러나 풍수사상은 국가의 큰일에 나름대로 역할을 하였다. 국립묘지의 선정이라든지 정신문화원 터 등을 잡을 때풍수지리 적인 입지 조건을 제일 먼저 고려했던 것이다. 또한 정통성이 없는 정권이 그들의 정권에 대한 필연성을 부각시키기 위해 풍수사상을 이용하였다. 박정희 대통령은 구미 금오산 자락에 있는 할머니 묘가 제왕을 나오게 하는 자리이므로 박정희라는 인물을 배출하여 대통령이 될 수밖에 없었다는 논리로 5.16쿠테타에 대한 필연성을 강조했다. 또 전두환 대통령은 합천에 있는 아버지 묘가 천교혈로서 제왕지지이므로 5공의 대통령이 되었다는 논리를 폈다. 그밖에 수많은 이야기가 만들어졌는데 모두 자신들을 합리화하려는 의도성이 숨어있는 것들이다.
80년 이후 경제가 발전하고 민족의 주체성이 강화되면서 전통 풍습에 대한 정부와 국민들의 관심이 고조되기 시작했다. 풍수지리도 젊은 학자들 사이에서 연구가 활발해지고 일반 국민들도 미신이라는 개념에서 벗어나 자연지리 현상으로 이해하는 경향이 늘어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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