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리수잎 · 넷
새 시대인가, 말세인가
칸티빨로 스님 지음
조효종 옮김
인과와 도덕적 책임
나나야까라 지음
강대자행 옮김
◈차 례◈
새 시대인가, 말세인가 7
인과와 도덕적 책임 35
새 시대인가, 말세인가
A 'New Age'? Relating Religions
Khantipālo Bhikkhu
칸티빨로 스님 지음
조효종 옮김
(BODHI LEAVES NO. B.82)
BUDDHIST PUBLICATION SOCIETY
KANDY, SRI LANKA
새 시대인가, 말세인가
요즘에 와서 사람들이 바야흐로 ‘새 시대’가 동터오고 있다는 얘기들을 많이 합니다.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 중 대개는 젊은이들인 것 같고, 기성세대들은 별로 그런 말을 하지 않는 것 같아 보입니다. 어쨌든 ‘새 시대‘가 정말로 다가오고 있는지 그 여부에 관심이 깊은 사람들이 그동안 충분하리만큼 많은 얘기를 해왔고, 이 문제를 주제로 한 저술 역시 꽤 많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새 시대’에 붙이는 이름도 각자의 관점에 따라 매우 다양한데, 그 중에는 ‘아카리우스 별자리 시대’1)란 이름도 자주 들먹여지고 있습니다. 그럼 ‘새 시대’의 특징은 도대체 무엇일까요?
‘새 시대’를 설명해 주는 가장 현저한 특징은 사람들이 다 같이 화합하여 살기 위해 이전보다 더 많이 애써야 한다는 점과 정신적 노력을 새롭게 전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 요청은 거듭 강조되어 왔고, 그 중 어느 한 가지도 소홀히 되어선 안된다는 데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할 것입니다. 문제는 실제로 이 지구상에서 과연 어느 정도로 이런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낙관주의자로서 이상주의적 경향이 다소 짙은 편인 사람이라면, 서슴없이 “그렇다, 현 상태는 낙관적이다”고 대답할 것입니다. 이러한 낙관주의자는 서구형 사회에서 새로이 나타나고 있는 수많은 정신 수련원들과 그리고 일부 동양국가에서 증대하고 있는 명상과 기도에 대한 관심을 실례로 들 것입니다.사실 요즘은 온갖 종류의 공동체와 집단, 사업기구 및 재단들이 생겨나 인종차별 폐지와 정신적 향상 및 인류의 화합을 목표로 광범하게 건전한 활동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경향이 날로 번성해져 가고 있는 것도 확실합니다.
그렇지만 비관론자들은 “그렇지 않다”고 말할 것입니다. 그런 사람의 눈에는 ‘새 시대’의 징후도, 정신적인 성장의 징표도 별로 띄지 않는 것입니다. 그는 당연히, 금세기에 벌어졌던 두 차례의 끔찍한 대전(大戰)과 그보다 더 가공스러울 삼차대전의 발발 가능성을 지적할 것입니다. 또 히틀러나 스탈린 같은 뒤틀린 과대망상증 환자들이 권력을 장악하고서 벌였던, 저 전무후무한 죄악상을 들 것입니다. 덧붙여 물질주의가 모든 정신적 가치들을 (심지어는 불교국에서마저도!) 꾸준히 잠식하고 있으며, 전보다 많은 사람들이 ‘새 시대’ 추구에 열중하기는커녕, 오히려 물질만능주의에 물들어가고 있는 사실을 적나라하게 들추어 낼 것입니다. 이처럼 비관론자가 할 말도 얼마든지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에 대해 불교인들은 어떻게 말해야 될까요? 정말 새로운 세계가 다가오고 있는 걸까요? 그리고 그건 어떤 세계일까요? 불교인이란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는 사람들입니다. 어떤 문제든 간에 모든 일에는 반드시 그 원인과 결과가 있다는 인과법에 비추어 그 해결책을 찾으려 하기에, 문제의 어느 한쪽 면만 보는 법이 없습니다. 그래서 불교인들은 낙관론자들이 동서양에 걸쳐 갖가지 고무적인 조짐을 열거하며 ‘새 시대’의 도래를 말할 때도 바로 이런(중도적) 자세에서 일단 수긍해 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불교인들은 몇몇 나라에서 그것도 일부 집단의 구성원들에게 일시 정신적 향상을 성취시키는 요인을 보았다 해서 그것을 곧바로 이 세계 전체의 변혁요인으로는 착각하지 않는 분별력도 지녀야 할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우리가 듣는 ‘새 시대’의 얘기가 거의 모두 고도로 산업화된 나라들에서 나오고 있다는 사실은 매우 흥미로운 일입니다. 이들 나라에선 수많은 젊은이들이 자기네 부모들 세대의 천박한 물질주의에서 등을 돌려, 좀더 깊은 만족감을 가져다 줄 무언가를 찾고 있는 것입니다.
그에 반해 인도, 아프리카 그리고 남미에서는 ‘새 시대’의 얘기를 거의 들어볼 수 없는 실정입니다. 의식주가 족하지 못하면 ‘새 시대’의 출현 같은 것이 별로 실감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또 ‘새 시대’ 관은 전통적 힌두교 신앙과도 맞지가 않습니다. 힌두교에선 현재를 ‘깔리 유가’ 즉 ‘철의 시대’라 부르는 바, 이는 타락한 말세를 의미하며, 이 세상이 변혁되려면 아직도 요원하다고 봅니다.
그러면 불교인의 새 시대관은 어떤지 살펴보기로 합시다.
불교인들 역시 낙관적인 친구들에게는 다음과 같은 경고를 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즉 물질적으로 진보한 사회에서조차도, 실제로 인생에 대해 좀더 정신적인 접근을 추구해 보고자 열심인 사람은, 전 인구 중 얼마밖에 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그런 사람들의 수가 늘어가고 있는 것만은 분명하지만 그들이 자기네 사회의 뿌리깊은 기존 규범을 변경시킬 수 있을 만큼 충분한 세력이라고 볼 수 있을까요?
이렇듯 불교인들은 확실한 근거에 입각해서 낙관론자들과 의견을 달리 하지만, 그렇다고 비관론자들과 똑같은 길을 걷는 것도 아닙니다. 특히 비관론자들이 “인간은 도저히 어찌 해볼 도리가 없다”고 말한다면 절대로 그 말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입니다. 실제로 사람들이 정신적으로 성장하고 있는 징표가 있는 데도 불구하고, 비관주의자들은 어두운 측면만 보려듭니다.
‘그렇지만 허다한 나라들이 종교를 박해까지는 않는다 치더라도, 종교활동을 달가와하지 않고 있지 않는가? 또 그런 나라들이 늘어가고 있는 게 사실 아닌가?’ 하고 비관론자들이 말할 경우 불교인들은, 이 지상의 광범한 지역에서 종교적인 숭고한 목표가 비웃음을 사고 있으며, 그 목표를 실천하려는 사람들이 많은 고통을 받고 있을 뿐 아니라 심지어는 목숨까지 바쳐야 할 경우도 있다는 엄연한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최근에 일어난 그런 사례로서, 적어도 가까운 미래에는 그보다 끔찍한 일은 다시 있을 것 같지 않은 사태가 캄보디아(지금은 크메르 공화국이라 부르지만)에서 실제 발생했으니까요. 그런 비극의 땅에는 어떤 ‘새 시대’도 가까이 다가와 있는 것 같지 않으며, 오로지 날로 격렬해지는 비통과 증오만이 미래의 분쟁의 소지로 자라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처럼 불교인들의 눈에는, 이 세계 일각에서, 즉 몇몇 나라 그것도 그 사회의 일부에서만 ‘새 시대’의 조짐이 보여질 뿐입니다. 따라서 이 정도의 조짐을 가지고 전 인류가 평화와 풍요를 구가하는 새 시대가 출연하고 있다고 거창하게 떠벌릴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그래서 불교인은 이 새 시대의 출현방식을 현실론자적 태도로 하나하나 검토해 나가야 할 것입니다. 가장 통속적인 사고방식 중에, 지금 태양계가 우주 안에서 어떤 새로운 점성학상의 구획안으로 들어섰는데, 그 구획안에서는 소위 ‘영혼의 진동’이 보다 용이하게 감득 계발되어질 수 있다고들 말합니다. 이 이론은 공간과 시간에 의존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여기에 뭔가 헛점이 있다는 것은 다음과 같은 사실만 보아도 곧 드러납니다.
즉 서양, 인도, 티베트 탄트라 등 각기 상이한 점성술 체계에서, 제각기 시간과 공간을 다르게 계산한 나머지 새 시대의 도래시기가 다르게 산출되고 있는 것입니다. 맥빠지는 일이지요. 거기다 또 하나 중요한 점은 우리가 굳이 ‘새 시대’를 공간과 시간의 요소에 달렸다고 말하고자 한다면, 이것은 바로 이 우주 어디엔가에 하나의 ‘대 계획’이 마련돼 있다는 것을 전제하는 셈이 됩니다. 그렇다면 이런 계획은 어떤 창조주의 작업이어야만 합니다. 그런데 불교인은 도대체 그런 계획이나 창조주가 존재한다고 상정할 어떠한 이유도 찾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 어느 것도 도무지 증거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이 문제를 더이상 다루고 있을 수는 없습니다. 관심있는 분은 다음의 글을 참조해도 좋겠습니다. *)
그럼 ‘새 시대’는 도대체 어떻게 출현하게 될까요? 오늘날 ‘새 시대’는 자기네가 예상하고 있는 방식에 따라서, 그리고 오로지 자기네들에 의해서만이 도래할 수 있다고 확신하는 수많은 조직체들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중에 일부는 서양의 종교전통에서 나온 것이고, 동양에서 나온 것도 있으며 심지어는 유물론적 견해에서 나온 것들도 있습니다. 그들은 제각기 미래의 경이적 세계로 틀림없이 이끌어준다는 이론들을 제시하고 있는데, 그 이론들이란 대개 너무 미래에 빠져들어 현실성을 상실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런 조직체들이 안고 있는 위험성은 바로 그 자신들의 완고한 편협성입니다. 그들은 모두 자기네 이념만이 이 세계를 새로운 문화에로 이끌어야 한다는 좁은 생각들을 하고 있습니다. 헌데 놀라운 사실은 자기네만이 ‘새 시대’를 여는 유일한 열쇠를 갖고 있다고 주장하는 철학마저도 얼마든지 있다는 사실입니다. 게다가 더욱 경이로운 사실은 사람들이 그 철학들을 신봉한다는 것입니다. 이들 신봉자들은, ‘새 시대’를 강매하는 다른 세일즈맨들은 일체 외면해 버리고, 오로지 자신들의 지도자만을 양떼처럼 따라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현상이야 말로, 이천오백 년 전에 부처님이 지적하셨던 대로, 견해 및 견해에 대한 집착이 빚어내는 갈등인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새 시대’는 이런 조직체들에 의해 도래할 것 같지는 않고, 혹시 온다면, 정복이나 폭력, 또는 혁명에 의해서 올 수밖에 없을 것인데, 그렇게 해서 오는 세상이라면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낡은 시대’보다 과연 무엇이 낫겠습니까?
불교인의 새 시대관
이 문제에 있어,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하신 말씀과 훗날의 논사(論師)2)들 말씀과는 신중하게 구별해야 하리라고 봅니다. 부처님께서 인간의 일반적 성향과 수명이 큰 폭으로 변하는 방대한 시간의 주기를 언급하신 것은 사실입니다. 사람들이 장수하고 근심 걱정이 적었던 시절, 부처님이 출현하시어 진리수행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조건이 갖추어졌던 그런 시절에 관해 언급하시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장수를 누리는 것이 언제나 좋기만 한 것은 아니어서 도리어 깨달음을 향한 공부에 장애가 될 수도 있습니다. 장수를 누리다 보면 불교 진리의 가장 핵심인 무상(無常)의 진리3)를 깨닫기가 어려워질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반열반4)에 드신 후 약 천 년 뒤에 스리랑카에서 논장을 펴낸 논사들은, 그 당시에 이미 극히 암담한 미래를 전망한 일이 있습니다. 즉, 사람들의 깨칠 수 있는 능력이 오백 년을 단위로 하여 점차적으로 퇴조해 가리라는 것입니다. 그들 말대로라면 오늘날에는 사람들이 수행을 통해 도달할 수 있는 최고 경지는 기껏해야 열반에 대한 최초의 통찰, 즉 예류향과 예류과 밖에 될 수 없다는 얘기가 됩니다. 그나마 앞으로는 사람들의 근기가 너무 둔해진 탓으로 이만한 정도의 증과(證果)조차도 얻기가 어렵게 될 시대가 올 것이라 합니다.
중국, 티베트 및 일본 등지의 일부 대승불교적 전통에 의하면, 그 전망은 더 한층 암울해져 현대를 아예 ‘말법시대’5)로 규정하고, 이 시대에는 어떤 향상도 불가능해서 오로지 미래불인 미륵불의 시대에 다시 태어나도록 염원하거나 극락정토에 왕생하기를 기원하는 일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전부라고 합니다.
그러나 또 다른 전통의 논서 해석에 의하면 현 불법의 수명은 오 천 년인데, 그 절반 시점까지는 계속 정법이 쇠미해지다가 그 시점을 넘기면서부터는 다시 힘차게 일어난다고 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불기(佛紀)로 헤아려 이천 오백 년하고도 조금 더 지났으니까(집필 년인 1977년이 남방전통으로는 불기 2521년이 됨) 오천 년 존속설의 절반 시점을 약간 넘긴 때가 됩니다. 사실 불교를 신봉하는 국가들의 사정을 살펴보면 여러 모로 희망적인 조짐들이 나타나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선정수행에 대한 관심이 전보다 훨씬 고조되고 있는가 하면 불법을 더욱 근본적인 각도에서 수행해 보고자 하는 열의도 생겨나고 있습니다. 반면에 이같은 불교중흥이 일고 있는 것과 때를 같이 하여, 공산주의 침략과 혁명 그리고 서구문명의 물질주의 풍조가, 전통적인 불교 신봉국가들 속으로 잠식해 들어가 불교세의 위축현상이 겹치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따라서 최근 몇 년 사이에 일어난 일련의 사태를 불교전반의 중흥기로 보느냐, 아니냐 하는 것은 누구도 단정지울 수 없는 문제라고 해야 하겠습니다.
한편, 논사들과 일부 대승불교 전통에서 오백 년 단위로 불교가 쇠미해 간다고 주장하는 것은 분명히 지나친 데가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한 관점은 불법의 수행이 마치 시간이라는 존재에 의해 조정되고, 시간은 마치 인간의 행위마저 지배하는 세계외적 우주법칙인 듯한 관념을 불교의 교리 속으로 끌어들인 셈이 됩니다. 이런 이론은 부처님 생존 당시에, 시간이 최고원리라고 주장하던 사람들을 부처님께서 직접 논파함으로써 이미 그 잘못이 밝혀진 바 있습니다. 그와 같은 견해는 분명 사람들을 숙명론으로 몰고 갑니다. 이를테면 그런 유형의 힌두교도라면 스스로 현상타개의 노력을 포기한 채 “지금은 깔리 유가의 시대인 걸. 내가 어찌 한단 말인가?” 하면서 현실회피의 구실을 삼으려 할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반드시 유념해야 할 것은,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불법이 오천 년 간 지속되며, 일정 단계까지는 쇠미해질 것”이라고 하셨다는 해석을 접할 때, 이것은 어디까지나 논사들의 입장일 뿐이지 결코 부처님의 말씀 그대로가 아님을 식별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태국이나 미얀마와 같은 불교국가들에서 깨치신 분들이 여전히 출현하고 있는 것을 보더라도 이들 논사들이 분명히 잘못 이해했다는 것을 산 증거를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부처님이 가르치신 바는, 수행이 시간에 달린 것이 아니라 노력에 달렸다는 것이며, 노력은 언제라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특정의 시간이나 장소가 정진에 더 도움이 될 수도 있겠지만, 그렇다고 그런 조건만 기다리고 앉았다가는 설령 그런 시간과 장소를 만난다 해도 자신의 업장을 이겨내는 정진력이 없다면 모처럼의 기회를 유효적절하게 살리지 못하고 허송하게 되기 쉽상일 것입니다. 훌륭한 결과를 가져오려면 다음으로 미루지 말고 지금 당장 최선의 노력을 기울이는 길뿐입니다. 마치 부처님이 나오셨을 때 사람들이 탁월한 스승의 지도를 받을 수 있는 모처럼의 기회를 놓치지 않고 열심히 애써서 좋은 결실을 맺었던 것처럼 말입니다. 따라서 정진의 성과는 결코 시간에 좌우될 성질의 문제는 아닙니다.
이제 최종적으로 생각해 볼 문제에 도달한 것 같습니다. 과연 무엇이 부처님 법을 쇠미하게 만들며 무엇이 정법을 오래 지탱해 주는 것일까요? 이 문제를 풀려면 반드시 다음 사항을 깊이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즉 부처님의 가르침은 계(戒)·정(定)·혜(慧)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이들 세 가지 공부[三學]가 널리 행해진다면 바로 ‘새 시대’의 도래를 의미하는 것이 되지만, 이 삼학이 쇠미할 경우엔, 믿고 의지하는 가르침이 무엇이든 간에 새 시대의 도래는 희망이 없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부처님을 다년간 시봉한 아난 존자가 바로 이 문제를 질문받은 적이 있습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습니다. “만일 사람들이 정념을 수행하면 부처님 열반 후에도 정법은 오래 갈 것이다. 그러나 만일 정념을 닦지 않으면 그땐 정법이 쇠미해지고 말 것이다.”
정념 또는 정지(正知)6)는 어떤 법(Dhamma)이든 법을 공부하고자 할 경우엔 반드시 필요한 것입니다. 가령 우리가 오계(五戒)를 잘 지켜 원만한 인품을 닦아보고 싶은 경우에도 정념은 반드시 견지돼야 합니다. 그리고 오계를 지키는 것만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선정공부를 일상화하고 싶을 경우엔 정념은 그야말로 절대적으로 필요하게 됩니다.
그럼 정념은 무엇일까요? 일상생활 속에서 정념이란 자신의 몸을, 그리고 그 몸으로 하는 일체의 행동을, 물론 말도 마찬가지로, 항상 염(念)하는 것을 뜻합니다. 이렇듯 행동과 말을 염할 때 자기 자신이나 다른 생명을 해치지 않게 되는 것은 당연합니다. 실제로 정념은 마음으로부터 건전한 자질을 이끌어내어, 지혜에 비추어 이를 발전시켜 나갑니다. 또 자신이나 남에게 더 많은 고통과 갈등을 초래할 뿐인 행위들을 잘 가려낼 수 있게 만들어 주고, 그래서 그런 행위를 그만두도록 만드는 것도 정념의 역할입니다.
정념의 범위는 몸으로 짓는 행동과 말로 짓는 행동에 국한하지 않고 마음에도 역시 적용됩니다. 우리는 탐욕·성냄·어리석음의 삼독심(三毒心)이 머리를 들 때 그것을 곧바로 알아차릴 수 있게 되며, 그렇게 되면 이들 불건전한 정신활동으로부터 헤어날 길도 찾을 수 있게 됩니다. 처음 단계에는 ‘내 마음’을 염하는 ‘내’가 거기에 엄연히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공부가 익어가면 오로지 ‘정념’만이 거기 있게 되고 따라서 ‘나’나 ‘내 마음’의 잔재는 모두 사라져 버린 채 오직 깊은 평화와 꿰뚫어 보는 통찰만 남습니다. 이야말로 선정인의 목표인 고요[止]와 통찰[觀]인 것입니다.
바로 이런 상태[法]야 말로 선정이란 말은 한번도 들어본 적조차 없지만 마음이 평화로워지고 갈등이 없어지기를 바라는 그 모든 사람들이 절실히 갈구하여 마지 않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이런 정념수행과 ‘새 시대’의 도래와는 무슨 관련이 있을까요? 정념은 바로 ‘새 시대’가 어디에서부터 시작돼야 할 것인지를 정확하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새 시대’란 결코 우주에 있는 별자리의 움직임에서 오는 것도 아니요, 인간이 상상하는 그 어떤 위계질서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며, 훨씬 더 상상의 산물인 창조주에 의해 도래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다만 탐욕·성냄·어리석음의 삼독심을 걷어낸 맑은 마음에 의해서 이루어집니다. 이 세계가 인간의 삼독심으로 물들어갈 수록, 가공할 권력투쟁의 새 시대라면 모를까, 참다운 의미의 ‘새 시대’가 동터올 가능성은 그만큼 흐려질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새 시대’를 오게끔 만드는 일은 바로 우리 각자에게 달려 있습니다. 탐욕과 사리사욕이 없는 ‘새 시대’, 성냄과 증오가 사라진 ‘새 시대’ 그러한 시대의 출현이 바로 우리가 기다리는 시대입니다.
다음과 같은 방법만이 곧 ‘새 시대’를 이 땅 위에 오게 할 수 있는 바른 길인 것입니다. 우선 무엇보다 오계(五戒, 산 것을 죽이지 않고, 주어진 것이 아니면 가지지 않고, 사음(邪淫)하지 않고, 거짓된 말을 하지 않고, 마음을 혼란시키는 일체의 취하게 하는 음식을 먹지 않는 것)부터 실천해야 합니다. 그리고 가능한 대로 일상생활 가운데 정념수행을 하여서 마음을 불건전한 정신활동으로부터 끌어내도록 하십시오. 이렇게 매일같이 한두 번이라도 가능한 한 오래도록 선정수행을 해 보십시오. 그리고 기회가 있을 때마다 언제든 법문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그리고 의문점을 자꾸 묻는 가운데 법에 대해 지적 흥미를 갖도록 하십시오. 왜냐하면 불법은 모두가 현재 우리가 영위하고 있는 바로 이 삶에 관한 가르침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연후에 시간이 나는 대로 훌륭한 지도로 수행의 난관을 극복하게끔 도와줄 수 있는 조용한 도량으로 1~2주쯤 선정을 닦으러 가십시오.
만일 그렇게 된다면 어찌 ‘새 시대’가 밝아오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좌우간에 우리 자신의 마음 속에 지혜의 빛과 광명이 동틀 것은 확실하다 하겠습니다. ‘새 시대’를 위해 그보다 더 알맞는 터전이 또 어디에 있을 수 있겠습니까?
인과와 도덕적 책임
Causality and Moral Responsibility
D.D.P. Nanayakkara
D. 나나야까라 지음
강대자행 옮김
(BODHI LEAVES NO. B.83)
BUDDHIST PUBLICATION SOCIETY
KANDY, SRI LANKA
인과와 도덕적 책임
불교는, 육체 및 정신의 작용을 정신물리적 에너지의 역학적 흐름으로 환원하여 설명하는 유일한 지식체계라는 점부터 먼저 말해 두어야겠습니다. 부처님이 설명하시는 정신물리적 역학의 세세한 의미를 여기선 깊이 파고들 필요도 없고 또 가능하지도 않습니다.***) 불교에 의하면, 흔히 ‘삶’이라고 불리우는 현상의 정체는 단지 인과관계의 진행일 따름이고, 그것은 정신적 에너지와 육체적 에너지간의 부단한 상호작용과 관련된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모든 형태의 에너지는 그것이 정신적이든 육체적이든 순간적으로 생겨났다-사라졌다-생겨났다 하면서 생성[有]의 흐름[流轉]을 이룬다고 가르치셨습니다. 매순간의 생성은 다음 순간의 다른 일어남을 유도하여 원인-결과-원인의 순환을 지속시켜 나갑니다. 생겨남 때문에 사라짐이 있고 사라짐은 또한 생겨남의 전제조건입니다. 그럼으로써 변화가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변화란 인과관계가 진행되어 가는 모든 과정에 있어서 겉으로 드러나는 부분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상대성의 세계는 큰 변화의 세계일 뿐입니다. 인과관계가 계속적으로 지속되는 것은 바로 이 변화에 의해서입니다. 과거의 순간은 현재 순간이 일어날 수 있는 조건을 지어주고, 현재 순간은 미래 순간의 발생을 조건지워 줍니다. (물론 바로 직전의 순간만이 지금 일어나고 있는 상황에 작용하는 유일한 조건은 아니겠지만.) 그래서 과거 현재 미래는 달라지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아주 다르지만은 않은 인과의 연속작용을 이어 나가게 됩니다. 정신물리적 에너지 단위들이 이 몸뚱이라고 하는 신체적 구조 안에서 찰나로 생멸하면서, 인과관계의 과정을 지속하고 있는 동안 생명은 지속하여 인간을 구성하는 것입니다.
정신과 육체의 상호작용이 멈추는 것을 불교에서는 죽음으로 봅니다. 불교에서는 죽음이 결코 불가사의한 일이 아닙니다. 금생의 마지막 정신물리적 에너지의 양이 다음 생의 첫 정신물리적 에너지의 단위를 형성합니다. 통속적으로 이것을 재생(환생)이라고 부릅니다. 이렇게 해서 태어나고-죽고-태어나는 연쇄관계가 존재하게 됩니다. 따라서 지금 몸의 주인으로부터 다음 몸의 상속인으로 흘러가는 에너지의 연결작용 때문에 전생에 대한 기억이 잠재적으로 남아 있습니다.
인과법 즉 원인-결과-원인이라는 토대 위에서 존재를 계속시키는 자양분 또는 원동력을 축적하는 것이 미혹한 마음입니다. 이 연쇄의 고리에서 결과는 원인 자체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원인과 무관하지도 않습니다. 이러한 자양분 또는 연료를 끊어버려 마음속에 있는 불순물을 없애버리면 인과의 속박에서 해탈하게 됩니다. 그러나 번뇌에 찬 마음은 한 생에서 다음 생으로 지속성이 끊어지지 않고 유지되도록 강요하는 어떤 힘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우리 마음의 번뇌가 인과율에서 결코 벗어나지 않고 계속 작용한다고 생각하면, 우리는 자연히 업의 교리에 입각하여 도덕적인 책임을 지지 않으면 안된다는 자각을 하게 됩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업의 교리[業設]는, 부처님께서 무지의 장막을 꿰뚫어 마침내 최상의 지혜를 증득하신 데에 전적으로 연유하고, 또 바로 거기서 나온 직접적 결과인 것입니다. 따라서 불교적으로 이해된 업의 작용은 부처님 이전의 그 어떤 종교적 사상이나 인도의 철학들과도 관계가 없습니다. 사후존속(死後存續)이나 업에 대한 언급이 베다 본문에는 나와 있지 않고 다만 브라흐마나(Brāhmaṇa)7)에 암시 정도로 나타나 있을 뿐이며, 초기 우파니샤드에 약간의 견해가 나타나고 있지만 그 중 몇 가지는 윤회론을 분명히 거부하고 있습니다. 불교사상에서 빠알리어의 ‘kamma’ 산스끄리뜨어의 ‘karma’가 가지는 전문적인 의미는 의지적 행위 또는 의도적 행위란 뜻입니다. 행동을 야기시키는 것은 바로 이 바라는 생각입니다. 즉 의지가 행동을 조건지운다는 말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연기법8)을 발견하시고, 존재의 지속을 인과적 요소와 연관시켜 이를 업의 이론으로 설명하셨던 것입니다.
불교에 있어서 업의 교리는 철저한 결정론도 아니고 그렇다고 완전한 우연론도 아닙니다. 이 두 가지의 극단적인 관점을 피하여 부처님은 중도를 가르치셨습니다. 부처님께서는 한편으로는 인생이 그 어떤 절대적인 신의 계획적 의도나 조종에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내셨고 또 한편으로는 삶은 인과관계의 방식을 조금도 벗어나지 않고 전개된다는 진리를 깨달으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 내리신 결론은 이렇습니다. “인간이란 자기 자신이 지은 생각의 주물공장에서 스스로 찍어낸 작품일 따름이다.” 부처님은 작위적 의도 내지는 그 의도의 구성요소인 의욕을 업(karma)이라고 부르셨습니다. 그리하여 인류의 행복을 위해 사람들의 행동거지를 이끌어 줄 윤리기준이 전혀 없었던 시대에, 도덕적으로 지켜 마땅한 고귀한 윤리적 가치를 세웠던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그렇게 하신 것은 오로지 인류에 대한 자비심에서 였습니다. 인간의 행위는 어쩔 수 없이 마음의 상태와 연관되기 마련이므로 우리가 지어 나가야 할 일은 행위에 유익한 조건이 될 수 있는, 윤리적 면에서 고양된 정신적 상태를 만드는 일입니다. 행동을 결정짓는 생각 자체가 자기향상에 알맞도록 도덕적으로 고양되려면 윤리적인 면에서 성격이랄까, 인간성이랄까 하는 것의 변화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말입니다. 부처님께서 사람의 윤리적 쇄신을 특히 강조하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의 인식을 끊임없이 휘어잡는 번뇌들을 약화시켜 마침내 근절시켜 버리는 윤리적 노력의 순서를 수행 방법론 속에 잘 엮어 놓으셨습니다.
청정한 마음은 모든 업으로부터 해탈케 하는 데에 반해, 번뇌에 찬 마음은 업을 자꾸만 짓게 하는 힘으로 채워져 있습니다. 그 시작도 끝도 없는 윤회의 바퀴 속에서 한 생은 시간상으로 따져 별 것 아닌 듯 보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금생의 모든 행위는 가차없이 인과법에 따라 다음 생을 지배하게 되므로 금생은 매우 중대한 의미를 지니게 됩니다. 업 또는 의지[行]는 감각적 접촉[受]·인식[想] 그리고 의식[識]과 상호 작용하는 가운데서 인과의 지속적 흐름에 필요한 힘을 취하면서, 또 한편으로는 각 존재가 좋게든 나쁘게든 제나름대로 받아들이게 되는 새로운 상황의 유형을 조건지우기도 합니다. 부처님께서 “지금 우리의 모든 것은 우리가 생각해온 바의 결과이다; 우리는 자신의 생각 위에 세워져 있다… 수레바퀴가 소의 뒷발굽을 따르듯 악은 그것을 행한 사람의 뒤를 따른다… 그림자가 사람을 떠나지 않듯이 선은 그것을 행한 사람과 같이 간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같은 인간이면서도 사람 사이에 불평등이 존재하는 까닭은, 주로 윤리적인 의미에서 선하거나,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거나 또는 악하게 마음낸 그 의지적 생각과 관계가 있습니다. 우리 각자가 의도적으로 행한 경험내용은, 그것이 선이든, 악이든, 선도 악도 아니든, 현재의 생각의 찰나[心刹那]를 조건지우고, 또 바로 다음 찰나는 현 찰나로부터 생겨나기 때문에, 지금 미래를 향해 방출하는 에너지의 흐름은 당연히 우리의 나아갈 궤도를 조건짓게 되는 것입니다. 앞으로 일어날 일은 우연히 이루어지는 것도, 운명이나 숙명에 의해서도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며 오로지 생각의 성향과 관계있을 뿐입니다. 즉 계속 이어질 존재의 유형을 형태지어 주는 데 가장 크게 영향을 미치는 것은 마음 속에 선 또는 악이 어느 정도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미래는 현재로부터의 연이생(緣已生)이기에, 원인을 이루는 근거 즉 생각이란 근거를 가지지 않을 수 없으며, 또 사람은 현 순간을 윤리적 향상 쪽으로 조건지울 수 있으므로, 조건지워지고 있는 이 세상에서 인간의 입장은 결코 절망적인 것은 아닙니다. 달리 말하면 숙명론을 펼 근거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현재 생각의 찰나들을 윤리적으로 고양시킴으로써 현재를 준거하여 일어나게 될 미래 생각의 찰나들은 자연히 더 좋아지는 쪽으로 정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자유의사에 따른 모든 행동은 그렇게 행동하도록 밀고 있는 생각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런 행동은 개인 각자가 그렇게 행동하려는 의도를 스스로 만들어 낸 탓으로 취해지는 것이니까 결코 우연히 일어난 것이라 할 수 없습니다. 감관 또는 느낌[受]과 상호 작용되는 의지작용[行]은 말을 하도록 만들거나 행동을 하도록 만들며 때로는 두 가지를 동시에 유발시키기도 합니다. 이와 같이 겉으로 분명히 드러난 행위들은 윤리적으로 판단해 보아 건전한 마음 상태나, 건전하지 못한 마음상태, 또는 건전하지도 불건전하지도 않은 마음상태 중 어느 것에건 연관시킬 수 있습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윤리적인 측면으로 보아 이로운 행위를 지을 수 있는 업인(業因)을 내게끔 우리의 생각을 윤리적으로 순화시키도록 강조하고 있으므로, 우선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은 계행(戒行)면에서 건전치 못한 마음상태를 아예 일어나지 못하게 막는 일입니다. 그러자면 쉼없는 경계와 노력과 훈련이 필요하게 됩니다. 다시 말하면 한 순간일지라도 경계하지 않고 그냥 지나칠 수 없다는 말입니다. 믿었던 곳에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경우가 왕왕 있기 때문입니다. 마음은 외부로부터 받아들인 감각을 재료로 하여 생각을 구상화시키며, 인식은 마음이 만들어낸 관념을 인지합니다.
정신이 얼마만큼 평온하고, 혼란스러운가 하는 정도는 자신이 마음 속에 스스로 일으켜 놓은 생각의 성질에 따라 좌우됩니다. 행복을 자기 것으로 지켜 나가는 주체는 곧 윤리적인 계를 척도로 삼아 이에 제어되는 마음입니다. 부처님께서 가르치신 수행방법의 요지는 자꾸만 산만해지려는 생각을 거두어 들이고 마음이 변덕을 떨지 못하도록 각자가 수행에 직접 참여하라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먹은 음식으로 나의 배고픔을 달랠 수는 없는 법입니다. 마찬가지로 아무도 남의 마음을 단련시켜 줄 수는 없기 때문에 우리는 각자 자신의 마음을 단련시킬 수밖에 없습니다.
업의 작용은 인과현상의 한 측면에 불과합니다. 남전대장경의 하나인 중부경(Majjhima Nikāya)에는 업과 과보 간에 내재하는 일정한 상호연관성이 제시되어 있습니다. 이 글의 지면상 거기 쓰여진 많은 상호관련성을 다 들 수는 없지만 몇 가지 특수한 예를 들 필요는 있을 듯 합니다. 그 경에 의하면 동물을 해치거나 골려주거나 잔인한 짓을 한 사람은 병약하기가 쉽고, 반면에 동물들을 잘 돌봐준 사람들은 건강하다고 합니다. 마음이 불안정하고 화를 잘 내고, 불쾌한 성격에, 남을 혹사시키기를 예사로 하는 사람은 못생긴 외모를 타고 나기 쉬우며, 그 반대인 사람은 단정한 용모를 갖게 된다고 했습니다. 또 남의 재산이나 성공을 시샘하고 질투하는 사람은 존경을 받지 못하게 되고, 반대인 경우에는 존경과 명예를 얻게 됩니다. 또한 남에게 보시할 줄 모르는 사람은 재산이 없기 쉽고, 허영에 가득 차고 거만해서 마땅히 존경해야 할 사람을 존경할 줄 모르는 사람은 비천한 가문에 태어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예로 든 상호관련성만을 가지고 일반적인 추론을 끌어낼 수는 없겠지만, 인간생활에서 드러나는 생물학적 진화과정에서 일어난 우연한 행운도 아니고 우발적인 사건도 아닙니다. 현대의 유전학은 유전의 기초를 체계화시키는 데 아직 미비한 상태여서, 예컨대 건강이나 장수, 매력적 자질, 재능, 적성, 기질과 같은 결정적 기본 유전인자를 알아내는 기능면에서는 충분하지 못합니다. 모든 사람들이 다 평등한 인간이지만 이러한 요소들이 모두에게 고루 똑같이 퍼져 있지는 않습니다. 다시 말해 불교적인 견해로 보아, 사람은 자신이 일으킨 생각의 산물이라는 것입니다. 자의로 하는 행동은 어떤 특정 순간에 있어서 건전한 마음, 불건전한 마음, 혹은 건전하지도 불건전하지도 않은 마음의 정도를 나타내는 지표일 뿐입니다. 착하든지, 악하든지, 착하지도 악하지도 않든지 하는 것은 행동 자체가 아니라 그 행동을 취하게 하는 마음상태인 것입니다. 존재를 구성하고 있는 원소들은 고정된 상태가 아니라 변화생성해 가는 과정에 있기 때문에 생각도 마찬가지로 일반적인 생성과정 속에서 생겼다 사라지고, 사라졌다 다시 생겨나는 생멸을 반복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악한 상태의 마음을 착한 마음이 극복해 버릴 수도 있고, 반대로 지속적인 수행이 없을 때는 착한 상태가 악한 마음으로 더럽혀지기도 합니다. 그래서 인간의 행복을 재는 표준은 생각에 대해 가장 영향력을 미치는 도덕적 요소인 것입니다.
사람은 자신이 자의로 입력시킨 경험내용의 성격에 따라서 다시 몸을 받습니다. 누구나 자기가 한 행위의 결과는 미래 언젠가 반드시 경험하게 되는데, 그렇다고 행동 하나하나의 결과를 따로 떼어 어떤 특정 행위와 연결시킬 수는 없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이것을 두 개의 그릇 속에 똑같이 나누어 넣은 소금을 비유로 들어 말씀하셨습니다. 두 그릇에 똑같은 분량의 소금이 들어 있어도 한 쪽에는 물을 적게 담고 다른 한 쪽에는 많이 담는다면 짠맛은 서로 다르게 느껴질 것입니다. 이 비유는 업의 결과를 일반화시켜서 요지부동의 결론을 끌어내는 것은 타당하지 못하다는 점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옳지 못한 추리는 그릇된 견해를 낳습니다. 악한 마음의 소유자라도 후에 덕스러움을 되찾아서 자신의 생각의 흐름을 윤리적 향상 쪽으로 흐르게 조건지울 수 있으며, 그럼으로써 에너지 흐름을 어느 정도는 건전하게 유도할 수 있습니다.
이 생에서 갖는 마지막 생각의 찰나가 인과법으로 보아 건전한 것이면, 생성력으로 충전된 재결합력 때문에 그와 가장 닮은 종류의 생각들 쪽으로 이끌려 갈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좀더 행복한 환경에서 새 몸을 받을 수 있는, 최초의 정신물리적 에너지 충격을 만들어 내는 조건이 될 것입니다.
반대로 건전하지 못한 마지막 생각의 찰나는 불행이 있는 하향의 길로 몰아갑니다.
행복의 기본요소로서 가장 중요한 것은 마음의 평온을 계발하는 것입니다. 마음과 몸은 서로를 조건지우므로 마음의 평온은 인과법으로 보아 유리한 신체적 반응을 일으킵니다. 흔히 병을 불러오는 것은 신체작용과 상호관계하는 해로운 생각입니다. 그럴 경우 고통스러운 느낌[苦受] 내지는 인간적인 불행이 일어나게 되며, 그것은 꼭 차후가 아니라 바로 지금에 그렇게 될 수 있습니다. “생각을 잘 지키는 것이 곧 행복의 관건”이라고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데는 깊은 뜻이 담겨 있는 것입니다. 악업을 짓게 되는 원인은 반드시 그 뿌리를 뽑아버려야 되는데, 그렇게 하려면 우리에게 동기를 부여하는 주요 원천이 되고 있는 기반을 다른 쪽으로 바꿀 수밖에 없습니다.
마음을 오염시키고 동요하게 만드는 삼독심 같은 개념들은 부처님이 가르치신 팔정도 속에 강조되고 있는 정진방법, 예컨대 정정진·정사유·정견 같은 항목에 의지하여 근절시켜야 할 것입니다.
업의 작용은 너무나 복합적이기 때문에 부처님 지혜 말고는 아무도 완전히 파악할 수 없습니다. 우주의 구조에 관한 것만 해도 상대성 세계를 구성하고 있는 무한한 은하계를 부처님은 모두 꿰뚫어 관찰하실 수 있었지만, 부처님 제자 가운데 천안(天眼)제일이었던 아누룻다 조차도 한 개의 은하계밖에 살펴보지 못했던 것입니다.
보편적 인과현상의 얼키고 설킨 구조와 의미를 깨달으셨던 부처님은 인간은 스스로 쌓아올린 정신적 구조에 입각한 존재라고 결론을 내리셨습니다. 따라서 부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모든 현상에는 마음이 선행(先行)한다. 마음이 그들의 지배자이다. 현상은 마음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라고. 이것은 법구경의 첫머리에 나오는 말씀이며, 법구경은 불교 경전의 압축으로 보아도 틀림이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시작조차 알 수 없는 과거로부터 인과에 얽혀 있습니다. 그 과거의 행위들이 지금의 우리 삶을 결정지은 것과 마찬가지로 지금의 행위들이 미래를 결정하게 됩니다. 좋든 싫든 간에 현재의 인간은 과거에 자신이 지은 행위에서 벗어날 길이 없고 미래에도 또한 그럴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자신의 가르침에서 윤리적 가치쪽에 최우선 순위를 두고 이에 의지해서 살아나가도록 대중들에게 훈계하셨던 것입니다.
다른 사람을 희생시켜 자신의 행복을 얻으려는 것은 헛수고일 뿐이라고 인과법은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업에 대한 교설은, 다른 생명체의 안녕에 미치는 자신의 행위의 효과에 대한 강한 책임감을 거듭 강조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행위를 도덕적으로 만드는 도덕적 책임감은 우리를 윤리적으로도 향상시키지만 현재나 미래에 우리 각자의 성향이 더 나아지도록 도와줍니다. 태어나고 죽고 태어나는 윤회 속에서의 이 한 생에는, 인과관계에 대한 확신이 섰을 때는, 세상을 멀리하는 쪽이 아니라 오히려 자비심을 기르는 계기가 됩니다. 남을 미워할 만한 근거란 아무데서도 찾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자비심을 내야 할 이유는 허다합니다. 그중 하나의 경우로, 도덕적 인과관계를 깨달을 때 우리는 자비심을 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주 해
1) [역주] 아카리우스 별자리 시대 : 서기 이천 년대에 이 지상에 실현된다고 서양의 점성가들이 예언하는 자유와 인간애로 충만한 미증유의 이상사회. 본문으로
2) [역주] 논사(論師) : 불교경전 삼장 중 논장을 이룩하거나 이에 정통한 스님들. 본문으로
3) [역주] 무상(無常)의 진리 : 물질과 정신의 모든 현상이 염념 생멸하여 항상 변하고 있는 것. 본문으로
4) [역주] 반열반 : Parinibbāna의 음역. 열반과 동의어. ‘완전한 열반‘의 뜻. 다시는 생을 받지 않는 윤회로부터의 최종적 해탈. 또는 존재의 기초는 남아있는 채 생에 대한 집착이 다한 경지의 두 뜻으로 쓰임. 그리고 부처님의 위대한 열반을 말할 때 쓰기도 함. 대반열반(大般涅槃)이라고도 함. 본문으로
5) [역주] 말법시대(末法時代) : 正法減(Saddharma-vipralopa), 오탁악세, 말세라고도 함. 부처님 돌아가신 후 오랜 기간이 지나면 불법이 쇠퇴하여, 법다이 수행하여 깨치는 사람이 없어지고 법만 남아있게 되는 시대. 보통 정법(正法) 천 년(혹은 오백 년), 상법(像法) 천 년, 말법 일만 년이라 함. 본문으로
6) [역주] 정지(正知) : 보리수잎. 둘의 p44 참조. 본문으로
7) [역주] 브라흐마나(Brāhmaṇa) : 광의와 협의의 두 뜻으로 쓰임. 광의로는 각 베다의 본집(本集) 부문인 상히따를 설명하며, 또한 이를 제식에 적용하는 법을 설명한 산문 주석서로서 협의의 브라흐마나(祭書), 아란냐카(林書), 우파니샤드(義書)의 총칭. 협의로는 제식의 실시 방법과 찬가(讚歌), 주사(呪詞)의 의의. 목적을 해석하거나, 제사의 기원. 비의(秘義)를 밝히는 일련의 설명적 문헌. 여기선 협의의 뜻으로 쓰였음. 본문으로
8) [역주] 연기법(緣起法. Paṭicca Samuppāda) : 정신적 물질적 모든 현상은 무수한 원인과 조건이 상호관련되어 성립해 있는 것으로 독립 자존해 있는 것이 아니며, 그런 원인과 조건들이 없어지면 결과도 자연히 없게 된다는 가르침으로 불교의 기본을 이루는 진리. 본문으로
*) B.P.S의 wheel publication No.47 「불교와 신의 개념」참조. 본문으로
**) 빨리 경전 증지부경(增支部經)에 보면 부처님께서 직접하신 말씀이라 하여 “비구니들에게 수계하게 된 탓으로 정법시대가 당초의 천 년에서 오백 년 간으로 줄어지리라”는 대목이 있다(증지부 8권 51). 이것이 부처님께서 그런 맥락에서 말씀하신 유일한 예이다. 이것이 후에 가필된 문구인지, 아니면 마치 오백 비구란 말이 많은 스님의 무리를 나타내는 것과 같이, 오백 년이 긴 세월을 나타내는 것으로 이해해야 할 것인지? 아마도 긴 시간을 뜻하는 후자의 해석이 옳을 것 같다. 부처님께서는 인간을 너무나 잘 아시기 때문에 반드시 문제가 생겨날 것이며, 그것이 가져올 사태, 즉 자신이 가르치신 교법이 단명해지는 사태를 예견하셨을 것이다. 본문으로
***) 저자는 앞으로 펴낼 불교관계 저술의 여러 측면 중에서도 부처님이 상세히 설하신 에너지 원리의 깊은 의미를 서술할 예정임. 본문으로
보리수04(2010.4.30).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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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늘 읽을 수 있음에 감사드립니다. 합장